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개국공신 선산 김씨 시조 김선궁
순충공(順忠公) 김선궁(金宣弓)은 선산김씨의 시조다. 어렸을 때부터 성품이 담대하고 용맹스러웠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에게 해를 끼친 자를 죽이고, 제 발로 관청에 찾아가 자수했는데, 효심이 남다르다는 점이 인정되어 풀려난 일화가 유명하다. 태조 왕건이 선산 지역에서 후백제 신검과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는 자원하여 전투에 나서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고려개국 공신으로 이름을 올렸다. 왕건이 특별히 그를 아껴 자신의 활을 하사하며 ‘선궁’이라는 이름을 내리기도 했다.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 아래에 묘소와 재사(齋舍)인 미석재(彌石齋)가 있다. 매년 음력 10월1일에 이곳에서 향사를 지낸다. ‘구미 인물열전’ 11편은 고려 개국 공신이자 선산김씨 시조인 김선궁에 대한 이야기다.
#1 15세의 나이로 참전하다
선산김씨의 시조 김선궁은 고려 태조 5년(922)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부근에서 출생했다. 원래 이름은 김선이었다. 김선은 김알지의 30세손으로 경순왕의 먼 친척(종형제)쯤 되는 셈이다. 그가 어렸을 때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아버지 체의(體誼)가 봉변을 당해 다쳤다.
“아버지, 몸이 많이 상하셨군요. 도대체 누구의 짓입니까?”
그는 아버지를 상해한 자를 찾아갔다. 맹렬하게 응징했다. 상대 역시 녹록지 않아 저항이 심했지만, 그의 힘을 당하진 못했다. 김선은 그를 살해했다. 그러고는 스스로 관청에 들어갔다. “내가 살인을 했습니다.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관아에서는 어린애가 이런 엄청난 일을 한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린 네가 그토록 포악한 자를 응징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니냐. 그래도 사람을 죽인 일은 잘한 일이 아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서서 그의 행동이 지극한 효심에서 나온 것임을 증언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 효심이 예사롭지 않음이 인정되어 결국은 장하다는 칭찬까지 하며 풀어주었다. 남달리 효심이 깊고, 그 성정이 담대하고 용맹스러웠음을 짐작하게 하는 얘기다. 그런 그가 열다섯 살 때 비범한 모습을 또 드러냈다.
왕건이 일선군(선산)에 머물 때의 일이다. 왕건이 일선군으로 부대를 끌고 온 것은 후백제를 치기 위해서였다. 후백제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으로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왕위를 차지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성한 상태였다. 그러나 견훤이 가까스로 금산사를 탈출해 왕건에게 투항하자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왕건은 그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이에 마음이 달라진 견훤은 자식인 신검을 정벌해줄 것을 왕건에게 청했다. 때마침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투항해 옴에 따라 주저하던 왕건은 비로소 후백제 정벌에 나섰다. 견훤도 왕건과 함께 참전했다. 그 전해(935년)에 신라가 스스로 투항함에 따라 이제 신검만 항복을 받으면 삼한통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왕건은 단단히 별렀다. 그리하여 8만7천여 군사를 이끌고 일선군으로 내려온 것이다. 태조 19년(936) 9월이었다. 왕건은 군사를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남진을 계속했다. 일선군 쪽에서 신검과 대치했다. 일리천을 사이에 둔 두 부대는 창검을 번쩍이며 전의를 다졌다. 그런 상황에서 왕건은 이 지역의 유능한 장수들을 구하고 병사를 모집했다. 이 지역의 지세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의 장수와 병사들이 많을수록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이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의욕이 컸다.
그러던 중에 15세의 한 소년이 지원해 왔다. 김선이었다.
그가 지원하자 모병을 담당한 장수가 눈을 크게 떴다.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선은 15세면 어른 자격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당당하게 나섰다. 장부로서의 자세가 나름대로 잡힌 것이 퍽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장수는 그를 특별하게 주목했다. 소년 스스로 찾아와 지원한 것이 전에 없던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출신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각 왕건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왕건은 김선을 불러오게 했다.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나서다니, 대단한 기개로구나. 네 스스로 한 것이냐?”
“네, 스스로 한 것입니다.”
“지원을 한 이유가 무엇이냐?”
“저의 아버지를 견훤의 군인들이 살해했기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후백제 견훤이 대야성(합천)을 공격한 후 일선군(구미·선산 일대)에 침입했을 때 아버지가 견훤 군에게 살해당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효심이 대단하구나.”
옆에서 참모가 이 지역에 널리 알려진 김선의 효심을 설명하면서 어릴 적의 이야기를 더 보탰다. 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울러 그의 집안이 대단한 호족임을 보고받자 더욱 기대를 가졌다. 그의 선대는 신라 문성왕 이후 선산지역으로 진출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집안을 건사하였고, 번성하여 벌족을 이루었다. 왕건은 그 점에서 그를 더욱 각별하게 대하였다. 고려를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환선길의 반역 등 나라 안의 갈등이 많았다. 각 지역 호족들의 권세가 왕실을 위협하는 지경이 비일비재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각 세력을 규합하는 일이 시급했다. 그런 상태에서 신라와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선산 지역은 신라와 가까운 지역이라 신라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할거가 더욱 거셌다. 그들 가운데는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한 것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꽤 있었다. 왕건은 이 지역의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그러한 화합의 모습을 통해 각 지역에 할거하는 호족을 통합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절감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왕실과 핏줄이 닿은 거족의 자제인 김선과 만난 것이다.
“참으로 귀한 인연 아닌가?” 왕은 말했다.
“신라 왕손의 후예이자 일선 지역의 거족이니, 그대는 내가 원하는 화합의 촉매제로 큰일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구나. 짐을 도와주겠는가?”
“폐하의 크신 뜻에 동참하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여깁니다. 신명을 다해 새 나라를 이루는 데 초석이 되겠습니다.”
김선은 어른 못지않은 기개를 결연하게 드러냈다. 김선은 이 지역의 벌족으로 인심을 잃지 않아서 지역의 병사들도 그를 잘 따랐다. 그리하여 그의 부대는 어디에서나 단합이 잘 되면서 눈에 띄는 용맹함을 자랑했다.
일리천 전투는 차츰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려군은 왕순식·왕렴·유금필·김철·홍유·공훤 등 수십 명의 장수와 그들의 지휘 아래 모인 기병·보병을 동원, 강안을 깃발로 덮으며 포진했다. 그 기세와 함께 이 전쟁에 참여한 견훤이 왕건의 옆에 버티고 있는 걸 본 후백제군은 흔들렸다. 이에 후백제의 좌장군 효봉·덕술·애술·명길 등 4명이 견훤이 타고 있는 말 앞에 항복했다. 왕건은 그들을 기꺼이 자신의 편으로 받아들이며 물었다.
“신검은 어디에서 지휘를 하는가.”
“중군 속에 있습니다.”
왕건은 명령을 내렸다.
“좌우로 공격해서 격파하라!”
이에 대장군 공훤은 삼군을 효율적으로 편성하여 후백제군의 중군을 향하여 일제히 공격하게 했다. 어지러운 먼지가 강안을 덮었다. 그런 가운데 차츰 전세는 고려에 유리해졌다. 후백제군은 패색이 짙었다. 고려군은 후백제의 장수인 흔강과 견달 등을 비롯하여 군사 3천300여명을 사로잡고 5천700여명의 목을 베었다. 후백제군은 견디다 못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추격했다. 긴 추격전이 벌어졌다. 후백제군은 황산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지만, 고려군의 추격에 한계를 느꼈다. 이에 신검은 아우 양검·용검과 문무관료들을 데리고 와서 왕건에게 항복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김선 역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몫을 했다. 왕건은 김선이 어린 나이에 자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운 것을 크게 치하했다. 친히 자기 활을 하사하고는 말했다.
“그대의 공이 너무 커서 짐은 무엇으로든 보답하고 싶다. 우선 나의 활을 내리고, 아울러 그대의 이름을 ‘선(宣)’에 ‘궁(弓)’을 더해 선궁으로 부르겠다.”
왕은 늘 그를 옆에 따르게 했다. 그러면서 자주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곤 했다.
“참으로 기특하고, 대단한 일이 아닌가? 앞으로 너의 가문은 창창할 것이다. 그 토대를 어린 네가 이루어낸 것이다. 어른으로서도 감히 이루기 어려운 일이니, 참으로 만고에 드문 일이 아닐 수 없구나.”
그 후 선궁은 왕건을 따라 종행하면서 후백제를 완전히 멸하는 데 공을 세우고 삼한통합 익찬공신(翊贊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리고 정종 때에 순충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문종 때에 이르러 문화시중이 증직되고 일선백(선산백)에 추봉(追封)되어 일선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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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후손들도 역사에 큰 획 그어
김선궁은 목종 9년(1006) 85세로 영면했다. 말년에 관직을 떠나 고향 선산에 낙향했다. 현 선산군청의 청사 자리를 대지로 사용했다. 지금도 비봉산 아래 봉하루(鳳下樓) 터와 군민이 공의 덕을 추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향화를 올렸다는 진민사(鎭民祠) 터가 있다. 선산김씨유허비각(善山金氏遺墟碑閣)도 선산읍 완전리에 있다.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 아래에는 순충공 김선궁의 재사(齋舍)인 미석재(彌石齋)가 있다. 매년 음력 10월1일에 이곳에서 향사를 지내고, 종친들이 묵고 가기도 한다. 미석재를 중심으로 뒤편에 묘소가 있고, 앞쪽에는 신도비가 있다.
그의 후손들 역시 역사에 큰 획을 그으며 이름을 남겼다.
고려조를 지키려고 충절을 지킨 두 충신인 김제와 김주가 대표적이다.
또 조선조의 훌륭한 다섯 선비로 꼽히는,
1)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효정(金孝貞),
2) 성리학맥을 이은 김숙자(金叔滋),
3) 사림파의 종조로 성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김종직(金宗直),
4) 중종 때 좌의정·우의정을 지낸 김응기(金應箕),
5) 명종·선조 때 동인(東人)의 영수 김효원(金孝元),
6) 호조판서와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와 해사록’을 남기고, 반계수록’을 쓴 류형 원의 스승인 김세렴(金世濂) 등을 배출했다.
김종직이 그의 가계와 부친 김숙자의 전기와 행적, 부친의 제자와 종유자(從遊者), 가문의 제사법 등을 기록한 책인 ‘이존록(彛尊錄)’을 보면,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문하시중이었던 김선궁이 세상을 떠난 후 큰 아들 김봉술(金奉術)이 문하시중을 습작하고, 이어 그 후손들이 개경에 계속 머물러 벼슬을 하게 되자 후예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일선(一善)이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