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기업의 가치는 결국 사회공헌이다.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을 납부해 국부를 살찌우고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전중윤(94·사진)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삼양라면 출시 50주년을 맞아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여러 번 강조했다. 1963년 배곯는 서민들을 위해 삼양라면을 세우고 식품사업에 뛰어든 전 명예회장은 80년대 중반까지 라면업계에서 부동의 1인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89년 “공업용 소뼈(우지)를 들여와 라면을 만들어 판매했다”는 검찰 발표로 삼양식품은 존폐 위기에 몰렸다. 7년9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재기를 모색하던 전 명예회장은 97년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또다시 역경을 맞았지만 절치부심의 노력 끝에 2005년 재기에 성공했다. 94세의 나이에도 정정해 보이는 전 명예회장을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고령이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한 기억력을 과시한 그의 서재엔 일본 책이 많이 눈에 띄었다.
-원로 기업인으로서 기업에 가장 중요한 가치는 뭐라고 보나.
“기업은 사회 공헌도가 높아야 한다. 일자리를 만들고 나라에 세금을 내고 지역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 사회에 공헌하지 못하면 기업이 아니다.”
-과거에는 ‘사업보국’이라 해서 ‘사업으로 나라에 은혜를 갚는다’고 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다 그렇게 얘기할 만한 분들이다. 흔히 기업 하면 돈만 생각하는 줄 아는데 사실 원로 기업인들은 창업할 때 나라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큰 철학이 있었기에 삼성·현대가 오래가는 거다. 이제는 그런 기업인이 줄어 걱정이다.”
-기업은 이익을 중시한다. 돈은 무엇인가.
“돈은 중요한 거다. 청빈(淸貧)보다는 청부(淸富)가 낫다. 조선시대 청백리가 7명이 있었는데 다들 돈이 없어 자식 교육을 못 시켜 가문이 어려워졌다. 돈이 있어야 먹고살고 자식을 공부시킬 수 있다. 기업은 이익을 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돈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거다.”
-기업가에게 기업은 제2의 자식이라고 하는데.
“자식보다 소중한 존재가 기업이다. 기업인은 기업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 성취를 못 이루면 기업은 안 되는 거다. 임직원의 식구까지 책임지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왜 라면 사업을 하게 됐나.
“해방 후 ‘동방생명’이란 상호로 생명보험 사업을 하다가 6·25전쟁 뒤인 1953년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팔고 ‘제일생명’을 인수했다. 어느 날 남대문 시장에 갔는데 50명쯤 되는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미8군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를 끓인 꿀꿀이죽을 5원씩 주고 먹고 있더라. 배곯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첫 해외여행으로 일본에 갔다. 일본 제일생명은 맥아더 장군이 쓰던 건물에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구수한 냄새가 나서 가보니까 라면이 있었다. 가격이 10원밖에 안 했다. 꿀맛이었다. 이걸 갖다가 배곯는 이들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생명보험은 누가 죽어야 돈을 버는데 식품회사는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돈을 벌지 않나. 라면회사 차려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이 ‘PL480’으로 명명된 원조를 해줘 밀가루는 확보돼 있으니까 해볼 만하다고 봤다. 61년 5·16이 터진 직후 삼양을 만들었다.”
-라면공장을 지으려고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JP) 전 총리를 만났다는데.
“그때 국가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식량 문제였다. 나는 라면이 ‘제2의 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라면공장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때는 달러가 워낙 귀했다. 마침 김성학이라는 동창 소개로 JP를 만났다. ‘라면으로 배곯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니까 JP가 혹하더라. 그런데 라면 만드는 기계 1개 라인을 세우는 데 당시 돈으로 6만 달러가 들었다. 당시 정부가 확보한 외화는 15만 달러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웃음) 석 달 뒤 농림부에 미국 원조로 10만 달러가 들어왔는데 JP가 이 가운데 5만 달러를 갖고 라면을 만들어보라고 해 그 돈을 원화로 샀다.”
-JP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셈인데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정의감과 신의가 있는 정치인이다. 옳다고 생각하면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다른 정치인은 자신이 도와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자신에게도 해가 미칠까 두려워 몸을 사리는데 JP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정치인들은 또 정의감 이전에 모종의 거래가 있어야 했지만 JP는 아니었다. 손해 보는 일이 있어도 옳다고 생각하면 도와준다. JP는 정직한 사람이다. 나중에 JP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JP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금이 모자랐는데 어떻게 충당했나.
“일본의 라면업체인 묘조(明星)식품을 찾아갔다. ‘한국 식량 사정이 어려워 라면 기계를 사러왔다’고 말했다. 간곡하게, 정말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묘조식품 측은 정보가 누출될까봐 공장조차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계속 배우겠다고 부탁하니까 마지못해 도쿄에서 좀 떨어진 공장에 보내줬다. 본사의 오쿠이 사장이 보냈는데도 나를 대하는 공장 분위기는 냉랭했다. 전 생산 라인을 20차례 넘게 왔다갔다 하면서 배우려 노력했다. 그 뒤 도쿄 본사로 가서 계약하겠다고 말했더니 ‘기술을 무상으로 원조해주겠다’고 하더라. 나를 믿을 만한 파트너로 본 것 같았다. 오쿠이 사장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한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일어섰으니 그 빚을 갚아주겠다’고 했다. 덕분에 기계 2개 라인을 반값 아래로 살 수 있었다. 1개 라인에 6만 달러인데 2개 라인을 2만7000달러에 구입했다. 결국 정부에서 빌린 5만 달러 가운데 2만3000달러가 남았다. 그걸 상공부에 되돌려 주니 다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분위기였다. 달러가 워낙 귀한 때라 되팔면 큰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기술원조를 받았나.
“묘조식품 측은 오쿠이 사장이 약속했는데도 라면의 핵심인 배합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내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난 뒤에야 사장 비서가 봉투를 건넸다. 일본 국내에서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한 거다. 봉투 속 종이에 수프와 면 배합 같은 핵심 기술이 적혀 있더라. 그 뒤로 오쿠이 사장은 기술자를 보내주고 기계를 조율해 주는 등 삼양이 정상에 오를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장을 서울 창동으로 정했던 까닭은.
“처음엔 하월곡동에 공장이 있었다. 그런데 라면이 잘 팔리면서 공장을 확장해야 했다. 개발 붐이 일기 시작한 강남과 도봉동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회사 내에선 강남으로 가자는 주장이 많았지만 이재민들이 개천 주변에 몰려 살던 도봉동에 결국 공장을 지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어서였다. 땅 가격이 쌌던 이유도 있었다. 일자리를 만들려고 라면봉지를 한 봉, 한 봉씩 수동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라인당 20명의 일자리가 생기기만 자동 설비로 봉지를 만들면 2명밖에 필요 없다. 도봉동 집집마다 한 명씩 고용하기로 원칙을 정했다. 처음엔 700명가량 고용했다. 사업이 잘돼 공장 부지가 두 배로 확장되면서 고용 인원이 1500명까지 늘어났다. 지금도 그 일대는 우리 회사 직원들이 많이 살아서인지 삼양라면이 가장 잘 팔리는 동네다.”
-공장 가동에 어려운 점은 없었나.
“경찰서에 부탁해 가구당 한 명씩을 원칙으로 500명을 뽑았다. 경찰은 일자리를 만들어준다니 대환영이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게 있다. 집집마다 평균 네다섯 식구가 사는데 그중 한 사람만 고정보수를 받으면 다들 먹고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직원들은 배고픈 게 해결되니까 직장을 하늘처럼 여겼고 퇴근시간이 따로 없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직원이 많아지면서 이들을 관리하는 부장, 차장들에게 주식을 100주, 50주씩 주었다. 책임감을 가지라는 뜻이었다.”
-삼양라면 처음 출시 가격이 10원이었는데.
“배 곯던 국민에게 꿀꿀이죽이 인기였던 건 5원이란 싼 가격 덕분이었다. 삼양라면도 가격을 가장 낮게 매겨 서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10원으로 책정한 거다. 공장을 수동으로 가동하니 인건비가 많이 들어가는데 가격까지 저렴하게 받으니 적자가 이어졌다.”
-경쟁사를 의식해 싼 가격을 매긴 건 아닌가.
“솔직히 나는 경쟁사를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만들어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경쟁 업체들도 가격을 올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다른 업체들은 줄도산했다. 우리도 사업을 시작한 지 1년반 뒤엔 적자였다. 그래서 보유했던 은행 주식을 다 팔아 적자 3억원을 메웠다. 한일은행을 찾아가 운영자금을 빌리기도 했다. 힘든 시절이었다.”
-망할지도 모르는데 전 재산을 공장에 투자한 이유는 무엇인가.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애정이 없으면 절대 이렇게 못할 거다. 사업을 시작한 지 4년쯤 지나니까 소비자들이 삼양라면을 익숙해하더라. 그때부터 회사가 흑자로 돌아섰다. 당시 한 해 삼양라면 생산량이 충청북도 한 해 쌀 생산량과 맞먹었다. 사명감을 갖고 일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삼양에 총무처 장관을 보내 인사정책을 배우라고 했다는데.
“나는 지역 편중 인사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신입사원은 물론 중역들도 출신 도(道)별로 골고루 채용·승진시켰다. 부장이 경상도 출신이면 차장은 전라도로 뽑았다. 식품회사에서 능력 차이는 크지 않다. 이렇게 인사를 하다 보니 뛰어난 직원은 고속승진을 시켜도 불평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영·호남 지역감정이 사라지지 않아 가슴 아프다.”
-박 전 대통령이 1960년대에 전 대표를 포함해 10대 기업 총수들을 불러 ‘가축 농장을 해보라’고 했다는데.
“그렇다. 박 대통령이 호주를 순방한 뒤 ‘잘사는 나라의 기준은 국민 수만큼 소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삼성·코오롱·삼양 등 기업 대표들을 불러 ‘목장을 하나씩 하라’고 권했다. 나는 산이 많은 강원도에서 목장을 해보겠다고 답했더니 박 대통령 지시로 (정부가) 헬기를 빌려줘서 대관령으로 갔다. 국민에게 단백질과 지방도 섭취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해 호주와 캐나다·미국에서 젖소를 들여와 그곳에 목장을 세웠다. 정부가 임대해준 600만 평가량의 부지 위에서다. 목장은 전부 톱과 괭이로 개간했다. 그때 기업들이 만든 목장 가운데 지금까지 운영되는 곳은 우리 목장뿐이다. 삼성은 용인에 불하받은 땅에 양돈사업을 했는데 지금은 에버랜드로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대관령 목장을 운영한다. 목장을 세울 때 돌에다 ‘산은 단백질 원이다’ ‘인간백회 천세우(人間百懷 千歲憂)’라고 새겼다. ‘인간은 백세를 살지만 천년 뒤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부지 중 필요하지 않았던 250만 평은 반납했다.”
-우지 파동 뒤 7년 반 소송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직후 외환위기를 맞았다. 시련을 견뎌낸 힘은 무엇인가.
“오직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우지파동으로 삼양라면은 불량식품으로 전락했고 1000여 명 직원은 회사를 떠났다. 결국 법원에 화의신청을 했다. 그런데 숨 돌릴 틈도 없이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밤낮없이 일하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4000억원 넘는 부채를 다 갚았다. 우지파동은 정치적 탄압에서 비롯된 거다. 라면에 들어간 우지는 절대 공업용이 아니었다. 우지가 팜유보다 30% 이상 비쌌다. 나는 거짓말 안 한다. 그때 당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책을 수천 권 읽었다.”
-그래서 호가 이건(以建)인가.
“기필코 이룬다는 뜻이다. 새로 창업한다는 뜻이다.”
-정부나 각계에서 훈장을 많이 받았다.
“정부에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동탑에서 금탑까지 다 받았다. 각계에서 준 상장도 700개쯤 된다. 라면만 50년을 했으니까.”
-식량문제에 열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도 세계적으로 식량이 40% 모자란다. 우리도 쌀만 자급률이 높지 다른 건 다 모자란다. 전부 수입해오는 실정이다. 게다가 북한은 우리의 절반도 생산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식량문제 해결이 절실하다. 전 세계에서 식량 자급이 가능한 나라는 미국·호주·브라질·프랑스 정도다.”
-기업을 하면서 성공도 하고 어려운 일도 많았는데 이겨 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나 자세는.
“역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성공한 기업은 사회에 공헌도가 높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는 어때야 하나.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다 있어야 한다. 지금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이 없으면 안 된다. 이들은 사회 공헌도가 높다. 대기업이 없으면 경제가 무너진다. 일본 책을 보니 ‘한국의 재벌들은 가난뱅이가 재벌이 됐기 때문에 중소기업을 착취한다’는 내용이 있더라. 그런 재벌은 오래 못 간다. 기업은 상대방, 특히 중소기업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해줬으면 하는 게 있다면.
“실행 가능한 것부터 국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걸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나라가 잘살려면 중산층이 70%는 있어야 한다. 부자가 인구의 10%를 넘기면 안 된다. 그러면 국민 모두가 반항심이 생긴다. 그러면 혁명이 오는 것이다. 골고루 잘 먹고 살아야 한다.”
-스스로 어떤 인생을 살아왔다고 평가하나.
“정직하게 살았다. 기업은 남과 척을 지지 말아야 한다. 옛말에 ‘한번 소송하면 5대로 원수가 생긴다’고 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왕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인류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 ‘그냥 사람이니까 사람으로 산다’ 이런 건 안 된다. 사회를 위해 무언가 공헌해야 하고 발전해야 한다. 중국에서 지인이 ?순자?에 나온 내용을 써서 보내준 게 있다. ‘美意延年(미의연년·아름다운 마음을 지니면 오래 산다)’이다. 또 어떤 종교든지 하나를 믿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신념이 강해진다.”
이광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그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7, 18대 국회의원과 강원도 지사(2010~2011년)를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역임했다. 1965년생(48세)으로 원주고와 연세대 법대를 졸업했다.
대담·글=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기업의 가치는 결국 사회공헌이다.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을 납부해 국부를 살찌우고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전중윤(94·사진)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삼양라면 출시 50주년을 맞아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여러 번 강조했다. 1963년 배곯는 서민들을 위해 삼양라면을 세우고 식품사업에 뛰어든 전 명예회장은 80년대 중반까지 라면업계에서 부동의 1인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89년 “공업용 소뼈(우지)를 들여와 라면을 만들어 판매했다”는 검찰 발표로 삼양식품은 존폐 위기에 몰렸다. 7년9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재기를 모색하던 전 명예회장은 97년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또다시 역경을 맞았지만 절치부심의 노력 끝에 2005년 재기에 성공했다. 94세의 나이에도 정정해 보이는 전 명예회장을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고령이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한 기억력을 과시한 그의 서재엔 일본 책이 많이 눈에 띄었다.
전중윤 1963년 국내에서 라면을 처음으로 만들어 ‘라면의 대부’로 불린다. 동방생명보험주식회사 부사장, 제일생명보험 사장을 지내다 59년 출장차 들렀던 도쿄에서 라면과 인연을 맺게 된다. 61년 삼양식품을 창립한 후 50년 넘게 한 우물을 파왔다. 라면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량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삼양식품에 직접 전화를 걸어 “수프에 고춧가루를 넣어보면 어떨까”라고 조언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한국생산성본부 부회장을 지냈다. 학교법인 진명학원 이사, 명덕문화재단 이사장도 역임했다. 선린상고 출신으로 경희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강원대에서 농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전중윤 명예회장(왼쪽)이 이광재 전 지사에게 삼양식품 창립과 기업 경영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기업은 사회 공헌도가 높아야 한다. 일자리를 만들고 나라에 세금을 내고 지역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 사회에 공헌하지 못하면 기업이 아니다.”
-과거에는 ‘사업보국’이라 해서 ‘사업으로 나라에 은혜를 갚는다’고 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다 그렇게 얘기할 만한 분들이다. 흔히 기업 하면 돈만 생각하는 줄 아는데 사실 원로 기업인들은 창업할 때 나라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큰 철학이 있었기에 삼성·현대가 오래가는 거다. 이제는 그런 기업인이 줄어 걱정이다.”
-기업은 이익을 중시한다. 돈은 무엇인가.
“돈은 중요한 거다. 청빈(淸貧)보다는 청부(淸富)가 낫다. 조선시대 청백리가 7명이 있었는데 다들 돈이 없어 자식 교육을 못 시켜 가문이 어려워졌다. 돈이 있어야 먹고살고 자식을 공부시킬 수 있다. 기업은 이익을 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돈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거다.”
-기업가에게 기업은 제2의 자식이라고 하는데.
“자식보다 소중한 존재가 기업이다. 기업인은 기업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 성취를 못 이루면 기업은 안 되는 거다. 임직원의 식구까지 책임지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1 1982년 5월 삼양라면 공장 직원들이 생산라인에서 일하고 있다. [중앙포토] 2 1989년 11월 우지 파동 사태 뒤 강원도 공단협의회 직원들이 삼양라면 판매촉진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해방 후 ‘동방생명’이란 상호로 생명보험 사업을 하다가 6·25전쟁 뒤인 1953년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팔고 ‘제일생명’을 인수했다. 어느 날 남대문 시장에 갔는데 50명쯤 되는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미8군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를 끓인 꿀꿀이죽을 5원씩 주고 먹고 있더라. 배곯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첫 해외여행으로 일본에 갔다. 일본 제일생명은 맥아더 장군이 쓰던 건물에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구수한 냄새가 나서 가보니까 라면이 있었다. 가격이 10원밖에 안 했다. 꿀맛이었다. 이걸 갖다가 배곯는 이들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생명보험은 누가 죽어야 돈을 버는데 식품회사는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돈을 벌지 않나. 라면회사 차려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이 ‘PL480’으로 명명된 원조를 해줘 밀가루는 확보돼 있으니까 해볼 만하다고 봤다. 61년 5·16이 터진 직후 삼양을 만들었다.”
-라면공장을 지으려고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JP) 전 총리를 만났다는데.
“그때 국가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식량 문제였다. 나는 라면이 ‘제2의 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라면공장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때는 달러가 워낙 귀했다. 마침 김성학이라는 동창 소개로 JP를 만났다. ‘라면으로 배곯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니까 JP가 혹하더라. 그런데 라면 만드는 기계 1개 라인을 세우는 데 당시 돈으로 6만 달러가 들었다. 당시 정부가 확보한 외화는 15만 달러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웃음) 석 달 뒤 농림부에 미국 원조로 10만 달러가 들어왔는데 JP가 이 가운데 5만 달러를 갖고 라면을 만들어보라고 해 그 돈을 원화로 샀다.”
-JP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셈인데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정의감과 신의가 있는 정치인이다. 옳다고 생각하면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다른 정치인은 자신이 도와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자신에게도 해가 미칠까 두려워 몸을 사리는데 JP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정치인들은 또 정의감 이전에 모종의 거래가 있어야 했지만 JP는 아니었다. 손해 보는 일이 있어도 옳다고 생각하면 도와준다. JP는 정직한 사람이다. 나중에 JP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JP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금이 모자랐는데 어떻게 충당했나.
“일본의 라면업체인 묘조(明星)식품을 찾아갔다. ‘한국 식량 사정이 어려워 라면 기계를 사러왔다’고 말했다. 간곡하게, 정말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묘조식품 측은 정보가 누출될까봐 공장조차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계속 배우겠다고 부탁하니까 마지못해 도쿄에서 좀 떨어진 공장에 보내줬다. 본사의 오쿠이 사장이 보냈는데도 나를 대하는 공장 분위기는 냉랭했다. 전 생산 라인을 20차례 넘게 왔다갔다 하면서 배우려 노력했다. 그 뒤 도쿄 본사로 가서 계약하겠다고 말했더니 ‘기술을 무상으로 원조해주겠다’고 하더라. 나를 믿을 만한 파트너로 본 것 같았다. 오쿠이 사장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한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일어섰으니 그 빚을 갚아주겠다’고 했다. 덕분에 기계 2개 라인을 반값 아래로 살 수 있었다. 1개 라인에 6만 달러인데 2개 라인을 2만7000달러에 구입했다. 결국 정부에서 빌린 5만 달러 가운데 2만3000달러가 남았다. 그걸 상공부에 되돌려 주니 다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분위기였다. 달러가 워낙 귀한 때라 되팔면 큰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기술원조를 받았나.
“묘조식품 측은 오쿠이 사장이 약속했는데도 라면의 핵심인 배합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내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난 뒤에야 사장 비서가 봉투를 건넸다. 일본 국내에서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한 거다. 봉투 속 종이에 수프와 면 배합 같은 핵심 기술이 적혀 있더라. 그 뒤로 오쿠이 사장은 기술자를 보내주고 기계를 조율해 주는 등 삼양이 정상에 오를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장을 서울 창동으로 정했던 까닭은.
“처음엔 하월곡동에 공장이 있었다. 그런데 라면이 잘 팔리면서 공장을 확장해야 했다. 개발 붐이 일기 시작한 강남과 도봉동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회사 내에선 강남으로 가자는 주장이 많았지만 이재민들이 개천 주변에 몰려 살던 도봉동에 결국 공장을 지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어서였다. 땅 가격이 쌌던 이유도 있었다. 일자리를 만들려고 라면봉지를 한 봉, 한 봉씩 수동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라인당 20명의 일자리가 생기기만 자동 설비로 봉지를 만들면 2명밖에 필요 없다. 도봉동 집집마다 한 명씩 고용하기로 원칙을 정했다. 처음엔 700명가량 고용했다. 사업이 잘돼 공장 부지가 두 배로 확장되면서 고용 인원이 1500명까지 늘어났다. 지금도 그 일대는 우리 회사 직원들이 많이 살아서인지 삼양라면이 가장 잘 팔리는 동네다.”
-공장 가동에 어려운 점은 없었나.
“경찰서에 부탁해 가구당 한 명씩을 원칙으로 500명을 뽑았다. 경찰은 일자리를 만들어준다니 대환영이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게 있다. 집집마다 평균 네다섯 식구가 사는데 그중 한 사람만 고정보수를 받으면 다들 먹고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직원들은 배고픈 게 해결되니까 직장을 하늘처럼 여겼고 퇴근시간이 따로 없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직원이 많아지면서 이들을 관리하는 부장, 차장들에게 주식을 100주, 50주씩 주었다. 책임감을 가지라는 뜻이었다.”
-삼양라면 처음 출시 가격이 10원이었는데.
“배 곯던 국민에게 꿀꿀이죽이 인기였던 건 5원이란 싼 가격 덕분이었다. 삼양라면도 가격을 가장 낮게 매겨 서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10원으로 책정한 거다. 공장을 수동으로 가동하니 인건비가 많이 들어가는데 가격까지 저렴하게 받으니 적자가 이어졌다.”
-경쟁사를 의식해 싼 가격을 매긴 건 아닌가.
“솔직히 나는 경쟁사를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만들어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경쟁 업체들도 가격을 올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다른 업체들은 줄도산했다. 우리도 사업을 시작한 지 1년반 뒤엔 적자였다. 그래서 보유했던 은행 주식을 다 팔아 적자 3억원을 메웠다. 한일은행을 찾아가 운영자금을 빌리기도 했다. 힘든 시절이었다.”
-망할지도 모르는데 전 재산을 공장에 투자한 이유는 무엇인가.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애정이 없으면 절대 이렇게 못할 거다. 사업을 시작한 지 4년쯤 지나니까 소비자들이 삼양라면을 익숙해하더라. 그때부터 회사가 흑자로 돌아섰다. 당시 한 해 삼양라면 생산량이 충청북도 한 해 쌀 생산량과 맞먹었다. 사명감을 갖고 일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삼양에 총무처 장관을 보내 인사정책을 배우라고 했다는데.
“나는 지역 편중 인사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신입사원은 물론 중역들도 출신 도(道)별로 골고루 채용·승진시켰다. 부장이 경상도 출신이면 차장은 전라도로 뽑았다. 식품회사에서 능력 차이는 크지 않다. 이렇게 인사를 하다 보니 뛰어난 직원은 고속승진을 시켜도 불평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영·호남 지역감정이 사라지지 않아 가슴 아프다.”
-박 전 대통령이 1960년대에 전 대표를 포함해 10대 기업 총수들을 불러 ‘가축 농장을 해보라’고 했다는데.
“그렇다. 박 대통령이 호주를 순방한 뒤 ‘잘사는 나라의 기준은 국민 수만큼 소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삼성·코오롱·삼양 등 기업 대표들을 불러 ‘목장을 하나씩 하라’고 권했다. 나는 산이 많은 강원도에서 목장을 해보겠다고 답했더니 박 대통령 지시로 (정부가) 헬기를 빌려줘서 대관령으로 갔다. 국민에게 단백질과 지방도 섭취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해 호주와 캐나다·미국에서 젖소를 들여와 그곳에 목장을 세웠다. 정부가 임대해준 600만 평가량의 부지 위에서다. 목장은 전부 톱과 괭이로 개간했다. 그때 기업들이 만든 목장 가운데 지금까지 운영되는 곳은 우리 목장뿐이다. 삼성은 용인에 불하받은 땅에 양돈사업을 했는데 지금은 에버랜드로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대관령 목장을 운영한다. 목장을 세울 때 돌에다 ‘산은 단백질 원이다’ ‘인간백회 천세우(人間百懷 千歲憂)’라고 새겼다. ‘인간은 백세를 살지만 천년 뒤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부지 중 필요하지 않았던 250만 평은 반납했다.”
-우지 파동 뒤 7년 반 소송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직후 외환위기를 맞았다. 시련을 견뎌낸 힘은 무엇인가.
“오직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우지파동으로 삼양라면은 불량식품으로 전락했고 1000여 명 직원은 회사를 떠났다. 결국 법원에 화의신청을 했다. 그런데 숨 돌릴 틈도 없이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밤낮없이 일하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4000억원 넘는 부채를 다 갚았다. 우지파동은 정치적 탄압에서 비롯된 거다. 라면에 들어간 우지는 절대 공업용이 아니었다. 우지가 팜유보다 30% 이상 비쌌다. 나는 거짓말 안 한다. 그때 당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책을 수천 권 읽었다.”
-그래서 호가 이건(以建)인가.
“기필코 이룬다는 뜻이다. 새로 창업한다는 뜻이다.”
-정부나 각계에서 훈장을 많이 받았다.
“정부에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동탑에서 금탑까지 다 받았다. 각계에서 준 상장도 700개쯤 된다. 라면만 50년을 했으니까.”
-식량문제에 열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도 세계적으로 식량이 40% 모자란다. 우리도 쌀만 자급률이 높지 다른 건 다 모자란다. 전부 수입해오는 실정이다. 게다가 북한은 우리의 절반도 생산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식량문제 해결이 절실하다. 전 세계에서 식량 자급이 가능한 나라는 미국·호주·브라질·프랑스 정도다.”
-기업을 하면서 성공도 하고 어려운 일도 많았는데 이겨 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나 자세는.
“역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성공한 기업은 사회에 공헌도가 높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는 어때야 하나.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다 있어야 한다. 지금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이 없으면 안 된다. 이들은 사회 공헌도가 높다. 대기업이 없으면 경제가 무너진다. 일본 책을 보니 ‘한국의 재벌들은 가난뱅이가 재벌이 됐기 때문에 중소기업을 착취한다’는 내용이 있더라. 그런 재벌은 오래 못 간다. 기업은 상대방, 특히 중소기업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해줬으면 하는 게 있다면.
“실행 가능한 것부터 국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걸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나라가 잘살려면 중산층이 70%는 있어야 한다. 부자가 인구의 10%를 넘기면 안 된다. 그러면 국민 모두가 반항심이 생긴다. 그러면 혁명이 오는 것이다. 골고루 잘 먹고 살아야 한다.”
-스스로 어떤 인생을 살아왔다고 평가하나.
“정직하게 살았다. 기업은 남과 척을 지지 말아야 한다. 옛말에 ‘한번 소송하면 5대로 원수가 생긴다’고 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왕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인류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 ‘그냥 사람이니까 사람으로 산다’ 이런 건 안 된다. 사회를 위해 무언가 공헌해야 하고 발전해야 한다. 중국에서 지인이 ?순자?에 나온 내용을 써서 보내준 게 있다. ‘美意延年(미의연년·아름다운 마음을 지니면 오래 산다)’이다. 또 어떤 종교든지 하나를 믿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신념이 강해진다.”
이광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그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7, 18대 국회의원과 강원도 지사(2010~2011년)를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역임했다. 1965년생(48세)으로 원주고와 연세대 법대를 졸업했다.
대담·글=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