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변화에 따라 사라져 가던 제주마는 이제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으며 관광 상품으로 변신했다.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문득 떠오른다.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말을 사육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고려 충렬왕 3년, 몽골이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목마장을 설치하고 목호를 파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때 몽고의 양마기술도 도입된 것이다.
목호들에 의해 운영되던 목마장은 조선 시대에는 좀더 체계화 된 10개의 국영목장으로 운영됐다. 제주마가 군마·산마·교통마뿐만 아니라, 어마·가교마·역마·파발마 등으로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제주목사가 말을 점검하는 게 주요 업무가 된 것도 그때부터이다.
체구가 작고 날렵한 제주마는 기후와 풍토에 적응력이 강해 말발굽이 견고하고, 병마에 쉬이 걸리지 않아 연중 방목이 가능하다. 달릴 때도 상하 진동이 별로 없고 매끄러워 승마가 편하다. 이런 특징으로 조선시대 한양으로 진상된 제주마는 조정 관원과 양반들의 전유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와 권위의 상징이 됐다.
제주마가 빛을 보게 된 것은 뉘 덕인가.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의 덕이다. 그는 1550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말을 좋아했다. 어른이 된 후에는 한 마리의 말로 시작해 일만 마리의 대목장을 일궜다. 말이 국력임을 일찍이 간파한 그는 종마 개량에도 진력했다. 전마·산마의 대량 번식은 물론, 젊은 청년들을 모아 기마훈련을 시키면서 좋은 말로 키워, 수많은 양마를 소유한 입지전적의 인물이 됐다.
선조 27년에는 임진왜란으로 국영 목장이 폐허가 돼 조정에서는 군마를 확보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때 44세의 김만일은 양마 500필을 조정에 헌마해 군비 증강에 공을 세운다. 그뿐인가. 광해군과 인조 때에도 정부의 요청에 따라 계속 말을 제공했다. 이런 공로를 높이 사 종1품 ‘숭정대부’를 제수 받는다. 이는 역대 제주인으로는 가장 높은 벼슬이다. 가문의 영광이요, 제주의 영광이었다.
김만일은 1632년에 세상을 떠났다. 38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를 재조명하는 심포지엄이 지난 11월 23일 사단법인 제주마생산자협회와 헌마공신 김만일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열었다.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소설가 권무일은 김만일의 삶을 소설로 엮었다. 그는 “김만일이 준마의 씨를 보존하고 개량해 국난에 대비한 헌신과 우국충정은 말과 전쟁의 역사, 한국의 역사와 세계사에 기록돼야 할 쾌거다”라고 평가했다.
제주마 목장을 찾은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김만일을 만날 수 없어 허허로웠다. 이는 나만의 생각일까.제주도가 마 산업을 일으키고 관광과 연계하려 한다면 모름지기 마 문화를 창출할 일이다. 제주마의 역사를 펼쳐 보이고, 제주의 마조(馬祖) 김만일을 높이 선양해야 할 것이다.
김만일 기념관을 지어야 한다. 김만일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 당국은 제주를 말의 고장이라고 자랑하면서도 기본을 다지는 일에 소홀히 하는 듯싶다. 마 문화의 창조적 재현은 관광객 2000만 시대를 여는 지렛대가 될 것이다. 제주마 목장에는 가을 햇살이 김만일의 미소인양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첫댓글 말(馬)의 역사를 알게 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꾸뻑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