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십자가의 회복) 3일차 - ‘부흥,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P.류응렬-와싱턴중앙장로교회)
* 설교자의 설교내용을 필자의 묵상과 결부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 내용과 의도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하단별첨)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는 교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십자가가 체험될 때 진정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흐릿해져 있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말씀으로 부흥이 일어났던 구약의 현장으로 돌아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려 합니다.
구약에는 두 번의 부흥운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분열왕국 시대 요시아 왕 때의 부흥과 개혁이었고(열왕기하 22:8-23:25),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에 등장하는 느헤미야 당시의 모습입니다. 두 부흥운동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고 그 말씀으로 듣는 자들 모두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풍요로운 삶에 도취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우상을 섬기다가 이방 민족의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포로생활 중에 그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붙들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잘못된 삶의 방향을 바로잡으려는 회개의 운동으로 향합니다.
느헤미야 때에 일어났던 부흥운동은 ‘말씀을 사모함’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열망이 진정한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에 대한 목마름으로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부르짖습니다(1v).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자가 먼저 찾아와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는 자가 먼저 그 말씀을 전해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말씀을 향한 갈급함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향해 귀 기울임으로 표현됩니다(3v). 52일 만의 성벽재건으로 지쳐있을 심신 때문에라도, 본향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을텐데, 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싼 눈에 보이는 성벽보다 말씀으로 무장된 견고한 내면의 성벽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알고 있었기에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모든 사역과 삶에서 추구하는 모든 일의 핵심에 하나님의 말씀 내지는 십자가의 복음이 중심에 서 있지 않다면, 말씀이 가져다주는 ‘삶의 변화’나 죽은 자를 살리는 십자가의 ‘생명의 능력’은 남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고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면의 성전을 견고히 세우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민족을 살리는 길임을 처절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1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아마존과 중국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듣기 위해서 수 일에 걸쳐서 말씀을 전하는 장소까지 달려오는 사람들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보면서 저 자신도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주님, 저에게도 이들과 같은 말씀을 향한 사모함과 갈급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저부터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향한 간절함과 사모함은 한국교회의 성장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교회 안에 복음이 점점 흐릿해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마이클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반 세기도 더 전에, 장로교 목회자인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는 주일 설교에서 이렇게 전했다.
사탄이 필라델피아를 장악한다면, 술집은 모두 문을 닫을 것이고, 도색물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깨끗해진 거리는 서로 웃음을 머금은 보행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저주 악담도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은 “예, 선생님” 혹은 “예, 부인” 하고 공손하게 말할 것이다.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죄인들의 유일한 희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논을 돌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에 의해 만사가 헤아려지는 곳, 우리가 죄인이라는 자각이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슬며시 뒤로 밀리는 그런 곳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가 길을 잃기는 했어도 적절한 지침과 동기부여로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착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는 구속자가 아니라 인생의 스승만이 필요하다. (후략)” -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마이클 호튼, 부흥과개혁사) 中(*)
십자가 복음,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는 교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설교 강단에서는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선포할 수 있는 인생의 지혜나 처세술을 이야기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복음은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생각에 ‘예수를 믿으면 나의 삶의 행복과 만족이 보장되어야 한다’라는 그릇된 생각과 오로지 ‘잘 되는 것만’이 가득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중심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자가 누리게 되는 진정한 행복은 무엇입니까? 죄인된 나 자신 스스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가 예수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영원한 안식,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요? 이 큰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되었음에도, 이 땅에서 무슨 행복을 더 바란다는 말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태양빛을 제대로 보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눈이 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의 화려한 샹들리에를 찾기에만 눈을 좌우로 기웃거리고 있다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가치에 진정 눈이 열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초대 교회가 핍박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할 때, 걸을 수 없던 자가 걷게 되는 초월적인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슴에 깊이 새긴 사람들의 헌신과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일학교에서 교회생활을 하던 다음 세대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50%이상이 신앙을 떠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70%이상에 이릅니다. 그들은 신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주일학교 때부터) 복음을 모르고 교회 건물만을 드나드는 자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다면, 신앙을 함부로 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말씀에 대한 사모함으로 충만한 자들이 사모함이나 갈급함이 없는 자들을 세우고 자극하는 것이 공동체 회복의 모습이요, 연합의 단초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내 심장을 흐르고 있다면, 우리 각자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삶이 ‘달라(져)야 한다’라고 표현하였지만, 엄밀히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나의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자책하는 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아무리 몸부림쳐도 변화가 없는, 소망이 없는 나를 회복시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갈급한 심정으로 복음을 사모할 때, 복음이 가져다주는 생명, 변화, 능력, 소망이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되고, 그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 부흥운동의 또 다른 모습은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 앞에 진실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도 자리에 앉아서 들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5v). 아멘으로 화답하고(6v), 말씀 앞에 통곡합니다(8-9v).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니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됨, 우상을 섬기는 부끄러운 모습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회개운동으로 이어집니다(느헤미야 9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놓고 진지하게 회개해 본 적은 언제였습니까. 나 자신이 언제부터인가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아무런 감흥도 반응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나의 영혼은 나도 모르게 병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삶의 가치관과 말과 행동이 획기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없는 곳에 자신의 삶 전부를 내던지고 복음을 전하는 자나 일상의 평범한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나 말씀을 향한 사모함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는 동일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바다를 이루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날은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하는 말에 기쁨의 순종으로 반응합니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v)’ 회개의 통곡은 이내 거룩한 기쁨의 축제가 됩니다. 하나님을 만난 기쁨의 감격을 서로 나누며 교제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목이 말라 있습니까. 정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여호와의 낯빛은 지금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서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십자가의 회복, 부흥의 시작은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반응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 전에는 일을 시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대화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전에는 세상의 다른 것을 읽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문]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냐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 책 본문은 http://cafe.naver.com/bokeumjari/396 에서 일부 발췌·인용한 것입니다.
첫댓글 특새 설교 글을 잘 정리해 주신 사랑의교회 성도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카톡을 통해 이글을 받았습니다 잘 정리해주셔서 참으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 글은 사랑의교회 대학부 안병준 형제가 정리한 글입니다 지금 사시 2차 준비 중인데요... 예수님의 제자로 신실한 법관되기를 중보 부탁합니다^^*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