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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비리 발본색원 출판준비위원회
전문가란 그 분야에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소설가 • 예술가 • 정치가 등과도 같이 “家”자가 붙게 된다. 여기서 “家”자가 붙는다는 것은 보통사람들보다는 경험 • 논리측상 보편타당성 있는 사고와 판단으로 더 합리적임을 말함이나, 이런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보다 차원 높은 시각에서 본다면 非論理的인 경우도 가끔은 있게 된다.
여기서 論理的이란 말은 광의적으로는 사물의 理致나 道理에 맞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협의적으로는 是是非非를 가린다는 정도로 나타나면서 감정해결의 면도날로 사용할 때 이런 말을 하는 자나 논박하는 자 모두가 같은 부류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면에서 論은 學보다 더 미흡한 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하여 學이란 적게는 배운다는 의미와 더불어 크게는 理論的矛盾에 대한 타파와 더불어 創意的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면에서 論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무엇인가를 論한다는 것은 그 논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먼저 논리적 타당성을 전제로 論하게 되는 것이요, 논리적 타당성이란 먼저 論理三段論法을 거쳐 사회적 타당성과 합리성이라는 검증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것에 대한 신뢰를 부여할 수 없기에 진정한 論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자신의 실력과는 상관없이 어부지리로 얻은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여기서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소리라는 얘기요, 말과 소리의 다른 점은 그 말이 이성적이냐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말과 소리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소리에는 "개~소리 말라"는 식으로 대하게 된다는 점을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즉 이런 소리에는 구태여 말을 하거나 論할 가치가 조차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소리에 대답하는 것은 결국 대답한 사람도 개~소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學이라고 할지라도 論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學이라는 순수성이나 창의성 그리고 정열적 탐구성도 論理三段論法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하기에 論者나 學者나 외양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論이란 지식을 단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타인에 대한 공격성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데 비하여, 學이란 그 앎을 승화시키는 가운데 모순점을 찾아내고 새로운 지식을 창의한다는 면에서 인내와 수양이 첨가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學者가 論者보다 더 수양과 인품이 진보된 단계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學에 대하여 道란 論과 學을 거쳐 이른 최상의 단계로, 論이 단순한 논리적 타당성이나 當不當을 논하는 단계라면, 學이란 이런 論의 과제를 단지 可不를 따지는 논제의 黨不當을 넘어 보다 나은 방법을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보며, 이에 대하여 道란 그 바탕이 넓고 크며 본디 밝은 것이라 했으니, 그 논제의 과제를 더욱 더 明確觀火하게 하여 인간을 神의 경지로 이끄는 최고의 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여 그 배운 지식으로 옳고 그름을 論하는 필자가 되어 논단에 서게 되고, 그러한 과정의 연속적인 가운데 그 지식에 대한 모순점을 찾아내어 고치거나 새로운 지식의 필요성에 의하여 학문을 연구 창작할 때 학자라는 칭호가 부여되며, 이러한 학자가 창조 창의라는 세계에 몰입하면서 하나의 지식만으로도 우주만물의 이치를 꾀뚫어 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를 때 道學者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오르기 힘든 道에 이르는 길에는 종교적인 방법과 학문적인 방법이 있다.
즉,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도교와 불교가 있으나, 도교의 無思想이나 불교의 空思想은 서로 비슷하여 종교학자들 간에는 서로 자기네 이론을 빌어간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이니 알기 쉬운 불교를 위주로 말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道를 10단계로 나누어서 그 최고단계에 이른 사람을 확철대인이라 부른다. 또한 이처럼 道의 단계를 걸어감에 있어서 한단계한단계식 오를 때마다 자신보다 더 높은 道人에게 검증을 받으며 사도에 빠지지 않고 보다 높은 단계로 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學에서 말하는 道란, 종교에서 2단계에 이른 道와 學에서 1단계 이른 道를 같은 수준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학문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지식을 쌓는 단계 그리고 硏究創意하는 단계 이후에 수양과 경륜이 쌓이면서 세상이치를 깨달아가는 길이기에 종교에서의 2통을 학문에서의 1통과 같은 수준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힘든 길이 道의 길이기에 아무나 도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런 道에 이르기 위해서는 3생을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평생을 공부하다가 죽어 그 영혼이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고, 이렇게 환생한 사람이 다시 죽을 때까지 공부하며 수양하는 과정을 되풀이 해야만 道를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도 힘든 과정을 거쳐서 道를 통하기에 도통한 사람은 단순한 學이라는 단계를 뛰어넘어 소인과는 다른 원대함이 있기에 사물을 봄에 있어서도 明確觀火하여 흔들림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도 힘든 길이 지식의 길이요 학문의 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노력없이 수장이라는 최고의 자리를 어부지리로 꿰차고 앉아서 그 자리를 오염시키는 소인배들이 있는 한 그 피해는 모두 국민들의 몫으로 돌아오며 고통과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소인배들은 재물을 탐함에 있어서는 쇠파리보다도 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의 뜻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팔아 자신의 유치한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국민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면서도 반성할 줄을 모르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마치 치자가 죽을힘을 다하여 사그러져 가는 경제의 불씨를 살리자마자 저 세월호와도 같은 사건으로 그 불씨에 찬물을 끼얹져 온 국민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서도 반성할 줄 모르며 계속해서 큰소리치는 후한무치한 자들과도 같이 말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잘 못된 교육관과 정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한창 지식을 연마해야 할 시기에 진리탐구는 하지 않고 데모나 하다가 구속되면 그 구속이 이마의 별이 되어 야당정치인들이 모셔가는 잘못된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들이 이런 일을 주도하다보니 자기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써먹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계는 학계대로 치열하게 지식을 연마하는 탁월한 인제들을 키워줘야 함에도 실력없는 기성세력이 그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자기보다 뛰어난 제자들을 질시의 눈으로 보며 스스로 연구하고 노력하여 새로운 논문을 발표하는 어려운 길보다는 손쉽게 제자들의 논문이나 표절하며 그 자리를 고수하려는 사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스승 밑에서 배워온 학생들 또한 구태의연한 자세가 그대로 정치에 반영되어 정책개발은 상상도 못하고 집권당의 일에 사사건건 시빗거리를 찾아내어 그 짓거리로 자신의 이름을 떨치려는 골빈당 정치인들 때문에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되어 국민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각 메스컴들은 이런 뉴스를 자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오보함으로서 무식한 자들이 정계에 입성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는 결국 실력 있고 현명한 자들의 정계입성을 간접적으로 제한하는 역할을 함으로서 국민들이 현재와 같은 암울한 세월로 고통을 당하게 함에도 일조를 하고 잇음을 자각하고 앞으로는 현명한 자들이 정계에 입문할 수 있도록 보도함으로 써 국민들을 보호하는 역할에 적극 협조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잘 못된 구태의연한 자세에 대하여 변명하려는 기성세력들에게 이렇게 외치며 물어보고 싶다.
보라!
가장 짧은 역사와 더불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다민족국가인 미국이 오늘날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필자가 발명품을 가지고 유럽과 미국 등을 다니며 석학들과 토론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즉 미국은 발명가->교수->박사라는 사회구조를 이루며 대우해주기에 다민족국가라는 단점과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세계경제를 지배해 오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발명이란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일에 도전하며 수많은 난관을 복함으로써 그 나라와 사회에 공헌한 바가 가장 크기 때문에 그 고통에 대한 대가로써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사회 지도층을 이끌어가는 종교단체의 수장들 역시 일류대학을 나온 엘리트들만 신학교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그 누구보다도 더 논리적이요 이성적이라서 그 힘이 정치에도 파급돼 과학문명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미개한 나라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장 위대한 이성적이고도 논리적 사고를 무시하며 혼돈의 세계에서나 써먹던 “무조건“이란 단어를 남발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無知를 마치 神의 계시자로 승화시키며 기망과 자기포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20세기의 거성이라는 버틀런트 럿셀이 하버드대학에서 “나는 왜 크리스찬이 되지 않았는가!” 라는 강의에 대하여는 일언반구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도 미개한 사고는 사회전반에 그대로 반영되어, 잘 한다고 하는 정책이 장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천길 낭떨어지로 향하게 하고 있기도 한 것이고.
국민은 꿈과 희망을 먹고산다. 그러기에 당장은 배고프고 고통스럽더라도 조금만 더 가면 행복이 기다린다면 현재의 고난은 오히려 행복으로 바뀌며 열심히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천길 낭떨어지가 기다린다면 아무리 고기반찬을 입에 넣어준다고 할지라도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요, 치자들의 덕목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책을 제시할 지식이나 능력이 없기에 선심성정책이나 남발하며 국민들을 천길 낭떨어지기로 향하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 정치이다. 이처럼 장래가 암담할 때 이익이나 챙기자고 온갖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시절에는 경제적으로 헐벗고 배고픈 시절이었으나 국민들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결과 아시아의 기적을 이룩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그 당시에 비하면 춥고 배고프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지정책이 잘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래가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흥청망청 앞뒤 안 가리고 카드를 긁어제껴 파탄에 이르게 되자 그 빚을 정부가 탕감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은 정책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며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다는 사고를 불러일으켜서 일 안하고 놀고먹으려는 사고가 국민들 속에 팽대해 장래가 보이지 않는 암흙 세계를 만드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듯이, 이 말은 일을 하지 않고 흥청망청거린 결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임에도 그런 자들이 고통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면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대적 손해라는 느낌을 주게되어 열심히 일할 의지를 꺾고 놓고 있으니 어찌 이러고도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겠는가!
또한 정부예산을 더 타내려고 연말이되면 말장한 보도부럭을 파헤쳐 시민들의 불편은 아란곳하지 않는 구청들의 작태를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예산이 남으면 그 남은 돈으로 불우이웃돕기를 하도록 하라! 그리고 불우이웃돕기를 가장 많이 한 구청에게 예산을 더 편성해 주라! 그러면 정부예산이 쓸데없이 낭비됨 없이 좋은 일에 사용됨으로써 일잘하는 정부로 칭송을 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된 근원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석학들 중 우리나라 석학들은 자신이 모르면 엉터리라고 치부하며 자기가 최고라는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더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고 구태의연한 자세에 빠져 있었다. 그로 인하여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여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 물질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논문이 나오질 않아 발전이 없으며, 이론이 부족한 발명가들이 찾아가면 알 수 없는 발명품에 대하여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엉터리라고 주장하여 실망으로 포기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진 석학들은 우리와는 달랐다. 즉 만들어진 발명품은 실증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실증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증명하는 것이므로 모르면 솔직히 모른다고 말하고 그 발명품에 대해 낮은 자세로 가르침을 받고자 하며 그러한 자세로 연구 노력하여 새로운 논문이 나오고, 이 논문을 바탕으로 획기적인 발명품울 탄생시켜 선진국이라는 자리를 고수해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석학들의 낮은 자세는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단지 책으로만 배운 학생들과는 느낌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사실이 이럴진데 그 간접적인 지식마저 배우지 않고 데모나하다가 정치계에 입문한 자들이야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7~8명이 모여서 분야별로 연구 노력한 지식을 모여서 토론으로 한꺼번에 흡수하는 교육자세와 비교해보라)
법조계 또한 오십보백보로, 보통 사람들보다 더 높은 윤리의식을 가지고 판단해야 함에도 일반인보다 못한 윤리의식에다가 양심마저 검은 법복으로 가리운 채 전관변호사와 협작하여 판결문장사로 얻은 재물을 이용하여 정계에 입문하고 있으니 이러고도 나라꼴이 잘 되기를 바라는가!
또한 진리탐구에 열중해야 할 시기에 데모나 해대던 골빈 학생들을 정치에 입문한 현실에서 무슨 새로운 정책을 기대하고 선진문화창출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면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한 공로가 있으니 정계에 입문할 자격이 있다고 말할지 모르나 이는 진정으로 무지한 자들의 헛소리로, 역사란 거대한 大河의 흐름과도 같으니 그 흐름에 저항하는 바윗덩이들은 거시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역사의 흐름에 방해만 될 뿐이요 이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 산증거가 바로 고 박정희대통령시절 아시아의 경제기적을 이룩한 살맛나는 나라를 쭉 이어가지 못하고 데모나 하던 자들이 정권을 잡은 결과 앞날이 암울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물어보라!
고 박정희대통령시절 정치를 잘 했기에 가득 쌓아놓은 곳간의 곡식을 이제까지 바닥나오게 퍼먹고도 모자라서 나라 팔아먹을 정도로 빚덩이 나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데모할 때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나라는 선진국대열에서 세계경제를 이끌어가고도 남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무지한 자들의 허황된 주장은 무지의 소산이니 절대로 교언형색에 빠져서 다시는 이런 현실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고로 이제는 바꿔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도 변해야 한다. 인고응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인과응보가 통하지 않는 현실은 암담한 앞날을 예고할 뿐이다. 또한 이런 암담한 현실을 만들고 있는 파렴치한들을 몰아내야 할 것이다.
특히 모든 부정부패의 뿌리요 칼자루를 거머쥔 법조비리를 발본색원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바로 설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정부패가 집결하는 곳이 법조계인데 이들이 바로서지 않는 한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것은 사성누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조비리의 뿌리가 사회전반에 암세포처럼 뻗어 있어서 도려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즉 그 어떠한 정책이나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에 인간의 심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인 처자들의 저주스러운 눈총을 받게 하는 썩은 검판사집필집을 발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왜냐하면 교활한 법조인들은 중세 철학자이자 궤변논자들이 써먹던 논리를 판결문에 적용하여 범법자들이 정당하다는 허가장인 판결문을 만들어서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논리의 반전을 일으키는 “일응이나 고로”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살인자를 선량한 시민으로 만드는 판결문의 실체를 썩은 검판사집에 상세히 설명하여 그의 아들딸들이 보고 저주의 눈총을 보내도록 함으로써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실감하도록 해 一罰百戒의 효과로 부정부패를 拔本塞源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화가 되지 않는다면,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의무가 있는 법조인들이 사회정의를 좀먹는 현실을 만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헌법전문에 웅집 된 국민저항권으로 이들을 몰아낼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헌재결 1997. 9. 2597헌가4)
다음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생활로 모두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마평하던 시절 이름도 없었던 노태우씨를 대통령으로 만든 선거전략과 그 선거전략 속에 숨겨진 비전(천상의 세계에서는 3개월 전에 이미 대통령을 뽑아놓고 그렇게 되도록 민심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원리를 모르는 한 대권은 물 건너 간 것이다. 그러기에 조상을 잘 섬겨야 한다는 것으로, 조상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 묘자리도 옮기고 제사도 지내고 하는 것으로 선거 최소한 6개월 전에는 최고신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기 위함이다)을 말하면서 이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위해 인간의 구성체인 영혼이 이루어진 부분과 천상에서의 역할 그리고 영이 센자는 아무리 지식이 많은 교수 박사들이라고 할지라도 종 부리듯이 하는 원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댓글 제목을 이렇게 정하면 어떨까 하고 글을 수정하여 올려봅니다.
이 일은 큰 일이기 때문에 능력있는 분이 나타난다면 언제라도 본부장직을 내려놓고 평회원으로 최선을 다해
법조비리를 발본색원하는 일에 매진하고자 합니다.
보다 많은 단체나 능력있는 사람들과 연계하여 이 일을 같이 하였으면 합니다.
더 좋은 고견이 있으신 분들의 참여에 의하여 제목을 수정하였으면 합니다.
오늘 마침 시간이 날 것 같아서 구교수님 재판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올리신글 2번 읽으면서 대충 시향기님의 방향을 알것 같습니다. 1. 각자는 자신이 보는 관점. 이론전개. 사실입증 모두 자유롭게 할 수 있다. 2. 그러나 제한된 페이지(분량)속에 담아야 하므로 원고의 양은 서로 협의하여 정한다.
저는 저의 판결문(엉터리 판결문)을 중심으로 쓸까 생각합니다. 역시 고문님이 지적하신데로 무죄로서 마지막 승소한 사건입니다.그러나 사실이 제대로 인지되고 적시되지 아니한 엉터리 판결문(회원님 사건이 모두 그러하시겠지만?)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합니다. 참고 말씀 주신다면 받아 들이겠습니다.
항소님 판사의 기각판결에 대하여 "법도 모르는 자들이 법복을 걸치고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가!"
라는 글과 함께 대법원에 상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대법원으로 직행하여 접수 3일만에 오늘 대법원서 접수통지서가 왔습니다.
때로는 이처럼 충격요법도 필요하다고 보니다.
시향기님 큰일 하십니다 누구인가는 꼭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영육 간에 강건 하십시요
부정부패 추방국민운동본부 싸이트 추천 함니다
감사합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세부 목차, 지침, 방향이 포함되었으면 좋겠어요
집필진들이 함께 만들어 가야 안되겠나 생각합니다. 의견을 각자가 밝혀 가다보면 윤곽이 안 드러 나겠습니까?
이견은 나중 만나서 조정하면 되겠지요?
바둑에~
" 아생연후살타" 라 합니다.
내부가 더더욱 중요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법조비리 발본색원 출판준비위원회 발족 필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적극 협조부탁드립니다.
농약사이다 할머니 사건을 요즘 인터넷에서 가끔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도데체 재판이란 무엇이고? 법이란 무엇인가?
죽은 사람 두고 또 산사람 죽여야 하나? -- 잘못된 생각입니까? 우리가 책을 쓴다면 이런 재판과 법의 본질적인 비판? 사고력이 높고? 철학적 식견을 갖추고?
법전문가로서? 그런 분이 이 문제에 좀 접근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방향으로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 향기님의 사법개혁이란 큰틀에서 발간해 보자는 말씀 환영합니다.
우선는 발기인님들과 집행부와 회동을 하시여 충분한 의견을 취합하여 기획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공익적이라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회원들이 각자 경험하고 느낀바를 진솔하게, 그리고 객관성 있게 기술하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 되며, 센세이션을 일으킬 소재가 된다고 봅니다.
꼭 승소한 사건이라기 보다, 진행 중이어도,억울하면 기술하는 것이 이 출판의 목적이 아닐는지요?
감사합니다.
높으신 안목으로 적극 협조 부탁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시민 기자님. 우리는 모두 인터넷 세상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출판 기획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해 주시면, 훨씬 빨리 일이 진행되고,
객관적이고 투명성 있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냥 무조건 참여한다는 것은, 취지는 높이 평가하나, 어떤 과실은 딸 수 없다고 보여짐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그 내용으로 글을 쓰면 되겠습니다. 그냥 썩은 판사라 함은 기준이 모호하고? 인명사전을 만든다는 것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판결문 수집은 가능하겠지요? 여하튼 그런 주제로 글을 쓰시면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