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안중근 의사 딸 수기 발굴,
“고국에 돌아와도 의지하고 찾아갈 곳이 없었다”
시사IN | 주진우 기자 | 입력 2010.03.26 10:32
독립운동가 가족의 삶은 고단했다. 안 의사의 딸 현생씨도 고단한 삶을 살았다. 의거 후 가족은 흩어져 중국과 러시아 일대를 떠돌아야 했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와 기관의 도움은 없었다. 뜻있는 사람들이 온정의 손을 내밀었지만 세상 눈이 어두워 사기를 당하곤 했다. 주변에는 안 의사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 시사IN > 은 안중근 의사의 딸 현생씨의 수기를 공개한다. 수기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에서 발굴했고, 국내 언론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다(수기 원문은 1956년 월간지 < 실화 > 4월호에 실렸고, < 시사IN > 은 가급적 당시 표기법을 살려 옮겨 실었다. < 실화 > 는 1953년 신태양사에서 창간한 문화·교양 등을 다룬 월간지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윤원일 사무총장은 "자신의 친일에 대한 참회는 빠졌지만 현생씨가 가족들의 삶을 직접 정리했다는 의미가 크다"라고 말했다. 안중근 연구가 신운용 박사는 "이 수기는 안중근 의사 가족이 안 의사 의거와 가족들을 이야기한 최초이자 유일한 자료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수기 전문
혁명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기사로 혹은 전기, 연극 등으로 적지 않게 소개되었으며 이와 같은 기사나 전기, 연극은 사실과 다소 어긋나는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개된 바와는 달리 안중근 의사의 딸인 안현생(安賢生) 여사의 이번 이 회고담은 새로운 사실을 확실히 밝힘으로써 독자 여러분에게 새로운 관심을 주리라고 믿는다. 원래 안중근 의사는 2남1녀를 두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안현생 여사의 맏동생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에 태어난 장남 안준생(安俊生)씨는 피란 간 부산에서 온갖 고생 끝에 신병으로 타계했다. 그리하여 안중근 의사의 직계로는 안 여사 한 분만이 남고 그 밖에 안 의사의 질녀 안미생(安美生)·안련생(安蓮生)씨가 있다. (실화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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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안중근 의사의 큰 딸 안현생씨.
| 거사 후에 우리 가족이 더듬어온 길
세상 떠나신 선친에 대해서 여러분이 쓰신 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만 저 자신이 붓을 들기는 이것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청을 받고 붓을 드니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머리 위에 떠오르는 지난 일도 많습니다만 무엇으로부터 말을 시작해야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나는 대로 대충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선친이 돌아가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3월26일이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여덟 살이고 보니 큰 기억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만 자라면서 조모님을 비롯하여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원래 저의 집 고향은 황해도였습니다만 조부모님 때부터 진남포(鎭南浦)에서 살았습니다. 선친께서는 일찍이 집을 떠나 망명길에 나섰고 숙부 한 분은 서울법정학교에 다녔고 한 분은 진남포에서 일찍이 선친이 창설한 학교 교원으로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어머님과 어린 동생은 조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만 선친께서는 의거하신 해에 노령(露領·러시아 영토) '버그라니스'에 살림을 장만했으니 온 집안 식구더러 오시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살림살이로 보든지 식구로 보든지 솔가할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조모님 말씀이 비록 망명길을 떠나기는 했으나 가족이 그리울 것이며 그날그날이 적적할 테니 저의 어머님과 어린애들만이라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장녀로 태어나 조모님의 지극한 귀여움을 받아오던 저까지 보내면 쓸쓸하셔서 견딜 수 없다고 저만은 조모님께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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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월간 < 실화 > 4월호 표지
| 이와 같은 조모님의 말씀대로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딱딱한 사회적 환경과 딱딱한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어머니는 이때 처음으로 기차를 타시게 되었고 처음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장옷을 벗고 구두를 신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장(旅裝)을 꾸미시고 집을 떠나 기차가 장춘(長春·당시 新京)에 이르렀을 때 정거장에는 총을 메고 칼을 찬 헌병이나 경찰을 비롯하여 유달리 일반 사람이 흥성대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처음 길 떠난 어머니도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지만 주위 사람들도 저마다 의아스럽게 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등박문(伊謄搏文)의 시체를 실은 기차가 마주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와 같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하얼빈에 도착하여 선친이 연락하신 대로 그곳 김성백(金聖佰)씨 집을 찾아갔습니다. 한데 김성백씨를 비롯하여 집안사람들이 조금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을뿐더러 거의 무표정하게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이라고는 한 분도 없는 하얼빈이라 어머니는 그래도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그곳에 선친하고 함께 계시던 모씨가 들어오더니 선친께서 이등박문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함으로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분 말씀이 곧 일본 경찰이 잡으러 올 텐데 절대로 안중근의 아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분 말대로 얼마 후 말소리 요란스럽게 일본 경찰이 와서는 어머니와 어린것을 잡아갔습니다.
어머니로서는 객지에 나선 것도 이것이 처음이요 경찰서에 가보기도 처음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선친과 ×××씨의 사진을 내보이면서 잘 알지 않느냐 하고 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순간 어머니는 선친의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한쪽에 밀어내고 모씨는 오빠 되는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이처럼 고집해도 이미 알아낸 일본 경찰은 "안중근의 아내인 줄 알고 있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끝내 부인하자 그들은 어머니와 어린 것을 유치장에 가두었습니다.
평소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는 어두컴컴한 유치장에서 어머니는 어린 동생보고 울라고 시켰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면 시끄러워서라도 곧 내보내리라 믿었는지 모르지요. 그것은 어쨌든 어린 동생이 자꾸 울기만 하자 일본 경찰은 나오라고 하면서 다시 조사를 계속하는데 그때 어머니는 어린 동생보고 이젠 울지 말라고 하니 "엄마, 아까는 울라고 하더니 왜 이젠 울지 말라고 해요" 이렇게 말하였고 이것을 들은 일본 경찰은 또다시 욕설을 퍼부었답니다. 결국 어머니는 3일 동안 유치장 생활을 하시다가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외로웠을 심정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 후 선친이 의거하신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이곳저곳에 흩어졌던 여러분들이 하얼빈에 모이기 시작했고 그분들의 주선으로 선친이 마련하신 버그라니스에서 고독한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李王의 밀사라고 모계(謀計)하는 일본 경찰
한편 일본 경찰은 진남포 저희 집을 수색하고 서울에서 공부하시는 숙부도 조사하고 야단이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니 저의 집안사람들이 국내에서 마음 편히 살수는 없는지라 조모님, 숙부님 모두 조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여관에 묵고 밤이면 걸어서 함경도-만주로 해서 노령인 버그라니스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다시 동청철도(東淸鐵道) 연변에 있는 목릉에 집을 옮겼습니다. 그 후 한 사람 두 사람 숙부님의 가족도 한곳에 모이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곳에서 우리 집안사람들이 살게 되었는데 그곳을 지나오고 지나가는 혁명가 분들은 꼭 들러서 위로해주곤 했습니다.
한편 선친의 의거에 대해서 말하면 일찍이 의용군(義勇軍)을 조직하고 두만강에서 일본 사람과 접전(接戰)하시던 선친은 다시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지들과 함께 의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등박문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지의 한 분인 우덕순(禹德順)씨는 본래 은방을 한 경험이 있는지라 총알도 몸에 박히면 한층 괴로움을 당하도록 모가 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얼빈까지의 지리를 따져 우덕순씨, 유동하(柳東夏)씨 그리고 선친 세 분이 세 곳에 대기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우덕순씨도 그와 같은 의거의 기회를 만나지 못했고 유동하씨도 그러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기회인 하얼빈에서 선친이 이등을 죽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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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친은 이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같이 동지들과 계획을 세운 다음 소련에서 자라 소련말 중국말에 능통한 유동하씨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해서는 위에서 말한 바 있는 김성백씨 집에 투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0일 가까이 대기하고 계시다가 마침 10월26일! 그날이 왔습니다. 이등을 맞이하기 위해서 소련의 고관들도 많이 나왔고 경비도 준엄했습니다만 선친께서는 용의주도하게 이등 가까이까지 뚫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총을 뽑기 시작했는데 이에 앞서 해삼위에서 동지들과 약속하기를 이등에게는 총 세 발을 발사할 것, 그렇게 함으로서 절명(絶命)을 보장할 수 있으며 나머지 총탄도 주의해서 발사하되 소련 사람이 맞을 경우 국제적인 문제도 있으니 주위에 있는 일본 고관에게 발사하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선친께서 이등을 향해 일 발을 발사했으나 워낙 군악(軍樂)소리가 요란스러웠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총소리를 듣지 못했고 이 발을 발사하자 그때 비로소 주위 사람들이 총소리를 알아듣기는 했으나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답니다. 삼 발을 발사하자 이등은 땅에 쓰러지고 선친은 계속해서 주위에 있는 일본 고관들에게 난사(亂射)하여 팔에 맞은 놈, 머리가 깨지는 놈이 속출했답니다. 이제 뜻했던 바 일에 성공하신 선친은 권총을 내던지고는 바로 그 장소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힘 있게 외쳤지요. 이리하여 일본 경찰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선친을 마차에 실어 여순구(旅順口)에 이송하였습니다.
취조가 시작되었으나 선친께서 자기의 일거일동을 명백히 하는지라 고문할 필요도 없었고 길게 조사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모계(謀計)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선친더러 목숨을 살려줄 테니 공판정에서 이왕(李王)의 명을 받고 이등을 죽였다고 진술할 것을 강요한 것입니다. 이때 선친께서는 "목숨을 아낄 내가 아니요, 그렇게 목숨을 아끼는 나라면 이런 중대한 일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천부당만부당한 말을 그만두고 빨리 사형해 달라고 했습니다. 선친의 태도가 그와 같이 확고하니 일본 경찰도 그와 같은 그들의 계획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나라를 찾거든 고국에 묻어달라!"고 유언
그리고 일본 경찰도 선친께 대해서는 극진한 대우로서 음식은 요구하는 대로 제공했답니다. 의거하신 10월26일에서 사형당하시던 다음 해 3월26일까지의 만 5개월 동안 추운 형무소 생활을 계속하신 선친의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선친께서 사형언도를 받자 그때 서울에 와 있던 프랑스인 홍(洪) 신부님은 선친의 마지막 길에 '연미사'를 올리고 유언을 듣기 위해서 여순구로 왔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주교(主敎)의 승낙을 얻을 수 없는 일이어서 홍 신부님은 주교에게 비밀에 부치고 개인적으로 그것을 행했기 때문에 나중에 신부 자격을 잃게 되었지요. 즉 홍 신부님은 선친을 위해서 희생된 것인데 그 후 홍 신부님은 비록 신부의 자격은 잃었어도 고국에 가서 그대로 신부의 복장을 하시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계속했답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홍 신부님이 연미사를 올리고 마지막 유언을 들을 때에는 저의 숙부 두 분도 참석하였습니다. 선친의 유언은 간단했지요. "나라를 찾거든 나의 시체를 고국에 묻어달라"라는 한마디였습니다. 그들은 3월26일 오전 10시 정각에 정기장치로 사형을 집행했고 그때 숙부님 두 분이 일본 경찰에게 시체를 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만 일본 경찰은 이를 거절하면서 숙부님을 밖으로 떠밀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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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부님 두 분은 워낙 어리신 때라 눈물이 앞을 가로막아 그대로 여관에 돌아가 밤새 붙잡고 울기만 했답니다.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을 보고 선친을 ××에 매장한 것을 알게 되었지요. 한편 선친의 의거가 있기 전에 제정 러시아에서는 교포 7만명을 노령으로부터 퇴거(退去)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친의 의거가 있자 한국에 이와 같이 훌륭한 분도 있느냐고 하면서 퇴거명령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땅을 제공하기까지 했답니다. 또한 저희들을 감격하게 한 것은 해마다 선친이 돌아가신 3월27일이면 중국 사람을 비롯한 외국 사람들까지도 그 묘지를 찾아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사람들도 그날이면 분향을 했습니다. 얼마 전 향항(香港.홍콩)을 거쳐 중국에서 돌아 온 사람이 전하는바 지금도 그 묘지를 찾아주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8·15 해방이 되면서 선친의 유언대로 고국에 모시려고 했습니다만 국제정세가 미료했던 관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셋째 숙부님은 일찍이 중국에서 세상을 떠나시고 둘째 숙부님은 "형님이 그렇게 유언하셨는데 어찌 나만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고국에 돌아올 것을 거부하고 국제정세가 좋아지면 선친의 유언대로 선친을 모시고 고국에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숙부님은 상해와 대만을 오고가고 하시다가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제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된 다음해 11월11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돌아오게 된 것은 물론 선친을 모셔야 한다는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다른 돌발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방 당시 중국 상해에 우리 교포 몇 천명이 살고 있었는데 주인(남편)이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일을 보아오다가 그해 12월4일 나쁜 사람들로부터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나게 된 불행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인의 유골을 모시고 돌아와야 하였기 때문에 그처럼 늦게 돌아오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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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딸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저는 당장 의지하고 찾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오직 있다면 제가 어릴 때 약 4년간 불란서 '까이리' 수녀님과 지낸 일이 있어 그 계통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명동 성모병원으로 갔더니 마침 정(鄭)의례시나 수녀님이 저를 알아보고 고맙게 대해주셨습니다. 수녀님은 추운 날씨라 제 손을 잡고 자기 입김을 불어주시면서 방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곳에 우선 짐을 맡겨두었지요. 상해에 있을 때 듣기에 입을 옷이며 가구가 귀하다고 하기에 중요한 것만 꾸려 가족 가방 다섯 개와 보통 짐 다섯 개로 만들어 수녀님 댁에 보관시킨 거지요.
조국을 찾은 첫날에 당한 지능적 사기!
한데 고국에 돌아오자 또다시 예기치 않았던 불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상해를 떠날 때 저와 딸 둘로 여자들만이라 이웃사람의 소개로 어떤 청년과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짐을 꾸릴 때에도 거들어준다고 하면서 어느 속에 무엇이 들고 어느 속에는 어떠한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저만큼 알고 있었지요. 그리하여 함께 돌아와 성모병원까지도 같이 왔었고 저는 짐을 그곳에 맡겨두고는 아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지요.
다음 날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수녀님을 찾고 그 뜻을 말했더니 짐을 둔 방문을 열어주셨습니다. 한데 가방 다섯 개가 눈에 띄지 않기에 제 생각으로는 수녀님께서도 가방 다섯 개만은 중요한 것이 들었으리라 믿고 자기 방에다 따로 보관했으리라 믿었지요. 그래서 "수녀님, 가방은 방에다 보관하셨군요"라고 한마디 하자 순간 수녀님은 매우 당황한 표정이 되어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 순간 말씀하기를 전날 저와 그 청년이 나간 지 한 시간 후 청년은 다시 돌아와서 지금 호텔 방을 하나 얻고 당분간 그곳에 투숙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제가 시켜서 왔다고 하면서 가방 다섯 개를 갖고 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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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수중에 돈은 없고 이제 입을 옷까지 잃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나 생각해봐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청년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한 일이라 다시 찾을 수도 없으리라 단념하고 우리 세 모녀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한데 고마웠던 것은 이(李) 신부님이 신학교 기숙사 방 하나를 빌려주셨습니다. 비록 다다미방이기는 했으나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모녀에는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였지요.
이제 방은 얻었으나 먹을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정의례시나 수녀님의 소개로 금강전구주식회사 사장인 박정근(朴定根)씨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전구로 장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와 같이 장사하기로 이야기는 됐습니다만 우선 전구를 100개 받아오려면 낡은 전구 100개를 가지고 가야 하는데 제 주위에서는 그것을 구할 도리가 없었지요.
이것 역시 교회 안에서 모아가지고 전구를 받아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집 저집, 이 가게 저 가게 찾아다녔지만 그리 잘 팔리는 장사도 못될뿐더러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퍽 어색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다소 익숙해지기도 했고 밥 세끼를 먹을 만한 최소 한도의 수입은 있었습니다. 전구 하나를 팔면 20전이 이익으로 남았고 그리하여 하루 이삼백원 수입으로 세 식구는 그날그날을 보냈지요. 그러나 전구가 제대로 생산되면 100개건 200개건 받을 수 있었으나 생산이 제대로 되지 못할 때에는 최소한의 수입마저 끊어지는 날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전구를 잘못 받아 오면 몇 개씩 손해를 보게 되는지라 공장에서 하나하나 시험을 해가면서 100개 200개를 받는 수고는 그때가 추운 겨울이라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최소한의 생활도 다시 풍파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학교에서 기숙사를 수리하여 학교에서 써야 하는지라 저와 같이 방을 얻어 쓰고 있던 몇 사람은 부득이 방을 비워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방은 꼭 비워드려야 했으나 우리 세 모녀는 당장에 갈 곳이 없었지요. 그래서 저는 며칠을 두고 생각했답니다. 누구를 찾아가면 꼭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머리 위에 그려보면서 하나하나 판단을 내렸지요.
그러던 끝에 선친을 잘 아시고 저와도 중국에서 학교 시절 가까이 지냈던 주모씨를 방문하고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그때 돈으로 적지 않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선 안국동에 방 하나를 얻고 나머지 돈을 밑천으로 해서 우리 모녀의 살림을 확립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김모씨의 말이 된장, 간장을 받아서 군부에 납품하면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기에 그 사람 말대로 안국동에 '안생공사(安生公司)'라는 간판을 걸고 그 사람과 함께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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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의거 직후 중국 뤼순 감옥의 안중근 의사(맨 왼쪽). 의거 다음날 1909년 10월27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찍은 안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와 아들 분도, 준생(오른쪽 위). 안 의사의 둘째 아들 준생, 동생 정근, 정근의 아들 원생, 안의사의 딸 현생, 동생 공근의 아들 우생.
| 또다시 사기당하는 온정의 거금
그것이 1947년 7월이었습니다. 한데 그 김모씨는 장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국 사정에 어두운 저를 속이고 장사밑천으로 고스란히 사복을 채웠지요. 속았다는 괘씸한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주씨로부터 얻은 그 적지 않은 돈을 이렇게 헛되게 없애버린 미안스러운 생각이 앞서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제 또다시 생활이 곤란한 데다가 방세도 다시 내야 할 텐데 제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다시 어는 누구를 찾아 동정을 바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울히 지내는 어느 날 저의 사정을 잘 아는 신모씨가 퍽 동정하시면서 8군단에서 지은 후생주택 하나를 주선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이지요. 서울시에 가서 집 열쇠를 받아들고 우리 세 모녀는 너무도 기뻐서 손을 마주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좋든 나쁘든 집은 장만이 되고 남은 것은 먹고살아 나갈 생활방도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민정장관(民政長官) 안재홍씨도 방문하고 경무부장 조병옥씨도 방문하였던바 조병옥씨 말씀이 모자 무두 경무부에 나와서 일을 하면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만류도 있고 해서 양자로 있는 사람을 경위(警衛)로 취직시켰습니다. 다만 이러니 저러니 해서 두 달인가 석 달 후에야 비로소 발령을 받았지요.
근무는 인천이라 추운 겨울날 북아현동 산 밑에서 새벽 일찍이 출근하여 밤늦게야 돌아오고 그렇게 지내다가 마침내는 폐가 나빠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오기는 했으나 여순반란사건 때 전투대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고는 병상에 눕게 되었지요. 이래서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습니다. 장(張) 여사가 때때로 쌀을 갖다 주셨고 찬값도 이삼천원씩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그때 신한공사(新韓公司) 총재로 계시던 C씨가 영등포에 있는 땅 천평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돼지를 치고 집에서는 닭을 쳤습니다. 이것이 6.25 직전까지 돼지 서른다섯 마리, 닭 백 마리가량으로 늘었습니다. 6·25동란을 맞이하여 양자 되는 사람이 경찰이라 해서 영등포에 있는 돼지는 그들이 죄다 가져갔습니다.
집에 있던 닭은 파편을 맞아 죽기도하고 나머지는 생활이 궁할 때라 잡아먹기도 하고 이러하여 모두 없어졌지요. 6·25 때 공산당 사람들이 여러 차례 찾아오기는 했으나 양자는 병으로 누워 있고 집안 살림도 말씀이 아닌지라 별반 해롭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9.28수복 때 제가 살고 있는 북아현동이 최전선이 되어 이웃집들은 적지 않게 피해를 입었습니다만 저희 집 장독대와 우물에는 파편 하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1·4후퇴 때 양자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저와 딸 둘은 대구에 내려가 저는 천주교에서 세운 효성여자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쳤습니다. 대구시장께서 쌀 배급을 주셔서 그럭저럭 생활은 유지되었고 큰딸은 육군중령으로 있는 지금의 사위와 결혼을 하였지요. 제가 효성대학에 나가다가 하루는 얼음판에서 넘어져 절골을 당하고 그때 혈압이 230으로 고혈압에 몹시 신음한 바 있었는데 지금도 그 병세 때문에 적지 않은 괴로움에 잠겨 있습니다.
이렇게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저는 늘 선친의 교훈을 잊지 않습니다. 고생하고는 모진 고생이기도 하지만 선친에 비한다면 이것이 무슨 고생이 될까 자탄하면서 지내왔습니다. 서울로 돌아올 때에는 그곳 학생들이 모아둔 고마운 전별금도 있었고 그리하여 다시 옛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역이용하는 사람들?
생활은 사위 몫으로 배급 나오는 쌀로 그럭저럭 유지해왔고 해가고 있습니다. 둘째딸은 리더스다이제스트 사에 근무하여 집안 살림도 조금씩 도우면서 저금을 계속해오다가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나 좀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지난 1월20일 로스앤젤레스로 떠났습니다.
서울에 돌아왔어도 생활 때문에 네다섯 명의 개인교수도 했으나 혈압이 자꾸 높아가고 그래서 그것도 그만두었지요. 다만 집주위에 꽃을 재배하는 것을 일삼고 그날그날을 보내왔습니다. 앞으로 저의 오직 하나 큰 희망은 선친의 유언대로 선친을 고국으로 모셔오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와 같은 국제정세에서는 당분간 어려우리라 생각되어 퍽 마음이 괴롭습니다.
또한 제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친의 이름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안중근 의사의 어떻게 되는 사람이요" 하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불미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을 허다히 듣고 있습니다. 풍문만이 아리나 실제 만나본 일도 있습니다.
지난번에 '안희자'라는 여성이 저를 찾아와서는 언니라고 하면서 자기도 선친의 따님이라고 해요. 그래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딸은 저 혼자뿐이라고 간단히 대답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 자기는 어릴 때부터 홀로 객지에 나왔기 때문에 기억이 확실치는 않으나 그렇다면 질녀가 되는지도 모른다고 엉뚱한 말을 하지 않아요. 그래 질녀가 있기는 해도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안미생, 안련생 두 사람밖에 없어요.
또 자기가 일본에서 자랐다고 하기에 그럼 일본 어디서 자랐느냐고 물었더니 기억할 수 없다고 대답해요. 우리 집안사람은 일본에 갈 리도 없고 갈 수도 없다는 것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는 길게 말할 흥미조차 없어 저를 찾아온 목적이 뭐냐고 했더니 태연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거예요. 지금 땅도 얻게 되고 그리하여 학교를 짓고 저를 교장으로 모시겠는데 다만 필요한 것은 자기가 선친의 따님 혹은 질녀가 된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세상이 혼란하기로서니 이런 일이야 어찌 꾸며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시는 찾아오지도 말라고 하면서 돌려보냈지요.
평소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느낀 바도 많았던지라 두서없는 말을 길게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저는 하루바삐 선친을 고국에 모실 수 있는 그날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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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 義士의 딸 安賢生女史의 최근 생활]=<主婦生活> 1958년 12월호
안중근 의사의 친계親系는 오직 한 사람 친딸이 남아있을 뿐이다. 안중근 의사 하면 모를 사람이 없다. 그것은 일제의 압박이 극도로 심할 때 압박에 지친 우리 민족은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에 있어서는 원흉元兇인 이등박문伊藤博文를 암살하게 됨으로 왜놈들에게 사형을 당하게 된 의사가 바로 안중근 의사인 것이다 이제 의사의 친딸이 세상에 남아있으나 매우 괴로운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 그의 최근 생활을 공개해 보기로 한다. 서울의 번화한 거리와는 등진 곳. 조용한 시골과 같은 감을 여지없이 주고 있는 북아현동 집에 살고 있었다. 뜰 앞에는 화초밭이 깨끗이 다듬어져 있었고 큼직한 감나무도 눈에 띄었다. 뒤에는 곧 산이어서 산새 우는 소리며 이름 없는 나무와 꽃들이 자연의 그리움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도시인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고 있었다. 잠시 이런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하는 순간 또다시 현실이 눈앞에 가로놓인다. 그것은 1년이 넘도록 병석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안현생安賢生여사를 만나게 된 사실이다. 여사는 본래 고혈압으로 항상 각별한 주의를 하여왔지만, 심한 중풍으로 자리에 눕게 된 것은 작년(1957년) 8월 31일에 거대하게 거행되었던 선열 추기합동 위령제가 있은 직후의 일이었다고 한다. 세 시간이나 계속된 식장에서 무리를 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건강한 사람의 경우면 몰라도 본시 고혈압이 있는 여사는 폭염 아래 종이 한 장 머리에 올려놓지 않고 세 시간을 용하게 참았는데 그때 자기의 몸 상태가 좀 이상하고 불편하였지만 왜놈들과 싸우다 피 흘린 아버지를 생각하고는 요까짓 폭염暴炎 같은데 못 참아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하는 결심을 하게 됨으로 사람들은 못 참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참아보리라 하는 일념에 끝까지 견디어 내기는 하였는데 결국 병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고혈압이란 병은 뇌일혈로 죽지 않으면 중풍을 일으킨다고 하는데 죽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하지만 너무 오래 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니 말로 무엇이라 설명할 바를 잊어버리게 된다고 하면서 한없이 눈물을 짓는다. 별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활동가이며 사람들을 좋아하는 여사가 지난날의 추억으로 해를 넘기고 또 넘기는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즈음에 와서는 별로 병이 더하지는 않는데 의사의 말이 더하지 않으면 낫는다고 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의 일을 잘 알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모든 것을 천주께 맡긴다고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여사는 오랜 대중교인인 가톨릭 신자였다. 본명은 安 테레사라고 하며 벽에 걸린 사진은 현재 미국에 유학 중인 딸의 사진과 본명 성인의 상분이 있었다. 아버지인 안중근 의사는 安토마였으며 죽기 전 천주 대전에 부끄러움 없이 기도와 성사를 받고 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잠시 회상에 잠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극히 희미하다고 한다. 해외에 항상 나가 계신 아버지였던 탓으로 자주 볼 수 없었으며 여덟 살 때의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왜놈의 아주 큰놈을 죽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왜놈들이 와서 가택수색을 하고 야단치던 기억은 뚜렷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던 날 전보를 받고 온 가족이 알 수 있었는데 할머니의 통곡하시던 광경은 눈에 선하며 그 후 좀더 자라서 삼촌들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사형선고를 받기 전에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보낸 조선옷을 입고 기도를 올리고 웃으면서 사형장으로 나가셨다는 이야기 등을 들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는 아들에 대한 생각으로 밤낮을 정신 없이 지내다가 드디어 병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이마에 매일같이 針을 맞던 일이 생각이 나며 이제는 얼마나 할머니가 괴로웠을까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한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도 모르고 지냈지만 아버지의 시신屍身도 못 본 초상初喪을 만난 가족들, 그 당시의 슬픔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의 유언이 한국이 해방되거든 내 시체를 고국으로 옮겨달라고 하셨다는 그 마지막 말씀이 결국 실행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그 자체를 생각하면 울분을 표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내 몸이나 성했으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내 있는 힘껏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이렇게 아픈 몸이 되어 가지고는 가슴만이 답답할 뿐이라고 하면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병이 하루 이틀 나을 수 있는 병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 만큼 안정을 제일 필요로 하면서 영양보급을 위하여 비타민제를 계속 복용하고 있었다. 특히 비타민 C가 부족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식생활에 있어서도 많은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몸은 만신불수滿身不髓가 되어서 불편하지만 신경은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서 현실의 일보다는 지난날의 일들을 하나 하나 조용히 추억해보면서 시간을 지내고 있는 것이 安 여사의 생활의 전부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금년(1958년)에 쉰 일곱이 된 여사는 슬하에 딸 둘이 있을 뿐이다. 현재는 큰딸과 함께 살고 있다. 북아현동의 집은 본래 적산敵産 집이었는데 불하拂下 중이라고 한다. 조용하고 공기가 좋아서 요양에는 퍽 좋은 곳이어서 마음에 든다고 한다. 여사의 병시중은 큰딸이 보고 있는데 이미 출가를 한 딸이니 만큼 2남 1녀의 어머니가 되었으며 군인으로 있는 남편을 섬기는 아내의 고달픈 몸이었지만 의지할 데가 없고 아무도 주위에 없는 여사로서는 불가 부득 딸을 부르게 되어서 딸이 손수 어머니의 시중을 돌보고 있는데 딱한 일이 많다고 한다. 무엇보다 손수 손녀들이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리광을 조금도 부리지 못하고 고독하게 자라고 있는 것, 엄마에게 매를 맞고 울고 있는 광경 등은 마음 속으로 애처롭고 귀여워도 몸이 불편하고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어린것들에게 안 되었다 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딸이라도 있어서 이렇게 어려운 생각 없이 마음껏 정성껏 시중을 들어주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또한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 여사를 좋아하는 청년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곧잘 안 여사는 지난날의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재미있게 털어놓고 있었다. “연애를 못하는 남자가 어데 있어! 연애를 못하면 바보지!” 이렇게 정열적인 젊은이들의 기분을 잘 알아 맞춘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하루종일이라도 그칠 줄 모른다.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앉아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안 여사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뿐이 아니라 학문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열성을 다하는 데에는 모두 놀라며 감탄하고 있다. 병이 나기 전 여사는 이대梨大 학생들의 프랑스 어 강의를 개인교수직으로 맡고 있었는데 사간 제로 끝나는 일이 없으며 헐 수 있는 데까지 하다가 상대방의 학생이 지칠 정도가 되어야만 그만 두게 되는 성미였다고 한다. 모든 일에 정열적인 여사가 지금은 병으로 누워 있게 되지만 않았다면 사회사업에 반드시 몸을 받치고 말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자기의 일보다 남의 일을 보아주기 좋아하고 남의 일을 자신의 일과 같이 성의 있게 보살펴주는 데서 자신의 사는 보람을 느꼈다고 하는데 퍽 남다른 데가 있음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옛날 자신의 연애시절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여사는 항상 많은 남성들의 동경憧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으며 프로포즈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마음에 드는 남성이 없었는데 결국에는 지금의 여사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하고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여사의 비위를 맞추는 등 하는 데에서 그만 지고 말았다고 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여사인 줄 알고 부지런히 바이올린을 배우는 등 또는 같은 하숙집으로 하숙을 옮기는 등, 갖가지의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는데 20년 간의 결혼생활을 통하여 한결같이 고맙게 아내에게 대해 왔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하는데 남편에 대한 불만을 20년 간 결혼 생활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단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술을 과히 마시는 일이라고 하는데 술 마시고 주정을 부렸다거나 주위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기 남녀간의 결혼은 서로 신중하게 상대방을 연구하고 잘 알게 된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이 아내에게 소리나 버럭버럭 지르고 돈이 생기면 첩이나 얻을 줄 알고 그래서는 이상적인 가정은 이룩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실제의 경험담을 재미있게 이야기 해준다. 발음이 또렷또렷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앉아서 한참 듣고 있노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의사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절대로 삼가야 한다고 하지만 뜻 있는 친구나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힘이 드는 줄 모르게 이야기의 꽃을 피우는 안 여사였다. 지난날의 생활이 그대로 자취를 감추지 못한 탓이라 하겠다. 그렇게 활동적이며 적극적인 여사이지만 가정에서의 주부로서의 일면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요리 솜씨와 바느질 솜씨가 매우 비상하다는 것. 바느질과 요리에 있어서도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루바삐 몸이 완쾌되어서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룰 것을 빌고 싶었다.
= <主婦生活> 1958년 12월호
우리는 지금 / <詩> 대산/최홍윤
우리 땅을 딛고
같은 하늘의 공기를 마시고 사는
우리는 지금,
서러워도 서럽다 말자
그리워도 그립다 말자
어디 한 번
조실부모(早失父母)한 사람만큼
서러워 봤는가?
어디 한 번
어린 나이에 부모 잃고
뼛속에 사무친
그리움으로 살아보았는가?
그것도
조국을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의
아들딸로 살아보았는가 말이다,
나는 오늘
안중근 의사의 고명딸
안현생(安賢生) 여사의 육필 수기를
처음 접하고 부끄러워서
그리움과 서러움이란 단어를
함부로 쓰지않기로 했다
사람 사는 세상
언제나 어둡고, 도둑과 사기꾼이
득실거리기 마련이지만
호국 영령의 子孫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사지(死地)로 내 몰아서야 되겠는가
누가 지킨 금수강산인데
누가 찿은 조국인데!
아, 너무도 부끄럽다
내 주변에는 아직도 조국 때문에
조실부모한 사람이 많다
자유란 공기로 살아가는 우리가
이젠 그리움이니 서러움이니 하는
낯부끄러운 말들은 하지도 말자.
이 땅에 몹쓸 사람들과
숨쉬며 살아가는
나 역시 부끄러운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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