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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완계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沙月
넷째 날 오늘은 비교적 쉬운, 아니 쉽다기보다는 육체적으로 덜 힘든 코스였다. 용경협과 이화원이 주코스였고 슈쉐이(秀水) 짝퉁시장은 이번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줄 보조코스가 될 터였다. 출발이 7시 반이었고 모닝콜도 30분 늦게 울렸지만 언제나처럼 모닝콜이 울리기 전에 일어났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평상시처럼 용진을 더 재우고 늦게 내려갔다. 용진이 아침을 제대로 먹지 않는 것도 평상시와 별 다름이 없었다.
호텔 객실(1917)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용경협(龍慶峽)으로 갔다. 가는 길에 거용관이랑 팔달령 장성이 보여 사람들이 한동안 또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용경협 가는 길은 약 80km 정도 되었는데 팔달령 장성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갔다. 역시 북경시에 속한 행정구역이었으나 거의 시골이나 다름 없었다. 이곳은 복숭아 등 과일이 많이 나는 곳인 듯 길가에 노점을 펴놓고 과일을 파는 곳이 많았다. 그리고 꿀을 채취해서 파는 곳도 더러 보였고. 이곳의 교통수단은 오토바이 뒤에 적재함을 달아 담요를 깔아놓은 것인 듯하였다. 이것은 비교적 고급이었고 자전거 뒤에 매단 것도 있었다. 하여간 옛 고향에 온 듯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중국하면 떠오르는 것이 북경 같은 대도시보다는 시골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 아닐까?
용경협 가는 길에 보인 이곳의 가장 중요한 탈것. 우리의 택시에 다름없었다.
용경협에 도착하였다. 새형님은 어제 호스트로서 술접대를 하느라 얼굴이 완전 갔다. 오전 중에는 거의 굴신을 못할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게 사람은 항상 펑정심을 유지해야 하는가보다. 이곳은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 양 곳곳에 한글 안내문이 보였다. 그러나 틀린 철자법에 문장이 정상적으로 끝나지도 않은 것이 있는 등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 많았다. 용경협은 댐이다. 북쪽에는 이런 물이 좋은 산수가 없어서였을까? 자기네들끼리 산수 좋은 계림을 끌어다 소계림이라 부르고 있었다. 용경협으로 올라가는 곳은 거대한 용을 형상화한 통로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놓았다. 그리고 배를 타는 곳이 나오는데 그 위로 또 찻잔을 공중에 달아놓은 듯한 삭도가 운행되고 있었다. 배를 타고 좀 가다 공중을 보니 번지 점프도 하고, 공중 오토바이 묘기에, 외줄타기 등 놀이시설이 많았다. 자연 풍광에는 병풍바위니 코끼리 바위니 각종 이름을 갖다 붙였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인간의 흔적인 쟝쩌민(江澤民)이 썼다는 용경협이라는 붉은 글씨가 더 눈에 들어왔고, 하얼빈과 더불어 유명한 겨울의 빙등축제(氷燈祝祭: 얼음축제라고 함)가 더 생각이 났다. 거의 만원의 승객을 태우고 갔지만 중간에 다른 시설을 이용할 요량인지 중국인 일행이 모두 내려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 일행만이 남게 되었다.
용경협 올라가는 길. 다리 끄트머리에 있는 입 벌린 용머리로 올라가면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내려올 때는 없어서 세련누나가 고생을 많이 했다. 덕분에 봅슬레이를 타는 경혐도 했지만...
이름값을 하려는지 곳곳에 용 조형물이 많이 눈에 띄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세련누나가 발이 아파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제일 나중에 내려온 탓에 4남매가 모두 봅슬레이를 이용해서 내려온 것이었다. 얼음이 아니니 봅슬레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그거야 아무려면 어떨까? 앞의 사람들은 겁이 많아서, 뒤의 사람들은 타면서 사진을 찍느라 제대로 속도 한번 못 내봤다. 속도를 냈으면 재미가 있었을 법한 놀이였는데. 그동안 더위로 고생을 해서인지 큰형님께서 이곳에 이번 코스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큰형님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물으니 용진도 용경협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혹 다음 여행을 기획할 때라도 이런 곳은 한 군데쯤 꼭 넣어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용경협을 둘러보기 위해 이용한 배
수십 미터 상공에서 공중 오토바이 묘기를 보이는 모습
용경협에서 의외로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점심은 원래 창평이란 곳에서 오리구이를 먹기로 했는데 취소하고 또 여우이상띠엔으로 갔다. 이장휘 선생 말이 창평에서는 이름값 때문에 지나치게 비싼 취엔쥐더보다 훨씬 싼 가격에 더 맛있는 오리구이를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급변경되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이 여우이상띠엔은 국영이지만 주인이 북경 제일의 주먹이라고 한다. 해서 CCTV를 설치해놓고 이곳에 안 들르는 차가 있으면 그 여행업체는 북경에서는 살아남기 힘들게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북경에 3번 왔는데 3번 모두 들르게 된 것이다. 정말 말로만 사회주의국가이지 여느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북경 쪽을 올 때마다 들르게 되는 여우이상띠엔(友誼商店)
여우이 상띠엔은 칠보공예품으로 유명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칠보 공작의 모습.
이곳에서는 한국 사람이 제법 많은 듯 세련누나가 울산의 학부형도 만나고 곳곳에서 한국어도 들리곤 하였다. 오후에 첫 코스로 들른 곳은 이화원이었다. 역시 세 번째 오다보니 별 감흥이 일지 않는 곳이었지만 처음 오는 사람도 많이 있으므로 나름 의의가 있을 것이었다. 가이드도 이곳에서는 별다른 설명도 해주지 않고 그저 장랑주위에서 좀 머물다가 다른 쪽으로 안내를 해주는데 지난 겨울에 왔을 때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람 구경을 하러 온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장랑을 지나서는 사람들이 비교적 적은 코스로 안내를 한다. 출구쪽에서 집결지에 제때 모이지 못한 사람이 있어서 잠시 기다리기는 했지만 무사히 잘 나왔다.
여름의 이화원은 항주의 서호를 연상케 한다
이화원도 어언 세 번째이다. 노불야(老佛爺: 부처)로 불리기를 좋아했다는 서태후가 해군의 군자금 30만량을 빼돌려 조성한 곳인데 이 정도의 자금은 성수기 며칠이면 빼고도 남을 듯 싶었다.
6개 1000원 하는 옥수수를 세 봉지나 사서 차에 올랐다. 중국을 다니면서 느낀 그 많던 옥수수에 대한 궁긍즘이 약 0.01% 정도는 해소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옥수수는 찰옥수수도 아니고 별 맛이 없어서 인기가 없었다. 내가 한 두 개 쯤 먹었을까? 나중에 출출해지면 혹 먹을까 싶어서 호텔 객실까지 들고 갔지만 결국 버리고 말았다.
옛 건물군의 위치만 알려주는 안내판
원명원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검은 거위들. 인간의 역사를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코스는 원명원(圓明園)이었다. 북경의 어느 코스인들 청말의 굴욕적인 역사의 현장이 아닐까만 이곳은 그야말로 굴욕의 현장이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당시 영불연합군에 의해 파괴되고 약탈되고 불태워진 곳이다. 사고전서의 북사각 가운데 하나인 문원각이 이때 파괴되고 프랑스로 일부가 유출되었다. 우리나라가 병인양요 때 강화도의 서고가 약탈당하여 외규장각도서가 파리의 루부르박물관에 있는 것처럼. 이 정도로 끝났으면 그래도 다행이었을 텐데 그 여파가 엄청나서 함풍제는 피서산장으로 피난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그 뒤 정권은 사실상 서태후에게 넘어가서 40년 이상을 중국을 폐쇄적인 국가로 만들어 근대세계에서 도태되게 만들고 말았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서양식 건축물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옛날의 영화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입구에 파괴되기 전의 건물 배치도가 있었고, 내부에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가 있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다만 자연으로 돌아가 이곳의 명물이 된 검은 거위가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고, 이런 인간의 영욕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가들에게 포즈를 취해주고 있었다. 또한 야생 고양이들이 많아 역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고, 옛 건축군이 있던 곳을 가리키는 표지판만이 남아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복원된 곳도 있다 하고 덜 파괴되어 볼만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입장료 90원(18000원, 이곳은 25원)을 더 내고 관람을 해야 한다고 한다. 바로 전에 들렀던 곳이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화원이어서였을까 일행들은 오히려 이곳을 좋아하였다. 단지 사람이 적고 호젓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명원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서양식 건축물. 그러나 옛 건물배치도를 봐도 미니어처를 봐도 옛 건물들의 위치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였다.
원명원의 옛 모습을 미니어처로 재현한 모습
다음은 이번 여행 중 유일한 쇼핑코스인 짝퉁상품을 파는 슈쉐이(秀水)백화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소 들뜬 듯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지난 겨울에는 홍챠오(紅橋) 시장으로 데려갔는데 그때도 당시 가이드가 그곳과 어떤 협약을 맺어 그곳으로 데려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가이드 말이 북경에는 현재 짝퉁 시장이 세 군데 있는데 슈쉐이가 가장 최근에 지어진 최신식이라고 한다. 여행가이드북을 살펴봐도 거의 슈쉐이만 소개되어 있다. 이곳은 북경 LG 쌍둥이 빌딩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북경에서 제일 높다는 건물이 지척에 보였다. 자유시간을 1시간 반쯤 줬는데 나는 용진 및 민지네와 다녔다. 큰형님네는 전에 한번 경험이 있었고 세련누나는 알아서 잘 할 터였다. 민지는 3200원을 부르는 가방을 250(50000)원에 샀다. 그리고 용진이 책가방이 떨어져 키플링 짝퉁을 하나 샀다. 가격은 80원. 나는 겨울에 집에서 실내복으로 입을 만한 중국 전통 복장을 하나 샀다. 700원에서 시작하여 100원에 샀다. 대체로 이곳에서의 쇼핑이 즐겁고 재미가 있었지만 불쾌한 일도 있었다. 잡화점에 가서 조그만 모형 정(鼎)을 하나 사려고 했는데 가격 흥정을 하던 도중 가방에 걸려 접시 등의 모형이 있는 조그만 다기 세트를 깨뜨렸던 것이다. 그랬더니 점원들이 득달 같이 달려들어 하나는 변상, 하나는 사는 가격으로 110원을 지불해야 했다. 50원까지 깎아놓았던 정에 60원을 더 지불한 셈이었다. 디스플레이를 튀어나오게 한 잘못도 있었지만 내가 깨뜨렸으니 할 말이 없었다. 노스페이스 라운드 티가 있으면 온가족이 단체복으로 입을 수 있을 것 같아 찾았지만 없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이곳에는 한국 사람보다 다른 외국인들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사람들도 내가 보기에 러시아 등 북구 쪽이나 아랍권 사람들까지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재미있는 곳이다. 버스에 올랐더니 사람들이 제각기 제가 산 물건을 서로보여주기도 하고 한번 보자고도 하며, 자랑도 하고 바가지를 썼다고도 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다음에 코스를 짜더라도 역시 이런 곳을 한군데 정도는 반드시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북경 여행객의 필수 여행 코스가 되어버린 슈쉐이가(秀水街)
슈쉐이가는 아마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일 것이다
마지막 저녁을 먹은 곳은 따야리카오야띠엔(大鴨梨烤鴨店)이라는 곳이었다. 벌써 몇 번째 중국음식인지 별 다른 기억은 없었고 다만 용진이가 드디어 이곳에서는 아예 젓가락도 한번 들지 않았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용진에게 알아서 쓰라고 준 80원을 여기서 계산기 겸 필기구를 사느라 썼다는 점.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한 식당
마지막 밤은 용진 때문에 속이 상해서 그다지 즐겁게 넘어가지 않았다. 사람들에 따라서 발맛사지도 하고, 또 까르푸(加樂福)에 가서 친구친지들에게 선물도 사러가고 하였다. 그러나 한 숟가락도 안 먹은 용진을 두고 가기도 그렇고 또 노력을 해서 먹기 싫더라도 억지로라도 좀 먹었으면 하는 바램에 용진을 좀 꾸지람하기도 하느라 다름 사람들과 시간을 못 맞췄던 것이다. 덕분에 잠은 일찍 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