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급식 논쟁, 또 다른 축은 '농업'이다"
[우석훈 칼럼] 공생을 거부하는 '서울', '나쁜 투표'의 의미
기사입력 2011-08-22 오전 8:03:44
솔직히 어지간하면, 나는 그냥 투표하려고 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나쁜 투표'라는 구호에 잘 동의가 안 되어서 그렇다. 오세훈 서울 시장이 좋은 시장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보편적 복지=포퓰리즘'이라는 조중동 프레임도 너무 낡은 시대착오적 구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남의 단체장 주민소환의 경우 등,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그렇게 입장이 다를 때마다 서로 투표를 거부하면 과연 '레퍼렌덤'이라고 부르는 정책 투표 자체가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더 컸다. 사실 우리가 했던 주민투표는 방폐장을 누가 더 높은 찬성률로 유치할 것인가, 그런 관제투표 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이유로, 어지간하면 나는 그냥 투표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오세훈 시장이 투표율에 자신의 신임을 거는 걸 보고서, 이 투표는 도저히 내가 참가할 수 없는 투표가 되어버렸다. 일단 시장은 선거를 관리하는 사람이지, 이렇게 한쪽 방향으로 참가하는 것 자체가 주민투표법 위반이다. 선거 조항에서부터 관리까지, 이상한 게 한 두 개가 아니라서 그 정도는 그냥 애교로 넘어간다고 치자. 누군가는 고발을 하겠지만, 내가 고발할 건 아니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투표에는 선택이 있고, 그 선택의 결과가 승부가 된다. 나는 찬성이든, 반대든, 어쨌든 원칙적으로 어느 쪽이든 이기게 되는 그런 정상적인 상황을 기대한다. 그러나 지금 시장이 연동하겠다고 하는 것은, 승리와 패배, 그런 게 아니라 투표율 자체에 걸었다. 간단하게 계산해보더라도, 지난 지방선거에서 오 시장이 받았던 표 이상을 받아야 하니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정치에는 양보와 타협 과정이라는 게 필요하니까, 사실 투표를 던지기 전에 반대 의사를 가진 사람들과 다양한 조율을 하면서 정치인으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게 원칙적으로는 더 옳았을 것이다. 그냥 정부에서 임명하는 게 아니라 단체장을 정치적인 선거를 통해서 뽑는 게 그런 역량을 발휘하라고 한 정신이 아닌가?
현재 오 시장이 자신의 신임과 연동시킨 것은, 투표참가율 그 자체이다.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설령 내가 단계적 무상급식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투표에 참가하는 것 자체를 '잠정적인 오 시장 지지'로 간주하겠다는 건데, 이건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정상적인 일이다.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으니, 이런 기상천외한 일이 생겨나는 것 아니냐? 이런 상황에서는, 나도 도저히 투표에 참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정치인 오세훈이 잘 해주기를 바랬던 정서적 애틋함이 아직도 남아있다. 공개적으로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원전 정책에 대해서 반대했던 국회의원이 바로 오세훈이었다. 왜 그가 지금과 같이 토건을 상징하고, 보편적 복지라는 시대 정신을 반대하는 그런 정치인이 되었는지, 애틋함이 느껴질 뿐이다. 부자들의 2세들에게 무상 급식을 줄 수 없다는 건, 그 부모들이야말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니, 경제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얘기이다. 잠깐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얘기인데, 도대체 오 시장은 뭐에 씌워서 이런 일을 하는지, 영 안쓰럽다.
이 기회를 빌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놓치고 있는 분야 한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왜 '무상급식 + 친환경 + 지역농업', 이런 틀로 지금의 급식 논의가 왔는지, 그걸 잊은 것 같다. 학교 급식, 작업장 급식, 군대급식, 이렇게 시작되었던 급식 운동의 한 축은 복지이지만, 다른 축은 기본적으로는 농업정책이었다. 급식에 대한 지원금을 보조금으로 본다면, 궁극적으로 이건 농업과 농민에 대한 보조금이다. 경기도 같은 데에서 서울처럼 지나치게 복지 논쟁으로만 가지 않은 것은, 서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은 바로 지역 농민들에게 보조금 혜택이 가기 때문이다.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농업에 대한 수요 기반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학교급식 문제를 그렇게 강조한 것이다.
다만 서울에는 농업이 없다. 그 대신 양수리 친환경농업단지 등 경기도 혹은 그 외의 지역 농민에 대한 소득 이전이 생겨나게 된다. 물, 전기, 석유 등 서울을 움직이기 위한 물질적 기반들을 위해서 서울은 다른 지역에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 소득이전은 당연히 서울에 사는 시민들이 감수해야 할 정도의 작은 불편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으로 다 따지면, 서울의 물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서 강원도가 댐을 유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손실 같은 것도 다 보전해주어야 한다. 아무런 발전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원거리 송전으로 사용하는 서울 사람들이, 전기값도 더 내야 하는 게 원칙적으로 옳다. 서울시의 학교급식의 당사자는 서울시민만 있는 것 같지만, 국가라는 틀에서 보면 다른 지역의 농민들도 이해당사자들이다.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민주당도 그런 농업의 측면이라는 데에서는 잘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다.
당연히 서울에는 농민들이 살지 않기 때문에, 서울시의 학교에 식재료를 납품하는 농민들을 위해서 나는 내 한 표를 행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한 표마저 다 자신의 지지로 이해하겠다는 시장의 이상한 계산방식에, 도대체 내가 어떻게 투표를 할 수 있겠는가?
서울은 지방을 착취한다. 그래서 서울 등 수도권에 여러가지 불편을 주는 게 경제적으로는 당연하다. 무상급식에는 복지의 측면도 있지만, 전국적 농업정책을 형성하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번 투표가 가진 나쁜 정신 중에는, 보편적 복지의 거부도 있지만, 농업에 대한 지원을 자신들은 다른 지역의 농산물을 얻어먹는 주제에 "내 돈은 못쓴다"는 더 나쁜 정신이 숨겨져 있는 것 아닌가? 대통령 8.15 경축사에 나왔던 '공생'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오세훈의 '지속가능한 복지'라는 말 자체가 공생에 반하는 개념이다. 그게 이번 주민투표의 진짜 나쁜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먹는 것, 우리가 쓰는 것, 우리의 전기, 이게 서울이라는 틀로 들어오면 이 대부분을 서울시민은 다른 지역에 신세지고 있다.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도시적 삶의 물질적, 생태적 속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오세훈 주민투표 소동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다.
투표를 하든, 거부를 하든, 이건 시민들의 개인적 선택이다. 다만, 오세훈이 제시한 문구에 찬성하는 순간, 서울이 다른 지역과의 공생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에 투표하게 된다는 것을 환기시켜 드리고 싶다. 한나라당, 그리고 강남의 일부 부자들, 이번 사안을 너무 좁게 보고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