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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소식(우편엽서) 1장 무료로 전해줄 수는 없을까
주책 없는 늙은이?
간밤에, 80대 늙은이가 동심인 듯 별들과 노닐다가 꼭두새벽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으니까.
거의 꼴찌로 기상하여 아침을 먹는 듯 마는 듯 꼴찌로 알베르게를 나섰다.
아침식사(desayunar) 조건의 비싼 숙박료에 비해 알베르게가 제공하는 아침식사란 대부분이
토스트 두어 조각에 커피 한잔 또는 음료수 한 컵이지만.
노르떼 길은 호세 마리아 데 뻬레다 길(C./Jose Maria de Pereda)을 따라 내려간다.
이어서 론다 데 라 엔끄루씨하다(Ronda de la Encrucijada)와 까미노 알또 데 산띠아고(Ca
mino Alto de Santiago)길을 만나고 푸엔떼 엘 아이에도 길(C./Fuente el Hayedo)을 따라서
남서진하면 라 아쎄보사 구역(Barrio la Acebosa) 길이다.
고속도로(A-8, E-70)와 철도 등의 고가육교를 거듭 건너는 등 1km쯤 가면 인구 156명(2014년
기준)인 작은 마을 라 아쎄보사(la Acebosa)다.
이 마을에서 서쪽으로 2km, 기초지자체 산 비쎈떼 데 라 바르께라의 도심에서는 3km 지점에
자리한 오르띠갈(Hortigal)까지는 2개의 길이 있다.
CA-843지방도가 개설됨으로서 전통(original) 까미노와 지방도로로.
이 길에서는 굳이 차도(지방도)를 택할 이유가 없다.
거리가 비슷하거니와 오리지널 루트는 오르내리는 부담이 있기는 해도 목초지를 걷는 쾌감뿐
아니라 전망 명소인 동산(Jilguera)의 정상을 거쳐 가니까.
뒤로는 지나온 산 비쎈떼 데 라 바르께라 하구와 마을이 한눈에 포착되고 앞에서는 삐꼬스 데
에우로빠의 웅위에 압도될 수 밖에 없는 명소다.
하늘과 맞닿은 삐꼬스(데 에우로빠)에서 섬광처럼 번득이는 것은 작렬하는 햇살 따라 춤추는
만년설의 묘기렸다?
주민이 50명도 못되는 작은 마을 오르띠갈은 노르떼 길의 산간 지선인 72.73km의 레바니에고
길(Camino Lebaniego/San Vicente de la Barquera~SantoToribio)이 분기하는 지점이다.
여기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진행을 계속했다.
자주 부닥치게 되는 짧은 지선들에 대한 미련을 다스리지 못하면 진행이 더디겠기 때문에.
도심 거주자는 25명 뿐이고 남어지는 뿔뿔이 흩어져 살기 때문인지 미니 같은 마을을 벗어나
CA-843도로 따라 개천 수준의 간다리야 강(Rio Gandarilla)을 건넜다.
다음 마을까지 서진하는 길(2km쯤?)에서 동일 방향으로 이동하는 큰 무리의 소떼를 만났다.
많은 새끼들을 대동한 것으로 보아 더 기름진 초장으로 이동하는 중이라 이해되었으나 도로변
좀 떨어진 목장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던 소들이 덩달아 뛰어다니며 울어대는 것은 왜?
그보다 더 민망스러운 것은 왕복 2차선을 모두 차지한 소떼 때문에 차량의 통행이 저지된 것.
반대쪽에 묶여있는 차들은 소떼가 통과하면 바로 달릴 수 있으나 뒤따르는 차들은 어찌한다?
낭패가 아닐 수 없겠는데 불평 한마디 없이 조용히 뒤따르고 있는 그들.
시간이 갈 수록 장사진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들도 목동이거나 목장주 또는 그 출신이라 역지
사지로 이해해서 참고 있는 것인가.
클랙슨(klaxon)을 울려대다 못해 뛰쳐나와 자칫 큰 시비로 커질 우리와는 어떤 차이?
소 떼와 헤어지고 잠시 후에 도착한 마을은 더 작은 에스뜨라다(Estrada).
아스뚜리아스와 경계를 이루는 깐따브리아 지방의 마지막 기초지자체인 발 데 산 비쎈떼(Val
de San Vicente)에 속한 마을이다(기초지자체 산 비쎈떼 데 라 바르께라는 이전 마을까지)
주민 총수가 20명 미만으로 미니 마을이기는 하나 해발 110m에 위치해 일품 전망지다.
해안마을 또는 해안 인접 마을이 해발100m 이상이면 높은 지대에 속하며 당연히 넓은 시야가
확보되어 있으니까.
북쪽으로 1km쯤 전방의 세르디오(Serdio)를 향하여 마을의 중심부를 벗어나면 에스뜨라다의
탑(Torre de Estrada)이 있다.
13c~15c(14c?)에 작은 예배당(capilla)과 함께 건립되었다는 고딕 양식의 4각 탑이다.
이 곳 기초지자체에서 가장 작은, 미니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웅장한 탑이 들어서게 된 까닭은
알 수 없으나 깐따브리아 지방에서 가장 소중한 탑 기념물 중 하나란다.
'관심문화유산'(BIC/Bien de Interes Cultural)으로 지정될(1992년에) 정도로.
탑에 이어서 바로 대면한 것은 뻬레그리노스(Peregrinos)의 메시지 박스(messsage box).
뽀사다 루랄(Posada Rural/농촌객줏집?) 푸엔떼 데 라스 안하나스(Fuente de las Anjanas)
의 담벼락 위에 세웠는데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누가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기라는 것인가.
순례란 보이는(visible) 길에서 보이지 않는(invisible) 길을 찾아가는 구도 과정이다.
전자는 순례길이라 하나 일반 여행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가시적인 길을 말하며
후자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갈망하는 자기만의 길인데 남길 무슨 메시지가 있겠는가,
그보다 까미노 데 산띠아고 7개 루트의 요소요소에 우체통(post box)을 설치하면 어떨까.
이에 더하여 가장 의미있는 각 1곳에는 무료 포스트 박스를 세우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엽서(postcard)는 도처에 있으나 우표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으므로 순례자의 엽서에 한해서
무료 배달하는 선심을 베풀 수는 없을까.
우리나라의 1급 관광지가 된 간절곶(울산시 울주군 서생면)에는 초대형 우체통이 서있다.
비치되어 있는 우편엽서를 이용하면 무료로 소식을 전달해 주는데 인기 만점이다.
하물며 지구촌 각지에서 연간 15만명 이상의 순례자가 몰려오는데 그들에게 엽서 1장쯤 거저
배달하는 선심을 써도 되지 않을까.
15만명이라 하나 내국인(스페인)이 반(半)을 넘고 남은 반 중에서도 반 이상이 인접국들이며
먼 한국(극동)의 통신요금도 78센트(우표1매)에 불과하므로 전혀 부담이 되지 않을 텐데.
걷는 동안에 순례자 1인이 평균 1.000유로를 쓴다면 연간 수입은 1억 5천만유로다.
수익률을 10%로 잡아도 1천5백만 유로의 순익을 올린다.
우표값을 1매당 50센트(평균)로 친다면 연간 우표값 총액이 7만 5천유로.
이익금의 2백분의 1에 불과하며 우표값을 제해도 순 이익금은 1천 4백 9십 2만 5천유로다.
실제로 수입, 수익금은 이 보다 엄청 많고 우표 값은 훨씬 적을 것이다.
깐따브리아 지방의 마지막, 발 데 산 비쎈떼와 운께라
에스뜨라다 북쪽에 자리한 마을 세르디오(Serdio) 까지 1km는 너무 짧게 느껴지는 길이다.
해발 100m대에서 완만하게 꾸불거리는 전형적 농목촌 길(Poblado Serdio)이 CA-844도로를
만나 진행하면 산 훌리안 교회iglesia de San Julian)가 있는 세르디오 중심부에 이른다.
기초지자체 발 데 산 비쎈떼에 속해 있으며 크지 않고 특징 없는 마을(2008년기준인구177명)
이지만 에스뜨라다 보다 5m 높은 해발 115m의 위치라 그런지 시야는 더욱 넓다.
중심부에서 조금 비켜있는 공립 알베르게(municipal)를 외면하고 서진을 계속했다.
이 알베르게가 내 일정과 무관하기 때문이었는데 노르떼 길이 다른 루트에 비해서 마을 간의
거리가 짧고 알베르게도 많은 편이다.
그래서 웬만한 체력이면 걷기를 시도해 봄직하다고 생각되는 까미노다.
북한산 둘레길(도봉산 구간 포함)을 완주하는 체력이라면 능히 걸을 수 있겠는데 아내가 이에
해당하며 더구나 대서양 해안의 매력이 시너지효과로 작용하면 더욱 용이할텐데.
이미, 꼰차 만과 사라우쯔 해변을 지날 때 아내와 함께 걷지 못하는 것이 깊은 회한으로 다가
와 나를 괴롭혔는데 오늘 또 그랬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잠시 스쳐가는 부질없는 잡념이었을 뿐이다.
사도 야고보의 무덤 발견에 기원을 두고 있는 까미노가 중세를 거쳐 현대의 모습이 되기 까지
우여곡절이 얼마나 많았던가.
고난과 형극을 극복하고 구도의 길을 걷다가 희생된 순례자가 부지기수 아닌가.
오늘날과 같은 낭만의 해안 까미노를 꿈이나마 꿀 수 있었던가.
순례자의 절대 금기에 잠시나마 유혹되다니?
길가에는 대형 채석장이 있다.
채석장이라기 보다 바위 또는 큰 돌을 분쇄하는 거대한 쇄석장이며 이 일대는 나무도, 초장도,
옥수수밭도, 공기까지도 회색 돌가루를 뒤집어 쓰고 뿌옇게 풀죽어 있다.
까미노들에서 공해업소는 보기 드문 높은 굴뚝이 아니고 이들 채석장, 쇄석장이다.
거듭 말하지만, 주체할 수 없도록 돌이 지천인 땅에서 돌을 캐기 위해 자연(산)을 망가뜨리고
있는 짓이야 말로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다.
채석장을 지나면 발 데 산 비쎈떼의 작은 마을(인구 108명?) 무뇨로데로(Muñorrodero)다.
노르떼 길은 마을을 왼 쪽에 두고 그냥 가게 되어 있으며 마을을 거쳐가려면 채석장을 벗어날
때 마을길을 택하면 된다.
나는 500m 정도만 더 걸으면 되는 마을길을 택했다.
BIC(관심문화유산)라는 동굴(Cueva de la Fuente del Salin/鹽庫泉窟?)의 인력에 끌려서.
그러나, 괴이쩍은 것은 2000년에 지정되었다는 소중한 자연문화재인데도 안내가 전혀 없다.
스페인의 기초지자체들도 관광명소 개발에 열을 올리고는 있는 듯 한데 우리나라 지자체들이
온갖 연기(緣起)를 주장하며 아전인수식 겹치기 홍보를 하는 것과 달리 왜 소극적일까.
수익률이 가장 높으며 무공해 산업이라는 관광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리한 경쟁도 불사할 수
밖에 없겠는데 이 마을은 왜 그럴까.
100명 이상의 거주자 마을이기에 당연하게 교회가 있으나 현판이 없다.
한낮인데도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물어볼 길 없고, 책자에 소개된 '아이에도 성모마리아 교회'
(Iglesia de la Virgen del Hayedo en Muñorrodero)려니 짐작하고 떠날 수 밖에.
노르떼 길은 난사 강(Rio Nansa/남에서 북으로 흘러 Tina Menor 하구를 이루고 깐따브리아
해로 빠지는 강)과 나란히 북상하는 CA-181도로를 따른다.
마을을 벗어나면 강변에 썩 맘에 드는 소규모 휴식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산을 무자비하게 절개해서 만들어야 할 만큼 절실한 공원인가.
왕래하는 차량이 적고 걷는 사람은 노르떼 길 순례자 뿐인 길인데 누구를 위해서?
4년 전에 비해 자주 눈에 띄는 신설 도로공사 현장의 대부분에서 산을 깎고 있다.
나는 이베리아 반도가 하천을 비롯해 각종 토목공사에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친화적이라고
극찬하고 있는데 도로공사만은 우리보다 후진국인가.
우리는 분별 없는 절개 시대에서 터널 시대로 발전했는데.
CA-181지방도와 함께 하며 철도지하도와 A-8(E-70)고속도로(Autovia del Cantabrico) 고가
밑을 지난 노르떼 길은 난사 강 다리를 건넌 후 CA-181도로를 떠난다.
(다리 초입에 세운 안내판 'ria de Tinamenor'는 위치를 잘못 잡은 것 같다)
이름대로 올라가는(arriba) 라 바르까 아리바(La Barca Arriba) 길과 바예달 길(Barrio Valle
dal)을 따르면 뻬수에스(Pesues)의 중심부에 이른다.
기초지자체 발 데 산 비쎈떼의 도심 마을로 인구 357명(2008년 기준)의 페수에스에서 운께라
(Unquera)로 가는 길은 까미노마커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길도 방향도 자주 바뀌기 때문이다.
철도와 지근에서 나란히 걷고 국도를 짝하여 걷기도 하고 소로와 포장, 비포장 도로도 걷는 등
헷갈리기는 해도 까미노마커만 놓치지 않으면 길 잃을 염려는 없지만.
다만 긴장하고 걷기 때문에 어떤 생각에 몰두하지 못함으로서 피로가 쉬이 오는 듯 했다.
마지막 산책로(Juncal?)를 걸으며 긴장은 풀렸으나 일찍 찾아온 피로까지 풀리지는 않았다.
뻬수에스에서 3km, 인구893명(2008년기준)의 운께라(Unquera)는 발 데 산 비쎈떼의 서쪽 끝
마을이며 깐따브리아와 아스뚜리아스 두 지방의 깐따브리아쪽 경계가 되는 마을이다.
경계선인 데바 강(Rio Deva)의 하구 띠나 마요르(Ria de Tina Mayor)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강은 1230년까지 레온 왕국과 까스띠야 왕국의 국경선이기도 했단다.
이 해에 후사가 단절된 레온 왕국의 왕위를 까스띠야 왕국의 왕 페르난도 3세가 겸하는 까스
띠야연합왕국(Corona de Castilla)의 탄생으로 이 국경은 자연 소멸되었다는 것.
자선사업으로 BIC가 된 마을 콜롬브레스
까미노마커가 덕지덕지 붙은 데바 강 다리를 건넘으로서 아디오스(adios) 깐따브리아 지방.
노르떼 길을 담고 있는 4개의 자치지방 중에서 2개를 지나 3번째인 아스뚜리아스 지방(Comu
nidad Autonoma del Principado de Asturias/Autonomous Community)에 들어섰다.
첫 마을은 데바 강의 양안 중 한 쪽에 있는 부스띠오(Bustio)로 운께라를 마주 보고 있다..
지자체 리바데데바(Ribadedeva)에 속해있으며 215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자그마한 마을인데
강안에는 품위 있어 보이는 고풍스런 집들이 들어서 있다.
아스뚜리아스 지방에서 내딛는 첫 발의 노르떼 길은 멋있다.
돌과 벽돌로 다듬은 오르막 길로 시작하며 올라서면 조망권이 그만이다.
이처럼 까미노에 대한 아스뚜리아스 지방의 관심이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곧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 마크가 드물어가고 잘못 안내하기도 하고 까미노에 대해서 주민들이
별무 관심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으니까.
노르떼 길은 부스띠오에서 2km 전방에 있는 꼴롬브레스로 향한다.
해발 20m인 부스띠오를 떠나 완만한 오름세로 이어간다.
공원(Parque de Aventura Canopie)과 예배당(Capilla de El Cantu)을 지나 라마드리드 길
(C./Lamadrid)을 따르면 해발 125m에 자리한 마을이 콜롬브레스(Colombres)다.
지자체 리바데데바의 청사(廳舍)가 있는 도심 마을로 부속마을들의 주민을 포함해 인구 1.351
명의 마을이며 기독교(가톨릭)의 교구교회(Parroquia de Santa Maria)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Albergue El Cantu Devatur/사설)에 들러 스탬프를 받고 마을에
관해 상당한 안내도 받았다.
꼬레아를 안다는 오스삐딸레로는 내 나이부터 물어왔다.
80세 이상의 뻬레그리노를 보는 것이 신비스럽다는 그는 81살 꼬레아노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잘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마을에 대해 천천히 자상하게 설명하는 등 특별하게 환대했다.
스페인의 역사유산(Patrimonio historico de Espana) 분야의 BIC로 지정되었다(2013년 8월
28일)는 이 마을(Villa de Colombres).
지정 이유는 자선사업으로 유명해진 마을이라는 것.
주인공은 인디아노스(Indianos) 마누엘 이바녜스 뽀사다(Manuel Ibanez Posada)와 이니고
노리에가 멘도사(Iñigo Noriega Mendoza), 이니고 노리에가 라쏘( Lasso) 등이란다.
뽀사다는 그 공로로 리바데데바의 백작이 되었고 그들의 별장들은 현재 인디아노 사료관(Ar
chivo de Indianos)과 이민 박물관(Museo de la Emigracion) 등 다양하게 사용중이라고.
나는 '인디아노(indianos)'라는 그들을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 'Indian'으로 이해함으로서
잠시 헷갈렸다.
1492년에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이 대륙을 인도의 일부로
착각하고 동인도라 했으며 이후 영어에서 '인디언'은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의 총칭이 되었다.
그러나 에스빠뇰(español/스페인어)에서 'Indiano'는'아메리카(동인도) 태생이 아닌 원주민'
과 '아메리카에서 부자가 되어 돌아온 사람'을 말한단다.
그럼에도, 이 때(2015년 5월 23일) 나는 이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그들을 아메리칸 인디언
으로 착각한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이곳 콜롬브레스 태생인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약 부자가 되어 돌아옴으로서
인디아노가 되었으며 부(富)를 자선사업에 쾌척함으로서 고향 마을을 빛나게 했다.
한데, 아메리카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을 따로 지칭하는 단어(인디아노)가 왜 생겼을까.
정복자로 군림하여 현지의 자원과 노동력을 부당한 방법으로 착취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이야 말로 우리의 속담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쓴" 모범 사례라 하겠다.
나는 좋은 결과라면 나쁜 수단에 대해 관대해도 좋다는 쪽이 아니므로 내 견해는 아니지만.
콜롬브레스에서 3.5km되는 다음 마을 라 프랑까(La Franca)로 가는 노르떼 길은 교구교회와
도심을 지나 바달란 길(C./Badalan)을 따라서 콜롬브레스를 빠져 나간다.
마을 길(Aldea Peral)과 RD-3포장 소로를 따라서 N-634국도에 합류한 후 A-8고속도로 밑을
통과하여 라 프랑까 까지 이 국도(N-634)를 따른다.
콜롬브레스에서 국도에 합류하는 길지 않은 길은 여럿이 있지만 서진(西進)만 확실하게 하면
빗나가는 일 없으므로 까미노 외길만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국도(N-634)를 따라서 라 프랑카 어귀 까지는 갔으나 심한 공차증
(恐車症) 때문에 더 진행할 자신이 서지 않았다.
짧은 거리나마 샛길을 모색하기 위해 호텔 겸 식당인 라 빠라(La Parra)앞에서 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교회(Iglesia de San Andres) 쪽으로 갔다.
적잖이 우회는 해도 한동안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는 마을길을 걷다가 한 영감의 부름을 받았다.
세요(sello)를 받아 가라는 영감인데 나를 자기 연배(66)로 본 듯.
나올 때 발견했지만 집 앞에 세요와 물(seiio y agua)이 있다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애향심이 강한 영감인가.
자발적 봉사(스탬프와 물)를 하며 부엘나 까지 가려고 한다는 나를 이 마을의 알베르게(Alber
gue Renacer)가 좋다며 붙들어 앉히려 했으니까.
해가 아직 중천에 있는데도.
하긴, 십리에 불과한 거리의 이웃 마을이지만 라 프랑까와 부엘나는 소속 지자체가 다르다.
리바데데바와 야네스.
노르떼 길과 무관하며 되돌아 나와야 하는 프랑까 해변(Playa de la Franca)까지 내려갔다.
간밤의 알베르게(라 바르께라)에서 전단을 보고 정한 오늘의 숙소(Albergue Santa Marina)
가 겨우 4km 전방에 있으므로 여유로워서 그랬을 것이다.
곧 합류하게 되는 아이호 강(Rio Ahijo)과 까브라 강(Rio Cabra) 사이에 수영장과 방갈로(Bun
galows)를 갖춘 캠핑장이 있으며 휴식을 취하기 안성맞춤인 해변이다.
부엘나의 알베르게 산따 마리나와 주인 호세
까미노에서 좀처럼 하지 않는 휴식을 충분히 취한 후 까브라 강을 건너 N-634국도로 돌아왔다.
부엘나까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으며 이로써 기초지자체 야네스(Llanez) 땅에 들어섰다.
국도 신설 이전에는 한때나마 아주 낭만적인 해변 까미노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흔하게 남아있는 것 처럼 도로의 직선화 과정에서 버려지게 된 자투리길
들을 이따금 밟게 될 뿐 반듯한 차로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지루한 노르떼 길이다.
다행인 것은 병행하는 고속도로(A-8, E-70)의 흡수력 탓인지 차량의 왕래가 현저하게 줄어서
긴장하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침에 꼴찌로 출발한데다 휴식시간도 적지 않았는데 걸음이 빨랐는가.
25km쯤 되는 부엘나(Buelna)에 오후 3시쯤 도착했으니까.
취락의 시작이 중세라 하나 현재 주민이 80명 안팎의 자그마하며 아무 특징이 없는 듯한 마을.
그럼에도, 여느 날과 달리 이른 시각인데도 내가 이 곳에 머물기로 한 것은 우편엽서 2분의 1
남짓 크기의 리플릿(leaflet) 1장의 힘이 컸다.
간밤의 알베르게에서 본 'BUELNA Albergue Santa Marina 15€ Cenar(저녁) + Dormir(숙박)
+ Desayunar(아침)'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전단.
15유로는 내 알베르게 이용 상한선(10유로)에 위배되는데도 왜 그랬을까.
저녁과 아침 식사에 5€라면 무방하다고 생각되어서?
내게 아침 식사의 조건은 무의미하지만 마땅한 매점이 없는 시골길에서 5€의 저녁 식사라면
아무리 부실하다 해도 소위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리(계산) 작용 때문이었을까.
N-634국도변에 자리한 이 알베르게에 당도할 때까지는 막연했는데 대면한 젊은 주인이 주는
호감이 확고하게 나를 붙들어 놓았을 것이다.
에스빠뇰 치고는 거구인 42세의 호세(Jose Luis Lopez Gil).
내 무거운 배냥을 스스로 메고 앞선 그는 2층 침실로 안내하며 대충 설명했다.
바르(Bar)와 식당(Restaurante)을 겸하고 있으며(1층) 몇개의 홀로 나뉜 너른 2층 대부분이
뻬레그리노스를 위한 침실(100plazas?)로 사용되고 있다.
숙박은 10€, 저녁과 아침은 각6€와 2€지만 순례자여권 소지자에 한해서 숙식 15€라는 것.
점심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야외의 파라솔 식탁들 위에는 빵과 물이 놓여 있다.
낮에 시장한 순례자들에게 요기가 되기를 바라는 호세(주인)의 갸륵한 배려란다.
하지만 이 날의 숙박자는 노르떼 길 순례자 3명과 다른 몇명이 전부였다.
아마, 오픈한지 일천하여(2013년 6월 27일 오픈)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저녁 식탁은 순례자와 다른 팀으로 양분하여 차려졌다.
순례자 팀은 간 밤에도 같은 알베르게에서 유했으며 독일어권이지만 독일인은 아님이 분명한
초로의 남녀와 나.
나는 까미노에서 배낭 또는 복장으로 Aleman(독일인)을 알아낸다.
독일 제품을 사용하는 非알레만은 있으나 알레만은 자국 제품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데 이들의
언어는 독일어지만 백팩과 옷은 메이드 인 저먼(German)이 아니니까.
나처럼 간 밤에 리플릿을 통해서 이 집을 알게 되었다는 그들.
나이와 달리 몸도 마음도 아직 청춘인가.
분위기로 보아 노르떼 길에서 최근에 알게 된 관계인 듯 한데 어느 새 정분이 났나.
자기네 애정 표시하느라 동양 늙은이는 관심 밖이거나 어쩌면 눈엣가시 같은 존재?
순례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을 택한 그들에게 나는 필시 훼방꾼이렸다.
달아오르는 열정을 주체 못할 정도라면 호텔을 찾을 것이지 좀스럽게 알베르게라니.
남녀간의 애정문제는 엔간한 신앙으로는 다스릴 수 없으며 이 한쌍과 같은 경우는 까미노에서
드물거나 아주 낯선 풍경도 아니다.
까미노도 사람의 길이며 순례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실망하는 일이 없기 위해서는 어떤 기대의 싹도 틔우지 말아야 한다.
나는 예상 이상으로 무던한 식사를 마친 후 적선하는 셈치고 바로 자리를 떴으며 어두워지기
전의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을길 산책에 나섰다.
무심코 걷는 발길이 부엘나 해변(Playa de Buelna)에 이르렀을 때 나는 펼쳐지는 해안절경에
큰 충격을 받았고 내 디카의 셔터는 쉴 새 없이 바빠졌다.
어두워지기 전에 한 장면이라도 더 담아두려는 욕심 때문에.
(그랬음에도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으니 아쉬움을 달랠 길 없다)
마을에 알맞는 규모의 부엘나 만(Ensenada de Buelna)은 작은 해변을 2개 가지고 있다.
곶(Punta de Buelna)도 있고 동굴(Cueva Cobijeru/스페인의 내전-Civil war-때는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는)도 있다.
해안에 있어야 하는 모든 것을 갖춘 절경 해안의 미니어처(miniature)에 다름 아니다.
동동북 해안 고지대의 비탈진 초원에서 저녁 식사중이거나 식사를 마치고 백지장처럼 엷어진
저녁 햇살을 즐기고 있는 소떼들이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농축 마을에서 관광 마을로 전이중이라는 부엘나.
까미노에서 내가 하룻밤 머문 작은 마을들 중 이처럼 매료되어 본 마을이 있었던가.
하마터면, 명승의 부엘나가 특징 없는 마을로 내 머리에 고착될 뻔 했다.
나를 산책으로 내몬(?) 그들이 되레 고마운 밤이 되어 돌아왔다. <계 속>
첫댓글 반가운 글만 대하여도 기쁨과 만가움이 앞서는군요, 건강히 지나시온지요?....
손주들과 보내신 여름 행복하셨죠?
저는 10월 들어서 모처럼 산행 여정을 가졌습니다.
한라산과 영남알프스, 경북과 전북과 충북이 만나는 해발 1067m 삼도봉의 삼도화합제,
강원도 백덕산과 민족의 영산 태백산 등을 다녀왔으니까요.
재회가 이뤄질 때까지 양주께서 늘 강건하시기 빕니다.
선배님의 도전과 모험을 본 받으려 노력하는 후배입니다. 훌륭합니다. 저는 올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 바이칼호- 카잔-모스크바-산트-헬싱키까지 열처로, 발트3국과 벨라루스와 폴란드는 버스로 솔로 여행다녀왔습니다. 책도 냈고요(유라시아 철도여행 발트3국버스여행). 언제 한번 뵈야죠~
스케일 큰 여행 체질이시군요.
북한산에도 순단풍 군락지가 있는데 붉게 수 놓는 막걸리 한잔 맛이 그만이거든요.
생각이 있으시면 아무 날이나 잡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