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 《회향시초》에는 한시 115 수를 수록하고, 모든 시를 한글로 대역하고, 시에 나오는 어려운 한자와 어려운 전고를 풀고, 관련된 인물이나 지명 같은 사항도 자세하게 해설해 놓고 있어,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이 시가 무슨 뜻인지, 또 왜 이런 시를 짓게 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부록에는〈항일애국지사 우전 김남수 선생 기적비〉와 〈선친 기적비 제막에 즈음하여 드리는 말씀〉등 선친을 회상하는 글이 2편 붙어 있고, 책 말미에 이《시초》에 실린 모든 시의 주석에 나오는 낱말 색인까지 붙어있다. 저자의 알뜰한 마음씨와 주밀한 솜씨를 아울러 읽어낼 수 있다.
이 시집에는 4구씩으로 된 절구 58수, 8구씩으로 된 율시 46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가 많기는 하나, 최근에 국내․외(특히 중국)를 여행하면서 고적지에서 지은 것, 친구와 우정을 나눈 것, 작고한 분들에게 지어올린 만사 같은 것, 선열에 대한 추모시 같은 내용도 들어 있다.
4.
그가 지은 시 몇 수 읽어보자.
〈乙酉秋過鳥嶺〉
〈을유년 가을 새재를 지나면서〉
九折羊腸駄馬哀
굽이 굽이 험한 고개 노새도 숨차하고
一峰纔過一溪來
한 봉우리 돌아가자 시냇물 앞 가리네
全山亂石霜楓裏
산을 덮은 어질바위 서리친 나뭇잎들
回望嶺南雲半開
바라보는 영남땅은 구름 절반 개인 하늘
문경 새재를 넘어갈 때 승용차나 버스를 타고 갔을 터인데, “노새”를, 그것도 “짐을 실은 노새(駄馬)”를 끌고 갔다고 하니 재미있다.
〈丁亥春登濯淸亭〉
〈정해년 봄 탁청정에 올라〉
雲收古縣一天晴
구름 걷힌 옛적 고을 하늘이 하냥 맑아
十里湖山錦繡明
십리라 걸친 산천 비단수마양 밝다
繼繼遺謨尙在此
대를 이어 지킨 법도 상기도 뚜렷함에
倚欄回首感懷生
난간에 기대보니 감회가 절로 난다
이 탁청정이 바로 안동군 예안면 군자리에 있는 저자의 큰 집 정자 이름이다. 수려한 고향의 경물이나 유서 깊은 고향으로 돌아온 감회를 잘 표현하고 있다.
〈乙酉冬至夜〉
〈을유년 동짓날 밤〉
如流歲月自行巡
세월은 물같아도 시절은 어김없어
一到隆冬降雪頻
겨울이 깊어감에 눈은 거푸 내리는다
窓外三更聞遠雁
창밖은 깊은 한밤 하늘가에 기럭 소리
挑燈讀杜似先人
등불 밝혀 두시 읽는 내가 옛분 닮아있다
“창외삼경”이라는 표현은 최고운의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창 밖에는 삼경 비 내리는데, 등불 앞에서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라는 이름난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등불 심지 돋우어 가면서 호롱불 아래서 한시를 읽던 선인들이 모습을 닮고 있으니, 그가 이미 고향 땅에 가서 앉아 있든지, 서울에 앉아 있든지 간에,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懷鄕)”은 이미 십분 성취 되었고, 그러한 마음을 벌써 옛 사람들과 같이 “두율(杜律)”을 읊조리는 경지에 도달한 것 같이 보인다.
5.
그런데, 첫 번째 인용한 시의 마지막 구절의 “회망(回望)”은 글자 그대로 풀면 “되돌아본다”는 뜻인데, 이 번역에서는 “바라보는”이라고 옮겨 적었다. “되돌아보는”이라고 옮기는 것이 더욱 시적이라고 할 수 있고 원시의 뜻과도 부합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집에 실린 한글 대역문들을 보면, 다섯 자씩 된 오언시나, 일곱 자씩 된 칠언시나 모두 국문 가사체와 같은 4․4조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우리말의 리듬을 살리는 데는 효과가 있을지라도, 한시의 뜻을 직역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이 대역문들만 따로 떼어 놓고서 읽어 보면, 모두가 그 나름대로 아주 정교한 국문 시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원 한시와 대조하여 보면 더러 위와 같이 뜻이 꼭 일치하지 않은 경우도 자주 보인다.
아마 이러한 경우는, 어느 누가 동시에 두 가지 다른 언어로 똑 같은 소재로 작품을 짓든지, 또는 한 가지 언어로 작품을 완성해놓고 그 작품을 자기가 번역한다고 해도 원작과 둘째 번의 작품(또는 번역)이 원작의 뜻과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에, 여기서 이러한 예를 앞서 한번 지적한 것 이외에 더는 들지는 않겠다.
지금 나는 우리나라의 선인들 중에서, 아주 희귀하기는 하겠지만, 한문과 한글로 같은 내용을 두 가지 언어로 적어 놓은 작품들이 있는가 찾고 있는 중인데, 별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 이 향천의 경우와 같이 한문과 한글로 똑같은 내용의 시를 수 백 수나 쓴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시집은 한국문화사에서나, 비교문학이나 번역문학사에서 연구에 매우 주목할 만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할만하다.
첫댓글 원작도 교수님의 해설도 모두 훌륭합니다. 시가 참 좋습니다.교수님도 지적하셨지만, 그래도 懷鄕詩鈔의 한시 원문이 한글역보다 뛰어납니다. [십리라 걸친 산천 비단수마양 밝다] 보다는 [十里湖山錦繡明]이 운치가 나지요. [원안(遠雁)] 과 [하늘가에 기럭 소리]도 맛이 다르고요~~ 한시의 국역은 '두시언해' 가 제일이라 생각합니다. 두보의 원시(原詩)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지 않습니까! ? 오히려 나은 것 같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