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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1. 8. 9.~10.(월,화) - 음력(7. 2.~3.), 일출 05:34~일몰 19:27
●산행지: 주왕지맥 2구간(피늪재-합수점)
●산행코스: 천지당-임도삼거리-1,174m봉-1,378m봉-주왕산-도치동갈림길-1,235m봉-1,245m봉-1,144.8m봉-1,241m봉-암릉-벽파령-송전탑/임도-남병산갈림길-1,218m봉-청옥산-규전갈림길-1,100m봉-용수골갈림길-1,091m봉-지동리갈림길-1,055m봉-1,033m봉-삿갓봉-768.7m봉-779.7m봉-세골재-813m봉-828m봉-810m봉-877m봉-841m봉-884.4m봉-912.3m봉-860.3m봉-산불감시초소-703m봉-멧둔재터널/42번구도로-멧둔재-695m봉-삼방산갈림길-915.4m봉-철탑-어둔골갈림골-858m봉-834m봉-암봉-824m봉-811m봉-성안산-밧줄-암봉-818.8m봉-돌길-797m봉-밧줄-함몰지-643.3m봉-552m봉-밤재-664m봉-713.4m봉-639m봉-박달재-십자봉-쑥박재-776m봉-782m봉-761m봉-접산전망대-701m봉-돌리네지형-접산임도-825.3m봉-접산-안테나-814m봉-접산풍력발전소-창고-빌밀재-760m봉-육각정자임도-덕안사방향-안테나봉-송이골재-611m봉-655m봉-분덕재-521m봉-510m봉-521m봉-542m봉-534m봉-장릉갈림길삼거리-639m봉-650m봉-발산-414m봉-416m봉-300m봉-영월읍사무소-버스터미널-은행나무-실내체육관-동강서강합수부
●먹거리: 생수2.5리터, 빵2(단빹, 호떡), 양갱3 단백질바2, 미니자유시간3, 홀스1, 박하사탕15, 알마겔4, 토마토케챱2
●준비물: 모기장텐트, 전지가위, 춘추잠바, 스틱, 헤드랜턴, 구급약,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마스크3, 충전지2, 충전짹,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스패츠, 팔토시, 말방울+세라컵, 우산모자, 비닐우의, 매트, 은박매트, 안대, 귀마개, 머리띠, 양말, 여분의류, 띠지15
●거리: 약 56.85m (접속 4.7km)
●소요시간: 36.06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기차18,000, 택시:12,700, 식사7,000, 모텔30,000, 택시17,500, 육백마지기7,000, 음료7,800, 택시4,500, 뒤풀31,000, 시외버스20,700
●날씨: 19~29, 약한비 개고 또 비, 소나기도 만나고...
●산행경과:
* 8. 9.(월)
- 05:14 : 천지당 임도차단기
- 06:45 : 임도
- 06:58 : 피늪재/ 임도삼거리
- 08:26~09:20 : 주왕산(1,381.4m)/ 이군삼면봉(평창군 대화면, 진부면 → 정선군 정선읍), 50분 알바
- 10:14 : 수리봉(1,235.3m)
- ??:20 : 벨피재
- 11:11 : 벽파령
- 11:52 : 남병산갈림길(1,140m)/ 이군삼면봉(정선읍, 대화면 → 평창읍)
- 12:15~12:58 : 청옥산(1,255.7m)/ 이군삼면봉(평창읍, 정선읍 → 미탄면)
- 14:12 : 삿갓봉(1,054.9m)
- 15:30 : 860.1m봉
- 15:43 : 세골재
- 17:20~38 : 멧둔재 임도/ 면둔재/ 철탑, sk기지국
- 18:24 : 삼방산갈림길/ 영월군 도착!
- 18:30 : 915.4m봉/ 이군삼면봉(미탄면, 평창읍 → 영월군 북면)
- 19:23 : 성안산(843.8m)
- 21:28 : 밤치/ 413번지방도로/ 간이화장실, 노면주차장
* 8. 10.(화)
- 04:30 : 밤치/ 밤재/ 율치/ 노면주차장, 간이화장실
- 06:23 : 박달재/ 돌무더기
- 06:55 : 십자봉(634.2m)/ 이군삼면봉(북면, 미탄면 → 영월읍), 완전 영월군으로 진입
- 07:00 : 쑥박재(615m)
- 08:23 : 두모치/ 접산임도
- 08:43 : 접산(835.3m)/ 겹산/ 영월읍-북면 경계
- 10:18 : 덕안사 갈림길
- 11:04~19 : 송이골재
- 12:4? : 655m봉/ 삼읍면리봉(영월군 북면 마차리, 영월읍 삼흥리 → 영흥리)
- 12:57~13:08 : 분덕재(472m)/ 분덕치/ 2차선 도로
- 14:20 : 장릉갈림길 : 북면과 영월읍 면계 → 영월읍으로 진입
- 14:50 : 발산 삼각점
- 15:00 : 발산(676.1m)/ 정상석 두개/ 영월읍의 진산
- 16:30 : 문화예술회관
- 17:21 : 합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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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간거리
- 피늪재~벽파령 8.14km (접속 4.7km)
-. 벽파령~청옥산 2.1km
- 벽파령~밤재 22km
-. 가평마을~벽파령 접속 4.5km
-. 청옥산~밤재 19.24km
- 밤재~합수점 21.1km, 성안산 내림 밧줄구간(90m) 상당히 위험, 이후 크레바스 지역도
-. 밤재~분덕재 13.8km
-. 밤재~발산 정상석 17.1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대화면 개인택시: 010-6471-8044, 010-5369-1637
- 평창읍 개인택시: 033-332-2081
- 평창버스터미널: 033-332-2407
- 벽파령: 대화면 하안미리 가평마을 접속(4.5km)
- 청옥산: 육백마지기 편도 0.5km
- 육백마지기: 주차장쪽 간이매점(김밥, 감자전, 곤드레전, 라면, 냉커피), 화장실, 수도
- 밤치: 주차장, 간이화장실
- 밤재 대중교통: 영월~미탄 시외버스 (영월~미탄: 06:20, 16:20), (미탄~영월: 07:05, 17:15)
- 미탄시외버스영업소: 033-332-3723
- 미탄면 개인택시: 033-333-7789
- 영월읍사무소: 뒤편에 수도 있음.
- 영월시외버스터미널: 033-374-2451
- 영월읍: 제일슈퍼, 편의점, 서부시장
* 서울에서 피늪재, 벽파령 가는 길
- 청량리역~평창역 ktx: 05:32, 06:22,~18:22, 18:52, 19:22, 21:52, 1.15h, 15,300
- 평창군 농어촌버스 209번: 08:10, 장평터미널~ktx평창역~대화면 하안미5리 가평마을
- 평창~대화면 버스: 막차 19:30
- 대화면~하안미리 천지당: 택시
* 벽파령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벽파령~가평마을: 도보 45분
- 평창군 농어촌버스 209번: 18:10, 가평마을~ktx평창역
- 장평터미널: 033-332-4209- 평창터미널: 033-332-2407
- 평창역~청량리역 19:09, 20:09, 20:37, 20:53, 22:29, 22:37, 22:54, 1.16h, 18,000
- 평창~동서울 시외버스: 19:35, 15,100- 장평~동서울 시외버스: 20:13, 1.50h, 11,400
* 밤재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영월~미탄 시외버스: 06:20, 16:20, - 미탄~영월 시외버스: 07:05, 17:15
- 미탄~서울 시외버스: 미탄에서 평창이나 장평으로 나가야 합니다.
* 영월터미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17시, 18시, 19:05, 1.40h, 13,100~2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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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지맥 1구간, 피로와 더위에 쫒겨 피늪재에서 중탈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릿재에서 벽파령까지 구간 중에 영원사갈림길, 발내동, 하일동 등등 끊어갈 만한 많은 갈림길이 있었어요.
피늪재에서 임도를 따라 9.1km를 걸어 내려오며 산림청 산불진화훈련장도 지나고 그 앞 비닐하우스도 지나는데 사람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임도는 차 두대가 비켜갈 정도인데 개방하지 않는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어요. 짐작컨데 인근에 더 좋은 길이 있고, 가리왕산과 주왕산의 산림자원을 보존할 목적이겠지만....
지도를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보니 시종 길고 구불구불한 임도를 따랐습니다만 임도 좌측으로 두어 군데 단축하여 내려갈 만한 지름길로 보이는 곳을 지나기도 했습니다.
좀더 자세히 공부했다거나 지도를 판독할 실력이 되었더라면 피늪재에서 침착하게 중왕산으로 달라붙어 정상 직전에서 하안미리로 탈출하는 방법도 찾아냈어야 하는데 능력 밖이라 어설프게 잠깐 생각에 그쳤습니다.
퇴근하고 평창역으로 내려가 택시를 타고, 대화면 대화장터 옆에서 하룻밤 묵습니다. 24시간 하는 양푼집이 있는데 인심 좋더군요. 다음날 아침 택시로 천지당 위 임도차단기까지 이동하여 절골 계곡으로 피늪재로 올랐습니다.
장거리에서 물 다음 중요한건 날씨였습니다. 약한 비는 맞고 갈 수밖에 하며 출발하였으며, 영월 북면과 영월읍에 오후 2시부터 비 예보라 밤치에서 가능한 빨리 출발하자며 계획을 잡았는데 태풍의 영향인지 날씨가 시시각각 변하더군요. 소나기를 한차례 맞고 내려선 분덕재에서 또 세찬 소나기가 들어 온몸으로 맞을 각오로 출발했는데 다행히 이후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밤치에서도 비가 왔더라면 피할 곳도 없고, 영낙없이 중탈해야할 상황인데 밤하늘에 양떼구름 사이로 별이 총총총 하더군요. 현지에서의 상황에 따른 결정에 항상 전폭적 지지를 보냅니다.^^
역시 충분히 쉬고 시작하니 밀어주는 스퍼트도 좋고 오름길에도 힘이 있더군요.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후반부 가볍게 끝내도 될 부분에서 고생을 좀 했습니다만 그것도 지나면 주왕에서의 추억으로 간직되겠지요.
영월터미널 앞에서 삼겹살 2인분, 공기밥 하나, 맥주 한병으로 뒤풀이 마쳤습니다. 와~ 고생이 조금 되어서 그런지 뒤풀이가 다른 때보다 더 맛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말복이더라구요. 어쩐지 쏟아지는 햇볕이 장난이 아니더라니 땀 무쟈게 흘렸네요. 김삿갓의 고장 영월시내는 풍물시장에서 구입한 2,500냥 짜리 삿갓우산으로 햇빛을 가리고 통과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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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왕지맥(住王枝脈)이란
한강기맥의 오대산에서 계방산으로 서남진 하다가 소계방산 삼거리에 있는 뾰지게봉(1462m)에서 서진하여 계방산(1,577.3m)에서 동쪽으로 약 2.4km떨어진 1,462m봉 전방, 1,433.5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이승복생가를 평풍처럼 두른 1,000m대의 산군을 따라 가리치 속사리재를 거쳐 평창군으로 넘어, 백적산(1,142.5m), 모릿재를 거쳐 대화면을 마천루처럼 휘감고 도는 잠두산(1,244.1m), 백석산(1,364.8m), 마항치를 거쳐 하일산(1185m), 가리왕산에서 분기한 주왕산(1,381.4m), 정선군으로 넘어 벽파산(1,182m), 청옥산(1,257m), 삿갓봉(1,054.9m), 갑자기 고도가 내려앉아 평창 미탄면의 멧둔재(703m), 성안산(844m) 영월군의 접산(835.3m), 시루산(688m), 발산(674.4m)을 지나 평창강이 남한강에 합수하는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에서 남한강에 그 맥을 다하는 약 92km에 달하는 산줄기다. 실거리 약 103km이다.
이 산줄기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오대천이 되어 송천과 합류하여 조양강을 만들고 조양강은 백두대간 금대지맥, 노목지맥, 죽렴지맥을 가르는 어천과 지장천을 만나 동강물이 되고, 서쪽으로 흐른 물은 백덕지맥을 사이에 두고 속사천이 되어 흥정천과 만나서 평창강이 되고, 평창강이 흘러 주천강을 만나서는 서강이란 애칭을 얻고, 동강(한강)과 서강(평창강) 두강은 주왕지맥이 명을 다하는 영월읍 하송리에서 만나 남한강이 되어 충주호로 흘러간다. 주왕지맥(住王枝脈)은 이산줄기의 제일 높은 산인 주왕산(1,376.1m)의 이름을 따서 주왕산이라 부르는데 전엔 中旺山이라 부른던 지명이 2003년에 住王山으로 변경 고시 되었다. 주왕지맥(住王枝脈)은 계방산에서 분기하고 높이로나 유명세로도 쉽게 알 수 있어 계방지맥(桂芳枝脈)으로도 부른다.
♤ 주왕지맥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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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왕지맥을 지나는 동네
* 평창군(平昌郡)
강원도 중남부에 있는 군으로 백두대간과 한강기맥 분기점에 위치해 1,000m 이상의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고랭지채소 재배가 주로 이루어지며 옥수수·감자·배추 등이 생산된다. 횡계리 일대에는 목축업이 활발하다. 또한 오대산과 대관령, 용평 스키장 등 관광자원을 중심으로 동해안과 연결된 관광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평창읍·대화면·대관령면·미탄면·방림면·봉평면·용평면·진부면, 계촌 출장소 등 1개읍 7개면 1개 출장소 89개 동리가 있으며, 군청소재지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군청길이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어 산간지역인 이 지역에서 사람의 거주가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부족국가시대에는 예맥국의 영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들어 고구려(또는 신라라고도 함)의 영역이었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백오현(白烏縣)이 되었다. 고려초에 지금의 이름인 평창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초인 1392년(태조 1)에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의 비 효경왕후 이씨의 고향이라 하여 평창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평창의 별호는 노산(魯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충주부 평창군, 1896년에 강원도 평창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로 동면을 정선군으로 이관하고, 강릉의 두입지였던 대화면·진부면·봉평면을 합속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군북면·남면·북면이 군내면으로 통합되었다. 1917년에 군내면이 평창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에 정선군에서 도암면이 편입되었으며, 1934년에는 대화면이 대화면과 방림면으로 분리되었다. 1979년에 평창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3년에 진부면에서 용평면이 분리되었다. 1960년대 이후 고랭지채소농업의 증가, 1970년대 이후 산지개발정책의 전개에 따른 축산업 발달과 목장의 증가 및 영동고속도로 개통, 1980년대 용평지역의 대규모 관광지 개발과 관광에의 관심 고조 등으로 지역의 변모가 촉진되고 있다. 1998년 면온·수항·유천출장소가 폐지되었다. 2007년에는 도암면의 명칭이 대관령면으로 변경되었다. 2011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제123차 IOC 총회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평창올림픽은 아시아에서는 3번째,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개최되는 동계올림픽이다. 백두대간과 한강기맥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는 동북쪽의 오대산(1,563m)을 비롯해 1,000m 이상 되는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내륙의 고원지대를 이루고 있다. 험한 산들이 군내 전역에 남북으로 연이어 있으며, 남부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약간 낮은 편이다. 백두대간이 뻗어내린 동쪽에는 선자령(仙子嶺, 1,157m)·고루포기산(1,238m)·장군바위(1,140m)·노인봉(老人峰, 1,338m)·발왕산(發旺山, 1,458m)·옥녀봉(玉女峰, 1,146m)·박지산(博芝山, 1,394m)·가리왕산(1,561m)·청옥산(靑玉山, 1,256m) 등 1,000m 이상의 고봉들이 연이어 있으며, 대관령(832m)이 위치하고 있다. 한강기맥이 지나는 북쪽과 서쪽에는 보래령(寶來嶺)·회령봉(會靈峰, 1,309m)·흥정산(興亭山, 1,277m)·태기산(泰岐山, 1,261m)·청태산(靑太山, 1,200m)·계방산(1,577m)·사자산(獅子山, 1,120m)·백덕산(白德山, 1,350m) 등이 연봉을 이루고 있다. 도암면 횡계리 주변을 비롯한 군의 일부 중앙부에는 고위평탄면이 발달해 고랭지농업과 축산업이 이루어져 주민의 생활근거지가 되고 있으며, 백석산(白石山, 1,365m)·백적산(白積山, 1,141m) 등이 솟아 있다. 남쪽에는 무동산(舞童山, 633m)·노성산(魯城山, 400m)·옥녀봉(玉女峰, 590m)·삼방산(三芳山, 980m) 등의 1,000m 이하의 산들이 솟아 있다. 계방산에서 발원하여 군의 남북을 관류하여 남한강에 합류하는 평창강은 속사천으로도 불리며 남류하다가 봉평면에서 흥정천, 대화면에서 대화천, 방림면에서 계촌천과 합류하여 평창읍에 이르러 심하게 곡류하며 영월군에 흘러든다. 두로봉(1,421.9m)에서 발원한 오대천은 진부면을 지나 명주군에 흘러가며, 군의 동북부를 흐르는 송천은 황병산(黃柄山, 1,407m)과 선자령의 분수계를 기점으로 심하게 곡류하면서 도암면을 관류하여 정선군으로 유입한다. 군내를 흐르는 대부분의 하천들은 감입곡류하천으로, 주변에는 좁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남부에는 석회암지층이 분포하여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했다. [포탈에서 발췌정리]
* 정선군(旌善郡)
강원도 남동부에 있는 군으로 본래 산간오지로 왕래가 드문 곳이었으나 1948년 정선군의 함백탄전 개발로 인구가 불어나게 되었다. 최근까지도 석회석·규석·철 등의 광물을 생산하고 있다. 백두대간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가면서 강원도에 이르러 영동과 영서의 분수령을 형성하였는데, 정선군은 영서에 위치한다. 지형상 개발이 늦어져 천연자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관광자원이 많다. 가리왕산을 비롯하여 많은 산과 계곡, 폭포가 있다. 북쪽은 강릉시, 북서쪽은 평창군, 남쪽은 영월군, 동쪽은 동해시·삼척시·태백시와 접한다. 임계천과 구절천(九切川)이 만나는 강변과 북평면 남평리 강가에 고인돌군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현으로 668년(보장왕 27)에 잉매현(仍買縣)이라 불렸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지금의 이름인 정선으로 개칭되어 명주(溟州)에 소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940년(태조 23)에 삼봉(三鳳)으로 불리었고, 1018년(현종 9)에는 주진군(朱陳郡)으로 개칭되고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 1291년(충렬왕 17)에 도원군(桃源郡)으로 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침봉군(沈鳳郡)으로 개칭되고, 1353년(공민왕 2)에 다시 정선군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66년(세조 12)에 원주의 관할령이 되었으며, 이듬해 정선군으로 부활되어 조선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1895년에 강원도에서 충주부 관할로 이전되었고, 다음 해인 1896년에 13도제를 실시하면서 다시 강원도 관할이 되었다. 1906년에 강릉군 임계면·도암면과 평창군 신동면이 정선에 편입되어 6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24년에 서면이 정선면에 병합되었고, 1931년에 도암면이 평창군에 편입되었다. 1935년에 정선면 일부가 평창군 진부면에, 신동면 일부가 영월군 상동면에 각각 편입되었다. 1948년에 신동읍 조동리에 대한석탄공사 함백광업소가 문을 열게 되면서 이 지역의 탄광 개발이 시작되었다. 1950년 6·25 당시 이 지역은 공산 치하에 들어갔고, 같은 해 9월 수복되었다가, 1951년 1월 다시 공산 치하에 들어갔으나 2월 아군이 북상하여 탈환하게 되었다. 1957년에 제천에서 영월을 잇는 철도가 정선군까지 연결되어 석탄 수송이 용이하게 되면서, 1959년에 사북지역의 탄전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1973년 7월 1일에는 정선면과 동면 사북출장소가 각각 읍으로 승격되어 2읍 5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 삼척군 하장면 가목리와 도전리가 임계면에, 명주군 왕산면 구절리와 남곡리가 북면에, 신동면 천포리가 영월군에 각각 편입되었다. 1974년에 태백선이 완공됨에 따라 이 지역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탄 공급지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에 탄광 근로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사북 사태가 발생하여 세간의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이해 12월 1일에는 신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5년에는 사북읍이 고한읍과 사북읍으로 나누어졌다. 1986년에 북면의 북평출장소가 북평면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에 임계면 봉정리가 북면에 편입되었다. 2009년 5월 1일에 동면이 화암면으로, 북면이 여량면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한강기맥에서 뻗어내린 상원산(上元山)·가리왕산(加里旺山)·비봉산(飛鳳山)·벽파령(碧波嶺)·성마령(星摩嶺)·마전치(麻田峙) 등이 군의 우측을 이루었으며, 석병산(石屛山)·중봉산(中峯山)·갈래산(葛來山)·백운산(白雲山)·예미산(禮美山) 등은 좌측을 이루고 있다. 고양산은 군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화암면, 여량면, 임계면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갈래산(葛來山)은 동에서 서로 뻗어내려 우암산, 서운산, 기우산을 이루면서 조양산(朝陽山), 병방산(兵防山)을 끝으로 북쪽은 정선읍과 화암면의 일부가 되고 남쪽은 남면의 북반(北半)을 이루었다. 함백산은 서쪽으로 뻗어 영월로 가는 중간에 백운산(白雲山), 두위봉(斗圍峰) 등이 있으며 그 북쪽은 화암면의 일부를, 남쪽은 신동읍을 형성하였다. 남한강 상류가 관류하고 있는 정선에는 오대천, 석항천, 지장천, 용탄천, 어천, 골지천, 임계천, 송현천, 송천, 봉산천 등 10개의 하천이 있다. 평창군 대관령면에서 발원한 송천과 삼척시 하장면에서 발원한 골지천이 여량면에서 합류하고, 북평면 나전리에서 오대천과 합류하여 정선읍에 이르러, 화암면 백전리에서 내려오는 어천과 합류하며, 갈래산에서 발원하여 고한읍·사북읍·남면을 관류(貫流)하는 지장천과는 가수리에서 합류하여 남한강을 이루어 충청·경기·서울을 지나 서해로 유입한다. [포탈에서 발췌정리]
* 영월군(寧越郡)
강원도 남부에 있는 읍으로 강원도에서도 산세가 수려하고 삼림이 울창하기로 이름나 있으며,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많다. 2개읍 7개면 57개리가 있다. 군청소재지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로이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일부였고 4세기 초부터 한산성(漢山城: 지금의 광주)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백제의 세력이 커져 한강 하류지역 일대를 차지함에 따라 이때부터 백제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이 고장은 100가구가 넘는다는 뜻으로 백제의 백월(百越) 땅이라 불렸다. 그러나 북쪽의 고구려 세력이 낙랑군을 정복하면서 남하하게 되고 또한 반도 동남부에서 일어난 신라의 세력이 팽창하여 북상해 오면서 한강 이남의 중부 지방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사이에 치열한 경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장수왕 때에 고구려는 국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그 세력을 남으로 뻗쳐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한강 유역은 고구려가 점령하게 되어 백월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내생현(奈生縣)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통치제도를 정비하면서 내생현을 내성군(奈城郡)으로 개칭하였으며, 9주 5소경 중 명주(溟州)에 속하게 되었다. 후삼국기에 이 지역은 고려에 영속되었고 940년(태조 23) 영월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주천현(酒泉縣)을 폐하면서 원주(原州)에 이속시켰다. 995년(성종 14)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원주와 같이 중원도에 속하였고, 5도양계 이후에는 양광도(楊廣道)에 편입되었다가 1372년(공민왕 21)에 영월 출신 환자(宦者) 연달마실리(延達麻實里)가 명나라에 있으면서 국가에 공이 있다고 하여 영월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1401년(태종 1)에 이 지역은 강원도에 귀속되면서 지군사(知郡事)가 다스렸다. 1457년(세종 3)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어 왔다. 1698년(숙종 24)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편 때 군이 되었으며, 원주·평창·정선 등과 함께 충주부에 편입되었다가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에 다시 강원도로 복귀하게 되었다. 1914년 원주에 속해 있던 수주면(水周面)과 좌변면(左邊面)이 이 지역으로 귀속되었으며, 1915년에는 정선군 신동면 석항리가 편입되었다. 1931년 천상면(川上面)이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되었으며, 1937년 7월 군내면이 영월면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 1월 1일 영월면이 상동면 연하리를 편입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 1월 1일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의 천평리·덕구리가 상동면에 편입되고, 수주면 강림리·부곡리·월현리가 횡성군 안흥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상동면이 정선군 신동면 천포리 일부의 편입을 받아 읍으로 승격되었고, 하동면(지금의 김삿갓면) 정양리와 남면 흥월리가 영월읍에, 서면(지금의 한반도면)의 북쌍리가 남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상동읍의 녹전(碌田)·석항(石項) 2개 출장소를 통합, 중동면을 설치하였다. 2009년에는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서면이 한반도면으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6년 11월에는 수주면이 무릉도원면으로 변경되었다. 북쪽으로 정성군, 평창군, 서쪽으로 횡성군, 원주시, 남쪽으로 충북 제천시, 단양군 및 경북 영주시, 봉화군, 동쪽으로 강원도 태백시에 접한다. 북동부에서 남동부로 영월지맥이 남북으로 뻗어있고, 남동부에는 백두대간 동서로 뻗어 그 산맥의 여파가 군내 각지에 미쳐 산악이 중첩하며, 북서부에 백덕산(1,350m), 북동부에 백운산(1,426m), 두위봉(1,466m), 망경대산(1,088m) 남부에 태화산(1,027m), 옥석산(1,232m) 등이 솟아있다. 중앙부를 한강 지류인 평창강과 주천강이 한반도면 신천리 부근에서 합류하여 동류하다가, 영월읍 하송리에서 한강 본류와 합류하고, 다시 각동리 부근에서 옥동천이 합류하며, 평지는 주천리와 영월분지 외에는 별로 없다. 군내에 석회암층이 곳곳에 있어 쌍룡,옹정,연당,영월 부근에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해 있고, 진별리에는 고씨동굴 등 석회동굴도 여러 개 발달해 있다.내륙산간지대에 있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큰 내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지하자원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 제천-태백을 잇는 산업철도인 태백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방향으로 지난다. 평창-태백, 제천-정선을 잇는 국도가 영월읍을 지나며, 군내 각 지역은 지방도로 연결된다. [포탈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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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지맥 피늪재를 완전 마스터 하였습니다.
1구간에서 내려와 112신세를 진 임도차단기가 있는 곳이 바로 천지당 위였습니다.
계곡에 무슨 절이 있었던 모양이죠. 장마철엔 다 휩쓸리겠던데 절골이랍니다. 지금은 사방댐이 설치되어 있어요. 올라가다 띠지 두장 매달았습니다. 임도에서 절골계곡으로 탈출하는 지점에도 띠지 매달았어요. 내려서는데는 1시간이면 족할것 같더군요.
평창군 대화면 하안미리는,,,
피늪재로 내려서는 하일산갈림봉에서 시작하여 주왕산, 벽파령을 지나 청옥산 직전 남병산갈림길까지 주왕지맥과 함께 하는군요.
피늪재삼거리에서 온갖 잡풀이 엉켜져 있는 잡목길을 뚫고 올라서야 합니다. 임도처럼 보이는 희미한 등로를 한동안 따르다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길이 없는 구간을 치고 올라섭니다. 오른쪽을 보면 능선이 보이는데 그쪽이 수월합니다.
♤ 피늪재(1,035m)
평창군 진부면 장전리와 대화면 하안미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비포장 임도가 지나가는 넓은 공터이다. 산악기상관측소가 있고, 오래되어 알아 볼 수 없는 평창국유림관리소 안내도가 서있다.
- 임도를 따라 오르다 임도삼거리에서 우측 끝으로 선답자들의 띠지가 보이는 숲길로 진입한다.
♤ 1,172m봉
잡목이 우거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상에서 좌틀하여 주왕산으로 오른다.
- 4등삼각점 정선 403이 있다.
♤ 1,378m봉
몇 발자욱 떼면 폐헬기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가 나오는 주왕산 전위봉이다. 주왕산 정상으로 향하다 우측으로 하안미리로 내려서는 천당골 갈림길을 지난다.
중요한건 여기서 알바를 무려 1시간이나 했다는 겁니다. 가리왕산쪽으로 25분 내려서고 다시 기올라오는데 30분 걸리더군요. 상배성님 띠지가 있고, 조금 내려가니 와룡산님 띠지가 있고, 조금 더 내려서니 길라잡이님 띠지가 있고, 더 내려가니 플러스형님 띠지가 있고,,,, 그러니 믿거니 하며 계속 가다가 여기 정도서 한번 확인하자 했는데... ㅠㅠㅠ 지맥길은 정상 헬기장 벗어나자마자 바로 우틀해야 합니다.
♤ 주왕산(住王山, 1,381.4m)/ 중왕산(中旺山)/ 이군삼면봉(평창군 대화면, 진부면 → 정성군 정선읍)
주왕산은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과 평창군 진부면의 경계에 있는 주왕지맥의 모산이다. 지맥길은 우측이지만 정상표지기 뒤쪽으로 진행하면 가리왕산으로 갈 수가 있다. 가리왕산의 유명세에 밀려 정상석도 없는 주왕산은 일제때 중왕산에서 2003년 3월 8일 주왕으로 변경고시 되었다. 자연휴양림이 있는 가리왕산과는 능선으로 4km 이어져 있어 같은 산으로 보기도 한다. 한강기맥의 주왕지맥에 속하는 산으로 북쪽에 백석산(1,365m), 서쪽에 중대갈봉(1,013m), 남쪽에 청옥산(1,256m), 동쪽에 가리왕산(1,561m), 중봉(1,433m) 및 하봉(1,380m) 등의 높은 산을 비롯하여 정선 소금강, 화암약수, 정선 아우라지, 화암종유굴 등의 명승지가 있다. 동북쪽으로 흐르는 계류들은 오대천으로 흘러가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회동리를 거쳐 용탄에서 남한강의 본류로 흘러든다. 산 북쪽의 진부면 장전리는 일찌기 화전취락으로 조사, 연구된 지역이며, 서쪽의 대화면 하안미리는 부근에 서울과 강릉을 잇는 국도가 지나고 있으며 일찍부터 농업지역으로 개발된 곳이다.
- 미역줄나무가 점령하고 있는 정상에는 이정표나 정상석이 없고 판독이 불가한 깨진 4등삼각점이 있다.
- 가리왕산으로 가지 않도록 독도에 주의한다. 벽파령은 우측 잘 보이지 않는 길이다.
♤ 가리왕단맥
주왕지맥 주왕산에서 동쪽으로 재분기한 가리왕단맥은 가리왕산(1,561m), 중봉(1,433m), 하봉(1,382m), 민둥산(979m)과 비봉산(829m)을 지나 조양강으로 맥을 다하는 길이 약 16.8km의 정선, 평창 지역의 마루금으로 좌측으로 조양강으로 우측으로 오대천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흐르게 한다. [홀산아님 블로그 참조]
♤ 가리왕산(加里王山, 1,561m)/ 갈왕산(葛王山)
가리왕산은 정선군 정선읍, 북평면과 평창군 진부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오대산의 남쪽에 있으면서 높이도 비슷하여 오대산과 더불어 태백산맥의 지붕노릇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육산이며 능선에는 고산식물인 주목, 잣나무, 단풍나무 등 각종 수목이 울창하다. 옛날 맥국(貊國)의 가리왕(加里王)이 이곳에 피난하여 성을 쌓고 머물렀으므로 가리왕산이라 부른다고 하며, 북쪽 골짜기에 그 대궐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갈왕(葛王)이 난을 피하여 숨어든 곳이라 하여 갈왕산(葛王山)이라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가리왕산(加里王山)으로 불리고 있다. 정선아리랑의 고장이다. 2018년 동계올림픽 경기 중 알파인 활강스키가 개최될 강원도 정선군 가리왕산 일대에 스키장을 건설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논쟁이 약 5년가량 뜨거운 감자였다. 지금은 가리왕산 안에 국립 자연 휴양림이 있으며 국립휴양림(www.huyang.go.kr/)에서 예약, 이용 가능하다.
아무런 특색이 없어 사진을 박지 못했네요. 길라잡이님은 우측에, 정면으로는 세르파님이 길안내를 하고 계시더군요.^^ 만약 공부를 충분히 했더라면 1구간에 동력도 물도 충분했기에 주왕산을 넘어 여기까지 왔어야 했습니다. ㅠㅠ
♤ 도치동갈림길
주왕산에서 내려서면 도치동갈림길에 닿는다. 벽파령 방향의 지맥길은 직진이나 우측 하안미리 도치동 방향으로 일반산악회 띠지가 많이 걸려 있다.
♤ 수리봉(1,235.3m)
하안미리로 탈출하는 갈림삼거리를 직진하여 산죽 등로를 따르다 1,235.3m봉에 도착한다. 뒤쪽으로 암봉 위가 멋진 조망터이다. 평창군 대화면 하안미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좌측으로 멀리 가야할 청옥산 풍력발전기가 조망된다.
♤ 벨패재/ 옛길
정선 주민들은 벽파령을 벌피재, 펄판재. 벌패재, 수통매기재 등 다양하게 부르는데 벌패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전멸당한 데서 생긴 지명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으며, 그래서인지 벼슬을 하는 사람이 이 고개를 넘으면 패한다는 이야기도 전한다고 한다. 수통매기재라고도 부르는 이곳에는 청쟁이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가토키요마사(加藤請正) 휘하의 부대가 진을 쳤던 곳이라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 지도상으로 벨패재로 표시되나 고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 1,143.8m봉
연속되는 암릉구간 능선상의 사면길이 있는 봉우리로 이 구간을 통과하며 대화면 하안미리 전경과 멀리 가야할 청옥산의 모습이 조망되는 곳이다.
- 4등삼각점 (정선 404)이 있다.
♤ 벽파령(碧波嶺)
벽파령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과 정선군 정선읍과 북면 경계에 있는 가리왕산에 위치한 고개이다. 산이 높아 산상에서 주위를 바라보면 크고작은 산들이 중첩하여 마치 푸른 파도와 같다는 뜻으로 벽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대화면 하안미리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팔도지도』에는 벽파산으로, 『대동여지도』에는 벽파령으로 나온다. 『동여도』, 『팔도분도』에도 벽파령으로 표시되어 있다. 예전에 평창과 정선이 상거래가 활발해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였다. 벽파령은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고개이름으로 대동여지도, 동여도, 해동지도,팔도분조 등에 벽파령이라는 이름이 나오며 조선팔도지도와 동국여지승람에는 벽파산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고 한다. 벽파령은 지리적으로 한양에서 평창 대화를 지나 정선 땅인 회동리 말목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가리왕산을 가로지르는 험난한 고갯길로 표현하고 있는데 조선말 정선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은 부임하기 위해 넘던 벽파령에 대해 “웅장하고 길어 하늘을 받치는 듯하고 산세는 급하여 말을 달리는 듯하며 눈이 닿는 끝까지 줄줄이 태산이 늘어섰다.”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이러한 벽파령에 정선문화원에서 2017년9월25일 역사적 의미를 담은 표지석을 세웠으며 후면에는 고려말 사람으로 이방원의 스승인 운곡 원천석의 登碧波嶺(벽파령을 올라) 한시를 새겼다.
- 우측 하안미리로 하산하며 구간을 나누는 곳이다. 벽파령(碧波嶺) 표석 우측으로 탈출하여 10분 후 세석임도 차단기를 우회(우측)하여 내리고, 35분 후 몽골캠프 갈림삼거리에서 좌틀하여 갈번지교 지나 가평동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개울물이 있고 인근에 슈퍼도 있다.
임도에서 빡시게 약 30분 올라치며 지맥길은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남하합니다. 남병산갈림길 그리고 삼방산갈림길에도 배창랑대선배님 띠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 남병산갈림길(1,140m)/ 이군삼면봉(정선읍, 대화면 → 평창읍)
평창군 대화면과 평창읍의 면계는 지맥의 우측 1,157m봉으로 분기하는 능선을 따라 남병산(1,149.7m)으로 향하며 지맥은 좌측 청옥산으로 가는 길이다.
♤ 남병산(南屛山, 1,149.7m)
평창군 평창읍과 방림면, 대화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안미리의 남쪽에 위치하며, 지명의 유래는 정상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대화면 쪽에서 바라 보았을 때, 남쪽에 병풍을 두르며 기러기가 날개를 펼친 형상이라 붙여졌다고 하며 정상 아래에는 기러기재가 있다. 『평창군신지지』에 따르면 남병산은 서쪽으로 모노치(毛老峙)와 이치(梨峙)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벽파령(碧派嶺)과 안치(鴈峙)로 이어진다. 산 중턱에 있는 산제당(山祭堂)에서는 매년 석탄일에 풍년제를 올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염출한 제사비용으로 제물을 마련하고 제관만 제단에 올라가 의식절차에 따라 진설하고 소지를 올린다. 산과 관련된 설화로는 8부 능선에 자리한 조판서의 묘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조선 시대 병조판서를 역임한 용인 사람 조판서가 서거하자 지관에게 물으니 "남병산에 묻어라. 그러면 그 산에서 500년 후에 은(銀)이 나온다고 했다."고 한다. 장남은 그 위치를 알 수 없어 북간도로부터 함경북도를 거쳐 강원도 금강산을 헤맸지만, 이 산을 찾지 못하였다. 결국 대관령을 넘어 이 산 아래에서 하루 묵게 되었는데 이튿날 이 산이 남병산임을 알게 되어, 선친의 유골을 이곳에다 안치시켰다는 것이다. 그 일가는 그 후 우환없이 집안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강원도 산치고는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웅장한 산세에 사람들의 손길이 타지않은 천연림, 아름드리 송림에다 산나물과 버섯 등 철따라 풍부한 산림자원을 갖고 있는 명산이다.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는데 정상은 육백마지기쪽으로 10여미터 가야 합니다.
배낭을 이곳에 놓고 육백마지기를 다니러 갑니다. 삿갓봉은 여기서 갈라집니다.
전위봉인 1,218.4m봉에서 10분여 진행하여 도착한 청옥산은 주왕지맥 출발점에서 약 60km 지점입니다.
♤ 청옥산(靑玉山, 1,255.7m)/ 이군삼면봉(평창읍, 정선읍 → 미탄면)
청옥산은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미탄면과 정선군 정선읍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선군과 군계를 따르던 지맥길은 여기서 정선군과 헤어지고 평창군으로 진입하여 평창읍과 미탄면의 경계를 따라 서남진 한다. 가리왕산에서 주왕산으로 이어지는 남쪽 능선 끝에 솟은 산으로 능선은 비교적 평탄하며 산세는 육중하다. 곤드레나물과 함께 청옥이라는 산나물이 많이 자생하여 이름 지어졌다. 산나물과 야생화가 많기로 유명한 청옥산은 춘궁기에 산나물을 뜯어 연명하던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평창아리랑의 발상지이기도 한 곳인데 1950년대까지는 화전민들이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1960년대 들어서 넓은 땅이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정부에서 거주민들에게 밭농사를 권장하였고, 배추농사는 1970년대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 산나물을 뜯으며 삶의 고달픔을 잊기위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감흥을 노래한 것이 아라리 가사가 되어 미탄지방 주민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미탄면 일원에서 발생한 평창아라리는 옛 선비들이 청옥산 성마령을 넘나들며 정선으로 전해져 정선아리랑의 곡조가 평창아리랑에서 비롯됐다고 이야기 한다. 한치라는 높은 고개가 있고 그 아래 한치동이 있는데 한치는 눈이 늦은 봄까지 녹지 않고 있어 지어진 이름이고, 예전에는 탄광이 있어 사람들이 붐비던 마을이다. 산의 서쪽 아래에는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부르는 밀목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42번 국도에서 시작된 골짜기의 제일 끝 마을로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적을 피해 숨어 살던 곳이라고 하여 밀목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산 아래 몇 채의 집이 모두 너와로 지붕을 해 이어 너와등이라고 부르는 마을도 있다.
- 정상석과 3등삼각점 (정선 313), 파손된 삼각점이 하나 더 있다. 주차장까지는 0.3km이고, 육백마지기까지는 0.5km이다.
♤ 성마령분맥
주왕지맥 청옥산에서 동남쪽으로 재분기한 성마령분맥은 성마령, 백운산(882m)을 지나 동강으로 맥을 다하는 길이 약 24.3km의 평창, 정선, 영월 지역을 지나는 마루금으로 좌측은 조양강, 우측은 동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흐르게 한다. [홀산아님 블로그 참조]
지맥길은 지동리 방향으로 진행되고, 이정표에 600마지기가 0.5km입니다. 생각보다 가깝네요. 산에서 2~300m내려서면 임도입니다. 멋진 정자도 있고, 아쉽게 샤스타데이지는 6월 말에 제철이 지났데요.
♤ 육백마지기/ 풍력발전단지
육백마지기는 평창군 미탄면과 정선군 정선읍의 경계인 청옥산 정상부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평원을 말하는데, 구비구비 산길을 오르면 산 정상에 육백마지기라 불리는 평원이 펼쳐져 있다. 원래 능선이 평탄해서 산행을 하기에도 부담이 없지만 4륜구동차를 이용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비포장길이 열려 있다. 청옥산 근처 주차장에는 나들이 차량도 많고, 차박을 하는 사람도 보인다. 평지가 드문 강원도 산골에서 면적이 600두락 또는 볍씨 육백 말을 뿌릴 수 있는 곳이라 해서 육백마지기라 불리는 곳이다. 두락은 마지기와 같은 뜻으로 논은 200평, 밭은 300평으로 치니 600마지기라면 그 넓이가 자그마치 18만 평이다. 해발1,200m가 넘는 산꼭대기에 있는 밭 면적으로는 엄청난 넓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냉지 채소밭으로 알려진 육백마지기는 대관령 고냉지 채소밭보다 해발고도가 400m나 높아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고 모기떼도 찾아 볼 수 없는 청정지역이다. 이곳이 고냉지 채소밭으로 개간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로 여기서 나는 배추는 농약을 쓰지 않기로 유명하고 무의 맛이 달기로도 손꼽힌다. 전엔 예쁜 배추밭의 물결이 장관이었는데 요즈음은 샤스타데이지 꽃이 만발하여 등산객들과 여행객들을 부르며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 육백마지기 주차장 쪽에 간이매점(김밥, 라면, 감자전, 곤드레전, 냉커피)과 화장실 그리고 여자화장실 뒤에 수도가 있다. 주류는 취급하지 않고 미탄면 부녀회에서 매점을 운영한다.
♤ 용수골갈림길
좌측으로 용수골로 내려가는 길인데, 우측에도 길이 있다. 규전으로 내려서는 길인데 maybe 여기가 약수터로 가는 방향으로 보인다. 약수터가 중요하건만.... 하지만 불확실한 멧돼지 약수터를 찾아가느니 청옥산에서 육백마지기로 내려가 요기도 하고 물도 보충할 것을 추천한다.
1,100m 지나서 용수골 가는 이정표가 또 나옵니다.
♤ 지동리갈림길 삼거리
1,049.1m봉에서 6분여 완만하게 내려서면 이정표가 서있는 지동리갈림길 삼거리가 나온다. 정리하자면 청옥산과 용수골갈림길 삼거리 이전에 만나는 1,100m봉의 중간지점에서 만나는 우측 갈림길과 연결되는 지동리 방향이다. 그러니 1,100m봉 오르기 전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멧돼지약수터, 청옥수약수터, 못골약수터 등이 자리하고 있다.
청옥산에서 삿갓봉까지 비교적 무난한 길이 계속됩니다.
♤ 삿갓봉(1,054.9m)/ 입봉(笠奉)/ 헬기장
삿갓봉은 백두대간의 주맥이 갈라져 나와 백적산을 세우고 청옥산을 일구며 강원도 평창 남서쪽으로 산세를 뻗쳐 솟아오른 평창군 평창읍 조동리와 미탄면 회동리와 경계에 있는 산이다. 삿갓모양으로 우뚝 서 있어 삿갓봉이라 불리는데, 백운산, 응봉, 매봉 등과 마찬가지로 전국에 똑같은 이름의 산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산이기도 하다. 강원도 평창군의 삿갓봉은 강원도의 산들이 대개 그렇듯이 첩첩산중 오지 중에 오지로,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기로 유명하다. 사람의 발길이 얼마 닿지 않아 울창한 산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작은 벌레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주변이 조용하여, 쾌적하고 여유로운 산행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인 산이다. 1천미터 이상의 기암괴석들이 봉우리를 이룬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 남병산, 남쪽으로 삼방산, 동쪽으로 청옥산, 그리고 서쪽으로는 장암산 등이 손에 잡힐 듯 조망되어 산행의 즐거움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산이다.
- 정상은 헬기장이 있는 넓은 공터이고 깨진 삼각점이 있으며 조망은 없다. 지맥길은 넓은 방화선 좌측 숲길로 이어진다.
♤ 860.2m봉/ 삼각점봉
산패는 없고 띠지가 860.2m봉임을 말해준다. 이끼때문에 식별이 어려운 삼각점만 있다.
새골재까지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쳐 영역표시를 해두었다. 무슨 공간이었을까?
♤ 새골재(779.7m)
강원도 평창군 회동리 갈림길이다.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최근에 임도가 개설되어 있어 임도를 따르기도 한다.
임도를 따르다 보면 우측으로 829.4m봉이 있다.
멧둔재 내려서기 직전 등로 좌측으로 보이는 산불감시초소입니다. 살펴보니 상태 좋습니다. 문도 개방되어 있고.... 한겨울엔 호텔일것 같았어요.
♤ 면둔재/ 멧둔재/ 미탄치
멧둔재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노론리, 상리에서 남쪽에 위치한 미탄면 창리, 율치리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하는 고개이다. 삼방산의 동북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평창읍지에는 군으로 부터 동쪽으로 17리에 있다고 기록되여 있다. 『조선지도』, 『여지도』 1872년 지방지도, 『광여도』, 『조선팔도지도』, 『동여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미탄령(味呑伶)으로 표기되여 있다. 이 고개 근처에서는 자색 벼루돌이 나는데 품질이 아주 좋다고 한다. 미탄치 아래에는 마을을 재밑마을이라 하고 한자로는 치저동(峙低洞)이라고 부른다. 미탄치를 메둔재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산새가 두루뭉실하고 크다는 뜻의 메둔과 고개가 합쳐진 말이다. 1991년 산꼭대기로 평창과 정선으로 이어지던 42번 국도가 새로 생긴 신42번 국도가 뚫리면서 640m로 개통된 터널을 통해 미탄을 거쳐 정선으로 이어진다.
- 고개에 높다란 철탑과, sk기지국이 있고, 삼방산 3.2km 이정목도 보인다. 지맥길은 삼방산 방향 등산로로 올라선다.
삼방산갈길림길에서 10여 분 진행하면 삼각점이 있는 915.4m봉이다. 드뎌 영월군에 진입했습니다.
♤ 삼방산갈림길(915.4m)/ 이군삼면봉(미탄면, 평창읍 → 영월군 북면)
평창군 평창읍과 미탄면의 경계를 따르던 지맥길이 삼방산갈림길에서 영월군과 만나 좌틀하며, 이후 지맥길의 우측이 평창읍에서 영월군 북면으로 바뀌어 미탄면과 영월군 북면의 경계를 따른다.
- 4등삼각점 (평창 469)이 있다. 삼방산(979.7m)은 왕복 4.2km로 1시간 이상 걸린다.
♤ 삼방산(979.7m)
삼방산은 영월군 북면 공기리와 평창군 평창읍 노론리와 미탄면 창리에 걸쳐 부드럽게 솟아 있다. 양 군 경계를 이루며 예로부터 봄철 산나물 산행지로 제격이라는 호평을 받고있는 산이다. 거대한 종 형국으로 웅크린 모습을 지니고 있다. 영월 북면 연덕리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면 주능선이 하늘금을 그리며 웅장하게 올려다 보인다. 산 이름의 유래는 세 방향으로 가는 길이 있다 해서 삼방산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 예로 ‘영월부읍지’에는 삼방산 입구인 북면 연덕리에는 옛날 교통의 요지에 설치하는 역과 원을 두어 관리들의 지방 출장과 통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연평역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정표가 없어서 그냥 지납니다.
♤ 어둔골갈림길
송전탑을 지나자마자 야트막한 봉우리가 나오는데 뚜렷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진다. 독도주의 구간인데 좌측으로 선답자들의 띠지가 많이 보인다. 어둔골은 삼방산 밑으로 계곡이 깊고 높은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 일조시간이 짧고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어둔골' 또는 어두 탈락현상으로 '둔골'이라고 한다.
♤ 영월군 북면 공기리(恭基里)
공기에는 무모님 묘에서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한 김선배 효자각과 홍우보의 처 선성김씨의 열녀각, 서씨 효자각 등 효자, 효부, 열녀각이 많고 웃어른을 받들어 모시는 살기좋은 고장이므로 '받들 恭'자와 '터 基'자를 써서 공기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성안산은 작아보이지만 접근하는데도 내림길도 부드럽지만은 않은 까다로운 골산이로군요.
♤ 성안산(843.8m)
영월군 북면 공기리와 평창군 미탄면 율치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평창군에서 미창(미탄은 일제 때부터 부른 이름)하면 사방 산으로 꽁꽁 묶여 있어 옛날에는 알아주는 궁벽진 한촌이었다. 그 땐 큰 맘 먹고 콧바람이라도 쐬이려면 밤재를 넘어 영월까지 대충 80여 리, 성마령 넘어 정선까지도 80리, 제일 가까운 평창읍내가 30리다. 미창에 장이 서지 않던 시절 평창에서 장 구경하다 사돈이라도 만나 국밥에 탁주라도 한 잔 걸치고 나면 해거름에 찌든 간 고등어 한 손 들고 삽짝문 들어서기 바쁘다. 이제는 평창, 정선으로 멧둔재, 비행기재 터널이 뚫렸건만 아직도 영월로 이어진 밤재는 구불구불이다. 이러한 두메에 알려지지 않은 성안산이 있다. 성안산의 봉우리들은 누대처럼 생겼으며, 봉과 봉을 잇는 능선은 흡사 인공으로 축성한 듯한 자연성곽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형세가 안말 마을을 감싸고 있다고 하여 이름이 생겼으나, 주위의 큰 산인 삼방산(979.7m)이 있어 근동에서는 성안산도 싸잡아 삼방산이라 했다가 안말 산당골에 영화 ‘웰컴투 동막골’ 세트장이 들어서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문제는 밤치를 약 3.8km 남겨둔 지점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등로에 쓰러져 있는 나무를 위로 넘어서면서 왼손으로 잡은 가지가 힘없이 부러지네요. 그 바람에 착지가 빨라 몸이 왼쪽으로 쏠렸습니다. 좌측 무릎 바로 아래 오금쪽으로 인대가 늘어난것 같습니다. 밤치까지 내려가는게 나은지 여기서 쉬고, 아침에 보다 일찍 출발해야 하는지 고심하다가 진행했는데 어둠속에서 랜턴에 의지한 크레바스 지역이 위험천만하게 보였습니다.
여기까지 평속 2.4로 밤치까지 충분히 2.5로 올릴 수 있었는데 2.3으로 떨어졌어요. 다음날에도 가볍게 갈 수 있었는데 땀은 땀대로 더 흘리고 속도도 안나고, 스틱에 더 많이 의지해 절뚝거리며 고생 많았습니다.
강원도탄광문화촌, 영월한옥협동조합이 있는 마차리가 특화마을협동조합으로 요즘 많이 변하고 있단 소식입니다. 게스트하우스가 있어 저렴한 가격에 묵을 수도 있답니다.
♤ 영월군 북면 마차리
1935년 영월탄광이 개광하면서 북면 마차리에 강원도 내에서 가장 먼저 탄광촌이 형성된다. 영월탄광이 개발되자 평양탄광에서 일하던 숙련노동자들이 투입됐다. 또 그뿐만 아니라 영월광업소의 인력 확보를 위해 중국 산동지역 출신의 중국인 광부 800명이 함께 투입됐다. 만주의 푸순탄광, 평양탄전, 일본 탄광 등에 일본인 기술자가 들어오면서 마차리는 국제탄광촌이 되었다. 조선인을 비롯해서, 일본인과 중국인 등 3개 민족이 함께 탄광 작업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영월광업소에서 생산한 석탄은 해방 이후 남한지역의 중요한 산업에너지원이 되었다. 1948년 북한이 남한지역에 대한 송전을 중단했을 때 그 위기를 구하고 나선 것이 바로 영월발전소였다. 북한은 남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하는데 대해 반대해왔는데, 남한이 단독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자 전력 송전을 중단한 것이다. 영월광업소와 영월화력발전소의 중요도만큼이나 탄광촌인 영월 마차리의 위상은 높았다. 1960~1970년대 3만 명까지 인구가 늘었다.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호황기로 영월 마차리 탄광촌의 호황기와 맞물려 있다. 마차리의 인구가 영월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마차리 탄광촌은 호황을 이루었다. 영월광업소 소재지인 마차리에는 대통령이 세 명이나 다녀갔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1980년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다녀갈 정도로 대통령의 관심을 받는 탄광촌이었다. 영월광업소는 영월화력발전소의 사용량 감소로 적자를 거듭하다, 1972년 9월 폐광되었다. 영월광업소를 재개발하도록 한 것은 석유파동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석탄증산이 필요해지던 1975년 영월광업소는 조광 운영체제로 재개발되었다. 조광 계약이 만료된 1980년 3월 이후부터는 대한석탄공사가 사외도급과 직영개발 체제로 나서면서 1990년 5월 폐광될 때까지 연평균 10만 톤의 석탄을 생산했다. “진부기생 배꼽엔 톱밥이 끼고, 마차기생 배꼽에는 탄가루가 낀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마차리는 탄광촌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마차리가 탄광촌으로 명성을 얻을 무렵에는 고급 술집도 많이 들어섰다. 당시 영월지역의 술집에서는 손님 중에서도 영월광업소 직원을 으뜸으로 쳤다. 그 다음 순서가 영월화력발전소와 대한중석 순이었으니 영월광업소가 있는 마차리 탄광촌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지맥길은 여기서 좌틀하여 내려서는데, 성안산 이후 봉우리 몇개를 지나는 함몰지역이다. 산이 아프게 찢어져 크레바스가 형성되어져 있다. 가이드 안전로프가 쳐져 있지만 위험지역으로 조심조심 통과해야 한다.
밤치에 다왔습니다. 함몰지역을 벗어나 643.3m봉에서 밤치로 가파르게 내려섭니다. 성안산을 지나온 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밤치에 도착하여 앞뒤로 구부러지는 도로를 150m가량 내려가 보았지만 약간 아래로 인가의 불빛만 보이고 물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주차장 끝쪽에 폴리스라인이 쳐져있고 그 뒤 풀숲 나무 주위로 잡초가 제거되어 있네요. 먼일 있었을까? 위로 올라가 예전 감자떡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던 앞쪽으로 노숙을 준비합니다. 춘추잠바를 입고, 바지를 하나 더 입고, 발은 새 양말로 갈아신고 그 위에 비닐을 덧씌워 보온하고, 은박매트로 감싸고 03:30분쯤 일어나니 은박매트 표면에 이슬이 맺혀 있네요. 밤재터널이 뚫려 머무는 동안 넘어다니는 차를 한 대도 볼 수 없었습니다.
♤ 밤치/ 밤재/ 율치/ 413번 지방도로/ 노면주차장, 간이화장실
밤치재는 평창군 미탄면과 영월군 북면 마차리를 잇는 경계로 413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며 아래로 터널이 뚫려있다. 율치에는 궁중이나 관아에서 관(棺)으로 쓰여지던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을 보호하기 위한 황장금표비가 있었다. 황장금표비는 무릉도원면 두산리 황장골과 법흥리에 남아 있다. 황장목은 석탄, 오미자, 복령(伏令) 등과 함께 조선 시대에는 영월의 특산물이었다. 『여지도서』와 영월부읍지에는 율치산으로 나온다. 군에서 북서쪽으로 30리에 있고 황장금표가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접해있는 평창군에서도 사료에 기록이 남아 있다. 평창읍지에는 군의 동쪽으로 30리에 있는 곳으로 기재되어 있다. 『조선지도』에 율치가 표시되어 있으나 위치가 영월 경계에서 실제보다 멀게 표시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는 밤치재라고도 부르며 미탄면 율치리에 위치한다고 쓰고 있다. 『여지도』, 『대동여지도』, 『동여도』에도 율치가 표시되어 있다. 성안산 산행들머리 밤치재는 옛날 아름드리 밤나무가 많았으므로 율치/밤치라는 지명이 생겼다. 율치리 혹은 밤고개 마을이라는 지명이 이 고개에서 유래함을 알 수 있다. 일제 때는 석탄이 다량 생산되어 이 재를 넘었다. 포장된 지는 지금부터 약 19년쯤 된다.
- 한때 길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정자와 먹거리 포장마차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주차장, 화장실 외에 아무것도 없다. 화장실 여닫이문에 예전 포장마차 핸펀 번호가 적혀있는데, 심부름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 영월전투(51. 1. 26, 영월 북면 마차리) 심일(沈鎰) 소위
심일 소위는 제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으로 1950년 6월 25일 당시 춘천지구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의 SU-76 자주포를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하여 육탄공격으로 3대의 북한군 자주포를 파괴하는 공을 세웠다. 열세한 무기인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적의 포로 돌진 하고 거두운 전공이었다.심일 소위는 이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9호)을 받았다. 심일은 1923년 6월 5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2년을 마치고 육사 제5기로 입교하여 1949년 5월 소위로 임관되었다. 춘천전투 이후 그의 탁월한 전투 능력은 충북 음성지역전투, 경북 영천 304고지전투 등에서도 발휘되었다. 그러나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강원도 영월지역전투에서 1951년 1월 26일 정찰임무를 수행하다 적의 총격으로 28세 나이로 산화하였다. 심일은 위관급 장교로는 최초로1957년 9월 17일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심일 소위는 제6사단 7연대 대전차포중대 2소대장으로 38선 남쪽 4㎞ 지점인 소양강 저수지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강에서 춘천에 이르는 길목 곰나루터에 2문의 57㎜ 대전차포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주저항선인 춘천 정면의 소양강 진지를 방어하고 서울 방향 진출하는 적을 저지하는 주요 요충지가 된다. 소대장인 심일 소위는 적 전차가 출현하자 500m 전방에서 1950년 6월 25일 07시경 2문의 57㎜ 대전차포로 앞서고 있는 적의 전차에 모두 명중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적 전차는 남진을 끄덕 없이 계속하였다. 이에 심 소위는 춘천 북쪽 4㎞ 지점인 옥산포로 어쩔수 없이 포를 거두고 철수하였다. 적 전차가 옥산포로 14시경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적전차가 100m 전방까지 접근하자 심소위는 사격명령을 내렸다. 앞서처럼 2발이 선두 전차에 명중되었으나 적의 전차는 요지부동이었다. 적 전차를 격파해야 하는 임무를 띤 대전차포 소대장으로서 심일 소위는 육탄공격으로 적 전차를 측면에서 가격하는 것만이 전차를 부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사격지휘를 그는 선임하사에게 넘기고, 5명의 특공조와 함께 전차가 지나는 길목에 매복하였다. 오직 화염병과 폭약을 가지고 적 전차를 파괴하겠다는 것이었다. 심 소위는 적 전차가 출현하자 첫번째 전차는 통과시키고, 두번째 전차 포탑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수류탄과 화염병을 전차 안으로 투척한 후 다시 첫번째 전차로 향하여 같은 방법으로 습격하였다. 순식간에 2대의 전차가 화염에 휩싸이자 전차병들은 전차에서 내려 도망하려 했으나 매복한 특공조에게 모두 사살되었다. 선두를 따르던 전차 8대는 전차가 화염에 휩싸이자 북쪽으로 방향으로 바꾸어 도주하였다. 이같은 심일 특공조의 활약으로 북한군 제2군단의 전차를 앞세워 춘천을 공격하려던 계획은 그 기세가 꺾였다. 그리고 아군 제6사단이 2일간이나 춘천을 방어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북한군의 남침 이래 이러한 전과는 아군의 최초의 전과였다. 당시 연대장과 참모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말문이 막혀 한참동안 숙연했다고 한다. 당시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심 소위가 육탄공격으로 전차 2대를 파괴한 사실은 6·25전쟁이 발발한지 몇 시간이 안되지만 이것이 처음일 것이며, 우리 장병들은 그때부터 전차를 파괴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영웅적인 심일 소위의 행동은 북한군의 남진을 개전 초기 지연시켜 6·25전쟁의 흐름이 달라지도록 하였다. 전군에 전파된 특공대의 자주포를 격파 전공은 아군이 적 전차와 자주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데도 한 역할을 하였다.
♤ 영월 중동면 녹전전투
6·25전쟁 당시 '영월 녹전전투'의 영웅인 고(故) 김해수 경감, 녹전전투는 김 경감을 포함한 24명의 경찰관이 전사하며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경찰대 이윤정 교수는 2021. 6. 23일 영월 녹전전투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연재물을 경찰 내부망에 게시하며 최초로 발굴한 김해수 경감의 사진을 공개했다.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난 김 경감은 1948년 경찰전문학교 경찰간부후보생 3기로 입교했다. 이 교수는 경찰전문학교(현 경찰인재개발원의 전신) 졸업앨범에 수록된 김 경감의 실제 사진을 찾아냈다. 영월 녹전전투는 1950년 7월1일 강원도비상경비사령부가 북한군의 대공세로 후퇴하던 중에 발생했다. 당시 치안국(경찰청의 전신)은 '화력발전소(10만㎾ 규모), 상동 광산이 있는 산업중추지대 영월을 반드시 사수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렸고 영월지구 전투부대는 치열한 방어전에 나섰다. 당시 김해수 경감은 전투경찰대 제8대대 제1중대장이었다. 그가 지휘한 47명의 결사대는 7월 8일 중동면 녹전리 송현고개를 넘어 북한군과 마주쳤다. 실탄이 소진되며 북한군의 포위 공격이 시작됐지만 결사 항전했고 북한군 7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정부는 2016년 김해수 경감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2018년 7월 김해수 경감을 '이달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 강원경찰청은 매년 7월8일 김 경감과 영월 녹전지구전투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추념제전을 열고 있다. 이윤정 교수는 “6·25전쟁사의 대부분이 국군을 중심으로 기록된 현실에서 경찰 전사(戰史)의 중요한 사료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 박달재
영월군 북면 마차리 학전동 감자골과 평창군 미탄면 한탄리 물골 재치마을을 잇는 돌무더기가 있는 뚜렷한 고개마루이다. 좌측 아래로 재치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우사가 있는지 소울음 소리도 올라온다.
♤ 십자봉(634.2m)/ 이군삼면봉(영월군 북면, 미탄면 → 영월읍), 완전 영월군으로 들어섭니다.
남쪽 절벽 아래로 감자골이 시원스레 펼쳐지는 묘처럼 봉긋한 봉우리이다. 정상에서 능선이 열십자로 뻗어있어 십자봉이라 한다. 영월군 북면과 평창군 미탄면 한탄리의 군계이자 면계를 따르던 지맥길이 평창군에서 완전히 벗어나 온전히 영월군으로 진입하며, 이후 영월군 북면과 영월읍의 경계를 따라 남하한다. 지역 산꾼들이 미탄면 한탄리 재치산 아래 재치마을에서 물골로 올라 박달재에서 십자봉에 이르고 붉은봉(724.8m), 고마루, 재치산(750.9m)으로 원점회귀산행을 하는 석회암지대 등산 루트이다. 지맥길은 십자봉에서 쑥박재로 우틀하고, 좌측으로 가는 능선은 붉은봉(724.8m)을 지나 좌측으로 재치산을 떨구고 동강의 진탄나루까지 가는 단맥이기도 하다.
♤ 쑥밭재(615m)
우측으로 영월군 북면 학전이 갈림길이다. 『조선지지』자료에 따르면 당시 북면 마차리의 소지명은 밤치, 학전, 미자골, 느다리골, 마차, 절골, 율봉, 솔치, 어라리, 벌마차, 장구목, 가마골, 빈미재, 분덕재, 접산, 빈미산, 참물기가 있다.
- 두모치 내려서기 1.8km전에 동강을 잠깐 바라볼 수 있는 접산전망대라는 곳이 있던데 그냥 지나쳤네요.
카르스트지형 돌리네, 석회동굴, 포노르, 카렌, 우빌라 등을 설명하는 안내판입니다.
♤ 두모치/ 마차리 임도/ 접산임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 윤지교와 영월읍 거운리 절운재를 잇는 양회임도이다. 여기서 접산까지 갈짓자 오름길 0.3km인데 한까끄막 하는 곳이다.
- 여기서 구간을 끊고 우측 임도를 따라 윤지교로 내려가면 도상거리 3.2, 실거리 4.2km이다.
이런이런 자료를 정리하고도 실수를 했네요. 300m를 올라서서 접산은 좌측인데 제가 이용한 트랙이 우측으로 가길래 알바했나 했더니 삼각점봉엘 다녀온 거였군요. ㅜㅜ
♤ 825.3m봉/ 삼각점봉
지맥길은 좌틀이지만 우측 200m 떨어진 곳에 삼각점봉을 다녀온다.
- 4등삼각점 평창 474가 있다.
접산 정상은 밋밋한 잡목숲이고 줄딸기밭이라 반바지는 발목이 성치않을것 같다. 올라선 곳에 노송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 접산(接山, 835.3m)/ 겹산
접산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문천리와 북면 마차리의 경계에 솟은 산이다. 평창 청옥산(1,256m)에서 영월읍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 상에 있다. 동쪽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맑다는 동강을 끼고 있고 사방은 손바닥만한 평지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첩첩산중이다. 영월읍 북쪽에 남북으로 길게 흘러내리는 접산은 석회암지대 특유의 석회석 침식에 의한 돌리네(doline) 현상으로 땅이 꺼지면서 주능선을 중심으로 몇 겹의 산줄기가 겹쳐있어 인근에서는 겹산이라고도 부른다. 겹친다고 할 때의 이 겹산이 비슷한 발음의 접산으로 한자화한 것으로 보인다. 서쪽 마치리에서 올려다보면 펑퍼짐한 것이 마치 봉분처럼 생겼다 해서 정상을 묘봉 또는 요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산의 서쪽에 석회암을 채굴하는 탄광이 있으며 중턱에는 다수의 돌리네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접산에 있는 문암사에서는 매년 사월초팔일에 호환(虎患)을 막기 위한 제사를 지낸다. 1935년 광업소를 열 때 호랑이가 나타나서 탄을 캐던 광부를 해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 나무 이정목이 있는 평평한 봉우리이다.
♤ 빌밀재(795m)
첫번째 풍력발전기 팔랑개비로 올라서는 탄광문화촌(3.3km) 갈림길 이정표 지점이다. 우틀하여 앞쪽에 보이는 첫번째 팔랑개비로 올라서서 양회임도를 따르면 된다.
예전 고랭지채소밭에 접산풍력발전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풍력발전소에서 동쪽으로 동강변의 백운산이 조망된다. 풍력발전단지를 지나면서 이 주변의 산들을 만끽한다. 동쪽은 두위, 죽렴, 노목지맥이요, 서쪽은 백덕지맥이다. 남쪽은 영월지맥이 시작된다. 백두대간에서 서쪽으로 뻗어나오는 산들을 모두 보여준다.
- 풍력발전기를 수리중인 차량을 만나 이 근처에 물 구할 곳이 있는지 물어보니, 없다면서도 가지고 있는 시원한 물 500cc를 건네주시네요. 흐마~ 고마운거...
지맥길은 마지막 풍력발전기 우측 절개지 수풀로 내려선다. 물론 직진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우회해도 된다. 선답자들 트랙이 접산을 지나 임도로 내려오면서 제각각 상이하다. 폐목 집하장이 길을 막아서 우회하느라 그렇게 된 모양이다. 이후 분덕재까지 네개의 왕만두와 찐빵을 지나는데 모두 힘과 땀을 쏟게 만든다.
영월읍 영흥리 장릉 옆에 있는 능말 보덕사를 영월군 북면 마차5리에 있는 덕안사로 착각하고 아래 포스팅을 했습니다.^^
♤ 보덕사(報德寺)/ 지방 문화재자료 23호
능말의 북쪽 골짜기이다. 보덕사와 금몽암이 있어서 절골이라 한다. 능말 절골에 있는 절이다. 신라 文武王 8년(668)에 의상조사(義相祖師)가 창건하고 그 후 1161년 설허선사(雪虛禪師)와 원경국사(元敬國師)가 극락보전, 사성전, 고법당, 침운루 등을 축조하였다. 그 후 영조 2년(1726)에 보덕사로 고쳤으며 6.25때는 강원도 경찰학교로 이용되었는데 이 때 소실된 것이 많았다. 석탑과 탱화가 있었으나 1993년에 도난 당했다.
무인항공유도안내철탑 안테나봉에서 내려서는 곳으로, 주왕지맥 합수점에서 바라보면 봉래산 뒤쪽이 송이골이다.
♤ 영흥리 송이골재
영월군 북면 마차리와 영월읍 송이골을 잇는 송이골재이다. 좌측으로 송이골계곡이다. 골안을 지나서 소나무가 울창한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송이버섯이 많이 나며 이곳을 지나 깊은 안쪽으로 안송이골이라 한다.
- 반바지님 산패가 있고 그 옆에 고사목이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한때는 국보급소나무라 했다는데.... 그 국보급 소나무에 마차시내방향이라고 이정표가 박혀 있다.
나무 아래도 아무 소용없는 한동안 시원한 소나기가 거침없이 쏟아집니다. 그래 잠시라도 이걸 원했던 거야 어푸어푸~ 소나기 샤워~ 머리도 비비고, 세수도 하고... 몸에 땀냄새가 가시니 정말 좋습니다. 샴푸만 있었으면 딱인데... 아쉽당구리... ㅋ
상단부 묘목지대를 지나 사진상의 우측 655m봉 정상에 산패를 만나면 90도 우틀해서 내려서야 합니다. 직진으로 길이 좋아 알바하기 쉬운 곳입니다.
♤ 655m봉/ 삼읍면리봉(영월군 북면 마차리, 삼흥리 → 영흥리)
우측은 영월군 북면 마차리이고, 지맥의 좌측이 영월읍 삼흥리에서 영흥리에 닿는 곳이다.
- 4등삼각점 영월 424가 있다.
분덕재로 밭 옆으로 내려서다 주욱~ 미끄럼 한번 타고... 비에 쫄딱 맞은 모습으로 분덕재에서 중탈을 고심하다 택시를 부르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8km 못 되게 남겨두었는데 시내구간이 3km는 될 것이고, 5km를 가지못해 영월에서 하룻밤 더 유숙한다는게 못 마땅했고, 무엇보다 아끼고 아껴서 남겨온 물이 1.35리터가 있었습니다. 시간과 거리를 따져보고 막차시간까지는 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윗도리를 벗어 물을 짜내고 다시 출발합니다.
♤ 분덕재(分德峙, 472m)/ 분덕치
영월군 북면 마차리 길골 분덕이 마을과 영월읍 영흥리 속골을 연결하는 2차선 도로이다. 마차탄광에서 영월 화력발전소까지 삭도를 이용하여 케이블카(솔개바가지)로 무연탄을 수송하였는데, 그 거리는 12km나 되었고 이를 떠받치는 철탑은 48개나 되었다. 삭도는 우목골 입구와 분덕치, 속골입구, 덕포리 역앞의 축강둑에 있었다. 「영월부읍지」에 『分德峙在付北距十里』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마차광업소가 한창 호황을 누릴 때는 영월에서 물건을 사 삭도의 케이블카로 물건을 운반했는데 이는 영월에서만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케이블카는 1943년 영월 화력 발전소 건설 때 만들어져서 1973년 말에 없어졌다. 케이블카는 높은 하늘에 떠있는 솔개(새매)같다고 해서 솔개바가지라고 했다. 2020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와 마차리를 잇는 군도 9호선 선형개량공사가 2024년 완공을 목표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총사업비 406억여원 규모의 이번 사업은 길이 990m 분덕재 터널 설치 등 총연장 1.98㎞의 선형개량공사이다. 분덕재는 급경사, 급회전 등으로 겨울철 안전사고 위험이 큰 구간이다.
- 고개 좌우가 절개지이므로 좌측으로 밭둑을 따라 내려와 건너편 임도를 따라 지맥길에 접속한다. 커다란 표지석과 쉼터 의자가 있다.
천문대가 있는 봉래산이 바라다 보인다.
♤ 장릉(莊陵)갈림길(639m) 삼거리/ 면계에서 영월읍 안쪽으로 진입
십자봉에서부터 걸어온 영월군 북면과 영월읍의 면계는 장릉쪽으로 보내고, 지맥길은 여기서부터 온전하게 영월읍으로 진입한다.
- 장릉(1.85km) 이정목이 있다.
조선 시대 예법과 절차 등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대부분 왕릉이 한양도성으로부터 10리에서 100리 사이에 마련되게 돼 있지만, 장릉만은 예외입니다. 장릉은 조선왕릉 가운데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왕릉이죠.
♤ 장릉(莊陵)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왕릉으로 이전에는 노산군(魯山君) 묘(墓)로 불려왔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端宗, 1441∼1457)이 추존복위됨에 따라 노산군 묘에서 장릉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왕조 재위 임금 중에서는 유일하게 수도권이 아닌 곳에 있는 능이다. 이는 숙부인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단종이 영월에서 죽게 되고 시신이 영월 동강에 버려지면서 지역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가 밤중에 몰래 아들들을 데리고 가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 산에 올랐다. 그러나 급하게 일어난 일인데다가 날씨조차도 눈보라가 쳐서 맨 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산 속에 앉아있던 노루 한 마리가 일행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는데 노루가 앉았던 그 자리에는 눈이 녹아서 맨 땅이 드러나 있었다. 이를 보고 엄흥도 일행은 천우신조라 여겨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매장한 후, 식솔을 거느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후에 단종이 정식으로 복권되어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지관을 조정에서 내려보냈는데 그들이 살펴보니 단종이 묻힌 그 자리가 이미 천하의 명당이었기에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고쳤다고 한다. 당시 서슬퍼런 세조의 눈을 피해 암장했던 만큼 단종의 무덤은 아무도 그 소재지를 몰랐다. 그 후 1541년 중종 때, 노산군의 무덤을 찾으라는 명을 받고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영월군수 박충원이 처음 발견하여 묘소를 정비하게 되었고, 1580년 주변에 비석들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이 당시까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상태여서 묘(墓)라는 칭호를 유지해왔다가 1698년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킴에 따라 무덤도 능으로 격상되고 장릉이라 이름하였다. 이때, 단종의 시신을 모셨던 엄흥도에게는 공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왕릉 공사를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였던 것을 감안한 셈이다.
단종 복위를 꿈꾸던 사육신(死六臣) 중에 한 사람 매죽헌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이 거열형을 받고 사형장(지금의 용산 새남터앞 모래 백사장, 한강철교와 인도교 사이)으로 끌려가며 읊은 시에 이 봉래산이 나옵니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 영월 봉래산(蓬萊山, 802.6m) 별마로천문대
별마로 천문대는 강원도 영월읍 영흥리 봉래산 정상에 건설된 국내 최대 규모의 공립 시민 천문대이다. 별마로란 별(star), 마루(정상을 뜻하는 마루), 로(고요할 로)의 합성어로 "별을 보는 고요한 정상" 이라는 뜻이다. 연간 관측일수가 196일로 우리나라 평균 116일보다 많아 괜찮은 관측 여건을 가지고 있다. 2001년 10월 13일에 개관하였다.
청령포는 한국관광공사가 2021년 선정한 '여름 비대면 안심관광지'에도 올랐다네요.
♤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 명승 제50호
청령포는 3면이 서강에 둘러싸여 있는 곳으로, 나머지 한쪽은 절벽이 가로막힌 섬과 같은 곳이다. 배를 타야만 출입할 수 있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의 남한강 상류에 있는 명승지로 청령포는 조선 단종의 유배지이다. 단종은 세조 찬위 후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2008. 12. 26일 대한민국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영월 청령포는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서쪽은 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으로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단종이 머물렀던 단종어소(御所)와 금표비, 와송(臥松)과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 청령포 노산대는 장릉과 사릉의 관계처럼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 있는 국망봉과 맞잡이다.
♤ 발산(鉢山, 674.4m)/ 영월읍의 진산/ 4등삼각점
마모되어 쉽게 도엽명을 알아볼 수 없는 4등삼각점이 지키고 있는 곳이 실질적인 발산이다. 발산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영월의 진산(鎭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군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평창 두만산(斗滿山) 남쪽 기슭에서 뻗어와서 읍의 으뜸이 되는 줄기가 된다. 장릉(莊陵)의 외청룡(外靑龍)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릉 · 영모전 · 보덕사 · 금몽암(禁夢庵) 등 많은 유적을 품에 안고 있으며, 정상의 조망이 매우 뛰어나 동강과 남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발산의 삼각점. 발산 정상석은 삼각점이 있는 674.4m봉에 세워져 있지 않고 다음 봉우리인 676.1m 봉우리에 세워져 있다. 한눈에 영월 읍내가 내려다 보이는 조망터여서 인가보다.
♤ 발산 정상석(676.1m)/ 주왕지맥 마지막 봉우리
영월군 영월읍 소재 발산은 시루산(685m)의 남쪽 능선 상에 위치한 산으로 남서쪽 산자락에는 비운의 조선왕인 단종이 잠든 장릉을 품고 있다. 발본산이라고도 불리는 발산은 영월읍에서 북쪽 방향으로 올려다보면 산의 모양이 마치 삼각형처럼 생겨 일명 삼각산이라고도 하며, 영월읍의 진산으로서 동남쪽으로는 별마로천문대가 있는 봉래산(799m)이 바로 코앞이고 동남쪽으로는 닭발을 닮았다는 계족산(890m)의 능선이 구불구불하다. 발산 정상석은 조금 더 가서 677.4m봉에 있다. 정상의 조망이 뛰어나 영월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두위지맥 끝머리와 마주보는 합수점도 내려다 보인다. 동쪽으로 두위지맥이 동강으로 내려서는 계족산 줄기가 보이고, 남으로는 영월읍이 한 눈에 들어오고, 굽이치는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어 남한강이 시작되고, 그 건너 태화산과 오른쪽으로 이어진 국지산이 병풍처럼 주능선을 펼치고, 그너머 소백산 연릉이 하늘금을 그리고 있다.
발산 정상은 영월읍의 진산답게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좋아 눈이 즐겁습니다.
주왕지맥을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왔군요. 여기서 합수점까지 마무리 해야할 누룽지가 꽤 됩니다. 자그마치 두시간 반....
발산 쪽에서 내려서면 만나는 좌우로 삼호아파트와 영모전 방향으로 하산하는 이정표의 중간 지점으로 능선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초입에는 길이 있는듯 하다가 보이지 않네요. 직진으로 희미한 임도길을 끝까지 따랐는데 우틀하여 읍사무소로 내려서는 경우가 많더군요.
♤ 삼거리 갈림길
영모전은 1517년(중종 12)에 단종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 충신 추익한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산머루를 진상하는 영정이 모셔져 있다. 지맥길은 우틀하여 도로를 따르지만 직진하여 합수점을 향해 우측 영월읍내 마을로 내려선다.
- 마지막 구간 영월공고 근처에서는 도로를 빙 돌아 산줄기가 이어지는데, 곧바로 직진하여 도로를 따라 합수점으로 이동한다.
판독불가 삼각점 두개를 지나고 오로지 직진하여 마을어귀 텃밭으로 내려서고, 이후 영월경찰서를 지나 서부시장쪽으로 시내를 가로지른다.
우측에 보이는 시외버스터미널을 지나고, 세무서사거리를 건너 직진, 은행나무를 향하여 큰 도로따라 계속 직진한다.
♤ 영월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76호
천연기념물 제76호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영월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1,000∼1,2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29m, 둘레 14.8m이다. 처음에는 대정사(對井寺)라는 절 앞에 서 있었으나 절이 사라지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나무의 원래 줄기는 죽어 없어지고 지금의 줄기는 새싹이 돋아 자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마을의 정자나무 구실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나무 속에 신통한 뱀이 살고 있기 때문에 동물이나 곤충이 접근하지 못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정성을 들여 빌면 자식을 낳는다는 전설도 있다. 영월의 은행나무는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종교적·문화적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마지막 합수점으로 가는 길입니다.
천연기념물 은행나무에 이르러 나무데크 계단으로 내려서고, 영월실내체육관 건물을 바라보며 좌틀하여 정문 주차장 방면으로 진행하고, 영월골프연습장 정문에서 도로를 건너 데크계단으로 강변에 내려선다. 우틀하여 도로 따라 좌측 갈대밭 사이로 들어서 약 200m 걸어간다.
걷기가 불편하여 골프장 앞에서 콜택시를 불러 터미널로 이동합니다.
♤ 합수점
좌측 철교 밑으로 영월읍 하송리 동강(남한강)과 우측으로 서강(평창강)이 만나는 합수점이다. 동강 강너편으로 계족산(890m)에서 내려선 두위지맥 끝머리와 마주한다. 주왕지맥은 질러왔는데 빙 둘러온 영월지맥의 태화산도 마중한다.
첫댓글 더위에 주왕지맥을 완성을 하셨네요 대단하십니다 축하드립니다 두발바닥을 보니 고생이 묻어납니다 주왕지맥 동강서강 감회가 지금도 느껴집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세르파선배님!
띠지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나뭇가지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띠지 두개 다시 잘 걸어두었습니다.
면양말인데도 물이 젖은 상태로 오래 걸으니 살결이 쓸리네요.
영월터미널부터 신발은 봉다리에 넣어 들고서 맨발로 집까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왕지맥 마무리 수고 하셨네요
저는 언제 마무리 할지 아직 모르고
당일 산행 위주로 누군가 하고 약속
때문에 아마도 남은 구간 2구간
마무리 할거 같아요 혼산 무박 못해서
어디서 1구간 마무리 하는게 날까요?
밤치??정도면 적당 할까요 일요일
진행 해야 해서 담날 출근 이라
막차 타고 서울 와야 해서요 ㅎㅎ
산타는영혼님!
피늪재까지 가신걸로 아는데...
청옥산 오름에 연거푸 띠지를 보고는, 진행하셨는가 하고 의아했습니다.
밤재가 젤 나을성 싶은데 상경하는 막차편에 대기가 애로워 출발을 서둘러야 하겠어요.^^
전에 청옥산 진행 한적 있어요
주왕지맥 상관 없이 잠시 스처간
기억이 나긴 하네요 예전에 ㅎㅎ
밤재가 가장 적당 할거 같긴 한거
같아 저도 상황에 따라 고려중
이긴 하네요
먼저 미탄에서 장평이나 평창읍으로 나가는 버스편 알아두시고,
자정에 피늪재에서 출발하신다면 벽파령 쯤에서 날이 밝겠네요.
육백마지기에서 물을 뱃속에 1리터쯤 채우고, 2리터만 짊어지고 출발하심 밤재까지 가겠더군요.
밤재에서 미탄까지 택시를 이용하시거나,
미탄에서 영월로 출발하는 17:15분 차편을 이용하여 영월로 가서,
19:05분 동서울로 올라오심 젤 이상적 일것 같습니다.
미탄정류소에 다시한번 영월로 밤치 넘어가는 차편 확인하십시요.
산타는 영혼님은 바리바리 챙긴 배낭이 무거우니
우선 먹거리를 줄여 배낭무게를 줄이시는게 첫번째 관건입니다.^^
텐트도 필요없고, 전지가위도 필요없습디다. 오로지 물과 빵 정도로만....
저도 처음엔 한꺼번에 땡땡하게 배를 채웠는데 장거리 요령은,,,
배가 고프지 않도록 참다가 신호가 올성 싶으면 가볍게 먹어주는 게 요령이더군요.^^
자세한 설명 까지 감사 드립니다 꾸벅
일단은 식수1리터 음료수1리터 빵 기타
등등 간식 하고 준비 하고요 청옥산 잠시
내려와 식수랑 챙기고 당일 일요일
오전 첫차 서울 출발 5시35분 차로
도착 해서 천지당 출발 진행 하려고요
상경은 밤재로 도착 목표로 택시로
이동해서 서울 올라 오는 당일 코스
계획중 입니다
어ㅡㅡ라?
다른 플러스 인계죠?
혹시나 하여 지난날 트랙을 검색 해 보았내요ㅡㅡㅡ
분명 알바가 없었는디ㅡㅡㅡㅡㅡ
한여름 지맥길 줄감하고 갑니다ㅡㅡㅡㅡ
아, 플러스형님!
따로 주왕산에서 마항치로 가리왕산 건너가신적 없으시죠.
그렇다면 플러스라는 닉넴이 또 있나봅니다.^^
산너머방장님 오산종주 산행기를 분석해보니...
오름길에서 살살 쉬면서 천천히 오르고 내림길이나 평지길에서 두배 이상 내빼는게 장거리 요령이더군요.
내려서는 길이 너무 좋아 속도를 낸나고 내뺐는데 올라오면서 보니 잠깐 사이에 왤케 많이 갔는지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왕지맥 졸업을 축하합니다.
산행 후기 꼼꼼히 봤더니 2시간 넘게 걸렸네요. ^^
관광으로 두세번 지나친 백지 지역인데 지리, 역사를 아우른 자세한 후기로 백지 지역을 지리와 향토사로 채워 주었습니다.
부르튼 발을 보니 우중 장거리 산행의 고단함이 느껴지고, 밤재 사건 현장 옆에서 태연한 비박은 담대함이 보여집니다.
따라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것을 배웁니다.
봉화동천선배님!
눈치 채셨군요.^^ 원래는 사각정자가 있는 걸로 알고 갔뎄습니다.
그 나무 아래가 딱 비박지인데... 육감적으로 와닿는데 찜찜해서 칠 수가 있어야 말이죠.ㅋ
모기장텐트가 위를 묶어놓고 네 귀퉁이를 돌이나 신발로 밀쳐서 공간을 확보하는 지라 평지에서는 펼칠 방법이 없었습니다.^^
모기소리가 들렸지만 귀마개로 귀를 틀어막고, 잤기 때문에 괜찮았습니다.
기온이 점차 내려가니 모기도 활동하지 못했으리라 보였구요.
모기기피제를 온몸에 뿌리고 잤습니다. 그 이상은 모기 회식을 시키는 수밖에는.... 손쓸 도리가 없었구요.
영월군은 박물관의 고장입니다.
박물관이 무려 30개는 넘는가 보더군요, 군청에 따로 박물관을 관리하는 부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코 워째 발이 저리되도록 걸으셨나요.
아무리 신발에 물이차도 그렇지 신발이나 양말에 문제가 있는건 아닌지 문제가 없는 거 같더라도 뭔가 변화를 시도해볼 필요가 있겠네요.
무덥고 우중에 주왕지맥 졸업 축하드리며 대단히 수고 하셨습니다.
부뜰운영자님!
산패하며 먼저 가신 산행기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밤재에 도착하기 전부터 졸업을 위해 신경써야 할 일이 있었는데
''자기 전에 aa에 연고 바르고, 출발전에 발바닥에 부직포 바르고,, 두가지였습니다.^^
양말을 한번 더 갈아신음 좋을까요, 아님 하나 더 덧신는게 좋을까요?^^
어쨌거나 졸업의 기쁨으로 모든 고통은 다시 리셋팅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어휴 이더운날씨에 58키로라니요....
진짜 수고많으셨습니다.
맨밑에 발사진 보니 영광이긴 하나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여름철 무리한 산행은 가급적 피하시기를 ....
여유로운 휴식 취하시고 빨리 회복하기를 기원해봅니다.
홧팅입니다.
넵, 부케님! 불나게 회복 중에 있습니다.
여름도 이제 한풀 꺾인것 같고 저는 소기의 목적을 이뤄냈습니다.
춘천에 있는 친구가 언제 오느냐며 난립니다.
그래서 도솔과 춘천 중에 어느 걸 먼저 어느 시기에 잡을지 고심 중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주왕을 멋지게 해내신것을 축하드립니다. 영월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발산 정상석이 있는 곳은 이제껏 산행을 보답해주는 것 같습니다. 장거리산행의 가장 큰 난제는 식수인데 아슬아슬합니다.
네, 상배선배님!
밤치 화장실 여닫이문에 전에 거기서 포장마차 하시던 분이
어디로 옮겼다며 그간 감사인사를 적어놨어요. 핸폰 번호와 함께 말이죠...
콜택시 심부름 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럴바에야 그 아저씨에게 심부름을 부탁하면 어떨까 싶더군요.^^
밤치에서 물을 구할 수 있다면 등짐도 훨씬 가볍고요. 밤치에서 물 보충이 요긴합니다.
배낭 벗어두고 우측 아래 인가로 내려갔다 오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만....
발산에서 조망, 끝내주더군요.
봉래산에서 날리는 페러글라이딩도 멋지구리 하구요.^^
영월읍 앞에 국지산에서 태화산으로 영월지맥이 지나가는데...
영월지맥 하며 바라보는 발산의 모습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주왕지맥 졸업 기념으로 받은 훈장이
보는 이에게는 아릿한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 어떤 명예보다 감동적인 선물이라 생각됩니다.
얼마나 산이 마음을 끌어당기면
인대가 늘어나는 것도 감수하면서 산을 품을까.
주왕산 고스락에서의 1시간여 알바도 기꺼이 감수하셨네요.
여러가지 곡절을 많이 만드셨습니다.
거침없이 퍼붓는 폭우를 즐기는 소나기샤워의 여유.
밤치에서의 노숙은 말 그대로 '자연'의 일부였습니다.
그런 고생 끝에 맞이한 발산에서의 황홀한 조망이여.
그런 조망 선물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퐁라라님의 산행기가 주는 가장 요긴한 정보는,
피늪재에 대한 마스터 정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퐁라라님이 품는 산속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희망합니다.
심술 많은 날씨 속에 고생하셨습니다. 즐감했습니다.
범산선배님!
후기를 써놓고도 혹여라고 더 보충할 것이 있는지,
후답자가 참고하기에 어렵게 설명한 부분은 없는지 자꾸 디다보게 됩니다.^^
밤치에서는 비를 피할 곳이 없는데 재수가 좋았고,
분덕치에서는 비도 맞고, 발바닥과 무릎으로 걷기 불편하여 하마트면 중탈을 결정할 뻔 했습니다.
분덕치에서 예보를 살펴보니 이후로 분명 비가 들었거든요.
아직 비가 안오는구나 안도하며 계속 가면서도 발산에서의 조망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날씨야 5분만 더 버텨주려무나,,, 기왕 여기까지 참았으니 발산에서 조망한번 보자꾸나..^^
이후 날씨는 점점점 더 좋아졌습니다.
아마 무릎을 다치지 않고 신나게 걸었다면 655m봉에서 맞은 소나기를 발산이나 내려서면서 맞았겠죠.
발산에서 조망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 모든게 다 하나님의 뜻이려니..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퐁라라님...
일단 주왕지맥 완성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아마도 중왕산에서의 알바는 누군가 시그널을
이동해서 걸어 놓았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게 만듭니다.
가끔 산행 하다보면 시그널이 엉뚱하게 걸려 있는
부분들이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트랙을 자주 확인하는 편입니다.
진행 하시다 소나기 만나면 좀 난감 하죠...
하지만 퐁라라님 께서는 시원한 소나기에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시며 격하게 반기시네요..
저도 더운 여름에는 소나기가 반갑기만 합니다. ㅎㅎ
헌데 산행기 에 문제가 생긴것일까요?
제가 늦게 확인해서 산행기가 저를 싫어 하는것일까요?
스마트폰으로 봐도 PC로 봐도 화면에 올려 놓으신
지도와 글은 잘 보이는데 사진이 하나도 안보이네요.
확인한번 해보심이 좋을듯 합니다. ^^
다류대장님!
사진을 꼭 두번 올리게 만들더라구요.
오류가 수정된 줄 알았는데 이번엔 좀 늦게 나타났네요.
사진을 더이상 올라가지 않을 때까지 올렸는데 작업 다시 할려면 오래 걸리겠는걸요. ㅋ
주왕산 띠지는 어느 분이 장난끼가 발동되어 그랬을까요.
상배성과 대구지맥 띠지는 지맥길로 옮겨두었습니다.
띠링띠링 하고 잘못 됐다고 알려주는 데도 "띠지가 보이는데 먼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고집을 피우고 확인하지 않은 제가 더 불찰이지요. 감사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주왕지맥을 마무리하셨네요.
주왕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상처뿐인 영광인가요?..
한줄기 마무리하면서 만감이 교차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영월읍내 모습을 보니 옛 생각에 젖어봅니다.
멋진 한줄기 마무리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어느것 하나 만만하고 쉬운 게 없습니다.^^ ㅋ
50km 이하로 내려가면 쉬운게 좀 있을려나요.
지맥을 함에 있어 선답자의 후기로,,,
사전에 물과 식당, 등의 정보를 알 수 있다면 보다 더 수월하게 마칠 수 있으리라 보여집니다.
절기에 따라 선택을 잘 해야 하고,
중간에 물이 있는 곳을 미리 알아야 물 무게를 줄일 수 있고,
식당이라도 있다면 짊어지는 먹거리 무게가 많이 줄을 듯 합니다.^^
갑자기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음 주엔 장마기간 처럼 비가 연속 될거라는 예보에 따라
25~27일 어디든지 가고자 했지만 일단 잠시 보류해야겠네요.
염려 덕분에 발바닥도 다 나았고,
왼쪽 무릎도 표나게 절뚝거리지 않고 2~3일 지나면 나을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한 발과 손을 위해 좀 쉬어가시면 좋갰습니다.
대길성님! 다 쉬었어요.
무릎만 한 3~4일치 남았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절뚝거리는게 표시나지 않습니다.^^
비 그치면 또 나설려고 운영자 산행기방에 계획 올려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