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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粹 異議 - 兪氏의 歪曲된 見解에 對하야」
金東里
작년말(昨年末) 동아지(東亞紙)에 게재(揭載)되었던 유진오씨(兪鎭午氏)의 「현대 조선문학(現代 朝鮮文學)의 진로(進路)」(?)와 금년(今年) 6월호(六月號) 「문장(文章)」지(紙)의 「순수(純粹)에의 지향(志向)」이란 두 편(篇)의 글을 읽었다.
여기서 내가 새삼스리 씨(氏)의 과거(過去) 경력(經歷)을 들추고 할 필요(必要)는 없겠으나, 어쨌든 내가 읽은 씨(氏)의 몇 편(篇)의 창작(創作)과 세인(世人)의 눈치와 구기(口氣)를 좇아 일찌기 내 머릿속에 그려진 씨(氏)의 푸로필이란 일개(一個) 작가(作家)로서나 혹(或)은 문예사상가(文藝思想家)로서보다 오히려 「탁월(卓越)한 문예견식가(文藝見識家)」로서였다. 지금까지 씨(氏)를 신임(信任)하고 기대(期待)하던 우리들 중에 특(特)히 씨(氏)의 1) 정평(定評) 있는 재분(才分)을 말하기도 하고, 혹(或)은 작가적(作家的) 양심(良心)을 들기도 했으나, 그것을 모두 종합(綜合)해서 보면, 결국(結局) 앞에 말한 「탁월(卓越)한 문예견식가(文藝見識家)」란 범주(範疇)로 귀일(歸一)했던 것이다. (씨(氏)는 우리 문단(文壇)에서 누구보다도 문예(文藝)에 대(對)한 지식(知識)이 구비(具備)한이다. 씨(氏)가 작가(作家)를 논(論)하나 작품(作品)을 논(論)하나 혹(或)은 문예사상(文藝思想)을 논(論)하나 씨(氏)는 결(決)코 황당(荒唐)한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씨(氏)를 이렇게 기대(期待)하여 왔던 것이다.
내가 시방 주(主)로 이야기해 보려는 것은 씨의 「순수(純粹)에의 지향(志向)하란 일문(一文)이거니와, 우선 작년말(昨年末) 동아지(東亞紙)에 게재두(揭載斗)었던 글에서 「30대작가(三十代作家)의 불행(不幸)과․신인(新人)의 행복(幸福)」운운(云云)한 구절(句節)로부터 따져 보고 싶다. 그 신문지(新聞紙)가 시방 내 곁에 없으매, 그 대문을 그대로 인용(引用)할 수는 없으나, 그 말의 내용(內容)인즉 지금 30대 작가(三十代 作家)들은 모두 이 수년내(數年來)급각도(急角度)로 전환(轉換)된 사조(思潮)와 격변(激變)한 세상(世相)에 상면(相面)하여 그 거취(去就)에 심(甚)한 자기분열(自己分裂)을 일으키고 있으나 이제 신인(新人)들은 그러한 자기분열(自己分裂)을 맛보지 않으니 이로써 30대 작가(三十代 作家)는 불행(不幸)하고 신인작가(新人 作家)는 행복하다는 것이 있다. 나는 씨(氏)에게 묻는다. 씨(氏)가 말하는바. 행복(幸福)과 불행(不幸)이란 말은 작가(作家)로서의 본질적(本質的) 성패(成敗)를 의미(意味)하는 말인가. 시정적(市井的) 득실(得失)을 의미(意味)하는 말인가. 만약(萬若) 후자(後者)가 아니고 전자(前者)라면 하필(何必) 변천(變遷)된 이 마당에 와서 행불행(幸不幸)을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당초(當初) 문학(文學)에 지향(志向)하던 그날부터 이미 작가(作家)로서나 혹(或)은 사상가(思想家)(문예(文藝))로서는 극(極)히 초라한 운명(運命)을 졌던 것이니, 그러한 작가(作家)에게서는 외적(外的) 동기(動機)의 자기분열(自己分裂)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작가(作家)로서의 기대(期待)는 성격적(性格的)으로 이미 가지지 못한 자이다. 작가(作家)다운 작가(作家)일수록 이미 그 주관(主觀) 속에 항상(恒常) 인간적(人間的)으로나 문학적(文學的)으로 맹렬(猛烈)한 자기분열(自己分裂)을 가지는 법이라, 씨(氏)가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다분(多分)히 시정성(市井性)을 띤 자기분열(自己分裂)이란 결(決)코 그 작가적(作家的) 행불행(幸不幸)을 결정(決定)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萬若) 작가(作家)의 행불행(幸不幸)이라는 말이 내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러한 작가(作家)로서의 본질적(本質的) 성패(成敗)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까지 작가(作家)로서는 무책임(無責任)한 말이니, 문제(問題)될 것도 없다.
대저(大抵) 씨(氏)의 불행(不幸)이니 행복(幸福)이니 하는 말의 어의(語義)를 나는 의심(疑心)한다. 씨(氏)가 만약 한 작가(作家)의 행복(幸福)이란 것을 그 작가적(作家的) 성패(成敗)에 두지 않고, 다만 경제적(經濟的) 보장(堡障)과 형이하적(形而下的) 안일무사(安逸無事)로 생각한다면, 씨(氏)가 신인(新人)을 가리켜 행복(幸福)이라 한 말은 신인(新人)에 대(對)한 최상(最上)의 모욕(侮辱)이 아닐 수 없으며, 동시(同時)에 자기(自己)에의 불행(不幸)이란 말 속엔 상당한 자긍(自矜), 자존(自存)이 들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한 문필가(文筆家)의 안식(眼識)이 졸(拙)하거나 견해(見解)가 열(劣)한 것은 원칙적(原則的)으로 보아 도덕상(道德上) 문제(問題)는 아닐게다. 하나 또한 문필가(文筆家)가 있어 남의 문장(文章)을 고의(故意)로 곡해(曲解)를 해 놓고 그 곡해(曲解)를 기초(基礎)로 하여 거기서 자기(自己)의 한 문장(文章)을 출발(出發)시켰다면, 이것은 아마 도덕상(道德上) 문제(問題)도 될 것이다.
유씨(兪氏)의 「순수(純粹)에의 지향(志向)」이란 일문(一文)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해문 (該文)을 읽은이만 더불어 이야기할 밖에 없다. 될 수 있는 한(限) 본문(本文) 인용(引用)과 소개(紹介)는 생략(省略)하겠다)
해문(該文)은 대개 다음의 몇 절(節)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1) 언어불통(言語不通) 운운(云云)
근일(近日)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이 「30대 작가(三十代 作家)들의 고뇌(苦惱)의 소재(所在를 전(全)혀 이해(理解)하지 못하고」, 「30대 문인(三十代 文人)들 특히 평가(平家)들이 문학정신(文學精神)의 정상(正常)한 발전(發展)을 위(爲)하여 악전고투(惡戰苦鬪)해 오던 그 노력(努力)을 코끝으로 웃어버리곤」(이하략(以下略)) 하는데 이것이 양자간(兩者間)의 문학정신(文學精神)의 상이(相異)나 발전(發展)이 아니라, 수삼년래(數三年來) 급각도(急角度)로 전환(轉換)된 「세상(世相)의 문단적(文壇的 반영(反映)」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예(例)의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은 자기분열(自己分裂)을 맛보지 않아서 행복(幸福)이라던 말과 마찬가지 어처구니 없이 옅고 단순(單純)한 견해(見解)다. 아마 씨(氏) 자신(自身)도 자기(自己)의 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솔직(率直)히 말한다. 우리는「30대 작가(三十代 作家)들의 고뇌(苦惱)의 소재(所在)」란 것을 동대(同代) 작가(作家)나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 날카롭게 더 투철(透徹)하게 이해(理解)하고 있다. 씨(氏)는 30대 작가(三十代 作家)와 평가(平家)들이 「문학정신(文學精神)의 정상(正常)한 발전(發展)을 위(爲)하여 악전고투(惡戰苦鬪)」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 문단형편(文壇形便)에 있어 과연(果然) 정상(正常)한 발전(發展)을 위(爲)한 것이든가 아니든가 하는 점(點)에 있어서는 해석(解釋)을 달리하는 자(者)이나, 어쨌든 지금까지 우리 문학상(文學上)의 모든 문학적(文學的 사실중(事實中) 배울 만한 것은 좁쌀 하나만큼 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거두는 셈이다. 그렇거늘 거기 언어불통(言語不通)이란 문자(文字)가 튀어나오도록 씨(氏)는 그렇게도 데퉁스런 사람이든가.
모든 문학적(文學的) 사실(事實)에는 물론(勿論) 「세상(世相)의 문단적반영(文壇的反映)」도 없을 수 없는 법(法)이다. 하나 이것까지 포함(包含)한 문학정신(文學精神)의 상이(相異)요 발전(發展)이다. 씨(氏)는 무슨 근거(根據)로 그것이 문학정신(文學精神) 상이(相異)도 발전(發展)도 아니라 하는가. 씨(氏)는 문학정신(文學精神)을 정의(定義)하되, 「본질적(本質的)으로 인간성(人間性) 옹호(擁護)의 정신(精神)」이라 하는데, 이 경우에 옹호(擁護)란 문자(文字)가 극(極)히 정확(正確)하지 못한 어휘(語彙)이나, 인간성(人間性) 「옹호(擁護)」랬자, 또한 문학정신(文學精神)의 발전(發展)한 요소(要素)임에 틀림은 없으니, 그것은 그렇다 하고, 씨(氏)에게 또 한 번 물어 볼 것은, 그러면 그러한 30대 작가(三十代 作家)들의 인간성 (人間性) 옹호(擁護)의 정신(精神)은 얼마만한 문학적(文學的) 표현(表現)을 가진 게며, 또 현금(現今) 가지고 있는가」 이를 지적(指摘)해야 할 것이다. 문학적(文學的) 표현(表現)없는 문학정신(文學精神)이란 것을 씨(氏)는 어떻게 상상(想像)하는가. 「표현」없는 「정신」, 이것은 문학세계(文學世界)에 있어 언제나 「순수(純粹)의 적(敵)」임을 씨(氏)는 또한 모르는가. 문학적(文學的)으로 마땅히 순수(純粹)해야 하고, 과연(果然) 가장 순수(純粹)한 오늘날의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이 이 「순수(純粹)의 적(敵)」을 경멸(輕蔑)하는 이유(理由)를 씨(氏)는 또한 모르는가.
씨(氏)는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의 문학정신(文學精神)을 의심(疑心)하고, 또 비난(非難)하기 전(前)에 먼저 씨(氏)등(等)은 자기(自己)네의 과거(過去)의 문학정신(文學精神)이란 것에 아직도 책임(責任)과 확신(確信)을 가지고 있는가, 스스로 물러가 생각해 볼 일이다. 수삼년래(數三년年의來)의 자기(自己)들의 문학적(文學的) 거취(去就)를 다시 한번 살펴보라, 자기 (自己) 자신(自身)들이 첫째 서푼어치 신념(信念)도 보여주지 않은 자기(自己)네의 문학정신(文學精神)이거늘 이를 순수(純粹)의 정신(精神)이라 하여 후진(後進)에게 계승(繼承)하기를 엄명(嚴命)하는 씨(氏)의 정신(精神)은 또한 왈(曰), 무슨 정신(精神)인지 불명(不明)하다.
(2) 표어시비
씨(氏는) 또 말하되 오늘날의 신인작가(新人作家)는 「모든 문학상(文學上)의 주의(主義)와 주장(主張)을 거부(拒否)」하는 자(者)라고. 오늘날의 진실(眞實)한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은 비교적(比較的) 2) 요설(饒舌)(잡문(雜文))을 기(忌)한다. 그러므로 극(極)히 드물게 발표(發表)되는 그들의 가장 짧은 「잡문(雜文)」 한 토막을 읽고, 그만 자기(自己)(유씨(兪氏)류(流의)) 오해(誤解)를 해버리는 것은 예(例)의 씨(氏)의 너무도 「단순(單純)」한 성격(性格)의 3) 소치(所致)일 게다. 나는 이 괴상(乖常)하게도 단순(單純)한 씨(氏)에게 또 한번 솔직(率直)히 이르되, 진실(眞實)한 신인작가(新人作家)는 결(決)코 「모든 문학상(文學上)의 주의(主義)와 주장(主張)을 거부(拒否)」하지 않는다. 얼핏 보아 거부(拒否)하는 듯이도 보이는 것은 오늘날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이 이 모든 문학상(文學上)의 주의(主義)와 주장(主張) 앞에 진실(眞實)로 경건(敬虔)하려는(좀 더 엄밀(嚴密)히 음미(吟味)하려는 데서) 문학상(文學上)의 역설적(逆說的) 표현(表現)이다.
씨(氏)는 또 말하되, 오늘날의 신인작가(新人作家)는 표어(標語)로서 나타나는 문학관(文學觀)을 거부(拒否)하는 자(者)라 한다. 씨(氏)의 표어(標語) 운운(云云)하는 것은 주로 월전(月前)의 나의 「문학우상(文學偶像)」이란 소문(小文)을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인데, 내가 그 소문(小文)에서 표어(標語)를 경계(警戒)한 것은 개성(個性)없는 사상(思想), 공식주의적(公式主義的) 기계적(機械的) 문자(文字)의 나열(羅列)의 무의의(無意義)함을 비난(非難)한 것이지, 결(決)코 작가(作家)의 문학관(文學觀) 거부(拒否)가 아닌 것은, 시방도 그 글이 곁에 있을 터이니, 다시 한번 읽어 보면 알 일이다. 나는 그 한 토막의 짧은 글 가운데서 「산 사상(思想), 참된 지혜(智慧)」란 말을 몇 번이나 거듭하였던고, 그 경우에 「산 사상(思想), 참된 지혜(智慧)」란 작가(作家)나 평가(平家)의 떴떴한 문학관(文學觀) 내지(乃至) 인생관(人生觀)을 의미(意味)함이 아니고 무엇이든가. 앞에서 「남의 문장(文章)을 고의적(故意的)으로 곡해(曲解)를 해놓고, 그 곡해(曲解)를 기초(基礎)로 하여 자기(自己)의 변설(辯舌)을 전개(展開)시켰다」 한 것은 이를 가리켜 한 말이다.
씨(氏)는 또 말하되, 「어떠한 「생각」을 자신(自身) 속에 양성(釀成)함이 없이 오직 신기(新奇)한 표어(標語)를 좇아 헤매는 평가(平家)를 우리는 흔히 보는 것이며, (중략(中略)) 이런 유(類)의 비평(批評)을 거부(拒否)함은 결(決)코 「생각」 그 자체(自體)의 거세(去勢)와 동의어(同義語)가 아닐 것이다. 비평(批評)이 문단(文壇)을 영도(領導)하던 때 문학적(文學的) 역량(力量)의 수련(修練)을 등한시(等閑視)하는 폐단(弊端)이 있었다면, 문단(文壇)의 주류(主流)가 상실(喪失)된 오늘 또는 일부(一部)의 작가(作家)가 생각(방점 필자(傍點 筆者))은 멸망(滅亡)되었다고 생각하는 오늘 (이하략(以下略))」 운운(云云). 그런데 여기서 이 말의 내용(內容)의 시비(是非)는 잠깐 차치(且置)하고, 소위(所謂) 「생각」이란 신기(新奇)한 문자(文字)부터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생각」이란 이 경우에 아무런 내용(內容)(성격(性格))을 갖지 않는 표본적(標本的) 사어(死語)니, 즉(卽) 한자(漢子)의 사(思), 고(考), 상(想), 념(念), 회(懷) 유(類)의 숙어(熟語)이면 어느 것이나 이 「생각」이란 문자(文字)에 대치(代置)할 수 있는 성질(性質)의 것이다. 오인(吾人)은 이 경우(境遇)에 이 「생각」이란 문자(文字) 대신(代身), 「사상(思想)」이나 「이데」란 문자(文字)를 놓지 않고는 그 문맥(文脈)을 다스릴 길이 없으니, 그러면 이만큼 정확(正確)하고 또 용이(容易)한 어휘(語彙)를 두고 왜 하필(何必) 「생각」이라는 따위의 사어(死語)를 갖다 놓았는지, 이는 씨(氏의) 문청적(文靑的) 일면(一面)의 탈선(脫線)된 현기취미(衒奇趣味)인지, 처세가적(處世家的) 일면(一面)의 도피수단(逃避手段)인지 아무튼 이해(理解)하기 극(極)히 곤란(困難)한 일이다.
이제 필자(筆者)는 예(例)의 「생각」이란 사어(死語) 대신(代身)으로 「사상(思想)」 혹(或)은 「이데」란 문자(文字)를 가려 놓고 그 대문을 다스려 보겠다.
과연(果然) 그렇다. 「어떠한 사상(思想)(「생각」의 대어(代語))을 육체적(肉體的)으로 자신(自身) 속에 양성(釀成)함이 없이 오직 신기(新奇)한 표어(標語)를 좇아 헤매는 평가(平家)들의 그런 유(流)의 비평(批評)을 거부(拒否)함은 결(決)코 사상(思想)(「생각」의 대어(代語)) 그 자체(自體)의 거세(去勢)와 동의어(同義語)가 아닐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진실(眞實)한 신인작가(新人作家) 중(中) 그 누가 일찌기 이와 반대(反對)되는 의사(意思)를 가진 자(者)가 있던가. 씨(氏)는 무슨 이유(理由)로 무근(無根)한 사실(事實)을 날조(捏造)하여 문학정신(文學精神)의 정도(正道), 순수(純粹)를 저이 문학적(文學的) 사명(使命)으로 하는 참된 순수(純粹)의 사도(使徒)들인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을 함부로 모함하며 중상(中傷)하고자 하는가.
또 씨(氏)는 말하되, 「문단(文壇)의 주류(主流)가 상실(喪失)된 오늘 또는 일부(一部)의 작가(作家)가 이데(「생각」의 대어(代語))는 멸망(滅亡)되었다고 생각하는 오늘……」 운운(云云)하였다. 「문단(文壇)의 주류(主流)가 상실(喪失)」 되었단 말은 세인(世人)이 다 입버릇같이 하는 말이니까 우선 그 시비(是非)는 당분간(當分間) 묻어두려 하거니와, 일부(一部)의 작가(作家) 「이데」는 상실(喪失)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그 「일부(一部)의 작가(作家)」란 대체(大體) 어느 작가(作家)란 말인가. 현금(現今) 우리 문단(文壇)에서 「이데」(「생각」의 대어(代)語)는 멸망(滅亡)되었다고 생각하는 작가(作家)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작가(作家)의 자격(資格)을 상실(喪失)한 불행(不幸)한 기계(機械)거나, 생격(牲格)없는 유령(幽靈)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소위(所謂) 「일부(一部)의 작가(作家)」를 도저(到底)히 작가(作家)로서 인정할 수도 없다.
(3) ‘순수’에의 결론
「하여간(何如間) 나는 일개(一介) 문단인(文壇人)으로서 문학(文學)에 있어서의 「순수(純粹)」라는 것을 생각하기 요새보다 더 절실(切實)한 적이 없다. 순수(純粹)란 별(別)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비문학적(非文學的)인 야심(野心)과 정치(政治)와 책모(策謀)를 떠나 오로지 빛나는 문학정신(文學精神)만을 옹호(擁護)하려는 의연(毅然)한 태도(態度)를 두고 말함이다.」 운운(云云).
과연(果然)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진실(眞實)한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이 씨(氏)에게 외치는 말-그것은 추상적(抽象的) 이론(理論)이나 잡문(雜文)으로서가 아니라, 창작(創作)으로서-이다. 가재(可哉) 가재(可哉). 이 「순수」야말로 이미 진실(眞實)한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이 4) 획연(劃然)히 획득(獲得)한 자기(自己)들의 세계상(世界上), 30대 작가(三十代들 作家)들의 「모든 비문학적인(非文學的) 야심(野心)과 정치(政治)」 주의(主義)에 분연(奮然)히 대립(對立)하는 정신(精神)이며 그에 도전(挑戰)하는 정신(精神)이다. 씨(氏)에게 묻노니, 작품(作品)(창작(創作))을 주(主)로 한 문단(文壇) 현실(現實)로 보아, 이 「순수(純粹)에의 지향(志向)」이란 말은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이 씨등(氏等)에게 외치고 있는 말인가, 씨등(氏等)이 일테면 신인작가(新人作家)에게 충고(忠告)하는 말인가. 이제 씨두(氏斗) 나와 양자 중 (兩者 中) 어느 하나는 체면상(體面上) 「파렴치한(破廉恥漢)」이 되어야 할 형편(形便)에 이르렀다. 왜 그런고하니, 씨(氏)가 해일문(該一文)에서 비열(卑劣)한 욕(辱)과 조소(嘲笑)로 공격(攻擊)의 대상(對象)으로 삼은 그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이 자초(自初)부터 포지(抱持)하고 있는 문학적(文學的) 의견(意見)(이데의 뜻)과 바로 씨(氏)의 해일문(該一文)의 긍정적(肯定的) 결론(結論) 즉(卽) 순수(純粹)에의 지향(志向)이란 것-이 합치(合致)하다는 점(點)이다.
생각건대, 씨(氏)는 아마 직실(直實)한 신인작가(新人作家)들의 우수(憂秀)한 작품(作品)들을 대부분(大部分) 읽지 않고, -이것은 씨(氏)의 다른 문장(文章)에서도 더러 나타난 일이 있었다-주(主)로 그들의 잡문(雜文)을 몇 토막 읽고 난 나머지 성급(性急)히 곡오(曲誤)를 해 버린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이제 씨(氏)가 가령 허준씨(許俊氏)의 「야한기(夜寒記)」쯤을 읽어 본대로, 자기(自己)가 지금까지 신인(新人)에 대(對)하여 얼마나 허황(虛荒)된 요설(饒舌)을 벌여 놓았는가 곧 깨달을 것이다. 「야한기(夜寒記)」의 성패(成敗)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패(成敗)로 따지어 해작(該作)이 오히려 실패작(失敗作)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 태양(太陽)같이 눈부시고, 대하(大河)같이 도도(滔滔)한 문학정신(文學精神) 앞엔 스스로 옷깃을 바로잡을 것이다. 씨(氏)는 일찌기 조선문학사상(朝鮮文學史上)에서 이만큼 정정당당(正正堂堂)하게 정면(正面)은 인간(人間)을 취급(取扱)한 작품(作品)을 보았는가. 이와 같은 너르고 웅장(雄壯)한 작품적(作品的) 세계(世界)를 보았는가.
유씨(兪氏) 이외(以外)에도 근일(近日)에 와서 소위(所謂) 30대 작가(三十代 作家) 혹(或)은 평가측(平家側)으로부터 신인(新人)에 대(對)한 불신(不信) 내지(乃至) 불만(不滿)을 말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왈(曰), 신인작단(新人作壇)와 목진(木振). 왈(曰), 신인불가외(新人不.可畏).
첫째에 대(對)해서는 그렇다. 신인작가(新人作家)래서 모두가 우수(憂秀한) 것도 아니요, 우수(優秀)한 신인(新人)이래서 편편(篇篇)이 역작(力作)만 쓸 수도 없는 바이다. 그리고 또 우수(優秀)한 신인(新人)의 역작(力作)이라더라도, 그것이 30대 작가(三十代의 作家)시 그것과 본질적(本質的)으로 그렇게 현저(顯著)한 차이(差異)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며, 더구나 문장(文章) 세련(洗練) 같은 점(點)으로 본다면 이미 10년(十年) 내외(內外)씩이나 앞서 수련(修鍊)을 겪어온 김동인씨(金東仁氏)나 이태준씨등(李泰俊氏等)에게 갑자기 따를 수도 없는 것이매 이러한 비난(非難)만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면(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몇 사람의 우수(優秀)한 신인(新人)들은 각기(各其) 제 개성(個性)에서 발아(發芽)한 5) 확호(確乎)한 문학적(文學的) 세계(世界)(인생(人生)) 하나씩을 그 작품(作品) 속에 건설(建設)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열 가지 비난(非難)을 무릅쓰고라도 신인(新人)의 의의(意義)는 여기 있다.
그 다음 「신인불가외(新人不可畏)」 설(說)의 안목(眼目)은, 오늘날의 신인(新人)들은 한 개 새로운 사조(思潮)로서 기성문단(旣成文壇)(작가(作家))에 도전(挑戰)해 오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문학사적(文學史的) 견지(見地)에서 하는 말인 모양인데, 물론(勿論) 일리(一理)는 있는 말이다. 우리는 과거(過去) 각국(各國) 문학사상(文學史上)에서 신인(新人)들이 한 개의 사조(思潮)로서 기성작단(旣成作壇)에 도전(挑戰)하여 문단적(文壇的)으로 승리(勝利)한 전례(前例)를 많이 구경하였다.
나는 여기서 문득 「진리(眞理)는 하나뿐」이라는 경구(警句)의 역설(逆說)을 생각한다.
진리(眞理)가 하나뿐이란 말은 일정(一定)한 공간(空間), 일정(一定)한 시간(時間), 일정(一定)한 객관(客觀), 일정(一定)한 주관(主觀) 등(等)을 조건(條件)으로 하고 성립(成立)된 말이다. 즉(卽), 그 경우(境遇)에 그 진리(眞理)는 하나뿐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뉴턴의 진리(眞理)와 이태백(李太白)의 진리(眞理)는 동일(同一)한 것이 아니다. 원래(原來) 자연(自然)이란 어떤 정착(定着)된 존재(存在)가 아니기 때문에 「그 경우(境遇)」란 무한(無限)한 것이요, 그 경우(境遇)가 무한(無限)함에 따라서 진리(眞理)의 수효(數爻)도 또한 무한(無限)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眞理)가 하나뿐이란 이 「하나」는 몇 억천만(億千萬)으로 분해(分解)할 수 있는 초자연적(超自然的) 소수(素數) 「1(一)」이다.
이에 어떤 사적(史的) 경험(經驗)을 가지고 그대로 인간사(人間事)의 율도(律度)를 삼으려면, 이에 배치(背馳)되는 사실(事實)을 왕왕(往往) 본다.
첫째 시대적(時代的) 약속(約束)도 있겠지만, 그 본질적(本質的)으로 조선문단(朝鮮文壇)이란 세계(世界) 문학사상(文學史上)의 그 어느 문단(文壇)과도 「그 경우(境遇)」가 다르다. 신인(新人)이 한 개 새 사조(思潮)로서 기성문단(旣成文壇)에 도전(挑戰)하는 일이 없다 하여, 그것이 그대로 「신인(新人)」의 무성격(無性格) 내지(乃至) 「무의지(無意志)」를 의미(意味)하는 말은 될 수 없다. 오늘날 「신인(新人)」은 신인(新人)으로서 기성작단(旣成作壇)에 대립(對立)할 새 성격(性格)을 가진 자(者라)고 나는 본다. 허나 새 성격(性格) 그 자체(自體)가 다분(多分)히 주관적(主觀的)이라고 보매, 동시(同時)에 또 개성적(個性的)이 아닐 수 없으므로, 그것이 쉽사리 한 개 사조(思潮)로서 통괄(統括)되기는 거북한 일이며, 성급(性急)히 그러할 필요(必要)도 없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격(性格)(사조(思潮)로서)이란 이론(理論)보다 작품(作品)이 앞서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분명(分明)한 윤곽(輪廓)이란 흔히 문학사적(文學史的) 숙제(宿題)로 남겨지는 수가 많다.
끝으로 나는 유씨(兪氏)에 대한 나의 평소(平素)의 인식(認識)을 고치지 않을 수 없는 서운함을 맛보며 붓을 던진다. -이상(以上) 자기(自己)의 변설(辯舌)에 책임(責任)을 진다.
(『文章』 제7호, 1939. 8)
1) 정당한 비평
2)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함
3) 무슨 까닭으로 빚어진 일
4) 구별이 매우 분명함
5) 아주 든든하고 굳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