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27절)
이경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마 11:27
본절에 나오는 아들은 신약 성경의 주심점이며 신약의 역사와 가르침의 핵심이므로 이 분이 누구시며 성탄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즉 우리가 정확하게 무엇을 기념하는지를 고찰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각자의 인생살이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냐는 문제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을 직시하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신자의 체험으로 들어가는 관건입니다. 여기서 출발하지 않은 체험들은 우리들에게 영구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주장은 놀랍고 어마어마한 주장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이제 이 말씀의 전반적인 상황을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이 예수라는 사람은 베들레헴에서 태었었고 이 지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목수로 일했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다른 인간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실은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주장은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있어서도 전혀 독특하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보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정말 알지 못한다. 나를 참으로 아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진정으로 아신다. 그리고 오직 나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안다. 당신들은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말도 하지만 하나님을 내가 아는 듯이 알지 못 한다”
우리들은 아무 때고 하나님을 본 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았으며, 유대인들이 이해했듯이 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의 자리에 놓았으며, 이따금씩 베일을 벗고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영원하고 신비스러운 관계를 약간씩 들어 내셨습니다.
나사렛의 목수였던 그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는 각별하기에 다른 모든 인간들은 아웃사이더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썼듯이 이 세상의 관운들은 그분을 몰랐습니다.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정말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왜 온 세계가 그 분을 믿고 따르며 복종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은 여기서 성육신의 신비에 직면해 있습니다. 누구도 성육신의 신비를 간단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동시대 유대인들의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동시대 유대인들의 틈에 있었다면 에수님의 주장을 과장됐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온 우주의 통제자며 자기능력 아래 온 세상이 있다는 예수님이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서 천사들의 호위를 받는 대왕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교육도 받지 못한 종의 모습, 낮은 신분이었기에 피곤함. 굶주림. 목마름을 아셨고 또 힘없이 체포되었고 십자가에 못박혔고 속절없이 극도의 무력함과 수치와 불명예 속에서 국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믿기 어려워 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전체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자신의 영광을 감추고 자신을 비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원 무궁한 영광과 하나님 되심의 현란한 상징과 표지들을 제쳐두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며 자신을 더욱 낮추셨습니다. 성육신의 모든 영광은 어떤 점에서 그 신비성에 있습니다. 그는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면서 감추셨습니다. 영원하신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 자신을 육신으로 가리우고 인간의 본성 속에 숨어 계신다는 것은 너무도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그를 기존 사상과 편견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막강한 군사적 능력으로 원수들의 멍에세서 해방시키고 정치적 최강국을 만드실거라는 편견을 가졌던 유대인에게 예수는 너무나 보잘것 없고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가 된 바울도 예수님을 몰랐을 때 “나는 그분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생각하고 그의 도를 핍박했습니다”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이 감추는 비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 오실 때 그런 식으로 탄생하셔야 했고 그런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기 대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려고 온 일들 때문에 수치와 신비와 경이는 예수님의 인격체에 필수 요소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의 놀라운 성육신의 신비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에수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지상에서 우리들의 죄를 몸소 지시고 우리의 죄책과 그 형벌을 자기 몸으로 십자가에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계셨을 때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길을 만드시고 그 길을 터 놓으셨습니다. 그 길은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해 시키는 구원의 방패였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실까요?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여 한 백성을 자신에게 부르고 계십니다. 역사는 나사렛 예수의 장중에 잡혀 잇습니다. 시간. 역사는 종착점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만인의 눈이 볼 수 있는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모든 악을 하나님의 영광스런 창조로부터 제거하신 후 다시 그 왕국을 그의 아버지께 돌려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 왕국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스런 임재 속에서 하늘 아버지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고 판정하는 것은 예수와 우리긍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그 모든 일들을 그리스도께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수치와 조롱을 의미합니다. 골로다로 가는 것이며 그 분의 거룩한 육신속에 못들이 박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수난 후에 승리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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