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의 하루
이 순 형
김포에 있는 거래처, 주물공장에 가니 마당에는 어느새 코스모스가 피어 높아진 창공을 배경으로 하늘거린다. 공장장이 나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공장으로 안내한다. 시커먼 주물사를 형틀에 넣고 다지는 기능공들이 저편에 보이고, 이쪽 벽을 따라서는 주조로(鑄造爐)에서 뜨거운 쇳물이 끓자 마스크를 쓴 인부들이 마치 주전자의 물이나 되는 듯 따라서 형틀에 붓는다.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보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작업반장은 안전하게 하라고 손짓하면서 소리를 지른다.
마당에서는 다른 기능공들이 이미 식은 형틀을 분리해내자 깨끗하고 예쁜 기계부품이 검은 주물모래(鑄物砂)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빨간색 용탕이 어떻게 저렇게 흰색 제품으로 변형되었는지 마치 번데기에서 갓 나온 나비처럼 신비하기까지 하다.
인류가 어떻게 구리를 녹여 도구로 만들 줄 알게 되었을까? 아마 구리 원석을 화덕의 받침돌로 쓰다가 녹아내린 구리가 굳어진 모습을 보면서 도구로 만들어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철이 많이 나는 고장의 원시인들은 철기를 만들었을 테고, 청동기를 가진 부족과 싸워 이기니 인류는 자연스레 철기시대를 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기술이 진보하기까지 백만 년이 더 걸렸을지도 모르지만 요즈음의 각종 합금강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불과 수백 년 동안 이루어진 결과라고 한다.
연금술은 고대 이집트에서 주술적인 용도로 시작되었는데, 보통의 비철금속으로 금을 만들고자하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세의 유럽에서 값싼 금속으로 금이나 은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은 더욱 커졌고, 많은 실험을 거듭하면서 발달하였다. 그래서 각종 합금강에 대한 제조 기술은 지금도 유럽, 특히 이태리가 가장 앞섰다고 기술자들은 설명한다. 미켈란젤로의 고향이니 오죽하겠는가.
문득 이태리의 욕심 많은 연금술사가 내 머릿속을 헤매고 있다. 기괴한 실험도구가 책상위에 가득하고, 각종 서적이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어두침침한 골방이다. 그는 빗질도 하니 않은 더벅머리, 덥수룩한 수염에 담배를 물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작은 쇠솥에서 끓고 있는 물질을 보고 있다. 잠시 후에는 노란색 가루를 넣으니 불꽃을 튀기며 녹아들어간다. 쇳물의 색깔이 보랏빛으로 변한다. 실망한 눈빛이 역역한 그가 고개를 저으며 주석을 한 덩어리 넣고 이번에는 꼭 금이 되라고 주문을 외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세요?”
공장장이 마스크를 벗으며 하는 소리에 나는 중세 여행을 마치고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주물이라는 것이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많은 노하우가 필요하답니다. 이 계통에서 30년을 넘게 근무하는 저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요. 섞는 성분에 따라 전혀 다른 제품이 나오지요. 구리를 주석과 섞으면 방짜유기그릇을 만드는 청동이 되지만, 아연과 섞으면 기계부속을 만드는 황동이 된답니다.”
신기한 눈으로 용광로를 쳐다보는 내게 공장장이 하는 말이다.
공부를 해보면 각종 금속은 녹는 온도가 다 달라서 알루미늄은 660도에서 녹고, 구리는 1,080도인데, 철은 1,500도가 넘는다. 더구나 텅스텐은 3천도가 넘어야 녹는다. 그렇게 높은 온도를 견딜 그릇이 어디에 있겠는가마는 다른 금속을 섞어서 녹이면 그 보다 낮은 온도에서도 녹으니 신비하다. 물론 불에는 녹지 않는 내화벽돌로 쌓은 용광로에서 특수 합금강을 만들지만, 텅스텐을 녹이기 위해서는 여러 원소를 넣는 순서가 맞아야 하고, 그 순서가 틀리면 잘 녹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아서 결국 못쓰고 버린다.
금속마다 녹을 때 보면 성분에 따라 혹은 합금의 비율에 따라 색깔이 달라서 연분홍이 있는가 하면, 파란 색을 띄는 것도 있다. 용탕을 내려 형틀에 부을 때는 색깔이 얼마나 예쁜지 숟가락으로 떠먹어보고 싶은 것도 있다.
성분에 따라서는 함께하지 못하는 것도 있는데, 유황이 많이 섞이면 깨지고, 탄소가 필요이상으로 많으면 완성품이 여러 갈래로 금이 가서 못쓰게 된다. 하지만 적당량을 넣으면 단단한 성질이 좋아서 각종 농기구를 만드는데 제격이다. 기계부품을 만드는 데는 용도에 따라 다른 원소를 넣고 끓인다. 그러한 배합비율이나 원소의 종류를 알아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했을까 생각하면 선배기술자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용광로의 크기도 여러 가지가 있다. 포항제철의 초대형 용광로는 우뚝 솟아서 그 지역의 랜드마크인데, 아마 10층 건물보다 크게 보이고, 한 번에 수 십 톤씩 쇳물을 끓여낸다. 그런가하면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30kg짜리 소형도 있으니 용광로라기보다는 장난감 같아 보인다.
공장을 둘러보면서 주조공장의 여러 가지 일조차도 우리 인간들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 사이에도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조직을 만들 때는 합금강을 만들 때처럼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사람들의 능력도 제각각이라서 이해심이 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 좁아 삐지기 잘하는 사람도 있다. 재능으로 말하자면 금속의 종류처럼 다양하다.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통역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손재주가 없어서 만지는 기계마다 고장이나 내는 나는 아내에게 늘 구박덩어리지만 손쉽게 뚝딱 고쳐놓는 사위의 모습을 보면 신기할 정도이다.
물론 성격도 제각각이라서 쉽게 사람을 사귀는 활기찬 성격이 있는가 하면 수줍음이 많아서 잘 어울릴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마치 알루미늄은 쉽게 녹지만 텅스텐은 잘 녹지 않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공장의 하루가 바쁘게 지나가고, 지붕위에는 지는 태양이 식어가는 쇳물 색깔로 물들어 있다. 작업 종료 벨이 울리자 연금술사들이 장갑을 벗고 땀을 닦아내며 하나, 둘씩 공장을 나온다. 사람들이 3D업종이라고 부르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뿌리산업을 지켜주는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환한 미소를 보낸다.
(2017 시에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