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와 르네 드 샤토브리앙(1768~1848)
샤토브리앙(Francois-Rene de Chateaubriand, 1768~1848)은 파란 많은 일생을 보냈다. 브르타뉴에서의 떠돌이 소년 시절,—아메리카 여행, 이어서 대혁명 중에는 런던에서의 빈궁한 생활,—제정 시대에는 프랑스에서의 문학적인 성공과 정치적인 반항,—왕정 복고 시대에는 대사와 장관이 되어 정치활동,—정통 왕조를 무너뜨린 1830년의 혁명 후에는 고매한 은퇴.—엄청난 자존심, 영원히 충족될 줄 모르는 상상력, 끊임없이 되살아 나는 우울은 그의 성격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고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의 주요 작품은 〈기독교 정수(精髓)〉(1802) 이다. 반(反)종교적 편견을 타파하고 사람들의 마음 속 밑바닥에 잠들어 있는 종교심을 회화적인 또는 감동적인 묘사로 깨우기 위해서 쓴 이 주요 작품은 동시에 시와 예술을 문학 속에 다시 가져다 주었으며, 작가들의 영감을 쇄신했다.—샤토브리앙의 다른 작품들은 위의 작품에 연결되거나 거기서 파생한다. 〈기독교 정수〉 속에 끼워져 있었던 아메리카 서사시의 단편(斷片)인 〈아탈라〉(1801)와 〈르네〉(1802)는 〈정수〉에 연결되고, 기독교적 경이(驚異)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쓴 〈순교자들〉(1809)은 〈정수〉에서 파생하고, 〈순교자들〉을 준비하는 데 쓰였던 여행기 〈파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역시 그렇다.—오직 〈무덤 너머서의 회상〉(1848~1850)만은 독립된 작품이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샤토브리앙에게 '마술사'라는 별명을 붙이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의 강력하고 시적인 상상력에 의해서,—대개의 경우 화려하고, 때로는 간결하고 힘찬, 그의 매우 다양한 문체의 하모니와 돋보임에 의해서, 동시대인들을 매혹했던 것이다. 샤토브리앙의 영향은 대단했다. 고티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고딕식 대성당을 재건하고, 닫혀 있던 대자연을 다시 열고, 근대적인 우울을 창조했다'라고. 이에 덧붙여, 그는 비평을 쇄신하고 외국 문학을 알리는 데 이바지했으며, 문학에 있어서의 목적은 아름다움을 표현함에 있다고 했다. 모든 낭만주의 작가들은,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19세기의 모든 작가들은 그의 영향을 받았다.
:::::::::::::::::::::::::::::::::::::::::::::::::::::::::::::::::::::::::::::::::::::::::::::::::::::::::::::::::::::::::::::::::::::::::::::::::::::::::::::::::::
프랑스와-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cois-Rene de Chateaubriand) 자작(子爵)은 1768년, 생-말로의 음침한 유태인 거리에서, 브르타뉴의 한 낡은 가문의 열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감시받는 이상으로 학대를 받으면서, 생-말로의 바닷가 길바닥에서 아무렇게나 자랐다. 그는 돌, 렌느, 디낭 등지에서 두서없는 공부를 했다. 이어서 커다란 숲과 음산한 늪으로 둘러싸여 있는, 콩부르(Combourg)의 아버지의 저택에 가서 살았다. 거기서 그는, 낮에는 황야(荒野)를 정처없이 쏘다니고, 저녁에는 어두컴컴하고 널따란 방에서 말 없는 양친 사이에 앉아서,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밤에는 지하도의 소음이 메아리치는 외딴 소탑(小塔)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반려자는 그의 누나 뤼실(Lucile)이었는데, 이는 흥분 잘하고 신경질적인 소녀로서, 젊어서 죽게 되었다. 이렇게 그 무뚝뚝한 아버지가 자아내는 공포 속에서, 그 공허한 생활에서 오는 권태 속에서, 그 균형을 잃은 누나의 애정 속에서, 동경과 몽상으로 가득 찬, 곧 세상 사람들을 매혹하게 될, 이 우울한 샤토브리앙은 형성되었다. 이러구러 그는 20세가 되었으나, 별로 아는 것도 없었는데, 먼 여행을 떠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슬기롭게도, 이 막연한 충동 대신에, 나바르 연대의 육군 소위 사령장을 얻어 주었다.
그리하여 이 기사(騎士)는 주둔 부대의 생활도 하고, 파리의 생활도 겪어 보고, 궁정에도 나가고, 임금님의 사냥에 황공한 마음으로 수행도 하고, 〈문예 연감(文藝年鑑)〉(Almanach des Muses)에 시를 써내기도 한다. 그러자 대혁명이 터졌다.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그의 연대도 해산되었으므로, 그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모험욕에 몸을 던진다. 그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서북 항로를 찾으러 간다고 공언하고, 사전의 연구도 없고 조사도 없고 준비도 없이, 관광객으로서 아메리카로 가는 배를 탄다.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몇 달을 보내고, 바닷가를 돌아다니고, 오지(奧地)에도 들어간다. 그가 이 미개의 웅대한 자연에 매혹되어 있었을 때, 루이 16세의 사망 소식이 우연히 그에게 들려 온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유럽으로 돌아와, 왕자(王子)들의 군대에 가담한다.
티옹빌의 포위전에서 부상하여 몸이 편찮은 그는 간신히 브뤼셀까지 걸어가 거기서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영국서 그는 무서운 빈궁과 지독한 굶주림을 겪는다(1793년). 그는 프랑스 어의 개인 교수와 번역으로 간소하게 살아가면서, 동시에, 용감하게도, 불완전한 자기의 교육을 다시 시작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한 누이의 죽음은 그를 다시 기독교도로 만든다. '나는 울었고 믿었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믿기 위해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종교가 그에게는 하나의 위안이 되는 감미로운 꿈처럼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하다. 종교도, 그의 눈에는 현실로 비친다는, 샤토브리앙의 모든 꿈들이 소유하는, 그의 눈에는 현실로 비친다는 특권에 참여할 테니까.
그는 믿게 되자마자, 무신앙과 싸울 준비를 하고, 〈기독교 정수(精髓)〉(Genie du Christianisme)를 계획한다. 그러는 동안 대혁명은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에 돌아와, 아메리카의 인상들이 담뿍 담겨져 있었던 방대한 원고에서 〈아탈라〉(Atala)(1801)의 삽화를 떼내어 간행했는데, 그 성공은 굉장했으며, 1802년에는 그의 〈정수〉를 출판했는데, 그것은 동시에 프랑스에는 하나의 걸작을, 당대의 사상에는 하나의 방향을 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로마 교황과 협약을 체결한 보나파르트가, 샤토브리앙이 취하는 것을 보기를 바라던 방향이었다. 보나파르트는 이 작가를 로마 대사관 일등 서기관에 임명하고, 이어서 발레〔스위스 연방의 한 주(州)〕주재공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앙기앵 공작(duc d'Enghien)〔1772~1804. 나폴레옹에 의해 총살 당했음〕의 죽음은, 예전에 루이 16세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샤토브리앙의 생활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당장 사표를 보낸다. 그리고 곧, 〈순교자들〉(Martyrs)의 구상이 되어 있었으므로, 근동(近東)을 향해 떠난다. 그는 그리스,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카르타고와 그라나다〔스페인 남부의 도시〕를 거쳐 귀국한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역사가의 역할에 관한 글을 〈메르퀴르〉 지(紙)에 실음으로써 나폴레옹의 비위를 거슬러, 이 때문에 신문은 발행 금지를 당한다.
그는 〈순교자들〉(1809)과 〈파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Itineraire de Paris a Jerusalem)(1811)을 출판한다. 그의 사촌형 아르망 드 샤토브리앙(Armand de Chateaubriand)을 살려 내기 위해 그가 온갖 힘을 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사촌형이 왕당파(王黨派)의 앞잡이로서 총살을 당하게 되자, 제정(帝政)은 그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연설문 하나를 썼는데, 나폴레옹은 그것을 그대로 공표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독재자에 의해서 삭제 또는 지적당한 구절을 한 줄도 고치기를 거부하고 박해를 기다렸으나 박해는 오지 않는다.
이 시기(1811년)에 샤토브리앙의 문학 생활이 끝나고, 바야흐로 그의 정치 생활이 시작되려고 한다. 대사, 장관, 논전가로서, 그는 자기 나름대로 왕정 복고에 봉사할 것이다. 왕권에 대해서 아첨하지 않고, 조신(朝臣)들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장관들에 대해서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손을 뻗기를 멸시하고, 권력을 잡는 사람들을 죽도록 미워하면서. 1830년〔7월 혁명〕 후, 그는 명예의 의무감에서 자기를 정통왕조(正統王朝)에 묶여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방계(傍系) 왕족을 멸시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그는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밖에 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정통 왕위 계승권의 원수를 갚아 줄 민주주의의 발전을 예언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슬기로운 위인답게, 고결한 태도로 만년을 보냈다. 그는 〈무덤 너머서의 회상〉(Memoires d'Outre-Tombe)을 쓰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죽은 뒤에야 나오게 되었다. 그의 충실한 여자 친구 레카미에 부인(Mme Recamier)은 그의 주위에, 그를 위해, 아베이-오-브와의 그 여자의 주택에, 가장 뛰어난 인사들을 모아 주고 있었다. 한 재원(才媛)의 배려로 선택된 이 사람들로부터 그는 그 비통한 위대함에 어울리는, 조심스럽고도 열렬한 숭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1848년에 죽었다. 그는 일찍부터, 생-말로 가까이, 바다를 바라보는, 그랑-베 섬의 바위 끝에 묻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일반적인 인류의 죽음 속에서마저도 격리되어, 그 장엄한 고독 속에서, 온 세상으로부터 보이는 곳에서, 처음 태어났을 때 자기를 흔들어 재워 주었던 그 똑같은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영원한 잠을 자고 싶었던 것이다.
샤토브리앙은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타고나기를 그러하고,—그가 격리와 속박 속에서 자라난 결과에서 그러하고,—또 끝으로 고의로 그렇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독한 영혼 속에는 거의 언제나 강렬한 개성이 있는 법이다. 샤토브리앙도 실제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지를 못한다. 우정에 있어서나, 연애에 있어서나, 그가 사랑하는 것은 그 자신이며, 부르봉 왕가(王家)에 대한 그의 애착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명예에 대해서 그가 갖고 있는 매우 강렬한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존심은 그의 마음의 근본이다. 관찰하는 경향도 거의 없고 또 그런 일에 능숙하지도 못한 그는, 남들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윤곽밖에 모르고 있었으나, 그 반면 자기 자신 속에는 똑바로 파고들어가, 자기의 감동과 욕망을 직접 포착하고 있었다. 그는 샤토브리앙 씨라는 단 한 사람에만 관심을 갖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서밖에는 인간의 정열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는 자신을 남과는 다른, 독특한, 따라서 탁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즉 저 기쁨들을, 저 고통들을, 저 욕망들을, 저 혐오들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파게(Faguet)의 이른바 '근대적인 서정(抒情)에 필요한 약간의 어리석음'을,—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만인의 흥미를 끈다는 확신, 그리고 그와 비슷한 것은 다른 사람 속에서는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었다는 확신을 아무도 그 이상으로는 가질 수 없으리라. 그의 염세주의도 같은 원천에서 유래한다. 즉 그는 어떠한 사람도 그렇게 피나는 듯한 고통을 느껴 보지 못한 상처 때문에, 어떠한 사람도 그렇게 울어 보지 못한 눈물을 흘리며 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불행, 그는 그것을 자기의 덧없는 몸 속에서밖에 느끼지 않으며, 자기야말로 고통을 받기 위해 인류 중에서 선택된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자존심은 그로 하여금 야심을 경계하게 한다. 그는 권력을 갖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것을 얻는 수단에까지 내려가는 것도 원치 않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명성과 천재의 영향력에밖에는 아무것에도 신세지기를 원치 않고 있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서 천하를 갖다 바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학수고대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존심은 그의 정치 생활의 실망을 해소시켜 주었다. 사람이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때에는, '만약에 내가 원한다면'이라고 그는 말하고, 그로부터 도로 빼앗아 갔을 때에는, '만약에 내가 원했더라면……'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원했다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모든 것을 쥐고 있을 수 있었으리라는 확신, 그런데도 자기는 모든 것을 경멸했다는 확신이 그의 마음을 달래 주고 있었다.—요컨대 자존심은 행동하고 원하는 수고를 그에게서 덜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고 행동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확실치 않다. 정열의 비약, 충동, 격발, 오직 이런 것들만이 사람들이 그의 생활 속에서 알아차린 것이고, 자발적인 행위란 결코 없었다.
아무도 그만큼 상상으로 살아간 사람은 없었다. 그의 자존심과 무기력은 다 같이 상상 속에서 이득을 보고 있었다. 현실은 우리 멋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에 드는 외관을 현실에 강요하기 위해서는, 거친 손과 악착스런 의지가 필요한데, 이에 반하여 몽상은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향락을 제공해 준다. 샤토브리앙은 그러한 향락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맛보았다. 그는 관념의 세계를 만들어 내어 자신이 그 세계의 주인이라고 느꼈다. 그는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이, 모든 기쁨과 모든 위대함을 자신에게 주었으며, 스스로 인류 위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의 자존심과 상상력은 그를 무한의 세계 속으로 실어 갔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무슨 결과가 나올 수 있었는가? 침통한 공허감과 한없는 권태이다. 샤토브리앙은 감각과 몽상에서 향락을 구했으며, 행동과 현실을 무시했다. 그러나 감각은 무디어진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몽상은 어떤 순간에 도달하면, 이내 향락을 고갈시켜 버린다. 그런데 샤토브리앙은 자기의 몽상을 실현하기를 단념하고 있었으므로, 공허한 무위의 영혼인 채, 자기의 허무 속에 다시 빠지고 있었다. 자신의 웅대한 자아(自我)에 대한 영원한 숭배는 결국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마음의 공허를 메울 곳을 아무데서도 찾지 못한 채, 영원히 우울한, '권태로운' 생활 속에서 지냈다. 이러한 기분이 하나의 자세가 되어 버렸다. 그는 이 기분을, 그의 〈회상〉 속에서, 자기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아직 몇 시간밖에 살지 않았었는데, 인생의 무거움이 이미 내 이마 위에 새겨져 있었다.'
단 한 가지 것이 그의 기분을 돌려 주고 있었다. 즉 자연과 인류의 문명이 제공하는 수많은 아름다움의 광경들이 그것이었다. 취미가 보편적으로 비속하고 편협했던 이 시대에, 그는 그의 영혼을 아름다움의 더없이 다양한 형태들에 대해서 크게 열고 있었다, 비록 그것들의 기원이 무엇이든 간에. 아주 소박한 고대인, 복잡하고 불안한 근대인, 이교, 기독교, 이탈리아나 브르타뉴 또는 아메리카의 풍경, 모든 것이 그에게는 어떤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같이 보였는데, 그는 그것을 끌어 내는 데 능했다. 이 자존심,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이 상상력,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이 우울이, 아름다움에 대한 이 날카로운 감각과 결합되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요소들이, 일찍이 존재했던 중 가장 강력하고 가장 독창적인 성질의 예술가 하나를 만들어 낸 것이다.
〈기독교 정수〉는 샤토브리앙의 중심적인 작품이다. 〈아탈라〉와 〈르네〉는 본디 그 삽화에 불과했다. 〈순교자들〉은 〈정수〉 속에서 내세운 하나의 주장을 예를 들어 해설하기 위하여 쓴 것이고, 〈파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순교자들〉에 결부시킬 수 있다.—큰 작품들 중에서는 오직 〈무덤 너머서의 회상〉만이 〈정수〉에서 독립해 있다.
〈기독교 정수〉는 4부로 구성된다.—제 1부, '교의(敎義)와 교리'. 이 부분은 특히 신학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제5편 '자연계의 경이에 의해 증명되는 하느님의 존재'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아주 서술적이며, 현실의 조화 속에 하느님의 섭리의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제2부, '시학(詩學)'. 이는 이 책 중에서 가장 참신하고 가장 풍부한 부분이다. 그것은 프랑스에 〈신곡(神曲)〉을 알려 주고, 〈성서〉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특히 예술 작품이 역사적 상황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스탈 부인 다음으로 힘차게 논증했다.
실제로, 인간의 영혼에 관한 우리의 인식이 더 정확해지고, 우리의 도덕 생활이 더 풍부해지고, 자연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더 직접적이고 더 깊어지게 된 것은 기독교의 덕택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르네〉의 삽화가 실려 있었는데, 이것은 그러한 복잡한 사실들의 한 예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제3부, '예술과 문학'. 샤토브리앙은 여기서 예술에 있어서의 기독교의 우월성을 밝히려고 시도한다. 그는 이 때까지 무시되었던 고딕식 교회의 명예를 회복시킨다.—제4부, '예배'. 샤토브리앙은 여기서 의식(儀式)들의 아름다움, 기독교 제도의 위대성을 서술한다.
〈기독교 정수〉는 1802년 4월 14일 출판되었다. 그로부터 나흘 후에 카프라라 추기경(cardinal Caprara) 이 노트르-담 성당에서 제1통령(統領) 나폴레옹의 임석하에, 로마 교황과의 화친 조약 체결을 축하하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보나파르트와 샤토브리앙은 종교 부흥에 협력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결과는,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것이다.—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가톨릭 의식은 7년 전부터 프랑스 전국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1796년 이래, 2만 5천 명의 사제가 3만 6천의 소교구를 관리하고 있었다. 도처에서 민중은 열심히 자기네 성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었다. 그러므로 보나파르트는 예배의 부흥자가 아니었고, 샤토브리앙도 역시 신앙의 부흥자가 아니었다. 〈정수〉의 성공은, 그것이 바로 다 준비되어 있는 세론(世論)을 만난 데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샤토브리앙이 자기의 책에 관하여 '그것은 꼭 알맞은 때에 나왔다'고 한 것은 옳은 말이었다. 기독교가 명예 회복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은 매우 확실하다. 18세기에는 기독교는 완전히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그것을 믿는 것은 바보들뿐이라고 사람들은 단언하고 있었다. 그 반대의 선입관을 만들어 내고, 세습과 젊은 시절의 추억과 모든 생활 습관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가톨릭 교도인 프랑스 인의 자부심을 안심시키고, 유식 계급들을 종교 생활과 결부된 조소의 두려움에서 해방하고, 종교를 존경할 만한, 점잖고 아름다운 것으로 그들에게 그려 보여 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을 논증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부활시켜야만 했으며, '사람들은 종교에 반대하여 상상력의 모든 매력과 마음의 모든 흥미를 무장해 놓았었는데, 이제는 이 똑같은 종교를 돕기 위해 그것들을 불러 오기'(제1부 제1편 제1장)만 하면 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들 마음 속 밑바닥에 잠들어 있는 종교심을 회화적이고 감동적인 묘사에 의해서 눈뜨게 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샤토브리앙의 의도였다. 그가 자기 책에 처음에 붙였던, 〈기독교의 도덕적 · 시적 아름다움〉(Beautes morales et poetiques du Christianisme)이란 첫 제목은 의미 심장한 것이었다.—이 호교론(護敎論)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성공밖에는 거두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내, 이 호교론이 지극히 세속적인 허울좋은 기초 위에, 즉 예술가나 시인의 감각 위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영속적인 흥미를 낳아 준 것이다.—논리적 · 철학적 견지에서는 〈기독교 정수〉는 매우 취약하다. 거기에는 오류들이며, 괴상한 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진한 논법들이 보인다. 새집들은 얼마나 잘 만들어져 있는가!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악어는 암탉처럼 달걀을 낳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인간은 무덤들을 존경한다. 그러므로 영혼은 불멸이다. 이 같은 유치한 논증은 베르나르댕드 생-피에르의 역량에는 꼭 알맞는다.—그러나 보잘것없는 논법의 이 모든 장(章)들은 한 위대한 예술가의 인상들이고, 거기에는 하나의 완전한 새로운 시학(詩學)이 포함되어 있다.
샤토브리앙은 근대 예술에는 근대적인 영감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그는 기독교를 영감의 원천으로서 제출한다.—그는 중세를, 고딕 예술을, 프랑스의 역사를 복권시킨다.—그는 이탈리아, 영국, 독일의 문학의 아름다움을 알려 준다.—그는 자연에 대한 감정과 운명의 불확실성을 시의 주제로서 제출함으로써 서정(抒情)의 모든 원천들을 열어 준다.—그는 일체의 예술의 기계적 기법을 규칙들과 마찬가지로 배척하고, 일체의 관례를 신화와 마찬가지로 배척한다.—그는 문학 작업을 아름다움의 표현이 되게 한다.—이런 것들이 이 책을 스탈 부인의 독일에 관한 연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하는 뛰어난 선견지명의 몇 가지 예이다. 샤토브리앙이 수사학과 관념론 대신에 재건하고 있었던 것은 진실로 시와 예술이었다.—그러나 그의 사상들은 좀 모호함을 면치 못한다. 그것은 그가 그것들을 생각하는 이상으로 그것들을 느끼기 때문이며, 그가 이론가인 이상으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론보다도 더 명료하고, 더 완전하고, 더 표현력이 풍부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아탈라〉와 〈르네〉는 샤토브리앙이 영국 체류 중에 지어 놓은 거대한 아메리카 서사시 〈나체즈 족(族)〉(Les Natchez) 속에 싣기 위해서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1800년 런던을 떠날 때 그는 이 방대한 원고1)를 거기에 놓아 둔 채 이 두 개의 삽화만을 가지고 돌아왔다. 〈기독교 정수〉를 지어 냈을 때, 그는 이 두 삽화를 모두 거기에 삽입하면 퍽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아탈라〉는 '기독교와 자연의 풍경 및 인간의 정열과의 조화'를 보여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르네〉는 '정열의 막연함'에 관한 장(章)의 주석(註釋)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두 삽화는 〈정수〉 속에 발표되었는데, 〈르네〉는 제2부 제4편을, 〈아탈라〉는 제3부 제6편을 형성했다. 그러나 〈아탈라〉는 그 전에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약간의 교정쇄(校正刷)가 분실되었으므로, 샤토브리앙은 도난을 걱정하여, 1801년 이 삽화만을 따로 떼어 출판했던 것인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었다. '내가 세상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아탈라〉의 출판 때부터이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2) 〈르네〉의 성공도 역시 굉장했으므로, 그는 이것을 〈아탈라〉와 함께 따로 재판(再版)했다.
〈아탈라〉는 '서곡'과 '이야기'와 '종곡'(終曲)으로 구성되어 있다.—'서곡'. 소설의 줄거리는 18세기, 루이지애나의 미시시피 강가에서 벌어진다. 해리(海狸) 사냥 중, 늙은 인디언 샤크타스(Chactas)는, 알 수 없는 불행으로 프랑스에서 쫓겨 온 프랑스의 청년 르네(Rene)에게 자기의 청춘 시절의 커다란 모험 이야기를 들려준다.—'이야기'. 적의 손 안에 빠진 샤크타스는 기독교도인 인디언 처녀 아탈라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 여자는 그와 함께 대초원을 거쳐 달아났다. 한 달 동안 그들은 뒤쫓아오는 사냥꾼들의 눈을 피하여, 마침내 오브리(Aubry) 신부의 암자 주변에 정주하고 있는 농민들의 거류지에 당도한다.
그러나 아탈라는 샤크타스에 반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여자는 죽어 가던 어머니가 자기를 하느님에게 바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의 사랑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그 여자는 독을 마셨다. 그 여자는 샤크타스에게 개종(改宗)할 것을 약속하게 한 뒤에, 기독교도답게 죽었다.—'종곡'에서 샤토브리앙은, 오브리 신부가 어떻게 박해를 받았고, 기독교도가 된 샤크타스가 어떻게 오브리 고해 신부와 처녀의 유해를 찾으러 돌아왔는가를 이야기한다.
〈르네〉는 거의 소설 같지도 않다. 그것은 콩부르에서의 샤토브리앙의 열광적인 소년 시절을 소설화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아탈라〉의 대응물(對應物)인 것 같다. 즉 〈아탈라〉에서는 샤크타스가 자기의 청년 시절을 르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르네〉에서는 이 프랑스 청년이 샤크타스에게 자기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한다.
르네는 나체즈 족의 여자와 결혼했다. 그는 우울한 은둔 생활을 보낸다. 그는 마침내 두 친구, 인디언 노인 샤크타스와 전도사 수엘(Souel) 신부에게 마음속을 털어놓는다. 그는 시골 벽지의 호숫가, 숲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아버지의 저택에서 지낸, 몽상에 잠긴 우울한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한다. 그의 유일한 기쁨은 누나 아멜리(Amelie)였다. 그는 '본능적인 충동으로 저 미지의 행복을 얻으려는' 욕망에 따라, 여행을 하고, 세상 사람들과 사귀어 보고, 세상에서 은퇴하여 시골로 피신했다. 그러나 시골에서도 그의 슬픔은 가라앉기는커녕, 도리어 정신 착란에 빠질 정도로 높아져 가기만 했다. 그는 자살하려고 생각했으나, 누나가 말렸다.
그 후 누나는 그에 대하여 너무나도 강렬한 애정을 느끼고 있는 데 스스로 놀라 수녀가 되었다. 그는 절망하여 배를 타고 떠났다. 그리고 아메리카에 도착하자마자, 아멜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샤크타스는 그렇게도 많은 불행에 막 동정하려고 하는데, 수엘 신부는 르네를 준엄하게 비판한다. '망상에 빠져 있는 젊은이여, 세상에서 할 일을 저버리고 쓸데없는 몽상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여…… 세상을 가증스런 것으로 본다고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오…… 고독은 하느님과 함께 살지 않는 자에겐 나쁜 것이오. 고독은 영혼의 힘을 북돋워 주지만, 동시에 영혼으로부터 훈련하기 위한 일체의 동기를 뺏어 버린다오. 힘을 받은 자는 누구나 그것을 동포를 위해 바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러므로, 이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말들로 샤토브리앙은 르네를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주인공의 내심 토로만큼 동시대인들을 감동시키진 않았다. 사람들은 이 내심 토로밖에 기억하지 않았다. 그것은 장-자크 루소와 괴테의 〈베르테르〉3) 이후 사회를 좀먹고 있던 질병의 정확하고도 완벽한 표현을 제공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병에 저항하기는커녕, 즐거이 거기에 빠져들었다. 완전한 하나의 문학이, 샤토브리앙은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이 작은 책에서 태어났다. 즉 낭만적이고, 자존심 강하고, 고독하고, 숙명적인, 낭만파의 주인공은 르네의 아들인 것이다.
〈순교자들〉(1809)은 〈기독교 정수〉에서 태어났다. 샤토브리앙은 〈정수〉 속에서, '기독교는 내가 보기엔 이교보다도 성격의 발전과 정열의 활동에 더 알맞은 것 같았다'라거나, '이 종교의 경이(驚異)는 아마 신화의 부자연스런 경이에 대해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1)라고 주장했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하나의 결정적인 예로써 설명하고자 했다. 〈정수〉가 출판되자 그는 곧 이 새로운 일에 착수했다. 그는 재빨리 자기의 주제를 기원 후 3세기에 갖다 세워 놓음으로써, 이교와 기독교의 두 문명이 '공평한 심판자인 독자' 앞에 동시에 제공될 수 있게 했다.—그러나 그는 이때, 그러한 과거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문헌들을 읽으려고 기도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3세기의 골(la Gaule)에 관한 베네딕트 파(派) 성직자들의 끈기 있는 저작(著作)들을 면밀히 조사하여, 역사가〔A. Thierry〕의 천부적 소질을 눈뜨게 할 만큼 강력하게 골을 환기시킬 수가 있었다. 그는 또 이 미래의 서사시에 담을 모든 경치들을 찾아가 보고자 했다. (1811년에 그의 기행문은 〈파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라는 표제로 출판되었다.) 고대 문명들이 펼쳐진 무대를 자연 그대로 묘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순교자들〉은 24개의 노래들로 나뉘어 있는데, 그것들을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의 11개의 노래는 외도르(Eudore)와 시모도세(Cymodocee)의 만남을,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서—〈오디세이아〉와 〈에네이드〉를 새롭게 한 기교—외도르의 과거의 생활을 서술한다. 그 다음의 13개의 노래는 그들의 사랑의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이교도인 그리스 처녀 시모도세는 메세니아 산중에서 길을 잃었는데, 기독교도인 그리스 청년 외도르가 그 여자를 호메로스의 대사제(大司祭)인 그 여자의 아버지 데모도퀴스(Demodocus)의 집으로 데려다 준다.
얼마 후, 데모도퀴스는 딸과 함께 아르카디아에 있는 외도르의 집에 가서 사례한다. 저녁에 외도르는 알페 강가에서 이 두 손님들에게 자기의 과거의 생활을 이야기하는데, 그는 과거에 로마, 바타비아, 브르타뉴, 이집트 등지를 차례차례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외도르와 시모도세는 서로 사랑하게 되고, 시모도세는 외도르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 기독교도가 된다. 스파르타의 주교는 두 남녀의 혼약을 축복한다. 그러나 곧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들을 떼어 놓는다. 외도르는 로마에 불려 가서, 황제 앞에서, 새로운 박해를 받는 기독교도들의 입장을 변호한다.
한편 시모도세는 아카이 지방 총독의 치근거림을 피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난다. 그 여자는 그 후 그리스로 돌아오고자 한 때, 폭풍으로 이탈리아까지 실려 간다. 외도르는 이미 투옥되었고, 그 여자 자신도 체포되었다가 나중에 로마 병사로 변장한 기독교도들에 의해서 풀려난다. 갑자기 그 여자는 외도르가 순교자로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감시를 피해, 원형 극장으로 약혼자를 만나러 가서, 거기서 둘 다 호랑이에 찢기어 죽는다. 이 때 천둥소리가 울리고, 하늘에서 한 목소리가 '신들은 떠나간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이 두 순교자의 무덤 위에서,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임을 선포한다.
이 책에는 아름다운 경치와 장엄한 역사적 묘사들이 듬뿍 담겨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바타비아 전투의 이야기(여섯째 노래)와 벨레다의 삽화(아홉째 노래)인데, 이것들 속에 샤토브리앙은 전쟁과 소년 시절의 추억을 옮겨 놓았다.—그러나 그는 그의 가장 중요한 의도에 있어서는 실패했다. 즉 그는 자기의 경이로운 기독교도에게 색채와 생명을 부여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이 인물은 얼어붙어 있는 것이다. 그는 또 여러 인물들의 성격과 정열을 뛰놀게 할 줄도 몰랐다. 사실, 샤토브리앙은 자기의 영혼을 닮지 않은 영혼을 창조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그린 단역(端役)의 인물들은 모두 상투적인 인물형이다.
그의 여주인공 사모도세 자체도, 그 형제격인 인디언 처녀 아탈라와 마찬가지로, 샤토브리앙이 옛날 콩부르의 황야에서 욕망과 몽상을 가지고 창조했었던, 그리고 그가 항상 반해 있었던, 실재하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인 저 '사랑의 곡두'의 일시적인 구상화(具象化)이다.—마찬가지로 외도르도 르네요 샤크타스이다. 이 모든 주인공들은 단 하나의 인물형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본 샤토브리앙인 것이다. 심리 묘사는 전혀 없고, 수사학만이 숱하게 담겨져 있으나,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때때로, 깊은 진실, 침통한 우울이 드러난다. 왜냐 하면 그는 자기의 고뇌를 주인공들의 고뇌로 삼아 그것을 과장하고 그것을 비극적인 것으로까지 밀고 가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1811)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샤토브리앙이 〈순교자들〉을 위해 참고 자료를 얻을 목적으로 지중해 주변을 돌아 본 여행의 기행문에 불과하다. 그러나 샤토브리앙은 자기의 여행 수기(手記)를 다시 손질하고 정리하지도 않은 채 공표하기에는 너무나도 독자를 존중하고 있었다. 〈여행〉은 다른 작품들 못지 않게 잘 다듬어진 작품이다. 서술의 완벽함, 이야기의 간명(簡明)함, 어조의 다양함에 의해서, 이는 가장 훌륭한 작품들에 필적한다.
〈여행〉은 다음과 같이 7부로 나뉜다.—Ⅰ. 그리스.—Ⅱ. 다도해(多島海), 소아시아, 콘스탄티노플.—Ⅲ. 팔레스타인.—Ⅳ-V. 예루살렘.—Ⅵ. 이집트.—Ⅶ. 튀니스. 처음의 3부에는 경탄할 만한 경치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이는 의외의 일이고 샤토브리앙이 믿는 기독교의 성질에 관해서 어떤 의심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일인데—예루살렘에 바쳐진 부분은 이 책 중에서 가장 무미건조하고 가장 개성이 희박하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부터 샤토브리앙은 마구 역사론을 쏟아 놓고 있으며, 묘사는 거의 없다. 어떤 환멸이 이 여행의 끝에 나타난다. 방문한 나라들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현된 모든 즐거움을 비애로 바꾸어 버리는 여행자의 공상적인 기질 때문이다. 샤토브리앙은 스페인을 거쳐서 프랑스에 돌아왔다.(그의 스페인의 인상은 이 책에는 실리지 않았고, 〈순교자들〉 속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그는 이 인상으로 한 편의 짤막한 소설 〈마지막 아뱅세라즈의 모험〉(Aventures du Dernier Abencerage)을 꾸며, 1826년에 출판했다.) 〈여행〉은 근동(近東)과 그리스를 유행시켰다. 그것은 초기 낭만주의를 초래한 근동 취미의 풍조를 빚어 냈다. 끝으로 그것은 여행기라는 하나의 새로운 장르의 첫 본보기가 되었다.
샤토브리앙은 43세 때(1811년) 그의 회상록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73세 때(1841년) 붓을 놓았다. 이 30년간, 그것은 그가 특히 좋아한 일이었다. 그러나 빚에 몰리고 있었던 그는, 이 작품을 죽은 뒤가 아니면 출판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유보(留保) 아래(표제는 이에 기인한다), 자기의 숭배자들로 구성된 주식 회사에 그 저작권을 파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회상〉은 샤토브리앙의 걸작으로 간주되며, 프랑스 문학의 가장 다양하고 가장 강력한 걸작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 〈회상〉은 진실한 증언이라기보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의도적으로, 샤토브리앙은 자기 생애의 화려한 시를 꾸미고자 그에 필요한 요소들만을 골랐으며, 자기에게 관계되는 요소들을 흔히 미화하고 있다.
〈회상〉은 4부로 나뉘어 여러 편(篇)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각 편은 일반적으로, 샤토브리앙이 이야기하는 사건들에 관한 웅변조(調)의 명상이든 시적인 상승(上昇)이든 간에, 서곡과 종곡(終曲)의 사이에 끼여 있었다. 그러므로 각 편이 하나의 온전한 작품이다.
제1부는 1768년에서 1800년까지로 여행자 및 군인으로서의 샤토브리앙의 경력에 관계된다. 제2부는 1800년에서 1814년까지로, 그의 문학적 경력에 관계된다. 제3부는 1814년에서 1830년까지로, 그의 정치적 경력에 관계된다. 제4부는 1830년에서 1841년까지로, 몰락한 군주제를 위해 진력하면서도 환상도 희망도 갖지 않는 샤토브리앙의 모습을 보여 준다.—제3부의 끝에서부터 샤토브리앙은 민주주의의 끊임없는 진보를 지적한다. 이 민주주의는 그에게는 종교 정신이 비어 있는 복음주의의 우스꽝스런 모방같이 보인다. 전에는 이 종교 정신이 복음주의를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사회로부터 그는 아무런 좋은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이 새로운 사회는 지적 · 물질적 발달을 매우 높였지만, 하나의 무서운 우상 숭배,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우상 숭배' 외에는 아무런 도덕적 요소도 이 사회를 떠받쳐 주지 않는다. 이러한 환멸의 어조가 제4부를 지배하고 있다.
제1부 전체(소년시절, 콩부르, 1789년의 사건, 아메리카 여행, 티옹빌의 포위전), 제3부의 제1편에서 제6편까지(나폴레옹), 제4부의 제5편에서 제8편까지(독일, 이탈리아, 보헤미아 등지에의 여행) 등이 특히 유명하다.
샤토브리앙은 비길 데 없는 예술가이다. 동시대인들은 그를 '마술사'라고 불렀다. 사실 그는 그의 상상력의 시정(詩情)과 그의 문제의 서정(抒情)에 의해서 당대인들을 매혹했으며, 지금 역시 우리를 매혹한다. 그는 시간이 없어서, 아메리카에서 미시시피 강변이나 플로리다 지방을 보지 못했었고 (그는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의 서술의 요소들을 다른 책들에서 끌어 냈었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자료를 제공한 사람들의 서술이 그의 서술과 비교해 보면 색채도 생기도 없어 보일 만큼 그의 서술의 요소들을 잘 구성하고 조명(照明)하고 변형해 놓았다.—그리고 그는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 감동을 불어넣는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주 사소한 문장들도 꿈을 불러 준다. 우리는 그 문장들이 오랫동안 우리 마음 속에서 울려퍼지는 것을 듣는다. 낱말들을 부풀어 올리고 그 뜻을 사방으로 퍼져 가게 하는 이 서정적인 떨림이야말로, 아직 운문의 형식을 찾아 내지 않은 아주 순수한 시이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는 꽤 뒤늦게야 18세기에 유행한 의고전주의적(擬古典主義的) 수사학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순교자들〉을 너무나도 빈번히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있는 그 모든 수식들, 완곡한 표현법이며 형용사들, 말의 도치(倒置)며 중복들은 이 수사학에 속한다. 〈순교자들〉과 〈여행〉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여행기는 일반적으로 그런 수식들을 사용하고 있는 글보다도 훨씬 훌륭하다. 왜냐 하면 이 여행기는 단순하고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무덤 너머서의 회상〉은 마침내, 직접적인 감동을, 그 색채도, 그 두드러짐도, 또 때로는 심지어 그 격렬함도 전혀 상실함이 없이 옮겨 놓는 그 재능을 드러내 놓았다.
샤토브리앙의 문체는, 너무나도 자주 그 문체를 혼잡하게 하고 있는, 그 시대에 뒤떨어진 수사학에서 해방되었을 때에는, 화려, 민첩, 하모니, 두드러짐이라는 네 가지 주요 특성을 보여 준다. 그의 문체는 꾸밈없이 화려하다. 그것은 온갖 것의 고귀하고 웅대한 모습을 표현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숭고한 영상 또는 격렬한 말을 찾아 낸다. 이러한 특성의 대가가 과장이다.—그의 문체는 그럴 필요가 있을 때에는, 민첩하고, 신속하고, 강렬하다. 〈여행〉 속의 어떤 서술들과 〈회상〉 속의 일화들과 인물 묘사들이 그것을 입증한다.—그의 문제는 꾸밈없이 음악적이며, 결코 단조로움에 빠지는 일이 없다. 리듬과 하모니는 언제나 뜻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리가 앞서 지적한 그 뜻의 신비로운 확장은 일부분, 그 뜻을 구성하는 말들의 낭랑한 소리의 미묘한 배열에서 기인한다.—끝으로 이 문체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능하다.
그것은 그러한 아름다움을 변질시킴이 없이, 강렬한 묘사를 하는 일종의 도취를 가지고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재현한다. 샤토브리앙의 가장 아름다운 글은 서경(敍景)의 글이다. 〈기독교 정수〉와 〈아탈라〉는 특히 그 점에서 가치가 있다. 〈여행〉은 근동(近東)과 남불(南佛)의 그림들을 진열한 화랑이다. 〈순교자들〉은 당시 회화에 있어서 우세했던 취미에 따라, 저 직접적인 풍경들을 역사적인 풍경들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무덤 너머서의 회상〉은, 이 노대가(老大家)의 모습이 고스란히 재현된 몇 폭의 그림을 담고 있다는 점에 주된 흥미가 있다. 회화적인 감각인 것은 무엇이고 그의 모든 작품 속에서 하루 아침에 낡아 버리지는 않았다.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는 샤토브리앙의 영향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는 고딕식 대성당을 재건하고, 닫혀 있던 대자연을 다시 열고, 근대적인 우울을 창조했다.'
그는 고딕식 대성당을 재건했다. 사실 그는 반종교적인 편견을 일소하고, 늘 지속되고 있는 종교 부흥 운동을 불러일으켰다.—또한 그는 프랑스 중세 건축의 훌륭함을 인정했다. 그는 특히 위고(Hugo)에게 중세와 고딕식 건축을 계시했으며, 과거의 영혼과 생명을 내포하고 있는 독특한 세부를 고문서 속에서 찾을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근대의 역사에, 어쨌든 〔과거의〕 환기(換起)요 재현인 역사에 그 방향을 제시했다. 티에리(Thierry)는 〈순교자들〉 제6편을 읽음으로써 역사가가 되었다. 그리고 또 샤토브리앙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미슐레(Michelet)를 가질 수 있었을지 누가 알랴?
그는 닫혀 있던 대자연을 다시 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루소와 베르나르댕드 생-피에르가 이미 시작했었다. 그러나 상드(Sand)에서 로티(Ltio), 고티에(Gautier)에서 르낭(Renan)에 이르기까지, 그 후 자연을 그리기에 몰두한 사람들이 모두들 자기의 스승으로 인정한 것은 샤토브리앙이다.
그는 근대적인 우울을 창조했다. 사실, 그의 삶의 권태, 끊임없이 부숴지는 그의 영원한 동경들은, 라마르티느의 시의 원천이다. 그의 염세적인 비애는 비니(Vigny)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그는 뒤이어 온 작가들에게, 말하자면 그의 영혼을 스며들게 하였다.—그리고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르네의 진짜 아들은, 아무도 그 비밀을 꿰뚫어볼 수 없는 불치의 고뇌를 평생 끌고 다니는, 숙명적이고 고독한 저 낭만파의 주인공, 에르나니(Hernani)요, 뤼이 블라스(Ruy Blas)요, 오트베르(Otbert)이다. 심지어 르네 속에는, 홀로 온 사회에 맞서 있음을 즐거움으로 삼는, 반항과 죄악을 좋아하는 하나의 딜레탕트도 있다. '스스로 무죄임을 느끼는데도 법에 의해서 유죄 선고를 받는다는 것은, 르네 같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사회 질서에 대한 일종의 승리였다.'
고티에의 판단은 그러므로 정확하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하다. 샤토브리앙은, 하나의 작품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기에 의해서 설명된다는 것을 〈정수〉 속에서 보여 줌으로써 비평을 혁신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또 프랑스 인들에게 외국 문학을 알려 줌으로써 그들의 취미를 넓혀 주었다.—끝으로, 영감의 동기들과 함께, 샤토브리앙은 형식을 알려 주었다. 즉 그는 아름다움의 탐구를 문학 작품의 주요 목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길다랗고 조화로운, 때로는 힘찬, 또 때로는 유유하고 잔잔한, 그러나 항상 표현력이 풍부한 문장의 예를 보여 주었다. 그는 '예술적인' 문체의 참다운 창조자인데, 이러한 문체는 장차 19세기의 둘째 세대와 함께, 그리고 특히 플로베르와 함께 꽃피게 될 것이다.
***(랑송불문학사, 1997.3.20, 을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