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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효문(54. 호남대 국문과교수)씨는 1970~80년대 이 지역 여류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생의 체험적 영상을 조형화하는 이미지의 긴장과 그 응집력이 하나의 특징이다. 그의 시는 현재 범람하고 있는 여류시의 나긋나긋한 정감의 세계를 벗어나 견고한 언어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 그의 내면적 싸움의 흔적은 시의 한 장면, 장면마다 상상력의 조형화로 묘사된다.
예리하고 선명한 직관적인 이미지의 조형력은 국효문 시인의 시적 감수성과 직결돼 있는데, 한 편의 시 작품을 은유적 인식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그의 언어감각은 대상을 향한 신선한 교감의 감수성에서 뛰어나게 발휘된다.
첫시집 ‘홍적기의 새’(79)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여성적인 순수서정의 미학에서 출발해 건강한 남성적 노동과 생명력의 추구를 거쳐, 그 양극적 세계의 지양으로 모색된 이미지의 조형화를 보여준다. 두 번째 시집 ‘님이시여’(88)에서는 그러한 정신적 탐험의 한 귀착점으로 돌아오면서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의 세계, 불교적 윤회관과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성찰로 자리잡게 된다.
그는 첫시집에서 ‘휴일이야기’‘회전그네를 타는 아이들’에서 선명하고 직정적인 이미지의 형상력에 의한 생의 충격적인 체험을, ‘起工’‘도시의 탄생’‘試錐’ 등에서는 강건하고 견고한 현실감각과 노동의 찬미를, 그의 초기 시편인 ‘선물’‘수예’‘첼로’ 등에서는 섬세한 감성과 화사한 언어의 무늬를 수놓는 서정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시집에 와서는 ‘그리움’‘종소리’ 등이 서정시편에서 삶의 내면적 깊이를 구상화 하면서 고독한 정신의 구원을 찾는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내고, 연작시 ‘계백이야기’나 ‘예하리’에서는 우리 시대의 어두운 상황을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해야 하는가를 탐구하는 보다 적극적인 이야기들에 심취하고 있다.
“이 길은 혼자 가는 길/끝없는 돌계단을 오를 때에도/꽃 한 송이/풀 한 포기 함께 할 수 없어/갈증을 적시지 못하는 길/찬 돌계단에 얼굴을 부비며/다만 신열을 잠시 식히며 가는 길//그러나,/화사한 꿈의 길/몇만 생애 동안 품을 수 있는 달빛 둘레로/날이면 날마다/부풀린 가슴 풀어헤치고/복사꽃 꿈길을 펴 놓으니//더 큰 기쁨과/더 큰 슬픔을/다 펼쳐놓은 다음/마알갛게 다시 고이는 물/눈에 가득 담고/이 길은 혼자/혼자 가는 길”(‘그리움’전문)
이 작품은 그가 고독한 구도자의 모습을 아름다운 나르시스즘의 톤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쓰는 작업의 고독함과 삶이 갈증을 몸으로 느끼면서 찬 돌계단에 얼굴을 비벼 신열을 식히는 시인의 자세가 조용한 자기연민의 자세를 담고 있다. 그렇게 혼자가는 길에서 찾고 헤매는 자기확인의 작업을 시인은 차라리 화사한 꿈의 길이라고 노래할 때 맑고 순수한 정신의 정화상태를 지니고 있음을 본다.
“내 안에서는/비릿한 꽃이었읍니다.//내 안에서는/언제나 아기였읍니다./내 안에서는/의연한 연인이었읍니다.//내 안에서는/검은 흙의 조국이었읍니다.//내 안에서는/무량한 우주였습니다.//님이시여/님이시여//빛의 기둥이 되어 빛이 되게 하시는/맑은 빗살이시여/말로는 다 못할 눈부심이여//내 안에서는/억겁을 잠들었다가 억겁을 깨어나 계시는/뼈저린 진실이었읍니다.//아아, 님이시여/크신 님이시여”(‘님이시여-계백의 이야기․1’전문)
15편의 연작시로 돼 있는 ‘계백이야기’는 서사적 골격을 지니면서 역사적 사건을 오늘의 우리 상황에 이어주는 일관된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계백이라는 백제의 장군을 백제의 영웅 내지는 전라도만의 영웅으로 미화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백제와 신라의 전쟁을 통해 아프게 드러나는 우리 역사의 상흔을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하나의 민족사에 융합돼야할 당위성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 계백은 시인 자신의 내면의 님이시며, 보다 넓은 사랑과 화해를 위해 나아가야할 우리의 정신적 자세를 형상화하고 있다.
“어찌하여 그토록 서러운 빛으로 서 있는가/숲 속 나무에 그윽히 기대어 있기도 하고/좁고 어두운 골목이나/저자거리의 소음 속에서도/황황히 타오르는 주황빛 자비로움으로/무엇을 비추고자 서 있는 것인가/몇굽이 돌고 돌아/암벽을 오르고 또 오르다가/부르터진 손으로/빈 가슴만 후비고 돌아서는/겹겹의 이 절망을/밝혀주기 위하여 먼길을 달려왔는가/어찌하여 그토록 서러운 빛으로 타오르고 있는가/모든 탑들이/세워지기 위하여 세워졌듯이/모든 무너짐은/그 무너짐이 가장 철저히 무너질 수 있을 때/아름다운 빛으로 겹겹의 절망을/일으킬 수 있다면/정말로 우리는 그 빛 앞에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정말로 우리는 그 빛 앞에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연등 앞에서’전문)
이 시에서는 국효문의 정신세계가 중년을 바라보는 생의 성숙성과 진지한 자아탐구의 구도적 자세에 깊이 침잠돼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황호아히 타오르는 주황빛 자비로움으로 서러운 빛을 발하며 서 있는 연등에서 세상의 모든 무너짐이 가장 철저히 무너질 때 비로소 완전한 절망의 극복이 가능하리라는 종교적 명제의 깨달음은 이 시인이 도달한 세계인식의 한 정점으로 보인다. 이 불교적 인생관의 자각은 그의 작품 많은 부분에 은연중 배어있는 화해의 정신 내지는 현상초극의 의지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영혼의 구원을 찾아 기도하는 자아확인의 참모습이며 삶의 내면을 정화시키면서 현상계로부터의 건져 올려짐을 희원하는 정신의 표상이기도 하다.
“어찌하여 이런 거대한 힘 앞에/서게 되었는가/작은 가슴으로는 받아낼 수 없는/엄청난 물결이/밑도 끝도없이 살속으로 파고 들어와/예리한 잎사귀로 반짝이고/뼛속 깊숙이 잠자는/영혼의 눈보라를 휘젓고 있다./날이면 날마다 나를 뒤흔드는/차가운 혼돈이여/이렇게 세찬 몸부림은/저 빙하의 대륙을 가로질러/황급히 내달리며/한 획으로 꿈틀거리는 산맥을/한꺼번에 무너뜨리고/더 먼 남쪽까지 내려와서/해일처럼 곤두박질치고 있구나.”(‘바람-예하리․1’전문)
여기의 작품 ‘예하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일반적인 고향이야기가 아니다. 어릴 때 뛰어놀던 그런 고향보다는 현대사의 한편에 남아있는 광주의 이야기다. 바람이라는 가장 가깝고 쉬운 소재를 이용하면서도 광주의 이야기를 가장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뼛속 깊숙이 잠자는 영혼의 눈보라를 휘젓고 있는 그날의 의미와, 산맥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남쪽까지 내려와 해일처럼 곤두박질치는 억압의 사슬과 아픔들을 국효문시인은 아주 쉽고도 가슴에 닿는 서정으로 풀어내고 있다.
“(전략)아직은 아가인 아들아/고향은 물 속에 잠겨 있고/길도 막혔다는데/이렇게 앉아서/가늘게 가늘게 숨쉬기만 할 뿐이다./할아버지 댁은 담장이 무너지지 않았는지/고향땅은 어둡게 먼데/TV는 뉴스도 없이/종일 노래가락만 흥겹게 들려오고 있다./네가 크면 아들아/물살이 거센 홍수에/고향은 산까지 넘치고/엄마는 박 속처럼 긁힌 피빗 가슴을/네 가슴에 가만히 맞대고만 있었다고/옛날 옛날에/그런 날이 있었다고/들려줄 수 있는 날이 오려는지/그때쯤은 핏물이 말게 가라앉아 있을른지(후략)”(‘옛날 옛날에-아들에게 주는 시’중에서)
80년 5월 광주를 떠나있었던 시인이 광주에 두고온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생활의 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었지만 5월을 몸소 겪지 못하면서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대로 일련이 역사적 사건과 현실적 상황을 우리시대의 아픔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광주가 물 속에 잠겨 있고, 길이 막히는 상황에서도 시인은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긍정적 자세를 찾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할아버지 댁에 두고온 아들이 잘 있는지, 옛날 옛날에 그런 일이 광주서 벌어졌노라고 들려줄 수 있는 날을 시인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빈 터에는 죽은 꿈만이 휴지처럼 쌓이고/탑 둘레를 돌며 춤추는 나비여/싼 賃金, 나쁜 노동조건 속에/스스로의 손금을 털고/햇빛과 바람의 交織에 파묻힌다./또 하나의 設計를 풀어낸다./벽돌에 그려진/이슬 젖은 날개가 파닥인다./바람의 빈 껍질이 쓰러져 있는 공사장의 빈 터/햇빛은 지푸라기를 밟고 뛰어다니고/꽃불처럼 따가운 사랑에 눈 떠/치자빛 저고리를 받혀 입은 舞姬./청사진에 담긴 他意의 설계라 하더라도/철근이 숲처럼 들어선 공사장에/날개를 접고/홋적삼인 채 시선을 떨며/손이 부르트도록 일하고/발 아래 깔린 가난과 풍요의/절대치를 굽어 보면서/본능만이 잡초처럼 우거진 일상과 싸운다.(후략)”(‘起工’중에서)
이 시는 그의 초기 작품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상한 작품이다. 시인은 대학 1학년때 서울 수유리의 개발현장에서 보았던 것을 소재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시멘트 벽돌과 기와를 만드는 공장에서 잡역부로 일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면서 썼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현장을 오늘날과 같은 각박한 사회구조의 모순적, 노사분규, 임금투쟁, 노동3권의 보장을 부르짖으며 고착화되고 도식화돼가는 노동시와는 다르다. 노동현장도 그는 신화적인 변증법과 잠언적인 모티브에서 시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강건하고 견고한 현실감과 노동의 찬미를 체험적 영상으로 조형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시는 구원의 빛이며 본체를 담는 그릇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마음에 맞는 한 편의 시와 만나기 위해 진실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아름다움이나 고통을 바치더라도 맑고 고귀한 세계와 만나려고 노력하겠다는 그의 바람은 변함이 없다.
시대에 대한 끊임없는 목마름과 역사의 무수한 언덕을 넘어 마침내 참된 빛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다면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다 소진된다 하더라도 이 길을 가겠다고 말한다. 이 길을 갈적에 함께 마주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욱 큰 기쁨이 되리라 생각하며, 어떤 고행의 길이 되더라도 이 길을 계속 가고 싶다고 한다.
학창시절 문예반 활동하며 문학적 소질 키워
이성교, 허영자 시인 만나 본격 문학수업
국효문 시인은 1949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했다. 광주 학강초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그는 장래희망을 물을 때면 문학가가 되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한 그의 소원은 어릴적 꿈치고는 소박하지만 가장 크고 고귀한 꿈을 지닌셈이 됐다. 그때부터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백일장이나 공모전 같은 것이 있을때면 빠짐없이 반대표로 나가 입상을 하곤 했다.
어렸을 때의 문학수업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엔 동화책이나 동시집이 아주 귀할 때여서 외적인 문학수업을 받기 힘들었으나 어머니가 일본서 전문학교를 나오신 분이라 일본 동요나 동시 등을 어머니가 노트에 번역해 주면 그는 그것을 읽고 모방해 보면서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전남여중에 입학해서도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여고에 근무하던 주기운, 이재현 선생을 만났으며, 고교에 들어와서는 윤삼하, 안영 선생의 지도로 문예반 활동을 열심히 했다.
본격적인 문학의 길을 선택한 것은 고교졸업후 성신여대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부터다. 그 곳에서 시인인 이성교, 허영자 교수로부터 체계적인 시창작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대학 3학년 봄 ‘전국대학예술축전’에서 시 ‘수예’가 금상을 수상하면서 문학과 대학생활에 대한 활기를 얻으며 자신감까지 얻게 된다.
그후 7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기공’이 입선되면서 그가 꿈꾸며 기대하면 시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때 심사위원이었던 박남수 시인과 인연이 돼 2주마다 한 번씩 그 분의 댁으로 시를 사사 받으러 가는 열정을 보였다. 그러다 74년 월간 시전문지인 ‘현대시학’에 박남수 시인의 3회 추천을 받아 완전한 등단을 하게 된다.
대학에서의 이성교, 허영자 시인, 그리고 문단의 등단의 지도를 해준 박남수 시인과의 인연은 그가 본격적으로 시공부를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에게 시를 바라보게 해준 스승인 셈이다.
대학졸업후 광주에서 한때 여고 교사를 보내기도 했으며, 광주의 대표적 시동인회인 ‘목요시’활동을 활발히 했다.
87년 번역시집 ‘바람’을 출간했으며, 그해 제7회 한중작가상과 88년 제1회 광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논문으로 김현승 시 연구, 노천명 시의 의미구조, 한국현대 여류시인 연구, 신석정 시 연구, 타고르와 서정시의 비교문학적 고찰 등이 있다.
현재 광주여류문학, 기픈시 문학회, 원탁시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호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글 ; 이재창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