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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3. 5. 10.~12.(수~금) - 음력(3. 21.~23), 일출 05:24~일몰 19:26
●산행지: 백운지맥(白雲枝脈)/ 수리봉, 서지재 비박
●산행코스: 치악산 남대봉(1,180m)-시명봉(1196m)-명경사-치악재(5번국도)-벼락바위봉(937.8m)-수리봉(911m)-군부대/백운산통신소/봉화지맥분기봉(850.5m)-백운산(1,086.1m)-오두봉-오두재-동막봉(967.5m)/천등지맥분기봉-작은양아치-운곡산(412.6m)-서낭당고개-미륵산(689.9m)-봉림산(577.5m)-서지재-쌀개봉(496.6m)-비두냄이고개(2차도로)-상봉산-만디고개-부문재-긴경산(351m)-수영봉-소리개재-매골고개-용마산(242.8m)-흥원창(49번도로)-섬강/남한강합수점
●먹거리: 생수2리터, 튀김건빵2, 단백질바2, 사탕5
●준비물: 하계텐트, 매트2, 스틱, 헤드랜턴, 구급약, 부직포, 피부연고, 충전지2, 충전짹,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팔토시, 안대, 귀마개, 겨울옷, 띠지20
●거리: 약 62.1Km
●소요시간: 48.22h
●누구랑: 나홀로
●경비: 시외버스11,300(원주), 택시10,400, 치악재휴게소15,700, 뒤풀10,000, 시외버스8,300(문막)
●날씨: 9~25, 좋음
●산행경과:
* 5. 10.(수) :
- 14:00 : 성남 상원사탐방소
- 15:25 : 남대봉(1,181m)
- 16:14 : 시명봉(1,196m)
- 18:38 : 치악재성황당
- 18:49~19:23 : 치악휴게소
- 20:09 : 헬기장
- 20:20 : 강아지바위
- 20:35 : 찰방치
- 21:38 : 벽암
- 21:47 : 벼락바위봉(937m)
- 22:29 : 수리봉(911.6m)
- 22:57 : 비박
* 5. 11.(목)
- 05:25 : 비박지 출발
- 06:02 : 보름가리봉
- 07:02 : 작은백운산(979.4m)
- 07:32 : 백운대통신소
- 08:17 : 백운산(1,087m)
- 08:29 : 상재
- 09:50 : 오두봉(964.6m)
- 10:20 : 오두재
- 11:41 : 삼거리봉
- 11:58 : 천등지맥분기점
- 12:18 : 천은사삼거리
- 14:26 : 작은양아치
- 15:28 : 운골산(412.6m)
- 16:30 : 서낭당고개
- 18:00~18:49 : 미륵산북봉
- 18:20 : 미륵산
- 20:05 : 봉림산갈림봉
- 20:30 : 서지재
- 20:40 : 비박
* 5. 12.(금) :
- 06:07 : 출발
- 06:37 : 쌀개봉(496.m)
- 07:14 : 비두네미고개
- 08:11 : 상봉산(443.4m)
- 09:08 : 삼방산(418.6m)
- 09:52~10:25 : 후용고개/부문재
- 11:55 : 긴경산(351m)
- 12:29 : 수영봉(283m)
- 13:40 : 용마산(242.8m)
- 14:35 : 흥원창
- 14:44 : 합수점
- 15:18 : 원주시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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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구간거리: 53.8km
남대봉-1.8km-시명봉-5.4km-가리파재-3.5km-벼락바위봉-6.9km-백운산-4.5km-오두재-1.8km-천등지맥분기점-3.9km-작은양아치-3.9km-서낭당고개-2km-미륵산-1.5km-봉림산(-0.6km)-0.9km-서지재-3.1km-비두냄이고개-3.2km-만디고개-3.2km-부문재-2.4km-긴경산-2.3km-수영봉4.4km-섬강/남한강합수점
* 구간거리: 58.2km
- 접속: 성남분소~남대봉 5.8km(버스5.9km, 택시3.3km)
- 접속: 금대리 금대야영장~남대봉 6.2km
- 접속: 행구탐방지원센터-2.5km-향로봉-3.9km-남대봉
- 치악재휴게소~서낭당고개 26.7km
-. 남대봉 분기점~치악재휴게소 7km
-. 백운산~서낭당고개 15.5km
- 서낭당고개~합수점 24.1km
-. 서낭당고개~부문재/ 후용고개 15km
-. 부문재/ 후용고개~합수점 9.1km
* 식수 보충 및 참고사항
- 상원사: 경내 급수대
- 치악재 기사식당: 06시~20시, 치악재휴게소 24시간
- 작은양안치: 전통한옥목공소(월가)
- 서낭당고개: 아홉사리마을 민가, 민박, 팬션
- 비두넴이고개: 오른쪽 고개 너머 300m정도 왼쪽에 버스 주차 공간, 주차공간 뒤에 계곡물
- 후용고개: 오른쪽 후용리 방향 농막 뒤편 계곡물, 북쪽 문막 경동대 편의점(도보 왕복40분)
- 신림면 원주콜택시: 033-763-3979
- 문막택시: 033-748-7100, 033-735-4333
* 치악산 남대봉 가는 교통편
- 동서울터미널 ~ 원주터미널: 06:10, 1.30h, 11,300원
- 청량리 ~ 원주(KTX): 06시, 0.48h, 8,600원
- 원주역 ~ 국형사: 역전 건너편 불로병원 사거리에서 좌틀 원주역정류장
- 원주역정류장 ~ 국형사행 버스, 치악재, 신림, 성남행 버스
- 단계터미널 ~ 원일로 농협앞 ~ 신림리버스
*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흥원창쉼터 ~ 원주: 51, 55번 버스
- 흥원창쉼터 ~ 문막터미널(건등사거리)
- 건등사거리 ~ 동서울, 강남터미널, 상봉 : 수시로, 8,100~8,300(원주서 타고 출발하므로 미리 예약 필수)
- 흥원창쉼터 ~ 여주버스터미널: 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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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지맥(白雲枝脈)이란
한강기맥 삼계봉에서 분기된 영월지맥상 치악산 남대봉(1,180m)에서 남서방향으로 산줄기 하나가 분기되어 섬강의 남쪽 분수령을 이루면서 시명봉(1,196m), 가리파재(치악재), 봉화지맥분기봉(850.5m), 백운산(1,086.1m을 지나며 다시 서진하여, 오두재, 천등지맥분기봉(967.5m), 서낭고개, 미륵산(689.9m), 봉림산(577.5m), 서지재, 비두냄이고개, 만디고개, 긴경산(351m), 용마산(242.8m)을 지나 태기산에서 발원한 섬강과 여주 남한강 합수점인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6.9km 되는 산줄기이다.
백운지맥 분기점인 치악산 남대봉(1,180m)은 원주시와 횡성군 경계에 위치하고, 지맥은 원주시 판부면과 신림면을 가르면서 출발한다. 중앙고속도로, 가리파재를 넘어 올라선 벼락바위봉(937.8m)에서 충북 제천과 도계를 접하다가 백운산을 넘으면서 원주시 귀래면으로 들어간다. 미륵산(689.9m)을 지나고 부론면계를 접하며 섬강의 하구로 내려가는데 남한강과의 합수점은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동매마을이다. 원주시가 강원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백운지맥이 원주시의 남서쪽 끝단으로 내려가니 백운지맥은 강원도의 남서단으로 가는 지맥이 된다.
* 백운지맥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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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지맥을 지나는 동네
* 횡성군(橫城郡)
횡성군은 강원도 서남부의 군으로 한우와 안흥찐빵 등이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군의 경계는 동쪽은 평창군, 서쪽은 양평군, 남쪽은 원주시와 영월군, 북쪽은 홍천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군청은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에 있다. 지형은 백두대간의 오대산에서 분기한 한강기맥이 군의 동부를 남서방향으로 뻗어 동·남·북부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완경사를 이룬다. 북쪽에 수리봉(960m)·발교산(髮校山, 998m)·태의산(台議山, 675m)·오음산(五音山, 930m), 동쪽은 운무산(雲霧山, 980m)·봉복산(鳳腹山, 1,022m)·태기산(泰岐山, 1,261m)·청태산(靑太山, 1,180m)·사자산(獅子山, 1,120m)이 있다. 남쪽에는 매화산(梅花山, 1,084m)·치악산(雉岳山, 1,288m)·향로봉(香爐峰, 1,043m), 남태봉(南台峰, 1,182m)·배향산(拜向山, 808m)·삿갓봉(1,030m), 서쪽에는 성지봉(聖地峰, 791m)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군내 산지의 특색은 봉복산을 제외한 모든 산이 군계와 접하고 있어 군역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고도는 낮은 곳이 횡성읍의 해발 110m이고, 둔내면은 평야지가 해발 500m의 고대지로 되어 있어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적 특색을 나타낸다. 모든 수계는 남한강계(南漢江系)에 속하고, 크게 섬강(蟾江) 수계와 주천강(酒泉江) 수계로 나뉜다. 갑천(甲川)은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청일면 감천리·유평리를 지나 초현리와 갑천면과의 경계에서 계천(桂川)과 합류한다. 수리봉에서 발원한 계천은 남쪽으로 흘러 갑천과 합류되기 전까지는 유동천(柳洞川)으로 불린다. 계속 서류하다가 태의산에서 발원하여 남류하여 온 대관대천(大官垈川)과 합쳐져 섬강이 되어 남류하여 금계천(錦溪川)과 합류한다. 죽림산에서 발원한 전천(前川)는 서류하여 횡성읍에서 섬강과 합류하고, 섬강은 남서류하여 원주시로 흘러든다.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은 둔내면의 자포곡리, 둔방내리를 지나 남류하여 안흥면 안흥리를 지나 강림면 강림리에서 동남쪽으로 꺾여 월현리에서 영월군 수주면으로 흘러든다. 고구려시대는 횡천현(橫川縣) 또는 어사매(於斯買)라 하였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황천현(潢川縣)이라 개칭되었고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으로 되었다. 고려시대에 다시 횡천현으로 개칭되어 춘주(春州)의 속현(屬縣)으로 되었다가 뒤에 원주(原州)의 속현으로 바뀌었다. 1389년(공양왕 1)에 비로소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횡천이라는 명칭은 군의 젖줄인 섬강이 남북으로 흐르지 않고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기 때문에 가로의 뜻인 ‘橫’자를 쓰게 된 데서 유래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감무가 현감(縣監)으로 개칭된 예에 따라 현감이 파견되었다. 다음해에는 홍천(洪川)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횡성현(橫城縣)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2000년 1월 12일갑천면 부동리를 갑천면 삼거리에 통합하였으며, 2002년 1월 10일횡성읍 마산리 일부를 횡성읍 읍상리에 편입하여 1읍, 8면 174행정리, 110법정리, 761개 반을 관할하고 있다. 5·6번 국도가 교차하고 우천면, 안흥면을 통과하는 42번 국도가 있다. 영동고속도로가 군의 중앙을 횡단하고 중앙고속도로가 종단한다. 횡성군은 독자적으로 군내버스를 운영하지 않으며 원주시내버스가 횡성을 연장하는 형식으로 운행한다. 2017년에는 경강선이 군내를 관통하여 횡성역, 둔내역이 신설되고 서울과 횡성을 40분에 이어 줄 수 있게 되어 서울로의 접근이 편리해졌다. [포탈에서 발췌정리]
* 원주시
한반도의 중심부이자, 강원도의 남서부에 있으며, 반도의 백두대간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영월지맥을 중심으로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은 영월군·횡성군, 서쪽은 경기도 여주시·양평군, 북쪽은 횡성군, 남쪽은 충청북도 충주시·제천시와 접한다. 강원도 내 행정업무는 춘천으로 옮겨갔으나 중앙선과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상업적인 기능이 활발해졌다. 치악산국립공원과 섬강 등의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문화유적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어 평원군 또는 치악성을 설치했으나 뒤에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삼국통일 후 677년(문무왕 17)에 신라가 북원소경을 설치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북원경으로 고쳤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원주로 개칭하고, 1018년(현종 9)에 군으로 바꾸어, 영월군과 제천군을 속군으로, 평창현·단산현·영춘현·주천현·황려현을 속현으로 포함한 큰 군이 되었다. 1259년(고종 46)에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260년(원종 1)에 원주군으로 복구되었다. 1269년에 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로 승격되고, 1291년(충렬왕 17)에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개칭되었다. 1308년에 원주목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성안부(成安府)로 강등되었다가 1353년(공민왕 2)에는 원주목으로 회복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원주목을 유지했으며, 강원도의 관찰사영이 위치한 행정중심지였다. 원주의 별호는 평량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23부를 실시함에 따라 원주군이 되어 충주부 관하에 있다가, 1896년에 도제 실시함에 따라 강원도에 소속되었다. 강원도의 행정중심지가 춘천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후 행정중심지로서의 역할은 줄어들었으나, 영동지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발달, 중앙선과 영동고속도로의 개통 등으로 상업적인 기능이 활발해졌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3개면을 영월에, 1개면을 횡성에, 2개면을 여주에 이관하여 면적이 크게 축소되었으며, 1914년의 군면 폐합으로 14개면이 10개면으로 통합되었다. 1917년에 본부면이 원주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37년에 원주면이 원주읍으로 승격되고, 1955년에 원주읍이 원주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원주군과 중심 도시 기능을 담당해왔던 원주시가 하나로 다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원주시를 이루었다. 강원도의 남서부에서 경기도와 충북에 맞닿아 있는 원주시의 전체적인 지세는 태백산맥의 오대산에서 갈라져나온 한강기맥이 시의 남동부를 뻗어내려 동쪽과 남쪽은 대체로 높은 산이 많고, 서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며, 곳곳에 침식분지가 발달했다. 치악산은 원주시와 횡성군에 걸쳐 있지만 최고봉인 비로봉(飛蘆峰, 1,288m)을 포함한 대부분이 원주시에 속해 있다. 치악산은 높이 1,000m가 넘는 사무랑산·토끼봉·대왕산·덕가산·남대봉 같은 산을 포함하여 약 24km 정도로 길게 뻗어 있다. 시의 남동쪽에는 향로봉(1,048m)·남대봉(1,182m)·매화산(1,084m)·감악봉(886m)·구학산(983m)·백운산(1,087m)·덕가산(701m)·십자봉(985m)·갈미봉(598m) 등이, 서쪽에는 수래봉(513m)·관모산(362m)·황학산(332m) 등 비교적 낮은 산이 솟아 있다. 산지에서 흘러내린 영랑천·단계천·대안천·매지천·궁촌천·백운천·원주천·서곡천·주포천 등이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에 흘러든다. 섬강은 부론면 흥호리에서 충주호에서 흘러온 남한강과 만나 경기도 여주군으로 흘러간다. 섬강 주변에는 강원도에서 철원평야 다음으로 넓은 문막평야를 비롯한 많은 평야가 발달해 있다.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어 일찍부터 영서지방의 교통 중심지로 발달했다. 중앙선이 시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며, 영동고속도로가 시의 서북부를 지난다. 평창-여주, 춘천-제천을 잇는 국도와 원주-충주를 잇는 국도가 원주시에서 만나고 중앙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 원주는 일찍부터 천주교가 뿌리를 깊이 내린 곳으로, 1965년에는 원주시를 포함해 삼척시·횡성군·영월군·정선군 등 강원도 남쪽 지방과 충청북도 제천시·단양군까지 관할하는 천주교 원주교구청이 개운동에 설치되었다. [포탈에서 발췌 정리]
* 제천시
충북 동북부에 있는 시로 강원도·경북·충북 3개도의 접경지역으로 중앙선·충북선·태백선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관광지로는 의림지와 충주호, 월악산국립공원이 대표적이며, 매년 여름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개최된다. 제천시는 본래 고구려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청풍으로 고쳐 내제군(奈提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충주에 속하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1317년(충숙왕 4) 이 고을의 중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었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1660년(현종 1) 부(府)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제천군에 병합시켜 읍내면(邑內面)이라 하였다가 1917년에 청풍면으로 고쳤다. 지명의 유래는 이곳의 산천경개가 빼어나 남도의 으뜸으로 쳐, 이에 따라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 한 데에서 따온 것이며 조선시대에는 진산(鎭山)인 인지산(因地山) 부근의 남한강유역에 한벽루(寒碧樓)가 있어 많은 시인 묵객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군사적으로는 오현봉수(吾峴烽燧)가 있어 동쪽으로 단양군 소이산봉수(所伊山烽燧)와 서쪽의 충주 심항산봉수(心項山烽燧)에 연결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내토군으로 불렸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내제군으로 개칭했으며, 고려초에 제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제천현이 되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제천의 별호는 대제·의천·의원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6년 충북 제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때 근좌면·근우면·읍내면·백운면·성산면·송학면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충주군 덕산면과, 청풍군이 폐지되면서 청풍군 8개면이 5개면으로 통폐합되어 제천군에 편입되어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이 시기에 통합된 읍내면이 1917년 제천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0년에 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중앙선과 태백선이 통과하여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강원도와 충북 내륙을 연결하는 제천의 역할이 더욱 커져 1980년 시로 승격, 분리되고 나머지 지역은 제원군으로 바뀌었다가 1991년에 다시 제천군으로 환원했다. 1983년 제천시는 당시 제원군의 금성면 일부를 편입했다. 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제천군과 제천시가 다시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제천시를 이루었다. 시의 전체적인 지세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다. 영월지맥이 시의 북부를 지나고, 백두대간이 경북과 경계를 이루며 시의 남부를 지나고 있어 북쪽과 남쪽이 높고 서쪽과 동쪽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시의 동쪽에는 금수산(錦繡山, 1016m)을 비롯하여 동산(東山, 896m)·가창산(歌唱山, 820m)·작성산(鵲城山, 771m)·마당재산(661m)·무등산(無謄山, 620m) 등이 솟아 있으며, 서쪽에는 십자봉(985m)·시루봉(734m)·오청산(五靑山, 655m)·천등산(天登山, 807m)·대덕산(大德山, 580m)·마미산(馬尾山, 601m)·등곡산(嶝谷山, 589m) 등이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백운산(白雲山, 1,087m)·구학산(九鶴山, 983m)·감악봉(紺岳峰, 886m)·석기암(石機巖, 906m)·청룡산(靑龍山, 575m)·송학산(松鶴山, 819m) 등이, 남쪽에는 월악산(月岳山, 1,093m)·대미산(大美山, 1,115m)·문수봉(1,162m)·매두막(1,100m)·만수봉(萬壽峰, 983m) 등의 높은 산들이 감싸고 있으며, 중앙에는 국사봉(國師峰, 632m)이 있다. 단양군에서 흘러든 남한강이 시의 중앙을 동서로 흐르며 많은 지류를 합하여 충주시로 흘러간다. 봉양읍을 흐르는 용암천이 장평천과 합류하여 주포천을 이루고 고교천이 금성면을 흘러 구룡천과 합류하여 각각 충주호로 흘러든다. 이밖에 송한천·시곡천·원서천·화당천·광천·하소천·용두천 등이 흐른다. 특히 하소천과 고암천의 하천유역은 상당히 넓어 청전동에서 두학동까지 펼쳐져 있으며 신월동 하안에 하안단구가 발달해 있다. 이들 하천들은 대부분 깊은 협곡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평야의 발달이 미약하여 장평천과 용암천이 흐르는 봉양읍 지역에 약간의 평야가 있을 뿐이다. 이 지역에는 관개용수 공급을 위한 저수지와 소류지가 많은 편으로 의림지(義林池)를 비롯해 백마저수지·월림저수지·안말제·광암제 등이 있다.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청풍면을 중심으로 한 5개면 61개 동리가 수몰되었다. 단양-제천-태백산지역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했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콩·팥·수수·옥수수 등이며, 고추·잎담배·마늘·약초·인삼 등이 생산된다. 특히 석회암질 토양에서 재배되는 마늘은 단단하고 맛이 좋다. 우리나라 기후구로 볼 때 중부내륙형 기후구에 속하는 이 지역은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해양의 영향을 받지 못하는 내륙으로 한서의 차가 심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철도 및 도로 교통의 중심지로, 시가지를 중심으로 철도와 국도 및 지방도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중앙선이 용암천·장평천을 따라 시의 북부를 동서로 지나고, 시의 북서쪽에 위치한 봉양읍 봉양역에서 충북선과 이어진다. 또한 제천역에서 분기한 태백선이 고암천을 따라 시의 북동부를 지난다. 원주·안동·안성·태백·충주·울진을 잇는 국도가 있다. 중앙고속도로가 완공되어 도로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포탈에서 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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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지맥은 단종대왕 유배길과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 563년 전 다신 오지 못할 길을 떠나며 단종의 눈에 들어온 백운지맥과 영월지맥의 산들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비운의 임금 단종대왕은 지금(2022)부터 565년 전인 1457년 10월 24일에 유배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서 교살(絞殺) 당했다. 당시 17세였다. 세조(수양대군)는 어린 조카의 옥좌를 찬탈하고 마침내 목숨까지 빼앗은 가장 잔혹한 임금이다. 세종대왕의 손자인 단종(1441∼1457)은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1452년 5월 18일 12세의 어린 나이에 조선 제6대 임금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숙부인 수양대군이 이듬해(1453) 계유정변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 등 대신들을 참살하고 국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유명무실한 왕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455년 윤6월 11일에 마침내 숙부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으나 배신자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무산되고 모두 참형을 당했다. 단종은 1457년에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해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사되고 단종은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되었다. 유배지 영월에서 달 밝은 밤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피눈물로 먹을 갈아 이렇게 시「寧越郡樓作」를 썼다.
“한번 원통한 새가 궁궐을 쫓겨난 후(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과 그림자 푸른 산 속에 있네(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잠을 자려 해도 잠은 오지 않고(假眠夜夜眠無假)/ 무궁한 한은 세월이 가도 끝이 없네(窮恨年年恨不窮)/ 소쩍새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 산봉우리엔 달만 밝고(聲斷曉岑殘月白)/ 피눈물 흘러가는 봄 골짜기에 꽃이 붉게 떨어졌네(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먹었는지 애절한 하소연을 듣지 못하고(天聾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수심에 쌓인 내 귀에만 들리게 하느뇨(何奈愁人耳獨聰)”
어린 단종의 한과 눈물이 오롯하게 그려진 진실의 세계, 시적진실(詩的眞實)이 가슴을 쓰리고 아리게 한다. 단종의 통한과 슬픔을 이 시를 통하여 편린(片鱗)이나마 알 수 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이 억겁을 지나도 결코 합리화 될 수 없고 미화될 수 없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아울러 단종의 비극적 삶과 통한이 시공을 초월하여 눈물짓게 한다.
금성대군 집에 연금 상태로 있다 창덕궁 대조전에 나가 유배교서를 받은 단종은 한양 돈화문에서 출발하여 남소문(시구문)으로 도성을 벗어나 살곶이다리를 건너 광나루로 향하였으며 남한강 물길을 거슬러 배를 타고 5일 만에 영월의 입구에 다다랐다. 그때 당시 남한강을 거스르는 유속을 감안해 현실적으로 10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청계천 영도교는 조선 태종 때부터 존재했던 유서깊은 다리로, 조선시대에 흥인지문을 거쳐 왕십리, 뚝섬, 광나루로 가려면 이 다리를 꼭 건너야만 했기 때문에 통행량이 굉장히 많았다. 이 다리가 영도교란 이름을 얻은 데에는 단종의 슬픈 이야기가 묻어 있다.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1440~1521)가 숭인동 정업원에서 이 다리까지 따라왔으나,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고 다리 위에서 이별을 했다고 한다.
송씨는 눈물을 삼키면서 홀로 떠나는 단종을 전송하고자 광나루까지 따라 나섰다. 그런데 동묘에서 황학동으로 가는 영미교(永尾橋) 다리에서 호송대장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송씨 부인에게 호령했다. 여기서 그만 돌아가시오! 노산군은 오늘 밤 안으로 양주까지 가야 하오! 휘하의 50여 명의 금부 나졸들이 창을 엇갈려 세워 송씨 부인을 막았다. 단종의 유배행렬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어득해(魚得海), 군자감정(軍資監正) 김자행(金自行),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이 이끄는 50명의 군사가 호송(護送)하였다.
사람들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하여 영영 이별한 곳, ‘영 이별 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이별교, 영영 건넌 다리 등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중에 이름을 한문화하여 ‘영도교(永渡橋)’가 된 것이다. 훗날 영미교(永尾橋)라고도 불렸는데, 이 역시 영이별교의 음이 전해 내려오면서 변해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영월로 떠나가니, 임금이 환관 안로에게 명하여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였다"라고 나와 있다. 부인 송씨와 이별한 단종은 황학동을 지나 광진구 화양동에 있는 화양정(華陽亭)에서 잠시 쉬었다. 세조가 환관 안노(安璐)를 시켜서 노산군을 전송하기 위해 화양정에서 약간의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화양정 터는 광진구 화양동 주민센터 앞에 있다. 화양정은 세종이 지은 정자인데 이 근처가 조선 태조 때 만든 말 목장이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노산군이 영월에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회행정(回行亭)이라고 불렀다.
단종은 어떤 길을 따라 영월로 갔을까? 단종 유배길에 검단지맥, 주읍지맥, 성지지맥, 독조지맥, 오갑지맥, 천등지맥, 영월지맥, 백덕지맥 등이 있다는 사실은 산꾼들이나 아는 사실이다.
화양정을 지나 광나루(광진정보도서관 앞)에 이른 단종 일행은 광나루에서 이천, 여주까지는 남한강 뱃길을 이용하였다. 하남 배알미동(拜謁尾洞)은 단종 유배를 보고 울면서 절을 했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여주에서 청령포까지는 역로를 이용하여, 원주 흥원창까지 간다. 남한강을 따라 이동할 때에 경기도 여주시 이포나루에 도착해 강을 건넌 후 샘물에서 물을 마시고 갔다는 데에서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물이 생겨났다. 이 우물은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 두둔마을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는 블루헤런 골프장 내에 있다.)
이포나루에 내렸다는 공식 기록은 없으나(광나루 이후 공식 기록은 없다.) 파사성에 오르고 어수정에서 물을 마시고 고달사에 올랐다. 성지지맥(聖地枝脈) 상의 행치(行峙)고개는 여주시 강천면 간매리와 부평리를 사이에 두고 여주와 원주를 넘나들던 고개로 단종 유배 당시 여주군 대신면 상구리 어수정에서 휴식을 취한 후 강천면 이호리 거문동을 거쳐 매화꽃이 만발한 간매리 설경주를 지나 이 고개에 이르렀다. 임금이 행차한 고개라 하여 행치(行峙)고개라고 전해진다. 사실은 행치(幸峙)라고 써야 맞다. 여주 구간에 행치는 총 세군데가 있다.
당시는 한강 수로가 원주의 흥원창을 거쳐 충주의 경원창까지 이어졌다. 흥원창은 지금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은 단종은 지금의 531번 지방도를 따라 부론면 단강리까지 갔다. 좀재, 염터고개를 넘으면 단강초등학교 안에는 단종이 쉬어갔다는 6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단종이 느티나무 아래서 더위를 피해 잠시 쉬었는데 후에 정자를 지으면서 이름을 단정(端亭)이라 붙였다. 단강리의 '끝정자마을'은 이 단정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단종은 동쪽으로 운계천을 따라 귀래면 운남리까지 간 다음, 계속 동쪽으로 길을 재촉해 배재(拜峙)를 넘는다. 배재는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와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를 연결하는 천등지맥(天登枝脈) 상의 고개로 해발 480m다. 이 고개의 이름이 배재가 된 것은 마을 사람들이 영월로 유배되는 단종을 불쌍히 여겨 모두 나와 절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재를 넘은 단종은 지금의 402번 지방도를 따라 운학재(일명: 구력재)를 넘고, 원주시 신림면 금창리 벼락바위봉 아래 찰방망이 고개를 넘어 신림면 신림리 역골에 이른다. 여주에서 강원도 원주시를 지나 영월군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치악재와 싸리재를 거쳐야 한다. 치악재는 원주 시가지를 지나 신림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싸리재는 신림면에서 영월군 주천면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고개이다. 단종 유배길이 조선 3로인 관동대로로 가서 안흥에서 영월로 빠지지 않은 이유는 백성들이 단종 행렬을 보지 못하도록 고개 고개를 넘었다.
싸리재를 통과하는 구간은 신림터널이 개통되었고...,
영월지맥(寧越枝脈) 상의 싸리재는 단종 유배 행렬이 통과했던 옛길로 잘 알려져 있다. 육로를 통해 청령포까지 이어지던 단종 유배길은 원주시 신림면에서부터 국가지원지방도 88호선의 노선과 대체로 일치한다. 지금의 88번 지방도를 따라 영월군 주천면으로 간다. 그러나 신림리에서 황둔리까지 이어지는 옛길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나 있었다. 지금 신림리에 있는 명성수련원 후문 쪽으로 난 길이 바로 싸리치 옛길인데, 이 길을 따라 단종이 갔다고 한다. 원래 싸리치 옛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졌을 텐데, 지금 다니는 길은 차량 운행이 가능하도록 계곡 옆 산자락을 굽이굽이 돌아 이어진다.
싸리재를 넘은 행렬은 먹골과 주천강을 지나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에 당도했다. 싸리재를 지나 솔치를 넘어 신흥역(주천)에 다다르고(솔치재에는 솔치터널이 뚫렸다.) 물미마을 솔치 정상에는 단종이 물을 마신 어음정(御飮亭)이라는 우물이 지근 거리에 있다. 한양에서 영월까지 오는 유배길이 힘들고 피로해 병이 날 만큼 지친 단종은 주천면에 도착하여 느티나무 그늘에서 무더운 삼복더위의 불볕을 피했다. 힘든 길을 이동하던 단종이 이 느티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데에서 이곳은 느티나무 쉼터로 불리게 되었으며, 공원 입구에는 '쉼터'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다.
주천면에서 군등치를 넘어 한반도면으로 진입했다. 군등치에는 어린 단종의 한이 깊게 서려 있다고 한다. 주천에서 영월 방향으로 가다가 처음 만나는 고개가 군등치다. 주천면 거안리와 한반도면(舊 서면) 신천리 사이에 있다. 군등치는 서강에 합류하는 평창강의 강변을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굽이굽이 휘어서 올라간다. 단종이 유배길에 넘었던 많은 고개 가운데 가장 험준한 고개였다고 한다. 고개를 오르면서 단종이 "이 고개는 무슨 고개인데 이다지도 험한가?"라고 물으니 수행하던 왕방연이 "노산군께서 오르시니 군등치(君登峙)라 하옵지요"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오른 고개라 하여 군등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송대장은 어득해(魚得海)이고, 왕방연(王邦衍)은 사약을 가지고간 금부도사이건만 어쩐 일인지 군등치는 왕방연을 불러내고 있다. 수행원이 "오늘부터 군등치라고 부르겠습니다." 했을법 하다.
백덕지맥(白德枝脈)의 마지막 한반도면 신천리에서 주천강과 평창강의 합수점을 지나 옹정리로 들어가는 구길이 단종 유배길이다. 군등치를 지나 신천리 우래실(명라곡)은 백성들이 몰려와 통곡하며 엎드려 울었다는 데서 유래하였고, 백덕지맥 끄트머리 88번군도가 넘는 고개의 왼쪽에 있는 옹정리 방울재는 단종이 타고 가던 말이 놀라서 말방울이 떨어진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천면에서 한반도면(옛 서면)을 거쳐 서강이 둘러 휘감는 청령포에 도착한 것이다.
청령포에 진입하기 전에는 배일치(拜日峙)라는 고개를 넘었다. 배일치는 한반도면 광전리 중심마을인 여촌 동남쪽에 위치한 고개이다. 단종이 유배길에 서산에 지는 해를 보고 절을 했다고 하는 배일치에는 배일치터널이 통과한다. 단종은 배일치를 넘고 북쌍리의 점말과 갈골, 옥녀봉(68m), 선돌을 지나 검각산(劍閣山, 505.3m)의 각한치(角汗峙, 350m)를 힘겹게 넘어 유배지인 청령포로 갔다.
7월 5일에는 강원도 관찰사에게 "노산군이 일용하는 비용을 원하는 대로 지급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7월 6일에는 의원(醫員) 조경지를 영월로 보내 옷가지를 내려준다. 그 후 노산군에 대한 기록은 점점 뜸해진다. 그러므로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난 것은 1457년 윤6월 22일이고, 영월에 도착한 것은 6일 후쯤으로 여겨진다.
영월로 들어서 육로를 따라 100리 길을 걸어 청령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동한 구간이 단종 유배길이다. 유배 생활을 하던 1457년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려 서강이 범람하고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단종은 두어 달 만에 영월부사의 객사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해 10월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단종이 마신 사약은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들고 갔다. 1457년 10월24일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가눌길이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시조를 읊었다. 실록에는 조정 대신들이 노산군을 처형하라고 주장해 세조가 이를 윤허했는데, 사약이 내려지자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千里遠遠道, 美人離別秋)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川流亦如我, 鳴洄去不休)
주천면에서 군등치를 넘어 청령포로 향하던 영월지방의 유배길은 총연장 44.1km로 현대에 와서 3개의 구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단종에게 내린 사약을 직접 들고 가던 신하들이 울부짖으며 걸어갔던 슬픈 통곡의 길, 죽음으로써 단종을 향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던 사육신과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잘못된 것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관직을 내 던지고 임금과 의리를 지켰던 생육신의 의지가 담긴 충절의 길,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모셨던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가 지켜낸 인륜의 길 등이다.
지금은 자동차를 타고 서울에서 청령포까지 3시간 정도면 이동할 수 있지만, 어린 단종이 이동했던 유배길은 150km(뱃길 50km), 380리 길로 실로 멀고도 험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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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악산
주봉인 비로봉(飛蘆峰, 1,288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매화산(梅花山, 1,084m)·삼봉(三峰, 1,073m)과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峰, 1,043m)·남대봉(南臺峰, 1,180m) 등 여러 봉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능선이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동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서쪽은 매우 급하다. 1973년에 강원도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84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큰골·영원골·입석골·범골·사다리골·상원골·신막골 등 아름다운 계곡과 입석대·세존대·신선대·구룡폭포·세렴폭포·영원폭포 등 볼거리가 많다. 이밖에 구룡사(九龍寺)·상원사(上院寺)·석경사(石逕寺)·국향사(國享寺)·보문사(普文寺)·입석사(立石寺)와 같은 오래된 절이 많이 있다.
♤ 성남분소
백운지맥을 금대분소에서 오르기 시작하면 백운지맥 분기점삼거리까지 4.7km이고, 분기점삼거리에서 남대봉까지 다시 0.7km, 상원사는 0.4km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있다. 신림면 신림리에서 원주콜택시를 불러 성남분소 끝까지 올라가면 상원사까지 2.6km, 남대봉까지 3.3km이다.
♤ 남대봉(南臺峰, 1,180m)/ 삼면봉(횡성군 강림면, 원주시 판부면, 신림면)/ 백운지맥분기점/ 상원사 0.7km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판부면, 횡성군 강림면의 경계에 있는 시군삼면봉으로 지맥길은 백운지맥분기점인 남대봉에서 횡성군과 헤어지고 원주시 판부면과 신림면(神林面)의 경계를 따른다. 남대봉은 치악산의 주봉인 비로봉(1,288m)에서 10km 떨어져 있고 비로봉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남대봉 아래에는 유서깊은 고찰 상원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부터는 치악산국립공원 지역이라 이정표와 등로가 잘 되어 있다. 남대란 상원골에 있는 큰 골짜기란 뜻으로 큰 남대와 작은 남대가 있다. 남태봉, 만경대, 망경대라고도 부른다. 표시목에는 한글로는 남대봉으로 표기 해놓고 한문으로는 남태봉(南台峰)이라고 해놨다. 이곳에서 가까운 1,187m봉을 남대봉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치악산국립공원 측에서는 1,196m봉은 시명봉이고 이곳을 남대봉이라 부르고 있다. 시명봉에 대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고, 이 지역 주민들은 시명봉을 남대봉이라 부른다. 치악산의 남대봉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명봉이 치악산의 2봉으로 남대봉이라 불려야 하는데 아직까지 바꿔어지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정상에는 남대봉 통제센터와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고 바로 옆으로는 헬기장이 있다. 약간 떨어진 곳에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어 삼각점은 지나칠 수 있다. 실질적인 남대봉 봉우리에 올라서면, 백두사랑산악회 팻말이 나무에 달려있고, 앞쪽으로 남대봉 공원지킴터 건물이 보인다. 남대봉 헬기장에서의 지맥길 들머리는 '공원지킴터'와 '탐방로 안내도' 사이로 들어서야 한다. 즉 공원지킴터 우측으로 헬기장에 내려서서 바로 좌틀하여 '탐방로 안내도' 사이 등로로 들어서야 한다. 헬기장에서 남쪽으로 시명봉(1,196m)이 커다랗게 보인다. 2등삼각점(안흥 27/ 1989. 7. 재설)이 있고, 넓다란 헬기장에 공원지킴터 건물이 있다. 공원안전센터 오른쪽이 맥길이다. 헬기장을 지나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직진한다. 상원사갈림길에서 상원사까지 0.4km, 상원사에서 물 보충이 가능하다. 영원사, 금대분소갈림길에서 금줄을 넘어 직진하여 시명봉으로 백운지맥을 진행한다.
상원사가 0.4km 떨어졌지만 물도 한잔 마실겸 새로 잘 지었다니 구경도 할겸 그첨저첨 들렀다 갑니다. 상원사에서 옛 기억을 떠올려 남대봉으로 막바로 위로 쳐올랐습니다.
♤ 상원사(上院寺)
보은의 종으로 유명한 상원사는 치악산 남대봉(南臺峰, 1,180m) 바로 밑 해발 1,084m지점인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성남2리 1060번지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창건한 이 절은 치악산 전설의 주인공인 무착대사(無着大師)에 의해 신라말에 중창되었다. 일설에는 경순왕의 왕사(王師)였던 무착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文殊菩薩)께 기도하여 관법(觀法)으로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말에는 나옹(懶翁)스님이 중창하였고, 이후 월봉(月峯)ㆍ위학(偉學)ㆍ정암(靜巖)ㆍ해봉(海峯)ㆍ삼공(三空)ㆍ축념(竺念) 등 많은 선사들이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한다. 또 조선조 역대 왕들은 이 절을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한 기도처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6.25 때 전소되어 폐허화되었던 것을, 1968년 주지 송문영(宋文永)스님과 의성보살이 중건하였으며, 1988년 경덕(敬悳)스님이 대웅전을 다시 짓고 범종각과 일주문을 신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치악산(雉岳山)의 유래가 된 은혜 갚은 꿩의 이야기는 이 절에서 생겨난 전설이다. 옛날 시골에 사는 한 젊은이가 과거를 보려고 집을 나서서 서울을 향하여 가다가, 강원도 적악산(赤岳山)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산중에서 꿩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바라보니 꿩 두 마리가 뱀에 감겨 먹히려는 찰나였다. 젊은이는 활로 구렁이를 쏘아 죽이고 꿩을 구해 주었다. 젊은이는 계속해서 길을 가다가 산속에서 날이 저물어 잘 곳을 찾아 헤매다가 한 인가를 발견하고, 그 집에 가서 자고 가기를 청하였다. 그 집에서 한 여인이 나와서 잘 곳을 안내해 주었다. 젊은이가 피곤하여 깊이 잠들었다가 숨이 막히고 답답해서 깨어 보니 큰 구렁이가 자기 몸을 칭칭 감고 입을 벌려 삼키려고 하였다. 구렁이는 젊은이에게 “나는 낮에 네가 죽인 구렁이의 아내인데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만약 살고 싶으면 종소리 세 번만 울려 다오. 그러면 풀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구렁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디선가 ‘뎅! 뎅! 뎅!’ 하고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종소리를 들은 구렁이는 반가운 빛을 띠고 감고 있던 젊은이의 몸을 풀어주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 날이 밝아오자 젊은이는 종소리가 난 곳을 찾아가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종루가 있었는데, 종 아래에는 전날 새끼들을 살리기 위해 울부짖던 꿩 두 마리가 머리가 깨져 죽어 있었다. 젊은이는 꿩이 은혜를 갚으려고 종을 울리고 죽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과거 길을 포기하고 그곳에 절을 세워 꿩들의 명복을 빌며 일생을 마쳤다. 그 후로 꿩이 죽음으로 보은하였다고 해서 옛날 적악산을, 꿩 치(雉) 자에 큰산 악(岳)자를 써서 치악산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고, 젊은이 무착조사(無着祖師)가 세운 절이 지금의 치악산 상원사이다.
♤ 영원사(嶺願寺)
조망바위에서 금대계곡으로 영원사가 내려다 보인다. 영원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의 말사로 원래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영원산성의 수호 사찰로 창건하여 영원사(永遠寺)라고 하였다가 조선 현종 5년(1664년)에 인환(仁煥)스님이 중건하면서 영원사(嶺願寺)로 바꾸었다. 영원산성이 있었던 영원사는 후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 때 치열한 격전지로 꼽혔으며 임진왜란 당시 영원산성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호국사찰로 이후에는 폐사가 되었던 적이 있으나 1939년에 이계호(李戒浩) 스님이 중건하였고 오랜 풍우(風雨)로 붕괴 우려가 있었던 법당을 1960년에 주지 김병준 스님이 중수, 1990년에 무이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폐허 직전에 영원사 사찰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 시명봉(始明峰, 1,196m)/ 면계/ 백운지맥 최고봉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와 판부면 금대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원래 남대봉인데 시명봉의 유래는 알 길이 없고,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는 출처 불명의 지명이다. 북으로는 비로봉, 서로는 벼락바위봉, 백운산이 훤하게 보이는 백운지맥 최고봉이다. 혹자는 남대봉보다 더 높아 시명봉이 남대봉이 되어야 맞다고도 한다. 대(臺)의 의미를 찾자면 봉우리 생긴 모습으로 봐서는 남대봉보다 시명봉이 훨씬 대(臺)답다. 하지만 1915년 발행 지도를 봐도 상원사 뒷봉이 남대봉이고 현 위치의 시명봉은 표기가 없다. 좀 오래된 5만 지형도 역시 마찬가지다. 시명봉은 그 후에 표기된 모양이다.
♤ 1064m봉/ 면계/ 삼리봉(판부면 금대리, 신림면 성남리 → 금창리)
지맥의 오른쪽이 신림면 성남리에서 금창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 789.4m봉
789.4m봉을 지나 급하게 우틀로 꺽어서 내려선다.
♤ 명경사 입구
입구에 자연치유센터라고 써놓고, 관우상과 십이지신상이 보이는데 전통사찰은 아니다. 전각에는 “天母宮”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단군모와 명성왕후, 육영수여사 사진이 걸려있었다는데 지금은 아니다. 잠깐 둘러보고 다시 명경사 입구로 나와 능선으로 올라선다. 물은 구경하기 어렵고 뒤쪽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물이 있다.
♤ 550.8m봉/ 폐산불감시초소
왼쪽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서면 폐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이다. 내려서자마자 급하게 좌틀로 꺽어진다.
♤ 가리파재(치악재)/ 5번국도/ 치악재휴게소/ 가리파성황당
가리파재는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과 신림면을 가르는 고개인데, 가리파재란 지명 유래를 보면 지금의 신림면이 예전에는 가리파면이었다고 한다. '가리파'는 순우리말이다. 특히 ‘가리’라는 말은 마루금을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더 가까이 해야 할 단어이다. '갈'에서 파생된 것으로 물가 마을에 많이 붙는 지명인데, 가리가 들어간 산 이름에는 산줄기가 갈린 목 또는 고장을 가르는 산에 주로 쓰인다. 물가름. 곧 분수령을 말하며, '파’는 백두산의 서파 북파 할 때의 그 ‘파(坡 : 둑, 제방)’ 이다. '파'는 언덕, 고개를 뜻하므로 가리파는 "산줄기가 갈린 고개나 언덕" 또는 "고장이 갈라지는 곳" 이라는 뜻이다. 고갯마루에 신림면에서 세운 ‘가리파재’ 표석이 있고, 치악터널 앞에 가리파호텔이 있는데, 그 뜻을 제대로 알고 묵어가는 이가 있을까. 1950년 9월 30일 국군이 원주를 수복한 후, 국군은 보도연맹원과 국군 후퇴 당시 인민군에 협조한 혐의가 있는 주민들을 색출해 냈다. 이 과정에서 금대리에서 신림으로 넘어가는 가리파재(현재 치악재) 등에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앙고속도로를 아래로 지나고 5번도로를 버리고 ‘백운산, 칠봉암’ 표지판을 보면서 오른쪽 임도로 들어선다.
♤ 790m봉
가리파재에서 가파르게 올라선 첫 봉우리인 741m봉/ 헬기장에서 10분 더 오른다. 790m봉에서 지맥은 좌틀인데, 약간 오른쪽으로 튀어나간 787.2m봉에 백운산을 향해 앉아있는 강아지바위가 있다. 조망이 좋으니 들렸다 가는게 정석이다.
♤ 찰방망이고개(察訪峙, 676m)/ 면계(신림면 - 판부면)/ 금대임도/ 바리케이드
찰방고개(察訪峙)는 옛날에 다니던 구길이었다고 하는데 역골 마을에 조선시대 신림역이 있을 때 역을 관장하던 보안 도찰방이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고 해 찰방고개라고 부른다는 설과, 원주 원(元)씨가 이곳에 묘를 쓰고 찰방이 났다 해 찰방고개라고 한다는 유래가 있다. 원주시 신림면 금창리에서 판부면 금대리로 이어지는 이곳을 찰방망이 고개라 부르는데, 찰방(察訪)이란 지방을 왕래하는 관료나 군관계자들은 반드시 역참을 들러 말을 갈아타거나 쉬었으며, 역에서는 말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길을 살피는 일을 하였고 여기에 관료들이 파견되었다. 찰방은 이 역찰의 관리자로서 품계는 종 6품이었으며 또 시기에 따라 지방 수령의 탐학을 살피는 역할도 겸했는데 주로 조선 초기의 일이다. 암행어사제도가 있기 이전이고 이 때의 찰방이 암행어사 역할을 대신 했다고 하니 찰방이란 꽤높은 벼슬이었다. 금창리에는 찰방목이(察訪項) 마을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곳은 조선조 비운의 왕이였던 단종의 애절한 슬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12살에 왕위에 오른 단종(1441~1457)은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 청령포(淸冷浦)로 유배되어 17세에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으로 한양에서 영월까지 160km를 걸어서 가는데 신림면 금창리 찰방망이 고개를 넘어 황둔리, 솔치재, 영월의 눈물재를 지나 다시 주천으로 해서 청령포에 도착했다. 당시 걸었던 수많은 고개중에 하나인 찰방망이 고개 위에는 바위 절벽이 벼락을 맞은듯 하다고해서 벼락바위봉이라 불렀고, 하늘이 노(怒)하고 땅이 슬퍼서 벼락이 쳤다고 하는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 원주시 신림면 금창리(金倉里)
임도 좌측으로 신림면 금창리로 내려가는 임도가 보이는데 조금만 더 내려가면 '둔창'이라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둔전(관청의 운영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토지)에서 생산한 쌀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라고 해서 둔창이라고 했다는 설과 쌀이 아니라 검(무기)을 보관하던 창고인 검창(劍倉)이 금창으로 바뀌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둔창마을에서 왼쪽으로는 강씨와 안씨가 피난을 와서 살았다는 '강안'이라는 마을이 있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예찬마을이다. 금창리는 원래 원주군 구을파면 지역으로 일리라고 하다가 지난 1914년부터 5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둔창, 예찬, 강안, 흑천, 금옥동 등 다섯 마을을 합쳐 금창리라고 부른다. 이 중 둔창이 도로 가까이에 붙어있어 중심역할을 했다고 한다. 금창리는 임진왜란 때부터 일제시대와 6.25전쟁 등 크고 작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는 바람에 전쟁으로 인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데 예찬마을에는 '절충장군' 묏자리가 있는데 워낙 오래된 데다 대도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땅을 구입하고 집을 짓기 위해 길을 내면서 훼손돼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평원 평 씨(平原 平氏) 평귀욱 절충장군의 묘역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인물로 보이며, 절충장군은 당상관의 무관 품계로 곽재우 의병장이나 이순신 장군과 같은 직급이라고 전한다.
♤ 벼락바위/ 면계/ 벽암(霹岩)
직전에 해산굴을 통과해야 하고, 지맥은 바로 직진이지만 해산굴을 나와 바로 오른쪽으로 올라야 벼락바위를 만난다. 벼락바위는 옛날에 벼락이 많이 떨어졌던 곳이고 벼락을 맞아 바위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벼락바위라고 부른다. 사방으로 절벽을 이루며 솟아오른 암봉이라 벼락이 때리기 딱 좋다. 벼락바위에서 앞뒤로 조망이 일품이다. 백운산 중계소와 원주 시내, 지나온 남대봉, 영월지맥 능선이 바라보인다. 지맥의 오른쪽은 시작부터 봉화지맥 직전봉인 작은백운산(982.7m)까지가 판부면 금대리이고, 지맥의 왼쪽이 여기부터 백운산(1,086.1m)까지는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이다.
♤ 벼락바위봉(937.8m)/ 시도삼면봉(원주시 판부면, 신림면 → 제천시 백운면)/ 2등삼각점(제천21/ 1995 복구)
10분 정도 진행하면 암봉으로 이어진 벼락바위봉이다. 휘황찬란한 산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금대동과 신림면 금창리, 충북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의 경계에 솟아 있는 삼면(三面) 경계봉이자 치악산 자연휴양림의 뒷산으로 정상부는 전망이 빼어난 세개의 봉우리로 되어있다. 오른쪽은 그대로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이고 지맥의 왼쪽이 원주시 신림면에서 충북 제천시 백운면으로 바뀌어 강원도와 충북의 도계능선으로 이어진다. 좀 더 설명하자면 서쪽으로 수리봉(909.9m), 보름갈이봉(860m), 백운산(1.087m), 오두봉(966.6m)을 지나 천등지맥 십자봉(984.8m)으로 갈라지는 967m봉까지 도계가 되고, 이 능선은 제천시를 오롯이 감싸며 제천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다. 남쪽으로 도계는 구렁재, 구학산을 지나 울고넘는 ‘박달재’로 이어진다.
♤ 구학분맥은?/ 시도계(원주시 - 제천시)
영월지맥상의 남대봉에서 남으로 분기한 백운지맥이 치악재를 지나 벼락바위봉(937.8m)에서 또 하나의 마루금을 분기해서 구력/ 운학재(530m), 구학산(983.4m), 주론산(906m), 박달재(453m), 시랑산(691m)을 넘어서 백운면의 원서천과 봉양읍의 주포천이 합류하는 두물머리로 떨어지는 도상거리 약 20.6km 제천지역의 마루금으로 왼쪽으로는 제천천으로 오른쪽으로는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흐르게 한다.
♤ 구학분맥 개념도
♤ 충북 제천시 백운면(白雲面)
제천시 북서쪽에 위치한 백운면은 원주시에 둘러싸이다시피 에워싸여 있는 지역이다. 지형상 백운산이 날개를 펼친 듯한, 더 정확히 말하면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가지속의 백운면은 육지의 고도같은 느낌을 강하게 준다. 동,북,서쪽은 구학산(971m)에서 벼락바위봉(939m), 백운산(1087m), 십자봉(985m),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다시피 장벽을 그리고 있는데다 동서 두 가닥의 맥은 각각 남으로 다시 뻗어 원을 완성하다시피한다. 즉, 서쪽은 십자봉에서 남으로 시루봉(734m)으로 이어졌다가 오청산(655m)을 거쳐 천등산(807m)으로 내려가고 동쪽은 구학산에서 박달재 자연휴양림이 있는 주론산(903m)과 박달재( 천등산 쪽에 있지 않고 주론산 남쪽에 있다)를 거쳐 시랑산에 가서야 멎는다. 천등산과 시랑산(691m) 줄기가 원서천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으니 백운면은 내륙의 고도가 된다. 그래서 유일한 교통로는 동쪽의 박달재, 서쪽은 다릿재였다. 최근에 와서는 신림에서 구력재를 뚫어 백운면 운학리로 들어가는 길이 생겼으니 원서천을 따라 들어오는 남쪽길을 합하면 네가닥 길이 있는 셈이다. 백운면 경계를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백운면에 들어가면 이들 산들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능선에 가려져 있더라도 산모롱이를 조금 돌아가면 산이 보인다. 일개 면에 800m미터 이상되는 산이 6개 이상, 등산 가능한 산이 그것도 모든 산을 잇는 중간선에서 보면 거의 비슷한 거리에 10좌 이상이나 솟아있는 곳은 그리 흔치않을 것이다.
♤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雲鶴里) 차도리마을
왼쪽으로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에 있는 차도리(3.6km)로 내려가는 길이다. 구학산과 백운산 아래에 위치하여 백운과 구학의 이름을 따서 운학 또는 운학동이라 하였다. 또는 구름 위에 학이 날으는 형국이라 하여 운학리라 이름 붙여졌다고도 하며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차도리와 용산리를 병합하여 운학리라 하였으며 자연부락으로는 구레골, 평촌, 거문골, 새터말, 차도리, 용산리, 독가촌 등이 있다.
벼락바위봉부터 가십자봉까지 마루금의 왼쪽은 충청도요 오른쪽은 강원도인데 왼쪽 아랫마을로 줄곧 단종유배길이다.
♤ 회론재(770m)/ 시도면리계(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 충북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
바위 봉우리를 피해 우틀로 내려서면 넙데데한 안부가 나온다. 등로 우측으로 내려서는 회론골 길은 회론재를 넘어 중앙선 똬리굴(회전터널)이 있는 판부면 금대3리 회론동으로 이어진다. 삼각점봉에서 신나게 고도 150이 떨어진다. 벼락바위에만 올라서면 큰 고비는 다 넘기는 줄 알지만 기복은 요동을 친다. 보통은 높고 실한 산줄기는 올라서기가 힘이 드나, 다 올라서면 이후로는 큰 기복이 없는 편인데, 이쪽 능선은 예외인지라 거인같은 봉우리가 일렬로 대기하고 있어 서가 빠지게 만든다. 왼쪽 차도리로 내려가는 중산골쪽은 잣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오른쪽으로는 치악산자연휴양림 영역이 끝났는지 더 이상 관리사무소 표시는 없다. 또 다시 앞에 솟은 봉우리는 방금 전 삼각점봉 높이 만큼이나 높이 솟았다.
♤ 수리봉(鷹峰, 911.6m)/ 시도면리계(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 충북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
수리봉(鷹峰)은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과 충북 제천시 백운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사방이 잡목으로 둘러싸여 조망은 없다. 지맥길은 좌틀로 급내리막이다. 수리봉에서 조금 떨어진 조망바위는 전망이 좋다.
♤ 한해재(754m)/ 피막재/ 시도면리계(충북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 -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회론재보다 조금 더 낮은 안부다. 제천쪽으로 당산나무 같은 고목과 성황당 흔적이 남아있다. 이 근방에는 지형도에 안나오는 이름들이 즐비하다.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와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한엿고개라고도 부르며 옛날 남쪽 차도리 주민들이 원주를 오가는 지름길이라 하여 차도리에서 한해재를 오르는 골짜기를 지름골로 불렀다고 한다. 왼쪽으로 [차도리3.4km], 앞으로는 [보름가리봉]을 가리킨다. 차도리에서 한해재를 넘어 금대리로 가면 중앙선 똬리굴이 있는 백척철교가 나오고, 치악산 영원사 계곡 입구가 된다.
♤ 보름갈이봉(877m)/ 보름가리봉/ 삼거리봉
한해재에서 15분 정도 오르면 잡목에 둘러싸인 877m 봉우리인데 ‘금대봉’으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지맥은 왼쪽(서)이고 북으로 따로 산줄기가 분기한다. 좌우 갈림길이 뚜렷하며 여기서 북쪽 금대리로 내려가는 산줄기에 보름갈이봉, 투구봉이 있다. 영원사계곡 맞은편 금대1리에서 아흔아홉골을 들머리로 하는 등산로가 열려있는데 지도마다 표기가 제각각이고 현지에도 정상석이나 어떤 표식도 없어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어렵다. 보름갈이봉은 그 옛날 분지를 이룬 당거리 골짜기에서 화전민들이 귀리, 조, 팥, 수수 등을 심기위해 밭을 가는데 비탈인데다가 돌이 많아 보름이 걸렸다하여 보름갈이봉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삼거리봉에서 지맥은 좌틀이지만 0.3km 정도 떨어진 보름갈이봉을 다녀온다.
♤ 중재/ 도사골고개
안부로 살짝 내려서면 중재 또는 도사골고개라 하는 안부인데 오른쪽 골짜기가 아흔아홉골이다. 지도를 보면 금대리에 대도사, 소도사 마을이 있고 구암사, 치마폭포도 보인다.
♤ 852.7m봉/ 폐헬기장
중재에서 다시 올라선 봉우리는 852.7m봉이고 우틀로 10분 정도 진행하면 헬기장이 있었는지 보도블록이 흩어져 있다. 853m봉에서 내려서면 길이 갑자기 넓어진다. 폭이 1m 정도 되게 일부러 손을 본 흔적이고 군용 전화선(삐삐선)이 깔려있다. 봉우리를 오른쪽 옆으로 바이패스 하며 지난다.
♤ 작은 백운산(979.4m)/ 시도면계/ 삼리봉(제천시 백운면 운학리,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 신촌리)
좁은 정상부에 참호 구덩이가 파져 있다. 지도에 백운산으로 표기되어 있어 작은백운산이라고도 불린다. 가리파재에서 여기까지의 최고봉이다. 전국 방방곳곳에 백운산이 있는데, 지형도에 보면 여기 백운산(1086.1m) 반경 7km 이내에만 백운산이 무려 5개다. 표기 지명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백운산은 우리나라에 33개 있다. 북한에 있는 일곱개를 제외하면 26개가 되는데 두위지맥 백운산이 가장 높고(영월 1,426.2m), 백두대간 백운산(함양 1,278.8m), 백운지맥 백운산(원주 1,086.1m)순이고 나머지는 1,000m 아래다. 이 근동에만 다섯 개의 백운산 표기 지명이 보이고 마을 이름도 백운면으로 가히 백운산 지주회사를 이루고 있으니 백운지맥 이름을 붙이고도 남을만 하다. 지도상으론 여기서부터 넓게 부대를 우회하지만 능선을 따라 철탑방향으로 직진하여 억새밭을 따라 군부대 울타리를 우회한다.
♤ 시도면계/ 삼리봉(백운면 운학리, 판부면 신촌리 → 서곡리)
지맥의 오른쪽이 여기서부터 신촌리에서 서곡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작은백운산을 지나 만나는 삼거리이고 군부대쪽으로 좌틀한다.
♤ 봉화지맥분기봉(950.5m)/ 시도면계/ 군부대
군 M/W통신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병과 주특기 번호는 높아야 좋다는데 일례로 군종은 400이다. 퐁라라는 32직군에서도 326인 TROPO(트로포), 주특기가 325인 M/W 장양리에 있는 50대대 3중대로 파견나가 있었고, 백운대통신소는 그 당시 1군사령부 안에 있던 50대대 2중대 파견지였다. 군통신과 KT가 같이 있다. 분기점까지 보통은 정문에서 왼쪽으로 군부대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는데 가파르고 길이 좋지 않다. 오른쪽도 마찬가지 거리는 더 멀고 끝 지점에서는 바윗길에 잡목지대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원주전투는 지워진 전투이다. 적의 수중에 너무 손쉽게 내어줘서 일까, 원주시내보다는 제천으로 넘어가는 백운산능선에서 전투가 치열했다는데 봉화지맥에서 그 흔적을 어느 만큼 찾을 수 있을지...
♤ 봉화지맥(鳳華枝脈)이란
치악산 남대봉에서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로 이어지는 백운지맥이 백운산 직전의 군부대가 있는 950.5m봉(강원 원주시 판부면 신촌리와 충북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의 경계)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하여, 시내동을 지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섬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42.6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에는 어깨봉(708.2m), 매봉산(545.5m), 백운산(535.7m), 용화산(227.7m), 배부른산(417.6m), 감박산(312.7m), 봉화산(334.8m), 덤바우산(262.6m), 장구봉(346.3m), 매봉산(253.1m), 영산(324m) 등을 만날 수가 있고, 이 산줄기의 서쪽과 남쪽에는 백운천, 매지천 등이 섬강으로 흐르며, 동쪽과 북쪽에는 봉천, 원주천 등이 섬강으로 흘러든다.
♤ 봉화지맥 개념도
♤ 백운산 군부대 정문(880m)/ 헬기장
맥꾼과 눈길이 교차하던 초병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 뿐만 아니고 지맥길에 부딪치는 KT와 함께 동거하던 군통신부대가 모두 철수했다. 군정찰위성을 띄워 더 이상 KT의 신세를 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남쪽으로 [차도리3.7km], 정면으로 백운산1.0km]을 가리키고, 시멘트길이 올라온 원주쪽은 아무 표시가 없다. 앞에 웬만한 학교 운동장만한 헬기장이다. 원주쪽에서 작은버스는 올라올 수 있다고 한다. 이 길은 원주시로 연결이 되는데, 용소골계곡으로 불린다. 아래 골짜기 입구에 ‘후리절’이 있는데 예전의 후리사가 있던 곳이란다. 신라 진흥왕 때 후리사라는 절을 창건한 유명한 고승 서곡대사의 이름을 따서 서곡리(瑞谷里)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후리사 또는 후리절 명칭은 절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며 마을 어귀에 있는 탑거리는 후리사 입구에 있던 수많은 돌탑에서 나온 것으로 현재도 탑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 차도리(次道里)마을
본래 제천군 원서면(遠西面)의 지역으로서, 구학산(九鶴山)과 백운산(白雲山) 아래가 되므로 백운과 구학의 이름을 따서 운학(雲鶴) 또는 운학동(雲鶴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차도리(次道里)와 용산리(龍山里)를 병합하여 운학리라 해서 백운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백운면 운학리가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제천군 백운면 운학리가 되고, 서쪽에서부터 십자봉, 조두봉, 백운산, 보름갈이봉, 수리봉, 벼락바위봉으로 이어지며 1,000m가 넘는 산줄기가 거대한 성곽처럼 도열해 제천시의 북쪽을 굳건히 지키고 서있는 모습이다. 이 산들은 제천시계 종주코스이기도 하다. 들머리에서 10리 넘게 이어지는 덕동계곡의 수려함과 청정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날머리인 운학리의 차도리계곡 또한 원시의 아름다움과 설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백운산(白雲山, 1,086.1m)/ 시도면계/ 삼리봉(판부면 서곡리, 백운면 운학리 → 덕동리)/ 3등삼각점(엄정 308/ 1989 재설)
백운산은 강원도 원주시와 충북 제천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늘 흰 구름이 끼어있고 겨울에도 흰 눈이 쌓여 있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며 마치 고기를 겹겹이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육산(肉山) 또는 겹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상에는 큰 못이 있었고, 근처에는 작은 못이 있어서 못재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현재는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백운산 아래 대용소골과 소용소골이 있는데 대용소골 서쪽으로 30분 정도 오르면 용수연 물줄기가 떨어지는 용수폭포가 있다. 이 폭포에는 보름날이 되면 옥황상제의 외동딸이 은하수를 타고 내려와 용수연에서 목욕을 하는데 그녀를 짝사랑하던 용이 함께 승천하려다 벌을 받아 이곳에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백운산 정상엔 충주시 엄정면이 도엽명으로 기재된 3등삼각점과 원주시와 제천시에서 세운 두개의 정상석이 있다. 정상 직전에는 산림청에서 세운 무선중계기 산불감시카메라 컨테이너박스가 있다. 지맥의 왼쪽이 행정구역상 백운면 운학리에서 덕동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 상재(880m)/ 상학동 임도갈림길
상재는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에서 충북 제천시 백운면 덕동리 상학동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이정표(→백운산 2.3km ,오두봉 1.3km, ↓상학동 임도 1.3km)가 있고 지맥길은 오두봉 방향으로 진행된다. 오두봉으로 이어지는 지맥길은 희미하고 상학동 임도로 내려가는 길은 뚜렷하여 독도에 신경을 써야한다. 941m봉에서 서틀로 팍! 돌아서 간다. 봉우리를 우회하는 사면길이 있다. 안부에는 긴 통나무 두개를 엮어 만든 의자가 있다.
♤ 제천시 백운면에 있는 덕동리(德洞里) 상학동마을
제천시 백운면에 있는 덕동리는 옛날 마을이 생기기도 전에 어떤 도인이 덕을 쌓으려고 수양하던 곳에 마을이 터를 잡아 덕골이라 하였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덕동리(德洞里)가 되었다고 한다. 구수애에서 상학동까지 집들이 산재되어 있는 산간 마을 대부분의 지대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교적 낮은 고도에 위치한다. 자연 마을로는 구수아, 덤바우, 오두재 마을 등이 있다. 구수아마을은 구수애라고도 불리며, 상학동과 운학리에서 흘러 오는 두 냇물이 마을 앞에서 합수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덤바우마을은 더미로 된 바위가 있다하여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으며, 오두재 마을은 까마귀의 머리처럼 생긴 고개(오두재)밑에 위치한다는 뜻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백운산에서 서쪽으로 약 2km 거리에 있다.
♤ 오두봉(烏頭峰, 964.6m)/ 시도계/ 삼면봉(제천시 백운면, 원주시 판부면 → 흥업면)/ 삼각점봉/ 헬기장
상재에서 잠깐 올라선다. 오두봉은 왼쪽으로 충북 제천시 백운면 덕동리와 오른쪽은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에서 흥업면 매지리로 바뀌는 삼면봉 지점이다.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이 있고, 오른쪽 흥업면 쪽으로 50m 정도 벗어난 헬기장 위쪽 둔덕에 삼각점이 있다. 헬기장에서 지맥은 왼쪽 오두치 방향으로 진행이지만 잠깐 오두봉 삼각점을 다녀온다. 오두봉은 오두치에서 생긴 이름이며 오두치가 까마귀의 머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고, 넓은 터라 조망이 열려 십자봉 능선 천등지맥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북으로는 흥업면을 가리킨다. 북으로 뻗는 능선이 판부면과 흥업면을 가르면서 용소동 계곡 울타리를 친다. 남서쪽으로 도계가 이어지는데 지도에 따라 ‘조두봉’, 조두치‘로 표기한게 보이는데 아래 골짝에 있는 ‘오두리’ 마을로 봐서 까마귀 ‘오(烏)’가 맞다. 삼각점은 오래되어 마모된 4등삼각점(엄정 427/ )이 겨우 식별이 된다.
오두봉에서 급하게 경사진 사면을 내려선 오두재는 잡풀이 무성한 넙데데한 안부이다.
♤ 오두재(烏頭峙, 712m)/ 오두치(烏頭峙)
오두재는 제천시 백운면 덕동리 자연마을인 오두리와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를 연결하던 옛 고개로 원덕동(오두리마을)에서 흥업면 매지리 전어치 마을로 이어진다. 백운산 이후 가장 고도가 낮은 곳이다. 앞으로 보이는 천등지맥 십자봉 능선은 높은 장벽처럼 펼쳐져 있다. 1990년까지 덕동리 주민은 오두재를 넘어 원주장을 보러 다녔다. 오두재 주변에 20여 호가 거주하였다 하는데, 그 흔적인 병, 접시, 대접 등의 파편이 고갯길에서 발견된다. 전어치는 고개가 아니라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오두재는 전어치마을 뒤에 있는 재를 말하며 매지리에서 제천 백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까마귀가 머리를 들고 있는 형상이라 한다. 백운산 부대에서 5.1km에 두 시간 거리이다. 십자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전어치마을
소설 ‘토지’하면 지리산 자락 악양벌이 먼저 떠오르지만, 악양은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곳이고, 이곳 매지리 전어치마을(회촌)은 박경리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백운산 자락에 매지농악이 울려 퍼지고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를 만나는 곳, 회촌마을 회촌(檜村)은 원래 전나무가 많이 자라 붙여진 이름으로 `전어치마을'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한자로 바꾸면서 전나무 회(檜)자를 따서 회촌마을이 됐다. 작가 박경리선생이 1998년부터 2008년 5월 타계시까지 생활했던 집 옆에 토지문화관이 지어졌고 회촌 민속관, 매지농악 전수관, 흙집 학교 아쉬람, 천연 염색학교 솟대촌이 있다.
♤ 934m봉/ 삼거리봉/ 대양안치갈림봉/ 시도계/ 삼면봉(백운면 덕동리, 흥업면 매지리 → 귀래면 운남리)
헬기장에서 15분 오르면 삼거리봉인 934m봉이다. 지맥의 남쪽은 도계이고 오른쪽(북서)으로 흥업면과 귀래면의 경계이면서 대양아치로 가는 능선이다. [대양안치3.6km] 이정표가 있고, [십자봉1.9km]는 바닥에 떨어져 있다. 도계로 가는 등로가 더 뚜렷해진다. 대양아치에서 십자봉으로 가는 일반등산로다. 운남리(雲南里)는 백운산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운남리라 했고, 귀래면 면소재지이다.
♤ 가십자봉(假十姉峰, 967.5m)/ 촉새봉/ 천등지맥분기점/ 시도면계(백운면 덕동리 → 귀래면 운남리)
삼거리봉(934m)에서 평탄하게 가다가 살짝 솟구쳐 오르면 천등지맥이 분기하는 가십자봉(967.5m)이다. 천등지맥 분기점은 남동쪽(왼쪽)으로 도계를 따르고 백운지맥은 오른쪽 산촌마을 방향이다. 산촌마을 쪽으로 내려서면 도계에서 벗어나 온전히 귀래면 운남리 안으로 들어서고 작은양안치로 내려선다. 벼락바위봉에서 만난 충북 도계는 맛만 보여주고 여기서 영영 이별이다. 이후로는 지맥이 끝나는 섬강까지 원주에서 놀게 된다. 이정표와 돌무더기가 있는 넓은 공터이다. 열십자로 능선이 뻗어나간 가십자봉의 정상에 서면 시야가 막힘없이 트여 장관을 이루는데 동북쪽에는 백운산(1,086.1m)이 있고 주능선 너머로 치악산 줄기가 뻗어있으며 남으로는 시루봉(734m)과 옥녀봉 능선이, 남서쪽에는 미륵산(689m)과 봉림산(579m)이 있다. 왼쪽 천등지맥 방향은 십자봉(983.3m)이 있으서 그런지 시그널이 주렁주렁하고 등로도 뚜렷한데 오른쪽 산촌마을 방향으로 이어지는 백운지맥 등로는 훨씬 희미해진게, 십자봉은 주로 큰양아치에서 오르고 작은양아치로는 지맥꾼만 다니는 모양이다.
♤ 원주시 귀래면 운계리(雲溪里)를 삼태미마을/ 산촌마을
산촌마을은 원주시 귀래면 운계리 삼태미 마을로 백운산을 배경으로 하여, 좌우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분지로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산골 오지마을로서 현재 원주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에 둔덕(언덕)이 많이 있다하여 달둔으로 불려지다가 변화되어 다둔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마을의 지명유래는 시대를 정확히 확인 할 수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구설로는 다둔마을은 옛날부터 금이 많이 나는 지역으로 금광을 운영하던 사업주는 많은 인부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금광운영으로 들어오는 수익이 고작 금 닷돈이라 하여 닷돈으로 불리웠는데 일제강점기 때 둔덕(언덕)이 많이 있다 하여 달둔으로 불려지다가 변화되어 다둔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 천등지맥(天登枝脈)이란
한강기맥 삼계봉에서 분기한 영월지맥이 치악산 남대봉에서 갈래치면서 백운지맥을 만들고, 백운지맥은 치악재(가리파재)를 지나며 벼락바위봉에 올라섰다가 서진을 계속하며 백운지맥의 주봉인 해발 1.056m인(백운산)을 지나 오두재를 거쳐 934m봉에서 세갈래로 갈린다. 한줄기는 북으로 뻗으면서 큰양안치를 지나 덕고산과 명봉산으로 이어지며, 또 한줄기는 남쪽으로 500m 더 뻗어나가다 가십자봉(967.5m)에서 서쪽으로 동막봉과 작은양안치를 지나 미륵산으로 맥을 형성하는 백운지맥이다. 하지만 십자봉에서 백운지맥과 갈라져 남진하는 능선이 또 하나 있는데 이 맥이 이른바 천등지맥이다. 천등지맥은 남쪽으로 강원-충북도계를 따라 십자봉(983.3m)을 지나 966m봉에서 남동쪽으로 삼봉산(909m)를 분가시키고. 뒷산을 거쳐 배재에서 숨을 고른 후 옥녀봉(714.4m)을 들어올린 후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릿재를 지나 시루봉, 오청산, 천등산(806.6m), 인등산(665.1m), 지등산(534.9m), 관모봉(628.4m), 부대산(626.9m), 사우양산, 주봉산을 지나 남한강 충주호로 그 여맥을 가라앉히는 도상거리 44.4km(실거리 52.6km)의 산줄기로 원주 제천 지역을 지나며 왼쪽으로 제천천을 오른쪽으로 남한강을 흐르게 한다.
♤ 천등지맥 개념도
♤ 865.9m봉
가십자봉에서 우틀로 10분 가량 내려서면 묘터가 나온다. 앞에 865m봉이 봉긋이 솟아있다. 묘터에서 내려서면 바로 아래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오른쪽으로 [천은사2.5km]를 가리키는데, 천등지맥 접근시 최단거리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산촌마을 3.8km] 산촌마을은 지도에 나오지 않지만 거리는 작은양아치까지 거리다.
♤ 천은사(天恩寺)
천은사는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백운산(白雲山, 높이 1,086.1m) 등산로 초입으로 지금은 천은사 계곡으로 불리지만 30년 전만 해도 명주굴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 계곡 아래쪽 20여 가구 마을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비가 안 오면 제사를 지냈던 곳이 바로 이 명주굴이다. 명주굴은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연못에 넣으면 모두 들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천은계곡이 개발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계곡을 따라 약 5백여m쯤 올라가면 아담한 천은사에 다다르는데 계곡가(천은사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로 사적자료는 구하기 어려워 알 수 없지만 사찰 기록을 옮겨보면 백운산 십자봉 아래에 고려시대 때부터 승려들이 수행하던 백운암이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 사찰은 1900년대에 폐사되었다 전해진다. 1960년대에 충주사람 홍성익이란 處士가 병이 있어 백운암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던 중 天人이 나타나서 금침을 놓고 언급하길 "바로 밑에 물이 양쪽에서 만나고 왼 쪽산 미륵불이 있는 곳에 절을 지어서 많은 사람들을 병고에서 구제하라"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이 후 홍처사의 몸은 씻은 듯이 나았고 곧 절을 지어 천은사라 이름 짓고 수행에 정진하면서 鍼術로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
♤ 천은사갈림길
가십자봉(913.7m) 갈림길에서 우틀로 내려서면 묘터가 나오고 묘터에서 내려서면 865.9m봉 사이에 있는 안부이다. 천은사갈림길이정표(산촌마을3.6km, 십자봉2.0km, 천은사2.5km)가 있다. 오른쪽은 천은사계곡길 하산로, 지맥은 산촌마을 방향으로 직진한다. 천등지맥을 할려면 천등사에서 천등계곡 따라 2.5km 거리인 이곳까지 와서 천등지맥 분기점까지 올라가 시작한다. 암릉지대를 지나 865.9m봉에 오른다.
♤ 796m봉/ 리계(귀래면 운남리 - 귀래리)
865.9m봉에서 796m봉으로 가면서 귀래리와 경계를 만나 진행한다. 바위에 올라서니 바위 능선길 비탈에 이정표가 서있다. [산촌마을3.1 십자봉2.1km] 796m봉을 지나고 부터는 암릉과 노송이 어우러진 코스로 청풍호반의 금수산 일대를 연상시킨다. 바위 날등을 타고, 집채만한 바위 옆으로 바짝 붙어 돌기도 하는데 로프가 걸려있어 큰 어려움은 없이 지난다. 우측으로 19번 국도가 보이며 차소리도 들리기 시작하며 고도가 사정없이 떨어진다.
♤ 754m봉
내리막길에 바위틈 사이로 누운 소나무가 있는 봉우리이다. 천등지맥 능선이 바라다 보이고 좌틀로 계속 내려선다. 원주시, 제천시, 충주시의 삼시군봉인 천등지맥 옥녀봉(714.4m)도 조망이 된다.
♤ 601m봉/ 삼리봉(귀래면 귀래리, 운남리 → 운계리)
지맥의 오른쪽은 계속해서 봉림산갈림봉까지 귀래리이고, 지맥의 왼쪽이 운남리에서 운계리로 바뀌어 미륵산까지 함께한다.
♤ 596.9m봉
왼쪽으로 우회길이 있지만 직진으로 올라선 봉우리이다. 암봉 정상에서 좌틀로 내려선다. 마지막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서야 작은 양안치다. 직직하면 백운령 백운산모텔로 내려선다.
♤ 동막봉(588m)/ 원주시 귀래면 귀래리 동막동
무너진 움막에 [동막봉]이란 팻말이 있다. 원주시 귀래면 귀래리 동막동 윗쪽에 있는 봉우리인데 동막골은
마을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서 동막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북쪽으로 대양아치 고개와 왼편으로 덕가산(699.5m)이 잘 보인다. 차광막 울타리와 심통마을 경고판이 자주 보인다.
♤ 원주시 귀래면 귀래리(貴來里)
원주시 귀래면 귀래리는 백운지맥 오른쪽인 귀래면의 북쪽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운계리, 서쪽으로는 부론면과 문막읍, 남쪽으로는 운남리, 북쪽으로 흥업면 매지리와 경계하고 있다. 귀한 분이 오셨다는 뜻에서 귀래라고 하였다. 신라말 경순왕이 이곳에 와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하였는데, 미륵산 마애불상과 관련이 있다. 이 마을 이름을 따서 면이름도 귀래면이 되었다.
♤ 원주시 귀래면 운계리(雲係里)
등로에서 왼쪽으로 귀래면 운계리의 모습이 내려다 보인다. 운계리는 동쪽으로 십자봉이 있고, 남쪽으로 갈미봉 밑에 자리한 산촌으로 자연마을로는 가맛골, 느릅재, 다둔, 뒷버덩, 아홉사리, 점말이 있다. 가맛골은 전에 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느릅재는 길게 늘어진 고개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다둔(多屯)은 산골짜기 또는 산의 둔덕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뒷버덩은 운계리 뒤의 버덩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아홉사리는 아홉사리 고개 밑에 있다 하여 아홉사리라 불린다. 점말은 전에 옹기점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 작은양안치(小兩峨峙)/ 소양안치/ 폐휴게소/ 19번국도
고개 정상에 고속도로 휴게소 못지않은 청원휴게소가 있는데 아래로 자동차 전용도로인 운계터널이 뚫리면서 옛길이 되어버려 폐업이 되었다. 작은 양아치는 원주시 귀래면 동쪽에 위치한 고개로 귀래면 운계리에서 흥업면으로 넘어가는 곰네미마을 양 옆으로 흥업쪽의 큰 고개를 큰 양아치, 귀래쪽의 작은 고개를 작은양아치라고 부른다. 고개가 마치 말안장 모양이라고 해서 양안치라고 부르는데 원래는 양어치라는 주장도 있다. 양어치라 불리게된 유래를 보면 고구려왕의 어거가 매지리에 머물고 신라왕의 어거가 운계리에 머물러서 그 경계인 이곳의 지명이 양어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1872년 지방지도에 양안치로 표시되어 있다. 양(兩)+봉우리아(峨)+치(峙): 양쪽 높은 고개라는 해석이지만 이 한자표기 또한 믿을게 못된다. 원래 우리말 소리를 억지로 한자화 한게 많기 때문이다. 대다수 후세 사람들은 한자로 표기된 지도가 있으면 그 표기된 한자 해석하기만 바쁘다. 그 한자 표기 자체가 제대로 된 것인가 까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양아치는 양(兩)+아+치(峙)인데 '아/어'를 매개모음으로 보고, 두 개의 높은 고개란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문을 닫은 휴게소건물 왼쪽으로 이동하면 역시 폐업된 주유소가 있는데 사람은 거주를 하는지 강아지 두마리가 짖어댄다. 주유소건물 왼쪽 끝으로 가면 잘 가꾸어진 묘지가 있고 묘지를 지나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 467.7m봉/ 3등삼각점(엄정 305/ 1989 재설)
시멘트바닥 작은 헬기장이 있는 470m봉에서 오른쪽으로 300m 벗어나 있어 다녀와야 한다. 3등삼각점이 있다.
♤ 운골산(412.6m)/ 리계(귀래면 귀래리 - 운계리)
원주시 귀래면 귀래리에 있는 산으로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연이어 이어지는데 아무 특징없이 소나무 숲을 이룬 봉우리가 운골산이다. 정상에 작은 돌탑이 있고 백운지맥 운골산 백두사랑산악회 산패가 나무에 걸려있다. 운계리 북쪽에 운골을 끼고 있어 운골산이란 이름을 얻은듯 하다. 국립지리원 지도나 오록스맵 지도상 무명봉인데 지형도 표기명칭은 아니고 귀래면 지명 유래에 그렇게 나온다. 미륵산 지나고 나오는 쌀개봉, 상봉산도 마찬가지다. 서북쪽 아래로 웅골이란 지명이 있는데 웅골은 사두와 서낭고개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지명 유래 중에 하나가 옛날 난리통에 주민이 움을 파고 숨었다고 해서 움골이라고 한다. 발음상 오기일 수도 있겠다. 운골산 다음봉에서 서쪽으로 꺾이며 서서히 내려앉는다. 서낭고개 직전 316m봉 Y자로 갈림길에서 우틀한다.
♤ 천등지맥 십자봉(十字峰)/ 촉새봉/ 불영대산(佛影臺山)
작은양안치에서 올라서 운골산과 미륵산으로 가는 구간에 줄곧 천등지맥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조망된다. 십자봉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덕동리와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귀래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제천시 백운면 덕동리 원덕동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산 모양이 촉새 부리처럼 뾰족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촉새봉이라 부르고 있으며 원래 지명은 불영대산(佛影臺山)이었다. 근래에 들어 십자가처럼 산 모양이 뾰족하게 생겼다는 의미에서 십자봉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본래 지명이 왜곡된 것이다. 십자봉 아래로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에서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로 넘어가는 배재가 있으며, 그 아래쪽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과 제천시 백운면, 충주시 엄정면이 만나는 삼시군봉인 옥녀봉(714.4m)으로 이어진다.
♤ 서낭당고개/ 아홉사리고개
귀래리 탑동에서 남쪽 운계리의 아홉사리 마을로 가는 고개를 말한다. 404번지방도(귀문로) 2차선 아스팔트 삼거리다. 고개에 성황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원래 지명은 아홉사리고개라고 한다. 예전에는 성황당에 춘추로 제를 지냈으나 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 당시 없어졌다. 고개 정상에는 양방향으로 구사 버스정류장이 있고 서낭당고개라는 이정석이 있다. 왼쪽으로 운계리 아홉사리 마을이 있다. 귀래면쪽으로 버스 한 정거장 이동하면 약수터가 있다. 북쪽으로 멀리 덕가산(699.5m)의 흉물스런 채석장이 보인다. 임도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국가유공자 묘가 나온다.
♤ 미륵사터 → 황산사터
서낭당고개 아래쪽으로 미륵산농원 간판이 보이는 고개를 넘어가면 황산사와 경순왕경천묘가 있는데,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국권(國權)을 고려로 넘긴 후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경천묘(敬天廟 : 영정을 모신 사당)는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로 옮겨 절은 없어지고 예전의 미륵사가 있었던 곳엔 지금은 삼층석탑과 부도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1km 떨어진 뒷산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글씨가 새겨진 조그만 탑은 세 층만 남아 있으나, 8층탑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탑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고 한다.
♤ 345.5m봉/ 4등삼각점(엄정 409/ )
등로상에 삼각점 기반이 불룩 솟아있고 두 팔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린 고사목 하나가 옆에 서있다. 철조망과 비닐테프가 쳐진 송이지역이다. 바닥에 비닐로 장판을 깐 송이모둠터를 지나고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된다.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지맥은 우틀이지만 왼쪽으로 지맥에서 700m 거리에 미륵산 신선봉이 있다. 왕복 1.3km, 약 40분 소요된다.
♤ 미륵산 북봉(彌勒山, 689.9m)/ 대왕산(大王山)/ 용화산(龍華山)/ 삼리봉(귀래리, 운계리 → 용암리)
원주시 귀래면에 위치한 미륵산 북봉은 귀래면 귀래리, 운계리, 용암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백운지맥길을 걷는 맥꾼들 사이에는 이곳을 미륵산이라 칭하기도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미륵산 북봉이 맞으며, 더 엄밀하게 따진다면 치마바위에서 장군봉, 신선봉, 미륵봉, 미륵산, 미륵산 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하나의 미륵산으로 보는게 맞다. 이 암봉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신선봉으로 가는 미륵산 등산로이고, 지맥은 북서쪽이다. 주포리 북쪽에 있는 미륵산은 원주시에서 남쪽으로 22㎞ 지점이다. 지도상 정상부는 거대한 바위다. 미륵은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파생한 마이트리야(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자씨(慈氏)로 의역된다. 따라서 미륵보살은 흔히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불교사상의 발전과 함께 미래불이 나타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사상이 싹트게 됨에 따라 미륵보살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들을 위해서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부처가 되기 이전 단계에 있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다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 있는 자세가 곧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삼국시대에 이 미륵반가사유상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마애불상이 있는 미륵봉은 신선봉에서 오른쪽으로 암릉구간을 1.5km 더 가야 한다.
♤ 미륵산 신선봉(694.3m)/ 헬기장/ 정상석
행정구역상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용암리와 충주시 소태면에 걸쳐 있으며 치악산(1,288m)의 줄기가 백운산(1086.1m)을 거쳐 미륵산까지 이어져 있다. 미륵산 남쪽으로 능선이 이어지는 산으로 신선들이 놀았다 해서 신선봉으로 불린다. 산세가 험한 편은 아니지만 정상 부근에는 미륵봉·장군봉·신선봉 등 12개의 봉우리가 있고 모두 암벽으로 되어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그중 가장 큰 황산사 뒤쪽에 솟은 미륵봉 천연암 바위에 마애석불이 새겨져 있어 미륵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마치 닭 벼슬 같이 뾰족한 12개의 암봉 주위로 군데군데에 바위틈을 비집고 붙어 있는 노송이 운치를 더 한다. 미륵산(彌勒山)은 미래세상 부처님을 기리는 산으로 문막나들목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산으로 산의 능선아래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쇠약해진 신라를 고려에 이양한 뒤 전국의 명산(名山)을 두루 다니다가 용화산(龍華山)에 올라 수려한 경관에 반해 그 정상에 미륵불상(彌勒佛像)을 조성하고 그 아래 학수사(鶴樹寺)와 고자암(高自庵)이란 절을 짓고 말년에 잠시 의탁하였다 한다. 경순왕이 왔다고 하여 대왕산(大王山) 이라고도 하고 지금의 지명 또한 귀한 분이 다녀가신 곳이라 하여 귀래(貴來)면으로 남게 되었다. 이 미륵불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머물면서 새겼다는 설도 있고 덕주공주가 아버지인 경순왕의 상을 새겼다고도 하며 어느 석공이 큰 홍수가 났을 때 배를 타고 와서 조각을 하다가 물이 빠져 미쳐 다 완성하지 못 하였다고도 한다. 상부가 뚜렷하게 조각이 되어 있는데 비해서 하부로 올수록 조각이 흐릿한 것은 물이 일찍 빠져 나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불상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초상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며, 불상의 코를 만지고 치성을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미륵신앙은 일반적으로 백제의 지배하에 있던 충청권과 전라도 지역에서 진표율사에 의해 부흥했던 것으로, 지주들로부터 또는 권력자들에 의해 착취당하던 궁박한 삶의 민초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를 기다리는 마음을 대변했다. 국운이 기울어가는 신라를 떠나 금강산으로 향하던 경천왕의 딸인 덕주공주가 생을 마감하며 세운 월악산 덕주사의 마애불과 함께 구원자에 대한 열망은 신분의 고하(高下)를 불문(不問)하였음을 역사의 뒤안길에서 고스란히 더듬어 볼 수 있는 산이다.
야간에 서둘러 진행하느라 봉림산엔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잠을 설쳐서 피곤하기도 하고, 랜턴불빛에 송화가루 엄청 날리네요. 기침 콜록콜록~
♤ 봉림산(532m) 갈림봉/ 면계/ 삼리봉(귀래면 귀래리, 용암리 → 부론면 손곡리)
안부에서 6분 오르면 왼쪽으로 봉림산이 갈라지는 분기봉인데 올라서자말자 오른쪽 첫번째 능선으로 꺾어 내려간다. 지맥의 왼쪽이 부론면 손곡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마지막 면인 부론면계를 만나는데, 지맥을 따라 면계가 잘 그어져 있다. 다른 곳에 보면 지맥 마루금과 상관없이 보다 큰 산줄기를 따라 경계가 나뉘는데 여기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아주 순탄하고 푹신하게 내려가는 능선이다.
봉림산갈림봉에서 왼쪽으로 1.3km, 약 35분 소요된다.
♤ 봉림산(鳳林山, 577.5m)/ 4등삼각점(엄정 406/ )
봉림산은 강원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소재한 산이다. 다녀오는 중간에 소나무가 있는 바위봉우리에서 남쪽으로 귀래면 용암리 방향 뷰가 좋다. 법천천이 봉림산에서 시작하여 손곡리 지역의 여러 시냇물과 합치면서 손곡저수지, 손곡 벌말, 법천리의 서원말, 골말을 돌아 남한강에 합류한다. 정상에는 판독불가한 삼각점이 있다.
♤ 현계산(玄溪山, 534m)
현계산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위치한 산으로 검은 계곡의 산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산이 높고 험하며 나무가 울창해서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원주시 남서쪽에 있으며 동쪽에는 남한강이 흐른다. 현계산에서 서지고개로 내려선후 다시 들어 올린 산으로 미륵산과 연결된다. 산 입구에는 임경업장군의 추모비와 손곡 시비가 있고 동쪽에는 봉림산에 이어 미륵산이 있고 서쪽에는 황학산이 있다. 현계산 자락에서 발원한 계곡천이 노적봉 아래에서 정산저수지를 이루며 인근에 고려시대 사찰인 거돈사지(居頓寺址)가 있다. 허난설헌의 스승인 이달(李達)은 이곳에 은거하면서 지명인 손곡을 자로 삼았으며, 조선 중기에 시문에 꽃을 피운 시인이다. 일찍 벼슬을 떠나 산수에 방랑하면서 청신염려한 시 삼백삼십여 수를 남겨 동방의 시성이란 일컬음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허균 · 허난설헌 남매를 훌륭한 문인으로 키워낸 스승이기도 하다.
♤ 원주시 부론면(富論面)
원주시의 서남단에 위치한 부론면은 강원, 경기, 충북의 삼도에 접해있다. 서쪽 섬강 건너로는 경기 여주시, 남으로는 남한강 건너 충북 충주시가 된다. 대체로 두물머리는 비옥한 농경지와 상권이 크게 형성되어 자연적으로 경제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부자들이 많이 모여 부(富) 즉, 경제를 논(論)했다 하여 부론면이 되었다 하기도 하고, 또는 거꾸로 사람들이 많이 모임에 따라 의논(論)이 풍부(富)하여 부론이 되었다고도 한다.
♤ 서지재((西芝峙, 397m)/ 삼읍면계(부론면, 귀래면 → 문막읍)
지맥의 오른쪽이 귀래면을 지나 문막읍에 진입하여 이후 부론면 손곡리와 문막읍 비두리의 경계를 따른다. 귀래리 방아실 뒤에 있는 재를 말한다.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와 귀래리 방아실골로 넘나드는 오솔길이 지나는 고개로, 동네 뒷산같은 평탄한 능선길이 한동안 이어지다 왼편으로 꺾이면서 오른쪽으로 가는 묵은 길이 나오고 몇 걸음 더 가면 왼편으로도 길 흔적이 보인다. 정확한 십자로가 아니라 조금 어긋난 고갯길이다.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서지마을에서 귀래면 용암리 웅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라기 보다는 그저 밋밋한 능선이다. 왼쪽 아랫쪽엔 시멘트 도로가 보이는 곳으로,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귀래면 용암리, 문막읍 비두리의 경계에 있다. 삼면 경계봉이 아닌 경계가 되는 고개로 좌우측이 백운지맥 들날머리로 이용된다. 지명의 유래는 손곡리 서지마을에서 따온듯 한데, 서지마을은 구마니 동쪽 방아실 아래에 있는 마을을 말하며, 지초(芝草)가 많았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다.
♤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蓀谷里)
원주시 부론면의 동북쪽에 있는 손곡리는 골짜기와 들이 대부분이고, 자연마을로는 귀만, 내산동, 신촌, 송정, 서지, 오곡, 백자동 등이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유배를 당하여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손위(遜位)하고 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손위실(遜位室)이라 부르던 것이, 이것을 한자로 적으면서 '위'가 탈락되어 손곡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고, 법천사지와 거돈사지가 있는 것에서 이곳이 옛날에 왕성한 불교세력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법천사지와 거돈사지, 그리고 섬강변에 있는 주말농장에는 주말과 여름 휴가철을 이용하여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
♤ 원주시 문막읍 궁촌리(宮村里)
문막은 원주시에 있는 유일한 읍이다. 읍을 관통하여 흐르는 섬강(蟾江)의 물을 막는다라고 해서 '물막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음차하여 문막(文幕)이라고 하였다. 문막읍의 원래 명칭은 사제면(沙堤面)으로, 일제강점기이던 1914년에 건등면(建登面)이라 개칭되었다. 1937년 5월 문막면으로 개칭되었고, 서들 북쪽에 있는 궁촌은 궁촌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문막읍 중앙에서 남쪽에 있다. 동쪽은 흥업면, 서쪽은 후용리, 남쪽으로는 비두리, 북쪽은 포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고종(高宗)의 후궁 순빈(淳濱) 엄씨의 고향이므로 경우궁(慶佑宮)을 지었고 경우궁이 있어 궁말, 궁촌이라 하였다 전한다. 후백제 견훤이 견훤산성에는 석성을 쌓고 여기에는 토성을 쌓았으며 이곳에 궁실을 지었다고 해서 궁말이라고 한다고도 한다. 후백제 견훤이 궁촌리에 들어와서 토성을 쌓고 궁실을 짓고 한편으로는 앞산(현 견훤산성)에도 석축을 쌓아 성과 구축을 단단히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왕건이 동쪽 맞은편 건등산에 진을 치고 장기전을 꾀했던 바 결국 견훤은 패주하고 말았다. 당시 견훤이 은거하던 곳임을 암시하고 있다. 1989년 10월 이곳에서 한 농부가 범종(흥법사종)을 발견하여 이곳이 궁터임을 추측하게 하였다.
♤ 쌀개봉(495.8m)/ 4등삼각점(엄정 436/ 재설)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와 문막읍 비두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지형도에 표기된 이름이 쌀개봉으로 나온다. 481.1m봉에 올라서면 북진이 된다. 고도차 거의 없는 편안한 능선길이다. 평탄한 능선은 계속 북으로 이어지고 467.2m봉 직전부터 산불 흔적이 넓게 남아있고 고사목이 장대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다. 서쪽으로 방향이 바뀌는 467.2m봉 부터는 하얀 비닐끈이 이어지는데 지능선이 여러가닥 벌어져 마루금 찾기가 까다롭지만 비닐끈을 따라가면 된다. 4등삼각점이 있다.
철계단을 따라서 비두네미고개로 내려선다.
♡ 비두냄이고개(碑頭峙, 290m)/ 비두리(碑頭里)재
비두냄이고개는 원주시 문막읍 비두리 비두냄이 마을에서 부론면 손곡리로 넘어가는 지방도로이다. 2차선 아스팔트도로를 새로 내면서 양쪽 비탈을 높이 깎았다. 왼쪽 아래에 계단이 있고, 건너편 오르는 철계단은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비두냄이란 지명 유래를 보면 고개 북쪽 아래인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비두리란 마을에서 유래 되었는데 여기에는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비두냄이에는 옛날부터 질 좋은 화강암이 많이 나와 그것이 비석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현재의 거돈사에 세워진 승묘탑비를 세울 때 비신과 좌대는 완성됐으나 비갓을 만들 만한 석재가 마련되지 않아 거돈사 주지는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이 마을 근처에서 화강암이 나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석공을 데리고 가서 알맞은 바위를 떠 용이 구름에 쌓여 있는 양각 무늬까지 쪼았다. 그러나 막상 이 비갓을 옮기려고 하니 얼마나 무거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쓴다는 사람들이 모였다가 이 갓이 꼼짝도 하지 않자 모두 슬며시 꽁무니를 빼고 없어졌다. 절쪽에서는 심히 난처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스님 한 분이 이 마을에 들렸다. 그는 어느 농가에 들러 "이 댁에서 먹이는 소 좀 빌립시다"하고 부탁해 왔다. "무엇을 하시렵니까?" 주인이 물었다. "비갓을 실어 옮겨야겠는데 댁의 황소면 거뜬히 할 수 있을 것 같소" 주인은 선뜻 승낙해주었으나 내심으로는 수십 명의 장정들이 모여 옮기려다가 옮기지 못 한 것을 스님 혼자서 어찌 황소 한 마리의 힘을 빌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은 소에게 쇠죽을 잔뜩 먹여 외양간에서 끌어내 앞마당에 매어놓았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소를 끌고 갈 듯한 스님이 해가 다 지도록 나타나지를 않았다. 주인은 일부러 쇠죽까지 잔뜩 먹여 놓은 일에 울화가 치밀었다. 이 때 스님이 나타나서 소를 잘 썼다며 인사를 하였다. 주인은 소가 종일 마당에 매어 있었는데, 언제 소를 끌고갔다 돌아왔다는 말인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스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하고 물었다. 주인의 생각을 눈치 챈 스님은 "몸은 그대로 두고 소의 혼만 데리고 가서 일을 마치고 무사히 왔소. 소가 몹시 힘겨운지 땀을 흠뻑 흘리고 있소." 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소를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괴이한 일이라 주인은 비갓을 옮겨갔다는 비두네미골로 가보았다. 이미 비갓은 분명히 옮겨졌고 그것을 끌고 간 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로부터 이곳 마을 사람들은 비두를 옮겨갔다 (넘어갔다)고 이곳을 비두네미로 불러왔는데 나중에 행정구역 명으로 '비두리'로 고쳐졌다 한다. 맞은편 절개지 철계단으로 올라간다. 오른쪽 고개 너머 300m정도 왼쪽에 버스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주차공간 뒤에 계곡물이 나온다.
♤ 상봉산(443.4m)/ 면계/ 삼리봉(부론면 손곡리, 문막읍 비두리 → 궁촌리)/ 3등삼각점(엄정 308/ 70. 9. 재설)
원주시 문막읍 비두리, 궁촌리와 부론면 손곡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형도에 나오는 공식 지명은 아니고 이 지역 사람들이 상봉 또는 상봉산으로 부르고 있으며 정상에는 마모된 3등삼각점이 땅에 묻힌듯 박혀있고 조망은 없지만 널찍한 정상이라 쉬어가기 좋다.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직진하면 비두리(碑頭里)가 나온다. 문막읍 최남단에 위치한 비두리는 구포골, 뒷말, 방아실, 봉두개울, 비두골, 사흥, 선돌, 앞말, 용곡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이 지역에 절이 있었는데, 절 앞에 비석이 있다가 부론면 법천사로 옮겨갔다. 비두(碑頭:비석의 머리)가 넘어갔으므로 비두넘이, 비두네미, 또는 비두골이라 하다가 후에 비두리로 부르게 되었다. 옛날부터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이 나와 비석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부론면 정산리에 소재했던 거돈사에 세워진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보물 제78호)의 비갓도 이곳에서 채석된 암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직전 봉에 올라서서 지맥길은 왼쪽으로 돌아 내려가고 오른쪽으로 약 100m 살짝 벗어나 있는 삼각점봉을 다녀온다. 평지길처럼 이어지므로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다. 임산물(송이)지역이라 궁촌 청년회장의 경고안내문이 붙어있다.
♤ 만디고개
상봉산에서 20분 내려오면 낙엽에 묻힌 산길이지만 뚜렷한 고갯길이 형성되어 있다. 만디고개는 원주시 부론면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왼쪽 문막읍 손곡리와 오른쪽 궁촌리 만디골을 이어주는 고개이다. 서들에서 부론면 손곡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를 말한다. 동쪽에는 문막읍 궁촌리, 서쪽은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남쪽은 정산리와 단강리, 북쪽은 노림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문막읍 궁촌리에 있는 산으로 명봉산 남서쪽에 만대산(萬垈山)이 있고”, ‘만대산 청소년수련원’, ‘만대골(만디골)’ 명칭이 남아있다. 만대산의 그늘 만디골이라 만디고개다. 왼쪽은 논골 방향이고 오른쪽은 예동터 청소년수련원체육관 방향이다.
♤ 만대산(萬垈山, 410m)/ 자주산
궁촌리에 있는 산으로 명봉산 남서쪽에 있다. 만디고개에서 약 30분 정도 오르면 산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는 아닌 펑퍼짐한 정상이다.
♤ 404m봉갈림길/ 면계/ 삼리봉(부론면 손곡리, 문막읍 궁촌리 → 후용리)
404m봉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는 왼쪽의 급경사로 내려선다. 독도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할 구간이다. 왼쪽을 살펴서 내려가면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 후용고개((厚用峙, 232m)/ 부문재/ 13번국도 2차선도로/ 면계(문막읍 → 부론면)
잘 닦인 길따라 능선에 올라서고, 남으로 급히 꺾는데 문막 경계는 북으로 가고, 이제 온전히 부론면으로 들어간다. 2차선 아스팔트 도로로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와 문막읍 후용리를 잇는 고개로 ‘부문재’라 새긴 커다란 표석이 있다. “이 고개는 1965년 5월5일 개통당시 박유식 강원도부지사가 명명”이라 새겨져 있다. 부론면과 문막읍의 앞 글자를 따 부문재라 한 모양이다. 정상에는 버스정류장이 있고 손곡리 마을표지석이 있다. 한시로 유명한 손곡 이달(李達) 선생이 살았다고 해서 손곡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아마 이달의 호 손곡은 손이실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 거란 이야기도 있다. 고개 양쪽으로 [문막읍 후용리 / 부론면 손곡리] 팻말이 있고 후용쪽에 팔각정이 하나 있는데 개인 사유지 안쪽이다. 좌측 손곡쪽으로 몇발 내려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인휘 작가가 쓴 소설 '부론강'에는 6.25 전쟁 당시 보도연맹학살 사건 때 부론 일대 주민 300여 명이 끌려가 처형당해 부문재 일대에 묻혔다는 내용이 소개되었다. 낙석방지용 철망으로 정면으론 오르내릴 수 없다. 버스정류장 표지가 있는 뒤쪽으로 올라선다. 후용리 방향으로 500M 내려가면 폐쇄된 기도원이 보이고, 아래 농막이 있고, 그 뒤 계곡에 물이 흐른다.
♤ 면계/ 삼리봉(부론면 손곡리, 문막읍 후용리 → 부론면 노림리)/ 능선갈림길
벼랑을 긁고 급경사를 올라서니 묘지가 나오고, 묘지로 올라선 능선에서 뚜렷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틀로 90도 꺽어진다. 이곳에서 부터 행정구역은 문막읍을 벗어나 좌우 온전하게 부론면으로 들어서는 곳이다.
♤ 박수고개
왼편에 임도가 지나가는 낙엽이 두툼하게 깔려있는 길이다. 부론면 손곡리와 문막읍 후용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손곡리 방향에는 뚜렷한 임도가 있고 그 아랫쪽에는 엄청나게 큰 채석장에서 나는 덕가산을 갉아먹는 소리가 요란하다. 손곡리 유래에서 찾아보면 “알산골에서 별간골을 거쳐 문막 후용으로 가는 고개를 말한다” 했고, 별간골은 “알산교에서 박수고개로 넘어가는 긴 골짜기를 말한다” 했으니 여기가 박수고개가 맞는듯 하다.
♤ 작은 만디봉(260.1m)/ 4등삼각점(엄정 403/ )
마루금은 우틀이지만 왼쪽으로 80m 가량 벗어난 봉우리로 잠깐 다녀와야 한다. 마모되어 번호도 없는 오래된 삼각점이 있고 조망이 조금 나온다. 북쪽으로 부론면 노림리의 들판이 보이는데 그 너머로 섬강이 흐른다.
♤ 황수골(潢遂谷) 안부(227m)/ 황숙골
긴경산 오르기 직전 푹 꺼진 골짜기이다. 짤록한 안부로 부론면 손곡리 양지말 북쪽으로 난 고개를 말한다. 광명터 뒤에 있는 골짜기로 긴경산 밑이 된다. 북쪽으로 노림리 황수골이나 사람이 다닌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이 고개로 긴경산(봉화대)을 넘어 광명터로 가게 된다. 황수곡(潢遂谷)이라고도 하는데 다시 긴경산으로 오르는 길은 코가 땅에 닿을 만큼 힘들다.
♤ 긴경산(351m)/ 삼리봉(손곡리, 노림리, 흥호리)/ 경경산, 경정산(敬亭山)/ 청룡봉/ 헬기장/ 봉화대
노숲 남쪽에 있는 산을 말한다. 백운산 줄기로 경경산, 경정산이라고도 한다. 황수골 안부에서 긴경산 오름의 곧추선 까끄막을 올라서면 작은 헬기장에 삼각점 기둥만 묘비석처럼 서있다. 조망이 좋아 손곡저수지, 서쪽으로 섬강, 영동고속도로 섬강교가 보인다. 긴경산에서 우틀(북서쪽)로 내려서서 영동고속도로를 건너와 섬강을 끼고 합수점에 이르는 갈래와 좌틀(남서쪽)하여 수영봉, 용마산을 밟고 합수점에 이르는 갈래로 마루금이 나누어진다. 초창기 선배님들은 긴경산에서 우틀로 내려서고 영동고속도로를 넘나들며 백운지맥을 진행했다. 굵직한 산줄기를 따라 말뚝삼각점 전에 좌틀하여 수영봉과 용마산쪽으로 길을 잡는다. 도엽명이 없고 방위표시만 있는 측량도근점이 있다.
♤ 수영봉(守英峰, 283.6m)/ 삼리봉(흥호리, 손곡리 → 법천리)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와 흥호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너럭바위가 있고 백운지맥의 합수점이 한 눈에 보일 정도로 전망은 좋다. 수양봉이라고도 부르며, 지명의 유래는 신선들이 와서 바둑을 두고 놀았는데 지금도 바둑판이 그려진 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찾아보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또 다른 유래는 법천천 가에 절벽이 있는데 우뚝 솟은 바위산에서 수양하기 좋다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남한강전망대 표지판이 소나무에 매달려 있으며 섬강이 남한강에 합수되는 부론면 흥호리 일대 흥원창의 합수점이 시원하게 잘 내려다 보인다. 남한강을 기준으로 북쪽이 성지지맥의 끝머리 여주시 강천면이고 아래쪽이 독조지맥과 오갑지맥의 끝머리 여주시 점동면이다.
♤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法泉里)
부론면 법천리는 부론면 소재지로서 동쪽은 손곡리, 서쪽은 경기도와 충북, 남쪽은 정산리, 북쪽은 흥호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조선시대 원주목 부론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개치, 곡촌, 도시랑, 평당, 원촌, 잠치, 장평을 합병하여 법천리라 하였다. 법천리 서원의 법천사지가 1965년 발굴 정리되었다. 당시의 유물은 불상광배, 불두, 연화문대석, 용두, 석탑재 등의 석조물이다. 본존 왼쪽에 지광국사 현묘탑비가 현재도 서 있는데, 이곳을 법천골이라고 옛부터 일러오고 있다.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법천사가 있었으므로 법천골이라 하였다가 법천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천리에는 국보급 보물이 많이 있다. 국보급 문화재로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법천사지와 조선중엽까지 존립되었던 거돈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원공국사승묘탑비, 임경업장군추모비 등 40여개소에 이르는 문화재가 있다. 한강 하류에 위치한 지리적인 여건으로 고려와 3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 소리개재(175m)/ 서리개고개/ 서리재고개
수영봉에서 20여 분 내려서면 낙엽이 수북히 쌓인 십자 안부인 짤록한 임도 고개이다.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아채마을과 매곡마을 동쪽에 소리개 마을이 있다. 소리개 마을 윗쪽에 있는 고개로 등로는 뚜렷하고 등로 왼쪽 아래 소리개 마을 쪽으로는 넓은 임도와 민가 한 채가 보이고 폐타이어를 비롯한 건축 쓰레기가 방치되어 있다. 맥꾼들은 소리개재라고 하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서리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매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를 사당골이라 하고 사당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 서리재 마을이다. 지명의 유래는 항상 응달인 지역이어서 이 부근에서는 서리가 가장 먼저 오는 곳이라고 한다. '서리'는 '사이'의 옛말이다. 골과 골 사이에 있거나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을 때도 '서리'라는 이름을 쓴다.
♤ 매골고개(115m)/ 매곡(梅谷)마을
소리개재에서 무명봉 하나 넘어서면 매골고개로 좌우로 길 흔적이 뚜렷한 짤록한 안부이다. 왼쪽에 매골마을이 있어서 매골 뒤에 있는 고개라 말한다. 원주시 부론면 손곡1리에는 임경업 장군의 추모비가 있으며, 그 옆 법천2리 매골에는 임경업 장군 조부의 묘가 있다. 하루는 임장군이 말을 타고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건너뛰다가 섬강 중간에 떨어지며 “아차”하고 소리쳤는데, 그때 떨어진 곳을 ‘아차’라 불렀다고 한다. 후에 이곳이 마을이 되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다.
♤ 불근덕고개
도사랑(都舍郞, 도시랭이) 마을에서 매곡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흙빛이 붉어서 불근덕고개라 한다. 여기에서 고려 고종 4년(1217)에 김취려 장군이 거란족을 크게 이겼다고 한다. 김취려 장군은 도망가는 적군을 추격하여 박달재에서 다시 싸워 또 이겼다고 한다. 도사랭이 마을은 법천사지, 거돈사지에서 유래한다. 이곳에 대형 사찰이 있었던 것은 흥원창과 불가분 관계로 추측된다.
♤ 용마산(龍馬山, 242.8m)/ 산불감시초소/ 3등삼각점(엄정 301/ 1989 재설)
매골고개에서 20여분 올라서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법천리에 소재한 산으로 임경업장군의 조부 묘가 있는데, 이 산의 정기를 타서 임장군과 용마(龍馬)가 났다고 한다. 남한강의 왼쪽으로 오갑지맥이 봉우재에서 합수점으로 향하는 모습, 독조지맥이 중군이봉에서 내려와 남한강에 합쳐지는 모습이 제대로 조망된다. 충주시 서북쪽 맨끝 앙성면(仰城面) 단암리가 오갑지맥 봉우재 아래 고향산까지 올라와 있다. 남한강을 경계로 개치마을 앞에 있는 충북과 경기도, 강원도가 만나는 삼도 경계면을 찾아보는 재미는 어떨까... 오른쪽으론 성지지맥이 마지막 자산에서 합수점으로 내려서는 가파른 벼랑길도 살펴진다. 왼쪽으로는 부론면소재지로 이어지는 넓은 임도가 나있고 면소재지와 백운지맥 합수점이 보인다. 우틀로 완만하게 내려선다.
논둑길을 걸어 흥원창 쉼터로 나가 섬강교방향 자전거도로를 따라 합수점으로 이동한다.
♤ 동매마을
월봉 남쪽 강가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물에 잘 잠기는 땅이라는 뜻이라 한다. 옛날에는 이곳에 나루가 있었고 강원도, 충청도 사람들은 물론 경상도 지방의 보부상들까지 이 나루를 건너 다녔다고 한다. 초창기 맥꾼들이 백운지맥의 날머리로 삼았던 동매산(53m)이 있다.
♤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興湖里)/ 시도계/ 삼면경계면(경기 여주 강천면, 점동면, 강원 원주 부론면)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곳의 마을을 말한다. 현 창말지역이다. 이 마을은 고려 때 원주, 영월, 평창, 정선. 횡성 심지어는 강릉, 삼척, 평해 지방의 세금 곡식이나 물자를 이곳에 모아 배를 이용하여 개성으로 보냈으며 조선조 때에는 원주 등지의 조세만 모아 보냈던 곳으로 흥원창이라 하였다. 고려 때에는 전국 12조창의 하나였는데 곡식 200석씩을 싣는 평저선(平底船) 21척이 배치되어 드나들었다. 횡성군 청일면 봉복산에서 발원한 섬강이 남한강과 만나는 은섬포는 양삿(양호) 앞강이 호수같이 넓고 깊어 흥원창 호수라는 뜻의 흥호리라 하였으며 세곡을 운송하는 평저선을 접안하기에 좋은 곳이다. 세곡운송을 위해 내륙수운이 개척된 고려시대, 수도인 개성에 닿기 위해서 은섬포를 떠난 평저선은 남한강을 따라 여주와 한양을 거쳐 서해로 나간 후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가 짐을 부렸다. 물길이 육로를 압도하던 시절 남한강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흥원창이 있던 은섬포는 물자와 사람이 들고 나던 곳으로 남한강을 매개로 역대의 수도인 개경, 개성, 한양을 강원 내륙으로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성계에 의해 부론면 손위실(손곡)로 유배를 온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황포돛배를 타고 은섬포에 내렸고, 손곡에 잠시 머물다 삼척의 궁촌리로 떠나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 흥원창(興元倉/ 興原倉)/ 은섬포/ 섬포구
흥원창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서 한강의 지류인 섬강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설치. 운영되였던 조창 중 하나이다. 양광도 소속의 원주(原州)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稅穀)을 모아 개경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던 한강 수계의 대표적인 조창중 하나였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을 설치하고 조운(漕運)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개경으로 운반 하였다. 흥원창(興元倉)은 고려 초기에 설치한 전국 12조창 중 하나로 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지역에 위치하였다. 고려 초기인 992년(성종 11) 개경까지의 수경가(輸京價. 조운선의 운반 비용)를 정할 때에 세곡6석에 1석의 비용을 지불하는 포구 중 은섬포(銀蟾浦, 이전 명칭은 섬포구(蟾口浦)가 흥원창이 있던 포구로 파악된다. 은섬포는 평원군(平原郡)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평원은 원주의 별칭이다. 고려시대 흥원창은 원주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흥원창의 수세(收稅) 구역은 원주와 그 주변 속군현(屬郡縣) 지역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고려사에는 정종(靖宗) 때(1034~1046) 전국 각 조창에 배치할 조운선의 숫자를 정하면서 흥원창에는 1척 당 2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1척을 두었다고 한다. 흥원창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원주, 평창, 영월, 정선, 횡성 등 강원도 영서지방 남부 5개 고을 세곡과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영동지방 남부 4개 고을 세곡을 수납, 보관했다가 일정한 기일내 한강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되었다. 흥원창을 비릇한 13조창에는 판관(判官)이 임명되어 각 조창에서의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다. 인종 때(1122~1146) 개정된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르면 13창의 판관에게는 20석의 녹봉이 지급되었다.
♤ 합수점
백운지맥 바로 아래가 섬강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곳이고, 남한강 남쪽으로 독조지맥과 오갑지맥 그리고 섬강 건너편으로 성지지맥의 네개의 지맥이 합쳐지는 보기드문 합수점이다. 19번 도로 4거리 흥창버스승강장과 ‘영서의 옛 선창 흥원창’ 표석이 있는 곳에서 좌틀로 600m가량 진행하면 남한강 제방이 나온다. 제방 오름길 왼편에 ‘흥원창‘이란 큰 표석과 4각 정자가 자리한다. 제방으로 올라서면 자전거 도로이다. 제방을 따라 500m가량 진행하면 왼쪽 제방 아래로 내려서는 곳이 있다. 바로 아래가 섬강(蟾江)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곳이고 건너편 우람한 봉우리가 성지지맥의 끝점이다. 제방에 내려서서 합수점에 닿고 백운지맥을 갈무리한다.
♤ 섬강(蟾江 길이 103.5km, 유역면적 1,478㎢)
남한강의 제1지류로, 강원도 청일면 율실리 봉복산(1,022m)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며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태기산(1,261m)에서 발원한 계천과 대관대천을 합류한다. 갑천 횡성호에 잠시 머무르다 횡성읍에서 금계천과 전천을 합류하면서 섬강이 된다. 계속 남류하여 원주시에 들어서고 원주천, 일리천, 이리천을 합한다. 원주시 문막읍 건등리와 문막리를 지나며 문막평야를 이룬 뒤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강천면과 경계지점인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남한강 건너편이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다. 섬강(蟾江)이란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가장 먼저 등장한다. 서거정(1420~1488)의 시에도 섬강이 등장하고 있어서 토정 이지함(1517~1578)이나 송강 정철(1536~1593) 이전, 즉 1400년대 이전이나 늦어도 1400년대 초반에는 이미 널리 쓰인 이름으로 보인다.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이 파주 군수를 하직하고 송강 정철을 이곳에서 만났는데, 간현의 풍광에 감탄하여 시와 풍류를 즐기다 문득 산꼭대기를 바라보니 바위의 형상이 바로 두꺼비가 앉아있는 모습으로 보여 두꺼비 섬(蟾), 섬강이라 칭하고, 그 징표로 바위에 두꺼비 섬(蟾)자를 음각으로 새겨놓았다 한다. 과거에는 원주·영월·평창·정선·횡성의 전세를 모아서 한양으로 운반하던 창고인 흥원창이 섬강의 북쪽에 있었다. 섬강 하류에 위치한 간현유원지는 맑은 물, 넓은 백사장, 병풍을 둘러친 듯한 기암괴석 등이 함께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난 피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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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고야 산행기 쓰시느라 한달은 걸렸겠네오.
근디 천등지맥 분기점에서 땡중대장님 얼굴은 왠일이래요.
오랜만에 지맥하나 졸업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우라는 지금 팔음지맥 분기점인 백두대간 봉황산에서 큰곡재까지 하구 지금 쉬고 있습니다.
내일 샘터재까지만 하구 올라 갈려구요.
담주에 봄 정기모임에서 뵈어요.
부뜰이운영자님!
60~80km 지맥 10개 정도는 미리 산행기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10개 정도는 더 작업할려고 하고 있구요.
다녀와서 조금만 보충하면 완성되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백운지맥 도중에 땡중대장님 하고,
만디고개에서 고사리 꺾으러 오신 궁촌리 마을 할마씨 두분 만난게 전부입니다.
봄모임이 어느덧 일주일 남았네요. 그때 반갑게 뵙겠습니다.^^
팔봉지맥하고 팔음지맥하고 많이 헛갈리네요.
박종율대선배님이 지나고나면 다 꽝이라고 말씀하시던데 공부가 끝이 없습니다. ㅋ
퐁라라운영자님의 백운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오랜만에 산길을 찾으셨네요.
산길에서 비박하면서 거침없는 발걸음은 이어졌습니다.
덕분에 수년전에 지났던 추억을 되돌려봅니다.
섬강합수점에 이른 감회도 느껴지네요.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장님!
바쁘다 보니 아래 권두언이 빠졌네요.^^
제가 쓰는 후기는 일상에 시간내기 바쁜 산꾼들이 지맥 탐사에 있어서 사전 정보를 얻는데 드는 시간을 줄여보도록 선답자들의 자료를 끌어 모아 짜집기한 것으로, 이후 후답자님들에 의해 보다 완성도 높은 산줄기 후기가 작성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겠습니다.
오랫만에 산행하고 산행기를 접해 봅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후답자에게는 많은 정보가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저희들은 예전 3구간으로 나누어서 했네요
1구간을 치악재에서 마무리 했네요
치악재에서 까칠하게 x787.2봉 오름이 오월에 무척 더워서 혼났네요
암능 구간도 있고 힘든 백운지맥을 한번에 마치니 대단 하십니다
지나온 구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 가네요
백운지맥 완주 축하 축하 드립니다^(^
와룡산선배님!
올만에 봽습니다~
제가 요즘은 클라이밍에 심취하느라 다른 시간내기가 빠듯합니다.
열심히 다니셨으니 졸업이 가까이 오셨으리라 보이네요.
주말에 외암마을에서 봽고 인사드리겠습니다.^^
퐁라라 운영자님 백운지맥을 길게도 진행하셨습니다
군부대 봉화지맥 분기점이고 백운산 그리고 천등지맥 분기점
땡중대장님을 조우도 하시고 정말 멋진 백운지맥 1구간 완성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세르파대장님!
짐 방장님과 욜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따 외암 마을에서 뵐께요.^^
우연하게 땡중대장님 첨 만나뵈었는데 넘 방가웠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