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배우 남궁원 ◈
최불암은 1992년 정주영이 이끄는
통일국민당 비례대표 의원이 됐지만
인기 드라마 ‘전원일기’에 계속 출연했어요
당시에는 규제가 없었지요
이후 서울 영등포에서 지역구 후보로 재선에 도전했으나
서른 갓 넘긴 김민석에게 밀려 낙선했어요
선거운동 때 김민석은
“국회의원 김민석과 연기자 최불암을 동시에 살리자”
“최불암은 무대로, 김민석은 국회로”를 외쳤지요
훗날 최불암은 “그 선거구호 때문에 졌다”면서
“맞긴 맞는 얘기잖아”라고 했어요
경기 구리에서 당선된 코미디언 이주일은 회고록을 남겼지요
“그들은 나를 국회의원이 아니라
여전히 행사나 빛낼 코미디언으로 대했다”면서 “참기 힘들었다”고 했어요
그는 후배 이덕화가 경기 광명에 출마했을 때 충고했지요
“연예인 티 내지 마. 입술 부르트고 눈도 충혈돼야 동정표 받아.”
그런데 “이덕화가 말을 안 듣고 가발에 무스 바르고
셔츠에 칼주름 잡더니 떨어졌다”고 했어요
“사람들은 후보에게 못난 구석이 있어야 찍는다”고 했지요
본인의 깨달음 같았어요
연기자 출신만 열서넛이 금배지를 달았지요
70년대 유명 드라마 ‘데릴사위’의 스타였던 홍성우가
서울 도봉에서 3선을 했어요
‘연예인 1호’ 국회의원이었지요
그 뒤로 최무룡 신영균 이주일 이대엽 이낙훈 이순재 최불암
강부자 신성일 정한용 최종원 등을 떠올릴 수 있어요
20대 국회의 ‘유일한 배우 출신’이라는 오신환은 무대 경력이 짧아요
‘장군의 손녀’ 김을동은 서울 송파에서 3선에 도전하다 고배를 마셨지요
그때 맥이 끊긴 셈이지요
지난 8일 배우 남궁원의 영결식이 있었어요
서구적 외모로 한국의 '그레고리 펙'으로 불렸던
영화배우 남궁원(본명 홍경일)이 5일 작고했지요
향년 90세. 유족은 그가 수년 전부터 폐암으로 투병을 하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전했어요
1934년 경기 양평에서 태어난 그는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다니다
영화계에 입문했지요
당초 연예인에 뜻이 없었던 그는 해외 유학을 준비하다
어머니가 몸이 아파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영화 쪽에 발을 들인 것으로 전해졌어요
고인은 1959년 영화 '그 밤이 다시 오면'으로 스크린에 데뷔했으며
이후 1999년 마지막 작품으로 기억되는 '애'까지 배우로서
출연한 영화가 345편에 달했지요
주요 작품으로는 '자매의 화원'(1959), '빨간 마후라'(1964)
'내시'(1968), '화녀'(1971), '아이러브 마마'(1975), '피막'(1980),
'가슴달린 남자'(1993) 등이 있어요
고인은 1960∼70년대 청룡영화상 인기남우상, 대종상 남우주연상 등을
받았고, 2016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으며,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지요
영결식날 아들 홍정욱이 추모사를 했어요
‘선거철이면 출마 종용을 받으셨을 텐데 왜 응하지 않았느냐’고
아버지께 여쭌 적이 있다고 했지요
“아버지께선 ‘내가 국회의원을 열 번을 해도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배우로 기억할 것이다.
한번 배우는 영원한 배우다’라고 답하셨다”고 했어요
“동료들로부터 존경받는 영화배우, 자식과 아내의 사랑을 받는 가장”,
사실 이보다 값진 ‘인생 훈장’은 없을 것이지요
과거 연예인이 권력층의 강권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면
갖가지 ‘이벤트’에 활용당하다 끝이 안 좋았어요
몇몇은 뇌물죄로 징역을 살기도 했지요
이덕화 김형곤 문성근은 첫 도전에 실패한 뒤 꿈을 접었어요
요즘엔 영입 후보로 거론되는 연예인들이 제안을 고사하지요
차인표는 “오로지 연기자로서 전념하고 싶다”고 했어요
남궁원은 오래전 이런 변화를 내다본 것일까요?
남궁원이란 이름은 앞으로도 영원히 배우로 기억되게 됐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언제나 변함없는 조동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