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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간화선 특강)
제5강 - 3부(2012. 11. 13.)
答 富樞密 季申 (一)
이참정의 出頌者, 참 근사하지요? 아주 기가 막히지요.
이런 것을 잘 곱씹고 곱씹어가지고 하나의 안목으로 잡아도 좋습니다.
이런 것을 가까이 하면 조금 건방져지긴 해요. 건방져지긴... 그런데 또 이런 선어록을 통해서 약간 건방져질 필요는 있습니다. 공부 하는 사람이 한번 씩 그런 과정을 통해서 소견도 좀 나고, 사람이 좀 통도 커지고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참 정말 아주 근사한 게송입니다. 그 다음에
答 富樞密 季申(답 부추밀 계신).
答 富樞密 季申(一)
示諭호대 蚤歲에 知信向此道러니 晩年에 爲知解所障하야
未有求悟入處일새 欲知日夕에 體道方便이라하니 旣荷至誠이라
不敢自外일새 據欸結案하야 葛藤少許호리라
只遮求悟入底가 便是障道知解了也니 更別有甚麽知解가
爲公作障이며 畢竟에 喚甚麽하야 作知解며 知解는 從何而至며
被障者는 復是阿誰오 只此一句에 顚倒有三하니
自言爲知解所障이 是一이요
自言未悟하야 甘作迷人이 是一이요
更在迷中하야 將心待悟가 是一이니 只遮三顚倒가
便是生死根本이라 直須一念不生하야 顚倒心絶하야사
方知無迷可破며 無悟可待며 無知解可障이니
如人이 飮水에 冷煖을 自知라
久久하면 自然不作遮般見解也리라
富樞密. 樞密은 추밀소임이니까 상당한 벼슬입니다.
부추밀에게 답함이라.
示諭(시유)호대
蚤歲(조세)에, 젊은 나이에
知信向彼此道(지신향차도)러니, 이 道에 信向할 줄을,
믿어서 向할 줄을 알았더니 그 말입니다. 信向此道. 그랬는데,
晩年(만년)에
爲知解所障(위지해소장)하야, 知解 = 알음알이지요. 지식.
알음알이에 장애 입는 것이 돼가지고서
未有求悟入處(미유구오입처)일새,
아직도 깨달아 들어가는 곳을 구하지 못했을 세.
欲知日夕(욕지일석)에, 밤낮으로
體道方便(체도방편)이라하니, 도를 체득하는 방편을 알고자 한다. 하니,
이 사람이 보낸 편지에 그렇게 써져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대개 편지 쓰는 형식이요? 상대방의 편지를 받고 내가 답장하는 것이니까,
당신의 편지에 이렇게ㆍ이렇게 했는데 그래 그 편지를 보고 답장을 쓰는 겁니다. 그러면 쓰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런 것 없이 무턱대고 하려면 조금 난감하지요. 보면 대혜스님 편지 쓰는 방식이 꼭 그래요. 상대의 편지 말을 인용을 하면서 “당신이 그렇게 사고하니” 또는 “그렇게 공부 한다.” 고 하니...
旣荷至誠(기하지성)이라. 至誠 = 지극한 정성.
지극한 정성을 짊어졌음이라.
不敢自外(불감자외)일새. 감히 스스로 외면하지 못할 세.
據款結案(거관결안)하야 葛藤少許(갈등소허)호리라.
款에 근거해서 안건을 맺어, 이것은 말하자면 당신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나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거기에 근거해서 조금 잔소리 좀 하겠다. 갈등을 조금 해보겠다. 이 말입니다.
只遮求悟入底(지자구오입저)가,
다만 이 깨달아 들어가기를 구하는 그것이, 깨닫기를 구하는 그것이
便是障道知解了也(변시장도지해료야)니,
도를 장애하는 알음알이다. 깨닫기는 뭘 깨닫느냐는 말이냐? 깨닫고자 하는 그 사실이 벌써 도를 장애하는 것이다.
更別有甚麽知解(갱별유삼마지해)가 爲公作障(위공작장)이며,
다시 따로 무슨 알음알이가 있어가지고, “알음알이ㆍ알음알이” 하는데 무슨 알음알이가 더 있어가지고서 公을 위해서 장애를 짓겠는가?
畢竟(필경)에 煥甚麽(환심마)하야, 무엇을 불러서
作知解(작지해)며. 知解를 알음알이라고 하느냐?
知解(지해)는
從何而至(종하이지)며, 어디로부터 왔느냐?
알음알이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느냐? 이 말입니다.
被障者(피장자)는, 장애를 입는다고 하는 것은
復是阿誰(부시옥수)오? 다시 누구냐?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장애를 입는다고 하는 것은 실지로 이것이 존재하는 거냐? 너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물건이냐? 이런 의미입니다.
只此一句(지차일구)에 顚倒有三(전도유삼)하니,
이 한 구절에 顚倒가 세 가지가 있다. 대혜스님도 사실 가만히 보면 지혜가 아주 넘쳐나면서도 말이 좀 많은 분입니다. 사실 말이 많으니까 우리는 거기서 공부 할 것이 있긴 있습니다만. 이런 대선지식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우리는 참 손해지요.
自言爲知解所障(자언위지해소장)이 是一(시일)이요.
自言 = 스스로 말하기를 知解가, 알음알이가 장애가 된다. “알음알이가 장애가 된다ㆍ알음알이가 장애가 된다.” 이것이 한가지이고, 또
自言未悟(자언미오)하야 甘作迷人(감작미인)이 是一이요.
내가 아직도 깨닫지 못해서 다르게 미혹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그것이 또 한 가지다. 또
更在迷中(갱재미중)하야, 다시 미혹한 가운데 있으면서
將心待悟(장심대오)가 是一이니, 마음을 가져서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이 이 한 가지다. 이래서 세 가지입니다. 顚倒가 세 가지다.
알음알이가 장애가 된다. 또
나는 못 깨달았다. 또
깨달아야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것입니다. 알음알이가 있다ㆍ나는 못 깨달은 사람이다ㆍ그렇기 때문에 깨달아야 된다. 이것을 세 가지 문제로 대혜스님이 아주 예리하게 짚어냈습니다.
只遮三顚倒(지자삼전도)가, 다만 이 세 가지 전도가
便是生死根本(변시생사근본)이라.
이것이야말로 진짜 생사의 근본이다 이 말입니다.
直須一念不生(직수일념불생)하야,
바로 모름지기 一念不生해서
顚倒心絶(전도심절)하야사, 顚倒心이 끊어져야
方知無迷加破(방지무미가파)며, 바야흐로 無迷.
가히 깨뜨릴 미혹이 없다 이 말입니다. 전도된 마음이 끊어져야 되는데, 이 세 가지 마음 때문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미혹 가히 깨달을 것이 없고, 또
無悟可待(무오가대)며, 깨달음 가히 기다릴 것이 없다. 기다릴 깨달음도 없다 이 말입니다. 불교가 깨닫기를 기다리잖아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해가지고 깨달음ㆍ깨달음ㆍ깨달음. 여기가도 깨달음ㆍ저기가도 깨달음. 앉아서도 깨달음ㆍ서도 깨달음. 깨달음이야기가 사실은 큰 문제입니다. 깨달음이 문제라고 하면서 깨달음을 말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이것이 걸리고, ???? 사실...
無知解可障(무지해가장)이니, 알음알이 가히 장애 될 것도 없다.
깨달음 기다릴 것도 없고, 알음알이 장애 될 것도 없고, 또 미혹,
가히 깨뜨릴 미혹도 없다.
如人(여인)이 飮水(음수)에 冷煖(냉난)을 自知(자지)라.
어떤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운 것을 저절로 알 것이다.
久久(구구)하면 自然不作遮般見解也(자연부작자반견해야)리라.
오래오래 하다보면 자연히 이런 견해를 짓지 아니할 것이다. 그랬습니다.
나는 못 깨달았느니,
깨달아야 되겠다느니,
알음알이가 있어서 장애가 많이 된다느니, 이런 생각을 결국 안하게 될 것입니다. 그랬네요.
但就能知知解底心上하야 看하라 還障得也無아
能知知解底心上에 還有如許多般也無아
從上大智慧之士가 莫不皆以知解로 爲儔侶하며
以知解로 爲方便하야 於知解上에 行平等慈하며
於知解上에 作諸佛事호대 如龍得水하고 似虎靠山하야
終不以此로 爲惱하나니 只爲他識得知解起處일새니라
旣識得起處인댄 卽此知解가 便是解脫之場이며 便是出生死處라
旣是解脫之場이며 出生死處인댄 卽知底解底當處寂滅이며
知底解底旣寂滅인댄 能知知解者도 不可不寂滅이며
菩提涅槃과 眞如佛性도 不可不寂滅이리니 更有何物可障이며
更向何處하야 求悟入이리요
但就能知知解底心上(단취능지지해저심상)하야 看(간)하라.
다만 알음알이를 아는, 알음알이가 있다고 하는, 알음알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는 그 마음 위에서, 그 마음에 나아가가지고 잘 살펴보라.
“듣는 놈을 들어보라.” 이 뜻입니다. 알음알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는가? 아는 위에서, 그 아는 거기에 나아가서 그 아는 실체를 한번 보라.
“듣는 놈을 듣고, 보는 놈을 보아라.” 그 말입니다. 이것이 능엄경에서
反聞聞自性(반문문자성)이라고 해가지고 이런 방법의 공부인데, 이것은
시삼마 화두도 역시 그렇고, 예를 들어서 손가락을 움직여보고
“무엇이 이 손가락을 움직이는가?” 라고 하는 것을 참구 하는 것도 결국 똑 같은 겁니다. 내가 알음알이를 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그것이 뭔가? 이것을 참구하는 것이나,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이 들어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인가?” 그 다음에
**拖死屍句子(타사시구자)라고 해서 “죽은 송장을 끌고 오는 놈이 무엇인가? 어느 놈이 송장을 끌고 왔는가?” 라고 하는 것 똑 같은 것이지요.
같은 화두입니다. 화두를 할 때, 또는 누구에게 지시를 할 때, 이것이 결국은 똑 같은 맥락입니다. 그것을 한번 보라 이것이지요. ‘무엇이 들어서 하는가?’ 그런데 그것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觀하기 시작하면
還障得也無(환장득야무)아? 그 때, 觀하기 시작한 그 순간에도 장애가 되느냐? 이 말입니다. 알음알이가 장애가 되느냐? 이미 그것은 알음알이를 아는 그 근원자리를 관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장애는 없습니다. 바로 들어가는 겁니다. 공부에 바로 들어가는 소식이기 때문에 그래서 還障得也無아? 또한 장애가 되느냐? 이렇게 하는 겁니다.
能知知解底心上에, 능히 知解를, 알음알이를 아는 마음 위에
還有如許多般也無(환유여허다반야무)아?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하니, 알음알이를 안다. 알음알이 하고 있는 것을 아는 그 위에 뭐가 들어서 알음알이를 아는가? 라고 하는데, 그 때 무슨 허다한 것이 거기에 있을 수 있습니까? 무슨 알음알이가 거기에 또 있느냐? 근본자리에, 예를 들어서 나무가 많은 가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잎이나 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이놈의 가지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왔는가?’ 하고 추궁해 들어가면 근본기둥에 가까이, 원 줄기에 도달할 거란 말입니다. 원 줄기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잎이니 가지니 하는 것은 배제돼버려요. 잎이니 가지니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대혜스님은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잎이니 가지니 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 경지에 딱 도달해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겁니다. 잎이니 가지니, 아무 것도 잎하고 가지하고 아무 관계없으니까요. 원 기둥만 잡고 있는데 무슨 잎이니 가지니, 그것이 문제될 것이 있습니까? 그래 알음알이, 그것이 문제가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알음알이 하는 놈이 무엇인가? 뭐가 알음알이 하는가? 알음알이를 아는 그 당체를 관찰하여보니까 알음알이는 이미 벌써 떠나버렸어요. 알음알이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 말입니다. 還有如許多般也無아? 허다한 알음알이가 있느냐?
從上大智慧之士(종상대지혜지사)가,
과거의 큰 지혜를 가진 선비들이
莫不皆以知解(막불개이지해)로 爲儔侶(위주려)하며,
모두가 알음알이, 모두가 아는, 지식이라고 하지요. 모두들 지식, 그것가지고 벗을 삼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어. 전부 그 지식가지고 벗을 삼았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들어서 불교도 하고, 그것이 들어서 공부하는 방법도 알고 그랬지요. 그러니
以知解(이지해)로 爲方便(위방편)하야,
知解로써, 알음알이로써 방편을 삼아서
於知解上(어지해상)에 行平等慈(행평등자)하며,
알음알이 위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於知解上에 作諸佛事(작제불사)호대,
알음알이 위에서 여러 가지 불사를 짓되,
如龍得水(여용득수)하고 似虎靠山(사호고산)하야,
용이 물을 얻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하는 것과 같아서
終不以此(종불이차)로 爲惱(위뇌)하나니,
마침내 이것으로써 번뇌를 삼지 않나니,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줄기를 알았다. 나무 밑둥치를 알았다는 겁니다.
그 때는 줄기가 많아야 됩니다. 가지가 많아야 ‘아 이것이 좋은 나무구나!’ 잎이 많아야 좋은 나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겁니다. 잎도 써 먹을 수가 있고 가지도 써 먹을 수가 있는 겁니다. 알음알이가 많아야 됩니다. 지식이 많아야 됩니다. 생각이 많아야 된다고요. 생각을, 근원자리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생각을, 근원자리를 제대로 꿰뚫어 보았다면 그 때는 생각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가지가 무성하면 무성할수록 좋은 나무입니다. 잎이 무성해야 됩니다.
이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알음알이로써 방편을 삼고, 알음알이로써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알음알이로써 모든 불사를 짓는다. 마치 그 일이
如龍得水하고 似虎靠山하야 終不以此로 爲惱라.
결국 그것은 번거로운 것으로ㆍ번뇌로ㆍ장애로 삼지를 않는다.
只爲他識得知解起處(지위타식득지해기처)일세니라.
다만 왜 그러냐? 알음알이가 뛰어난 근본자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只爲 = 다만 때문이다. 무엇 때문이냐? 그놈. 알음알이가 일어난 그 당체자리를 識得했기 때문이다. 참~ 아주, 대혜스님 이 분은요? 선지식으로서 아주 참으로 명쾌한 선지식입니다.
旣識得起處(기식득기처)인댄 → 기식득기천댄,
이미 일어난 곳을 알았을 진댄,
卽此知解(즉차지해)가, 곧 이 알음알이가
便是解脫之場(변시해탈지장)이며, 곧 해탈 場이며,
여기 기식득기천댄 ←이렇게 읽으세요.
기처인댄 ←이렇게 읽는 것이 아닙니다. 토를 인댄 이라고 달기는 했는데요. 한문을 읽는 방법은 기천댄 ←이렇게 읽어야 됩니다. 기처인댄 이 아니고요. 만약에 處가 아니고, “척” 이라고 하면 기척인댄 이라고 읽어야 됩니다. 이것이 한문 읽는 법에 관계돼서 참고로 우리가... 여러분이 다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으니까, 남을 가르치려면 그런 것도... 그것이 그야말로, 옛날에 이 있을 때, 머리에 이가 있고 옷에 이 있을 때, 이 말고도 작은 알이 있어요. 그것을 뭐라고 그러지요? 쎄가리요? 이것이 쎄가리 잡는 일입니다. 이런 것 가지고 논하는 것은 이 잡는 일도 아니고 쎄가리 잡는 일입니다. 이가 없으려면 쎄가리라도 자꾸 잡아야 이가 없어지지요.
기천댄 卽此知解가, 곧 이 알음알이가 便是解脫之場이라.
해탈 場이라.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뭘 보고 듣고 이해하고 느끼고, 말을 주고받고 춥고 더운 것을 알고 하는 그것 빼놓고 사실 뭐가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知解의 한 작용입니다. 그것이 知解의 작용이고, 도의 작용이고, 마음의 작용입니다. 해탈의 場이라고 그랬잖아요. 解脫場.
便是出生死處(변시출생사처)라. 생사를 벗어나는 그 자리다.
旣是解脫之場(기시해탈지장)이며 出生死處(출생사천)댄,
이미 解脫場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그 곳이라면
則知底ㆍ解底ㆍ當處寂滅(즉지저해저당처적멸)이며,
知니 解니, 다른 것이 그 자리에서 적멸한 자리입니다. 當處 = 그 자리에서 조용해져 버린다 이 말입니다. 알음알이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잎이 아무리 많고 가지가 아무리 무성해도, 무성할수록 좋고 잎이 많을수록 좋은 겁니다.
知底ㆍ解底ㆍ旣寂滅인댄, 知와 解가 이미 적멸할진댄,
能知知解者(능지지해자)도, 능히 알음알이를 아는 것도
不可不寂滅(불가불적멸)이며, 아는 것도 또한 不可不寂滅이라.
아는 것도 저절로 적멸이다 이 말입니다.
菩提涅槃(보리열반)과 眞如佛性(진여불성)도 不可不寂滅이러니,
다 적멸한 자리다 이 말입니다. 보리니ㆍ열반이니ㆍ진여니ㆍ불성이니 얼마나 고급용어입니까?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급용어들입니다.
그래봤자 이것 적멸한자리다 이 말입니다. 텅 비어서 아무 것도...
누가 진여니ㆍ불성이니 했어요? 누가 보리니ㆍ열반이라 했어요? 누가 해탈이라고 했어요? 번뇌 망상이라고 누가 했어요? 있는가? 찾아보세요.
있는가? 내놔보세요. 진여불성도 없는데 하물며 보리니 번뇌니 무명이니 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更有何物可障(갱유하물가장)이며,
다시 무슨 물건이 있어서 가히 장애 할 것이며,
更向何處하야 求悟入(구오입)이리요?
어느 곳을 향해서 깨달아 들어감을 구하겠는가? 바로 지금 눈뜨고 사물보고, 귀 열고 소리 듣고, 입 열고 말하고 하는 바로 그 자리다 이겁니다. 그 사실입니다. 돌아올 것도 없습니다. 어떤 이는 “획 돌아온다.” 그러더라고요. 원을 둥글게 그려놓고 1에서 한 바퀴 돌아오면 마지막이 100인데 1에서 1ㆍ2ㆍ3ㆍ4로 돌아가면 길이 머니까 1에서 획 돌아서면 요즘말로 빽도 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윷놀이 할 때 빽도 나오면 바로 졸업입니다.
그와 같이 설명을 하더라고요. 그와 같이 설명을 해요.
거기에 돌아올 것도 없습니다. 앉은 그 자리에서 해탈입니다. 앉은 그 자리에서... 무슨 끝나는 그 자리로 꼭 와야 되는 것이 아니라고요. 빽도를 쳐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고요. 앉은 자리에서 끝내요. 앉은 자리에서...
획 돌아서면 끝나는 자리다. 획 돌아서면 1이 100이 된다. 이러더라고요.
1이 100이 된다. 1이 그 자리에서 해탈이지, 무슨 1이 100이 돼야 해탈이냐? 이 말입니다.
釋迦老子가 曰 諸業從心生일새 故說心如幻이로니
若離此分別하면 則滅諸有趣라하며
僧이 問大珠和尙호대 如何是大涅槃이닛고
珠云 不造生死業이 是大涅槃이니라
僧이 問如何是生死業이닛고
珠云 求大涅槃이 是生死業이라하며 又古德이 云 學道人이
一念에 計生死이면 卽落魔道요 一念에 起諸見하면
卽落外道라하며 又淨名이 云 衆魔者는 樂生死어든 菩薩은
於生死에 而不捨하고 外道者는 樂諸見이어든 菩薩은 於諸見에
而不動이라하니 此乃是以知解로 爲儔侶하고
以知解로 爲方便하야 於知解上에 行平等慈하고 於知解上에
作諸佛事底樣子也니라
只爲他了達三祗劫空하야 生死涅槃이 俱寂靜故니라
釋迦老子가 曰(석가노자왈), 석가노자가 말하기를
諸業從心生(제업종심생)일새, 모든 업은 마음으로부터 생겼을 세.
故說心如幻(고설심여환)이로니,
그러므로 마음은 如幻과, 환과 같다고 내가 말하나니,
若離此分別(약리차분별)하면, 만약 이러한 분별을 떠난다면
則滅諸有趣(즉멸제유취)라하며, 곧 모든 趣를 = 諸有趣 = 모든 갈래 = 삶의 길, 삶의 방법을 전부 소멸한다. 라고 하며,
僧(승)이 問 大珠和尙(문대주화상)호대
如何是大涅槃(여하시대열반)이닛고?
珠云(주운) 不造生死業(불조생사업)이 是大涅槃(시대열반)이니라.
생사 업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이다. 대열반이 무슨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僧이 問 如何是生死業이닛고?
珠云 求大涅槃이 是生死業이라하며,
대열반을 구하는 것이 생사 업이다. 대열반이 뭐라고 대열반을 자꾸 구하려고 하느냐? 대열반을 구하는 그것이 생사 업이다.
참~~ 대단한 질문이지요? 대단한 대답이고요.
이 대주 화상은 마조스님 밑에 참으로 유명한 선사지요. 이 분은 깨닫고 나서 자기혼자 공부하면서 頓悟入道要門(돈오입도요문)이라고 하는 간단한 책하나 써가지고 천하의 대선지식으로 지금까지 추앙을 받습니다.
거기에 상ㆍ하권이 있는데 상권은 말하자면 저술이고, 하권이 문답입니다.
문답 속에 있는 내용이라고요.
무엇이 해탈입니까? 라고 물으니까
누가 너를 붙들고 있니? 해탈은 벗어나서 자유로운 것 아닙니까?
뭐가 벗어나서 자유로운 것입니까?
누가 너를 붙들고 있느냐?ㆍ누가 너를 붙들고 있기에 벗어나는 길을 묻느냐? 이런 식으로 문답이 되어있습니다. 아~ 이분 참, 지식도 풍부하고 지혜가 뛰어난 선지식이 돼놔서 적절하게 조사스님들의 법문, 또는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사실 아주 빛납니다.
又古德(우고덕)이 云, 또 고덕이 말하기를
學道人(학도인)이 一念(일념)에 計生死(계생사)이면,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순간에 생사를 계유하면,
卽落魔道(즉락마도)요. 마군이의 길에 떨어져버린다.
一念에 起諸見(기제견)하면, 한 생각에 여러 가지 소견을 일으키면
卽樂外道라하며, 곧 외도에 떨어진다. 외도의 길과 마군이의 길을 이렇게 좀 나눠서... 우리는 마군이ㆍ외도를 같이 보는데, 세분하면 그렇습니다.
又淨名(우정명)이 云, 또 정명이 운 = 유마거사.
衆魔者(중마자)는 樂生死(낙생사)어든,
마군이들은 생사를 좋아하고, 菩薩(보살)은
於生死에 而不捨(이불사)하고, 생사를 버리지 아니해요.
生死 싫다고 버리지 않는다. 이겁니다. 생사 해탈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생사를 벗어나면 어쩌려고요? 보살행을 못하잖아요. 생사를 가지고 있어야 중생제도하지요. 菩薩은 生死에 而不捨니라.
外道者는 樂諸見이어든, 외도들은 여러 가지 소견.
무슨 62견이라든지, 92견인가? 많게는 그렇게까지 나가지요.
菩薩은 於諸見에 而不動이라하니,
여러 가지 소견, 이 사람은 이런 소견을 피력하고, 저 사람은 저런 소견을 피력하고, 그래도 보살은 거기에 꿈쩍 달싹 않는다. 이 말입니다. 왜냐? 그 뿌리를 아니까요. 누가 이 나무 가져와서 이야기하고, 저 나무 가져와서 이야기하고, 이 줄기 가져와서 이야기하고, 저 가지 가져와서 이야기하고 보살은 그 뿌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묵묵할 뿐입니다.
此乃是以知解로 爲儔侶(위주려)하고, 알음알이로써 벗을 삼고,
以知解로 爲方便(위방편)하야, 알음알이로써 방편을 삼아서
於知解上에 行平等慈하고, 알음알이 위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於知解上에 作諸佛事底樣子也(작제불사저양자야)니라.
알음알이 위에서 온갖 불사를 짓는 본보기다.
作諸佛事底樣子也니라. 본보기다.
只爲他了達三祗劫空(지위타요달삼기겁공)하야,
다만 그는 三祗劫이 空한 것을 了達해서 生死와 涅槃이
俱寂靜故(구적정고)니라. 함께 적멸했기 때문이니라.
三祗劫이라는 것이 결국 뭡니까? 길고 긴 시간이지요. 길고 긴 시간이 공 한줄 아나ㆍ하루가 공 한줄 아나ㆍ한 시간이 공 한줄 아나 시간이 공 한줄 아는, 시간성을 초월한 입장이라면 생사가 어디 있으며 열반이 어디 있느냐? 다 적멸한 그 자리다.
旣未到遮箇田地인댄 切不可被邪師輩의 胡說亂道하야
引入鬼窟裏하야 閉眉合眼하고 作妄想이어다
邇來에 祖道衰微하야 此流如麻似粟하니 眞是一盲이 引衆盲하야
相牽入火坑이라 深可憐悶이로다
願公은 硬着脊梁骨하야 莫作遮般去就어다
作遮般去就底인댄 雖暫拘得箇臭皮袋子住하야 便以爲究竟이나
而心識紛飛호미 猶如野馬하야 縱然心識이 暫停이나
如石壓草하야 不覺에 又生하나니 欲直取無上菩提하야
到究竟安樂處면 不亦難乎아
旣未到遮箇田地(기미도자개전지)인댄, →기미도자개전진댄,
이미 아직은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切不可被邪師輩(절불가피사사배)의, 간절히 邪師輩들의
胡說亂道(호설난도)하야, 어지럽게 이야기하고 어지럽게 말해서
引入鬼窟裏(인입귀굴리)하야, 귀신 굴속에 이끌려 들어가서
閉眉合眼(폐미합안)하고, 눈썹을 딱~ 닫고 = 눈을 딱~ 감고 = 合眼.
作妄想(작망상)이어다. 망상을 지음을 입지 말지어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묵조선을 비판하는 소리입니다. 묵조선은 눈을 딱~~ 감고, 캄캄하게 그렇게 해가지고 결국은 그 속에서 나온 사람이 ??지요?
그래서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그 많고 많은 망상을 하나의 망상으로 집약시키는 겁니다. 하나의 망상이 뭡니까? 간시궐ㆍ수미산ㆍ무 자ㆍ시삼마. ←이것이 하나의 망상으로 집약시킨 겁니다. 하나의 망상으로 집약시키면서 온갖 망상을 다 털어내는 것이지요. 아주 좋은 방법이지요. 정말 앉아서 온갖 망상을 다하고 있다면, 그 많은 망상을 환히 들여다본 겁니다. 그러면 저절로 하나의 망상으로 집약시키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망상, 화두, 의심 하는 것. 탐ㆍ진ㆍ치ㆍ만ㆍ의라 해가지고 의심 하는 것이 교리 상에 번뇌중의 하나거든요. ‘왜?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ㆍ개가 왜?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이것은 사실 망상중의 망상입니다. 세상에 그런 망상 없잖아요.
왜? 개가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ㆍ왜? 없다고 했는가?ㆍ왜? 없다고 했는가?’하지만 그것을 몰아붙여 들어가다 보면, 그것마저도 다 털어져나가고 疑團만 獨露(의단독로)한 그런 경지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러한 경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내가 그런 경지 이전 상황을, 말하자면 온갖 많은 망상들을 하나의 망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邇來(이래)에, 요즘에
祖道衰微(조도쇠미)하야, 조사의 道가 衰微해서
此流如麻似粟(차류여마사속)하니,
이러한 流들이, 묵조선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고 조와 같다. 그렇게 많다.
眞是一盲(진시일맹)이 引衆盲(인중맹)하야,
참으로 한 맹인이 여러 맹인들을 이끌고
相牽入火坑(상견입화갱)이라.
서로 붙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격이다.
深可憐愍(심가연민)이로다. 매우 가히, 심히 깊이 가히 불쌍하고 불쌍하다.
願公(원공)은, 원컨대 공은
硬着脊梁骨(경착척양골)하야, 굳게 脊梁骨을 세워서,
이것은 좌선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좌선한다고 하는 의미도 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더 많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서, 정신 바짝 차리는 것을 脊梁骨을 세운다. 우리가 그냥 자세를 뒤틀리게 앉았다가 脊梁骨을 빡빡하게 딱 세우면 정신 차리는 의미가 되거든요. 그래서 정신 차리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莫作遮般去就(막작자반거취)어다. 이러한 거취를 짓지 말지어다.
作遮般去就底인댄, 이런 거취를 짓는다면
雖暫拘得箇臭皮袋子住(수잠구득개취피대자주)하야,
비록잠깐 동안은 이 냄새나는 가죽. 냄새나는 가죽자루 = 몸뚱이 = 육신이지요. 육신을 잠깐 구속해가지고 머물러있지만, 그것을 머물러가지고
便以爲究境(변이위구경)이나, 곧 구경을 삼으나, 몸뚱이를 한 곳에 가만히 머문다면, 그래서 그것을 최고라고, 究境이 최고지요. 최고라고 여기나
而心識紛飛(이심식분비)호미, 心識은 어지럽게 날고 있거든요.
아~~ 별별 망상 다 합니다. 별별 망상을 다 하는 것이
猶如野馬(유여야마)하야, 마치 아지랑이와 같아요. 봄날 아지랑이가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나부낍니까? 하지만 그것이 실체가 없는 것이지요.
縱然心識(종연심식)이 暫停(잠정)이나,
心識이 잠깐은 머문 듯하지만,
如石壓草(여석압초)하야, 마치 돌로 풀을 짓누른 것과 같아요. 풀을 짓누르고 한번 씩 우리가 울력하다 들춰보면 안 죽고 돌 밑에 노오란 싹이 꽉~ 차있습니다. 뿌리가 싱싱히 살아있으니까 시간이 가고 결국엔 비집고 나옵니다. 그것이 풀의 속성입니다. 모든 풀은 다 그렇다고요. 우리망상이라는 것이 마치 그와 똑 같다. = 如石壓草.
不覺(불각)에 又生(우생)하나니, 모르는 사이에 또 그래서
欲直取無上菩提(욕직취무상보리)하야,
直取無上菩提 = 無上菩提를 바로 취해서
到究竟安樂處(도구경안락처)면, 究竟安에 이르고자 한다면
不亦難乎(불역난호)아?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가지고는,
뿌리를 확 캐서 뜨거운 햇빛에 확 말려가지고 잡초를 그렇게 죽여야, 그것이 근본적으로 다 죽는 것이지, 돌로 짓눌러 놔봐야 그것이 그 안에서 노오란 싹이 그냥 똬리를 틀고 올라오고 있는데 어디 풀이 죽나요? 그래가지고 망상이 다 사라지고 무상대열반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우리 강원에 있을 때, “초발심자경문 한 3000독 읽어도 물리가 안 나거든 치문을 또 한 1000독 읽어라. 치문을 1000독 읽어서 물리가 안 나거든 그 다음 서장을 많이 읽어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물리가 난다.” 그랬는데, 이것 비록 편지지만 대혜스님의 편지 문장이 참~~ 뛰어납니다.
읽어보면 그냥 개울물이 척~~ 흐르다가 큰 못을 만나 갖고 빙빙 돌다가 끄트머리에 가서 터진 곳을 만나면 또 촥~~ 밑으로 흘러내려가고, 바위가 있으면 소용돌이 되고 그러면서 또 흐르고, 또 넓은 공간을 만나면 잔잔하게 도도히 흐르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자꾸 흐르잖아요.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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顚倒 :알음알이가 장애가 된다. 나는 못 깨달았다. 깨달아야 된다.
只遮三顚倒가 便是生死根本이라... 다만 이 세 가지 전도가 이것이야말로 진짜 생사의 근본이다
알음알이로써 방편을 삼고, 알음알이로써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알음알이로써 모든 불사를 짓는다. 우리가 뭘 보고 듣고 이해하고 느끼고, 말을 주고받고 춥고 더운 것을 알고 하는 그것이 바로 知解의 한 작용이고, 도의 작용이고, 마음의 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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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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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造生死業이 是大涅槃이니라...생사 업을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이다.고맙습니다. _()()()_
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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