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아버지
인생의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
미국 라이트주립대학교 음대 차인홍 교수
취재 글 김문영(편집부) 사진 김기현
한국 장애인 최초로 8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오하이오 라이트주립대학 음대 교수로 발탁된 차인홍 교수. 그의 입지전적인 이야기가 KBS1 TV 「글로벌 성공시대」의 전파를 타면서 많은 시청자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지난해엔 「휠체어는 나의 날개」를 발간하여 희망 없는 인생에 날개를 달아준 사랑이 무엇인지 고백했다. 그에게 아내 조성은 씨는 장애에 갇힌 마음을 풀어주며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일깨워준 가슴 벅찬 메시지다. 시련 가운데도 점점 나아지는 삶이 놀라워 감사의 노래를 멈출 수 없다는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프롤로그
무대 위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기를 조율하고 있다. 관객은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에 숨소리를 죽이고 지휘자의 등장을 기다린다. 일반 지휘 단상에 비해 높고 가파른 단상으로 시선이 모이자, 휠체어를 탄 지휘자가 순식간에 바람을 가르며 그 위로 오른다. 라이트주립대학의 바이올린 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차인홍 교수(55세)의 민첩한 기술이 선보이는 순간이다.
그는 두 살 때 소아마비로 걸을 수 없게 되었고, 궁핍한 형편 때문에 아홉 살에 홀로 재활원에 보내져 성장기를 보내야했다. 스물넷이 될 때까지도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사무치게 외롭고 초라했던 그의 삶에 한 가닥 희망조차 희박한 듯 했다. 하지만 시련과 고통이 바싹 조여 올 때마다 그를 잡아준 뜨거운 손길들은 꿈꿔도 괜찮다고, 희망이 가능하다고 자꾸만 그를 일으켜 세웠다.
‘마른하늘의 구름 한 조각’처럼 시리고 아픈 눈을 뜨게 한 사랑이 고마워서 그는 휠체어를 날개 삼아 장벽을 하나하나 넘어섰다. 매일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듯 정성껏 제 본분을 다하면서 희망이 현실로 부화하는 날들도 맞았다.
아내 조성은 씨(53세)는 누구보다 그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주었다. 변함없는 사랑이 존재한다고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의 삶에 찾아와 생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일생 부부의 연으로 앙상블을 내고 있는 이들에게 사랑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고, ‘동행(同行)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다.
절박한 때에 흡족하게 쏟아진 단비
차인홍 : 2000년 그 어느 때보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언감생심 기대조차 못했던 대학교수라니, 그것도 내 나라가 아니라 미국 땅에서 말이다. 바짝 마른 가뭄을 끝장내고 흡족히 내린 단비를 우리는 떨리는 두 손을 모아 눈물로 받아 마셨다.
1996년 말, 아내와 함께 가난한 유학생활의 고통을 감내하며 뉴욕시립대학교 브루클린대학 석사 과정을 마친 후, 한국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한 대학에 지원했다가 쓰디쓴 거절을 당했다. 발붙일 곳 없는 내 나라를 서글픈 심정으로 떠나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에서 공부 중이던 박사학위(지휘 전공) 과정을 부랴부랴 마쳤다. 일단 살기 위해서 공부를 마쳐야겠다고 했는데, 살길이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1년 안에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미국을 떠나야 했기에 여러 군데 오디션도 보러 다녔고, 인터넷으로 구인광고도 수시로 뒤졌다. 불안한 마음에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치과기공사를 해볼까 고민도 했다. 점점 시간은 흘렀고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음악의 ‘음’ 자도 모르고 살았을 나를 이곳까지 오도록 끊임없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던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내와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서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 같아요. 오케스트라 단원과 교수 자리 중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아요?”라고 물었다. “둘 다 하늘에 별 따기지만, 그나마 교수 자리가 나을 것 같다.”고 대답은 했으나,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런 대화가 오고간 다음 날인가? 여느 때처럼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한 화면에서 나도 모르게 스크롤을 멈추었다. “오하이오 라이트주립대학교 바이올린 지도교수 채용 공고. 자격 ; 바이올린 전공자, 현악 4중주 경험자, 지휘를 겸용할 수 있는 자.” 전날 아내가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분이니, 그분이 허락하시면 안 될 것도 없지 않을까요?”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세 가지 조건은 그동안 내가 쌓아온 이력과 딱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간 이런 조건으로 채용 공고가 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정말 신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온 정성을 다해 지원서를 냈고, 기라성 같은 사람들 틈에서 마지막 세 명이 추려지기까지 장장 7개월 동안 피가 마르는 과정을 지났다. 적극적으로 과정에 임했던 용기가 어디서 솟았는지, 도저히 내 능력과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최종 합격통보를 받았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토록 초라한 자의 인생에 ‘격려와 응원의 화관(花冠)’을 씌우신 것이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두 마음을 품어요?
조성은 : 인간적인 생각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중에도 우리는 늘 부유했다. 절망하기보다 소망하고, 원망하기보다 사랑하는 법을 고통 가운데서 배우며 우리는 하나가 되어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남편을 처음 보았는데 흔한 말로 첫눈에 반했다고 해야 하나, 그보다는 운명적인 느낌이랄까. 앞으로 이 사람이 나의 배우자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비올라를 시작했고, 남편은 대전의 성세재활원 친구들과 베데스다 4중주단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베데스다 4중주단의 연주회가 있으니 가보라고 선생님이 티켓을 주셨다. 연주회장에 가던 길에 우연히 길 건너편에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았고 그때부터 그를 향한 마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개인 교습을 받으러 다니면서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고, 한동안 오빠처럼 따랐지만 친구를 통해 전해진 나의 마음이 가닿지는 못했다. 이후, 나는 경희대학교 음대에 합격하여 서울로 갔고, 마침 그이도 한국소아마비협회 정립회관 측의 후원으로 베데스다 해체 위기를 넘기고 서울로 왔다. 남편과 다시 만났고, 연습실이 없어 하루 종일 연탄광에서 바이올린을 켜던 그를 생각하면 혼자서 대학의 낭만을 편히 즐길 수는 없었다.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돌리거나 차 한 잔 마시는 일도 없었다. 남들은 고지식하다고 할지 몰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두 마음을 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벌써 결혼한 지 29년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소녀였던 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그의 곁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놀라운지, 어떻게 삶이 계속 나아지는지 경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마음의 장애를 없애준 고마운 사랑
차인홍 : 아내는 바보 아니면 천사다. 요즘 세상에 누가 외모나 배경 안 따지고 사람을 사귀겠는가? 난 주머니에 천 원 한 장 없었고, 재활원에서 공부한 것이 전부인 장래가 불투명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초라하고 볼품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춘기 소녀의 마음으로 시작했다 해도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당시 나는 아내의 순수한 감정에 호응해 줄 수 없었다. 그만큼 사랑은 나에게 사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 여겼다. 그러나 일 년 후 대학생이 된 아내에게 “나를 만나러 왔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때 그녀가 찾아와 주었다. 여전히 나는 결혼을 한다거나 미래를 꿈꾸고 계획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육체의 장애보다 더 심각한 마음의 장애가 나를 가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나를 그녀가 만나러 와주었다는 것은 ‘나도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엄청난 메시지였다. 나에게 아무 조건 없이 와준 그녀의 용기가 고맙고 또 고마웠다.
아내가 아들들(차진, 차용)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앙을 강조해 조금 우려했다. 하지만 우리 애들을 보면서 싫든 좋든 믿음 안에서 성장하면 크게 어긋나지 않고 바르게 성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나는 아버지로서 해야 할 역할이 상당히 부족하다. 아이들도 그런 점을 느꼈으리라.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재활원에 맡겨진 이후로 부모의 돌봄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서 오는 결핍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상처 때문에 아이들에게 자상하지 못했다는 걸 반성하고, 어느 날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이해를 부탁했다. 나의 성공이 아버지로서의 성공을 의미하진 않는다. 아버지만 성공한다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아들이 바르게 살고 성공해야 아버지의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들들에게 좋은 영향만 주고 싶은데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또한, 어떤 때는 잠재된 상처가 아내에게 제일 많이 나타난다는 것도 잘 안다. 남에게는 친절하면서 정작 아내를 배려하지 못했던 일들을 돌아보면 자라온 환경을 무시할 순 없을 것 같다. 이런 사실들을 하나하나 인정하면서 ‘부족한 것이 당연하니 괜찮다’고 여길 줄도 알게 되었다. 다만 그 부족함이 가족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노력한다.
주리고 목마른 자, 그들이 배부르리라
우리는 선물처럼 주어진 삶을 누려왔다. 맡겨지는 대로 이루어지는 대로 따라왔을 뿐이다. 책에서도 고백했지만, 나는 “하나님이 휠체어를 미는 속도와 방향에 따라 따라가는 것이 맞다.”라고 확신한다. 지금까지 계획 세워본 적 별로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요즘 원하던 원하지 않던 나눔의 기회들이 주어지고 있다. 나로서는 무척 감사하고 황송한 일이다. 내 이름이 아니라, 초라한 자의 인생을 세우신 이름을 드러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분은 약하고 부족한 자를 더욱 사랑하신다. 나를 축복하신 이유도 그런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 믿기에, 나와 같은 이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고 싶다. 나는 더는 명성이 높아지는 걸 꿈꾸지 않는다. 이미 나는 충분히 그분에게서 나오는 양식으로 배부른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욕심을 버리고 간판에 대한 유혹을 내려놓고 어디서든 온 힘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 다른 이와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다하면 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초라할 수 없는 법이다.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 모습이 다르다. 무슨 일을 하던 그에게는 기품이 느껴진다. 인간이 자신의 약함을 경험하는 것은 은혜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다.
에필로그
마지막으로 차인홍 교수에게 어떤 음악을 추구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열세 살쯤, 미국평화봉사단으로 재활원에 오셨던 젠 영이라는 분이 미제 클래식 레코드판을 가져와 음악을 들려주셨죠. 그때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 5번’을 들으며 천상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그의 음악이 내 피부에까지 흡수되는 듯했지요. 척박한 환경에서 들었던 모차르트의 음악이 제게는 아름다움 그 이상의 위로였습니다. 그런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조성은 씨는 “남편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들들이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고 존경한답니다. 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하고 있어요. 저는 우리 가족이 천국으로 가는 삶을 함께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죠.”라는 말을 남겼다. 인터뷰하는 동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부부의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고 순수해 보였다.
차인홍_ 학력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대학교, 뉴욕시립대학교 브루클린 대학 석사,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 박사(지휘 전공). 이력 대전시립교향악단 악장, 사우스캐롤라이나 필하모닉 바이올린 수석 역임, 현재 오하이오 주 라이트주립대학교 음악과 종신교수. 수상 2006년 해외유공동포 대통령상 수상, 2011년 해외평통자문위원 위촉. 방송 KBS1 「수요기획」 「글로벌 성공시대」 다큐멘터리 등. 음반 「러시아 쌍뜨베떼르부르그 오케스트라」 차인홍 지휘, Sony/BMG 저서 2003년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토기장이), 2012년 「휠체어는 나의 날개」(마음과 생각)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