4)호남 차별 35년, 영남 차별 200년
한국의 족보에 기입하는 관향 또는 본관(本貫)이라는 용어는 한번 경주 김씨면
그 사람이 평양에서 300년을 살았더라도 족보와 묘비명에 ‘경주 김씨’라고
기재한다.
이를 읽는 사람이 보면 경주에서 살았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실제로는 평양 사람이지만 외부인들은 경주 사람으로 인식한다. 안동 김씨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의 패권과 세도는 경상도 사람들이 누린 게 아니라 서울
사람들이 누린 것이다.
대략 170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 모든 인물과 권력, 재력이 집중됐다.
물론 수도이니까 예전부터 집중되는 현상은 있었지만 ‘장김’을 비롯한 노론
일당의 집권이 계속되면서 서울 집중에 가속도가 붙었다.
예전에는 정권교체가 자주 이뤄져 실권한 당파 사람들은 지방에 내려가
살았다.
교체가 되면 이긴 당파는 서울에 살았지만 패한 당파는 낙향하여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200년 동안 승리한 당파는 기호(畿湖)에 기반을 둔 노론(老論)
이다.
기호학파가 서울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정권투쟁에 패해서 지방으로 몰린 당파는 경상도에 근거를 둔
남인(南人)이다.
경상도 남인, 즉 영남학파는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산촌에서 대략 200년
동안 고픈 배를 부여잡고 살아야 했다
어찌 됐든 서울 집중이 가속화하면서 생긴 말이 ‘귀경천향지풍(貴京賤鄕之
風)’이다.
‘서울을 귀하게 여기고 시골을 천하게 여기는 풍조’를 말한다.
‘사람 자식은 서울로 보내고 말 새끼는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는 말도 대략
이 시기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종합하면 조선후기 세도는 경상도 사람들이 누린 게 아니다.
서울 장동에 살던 장동 김씨 집안이 누렸다.
호남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도 이 대목을 착각하기 때문에
경상도 사람들이 다 해먹은 것으로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조선 후기는 경상도 사람들이 지역 차별과 정치적
소외를 받았던 역사다.
안동 일대에서 손꼽히는 명문이 퇴계 선생의 진성(眞城) 이씨 집안,
서애 유성룡의 풍산(豊山) 유씨, 학봉 김성일의 의성(義城) 김씨 집안이다.
의성 김씨 학봉파(鶴峯派) 후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 숙종 이후 이
집안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한 것이 ‘참의(參議)’라고 한다.
지금의 차관보(次官補)에 해당한다.
정부 중앙부처 1급 국장급이다.
영남에선 참의 벼슬이 아주 높이 올라간 경우이고 대부분은 ‘교리(校理)’
‘정언(正言)’ ‘장령(掌令)’ ‘사간(司諫)’ 벼슬에 그쳤다. 정부 부처의 과장급 정도
되는 벼슬이다.
대부분의 영남 선비들은 평생 벼슬을 못하고 강호의 처사(處士)로 인생을 끝냈다.
그러니 얼마나 원망이 많았겠는가. 능력이 아니라 출신지역 때문에 당한 불합리한
차별이었다.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 경상도의 남인이 철저하게 견제를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는 지역차별의 정치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차별 기간이 대략 200년이다.
근래 호남차별이 35년이라면, 조선후기 영남차별은 200년이다. 안동에서 바라
보는 안동 김씨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