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괴물' '신기전' '미인도' '왕의 남자'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이 영화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역사'는 실제 있었던 일을 지칭하기도 한다. 우리가 소위 '팩션'이라고 말하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허구물들이 바로 이런 영화들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을 든다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거론한 영화들이 한국 영화 흥행 계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들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미인도'의 줄거리는 이렇다. 신윤복은 유복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다. 아버지 신한평은 도화서의 중심 세력이었는데 새로 즉위한 정조와 그의 총애를 받는 김홍도로 인해 권력에서 멀어지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아 주기를 바란다. 문제는 아들에게 미술적 재능이 없다는 것. 재능은 도화서 화원이 될 수 없는 딸에게서 발견된다. 이에 신한평은 딸을 아들처럼 키워낸다. 영화 '미인도'는 바로 "신윤복이 여자였을 수도 있다"라는 가설에서 시작한다.
신윤복이 남자가 아닌 여자였을 것이라는 상상력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도화서 화원들 간의 경쟁구도로 확장된다. 이 구도에는 왕의 총애를 받는 새로운 세력인 김홍도와 왕의 총애를 잃게 된 구세력 간의 대결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왕의 남자'에서도 발견된다. 남사당 놀이패들이 왕의 관심을 받는다. 이는 단순히 왕의 취향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정쟁의 핵심 주제 중 하나로 변주된다. 결국, 연산군 폐위와 깊숙이 연관된 사건으로까지 확산되는 것이다.
▲ (왼쪽부터) 영화 '신기전'의 한 장면,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 /조선일보 DB
흥미롭게도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들은 '왕' 혹은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괴물'이나 '신기전'은 국가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기전'은 "허약한 국가였던 조선이 자체 개발의 무기를 통해 대국과 맞설 수 있었다"라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신기전'이라는 새로운 무기의 발명으로 대국과 상대할 만한 힘을 갖췄다는 것이다. '신기전'은 "이러저러한 기구가 있었다"라는 역사의 한 구절에서 출발했다. 명나라와 조선의 갈등, 명나라라는 제국에 대항한 구체적 서술은 사실 역사서에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영화 관객들이 한국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에 환호한다는 사실이다. 재해석은 대부분 한국의 저력과 위력을 설파하는 쪽인 경우가 많다. 동북공정과 같은 최근의 세계사적 이슈도 한 몫 했겠지만 사실상 한국 영화에 있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국가'라는 개념을 강화하고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쪽의 영화들이 계속해서 관객들의 환대를 받아온 것이다.
한국 영화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할 수 있을 '쉬리'도 '국가'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역사와 국가라는 개념에 대한 재해석과 상상력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형상화된다는 것 일 테다. 최근에 주목 받고 있는 역사적 상상력이 실존 인물의 삶에 대한 재해석인 점도 연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 '미인도'는 도화서라는 국가 제도의 일원이었던 화원 신윤복이 아니라 인간 신윤복의 욕망과 예술에 대한 갈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으로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그림의 세계에 진입했던 모습이 아니라 여성적 욕망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개인의 내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이는 과거 '국가' '제도'와 관련해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하고 음모론에 견줄 만한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던 팩션의 경향과 상당히 다르다. '역사'가 그것을 기록하는 사관과 해석자의 시선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판단이 아니라 아예 '역사' 자체를 상상으로 재조립할 수 있는 소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미인도'나 '바람의 화원'같은 서사물이 국가에 소속된 화원들의 삶을 그리면서 "신윤복이 여자였더라면"이라는 상상력만을 보여주는 것은 역설적 의미는 없을까? '국가'라는 강력한 힘은 지우고 근거가 희박한, 상상력으로 역사적 소재를 사용하는 것 말이다. 역사에 대한 재해석은 역사적 사실의 남용이라는 문제와 섬세하게 구분돼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