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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에 잠든 순교자들의 이야기
2008년 1월 글 임성빈 요한 금구
<무명 순교자 비> 비문
오! 위대하신 주님의 용사들이여!
영원한 삶의 길인 진리를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전하시다가
당신들의 소중한 성명을
아낌없이 주님께 바치신
그 숭고한 정신을
저희들은 정성을 다하여 영원히 영원히 빛내리이다
<미리내 성지 무명 순교자 묘역 안내문>
이 묘역에는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이름조차 숨긴 채 순교하신
16위의 무명 순교자들이 모셔졌다.
1976년 수원교구의 순교자 현양사업으로,
좌로 12기는 4월 23일 용인군 내사면 대대4리 음다라니 산기슭,
소위 목 없는 줄 무덤으로 전해오는 곳에서,
중앙의 1기는 6월24일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골 산상에서,
우로 4기는 12월 17일 용인군 수지면 신봉2리
시봉부락 밭 기슭 돌무덤으로 전해오는 곳에서 옮겨 모셨다.
중앙의 1기 묘는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12월21일 순교 장소인 대구 관덕정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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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 없는 치명자 무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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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목 없는 치명자 12기 무덤’이 있던
용인 내사면 대대4리(양지IC. 서북방 1.5km)는
용인군 양지면 대대리 한터마을 - 일명 ‘무량골 응달말(음다라니=음달안골 마을?)이라는 곳입니다.
‘무량골 사기점’ 하면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군난을 피해 숨어살던 교우촌 산골 마을로
‘치명일기 851호 치명자’ 이희서(49세)는 이곳 한터 사기점에서 살다
병인박해 때에 죽산 포졸에 붙잡혀
1866년12월7일 당시 현청과 도호부사가 있던 죽산 감옥에서 치명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병인박해 당시
죽산 감옥에서 처형된 순교자는 모두 24명이라고 하나,
이 중 용인 이동면 묵리 병목골 사는 김 도밍고(치명일기137)와
용인출신 정도마, 정야고보, 방데레사, 금데레사
(치명일기 1428. 1458. 421. 1086),
그리고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함께 124위 시복 시성 심사에 올라있는
박 프란치스코(충청도 33세), 오 마르가리타 (여, 출생지 , 나이 불명)만이
이름과 본명이 전하여 질뿐
나머지 분들은 순교자들의 이름이 없습니다.
또한 이들 4인의 치명자들도 출신지가 용인 어느 곳인지가 불명인 것입니다.
미리내 오두재 넘어 해곡리 교우촌 출신으로
1945년 11월에 서울에서 서품된 조창희 분도신부의 증조부 조강 할아버지도,
그의 동생 조종 바오로와 함께 죽산 포졸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동생인 바오로는 어리다고 석방되고
형의 옥살이 수발을 들던 중 어느 날,
형님 식사를 준비해 갔는데
이미 형 조종이 처형되어 치명한 것을 옥졸을 통해 알았으니,
1866년 병인박해에 죽산 감옥에서 순교하였는데,
치명의 역사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없어
대대로 집안에 치명자로 구전 되어올 뿐이다.
죽산 감영의 치명자 기록에 관한 사정이 이러하였습니다.
양지면 대대리 한터 사기장(사기점) 교우촌은
현재 지도상에도 대대리 ‘사기장’ 지명으로 남아있는 곳입니다.
(사기점에서 무량골을 지나 영동고속도로 양지IC. 남방 맞은편4Km 지근거리에 은이마을.
그 은이성지에서 미리내성지로 오르는 <신망애- 삼덕고개>를 오르는 골짜기에도 사기점골 동이점골 회골, 은석골 터주골 등의 옹기 굽던 동리명칭과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대대4리의 한터 ‘무량골, 사기점’
(한터초등학교에서 98번 지방도로 동편 1.5Km) 하면 교우들이 군난을 피해 숨어살던 산골입니다.
이웃 동리인 ‘응달말’(음달안, 한터 초등학교 서북편1.2Km)
소위 목없는 12기 치명자 무덤이 있던 곳은
바로 이 대대리 마을이 군난의 와중에서 몸부림치던 눈물의 교우촌 이였으며
그들이 살던 고향이,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그들 삶의 사연들이 어떠했었는지를 침묵으로 말해줄 뿐입니다.
주님만이 순교자들의 잃어버린 이름들을 알아 계시고
그들의 고향, 옛 생각과 그날의 애달픈 사연들을 헤아리고 계시리라생각됩니다.
치명자들이 계신 곳에서는 늘 성소의 진한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김옥균 바오로(1954년 서품) 주교가
이곳 대대리 무량골 교우촌(한터 저수지 남쪽 깊숙히 들어간 마을)에서 태어나
백부가 계신 은이 마을에서 성장 하였습니다.
<시편 115>
모진 고생을 뇌면서도 나는 굳이 믿었노라.
답답할 때 나는 말하였노라. ‘사람은 다 믿을 수 없다’고.
제게 주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주님 당신 이름을 높이 부르며 찬미의 노래를 올리리다.
주님의 모든 백성 앞에서 저는 서원을 채워 드리리이다.
주님의 궁전 안뜰에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서.
나는 하느님 말씀 때문에,
충실한 증거 때문에 죽임당한 사람을 보았도다. 아멘 **
附記 : 임성빈 요한금구
참고자료
- 용인천주교회사(1981. 5.20). 달레 천주교회사.
103위 성인전(김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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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인 수지면 시봉(서봉)부락 돌무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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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수원교구의 순교자 현양사업으로 이장된 무명순교자 4위는
그 해 12월 17일 용인군 수지면 신봉2리
시봉부락 밭 기슭 ‘치명자의 돌무덤’으로 전해오는 곳에서 옮겨졌습니다.
수지 신봉리 시봉부락(서봉)은
분당 죽전동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바라보며 맞은편에 자리한 동리가
수지구 신봉동(LG자이아파트 1~6차가 있음)이며
그 북쪽의 해발265M <성지바위 고개-성지바위산>을 넘어가면
‘중손골(손곡)‘ 동리인데
’고기리 유원지‘ 들어가는 입구 동네(’낙생저수지‘ 남방 1Km)입니다.
이곳 수지의 동천리 손골과 이웃한 신봉리 교우촌은
옛 박해 때부터 달레 천주교회사에서도 언급된 유명한 곳입니다.
동천리, 신봉리 서북방 30리 지점 - 서울외곽순환국도(100번) 청계터널 근방에는
<하후현 성당>, <서 루도비꼬 신부의 유적지>가 있고 판교 신도시가 연하여 있습니다.
예로부터 용인에는 페레올 주교가 한때 피신하였다고도 전해지는
사리틔(용인 이동면 서리)의 ‘신부 터’ 그리고 ‘붉은 고개 전설’ 이나,
용인 태화산 북방 산중턱에 있는
‘성지굴’(광주군 도척면 상림리 시어골, 聖地堀)은
옛날 군난 때에 교우들이 숨어 모여서 기도하였던 굴이라 전해집니다.
7, 8명이 등어가 몸을 숨기고 기도할 수 있는 작은 바위굴로
시어골(광주군 도척면 상림1리)에서 태화산을 향해 계곡 물줄기를 따라가다가
계곡 우측 6부능선 큰 바위아래에 성지굴이 있습니다.
1936년 사제 서품된 박흥원 방지거 신부의 고향도 이곳 시어골 화전촌입니다.
인근에 시어골 공소가 있고, 6.25 동란 전후 때 까지만 하여도
60여호의 교우들이 공소를 이루며 신앙공동체를 갖던 마을입니다.
시어골에서 남쪽으로 태화산을 넘으면 가까이에 양지IC가 내려다 보이고
산기슭에 대대리 한터 사기장골이 있습니다.
이런 옛 군난때의 일화와 전설, 유적들은
은이 골배마실(남곡리), 한터(대대리), 먹뱅이 한덕골(묵리),
손골(수지 동천리)등지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이동면 서리 ‘사리틔’는
남인 대학자 권일신이 신해박해 때에 모진 매를 맞고 귀양 가던 중
광주현 구성 주막에서 숨을 거두고, 권철신 권상문이 신유박해로 숨을 거두자
그 자손들이 시신을 거두어 선영인 양근(양평) 강상면 대석리
한감개 마을 양자산(주어사 앵자봉 옆 산) 아래 효자봉에 안장한 후,
남은 가족들이 군난을 피해 양근을 떠나 용운 덕동, 원주 백운산, 횡성 풍수원등지에서 지내다가
1830년대 후반에 들어와 살던 곳으로서
그의 6대손인 권희집 마티아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순교자 ‘도리 헨리코’ 신부(1866.3.7 새남터 순교)가
1865년 5월27일 ‘루도비코 볼리에르’등 동료신부들과 함께
충청도 내포지방으로 입국 한 뒤의 첫 부임지가
수지 신봉리 인근의 손골마을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말을 배우며 거처하였는데
장 베르뇌 주교가 헨리코 신부의 한국문화- 언어 적응과정을 격려하고
교우촌 교우들을 돌아보기위해 이곳을 찾아와 하룻밤 지낸 곳이기도 합니다.
이듬해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2월에는 장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고,
2월27일 배교자 이선이(李仙伊)의 밀고로 헨리코 신부가 체포된 곳입니다.
*<김 도리 신부는 1864년 프랑스에서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한국 선교사로 부임했습니다.
지금의 손골성지 지역 - 용인시 수지읍 동천리에서
한국말을 배우며 선교에 나서다
병인박해때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키고 방안에서 혼자 기도를 하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됐습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돼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신부가 잡히던 날,
손골마을 북쪽으로 고개넘어 하후현 고개(하후현 성당-1903년)에서도
이선이, 장제철의 밀고로
헨리코 신부의 동료인 서 루도비코 볼리에르 신부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니
3월7일 새남터 형장에서 장 베르뇌 주교와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수지 신봉리 시봉부락과 동천리 손골에서 동쪽인
‘죽전동’ 우측으로 재를 넘어 30여리 인근이
그 유명한 모현면 오산리 사기막골 교우촌입니다.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지 근처입니다.
오산리 사기막골은
오산리 본동에서 2Km 산골짜기로 더 들어간 두메산골이었습니다.
옛날 군난을 피해 들어온 교우들만으로 이루어진 마을로서,
1920년대 까지만 하여도 교우 70여호가 살던 큰 공소였다 한다.
그러기에 이곳 공소에서만 여섯 이상의 신부와 수많은 수도자를 배출하였습니다.
소년 치명자 <성 유대철 베드로>의 후손인
유재옥 방지거 신부(1925년6월 사제서품. 황해도 겸이포 본당 주임으로
6.25전쟁을 맞아 교우들을 두고 남하할 수 없다 하여 소식이 끊겼습니다).
순교자 김종륜 루가(1868.814 순교)의 증손자인 김경민 루수 신부.
다산 정약용의 후손인 정욱진 토마스 신부(1947년 서품).
효명중고등하교를 설립한 유수철 도미니코 신부(1943년 서품).
이상영 베드로 신부(오산리 양촌, 1977년 서품) 가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옆 동리인 능원리 소리마을
(포은 정몽주 묘 인근 마을)의 양병묵 루까 신부(1958년 서품)는
그 증조 할아버지가 남곡리 은이 골배마실에서
김대건 신부 집과 이웃해 살며 신앙을 지켰고
한때는 김대건 신부의 집에서도 살았다 전해집니다.
수지의 신봉리와 동천리 손골에서 동남방 30여리에
용인 동백지구 옆 <상하리 민재궁>이
바로 오기선 요셉신부, 오기순 오알벨도 형제 신부의 고향입니다.
이렇듯 신봉동 교우촌 시봉부락 산기슭 밭두렁에
돌무덤으로 남아 있던
네 분의 무명순교자 묘역을 중심으로 하여 하느님을 섬기던
수많은 교우촌들이 골짜기 마다 산재해 있었고,
그들 교우촌 치명과 수난 행군의 발걸음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
훌륭한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배출해 내었으니
주님의 크신 섭리, 통공의 은총을 입었음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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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무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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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人 요한 이윤일 遷墓 史蹟碑> 비문
성인 이윤일 께서는 1812년 충청도 홍주 땅에서 태어나셨다.
성장 하신 후, 천주신앙 봉행으로 말미암아 여러 곳으로 옮겨 사시다가
경상도 문경새재 근처의 산간마을인 여호목에 정착하시었다.
일가와 더불어 천주의 가르침대로 사시다가
병인박해가 크게 벌어지던 1866년 11월18일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시었고,
문경 상주 등지에서 고난을 겪으신 후,
마침내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 광장에서 순교하시었다.
그의 시신은 그곳 교우들에 의해 수습되어 형장부근에 가매장 되었다가
그 후 박해가 다소 누그러지자
후손들에 의해 대구 날뫼(비산동) 야산에 안장 되셨다.
1904년경에 이르러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리 먹방이 마을에 은거하던 후손이
그 무덤을 대구로부터 먹방이 뒷산으로 옮겼다.
1976년 수원교구가 순교자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교구 내 각지에 흩어져있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를
유서 깊은 미리내 성지에 조영할 때,
성인께서도 그 해 6월 24일 먹방이 뒷산으로부터
이곳 미리내 성지로 이장되시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이 근래에 밝혀지자
성인을 특별히 현양하고자 하는 대구 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의 원의를
수원교구 김남수 주교가 받아들이게 되어
성인이 혈체를 봉헌하신 대구 관덕정 옛터로
성인을 모셔가기 위하여
1986년 12월 21일에 대구 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와 사제 평신도 다수가 함께
장엄한 행렬을 이루는 가운데 성인은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이제 이 사실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뜻을 모아 이곳에 천묘사적비를 세우는 바이다.
1988년 9월 20일 한국 103위 순교자 대축일에
글 지은이 : 이원순(에우세비오)교수
세운이 : 이문희(바오로)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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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뱅이 신방골 뒷산의 ‘거꾸로 묻힌 치명자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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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윤일 요한 성인의 생애와 이장경위
이윤일 성인은 1812년 충청도 홍주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신앙가문에 태어나 성장한 후,
박해를 피해 여러 곳으로 옮겨 살다가,
경상도 문경새재 근처 산간마을인 여우목에 정착하여 전교회장을 하시고,
외교인 30여명을 입교시켜 마을을 교우촌으로 형성시켰습니다.
병인박해가 확산된 1866년 11월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어,
이듬해 1월 대구 남문 밖 관덕정 광장에서 참수되어 순교의 화관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의 나이 45세 때였습니다.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병인박해가 크게 확산되어가던 1866년 11월,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포졸들을 보냈습니다.
이 요한 회장의 가족 8명과 마을의 신자 30명은 체포되어 포승줄에 줄줄이 묶이어
문경관아로 끌려가 사흘을 지낸 후 상주로 압송되고 여기서 세 달을 지냈는데,
그가 기거하던 곳은 겨울에 무나 배추를 저장하기 위해 파 둔 구덩이였습니다.
그의 목에는 죄수가 쓰는 칼이 두 개나 채워졌고,
발에는 차꼬를 끼워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교우들은 풀려났으나,
사학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여러 날을 무참한 취조와 고문을 겪던 요한 회장은,
마침내 사형선고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후에는 꼭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대구로 이송된 그는 1867년 1월 21일 참수되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2. 무명 순교자가 되어 거꾸로 묻혀있던 이윤일 성인의 무덤
이윤일 요한 순교자의 시신은 매부인 ‘이 토마스’ 등에 의해 거두어져
처형장인 관덕정 부근에 가매장 되었다가,
1870년경 아들 ‘이의서 마티아 형제’가 다시 대구시 비산동(날뫼)으로 옮겨 안장하였습니다.
<참조 / 대구 순교자들 - 1981년, 김구정 발간>
치명 37년 만인 1904년에, 미리내 인근 먹뱅이에 은거해 살던 순교자의 동생 이시영이
순교자의 유해를 대구에서 용인으로 급히 옮겨 마을뒷산에 이장합니다.
1901년부터 일제에 의해 경부선 철도가 착공되면서
철로가 대구 ‘날뫼 공동묘지’를 통과하게 되어 이장을 서두른 것입니다.
유해를 옮겨온 성인의 동생이 용인 먹뱅이에서 사망하자,
그 아들은 타지로 이사하면서 소식이 끊겼고,
후손이 사라진 묘는 교우촌에서 한때 잊혀졌었습니다.
이후 ‘거꾸로 묻힌 치명자의 무덤’으로 알려져 온 무덤은
다시 교우촌의 몇몇 교우들에 의해 보호되었고,
무덤의 주인 이름마저 실전되어버린 <순교자의 유해>는
1976년 수원교구가 순교자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교구 내 각지에 흩어져있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를 미리내 성지에 조영할 때에
미리내 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미리내 무명순교자 묘역에 잠들어계시던 분이 성인위에 오른 사연
1970년대 초에 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現 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이
서울 가톨릭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던 교수신부 시절,
방학 과제물로 신학생들에게 내놓은 숙제를,
당시 용인 출신 한상호 마르코 신학생(1974년 서품, 현 안양 대리구장, )이
<‘순교자와 그의 유해를 먹뱅이 뒷산으로 옮겨 모시게 된 경위기 -구전되어 내려오던’ 리포트>를
작성하여 교수신부에게 제출 하면서,
소위 ‘거꾸로 묻힌 먹뱅이 무명순교자의 묘’가 최초로 알려지게 되었고,
같은 무렵인 1966년을 전후하여,
용인 이동면 묵리 먹뱅이 출신 최재용 바르톨로메오 신학생(1971년 서품, 현 수원 대리구장)은
고향마을 먹뱅이 뒷산 ‘작은 신방골 치명자 묘’에 대한 어른들의 구전을 채집하고,
그 후손이 있다는 양평군 양동면을 찾아가
이윤일 성인의 아우 이시영의 아들인 이동호(당시 80세 전후)를 만나보고,
그의 집안이 <경주이씨 벽사공파>임을 알아내는 등 꾸준한 추적을 하고 있었습니다.
3. 성인위에 오르신 순교자는 이름을 다시 찾아 대구 관덕정으로
이런 중에도 이윤일 요한 순교자는 1968년 10월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셨습니다.
103위 시성식이 있은 지 2년 후인 1986년 3월경,
이원순(서울대 명예교수)교수가 교회사연구소장 최석우 신부님, 고려대 조광 교수와 함께,
미리내성지 고개 너머 먹뱅이 마을을 찾아가 현장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최석우 몬시뇰은 교회사연구소 서고에서
<1866 병인순교자 26위 시복을 위해 1922년 작성된 재판기록 - 병인박해 순교자 묘지 조사록>을
어렵게 찾아내게 되었고,
<‘이 요한. 대구에서 용인 먹뱅이로 이장’>이라는 기록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먹뱅이 뒷산에 거꾸로 묻혀 있다가 미리내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으로 옮겨온 분이,
병인박해 때인 1867년 1월21일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하신
<이윤일 요한 성인>임이 마침내 밝혀지었고, 우리 교회에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이 밝혀지자
성인을 특별히 현양하고자 하는 대구 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의 원의를
수원교구가 받아들이게 되어
1986년 12월 21일에 대구 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와 사제 평신도 다수가 함께
장엄한 행렬을 이루는 가운데 성인은 이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미리내 무명순교자 묘역에는,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무덤이 유지(遺址)로 남아있습니다.
성인의 유지는,
성인의 피와 살이 그의 순교신앙과 함께 깊게 스며 들은 진토(塵土)의 땅입니다.
주님은 무명 순교자였던 그의 무덤에 <이윤일 요한>의 이름을 다시 찾아 주셨고,
영광스러운 시복 시성의 화관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골 출신인
최재용 발도로메오 신부(1971년 7월 서품)의 친 조모인
<주 마리아> 할머니와 ‘이윤일 순교자 묘’에 관한 증언이 있는
<용인천주교회사 / 조성희, 205쪽: 1981. 5.20 >게재 내용을 고려해 볼 때에
1970년경 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現 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이
서울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시절,
여름방학 과제물로 내놓은 숙제를
당시 용인출신 한덕호 신학생이 리포트를 작성 최석우 신부에게 제출 하면서
소위 <거꾸로 묻힌 먹뱅이 치명자의 묘>가 교계에 알려지고,
1980년대에 와서
‘이윤일 성인의 묘’로 우리 교회에 밝혀지게 되는 첫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시 묵리 한덕골에는
최재용 신학생의 조모이신 주 마리아(1895년 전후생) 할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1911년경 그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한덕골 교우촌에 시집을 오니,
그때 이윤일 요한 순교자의 부인이
68세 된 노인(1843년생으로 추산됨)으로 이웃하여 생존해 사셨고,
그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어른들이 치명자의 머리만을 몰래 훔쳐다가 쉬쉬하며
밤에 뒷산에 묻었는데,
그때는 나이 젊은 새댁이라 크게 울지도 못하였다고’ 하더란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911년경 당시 먹방이 한덕골에 생존해서
44년 전의 성인이 치명하신 그날을 증언했다던 68세의 할머니는
성인과의 나이차이로 볼 때
이윤일 요한 치명자의 후처 또는 자부가 아닌 가로도 생각 됩니다.
‘유해의 머리만 모셔 왔다’ 함은 대구 날뫼로 시신을 모실때의 정황인것 같은데
혹여 1904년 대구에서 용인 묵리로
이장해 올때의 상황과 노인의 기억들이 겹쳐지면서
할머니의 증언으로 남은게 아닌가 로도 생각됩니다.
순교 후 세월이 한참 지나면서 용인으로 이장을 위해 파묘 시에는
유해 두개골은 그 형체를 유지 하였되 대부분의 뼈는 이미 삭아있어
그 작은 뼈들과 치아 그리고 성인의 일부 모발만을
그 위치와 순서대로 빠짐없이 정성껏 한지에 수습하여 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무연고 묘지에서 조차도
일상 작업 일꾼들에 의해 지켜지는 파묘-이장의 전통적 일반관습입니다.
이렇게 이윤일 순교자의 무덤은
묵리 먹뱅이 뒤 신방골 산에 ‘거꾸로 묻힌 치명자의 무덤’으로
신방골과 한덕골 교우들에 의해 보호되어 오던 중,
1976년 6월 용인본당 장덕호 신부에 의하여
미리내 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는데,
그때 순교자의 유골은 이미 흙이 되어 큰 뼈의 흔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묵리 용덕저수지가 끝나는 지점 먹뱅리골에 ‘이윤일 요한 성인묘 안내표석’이 서있고
산 정상을 향해 15분 정도 오르면 성인의 옛 묘지터에 ‘유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요한 이윤일 성인 遺址
이곳은 요한 이윤일 성인의 성해를 모셨던 거룩한 자리입니다.
성인께서는 1904년경부터 1976년 6월24일까지
이곳 묵리에 봉안되었습니다.
이 돌에 그 거룩한 자리를 표하여
순교성인의 장하신 신앙을 배우고 길이 전하려합니다.
1988년 6월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대주교 이문희(바울로)
이윤일 성인이 묻혀있었던 묵리는
미리내 성지 김대건 신부 묘역인 경당쪽에서 옛 산길로 가자면
경당 윗길 ‘오두재 고개-애덕고개’를 넘어
삼거리로부터 좌측으로 십오리 정도 거리 사방의 마을인데,
한덕골, 검은쟁이(거문정), 신방골, 먹뱅이(먹방이), 병목골 등등
잊혀진 교우촌들이 옛 사연들을 간직하며
골짜기마다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1827년경 김대건 소년의 할아버지 김택현은
교난을 피해 일가를 이끌고 충청도 당진 솔뫼를 떠난 후
서울 청파를 거쳐 안성 땅 ‘묵리 교우촌’ 골짜기를 찾아드니
그곳이 묵리 한덕골 이었고,
삼년 후 1830년경 할아버지 김택현이 돌아가시자
소년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고개 넘어
동북방 이십리 지점 교우촌인
은이 인근의 '골배매실' 골짜기로 이주하였다 전해집니다.
그래서 한덕골은 여섯 살 어린 김대건이 아홉 살까지 뛰어놀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한덕골은 또한 최양업 신부의 작은 아버지 최베드로 일가가
1837년 충청도에서 교난을 피해와 정착해 살던 곳이기도 하다.
1836년 모방 나 신부에 의해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 유학을 떠나 1849년 상해에서 강남교구 마레스카 주교에 의해
신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고국을 떠난 지 13년만인 1847년 12월3일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는 페레올 주교를 만난 후 첫 소임지인 진천 배티 동골로 가는 길에
이곳을 찾아와 중백부를 뵙고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의 치명소식을 상세히 전해들은 곳이며,
혈육인 4형제 동생들을 끌어안고
눈물로 만난 곳이 바로 용인 묵리의 한덕골 교우촌인 것입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죽산 감옥에서 처형된 순교자 24명에서
치명일기에 이름이 밝혀진 4명 중,
용인 묵리 병목골 사는 김 도밍고(치명일기137) 순교자가 있으니
박해당시 이곳 묵리 마을 교우촌 에서도
군난 때에 죽어간 이름 없는 치명자가 상당수 있으리라고 추정될 뿐입니다.
미리내에서 북편으로 채 오리도 안 되는 병목골은
한덕골 검은정이에서 동편 옆 마을로서
이민식 빈첸시오가 약현성당에서 귀향하여 노년에 살던 곳이며
지금 그 동리는 없어졌다. 그 동쪽 옆 마을이 학일리 고초골이다.
미리내 성지를 중심으로 보면 북편 북 서편 이웃동리 들입니다.
용인시에서 45번 국도로 안성방면으로 오다가 천리 사거리가 나오고,
천리에서 우측으로는 그 유명한 서리의 ‘사리틔 교우촌’이 있고,
천리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천리 적동요셉성당- 용덕저수지, 신원 월드컨트리 클럽, 한덕골이 나오고,
더 오르면 ‘영보성당’ ‘영보수녀원’ ‘장촌’ ‘거문정’ 마을을 지나
‘오두재고개’ ‘미미내성지 79위 시복기념경당’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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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용 마티아 회장도 이곳 묵리출신으로
그는 천리성당을 세우기 위해 젊은 나이로 회장을 맡아 전력을 다하였으며
묵리 미사리 지역 발전과 은이성지 개발,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과 희생등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습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원입니다).
차량으로는 거문정이 까지만 진입이 가능합니다.
한덕골 인근 먹뱅리 용덕자수지 부근에
<천주교 순교자 이윤일 성인의 묘> 유지를 오르는 안내 표석이 있고, 표석에서 40m를 오르면
1986년 대구대교구에서 성인의 묘소가 있던 곳에 세운
<요한 이윤일 성인 유지비(遺址碑)>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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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골 교우촌의 이민식 빈첸시오, 사제와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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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식 빈첸시오
충남 아산에서 살다가 교난을 피하여
용인 묵리 ‘검은정이‘ 교우촌에 정착한
부친 함평이씨 이동서의 아들로 1829년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신봉하였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기백이 뛰어난 청년이었습니다.
16세 때인 1845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주로 밤에 김대건 신부님의 성사 순방길을 따라 여러 차례
미리내와 은이공소 인근의
한덕골, 해곡, 별미, 동이골, 검은정이, 먹방이, 병목골, 골배마실 등지의 교우촌에
신부님을 모시고 시종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시신을 새남터에서 숨겨와 안장한 후,
교난을 피해 잠시 전라도 지방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이민식은
자신의 집 ‘검은정이’ 마을에서 지척에 있는
신부님의 무덤을 하루도 빠짐없이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1853년에는 페레올 주교님을 선산인 김대건 신부 묘소 옆에 모시었고,
1864년 5월17일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두게 되니
아들신부 곁에 안장하였습니다.
1869년 40세가 되기까지 동정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던 빈첸시오는
자신이 살던 집을 교회 공소로 내놓고
자신은 사제가 되기 위해 이역만리 페낭 신학교를 찾아갔으나
성소를 받지 못하고 돌아와
서울 약현성당(중림동) 초대주임이신
정 두세 신부님의 복사를 하며 교회사업에도 헌신 하였습니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후에 그의 조카 <이 안당>을 양자로 들여
묵리 병목골(검은정이 이웃 동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1921년 92세로 선종하였습니다.
현재 이민식 빈첸시오의 양자
이안당의 증손자인 이선행 요아킴(이민식의 5대 후손)이
용인군 원삼면 학일리 ’고추골‘
(미리내 성지 인근 북동쪽 1.5Km)에 이주하여 살고 있습니다.
후손의 집에는 이민식의 필사본 친필성서인
’천주실의 1권‘ ’천의도리 상 하 각1권‘ ’성모성월 1권‘
’성교증명 6권‘ ’성경직해 5권‘ ’종도서 1권‘ 등이 보관되고 있다 하였는데,
그 일부만이 남아있습니다.
묵리 한덕골 교우촌은
미리내 본당 강도영 말구신부 직접 관할지역 이었으며
성소를 받은 사제와 수도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치명자들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성소의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최재용 신부 - 묵리 먹뱅이. 1971년 서품
예수성심전교회 김희식 데레사 원장수녀 / 불문학교수 김정옥 데레사 수녀
<시편 114>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지옥의 올무가 나를 덮쳐
슬픔과 괴로움에 잠겨 있었노라.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빌었었노라.
‘주님, 이 목숨 살려 주소서’ 라고
주님께서 너를 구하셨으니 고요로 돌아가라 내 영혼아.
죽을세라 이 목숨 건지셨도다.
울세라 이 눈들을 지키셨도다.
넘어질세라 이 발도 지키셨도다.
나는 거닐리라 주님 앞에서 생명의 지역에서 거닐리라.
성인들의 육신은 평화로이 묻혀 있고,
저들의 명성은 세세 대대에 살아 있으리라. 아멘
附記 : 임성빈 요한금구
참고자료 - 용인천주교회사(1981. 5.20). 달레 천주교회사.
103위 성인전(김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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