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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아주 의미 있는 숫자죠?
바로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 선생님께서 제시한 우리나라 산줄기 중 남한에 소재한 지맥의 개수입니다.
돌이켜보면 2010. 7. 2. 존경하는 박성태 선생님은 신산경표라는 지리지를 출간하십니다.
2004. 8.에 출간한 같은 이름의 저서를 증보 ·보완한 책입니다.
우리나라 남한의 모든 산줄기를 1대간 7정맥 6기맥 156지맥(후에 6지맥 추가하여 162개 지맥)으로 정리한 이 책은 나라 안의 산꾼들에게 "우리가 왜 산줄기를 가야 하는가!"하는 명제 즉 산행 목적 혹은 목표를 제시한 그야말로 그들에게는 등대 혹은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하며 산으로 이끌었습니다.
당시 지도의 능선과 능선을 나름대로 이어가며 산줄기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그들에게 능선의 길이를 연장시켜 주었으며 거기에 이름까지 부여해 주었으니 까막눈이었던 산꾼들은 개안을 한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본시 지명에는 그 지역의 문화, 역사, 풍습, 전설 그리고 생활 양식들이 녹아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 이름이 남들과 다름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면 지명 역시 특정지어 불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인데 사실 그 이름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작업은 분명 아닐 것이며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개념을 설정하고 그것도 모자라 산경도라는 개념도까지 만들어 산행에 도움을 주셨으니 박성태 선생님의 이러한 작업 아니 위업은 고스란히 하나의 역사입니다.
요즘 쓰는 시쳇말로 "그뤠이트!"라 할만 합니다.
선조들께서 물려주신 '산경표'에서 당신들께서 말씀하신 "우리는 대간과 정맥을 얘기해줬으니 그 이하는 너희들이 잘 챙겨서 선용하도록 하라."는 당부를 잘 따르신 선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같은 취지이나 내용을 달리하여 먼저 그와같은 산줄기를 걸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신경수님이나 김영환님 등이 그러한 분들이지만 활자화된 책을 만들어 배포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긴 합니다.
어쨌든 산꾼들에게는 하나의 목표가 생겼고 그런 목표가 생긴 이상 백두 대간을 마친 분들은 정맥으로 뛰어들었고 정맥이 끝난 분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기맥, 지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에 진학하는 그런 절차를 밟는 듯한 모양새였습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백두대간의 도상거리 671.5 km, 정맥 2,124km, 6기맥 그리고 지맥 162개 등 10,000km 가까이 되는 대장정을 수 년간에 걸쳐 두 발로 진행한 것입니다.
이런 정신 나간 분(?)들이 지금까지 20여 분 계십니다.
이 분들 중에서 제일 연소자가 무심이 선배님이고 신경수 님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들이 보통은 60세 중반 정도에 졸업하셨습니다.
그런 지맥 사회에 드디어 오늘 최연소 162지맥 완주자가 태어날 예정입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기 전인 1977년에 지리 종주를 시작으로 산행에 빠져들었으니 벌써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상당한 산행력입니다.
산경표를 접하자 바로 백두대간에 들었으니 산줄기 산행은 늦었지만 그만큼 깊이 있는 산행을 한 것 같습니다.
산 이름이 '산으로'라는 박흥섭 님의 얘기입니다.
대한산경표라고 신산경표와는 조금 다른 이론을 주창했죠.
산줄기를 산경이 아닌 물줄기 위주로 파악했다는 점이 박성태 선생님의 신산경표와는 차이가 납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그의 이론은 '합수점' 그러니까 소위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에 충실했다는 평가입니다.
그가 우선은 산경표의 선구자인 박성태 선생님의 신산경표를 따라 162개 지맥을 걸었으니 마지막 피날레를 신산경표의 이름으로 걷기로 합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그 구간은 신산경표의 이름으로는 각호지맥이고 걸을 구간은 그 중 삼도봉 ~ 도마령 구간입니다.
몇몇 지인들을 위하여 별로 어렵지 않은 구간으로 하나를 비워 두었던 것입니다
그의 대한산경표 이름으로는 초강지맥이죠.
그 구간을 거꾸로 걷기로 합니다.
백두대간 그것고 삼도가 만나는 삼도봉에서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는 얘기겠죠.
07:20
양재동 양재고등학교 앞에서 만납니다.
저와 수헌님, 산으로님 그리고 범여님입니다.
범여 선배님은 오늘따라 행사가 겹쳐 결국 참석을 못하신다고 하면서 축하 꽃다발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항상 여유로움으로 힐링산행을 추구하는 수헌님은 술좌석을 여러 번 가졌음에도 함산만큼은 이번이 처음이군요.
죽암 휴게소에서 한 번 쉬었다가 바로 도마령으로 갑니다.
지도 #1
10:44
오늘은 역으로 진행을 하기로 하였으니 도마령으로 올라갑니다.
우측 하단부 49번 도로는 영동군 상촌면과 용화면을 잇는 도로입니다.
그러니 바로 앞이 전라북도 무주군이고 멀리 좌측로 덕유산 향적봉이 사면에 슬로프와 함께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앞줄기의 전면에 있는 봉이 거칠봉1178.3m이고 우측이 깃대봉1062m일테니 그 뒤에 살짝 보이는 게 적상산1031m일 것입니다.
그나저나 덕유산 향적봉의 향적香積이 무슨 뜻인가요?
보통 우리나라의 산 이름은 불가佛家의 영향을 받았을것이니 부처님의 가피력香이 차곡차곡 쌓이는積 곳이라는 뜻이라고도 들립니다.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 '금산사'편을 보면 "앞으로 돌아가니까 반이나 무너진 향적香積에는 여우도 굴을 짓게 되었고 사람은 기척도 없는데 미륵교 본부라는 간판만 쓸쓸하게 붙어 있다"고 하여 향적은 '절에서 식사를 담당하는 곳'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공양간이라는 것이겠죠.
조금 다른 의미인가요?
그런데 진양지를 보면 향적사는 "천왕봉에 있다. 성모묘의 향화를 위해 건립됐다."고 하여 향화香火는 세간에서는 제사지내는 것을, 절에서는 불공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얘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재되어 있습니다.
한편 거창의 유학자 갈천葛川 임훈(1500~1584)은 『登德裕山香積峯記』에서 香林이 많아 향적봉이라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향나무가 많아서 향적봉이라....
숲을 이룰 정도로 많았던 香木은 지금도 일부 남아 있는 덕유산 향나무를 말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리고 상봉 아래 그러니까 지금의 대피소 자리쯤에 향적암터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향나무가 많아 향적봉이 되고, 거기서 향적암으로 이름지었다는 것은 조금 의문스럽습니다.
차라리 향적암에서 향적봉이 유래되었다면 백번 양보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금남정맥을 계룡산으로 오르다 보면 좌측에 있는 봉우리의 이름이 향적산574m이건만 이곳은 향나무와는 거리가 먼 산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불교 대승경전 '유마경' 제10품 '향적품'에 "아득히 먼 衆香세계가 있고 그곳에는 모든 것이 향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향기(妙香)로서 장엄삼매에 드는데 그곳의 부처님이 香積佛이다. 유마힐은 향적부처가 남긴 밥 한 그릇을 얻어다 수많은 대중들에게 대접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절밥을 향반香飯이라 하기도 한답니다.
그러니 향반을 만드는 곳을 향적이라 하는 것도 하나의 의미일 것 같습니다.
어쨌든 향적사가 곧 불국토, 이상세계라는 염원이 녹아 있다는 얘기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세월이 흘러 향적사가 들어선 산을 향적산으로 부른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향적이란 ①'절에서 식사를 담당하는 곳' 즉 공양간 같은 의미이고
② 장엄삼매에 들 정도의 향기가 있는 아득히 먼 衆香세계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 도마령에서 각호산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레입니다.
하나는 이 도마령 주차장 옆 나무 계단으로 오르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저 고갯마루 너머에서 바로 치고 올라가는 방법 등입니다.
그리고 지맥의 반대 방향은 사진 좌측 절개지로 오르면 됩니다.
거기서 약 1.4km 정도 북서진하면 천만산960m을 만나게 되는데 초강(각호)지맥은 여기서 직진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좌측으로 진행하는 가지 줄기가 백하지맥입니다.
플랭카드가 멋지군요.
덕유산을 배경으로 한 컷하고 오르기로 합니다.
그런데 도마령이 무슨 말입니까?
11:00
도마령 바로 위에 있는 상용정.
여기서 무슨 비밀이 풀릴 수 있을까요?
우선 상용정의 이름을 봅니다.
상촌면의 '上'과 용화면의 '龍'을 따 상용정이라 이름한 듯한데,
그 정자 안에 있는 건립기를 보면,
도마령刀馬嶺은 '칼을 든 장수가 말을 타고 넘었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랍니다.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북정맥에서 가평(화악)지맥이 가지를 치는 곳 부근에 도마치령이 있습니다.
그곳은 도마치倒馬峙라고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궁예가 말을 타고 고개를 넘다가 말에서 떨어져 넘어진 고개"라는 취지로 풀이합니다.
그럴까요?
사실 이런 '도마'나 '두로' 혹은 '두미', '대미' 등이 들어간 지명은 '두름 / 둠' 계열의 산이나 고개들로 그 지형이 길게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형상입니다.
휘감아 싸고 있는 형국이라는 얘기죠.
이를 국어학적으로 풀어보면 우리 옛말 '두름 / 둠'은 '두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런 '두름/둠'은 분지처럼 주변이 산이나 고개 등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세월이 흐르면서 '도로', 두로', 두미' 등이 생기고 '도마' 또한 여기서 생긴 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대전의 도마동이나, 깊은 산골이 두메산골이 된 과정, 논의 물이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주위를 둘러 막은 곳을 논두렁(두르 +엉) 등이 그 분화된 단어들이니 '둥글다'라거나 '동그라미'도 여기서 가지를 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상촌 혹은 영동이라는 큰 고을을 병풍처럼 크게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여기서 파생된 또 다른 단어가 두름 →두루미 →학 →하우 → 와우 등의 변형을 거치면서 학산도 생겼으며, 아우고개도 생겼고 와우산도 생기게 되었으며, 두르가 두류가 되고 두르가 '디리' →'지리'도 된 것입니다.
그러니 지리산이라는의미도 국어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이렇듯 그 어원은 이 '둠/ 두름'인 것입니다.
혹자들이 얘기하는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따서 智利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를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는 짐작입니다.
11:03
상용정 바로 뒤에 있는 봉우리가 842.7봉이고 여기서 4등급 삼각점(영동 457)을 확인합니다.
올라가야죠.
이제 긴 동면을 깨고 능선도 기지개를 켜는 듯 눈을 녹이고 있습니다.
오늘 밤엔 비가 많이 온다고 하죠?
11:45
하지만 여긴 맑기만 합니다.
하늘엔 검은 구름이 아닌 흰구름이 군데군데 널려 있으니 전형적인 맑은 날씨 그대로입니다.
각호봉 전위봉인 바위봉에서 민주지산과 중앙 좌측의 석기봉을 봅니다.
좌측끝으로 오늘의 종착지인 백두대간의 삼도봉이 보이니 우측 희미한 석봉이 삼봉덕유산이로군요.
수헌님이 좋아하며 깊은 애정을 품고 계신 '대덕산1290.7m'을 보려는 욕심은 아직 성급합니다.
흰눈 사이로 튼실한 골격을 보여주려는 지맥의 산등성이에서 자연의 힘을 느껴봅니다.
멀리 금산 시가지가 보이니 그 뒤가 갑천(식장)지맥 줄기겠고....
그렇다면 그 우측에 철탑이 보이는 고봉이 서대산904m이군요.
그러니 저 갑천(식장)지맥에서 가지를 치는 서화(장령)지맥이 우측으로 진행하는 방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촌면 물한리......
삼도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고자천을 만들고, 그 고자천은 상촌면 임산리에서 궁촌천을 만나 초강이 되어 금강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흘러가겠죠.
그 초강과 금강이 만나는 합수점.
그곳에서 지금 걷고 있는 이 지맥도 맥을 다하게 되겠죠.
다시 말해서 백두대간 삼도봉에서 가지를 친 산줄기와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
그들이 헤어졌다 만나는 곳.
그곳으로 이 산줄기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물을 건넘이 없이.....
물줄기를 중시하는 대한산경표의 입장에서는 그 물줄기인 초강의 이름을 차용하여 초강지맥이라 부릅니다.
반면 산줄기를 중시하는 신산경표에서는 이 지맥의 가장 높거나 널리 알려진 봉우리의 이름을 따옵니다.
그런데 이 지맥에서 가장 고봉은 석기봉1242m이나 민주지산1241.7m인 반면 각호산은 1202m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들 봉우리 중에서는 민주지산이 더 알려졌을 법도 하건만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 선생님은 '각호산'에게 대장大將 자리를 주셨습니다.
이름이 주는 강렬함에 점수를 더 주신 모양새입니다.
민주지산.
각호산 정상으로 오릅니다.
아래 고자리 마을 뒤로 삼봉산이 조망되고 그 뒤로 영동읍내 시가지가 보입니다.
정상석을 촬영하고 뒤에 오는 팀들을 위해서 잠시 기다리며 수헌님이 가져오신 프리미엄 막걸리를 한 통 땁니다.
홍삼가루가 무려(?) 0.144% 함유되어 있다고 표기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양이 실제 얼마나 되는 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감이 잘 안 잡힙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마십니다.
탄산성분도 많이 들어 있고.....
정말 멋진 산하입니다.
석교산1194.8m이 멀리 중앙에 보이고....
어느 등산지도에 보니까 저 석교산을 화주봉이라 표기했더군요.
산악회가 많아지다 보니까 명산(?)들도 많이 생기는군요.
우측 뾰족하게 선 봉이 석기봉이고 그 뒤 우측으로 희미한 봉우리가 수헌님이 좋아하는 봉우리인 대덕산.
그 석기봉 좌측 두 번째가 오늘의 종착역인 삼도봉이네요.
여담 한 마디.
저는 산행을 하면서 인물 사진을 별로 남기지 않다보니 정작 필요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사진 한 장이 없더군요.
그런 저를 의식하셔서 수헌님이 기념 사진을 촬영해 주시는데 영 쑥스럽기만 합니다.
민주지산을 배경으로 엉성하게 포즈를 잡아봅니다.
모델보다 작가가 좋은 거 같습니다.
후미 팀들이 올 때까지 막걸리 한 통을 따고 계란을 안주로 먹습니다.
12:19
한참이나 놀다가 일어섭니다.
각호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로프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제 완연한 봄날입니까?
질퍽질퍽 거리고 로프는 흙과 녹은 눈에 젖어 만지기가 영 찝찝하기만 합니다.
12:24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 안내판에는 지금 이곳이 각호산이랍니다.
아까 정상석이 있던 봉이 1202.0m 각호산이라고 분명하게 표기되었고 지금 이곳은 그저 각호산의 바로 옆에 있는 무명봉인 만큼 이 안내판의 잘못된 표기는 지워야 할것입니다.
지도 #2
12:40
황룡사 그러니까 물한리로 탈출할 수 있는 삼거리입니다.
삼도봉 ~ 도마령 구간에서 물한계곡 버스 정류장으로 탈출할 수 있는 루트가 두 군데 있습니다.
이곳과 석기봉 부근에 있는 곳으로 조금 이따 확인할 것입니다.
12:54
오늘의 주인공 산으로님이 1176.8봉 전위봉으로 오릅니다.
이어 수헌님도.....
12:57
1176.8봉의 모습은 그저 이렇고....
잡목 사이로 민주지산만이 조망될 뿐입니다.
좁은 능선을 따라.....
묵묵히 그냥 걷습니다.
조금은 답답한 구간입니다.
13:35
그러면 그 유명한 민주지산의 초막 즉 무인대피소입니다.
들러는 봐야죠?
쓰레기요?
당연히 가져 가야죠.
나쁜 사람들....
난로까지 설치한 이유는 혹시나 겨울에 저체온증이나 동사사고 예방을 위한 듯 싶습니다.
하지만 저나 우리 팀 같은 경우에는 무용지물일 것 같습니다.
산에 인화물질을 가지고 다니질 않으니.....
특전사 부대원 위령비를 보고.....
혹한기 훈련을 하다 이럴 정도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나온 봉우리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습니다.
좌측 끝이 각호봉.
13:48
그러고는 민주지산입니다.
예전에는 참 정감이 가던 산 이름이었습니다.
독재 정권 시절.
참민주주의를 꿈꾸고 열망해서 지은 이름으로 받아들였었습니다.
한자표기를 볼까요?
眠周之山이군요.
眠은 보통은 '면'자로 많이 써서 '쉬다', '자다'의 뜻으로 많이 쓰이지 않습니까?
그 쓰임새가 숙면熟眠,, 수면睡眠 등일 텐데...
'민'으로 쓰일 때는 훈訓이 '보다'이니 그렇다면 '周'와 함께 써서 '주위를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산'이라는 의미입니까?
참고도 : 1915년 제작한 일제강점기 지도
그렇군요.
구 지도에는 岷周之山이라고 표기되어 그저 '둘러 서 있는 산' 어쩌면 조금 전 살펴본 '두름/둠'에서 온 한자어가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듭니다.
그 민주지산에는 1등급 대삼각점(영동11)이 박혀 있군요.
마음 먹고 아주 큰 걸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석기봉 뒤로 백두대간의 능선들이 들어오는군요.
백수리봉과 그 뒤 중간에 대덕산, 우측의 삼봉덕유산.
중앙 좌측으로 석계산.
석기봉 좌측으로 두 번째 봉우리인 삼도봉.
용화면.
..................
우측 뒤로 대간의 웅이산까지도 조망이 되는 것 같은데....
삼도봉 뒤로 수도산, 가야산 그리고 지리산까지 마음으로만 조망합니다.
뒤에 따라오는 분들을 기다리며 데크 작업을 하고 있는 곳에 자리를 폅니다.
막걸리 서너 순배를 돌리고 자리를 텁니다.
삼도봉에서 기다리고 계실 '산으로'님 가족 걱정입니다.
40분 정도 실컷 놀고 일어납니다.
진행 방향이 남쪽이니 우선은 눈이 없습니다.
지도 #3
15:42
하지만 그것도 잠깐.
바로 심설 산행이 시작됩니다.
이번에 새로 맞춘 산으로님의 지맥 표지띠.
후답자들을 위해 긴요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16:05
석기봉을 오르는 길은 두 갈레입니다.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면 바위를 좌로 틀어 로프를 잡고 오르는 방법.
다른 하나는 바위 우측으로 편안하게 진행하여 마애불 샘터를 이용하는 루트입니다.
우측 루트로 저는 가보지 않았는데 두 분의 설명입니다.
석기봉 전위봉이 다리를 묶습니다.
중앙 최고봉이 삼도봉.
조형물이 보이는군요.
우리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는가요?
손을 흔드는 모습도 보이고....
좌측으로 물한리 계곡.
계단을 이용하여,
16:14
석기봉으로 오릅니다.
뒷분들이 걱정이 되긴 하는데....
정기적으로 산행을 하신다고 하니 그다지 걱정되지는 않고....
16:24
정자를 지나,
16:30
이정표 하나가 나옵니다.
아까 이야기한 좌측으로 탈출할 수 있는 곳입니다.
바로 물한리 계곡 황룡사로 떨어지게 됩니다.
발자국이 선명합니다.
헬기장으로 올라서자 두 분이 환영의 박수를 보내주시는군요.
부군夫君의 장거壯擧를 축하한다는 의미겠죠.
산행력이 40년이 넘으셨지만 산줄기에 들은 게 얼마나 되셨습니까?
이 신산경표 전지맥을 마치기까지는 이 산 저 산 하느라 거의 18년 정도 걸리셨나요?
어쨌든 지금 이렇게 박성태 선생께서 그어주신 신산경표를 따라 1대간 9정맥, 6기맥, 162지맥 완주라는 대위업을 달성하셨습니다.
통계로 보자면 22번째 혹은 23번째 완주자로 랭크될 것 같으며 거기에는 '최연소'라는 꼬리표가 붙을 것입니다.
당분간 '56세'라는 최연소 꼬리표는 현재 진행하고 있는 분들의 나이를 감안해 볼 때 앞으로 거의 100년 정도는 깨지기 힘든 기록일 것 같습니다.
9정맥을 마치고 지맥에 뛰어드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거나 지맥길의 고단함을 한 번이라도 맛 본 분들이라면 이내 단념하기 쉬우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지맥에서는 '50'이라는 숫자를 중시합니다.
나이 '50'이라는 숫자가 아닙니다.
진행한 지맥 숫자죠.
'50'개 이상 지맥을 소화했다고 한다면 그 진행한 숫자가 아까워서라도 162개를 채운다는 얘기겠죠.
그동안 소홀해야만 했던 가정생활.
이제 조금은 충실해야겠죠?
하지만 '산으로'님 경우에는 숙제가 몇 개 남아 있습니다.
스스로 그은 대한산경표의 175지맥 완주를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의 중첩된 부분을 제외하고도 두 '표'의 상위한 마무리 지점을 확인하는 작업도 하여야 하며 대한산경표에서 새로 확인한 지맥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뒤돌아 보면 순식간에 지나온 여정이었지만 꾼들에게는 지나온 기억이나 추억보다는 남아 있는 산줄기에 대한 기대가 더 크기만 합니다.
그래서 꿈속에서 산줄기를 만나고, 산줄기를 꿈꾸며,
정상에 무탈하게 오르기를 희망하기만 합니다.
간절히.......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나 부탁드리자면 대한산경표에서 제시한 지맥 다 완주하신 다음 기억에서 조금은 살아졌을 법한 백두대간 한 번 더 걸으시죠?
새록새록 다가올 것입니다.
초심이......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제 산으로님도 'legend' 대열에 합류하신 겁니다.
자랑스럽습니다.
멋지십니다.
그리고 사모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실 아무리 안아줘도 그 고마음을 다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겠죠.
선생님의 산패를 봅니다.
우리나라 산줄기사史의 살아 있는 얼굴이십니다.
올 봄 '홀대모' 모임에는 노모께 잘 말씀드리고 참석토록 해야겠습니다.
그동안 소원했던 어른들도 뵙고 공부거리도 찾아야겠죠.
독불장군이 어디 있겠습니까?
후미 대원들이 속속 도착합니다.
환경문제를 깊이 고민하며 그 운동에 열심이신 선배님.
대한민국 대추주 즉 棗酒釀造 인간문화재 시보試補님.
그리고 홍일점으로 우정 참석해 주신 처녀 같은 선배님.
옆에 계신 전통주 교수님.
곧 인제 둘레길 혹은 더 품격 있는 곳에 가령 수헌재齋 혹은 수헌軒 정도의 이름으로 전통주 음주장을 여실 듯 싶습니다.
저 우측 끝의 각호산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산으로 :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서두르자구요."
여성 선배님 : "사진 잘 나왔네."
조주양조 인간문화재 시보님 : "이렇게 할까?"
환경 선배님 : "모자 똑바로 쓰고!"
현오 : "자! 갑니다!"
현오 : "손 한 번 드시구요! 화이팅!"
이번에는 저도.....
산으로님 사모님: "자! 웃으세요!"
산으로님 사모님 : "혹시나 모르니까 한 번 더!"
다시 본업으로 돌아갑니다.
삼도봉
“형. 이게 뭐야! 아직도 이걸 청산하지 못하는 거야?”
백두대간보존법이 발효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 법이 제정됨으로써 백두대간은 나라에서 인정하는 공식용어가 됐다는 얘기다.
“글쎄다. 혹시 이게 학술적인 용어를 꼭 집어넣어야만 하는 자리라면 태백산맥이든 뭐든 이해를 해 줄 텐데....”
이 삼도화합탑이 제막된 게 1990년이다. 당시 영동군수, 금릉군수, 무주군수 등 삼 군의 군수들이 참석하여 삼 도의 화합을 빌었다고 한다. 물론 1990년이면 아직 세간에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그렇게 널리 퍼진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법으로 제정된 공식 명칭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백두대간이냐 태백산맥이냐”가 논란의 중심에도 섰지 않았었는가?
금릉군이 김천시가 되었고 당시 군수님들이 자리에 안 계셔서 그런가?
“우리가 고쳐야겠네.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우리 민족의 정기가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서 충청, 전라, 경상도로 갈라지네!’로”
백두대간은 나라에서 공인한 이름이다. 당연히 바꿔야 하지 않을까?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55쪽 이하
내려가려고 하는데 안내판에 쓰인 내용이 거슬립니다.
이 삼도봉에서 남진하는 방향 그러니까 대덕산으로 가다보면 김천시와 무주군의 도계가 되는 곳에 있는 고개가 부항령입니다.
김천시 부항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잇는 고개죠.
부항령(釜項嶺)
“저게 삼면봉인 808봉이고 멀리 가운데 우측 봉우리가 백수리산1034.2m이야.”
“이제 부항령은 다 온 거야?”
“응 거의 다 왔네.”
“이 고개 이름 부항(釜項)은 이 고개 동쪽의 ‘가목’에서 유래했다지? 마을의 생김새가 '가마솥'같이 생겨 '가매실', '가목'으로 불리다 이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부항(釜項)이란 이름이 생기게 된 건데 이것도 다 일본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는 거라면서?”
“그렇게 누군가 얘기하면 그게 진짜가 되어버리지. 인터넷의 병폐야. 사실은 이 부(釜)의 훈(訓)이 ‘가마’잖아. 어떤 호사가가 그 뜻에 착안하여 마을의 생김새가 가마솥같이 생긴 데서 유래했다고 한 거야. 이 ‘가마’의 본래 뜻은 ‘ᄀᆞᆷ’에서 온 거야. 즉 ‘ᄀᆞᆷ’은 ‘곰’이 단군 왕검의 어머니이니까 ‘신성함’을 나타내는 말이었지. 이 ‘ᄀᆞᆷ’이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에 따라 다른 발음을 가진 변형어를 여러 개 만들어 냈는데 ‘감’, ‘검’, ‘곰’, ‘가마’ 등이 그것들이야. 그런데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그것을 한자로 차자(借字) 하다보니 ‘가마’의 경우 별 의미없이 ‘부(釜)’를 쓰게 된 것일 뿐이지. 그러고 항(項)은 고개를 이야기하는 것이니 부항이라 하면 그 자체로 ‘신성한 고개’라는 의미야. 이 동네가 부항면이니 신라시대에 백제와 대치하고 있던 신라 사람들에게는 이 고개가 주는 의미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야.”
“그렇군. 전설이나 유래가 나올 때 ‘~같이 생긴데서 유래했다.’는 말은 우선 의심부터 가져야겠군. 그리고 항(項)은 곧 령(嶺), 재(岾), 치(峙)와 동일한 거고. 결국 항령은 어의 중복이군.”
이 부항령 아래로는 삼도봉 터널이 지나고 있다. 신라와 백제가 첨예하게 대립을 할 때에 신라의 영토였던 이곳은 덕산재, 소사고개와 더불어 신라와 백제가 변방을 지키던 곳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52쪽 이하
이렇듯 지명이라는 것은 그지역을 대표하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사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그 지역 주민들의 의지, 염원, 주관 등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생김새보다는 종교, 풍속, 생활상 등이 녹아들어 있을 것이니 그 이름을 파악하는 것은 그 지역의 역사를 아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위 안내문의 우두령이 '소머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는 설명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집니다.
사실 이 우두령은 여기보다는 사실 황강(수도)지맥의 우두령이 더 유명하고, 더 알려진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도 황강(수도)지맥상의 우두령
생각건대 우두령을 牛頭嶺이라고 표기하면서 그 유래를 '소머리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너무 자의적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지역이 금광마을이라는 곳이 있으니 금광이 있어 '金 〉쇠 〉소 〉우牛'로 변형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사이間', '새新'의 의미로 보아 새〉쇠〉소〉우牛가 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頭'라는 말이 예전부터 '존경', '꼭대기' 혹은 '우두머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가령 백두산이 바로 여기서 온 말입니다.
그러니 이럴 경우 이 황강지맥의 우두령은 전자로 보아 쇠金의 변형이 되어 예전에 '철광이 있는 혹은 금광이 있는 곳 부근의 높은 고개' 정도의 의미로 보거나, 백두대간 우두령의 경우는 삼도봉과 황학산 사이에 있는 높은 고개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해解하는 것이 그 원래 유래의 참뜻에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길일 것입니다.
17:52
너무 늦었습니다.
우측은 해인리 내려가는 길.
좌측으로 내려갑니다.
이건 언제 만들어 놓으셨나.....
장마철을 대비하여 길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다리도 두어 개 생긴 거 같고....
눈이 녹느라고 아주 시끄럽습니다.
석기봉 삼거리를 지나,
물한마을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서둘러 차를 빼서 황간시내의 맛집으로 이동을 하여 뒷풀이를 하고 귀경을 합니다.
저는 아예 여기서 기차로 환승을 하여 귀가토록 합니다.
다시 한 번 산으로님의 신산경표 전지맥완주 축하드립니다.
첫댓글 ㅎㅎ 현오님 글을 다시 보게되니 무척 반갑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같이 산행한것이 이번이 두번째더군요
처음 만남은 비록 말을 섞지는 않았지만
2014년 3월 박성태선배님의 신산경표 10주년겸 지맥완주 축하산행이었네요.
종종 이곳에서 현오님 글을 대할수있기를 바라며 봄모임때 반갑게 뵙겠습니다
저도 2014년 박성태님의 신산경표 10주년 및 지맥완주 축하산행에 참석했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현오님을 알지 못하였고
저나 현오님, 수헌님 모두 존재감이 없는 무명 산꾼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산을 다니면서 지명유래에 관심을 가지다가 어원이나 유래가 궁금하더군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만두었지요 도마치,,궁예가 말에서 떨어져 걸어 도망치다??이성계 관련 이야기들,,,좀 실망스럽더군요 억지로 꾸며된 이야기들 그리고 동일 또는 유사 지명은 왜 그렇게 많은 지요
사니조은님, 산행 잘 하고 계시지요?
지난 가을 구병산 홀대모 모임에 참석하셔서도 시간을 쪼개어 한남금북정맥을 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산과 지명에 대한 이런 해박한 지식이 놀랍고 부러울 뿐입니다.
산으로님의 산줄기 완주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현오님은 산꾼들이 운동 삼아서만 산에 다니지 말고 공부하고 생각하도록 자극을 주는 분이십니다. 하이모세님의 축하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