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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주강씨종회 광주전남 원문보기 글쓴이: 관리자
강민첨 초상 보물588호
고려시대 장군인 강민첨(姜民瞻)을 그린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61.3㎝, 세로 80㎝이다. 강민첨(姜民瞻)(?∼1021)은 고려시대 명장으로 목종(재위 997∼1009)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현종 3년(1012) 동여진이 침입하자 안찰사(按察使)로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동여진(東女眞)을 격퇴하였고 현종 9년(1018) 거란이 침입하자 이를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쓰던 모자인 복두에 정장을 하고 홀(笏)을 들고 앉아서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반신상이다. 의자 등받이에 있는 호랑이 가죽은 18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고려시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정조 12년(1788) 박춘빈(朴春彬)이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그림이다. 비록 조선시대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고려시대 초상화가 희귀한 상황에서 고려 공신상 형식과 표현형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그림이다. |
강계용(姜啓庸)
姜以式 高句麗 병마도원수공을 시조로 하나 그 이후의 一九分의 선조가 계시나 昭穆이 분명치않아 系代를 하지 못하고 다만 諱만 전하고 문헌상의 확실한 기록을 잇는 公을 一世로 한 것이다. 그것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大學者 陽村 權近이 撰한 恭穆公의 墓誌銘에 의한 것이다.
즉 거기에는 5代祖는 국자박사 諱 啓庸이며 그 아들 殿中內給事 諱 引文이 모두 높은 선비로서 이름이 나셨으며 박사공이 처음 日本通信使 書狀官이 되시여 일본에 가실때로 되여 있다.
諱 啓庸公은 文科에 及第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國子監博士가 되시니 이때 元나라가 日本을 征服할 때(1274년) 日本通信使書狀官이 되시어 日本에 원정 가셨다. 당시에 高麗쪽 都元帥는 金方慶 장군이였다. 公은 귀국 후 晋山府院君에 封해지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公의 墓는 失傳되었으나 公의 묘지라고 전하여지는 傳疑墓 경상남도 陜川郡 율곡면 갑산리 龍德山에 封壇하고 招魂禮葬을 하고있다. 처음 1792년에 封壇하였고 다음 1807년에 改修되고 1860년에 다시 改修하였으며 1936년에 다시 改,補修하여 1994년
博士公波 大同譜를 발간하면서 碑石, 床石, 望柱石,文武官石, 石羊, 石燈을 갖추었다. 齋室인 甲山齋와 門樓인 龍德門과 庫直舍도 갖추었다.
1274년(고려 원종 15년) 10월 원나라 일본을 정복하려 할 때 고구려 도독(都督) 김방경(金方慶)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아들 인문과 함께 일본 정벌에 참가하였다. 고려 원나라(몽고) 연합군 2만 6천 병사가 10월 18일 대마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이키시마(壹岐島)에서 용전하여 크게 기세를 올렸지만 10월 20일 하카다만에서 심한 풍랑으로 일본 정벌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본국으로 돌아와 벼슬을 하지 않았다(봉冠 不士)유사(遺事)에 이 사적이 실려 있다.
국자 박사(國子 博士) : 국립대학 교수
군(君) : 종친과 신하에게 주던 존호. 품게는 정 1품에서 종 2품까지 있다.
음직(蔭職) : 공신 또는 5품 이상의 신하의 자손에게 주던 관직.
3품 이상 신하에게는 사위, 동생 등에게 벼슬을 내리던 제도
부원군(府院君) : 종친 및 정 1품에게 내리던 작호
증직(贈職) : 공신, 충신, 효자, 학덕이 높은 사람 등에게 사후에 관직을 주거나
높여 주는 벼슬 제도 아들 : 引文
묘는 실전하였으며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손자 어사공(사첨)봉단과 증손자 진원군(諱 昌貴)의 묘가 있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뒤 용덕산 임좌(壬坐)에 봉단과 비를 세웠다.
강시의 휘는 恭穆公(공목공)이다. 그는 博士公(휘, 계용)의 5세손이며. 아버지는 문경공(휘, 군보)이다. 그는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배위는 진주하씨 찬성사 원정공(휘; 집)의 딸이며, 원정공의 증손에 영의정(하연)이 나왔다.
목공의 동생 양희공(휘, 서)은 공양왕 때 경상도병마도절제사를 거쳐 검교의정부 찬성사를 지내셨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종이 좌의정으로 불렀으나 稱病(칭병)하고 致仕(치사)하셨다. 양희공은 문경공, 공목공과 함께 3부자 재상이시다.
양희공의 외동 딸은 전주최씨 좌찬성 경절공(휘, 사강)에게 출가하였다. 전주최씨 경절공 후손에 祖孫(조손) 대제학에 祖孫(조손) 영의정(최명길, 최석정)이 배출되었다.
공목공의 아들인 통정공(회백)은 정당문학, 통계공(회중)은 보문각 대제학. 회순은 사재(소감) 재신(회숙), 진원군(회계)은 공양왕의 딸인 경화궁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강회백(姜淮伯)
강회백(姜淮伯, 1357(공민왕 6)∼1402(태종 2)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시(蓍)의 아들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부사·첨서사사(簽書司事)를 역임하였다. 1385년에는 밀직부사로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로 부사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창왕을 폐할 때 지밀직(知密直)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한 공이 있어,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해에 조준(趙浚) 등과 함께 세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어린 것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
돌아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鄭夢周)의 사주를 받은 간관 김진양(金震陽) 등이 조준·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할 때 이에 동조, 대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였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처음에는 동생인 회계(淮季)가 공양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탄핵을 면하였으나, 곧 진양(晉陽)에 유배되었다.
그는 총명(聰明)이 남보다 뛰어나고 강개(慷慨) 노성(老成)하여, 가는 곳마다 성적(聲績)이 있었다. 다섯의 아들이 있으니, 강종덕(姜宗德), 강우덕(姜友德), 강진덕(姜進德), 강석덕(姜碩德), 강순덕(姜順德)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8년(태조 7)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저서로는 《통정집》이 있다.
강회중(姜淮仲, ∼1421년(세종 3)은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보(仲父), 호는 통계(通溪).부친은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이고, 강회백(姜淮伯)의 아우이다.
1373년(공민왕 22) 군자시승(軍資寺丞)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ㅏㅇ인 최영(崔瑩) 장군을 따라 탐라도를 토평(討平)하였고, 1379년(우왕 5)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사사하였고, 순흥군 안종원(安宗源)과 판후덕부사 윤진(尹珍)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382년(우왕 8) 진사문과에 합격하였다. 1685년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고,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면서 두문동(杜門洞)에서 은거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사헌부집의(司憲府執議), 1392년 군자윤(軍資尹)이 되었고, 4월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옥사에 연루되어 형과 함께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이색과 함께 결당 모란(結黨謀亂)하였다는 죄로 본향에 안치되었다.
1398년(태조 7) 4월 궁성을 쌓던 인부들을 왕명보다 먼저 놓아 보낸 죄로 외방에 귀양 보내졌다가, 10월에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가 되었다. 1415년(태종 15) 신정을 하례하기 위해 중국에 다녀왔고, 1417년(태종 17) 함길도도순문사(咸吉道都巡問使)가 되었다가 무고죄로 갇혔으며, 1418년(태종 18)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겸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한성부윤(漢城府尹)‧공조참판(工曹參判)‧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421년(세종 3) 4월 4일 총제(摠制)로 재직 중에 사망하여 미두(米豆) 20석이 내려졌다.
저서로 《전해고문진보지(箋解古文眞寶誌)》가 있고, 묘는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 시묘골에 있다.
강회계(姜淮季, - 1392)은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 계보(季父). 부친은 문하찬성사를 지낸 강시(姜蓍)이며, 강회백(姜淮伯)과 강회중(姜淮仲)의 아우이다. 1390년 정월에 고공좌랑(考功佐郞)으로 세자 왕석(王奭)의 시학(侍學)이 되었고, 같은 해 8월에 공양왕의 삼녀 경화궁주(敬和宮主)와 혼인하여 진원군(晉原君)에 봉해졌다. 공양왕이 폐위되자 우성범(禹成範)과 함께 회빈문(會賓門) 밖에서 참형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