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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딛고서는길(19) - 차별(3) 창세기 38장 6-11절
<차별(3) : 타인을 향한 차별> 하나님도 내 생각에 동의하실까?!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독일의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는 유태인이 운영하던 한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찾아갑니다. 기회주의자에 약삭빠른 사업수완을 가졌던 쉰들러는 전쟁의 참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을 데려다가 인건비 한 푼 들이지 않고 공장을 운영할 생각에 들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쉰들러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독일군의 야만적인 유태인 살인 행각에 쉰들러 역시 진절머리가 난 것이지요? 전쟁과 차별의 고통 속에 괴로움을 겪는 유태인들의 현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태인을 오직 돈벌이로만 생각해오던 쉰들러가 마침내 그들을 수용소에서 구해내기로 결심을 합니다. 자신의 공장에서 일을 시키겠다는 명분으로 독일군에게 돈을 주고 유태인들을 빼오기 시작한 쉰들러는 공장의 재정이 점점 어려워지자 자신의 재산까지 팔아 그들을 구하기에 이르렀고, 그렇게 1,100명이 넘는 유태인들이 쉰들러에 의해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더 많은 유태인들을 구해내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는 쉰들러에게 그의 일을 돕던 유태인 회계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곧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영화로도 잘 알려진 쉰들러리스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고 형제로 대하고 가치로 대하면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차별을 당할 때는 나도 형제요, 나도 하나님이 이름을 기억해주시는 존귀한 사람이요, 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나 역시 누군가를 향해서 형제로 대하지 못하고 존귀한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인지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가령 우리들 앞에 잘 보여야만 하는 사람과 굳이 잘 보이지 않아도 될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각각 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혹은 같은 지역 출신이라거나 같은 학교 선후배를 만나게 되면 아무래도 그러한 공통적인 분모가 없는 사람들에 비해서 더욱 친밀감을 느끼고 잘해주게 되고 애정을 쏟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각별히 애정을 쏟는다는 것은 반대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은 본의 아니게 차별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나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과 섬김의 손길에서도 점차 멀어지게 된다는 뜻도 됩니다.
보십시오. 차별은 내가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배제할 때만 차별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와 조금더 친해질 때 의도하지 않게 생겨나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네 삶에 너무 깊숙하게 들어와 있고, 익숙해져있는, “이것도 차별인가요?” 싶을만큼 문제시 되지 않고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차별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겉으로 불합리한 처우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심 차별하는 태도를 갖게 되는 것,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한계요, 현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까지 다 차별인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살려면 너무 힘들 것 같기도 하구요. 오히려 행동은 그렇지 못할지라도 마음만큼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여기며 살아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쩌면 참으로 무거운 짐이요, 폭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별로 말미암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차별을 하게 된다’는 현실적인 전제 뒤에 숨어서 우리 스스로가 누군가를 차별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정당화하는 데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니까’ ‘저 사람은 나하고 안친하니까’ ‘저 사람은 나하고 안 어울리니까’ 등등 차별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서도 허용하실까요? 하나님께서도 동의하시고 인정해주실까요? 차별당하는 자를 오늘도 감싸시고 다가가시는 그분이, 오늘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당신과 동일하게 여기시는 그분이 이런 우리의 태도와 생각을 가만히 두고 보시고만 계실까요? 아뇨, 결코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모르고 또한 악용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보응하시는 분이시라고 우리 두 시간에 걸쳐서 배운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오늘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것도 차별이냐?” 라고 말하는 우리의 생각을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그럴 수 있도록 우리 주님은 반드시 그리고 지금도 일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누군가를 거절하고 밀어내는, 아니 누군가를 더 좋아하고 챙겨내는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하면 고쳐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하길 원하실까요?
그것을 살펴보시려면, 오늘 우리가 왜 누군가를 더 좋아하고, 누군가를 밀어내게 되는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바꿔말해 우리 안에서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 하게 되는 그 차별의 근원지를 파헤쳐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조금더 분명하게 그리고 조금더 객관적으로 그 감정의 뿌리를 확인하게 된다면, 내 감정이 내 태도가 수정되어야 함을 알 수 있을텐데, 그 과정은 생략한 채 저 깊이 있는 그저 호불호의 마음이라고만 생각할 뿐이니 이 태도는 고쳐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이 차별, 호불호의 마음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피곤함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보호기제 중의 하나인 “선입견”입니다. 올해 개의 해이긴 하지만 개의 해이니 더욱 두 마리의 개를 없애야 한다고 어느 분이 그러셨습니다. 그 하나가 편견이요, 또 하나가 선입견입니다.
어떻게 보면 선입견은 오해의 범주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있겠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볼 때,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방 결정을 내립니다. 이 결정이 빠를수록, 정신적인 피로도에서 쉽게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지고 있는 기준들을 가지고 순식간에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외모로 지위로, 성별이나 나이, 출신 지역이나 학교 등, 여러 가지로 말입니다. 좀 나아가서는 말투, 억양, 그리고 상대방의 사고방식이나 정치적인 이념등을 가지고도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번만 이야기를 해보면, 아 저 사람은 친해져야할 사람, 아 저사람은 저 혼자 살게 내버려둬야할 사람이 금새 정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면서 별 것 아닌 정보들의 조합들로 우리는 어느 순간,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겠구나”라고 하는 그 사람에 대한 윤곽을 정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거의 수정불가능하게 순식간에 결정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 잠시 보고만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체 평가 보고서를 완성해서 내 마음에 제출하는 것이지요. 때로는 그 사람을 본 적도 없으면서, 누군가의 이야기만을 듣고도 보고서를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아주 짧은 시간안에 말이지요. 그리곤 벌써 다른 사람들에게 아,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예요. 라고 어느 새 내 편협하고 일방적인 보고서에 의존해서 그 사람을 이야기하고 다니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게 차별의 시작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둔 각 사람에 대한 평가보고서를 말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과연 객관적이고 정확한 것일까요? 그 사람을 최소한 10년 이상 알아오고 교제해 온 사람이 내린 보고서와 오늘 내가 내린 보고서는 그 내용이 과연 같을까요?
제가 전도사 시절 저하고 4년을 함께 한 부목사님과 선생님들은 저에 대해서 그런 평가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일년 남짓, 새로오셔서 저와 함께 하신 부목사님은 담임목사님께 보고를 올렸습니다. 슬리퍼만 신고 아이들하고 놀기만 하는 전도사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담임목사님 은퇴하시는 해에 자신만 남아 새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저와 먼저 계시던 부목사님은 다른 교회로 이임을 해야했던 것입니다.
제가 당진에 세미나를 다니는데요, 그 강사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느 분이 당신 사모님에 대해서 그분은 이런 분이고 저런 분이라고 내가 그 분을 너무 잘 안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잠깐 학교를 같이 다니고 몇 번 교제를 하신 모양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다보니 당신이 30여년 같이 살아온 당신의 아내와 전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하셨다고 그래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하고, 제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좀 많이 다르네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단편적인 이야기, 경험, 일화 들의 조합으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우리가 아는 전부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 사람과 더 오래 교제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을 평생토록 지켜오고 성장해온 가족, 그리고 그 사람을 지어 파송하여 오늘도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들의 이야기는 전부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하고 많이 다르네요!” 라고 평가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토대로 차별과 호불호의 감정을 만들어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오감을 넘어 육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직관적으로 사람들에 대한 느낌과 생각들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것을 다 틀렸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것이 참으로 나만의 주관적인 감정이요, 생각이요, 느낌일 수 있다는 것을 늘 겸손하게 인정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더더욱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근거해서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내 감정, 내 느낌, 내 보고서대로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이런 저런 판단들이 내 안에 정리되고자 할 때, 반드시 기억하고 생각을 해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내 마음에 내 스스로 제출한 이 보고서를 하나님이 보시면 흔쾌히 맞다고 도장을 찍어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너 지금 이게 누구 이야기를 쓴 거냐!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누군가에 대해서 완전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요? 아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저명한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라 한들 가능할까요? 아뇨! 저 사람들은 물론 객관화되고 통계화된 수치정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으로 들어맞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만? 오직 하나님만, 오직 예수님만, 오직 사람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보실 수 있는 우리 주님만 사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선언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고, 그래서 그분은 저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이야기를 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이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요, 이야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 자신조차 모르는 것도 다 알고 계시며 그의 심중에 비롯된 생각까지도 다 간파하시는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도 몰랐던 잠재력과 가능성을 다 알고 계시고, 그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온 그의 허점이나 단점도 약점도 우리 하나님은 다 아시는 것입니다. 왜? 그를 지으셨고, 그의 생애 단 한 순간도 잠들지 않고 그를 지켜보신 때문입니다. 그런 분 앞에서 누군가에 대해서 평가를 하고 판단을 하고 정죄를 하니까 이런 말씀을 주시지 않더냐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셨지요?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14:4)
욥기를 읽어보셨지요? 욥의 친구들이 욥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장장 33장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동원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42:7)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들 지금 누구 얘기하니? 그건 내가 아닌데?”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 두려운 말씀이지요? 우리가 평생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고백하고 평생 그분이 이러한 분이라고 알고 살았는데,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얼마나 이게 무섭고 황망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오늘 저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 그리고 좀 나이가 어리다던 그 엘리후까지 오늘 참으로 두려운 선언을 들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알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다!” “잘 안다고 하지만 욥만큼 모른다 그러니 더 이상 욥을 가르치려 하지 마라” 라고 이야기 하셨던 것입니다. 욥은요? 하나님이 얼마나 욥을 사랑하시는지요? 38장부터 41장까지, 너가 알면 뭘 아냐고 한참 혼내셨던 것이지요? 그리곤 욥도 마침내 자신의 의로움을 호소하던 욥도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42:3,6절)
보십시오. 평생을, 어려서부터 저 유대인들이 배우고 듣고 자란 하나님입니다. 평생을 예배하고 경배하고 섬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보통 유대인이 아니고, 동방의 의인, 하나님이 인정하신 의인의 지식이 무지한 말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말들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 우리가 잠시 만난 상대방에 대한 지식이 올바른 지식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내린 평가, 내가 만든 보고서가 합당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되요? 늘 겸손해야합니다.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듯,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듯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말입니다.
그러면서 보세요.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서 뭔가 하나를 알면, 그것으로 사람을 우습게 여깁니다.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흥 컨닝한 주제에, 흥 도둑질한 주제에, 흥 거짓말한 주제에, 흥 범법자인 주제에 그러면서 상종도 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그의 모든 단점과 약점을 아십니다. 그의 실수와 잘못도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를 미워하실까요? 차별하실까요? 다시는 안보실까요? 아뇨,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허물을 알고 계시기에 더욱 우리에게 다가와 주십니다. 지난 시간 살펴보셨지요? 하나님이 보고 듣고 알고 내려오셔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출3:7)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족한 저를 오히려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온 몸으로 휘감아 보호해주십니다. 물론 책망하십니다. 질책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랑에 기인한 것이지요?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구원하여 생명을 얻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결코 차별이나 배제하심이 아니신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뭘 얼마나 더 알아서,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평가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우리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경험한 무지하고 무식한 내가 내린 결론과 정보에 의존해서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대적하기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미친 듯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면서 살아온 것이지요. 계속해서 이런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유다를 다시한번 살펴보시지요. 유다는 자신의 아들이 둘씩이나 죽는 경험을 하자, 그 짧은 지식으로 평가를 내리고 보고서 작성을 마쳤던 것입니다. 다말이 문제다! 다말을 내보내자!
큰 아들도 작은 아들도 다말과 만나 죽고 마니 좋은 시선,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유다에게 생겨난 이 선입견은 다말을 가문에서 내치는 차별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다말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 오늘 그녀를 통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엘과 오난이 아니라, 다말이 대체불가능한 여인인 것을 아셨던 하나님이시기에 다말을 더 지켜주셨습니다. 다말이 겪은 모든 억울한 처우를 품어주셨던 것입니다.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경험한 며느리 다말은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 다말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 다말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유다가 진정으로 사랑으로 한 번만 물었더라면, 유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부끄러운 시아버지로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시각각 수많은 판단이 결정이 우리 안에서 내려집니다. 특별히 사람에 대한 판단이 내려지게 될 때, 우리는 늘 하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우리네 인생의 부족한 지각을 염두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저 사람이 저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한번더 그 입장을 헤야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순서를 생략합니다. 그러면서 곧이 곧대로 오늘 지금 당장 그 사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생각을 하고 평가를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차별이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그릇된 호불호가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스스로 내 보고서에 도장을 찍고 나면, 수정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어느 누가 이야기해도 굳게 자리잡아버린 선입견은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만 진리인 까닭입니다.
이제 우리도 더욱 하나님을 떠올리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저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고, 저 사람을 돌보고 계시고, 저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지 않고 계심을 안다면, 우리는 상대방을 차별하고 제외시키려고 하다가도 그 행동을 멈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부족한 부분을 품어 주고 계신 이상,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복된 존재가 될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의 모든 만남들을 새롭게 해나가다 보면, 이제는 내가 경험한 그의 생애 극히 일부분의 경우들을 가지고 그의 인생 전체를 싸잡아 평가하는, 그렇게 배척하고 정죄하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자구요.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한 가지 모습만을 보고 우리를 평가해버리신다면, 특히 내가 화가 나고 속상해서 잘못된 말과 행동을 했을 때, 딱 그때만 보시곤, 그렇게 너는 그냥 볼 것도 없이 지옥!! 해버리신다면 얼마나 속상할까요?
여러분, 그런 경험 없으십니까? 하루 종일 화장실도 못가고 일하다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곧 있을 승진 발표, 그 인사 담당자가 내 사무실을 둘러보고 가는 것입니다. 며칠 동안 야근하고 업무처리에 정신없어서 책상도 못 치우고 쓰레기통도 못 버리고 있을 때, 사장님이 오셔서 우리 김대리 책상만 왜 이리 지저분해! 라고 말씀하시면 얼마나 억울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왜 상대방의 바로 그 한 순간을 가지고 전부를 평가하는 것일까요? 아뇨, 우리가 수십 번, 수백 번, 그 사람을 만나고 교제했다고 합시다. 그렇다한들, 그 시간이 그의 생애 전체를 놓고 보면 몇 시간이나 되겠습니까?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정말 그와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직장인들이 이야기 합니다. 남편보다 아내보다 내가 저 사람하고 더 오래 일하고 더 오래 근무했다고, 그렇게 우리는 동지고, 동료라고 식구나 다름없다고. 그러나 그렇다한들,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단언하여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늘 내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본 때문입니다.
아뇨, 우리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완성체라고 이야기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인생 전부를 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시면서 지금도 우리를 빚어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부족함을 친히 담당하시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오늘 나만이 아니라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를 그렇게 당신의 사랑과 섭리속에 완성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오늘도 저 영혼을 귀히여기고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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