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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강설 제16권 1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十五, 십주품(十住品)
서문
부처님께서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신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밑을 떠나지 않으시고 수미산 정상에 오르시었습니다.
제석천왕은 이렇게 찬탄하며 영접하셨습니다.
가섭(迦葉) 여래께서는 큰 자비를 구족하시니
모든 길상(吉祥)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구나모니(拘那牟尼)께서는 소견이 걸림이 없으시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가라구타(迦羅鳩馱)께서는 금산과 같으시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수미산에 올라 영접을 받고나서 다시 시방의 보살들로부터 각각 열 게송씩 1백 개의 게송으로 찬탄함을 듣습니다.
부처님이 길고 긴 찬탄의 노래를 듣고 나자 드디어 화엄경 7처(處) 9회(會)의 설법 중 제3회 설법의 본론인 십주(十住)법문이 법혜(法慧)보살로부터 설해집니다.
이른바 초발심주(初發心住)와 치지주(治地住)와 수행주(修行住)와 생귀주(生貴住)와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와 정심주(正心住)와 불퇴주(不退住)와 동진주(童眞住)와 법왕자주(法王子住)와 관정주(灌頂住)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열 가지 머무는 곳이라 이름 합니다. 이 열 가지 보살이 머무는 곳은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설하시는 것입니다.
2014년 10월 20일
신라 화엄종찰 범어사
如天 無比
차례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1, 근본법회(根本法會)
2, 세존이 수미산에 오르다
3,
4,
5,
6,
화엄경 강설 제16권 2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강설 ; 화엄경 7처 9회의 설법 중에 그동안 제2회의 십신(十信)법문이 끝났다. 다음은 제3회의 6품 경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보살의 수행단계가 시작되는데 먼저 십주(十住)법문이다. 십주법문 중 그 서분(序分)으로서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과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두품이 있다. 승수미산정품은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보리수나무를 떠나지 아니하고 수미산 정상의 제석천궁에 올라가서 걸림이 없는 변화의 몸을 나타낸다. 그리고 제석천왕은 이 제석천궁에는 가섭여래 등 열 분의 부처님이 다녀가신 궁전이므로 길상한 곳이라고 게송으로 찬탄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3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1, 근본법회(根本法會)
爾時에 如來威神力故로 十方一切世界一一四天下閻浮提中에 悉見如來가 坐於樹下어시든 各有菩薩이 承佛神力하고 而演說法하야 靡不自謂恒對於佛이러시니라
그때에 여래의 위신력으로 시방 일체 세계의 낱낱 사천하 염부제에서는 여래께서 나무아래 앉아 계신 것을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각각 보살이 있어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 법을 연설하며, 항상 부처님을 대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강설 ; 불법의 근본취지는 모든 사람의 진여불성은 본래로 불신력성(佛神力性)을 가지고 있어서 인연이 부합하면 누구나 언제든지 부처님의 위신력을 천변만화로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여래의 위신력으로 시방 일체 세계의 낱낱 사천하 염부제에서는 여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계신 것을 다 보며, 모든 보살과 모든 사람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법을 연설하며, 항상 부처님을 대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부연설명하자면 그것은 곧 이 세상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불성생명의 무한한 덕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방 일체 세계의 낱낱 사천하 염부제에서는 여래께서 나무아래 앉아 계신 것을 다 보았습니다.”라고 한 것은 세존이 출가하여 6년을 고행하시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신 이 사실이 인도의 부다가야 한 곳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시방 일체 세계에는 낱낱이 사천하가 있으며, 낱낱이 염부제가 있으며, 낱낱이 여래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모습이 천백억화신으로 복사되어 다 같이 동시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4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2, 세존이 수미산에 오르다
爾時에 世尊이 不離一切菩提樹下하고 而上昇須彌하사 向帝釋殿하신대
그때에 세존께서는 일체 보리수나무 아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수미산에 오르시어 제석천의 궁전으로 향하셨습니다.
강설 ; 그래서 모든 사람부처님을 대표하고 있는 비로자나 여래께서는 처음 정각을 이루신 보리수나무 아래를 떠나지 아니한 채로 수미산에 올라 제석궁전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루의 삶을 살아도 본래의 자기 자신을 떠나지 아니하고 천백억화신을 나타낸다. 지옥을 가든 천당을 가든 항상 본래의 그 사람으로서 간다.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든 언제나 본질을 벗어나지 않고 현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일체 보리수나무 아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수미산에 오르시어 제석천의 궁전으로 향하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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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3,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부처님을 보다
時에 天帝釋이 在妙勝殿前이라가 遙見佛來하고
그때에 제석천왕이 묘승전(妙勝殿) 앞에 있다가 멀리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강설 ;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이 있고, 그 제석천에 천왕이 있어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알고 묘승전이라는 궁전 앞에 나와 기다리면서 부처님을 마중하는 모습을 그렸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6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4. 사자좌의 장엄
卽以神力으로 莊嚴此殿하고 置普光明藏獅子之座하니 其座가 悉以妙寶所成이라
제석천왕은 곧 신력으로써 이 궁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보광명장(普光明藏) 사자좌를 베풀어 놓았습니다. 그 사자좌는 모두 아름다운 보배로 이루어져있었습니다.
十千層級으로 逈極莊嚴하고 十千金網으로 彌覆其上하고 十千種帳과 十千種蓋로 周廻間列하고 十千繒綺로 以爲垂帶하고 十千珠瓔으로 周徧交絡하고 十千衣服으로 敷布座上하고 十千天子와 十千梵王이 前後圍遶하고 十千光明이 而爲照耀러라
일일이 일만 층으로 훤칠하게 장엄하였고, 일만의 금으로 된 그물로 그 위를 덮었고, 일만 가지의 휘장과 일만 가지의 일산으로 사이사이 두루두루 벌려 놓았으며, 일만의 비단으로 띠를 드리우고, 일만의 진주영락으로 두루 엮어졌으며, 일만의 의복으로 자리 위에 펴서 깔았으며, 일만의 천자(天子)와 일만의 범왕(梵王)이 앞뒤로 둘러싸고 일만의 광명이 비쳐서 찬란하였습니다.
강설 ; 일일이 일만[十千]이라고 한 것은 부처님이 보살행을 닦을 때 여러 가지 수행을 빠짐없이 닦기 때문에 보살만행(萬行)이라고 한다. 그와 같은 만 가지 인행(因行)을 닦아 얻은 것을 밝혔다. 보살만행을 닦은 사람이라야 이와 같이 아름다운 사자좌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누구나 사자좌에 올라가서 주장자를 휘두르며 일구법문(一句法門)을 거침없이 토한다. 범어사에 계셨던 필자의 노스님, 지효(智曉)스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수행을 철저히 하셨으나 평생에 단 한 번도 법상에 오르지 않았으므로 법 앞에 무서울 정도로 겸손하신 미덕을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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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5. 제석천왕이 부처님을 청하다
爾時에 帝釋이 奉爲如來하야 敷置座已에 曲躬合掌하고 恭敬向佛하야 而作是言호대 善來世尊이시여 善來善逝시여 善來如來應正等覺이시여 唯願哀愍하사 處此宮殿하소서
그때에 제석천왕이 여래를 받들어 자리를 펴놓고 허리를 굽혀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공경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잘 오셨습니다. 선서(善逝)시여, 잘 오셨습니다.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등각(正等覺)이시여, 오직 원하옵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 궁전에 계시옵소서.”
강설 ; 제석천왕이 여래를 받들어 사자좌에 모시면서 세존, 선서, 여래, 응공, 정등각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여 부처님을 영접하였다. 부처님에게는 여래십호(十號)라고 하여 열 가지 이름으로 그 덕을 표현한다. 만약 열 가지 이름을 다 열거하면 너무 장황하여 격에 맞지 않다. 어른을 모실 때도 적절한 존칭을 사용해야 한다. 추사(秋史)선생이 백파(白坡)스님의 비문을 부탁받고 쓴 글이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이다. 이 비문을 두고 지금까지도 설왕설래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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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6, 시방 세계도 이와 같다
爾時世尊이 卽受其請하사 入妙勝殿하시니 十方一切諸世界中에도 悉亦如是하니라
그때에 세존이 곧 그 청을 받으시고 묘승전에 들어가시니 시방의 일체 세계 가운데서도 다 또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강설 ; 부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일거수일투족을 세상과 함께한다. 부처님이 제석천왕의 청을 받으시고 묘승전에 들어갔는데 그와 동시에 시방 일체 모든 세계에서도 이와 똑 같이 하였다. 발걸음 한 번 옮길 때 이 우주와 함께 움직이는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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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7. 제석천왕이 게송을 설하다
爾時에 帝釋이 以佛神力으로 諸宮殿中所有樂音이 自然止息하고 卽自憶念過去佛所에 種諸善根하야 而說頌言호대
그때에 제석이 부처님의 신력으로 모든 궁전 가운데 있던 음악소리가 자연히 그쳐 쉬었습니다. 그리고 곧 과거에 부처님 계신 곳에서 모든 선근을 심었던 것을 스스로 기억하고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강설 ; 세존이 제석천왕의 청을 받아들여 묘승전에 들어갈 때 시방의 일체 세계에서도 동시에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또한 동시에 궁중의 음악은 저절로 그치었다. 때를 맞추어 제석천왕은 자신이 과거에 닦은 바의 성근을 기억하고 묘승전에 지난날 다녀가신 부처님들을 한 분 한 분 열거하면서 게송으로 찬탄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0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迦葉如來具大悲하시니諸吉祥中最無上이라
彼佛從來入此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니이다
가섭(迦葉) 여래께서는 큰 자비를 구족하시니
모든 길상(吉祥)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과거 7불이 다녀가신 것을 소개하면서 석가모니부처님 바로 전의 가섭여래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밝혔다. 가섭여래에 대한 장아함경 중 대본경의 이야기는 이렇게 되어있다.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2만세를 살 때 세상에 출현하셨으며 종성은 바라문이고 성은 가섭이다. 아버지는 범덕(梵德)이며 어머니는 재주(財主)이다. 파라나성(城)에 머무시면서 니구율 나무아래에서 1회를 설법하시고 2만 명을 제도하셨다.”라고 하였다. 가섭 부처님은 과거 7불 중에서 석가모니의 바로 전 부처님이기 때문에 다른 경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부처님이다. 이러한 가섭여래께서 이 궁전에 다녀가셨으므로 이 궁전은 가장 존귀하고 길상한 궁전이라고 찬탄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1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拘那牟尼見無礙하시니諸吉祥中最無上이라
彼佛曾來入此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니이다
구나모니(拘那牟尼)께서는 소견이 걸림이 없으시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구나모니(拘那牟尼)는 구나함모니 여래다. 과거 7불의 가섭 부처님 바로 전 여래시다. 구나함모니불에 대한 장아함경 중 대본경의 이야기에는 이렇다.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3만년을 살 때에 세상에 출현하셨으며 종성은 바라문이고, 성은 가섭이며 아버지는 대덕(大德)이고 어머니는 선승(善勝)이시다. 청정성에 살았으며 오잠바라문 나무 아래에서 1회를 설법하시고 3만 명을 제도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나함모니 여래께서도 이 궁전에 다녀가셨기에 가장 길상하다. 아무리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궁전을 지었다하더라도 귀한 손님이 다녀가지 않는 다면 그것은 곧 천한 집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2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迦羅鳩䭾如金山하시니諸吉祥中最無上이라
彼佛從來入此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니이다
가라구타(迦羅鳩馱)께서는 금산과 같으시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가라구타 여래는 과거 7불의 순서대로 보면 구류손 부처님과 동일한 부처님이다. 구나함모니 부처님의 바로 전 여래시다. 구류손 부처님에 대하여 장아함경 중 대본경의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4만년을 살 때 출현하셨다고 되어있다. 그 외에도 종성은 바라문이며, 성은 가섭이며, 아버지는 예득(禮得)이며, 어머니는 선지(善枝)며, 안화성(安和城)에 살았다고 하였다. 설법은 1회며 제도한 사람들의 숫자는 4만 명이라고까지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3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毘舍浮佛無三垢하시니諸吉祥中最無上이라
彼佛從來入此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니이다
비사부불(毘舍浮佛)께서는 세 가지 때가 없으시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구류손 부처님의 바로 전 여래시다. 비사부 부처님에 대한 장아함경 중 대본경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6만세 일 때 세상에 출현하셨으며, 종성과 성과 부모와 살 던 곳과 설법의 횟수와 제도한 사람들의 숫자와 제자들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다. 세 가지 때가 없다는 것은 몸과 말과 생각의 삼업의 때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4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尸棄如來離分別하시니諸吉祥中最無上이라
彼佛從來入此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니이다
시기여래(尸棄如來)께서는 분별을 여의셨으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비사부 부처님 바로 전 여래시다. 시기여래는 과거 겁의 부처님 중에서 제2부처님이다. 장아함경 중 대본경(大本經)에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7만세가 될 때 세상에 출현하셨으며, 종성은 찰제리이며, 성은 구리야며, 아버지는 명상(明相)이며, 어머니는 광요(光耀)며, 관상성에 살았다. 분타리 나무 밑에서 3회의 설법을 하셨으며, 2십5만 명을 제도하였다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5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毘婆尸佛如滿月하시니諸吉祥中最無上이라
彼佛曾來入此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니이다
비바시불(毘婆尸佛)께서는 보름달과 같으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비바시불은 시기 부처님 바로 전 여래로서 과거 7불의 첫째 부처님이다. 장아함경경의 대본경에는 비바시 부처님과 7불에 대한 설명이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여래가 숙명을 아는 지혜로써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의 인연을 아는 사실을 듣고 싶어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내 말해 주리라.’ ‘비구들이여, 지금부터 91겁 전에 비바시여래지진(毘婆尸如來至眞)이라는 부처님이 있어 이 세상에 나오셨다. 그 다음에는 지금부터 31겁 전에 시기(尸棄)여래지진이라는 부처님이 있어 이 세상에 나오셨다. 비구들이여, 또 그 다음에는 31겁 중에 비사파(毘舍婆)여래지진이라는 부처님이 있어 세상에 나오셨다. 비구들이여, 또 그 다음에 현재의 현겁(賢劫) 중에는 그루손(拘樓孫)이라는 부처님과 구나함(拘那含)이라는 부처님과 가섭(迦葉)이라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다. 그리고 나도 지금 이 현겁 중에서 가장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 부처님은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라고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7불의 명칭과 종성과 성과 부모와 사시던 성(城)과 설법의 횟수와 제도한 사람들의 숫자와 제자의 이름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弗沙明達第一義하시니諸吉祥中最無上이라
彼佛曾來入此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니이다
불사(弗沙)여래께서는 제일의(第一義)를 통달하셨으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불사(弗沙) 여래는 발사(勃沙), 부사(富沙), 보사(補沙), 저사(底沙), 등으로 기록되는데 구사론 18에 “과거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명호가 저사(底沙)며 혹은 이름이 보사(補沙) 그 부처님에게 두명의 보살제자가 있어서 부지런히 범행을 닦았다.”라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7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提舍如來辯無礙하시니諸吉祥中最無上이라
彼佛曾來入此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니이다
제사(提舍) 여래께서는 변재가 걸림이 없으시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含經) 제1권 대본경(大本經)에 “그때에 비바시 부처님에게는 두 제자가 있었다. 하나는 건다(騫茶)요 둘은 제사(提舍)로서 모든 제자 중에서 가장 제일이었다.”라고 하였다. 비바시 부처님의 제자가 성불하여 제사(提舍) 부처님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波頭摩佛淨無垢하시니諸吉祥中最無上이라
彼佛從來入此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니이다
파두마불(波頭摩佛)께서는 청정하여 때가 없으시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파두마(波頭摩)란 붉은 연꽃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명호로는 알 길이 없다. 파두마 부처님은 그 이름의 뜻대로 “청정하여 때가 없다.”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燃燈如來大光明이시니諸吉祥中最無上이라
彼佛從來入此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니이다
연등(燃燈) 여래께서는 큰 광명이시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
그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궁전에 오셨기에
그런 까닭에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연등(燃燈) 여래는 과거불로서 석가모니의 전생에 수기를 준 부처님이다. 정광(定光)여래, 등광(燈光)여래, 보광(寶光)여래, 정광(錠光)여래등으로도 불린다. 과거세에 유동보살로서 보살계를 닦고 있을 때 석가모니는 스스로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연등불(燃燈佛)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길가에서 기다리다가 일곱 송이의 연꽃을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연등불은 미소로써 이를 받으시고는 ‘그대는 미래세에 석가모니불이라는 부처가 될 것이다.’라는 수기를 주셨다고 한다. 혹은 또 연등불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공양물을 준비하지 못해 스스로 진흙길에 엎드려 몸을 밟고 지나가시게 하여 수기를 받았다고도 한다. 이를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라 한다. 그래서 금강경에도 연등불이 석가모니에게 수기하신 이야기가 전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8. 시방의 제석천왕들도 모두 이와 같다
如此世界中忉利天王이 以如來神力故로 偈讚十佛所有功德하야 十方世界諸釋天王도 悉亦如是하야 讚佛功德하니라
이 세계 가운데 도리천왕이 여래의 신력으로써 열 부처님의 공덕을 게송으로 찬탄하는 것과 같이 시방 세계의 모든 제석천왕들도 다 또한 이와 같이 하여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였습니다.
강설 ; 도리천왕이나 제석이나 제석천왕이나 모두가 같은 뜻이다. 열 부처님의 공덕이란 위의 게송에서 보았던 가섭불, 구나모니불, 가라구타, 비사부불, 구류손불 등을 말한다. 역시 화엄경 종지에 의하여 하나의 사건 속에 온 우주의 전체 사건이 다 포함된다는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 一切卽一)과 일중일체 일체즉일(一中一切 一切卽一)이 부분 부분마다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
十三,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9. 궁전이 홀연히 넓어지다
爾時에 世尊이 入妙勝殿하사 結跏趺坐하시니 此殿이 忽然廣博寬容하야 如其天衆의 諸所住處라 十方世界도 悉亦如是하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묘승전에 들어가시어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으시니, 이 궁전이 홀연히 넓어져서 그 하늘대중들이 모두 머무는 곳과 같았으며, 시방세계에서도 다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강설 ; 제석천왕이 묘승전에 다녀가신 과거의 부처님들을 열거하면서 찬탄하는 게송을 다 설하여 마치니, 세존께서 묘승전에 들어와서 가부좌를 맺고 앉으시었다. 그 순간 궁전은 홀연히 넓어져서 도리천의 천중들이 머무는 곳과 같이 되었다. 즉 궁전이 곧 도리천 전체가 되고, 도리천 전체가 묘승전이 되었다. 역시 화엄경의 종지인 일다상용(一多相容)과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이치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이 도리천의 수미산 정상에 올라와서 제석천왕의 영접을 받으며 묘승전에 들어와서 가부좌를 맺고 정좌하시는 내용의 승수미산정품을 마쳤다.
승수미산정품 끝
화엄경 강설 제16권 2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강설 ; 제3회 설법의 서론으로서 부처님이 수미산정상에 오르시고 나니, 다시 시방에서 각각 큰 보살이 불찰미진수 보살들과 함께 모여와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품이다. 제3회 설법의 본론인 십주(十住)법문을 설하기 위한 서막이 이와 같이 수많은 보살들이 등장하고 엄청난 노래와 연주가 시방세계를 진동시킨다. 수미산정에 오르는 품과 수미정상게찬품은 십주법문의 설법을 위한 사전 의식이지만 그 의식의 내용 중에 화엄경에서 전달하고자하는 진정한 이치가 사이사이에 녹아있다.
1. 보상대중들이 모이다
爾時에 佛神力故로 十方各有一大菩薩이 一一各與佛刹微塵數菩薩로 俱하사 從百佛刹微塵數國土外諸世界中하야 而來集會하시니라
그때에 부처님의 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었습니다. 낱낱이 각각 불찰미진수(微塵數)의 보살과 함께 하시어, 백 불찰미진수의 국토 밖에 있는 모든 세계로부터 좇아와서 모였습니다.
강설 ; 불교에서는 누가 무엇을 하든 항상 빠지지 않는 이야기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하여 이와 같은 사실이 이뤄졌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도 또한 보살들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들은 모두 불찰 미진수의 보살들과 함께하여 이곳에 모여왔다고 하였다. 그와 같은 부처님의 위신력이란 무엇인가. 사람사람이 본래로 가지고 타고난 진여불성성(眞如佛性性)의 위신력이다. 일체 생명이 모두 가지고 태어난 무한능력성의 위신력이다. 그것은 곧 법신부처님과 보신부처님과 화신부처님을 다 포함하여 함께한 본래의 자성 부처님의 위신력이다. 이와 같이 법신부처님과 보신부처님과 화신부처님을 다 포함하여 함께한 사실을 부처님의 위신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2. 열 명의 보살 이름
其名曰法慧菩薩과 一切慧菩薩과 勝慧菩薩과 功德慧菩薩과 精進慧菩薩과 善慧菩薩과 智慧菩薩과 眞實慧菩薩과 無上慧菩薩과 堅固慧菩薩이요
그들의 이름은 법혜(法慧)보살과 일체혜(一切慧)보살과 승혜(勝慧)보살과 공덕혜(功德慧)보살과 정진혜(精進慧)보살과 선혜(善慧)보살과 지혜(智慧)보살과 진실혜(眞實慧)보살과 무상혜(無上慧)보살과 견고혜(堅固慧)보살이었습니다.
강설 ;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었으며, 그 낱낱 보살이 각각 불찰미진수(微塵數)의 보살들과 함께 하였는데 시방의 대표보살들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시방의 대표보살들의 이름은 모두가 지혜 혜[慧]자 라는 같은 글자로 이름 지어졌다. 즉 법의 지혜, 일체의 지혜, 수승한 지혜, 공덕의 지혜, 정진의 지혜 등이다.
우리나라에 화엄경이 처음 들어 온 것이 신라의 의상(義湘,625~702)스님으로부터다. 의상스님이 당나라로부터 화엄경을 배워 온 후로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세워서 화엄사상을 크게 전파하였다. 그 때는 60권 본 화엄경이었다. 화엄경의 영향을 받아서 한 가족에게 형제가 있으면 반드시 같은 항렬의 이름을 짓는 관습이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화엄경이 들어온 이후로는 우리나라의 불교는 화엄불교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민중들의 생활에까지 화엄경의 영향이 크게 미쳤던 것이다.
(주)중악 팔공산 미리사(美理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북악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보광사(普光寺), 웅주 가야협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岬寺), 양주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악산 국신사(國神寺), 한주 부아산 청담사(淸潭寺) 등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3. 보살들이 온 세계
所從來土는 所謂因陀羅華世界와 波頭摩華世界와 寶華世界와 優鉢羅華世界와 金剛華世界와 妙香華世界와 悅意華世界와 阿盧那華世界와 那羅陀華世界와 虛空華世界라
그들이 온 국토는 인다라화(因陀羅華)세계와 파두마화(波頭摩華)세계와 보화(寶華)세계와 우발라화(優鉢羅華)세계와 금강화(金剛華)세계와 묘향화(妙香華)세계와 열의화(悅意華)세계와 아로나화(阿盧那華)세계와 나라타화(那羅陀華)세계와 허공화(虛空華)세계들이었습니다.
강설 ; 보살들이 온 세계는 모두 화(華)자가 들어 있는 세계다. 동서남북 사유상하의 열 세계다. 이와 같은 열 세계에서 각각 큰 보살들이 무수한 대중들을 거느리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모여왔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4. 보살들이 섬긴 부처님
各於佛所에 淨修梵行하시니 所謂殊特月佛과 無盡月佛과 不動月佛과 風月佛과 水月佛과 解脫月佛과 無上月佛과 星宿月佛과 淸淨月佛과 明了月佛이라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청정하게 범행(梵行)을 닦았으니, 이른바 수특월(殊特月) 부처님과 무진월(無盡月) 부처님과 부동월(不動月) 부처님과 풍월(風月) 부처님과 수월(水月) 부처님과 해탈월(解脫月) 부처님과 무상월(無上月) 부처님과 성수월(星宿月) 부처님과 청정월(淸淨月) 부처님과 명료월(明了月) 부처님이셨습니다.
강설 ; 보살들이 섬긴 부처님들도 모두 같은 월(月)자가 들어간 이름이다. 시방에는 각각 세계가 있고, 세계마다 부처님이 계시고, 그 부처님들의 제자인 보살들이 많은 대중들을 거느리고 법회에 동참하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5. 부처님께 예배하고 앉다
是諸菩薩이 至佛所已에 頂禮佛足하고 隨所來方하야 各化作毘盧遮那藏師子之座하사 於其座上에 結跏趺坐하시니라
이 모든 보살들이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온 방위를 따라 각각 비로자나장 사자좌를 변화하여 만들고, 그 사자좌 위에 가부좌를 맺고 앉으셨습니다.
강설 ; 시방의 모든 보살들이 무수한 권속보살들을 거느리고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예배하고, 각자가 온 방위를 따라 사자좌를 변화하여 만들고 그 위에 가부좌를 맺고 앉았다. 시방에서 보살대중들이 모여오면 반드시 자신들이 온 방위에 앉는다는 것은 질서정연하게 행사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와 같은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보라. 얼마나 장엄한가.
화엄경 강설 제16권 2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6. 일체 세계도 그와 같다
如此世界中須彌頂上에 菩薩來集하야 一切世界도 悉亦如是하야 彼諸菩薩의 所有名字와 世界佛號가 悉等無別하니라
이 세계의 수미산 꼭대기에 보살들이 와서 모인 것처럼 일체 세계에서도 다 또한 그와 같았습니다. 저 모든 보살들의 이름과 세계와 부처님 명호도 다 같아서 차별이 없었었습니다.
강설 ; 화엄경은 언제나 하나의 사건이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나면 그 사건은 곧 전 우주에서 동시에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온갖 동물과 식물들도 마찬가지다. 한 가정에 새로운 사람이 한 사람 들어오면 그 가정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다. 큰 숲에 나무 한 그루가 새로 들어오거나, 혹은 잘려나가거나 하면 그 영향은 숲 전체에 미친다. 모든 존재가 가까운 인연은 크게 영향을 받고, 먼 인연은 작게 영향을 받는 것이 다를 뿐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7. 부처님이 광명을 놓다
爾時에 世尊이 從兩足指하야 放百千億妙色光明하사 普照十方一切世界須彌頂上帝釋宮中佛及大衆하야 靡不皆現이시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두발의 발가락으로부터 백 천억의 미묘한 빛의 광명을 놓으시어 시방의 일체 세계 수미산 꼭대기의 제석궁전 가운데 계시는 부처님과 대중들을 널리 비추시니, 모두 다 환하게 나타났습니다.
강설 ; 제3회 도리천 수미산에서 설하는 법문은 10주(住)법문이다. 부처님이 두발의 발가락으로부터 백 천억의 미묘한 빛의 광명을 놓는다는 것은 사람이 몸을 지탱하고 머무는 것은 모두가 발가락으로 균형을 잡아서 설 수 있듯이 52위의 수행점차가 제대로 수립되려면 열 가지 머무는 십주법문이라야 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믿음이 바탕이 되는 십신법문을 설할 때는 발바닥에서 광명을 놓은 것과 같은 뜻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8. 시방 보살들의 찬탄
(1) 동방 법혜(法慧)보살의 찬탄
爾時에 法慧菩薩이 承佛威神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曰하사대
그때에 법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가, 부처님이 광명을 놓다
佛放淨光明하시니普見世導師가
須彌山王頂의妙勝殿中住로다
부처님께서 놓으시는 청정한 광명으로
널리 보니 세간의 도사가
수미산 정상의
묘승전 가운데 머물도다.
강설 ; 먼저 동방 법혜(法慧)보살이 부처님을 찬탄한다. 부처님이 광명을 놓으니 그 광명으로 다시 부처님이 수미산 정상의 묘승전에 머물고 계시는 것을 친견할 수 있음을 밝혔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보는 데도 광명이 필요하고, 부처님을 이해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도 역시 지혜광명이 있어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30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一切釋天王이請佛入宮殿하야
悉以十妙頌으로稱讚諸如來로다
일체 제석천왕들이
부처님께서 궁전에 들어오시기를 청하여
모두 열 가지 아름다운 게송으로
모든 여래를 칭찬하도다.
강설 ; 열 가지 아름다운 게송이란 승수미산정품에서 설한 게송을 말한다. “가섭(迦葉) 여래께서는 큰 자비를 구족하시니 모든 길상(吉祥) 가운데 가장 높으사”라고 하였으며, 또 구나모니(拘那牟尼)께서는 소견이 걸림이 없으시니 모든 길상 가운데 가장 높으사“라고 한 등등의 내용으로 찬탄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 그 누가 특징이 없으며, 그 누가 장점이 없겠는가. 또 사람뿐이겠는가. 두두 물물 일체가 다 특징이 있으며 다 장점이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31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彼諸大會中에所有菩薩衆이
皆從十方至하야化座而安坐로다
저 모든 큰 법회 가운데의
보살대중들이
모두 시방으로부터 와서
변화하여 만든 사자좌에 편안히 앉으셨네.
강설 ; 이 세계의 수미산 꼭대기에 시방의 보살들이 와서 모인 것처럼 일체 세계에서도 다 또한 그와 같기 때문에 “저 모든 큰 법회 가운데”라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3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彼會諸菩薩이皆同我等名이며
所從諸世界도名字亦如是로다
저 모임의 모든 보살들이
모두 함께 나와 같은 이름이며
온 곳의 모든 세계도
이름 또한 이와 같네.
강설 ;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수미산에서 다 같은 십주법문을 설하기 때문에 보살들의 이름도 다 같은 법혜(法慧)이며, 온 곳의 세계와 그 이름도 다 같다. 한 사람의 몸에 감기가 걸리면 5장 6부와 3백 60골절과 60조의 전체 세포도 다 같이 감기에 걸린다. 이 또한 모든 존재의 본래 갖춘 소통성(疏通性)이며, 통일성(統一性)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3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本國諸世尊도名號悉亦同하시니
各於其佛所에淨修無上行이로다
본 국토의 모든 세존께서도
명호가 다 또한 같으시니
각각 그 부처님 처소에서
가장 높은 행을 깨끗이 닦으셨네.
강설 ; 시방에서 온 모든 보살들이 본래 섬긴 부처님과 본래의 국토다. 그 국토 그 세존들도 또한 다 같은 명호이다. 우주법계의 일체 존재가 이와 같이 엮여서 함께 돌아가는데 어찌 다른 존재라 하며, 어찌 남이라 하겠는가.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3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나, 여래의 자재한 힘
佛子汝應觀如來自在力하라
一切閻浮提에皆言佛在中이로다
불자들이여, 그대들은 마땅히 볼지니라.
여래의 자재하신 힘으로
일체의 염부제에
부처님이 계신다 말하네.
강설 ; 여래가 중생보다 우수한 힘은 무엇인가. 여래의 자재하신 힘으로 일체의 염부제에 부처님이 다 계시는 것을 아시고 그 사실을 설법하여 중생에게 깨우쳐 주는 일이다. 여래 수많은 힘 중에서 가장 중요한 힘이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3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我等今見佛이住於須彌頂하시며
十方悉亦然하니如來自在力이로다
우리들이 지금 보니
부처님께서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데
시방에서도 다 또한 그러하니
여래의 자재하신 힘이셔라.
강설 ; 수미산 정상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처럼 시방세계에서도 다 같이 부처님이 계시는 것을 우리들도 또한 본다. 사람사람이 본래 갖춘 여래의 자재한 힘의 능력으로. 소동파(蘇東坡)거사가 우렁차게 흘러가는 개울물소리를 듣고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이치를 깨닫고 지은 시가 있다.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는 부처님의 광장설법이요,
산천초목들은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이어라.
밤에 되니 8만 4천 게송이나 되는 것을
다른 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깨우쳐주랴.”
화엄경 강설 제16권 3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다, 원인을 들어서 결과를 말하다
一一世界中에發心求佛道하시니
依於如是願하야修習菩提行이로다
낱낱의 세계 가운데서
발심하여 불도를 구하시니
이러한 서원을 의지하여
보리행(菩提行)을 닦으셨도다.
강설 ; 어떤 세계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신분으로 살든 부처님은 항상 불도를 구하는 마음뿐이다. 이와 같은 꿈과 서원과 희망으로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보리행을 닦은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3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佛以種種身으로遊行徧世間하사대
法界無所礙하시니無能測量者로다
부처님께서 가지가지 몸으로
세간에 두루 노니시되
법계에 걸림이 없으시니
능히 측량할 이가 없도다.
강설 ; 중생들의 몸이 가지가지이므로 그 중생들을 교화하려면 부처님의 몸도 가지가지로 나타내어 세간에 노니신다. 천백억화신이 곧 그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3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慧光恒普照하사世暗悉除滅하시니
一切無等倫이라云何可測知리오
지혜의 빛이 항상 널리 비치어
세간의 어두움 다 소멸 하시니
아무도 짝할 이가 없어라.
어떻게 가히 헤아려 알리오.
강설 ; 현상계에는 태양의 빛이나 달빛이나 전기의 빛 등으로 어둠을 소멸하고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은 지혜의 가르침이 빛이 되어 어리석음을 소멸한다. 시방 보살들의 찬탄 중에서 동방 법혜(法慧)보살의 찬탄은 이와 같이 끝을 맺는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3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2) 남방 일체혜(一切慧)보살의 찬탄
爾時에 一切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일체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가, 부처님을 보아도 보지 못함
假使百千劫에常見於如來라도
不依眞實義하면而觀救世者인댄
설사 백 천 겁 동안에
항상 여래를 보더라도
진실한 뜻에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자를 본다면
화엄경 강설 제16권 40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是人取諸相하야增長癡惑網하며
繫縛生死獄하야盲冥不見佛이로다
이 사람은 모든 모양에 집착하여
어리석고 미혹한 그물만 증장하며
생사의 지옥에 얽매여서
눈이 멀어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강설 ;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수행도량에 살면서 부처님을 뵙고 경전을 많이 읽더라도 여래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수행도량에 사는 것이 아니며 부처님을 뵙는 것이 아니며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경전을 펼치고 읽으려할 때 반드시 외우는 게송이 있다.
“가장 높고 깊고 깊은 미묘한 법이여,
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워라.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받아가지니
여래의 진실한 뜻 알기를 원합니다.”
여래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는 모양에만 집착하여 어리석고 미혹한 그물만 증장하여 눈이 멀어 부처님을 보지 못하고 진실한 법을 알지도 못하리라. 불법은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심안으로 보고 혜안으로 깨닫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41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나, 법을 보아야 부처님을 본다
觀察於諸法컨댄自性無所有니
如其生滅相하야但是假名說이로다
모든 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의 성품이 있는 것이 없으니
그 생멸하는 모양과 같이
단지 거짓 이름만 말할 뿐이네.
강설 ; 모든 법이란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이며, 그 여섯 가지 근본의 대상인 물질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그 외의 사건들과 그리고 근본과 대상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의식작용 모두를 말한다. 이것을 18계라 하는데 이 모든 법은 자세히 관찰해보면 독립된 자기 성품이 없다. 마치 생멸하는 모양과 같이 생멸이라는 거짓 이름뿐이지 실체가 없다. 생도 멸도 이름은 있으나 그 실상은 없다. 소위 공관(空觀)과 가관(假觀)을 함께 밝혔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4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一切法無生이며一切法無滅이니
若能如是解하면諸佛常現前이로다
일체 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그 앞에 나타나리라.
강설 ; 불교의 관점에서 보는 일체 존재의 실상을 밝힌 매우 유명한 게송이다. 반야심경에도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였으며, 법화경에서도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현상이 항상 머문다.”라고 하였다. 모두가 존재의 불생불멸의 이치를 밝힌 내용이다. 눈앞에 나타난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영원토록 새롭게 생기는 것도 없으며 아주 없어지는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그릇에 담겼던 물이 증발하여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수증기가 되어 하늘에서 구름으로 있다가 비가 되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산천초목 이디인가에 머물면서 천변만화로 돌고 도는 것이다. 일체 존재가 그와 같이 천변만화하면서 불생불멸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4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法性本空寂하야無取亦無見이니
性空卽是佛이라不可得思量이로다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하여
취할 수도 없고 또한 볼 수도 없어
성품이 공한 것이 곧 부처라
생각으론 얻을 수 없도다.
강설 ;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하다.”는 것은 존재의 본질에서 하는 말이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들은 이와 같으나 그 본질은 텅 비어 공적하다. 공적하기에 취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성품이 공적한 본질의 자리가 곧 부처다. 이와 같은 경지는 생각이나 사량 분별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4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知一切法이體性皆如是면
斯人則不爲煩惱所染着이로다
만약 일체 법이
자체의 성품이 모두 이와 같은 줄 알면
이 사람은 곧
번뇌에 물들지 아니하리라.
강설 ; 모든 법의 성품 본래 공적하여 취할 수도 없고 또한 볼 수도 없는 줄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번뇌도 없고 번뇌가 없으므로 세상사에 물들지도 않는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4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다, 모양으로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凡夫見諸法에但隨於相轉하고
不了法無相일새以是不見佛이로다
범부가 모든 법을 보면
다만 모양을 따라 구르고
법의 모양이 없는 줄을 알지 못할 새
이로써 부처님을 보지 못하도다.
강설 ; 어리석은 범부는 무엇을 보든 눈앞의 현상만 보고 현상의 본질은 볼 주 모른다. 부처님을 보는 일도 너무나 현상에 익숙하여 있으므로 부처님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중생을 상견중생(相見衆生), 또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부른다. 금강경에서는 일찍이 그와 같은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만약 형색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사람이다.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라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4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라, 부처님은 법과 하나다
牟尼離三世하사諸相悉具足하시며
住於無所住하사普徧而不動이로다
모니께서 삼세를 여의시고
모든 모양 다 구족하시어
머무는 바 없이 머무시며
널리 두루 하셔도 움직이지 않으시네.
강설 ; 석가모니 부처님은 응화신 부처님이면서 곧 법신 부처님이다. 그래서 32상과 80종호를 다 갖춘 응화신으로 오셨으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떠나 계시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머무는 바 없이 머문다.
청량스님이 해석하였다. “부처님은 법과 같이 하나다. 이를테면 공한 법과 같은 까닭에 삼세를 떠나있고, 거짓 법과 같은 까닭에 온갖 형상을 구족하였고, 유와 무를 쌍으로 부정하는 까닭에 머무름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진여의 본체와 같은 까닭에 두루 하되 동요가 없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4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마, 법을 앎으로 부처님을 본다
我觀一切法하고皆悉得明了하니
今見於如來에決定無有疑로다
내가 모든 법을 관찰하고
모두 다 분명하게 요지하니
이제 여래를 친견함에
결정코 의심이 없도다.
강설 ; 여래의 실상을 제대로 보아서 의혹이 없게 하려면 제법의 실상을 관찰하여 명료하게 알아야 한다. 제법의 실상은 곧 여래의 실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4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바. 공덕을 법혜보살에게 미루다
法慧先已說如來眞實性일새
我從彼了知菩提難思議로다
법혜보살이 이미 먼저
여래의 진실한 성품을 말씀하였으니
저는 그를 따라서
사의하기 어려운 보리를 알았습니다.
강설 ; 남방 일체혜(一切慧)보살은 법혜보살이 여래의 진실한 성품에 대하여 이미 먼저 말씀하셨으므로 공덕을 법혜보살에게 미루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법혜보살의 설법보다 일체혜보살의 설법 안에 여래의 진실한 성품에 대하여 더욱 잘 밝히고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4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3) 서방 승혜(勝慧)보살의 찬탄
爾時에 勝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승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가, 여래의 지혜는 알 수 없다
如來大智慧가希有無等倫하시니
一切諸世間이思惟莫能及이로다
여래의 큰 지혜
희유하여 짝할 이 없어라.
일체 모든 세간들이
생각으로 능히 미칠 수 없도다.
강설 ; 여래의 지혜는 참으로 위대하다. 깊고 높으며 넓고 크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래의 지혜를 어떻게 하면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큰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화엄경과 같이 부처님의 지혜를 밝힌 경전의 가르침을 깊이 공부하면 미혹한 중생이라 하더라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50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나, 범부들의 미혹
凡夫妄觀察하야取相不如理하나니
佛離一切相이라非彼所能見이로다
범부는 망령되이 관찰하므로
모양만 취하여 이치와 같지 못하니
부처님은 일체 모양을 여의었기에
저들이 능히 보지 못하도다.
강설 ; 범부들은 미혹하여 눈앞에 나타난 현상만을 취하고 본질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의 현상을 다 떠나서 존재의 본질만을 보고 있다. 범부는 그와 같은 경지를 알 수 없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51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迷惑無知者는妄取五蘊相하야
不了彼眞性하나니是人不見佛이로다
미혹하여 앎이 없는 사람은
망령되이 오온(五蘊)의 모양만 취하여
저 참된 성품을 알지 못하니
이런 사람은 부처님을 보지 못하도다.
강설 ; 오온(五蘊)이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다. 육신인 색(色)과 정신의 네 가지 요소인 감수하는 작용과 생각하는 작용과 생각을 진행하는 행(行)과 인식하는 본체가 그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으로 나타난 현상일 뿐 사람의 본질은 아니다. 즉 참된 성품은 아니다. 오온에 속아서 사는 사람은 끝내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5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다, 법신불을 보는 길
了知一切法이自性無所有니
如是解法性하면則見盧舍那로다
일체의 법을 깨달아 알면
자체의 성품이 없나니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이해하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게 되리라.
강설 ; 일체의 존재는 자체로서의 고정 불변하는 성품은 없다.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알면 바로 법신불과 보신불과 화신불을 보게 될 것이다. 노사나 부처님이란 법신 부처님인 비로자나 부처님과 함께 이르는 말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5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因前五蘊故로後蘊相續起하나니
於此性了知하면見佛難思議로다
앞의 오온을 인한 연고로
뒤의 온이 서로 이어 일어나나니
여기서 성품을 알면
생각하기 어려운 부처님을 보리라.
강설 ; 사람의 본질인 자성은 무엇으로 감지하는가. 곧 오온에서 자성을 안다. 오온이 자성은 아니지만 오온을 떠나서 달리 자성을 아는 것은 아니다. 전생의 오온과 후생의 오온이 교차하며 상속하는 그 과정에서 오온의 자성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예컨대 꽃과 잎이 곧 봄은 아니지만 꽃이 피고 잎이 피는 그 과정에서 봄을 느끼고 아는 것과 같다. 자성이 현상은 아니지만 현상에서 본질인 자성을 아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5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라, 비유로써 밝히다
譬如暗中寶를無燈不可見인달하야
佛法無人說이면雖慧莫能了로다
비유컨대 어둠 속에 있는 보배를
등불 없이는 볼 수 없듯이
부처님의 법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능히 알지 못하네.
강설 ; 화엄경에서 설법이나 강의의 중요성을 밝힌 명구다. 큰 보배 창고에 들어가도 밝은 등불이 없다면 그 창고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부처님의 8만 4천 가르침 속에 이와 같은 화엄경이라는 보물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불교를 믿는다 해도 대개는 마치 수박 겉핥기와 같아서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모른다. 그러므로 화엄경을 깊이 공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설해줘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5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亦如目有瞖에不見淨妙色인달하야
如是不淨心이면不見諸佛法이로다
마치 눈에 눈병이 생기면
청정하고 아름다운 빛을 보지 못하듯이
이와 같이 마음도 청정하지 못하면
모든 부처님 법을 보지 못하리라.
강설 ; 또 불법을 이해하는 데는 청정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법을 설해주더라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것을 선근이라 한다. 청정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세속적 가치관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뛰어난 대승법을 만나면 기쁨에 겨워하는 마음이다. 청정하지 못한 마음은 마치 눈병과 같다. 눈병 있는 사람은 청정하고 아름다운 빛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5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又如明淨日을瞽者莫能見인달하야
無有智慧心이면終不見諸佛이로다
또 밝고 깨끗한 해를
소경은 볼 수 없듯이
지혜의 마음이 없으면
마침내 모든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강설 ; 부처님의 실상을 보고, 불교를 제대로 알고, 불교에 애착하는 사람은 참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마치 소경이 밝은 해를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5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能除眼瞖하고捨離於色想하야
不見於諸法이면則得見如來로다
만약 능히 눈병을 제하고
형색과 생각을 여의며
모든 법까지 보지 않으면
곧 여래를 보리라.
강설 ; 금강경에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라고 하였다. 모든 형상도 색상도 다 떠나고 일체 존재까지 존재로 보지 않아야 곧 여래를 본다. 여래의 실상은 육안으로 형상을 보듯이 보는 것이 아니다. 법안과 불안과 혜안과 영안으로 보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5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마, 공덕을 일체혜(一切慧)보살에게 미루다
一切慧先說諸佛菩提法일새
我從於彼聞하고得見盧舍那로다
일체혜보살이 먼저
모든 부처님의 보리법을 말씀하시니
저는 그에게서 듣고
노사나 부처님을 뵈었습니다.
강설 ; 승혜보살이 앞에서 나왔던 일체혜보살의 설법을 찬탄하고 자신은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겸손해 하는 내용이다. 보살의 마음 씀씀이는 언제나 이와 같이 겸손과 하심을 중요시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5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4) 북방 공덕혜(功德慧)보살의 찬탄
爾時에 功德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공덕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가, 범부들의 망령
諸法無眞實이어늘妄取眞實相일새
是故諸凡夫가輪廻生死獄이로다
모든 법에 진실이 없거늘
망령되이 진실한 모양을 취하네.
그러므로 모든 범부들이
생사의 옥에서 윤회(輪廻)하도다.
강설 ; 모든 법은 텅 비어 공하다. 변하지 않는 진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범부들은 망령되게 허망한 현상에서 진실하며 영원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한다. 그래서 보는 족족 집착하고 따라다니며 윤회한다. 마치 무지개를 손으로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지랑이를 손으로 잡으려는 것과 같다. 이것이 범부들의 망령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60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言詞所說法을小智妄分別일새
是故生障礙하야不了於自心이로다
말로 설명한 법을
조그마한 지혜로 망령되이 분별할 새
그런 까닭에 장애가 생겨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도다.
강설 ; 법은 말이 아니다. 실상은 말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언어로 진리에 가깝도록 설명한다. 또 마음,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이라는 말은 말일뿐이지 마음은 아니다. 어리석은 범부는 조그마한 지혜로 그 말을 따라 이리저리 분별하여 진리인양 여기고 마음인양 여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61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不能了自心이어니云何知正道리오
彼由顚倒慧하야增長一切惡이로다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바른 도(道)를 알겠는가.
저 전도(顚倒)된 지혜로 말미암아
온갖 악만 증장하도다.
강설 ; 화엄경은 일심(一心), 또는 유심(唯心)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마음의 실체를 깨닫는 것을 정각이라고도 한다. 자기 마음의 실체를 알면 도를 알게 되고 바른 지혜가 증장한다. 또 “불교를 받든다는 것은 곧 마음을 잘 단속하고 마음을 잘 관리하는 일이다.”라고도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6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不見諸法空하야恒受生死苦하나니
斯人未能有淸淨法眼故로다
모든 법이 공(空)함을 보지 못하고
항상 생사의 고통을 받으니
이 사람은
청정한 법의 눈[眼]이 없는 까닭이로다.
강설 ; 모든 법이 공(空)하다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잘 가르치고 있다. 제법이 공한 모양은 불생불멸이며, 또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공에는 육근도 없으며, 육진도 없으며, 육식도 없으며, 12인연도 없으며, 고집멸도도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청정한 눈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6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나, 참다운 깨달음을 보이다
我昔受衆苦는由我不見佛이니
故當淨法眼하야觀其所應見이로다
내가 옛적에 온갖 고통을 받은 것은
내가 부처를 보지 못한 까닭이니
마땅히 법의 눈을 깨끗이 하여
응당히 볼 것을 보리로다.
강설 ; 부처님의 진실한 모양을 보려면 청정한 법의 눈을 갖춰야 한다. 32상과 80종호라는 형상을 부처님이라 하거나, 또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한량없는 목숨과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공덕과 한량없는 지혜와 한량없는 자비의 부처님은 꿈에도 보지 못하리라. 마땅히 법의 눈을 깨끗이 하여 응당히 이와 같은 실상을 모아야 할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6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得見於佛하면其心無所取니
此人則能見如佛所知法이로다
만약 부처님을 보면
그 마음에 취하는 바가 없으니
이 사람은 곧 능히
부처님이 아신 바와 같은 법을 보리로다.
강설 ; 만약 진여자성과 법성생명의 한량없는 목숨과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공덕과 한량없는 지혜와 한량없는 자비의 부처님을 보면 밖을 향해 취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이 사람은 곧 부처님이 아신 바와 같은 법을 보았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6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見佛眞法이면則名大智者니
斯人有淨眼하야能觀察世間이로다
만약 부처님의 진실한 법을 본다면
곧 대지자(大智者)라 이름 할 것이니
이 사람은 청정한 눈이 있어
능히 세간을 관찰하리라.
강설 ; 불교인은 언제나 여래의 진실한 뜻을 알기를 발원한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간경을 하든 여래의 신실한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여래의 진실한 뜻만 안다면 그가 곧 여래다. 이 사람은 불안과 혜안과 법안과 영안으로 세상을 꿰뚫어 보게 되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6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無見卽是見이라能見一切法이니
於法若有見이면此則無所見이로다
봄이 없음[無見]이 곧 옳은 봄[是見]이니
능히 일체 법을 볼 수 있으리라.
법에 만약 봄이 있다면
이것은 곧 본 것이 없는 것이로다.
강설 ; 무엇을 보되 보아도 봄이 없는 것이 옳게 보는 것이다. 만약 볼 때마다 보는 것이 다 있다면 그 보는 것을 다 어떻게 할 것인가. 보아도 보는 것에 걸림이 없어야 일체 법을 볼 수 있으며 또한 법을 보는 것이 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6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다, 자각각타(自覺覺他)
一切諸法性이無生亦無滅이니
奇哉大導師여自覺能覺他로다
일체 모든 법의 성품이
남[生]도 없고 또한 없어짐도 없나니
신기하도다. 큰 도사시여,
스스로 깨닫고 능히 남도 깨닫게 하셨도다.
강설 ; 일체 제법의 성품은 불생이며 불멸이다. 현상은 끊임없이 천변만화하지만 그 본질은 불생불멸이다. 만약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하는 이치를 안다면 곧 깨달은 경지며, 큰 도사이다. 세존은 이와 같은 이치로 자신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6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라, 공덕을 승혜보살에게 미루다
勝慧先已說如來所悟法일새
我等從彼聞하고能知佛眞性이로다
승혜보살이 나보다 먼저
여래의 깨달은 법을 말하시니
우리들은 그에게서 듣고
능히 부처님의 참된 성품 알았노라.
강설 ; 북방 공덕혜(功德慧)보살이 앞서 설법한 승혜보살에게 그 공덕을 미루었다. 역시 자신이 설한 것은 여래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이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6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5) 동북방 정진혜(精進慧)보살의 찬탄
爾時에 精進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觀察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정진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가, 무상관(無相觀)을 말하다
若住於分別이면則壞淸淨眼이라
愚癡邪見增하야永不見諸佛이로다
만약 분별에 머물면
청정한 눈을 파괴하여
어리석고 삿된 소견만 더하여
영원히 모든 부처님 보지 못하리라.
강설 ; 본래 형상이란 없는 것인데 거짓 형상에서 분별을 하면 형상을 쫒아 다니느라고 본래 갖춘 청정한 눈을 파괴하게 된다. 그래서 형상만 따르는 어리석고 삿된 소견만 더하여 부처님의 진실한 모습은 보지 못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70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能了邪法하야如實不顚倒하며
知妄本自眞하면見佛則淸淨이로다
만약 삿된 법인 줄 알면
실상과 같아서 전도하지 아니하고
허망을 알아 본래 스스로 참다우면
부처님 보는 것이 곧 청정하리라.
강설 ; 눈앞에 나타난 현상들이 삿된 법인 줄을 알면 그대로가 실상이며 전도되지 않는다. 현상이 허망한 것임을 알아 스스로 참다우면 부처님의 실상을 바로 보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71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有見則爲垢라此則未爲見이니
遠離於諸見하야사如是乃見佛이로다
봄[見]이 있으면 곧 때[垢]가 됨이라
이것은 아직 보는 것이 되지 않나니
모든 봄을 멀리 여의어야
이와 같이 부처를 보리라.
강설 ; 형상을 실로 있는 것으로 여겨서 그것을 봄이 있으면 그것은 곧 허망함이며 번뇌가 된다. 형상을 보되 보는 것을 멀리 떠나야 부처의 실상을 보게 되리라. 이것이 무상관(無相觀)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7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나, 무생관(無生觀)을 말하다
世間言語法을衆生妄分別하나니
知世皆無生이면乃是見世間이로다
세간의 말로 하는 법을
중생이 망령되이 분별하나니
세간이 모두 생멸이 없는 줄 알면
비로소 세간을 보게 되리라.
강설 ; 세간의 현상은 끊임없이 생멸하고 또 생멸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언제나 불생불멸이다. 본질이 불생불멸하는 이치를 알면 세간의 실상을 비로소 보게 되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7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見見世間이면見則世間相이니
如實等無異라야此名眞見者로다
만약 봄으로 세간을 보면
봄이 곧 세간의 모양이니
실상과 같아 다름이 없어야
이 이름이 참으로 보는 자이니라.
강설 ; 망령된 소견으로 세간을 보면 그와 같이 보는 것은 진실한 모습이 아닌 세간의 드러난 모습이다. 그러나 세간의 실상을 실상과 같이 보아야 참으로 본질을 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7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見等無異하야於物不分別이면
是見離諸惑하야無漏得自在로다
만약 평등하여 다름이 없음을 보고
사물에 분별하지 않으면
이렇게 보는 것은 모든 의혹을 여의어
샘이 없어 자재를 얻음이로다.
강설 ; 모든 존재의 공성(空性)은 평등하다. 사물의 공성을 보면 어떤 차별상도 다 차별하다고 분별하지 않는다. 사물의 공성, 사건의 공성, 사람의 공성, 사람이 짓는 모든 것의 공성을 보면 어떤 의혹도 없다. 그래서 무루(無漏)의 경지가 되어 일체에 자재하다. 사람이 일체 존재에 자재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를 유성(有性)으로 보고 차별로 보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7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다, 무성관(無性觀)을 말하다
諸佛所開示一切分別法을
是悉不可得이니彼性淸淨故로다
모든 부처님이 열어 보이신
일체 분별의 법을
이것을 다 얻을 수 없으니
그 성품이 청정한 까닭이로다.
강설 ; 모든 존재의 무상(無相)과 무생(無生)과 무성(無性)은 본질을 보는 견해이다. 만약 현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라면 그것은 형상이며, 생멸이며, 고정된 자성이 있어야 한다. 불교는 언제나 현상에 미혹하지 말고 본질을 보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열어 보이신 온갖 가르침은 근기를 따르고 상황을 따라 분별해 보인 것이다. 그 본성은 텅 비어 청정[空]하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7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法性本淸淨하야如空無有相일새
一切無能說이니智者如是觀이로다
법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여
허공과 같아 모양이 없을 새
일체를 능히 말할 수 없으니
지혜 있는 자는 이와 같이 보리라.
강설 ; 법성은 본래 텅 비어 청정하다. 허공과 같아서 형상이 없으며 차별상도 없다. 그래서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하였다. 즉 존재의 본질은 텅 비었으며 차별하지 않고 모두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존재의 원융통일성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7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遠離於法想하야不樂一切法하면
此亦無所修니能見大牟尼로다
법이란 생각 멀리 여의어
일체 법을 좋아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또한 닦을 바가 없나니
능히 대모니(大牟尼)를 보리라.
강설 ; 불법은 무수이수(無修而修), 즉 닦아도 닦음이 없이 닦는다. 그래서 법성의 존재원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법성이라는 생각마저 멀리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닦을 바가 없다. 곧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 부처님이다[舊來不動名爲佛].
화엄경 강설 제16권 7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라, 공덕을 공덕혜보살에게 미루다
如德慧所說하야此名見佛者니
所有一切行이體性皆寂滅이로다
공덕혜보살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이름이 부처를 본 자니
있는바 일체 행이
자체의 성품이 모두 적멸이라네.
강설 ; 수미정상게찬품의 게송은 언제나 그렇듯이 “앞에서 설법한 보살이 충분히 설하였다. 자신은 별로 설한 것이 없다. 나의 설법은 앞의 보살의 설법과 같다.”라고 하여 그 공덕을 앞의 보살에게 미루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7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6) 동남방 선혜(善慧)보살의 찬탄
爾時에 善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선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가, 부처님을 보다
希有大勇健하신無量諸如來여
離垢心解脫하사自度能度彼로다
희유하시고 크게 용건(勇健)하신
한량없는 모든 여래여
때를 여의고 마음이 해탈하시어
스스로 제도하고 저들도 제도하셨네.
강설 ;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는 내용이다. “희유하시고 크게 용건(勇健)하시다. 일체 번뇌의 때를 다 씻어 버렸고, 마음은 가을 하늘처럼 해탈하셨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 중에 번뇌를 떠난 것과 해탈하신 것을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공덕 중에 무엇이 늘 생각나는가? 부처님의 위대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부처님의 무엇이 그토록 자랑스러운가? 지혜인가? 자비인가? 원력인가? 교화인가? 신통인가?
화엄경 강설 제16권 80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我見世間燈의如實不顚倒가
如於無量劫에積智者所見이로다
내가 보니 세간의 등불이
실상과 같아 전도되지 아니하고
한량없는 겁에
지혜를 쌓은 자의 보는 바와 같도다.
강설 ; 부처님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말 중에 ‘세간의 등불’이라는 말이 매우 빼어나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세간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분이다. 존재의 실상을 여실히 알아 전도되지 않는 길을 가시는 분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혜를 쌓은 사람이라야 볼 수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81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나, 법을 보다
一切凡夫行이莫不速歸盡하나니
其性如虛空일새故說無有盡이로다
모든 범부의 행은
빨리 다 하는 대로 돌아가지만
그 성품은 허공과 같을 새
그러므로 다함이 없다고 말하네.
강설 ; 모든 범부들의 행이란 무엇을 하든 빨리 없어져 버리고 마는 허망한 것만을 행한다. 영원히 마음의 자양이 되는 수행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본성은 부처님과 다름없이 허공과 같아서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본성에 부합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8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智者說無盡이나此亦無所說이니
自性無盡故로得有難思盡이로다
지혜로운 자는 다함이 없다 말하나
이것도 또한 말할 것이 없으니
자체의 성품이 다함없는 까닭에
부사의한 다함이 있음이로다.
강설 ; 지혜로운 사람은 허망한 현상에서 존재의 본질인 무진성(無盡性)을 설한다. 실은 무진성을 말할 것이 아니나 근본 자성이 무진하기 때문이다. 실로 존재의 본질인 진여자성은 불가사의한 다함이다. 그것을 “자체의 성품이 다함없는 까닭에 부사의한 다함이 있음이로다.”라고 표현하였다. 예컨대 산하대지는 다함이 있는 현상이라면 허공은 다함이 없는 본질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8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所說無盡中에無衆生可得이니
知衆生性爾하면則見大名稱이로다
다함이 없다 말한 가운데는
중생도 얻을 것이 없나니
중생의 성품이 그런 줄 알면
곧 큰 이름 가진 이를 보게 되리라.
강설 ; 존재의 본질은 다함이 없으며, 본질에서는 또한 중생이라고 할 것도 없다. 중생의 다함없는 본질인 자성을 알면 그가 바로 크게 소문난 부처님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8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다, 이익을 이루다
無見說爲見이요無生說衆生이니
若見若衆生을了知無體性이로다
봄이 없는데 본다고 말하고
중생이 없는데 중생이라 말하니
보는 것과 중생이라는
자체의 성품이 없는 줄을 알지니라.
강설 ; 존재의 궁극적 본질에는 주관으로서 본다거나, 또는 객관으로서 보여 진다거나하는 주객의 관계가 사라진 자리다. 또한 중생이라거나 부처라거나 나누어서 설명할 길도 없다. 보는 일도 중생이라는 것도 변하지 않는 어떤 자체의 성품은 없다. 편의상 거짓 이름을 짓고 거짓으로 나누어서 설명해볼 뿐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8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能見及所見의見者悉除遣하고
不壞於眞法하면此人了知佛이로다
보는 것도 볼 것도
보는 이도 다 제하여 보내고서
진실한 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이 사람이야말로 부처를 알리라.
강설 ; 능히 보는 것[能見]과 보여 지는 대상[所見]과 능소(能所)를 떠난 보는 사람까지 다 제하여 보내고 진실한 법, 즉 능소를 무너뜨리지 않고 주관과 객관을 다 혼융하여,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중도적 살활자재(殺活自在)의 삶을 펼치는 사람은 곧 부처를 알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8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人了知佛과及佛所說法하면
則能照世間이如佛盧舍那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을 알면
곧 능히 세간을 비춤이
노사나 부처님과 같으리라.
강설 ; 불교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부처의 실상을 아는 일이며, 부처님이 설하신 존재의 실상을 깊이 아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 지혜로 세상을 환하게 비추게 될 것이며 곧 노사나 부처님과 같으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8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라, 공덕을 정진혜보살에게 미루다
正覺善開示一法淸淨道하시고
精進慧大士가演說無量法하시니
정각(正覺)께서는 잘
한 법의 청정한 도를 잘 열어 보이시고
정진혜 대사는
한량없는 법을 연설 하시네.
강설 ; 부처님[正覺]은 한 법의 청정한 도를 설하여 모든 있음[有]을 부정하였고, 정진혜보살은 한량없는 문을 설하여 없음[無]을 부정하였다. 있음을 부정한 것은 텅 비어 공한 평등의 본질을 보인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8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有若無有彼想皆除滅하면
如是能見佛이安住於實際로다
있다거나 있지 않다는
그러한 생각 모두 소멸하면
능히 부처님께서
실제(實際)에 안주하심을 보리라.
강설 ; 없음을 부정한 것은 허망하던 현상이 모두 활발발하게 살아나는 진여생명으로서의 현상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다. 진공이 묘유며 묘유가 곧 진공인 이치를 부처님과 보살이 함께 보인 소식이다. 이것이 실제(實際)에 안주한 삶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8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7) 서남방 지혜(智慧)보살의 찬탄
爾時에 智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지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가, 자신을 이끌어 대중에게 권하다
我聞最勝敎하고卽生智慧光하야
普照十方界하야悉見一切佛이로다
나는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곧 지혜의 빛을 내어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어
모든 부처님을 다 보았네.
강설 ; 불교에는 무수히 많은 가르침이 있다. 짧은 인생에서 무엇을 먼저 공부하고 무엇을 뒤에 공부해야 한다는 정해진 과정은 없다. 그러나 경에서와 같이 무엇이 가장 훌륭한 가르침인가를 살펴서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학에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는 것이 있다. 즉 불교의 다양한 교설(敎說)들을 각 종파의 기준에 따라서 교리의 얕고 깊음을 분류하고 종합하여 하나의 유기적인 사상 체계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지혜보살이 스스로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들었듯이 다른 대중들도 화엄경과 같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들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90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나, 인집(人執)을 말하다
此中無少物이요但有假名字니
若計有我人이면則爲入險道로다
이 가운데는 아무 것도 없고
단지 거짓 이름만 있으니
만약 나와 남이 있다고 생각하면
곧 험한 길에 떨어지리라.
강설 ;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단지 거짓 이름뿐이다. 그런데 만약 나와 남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인아집(人我執)이다. 인아집에 떨어지면 인생의 험한 길을 가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91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다, 법집(法執)을 말하다
諸取着凡夫가計身爲實有하나니
如來非所取라彼終不得見이로다
모든 것에 집착하는 범부들이
몸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나니
여래는 취할 바가 아니라
저들은 마침내 볼 수 없으리라.
강설 ; 범부들은 모든 것에 잘 집착한다. 특히 부처님을 어떤 몸을 가진 존재라고 집착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몸은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여래를 몸을 취하듯이 그렇게 취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경계를 집착하는 법집(法執)이라고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9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此人無慧眼하야不能得見佛일새
於無量劫中에流轉生死海로다
이 사람은 지혜의 눈이 없어
능히 부처님을 보지 못할 새
한량없는 겁 가운데
생사의 바다에 유전(流轉)하리라.
강설 ; 자신에게 집착하고 대상에 집착하는 이와 같은 사람은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지혜의 눈이 없다. 일체 사물과 일체 존재를 바로 보지 못하거늘 어찌 부처님의 진실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곳곳에 집착하여 생사의 바다에 흘러 다닌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9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有諍說生死요無諍卽涅槃이니
生死及涅槃을二俱不可得이로다
다툼이 있어 생사(生死)라 말하고
다툼이 없으면 곧 열반이라 한다.
생사와 열반을
두 가지 다 얻지 못하네.
강설 ; 유와 무, 너와 나를 나누어 놓고 갈등하면 그것이 곧 생사다. 만약 유와 무, 너와 나에 갈등이 없으면 그것이 곧 열반이다. 그러나 실은 생사도 열반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텅 비어 없다. 생사와 열반이 본래로 없음을 알아야 생사와 열반이 같은 것[生死涅槃相共和]이라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9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逐假名字하야取着此二法하면
此人不如實이라不知聖妙道로다
만약 거짓이름을 따라서
이 두 가지 법에 집착하면
이 사람은 실답지 못하여
성인의 묘한 도리 알지 못하리.
강설 ; 생사니 열반이니, 너니 나니 하는 거짓 이름을 따라서 서로 상반된 법에 집착하면 중도실상이라는 성인의 도리에 계합하지 못한다. 성인의 도리란 너와 나, 생사와 열반을 다 받아드려서 너가 곧 나이고 생사가 곧 열반인 하나로 통일된 중도적 삶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9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生如是想호대此佛此最勝이라하면
顚倒非實義라不能見正覺이로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내어
이 부처님이 가장 수승하다 하면
전도되어 참 뜻이 아니라
능히 정각을 보지 못하리라.
강설 ; 만약 부처님이 가장 수승하고 부처님의 법이 가장 수승하다고 생각하면 이것이 또한 법집(法執)이다. 법집은 전도며 참 뜻이 아니다. 진정한 부처님의 정각을 보지 못하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9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라, 깨달음을 말하다
能知此實體의寂滅眞如相하면
則見正覺尊이超出語言道로다
능히 이 실체의
적멸한 진여의 모습을 알면
곧 정각존(正覺尊)이
언어의 길에서 벗어났음을 보리라.
강설 ; 현상은 이와 같이 눈앞에 현현되어 있다. 그러나 존재 본질의 실체는 적멸한 진여다. 적멸한 진여이기에 실체라 하더라도 실은 실체라고 할 것이 없다. 편의상 언어를 이용하지만 그 실체란 언어를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정각을 이루신 세존은 그와 같이 많은 설법을 했으나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9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言語說諸法이면不能顯實相이요
平等乃能見이니如法佛亦然이로다
말로서 모든 법을 말하면
능히 참 모습 나타낼 수 없고
평등하여야 능히 보나니
법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다네.
강설 ; 부처의 실상이나 법의 실상이나 온갖 언어로 설명을 하지만 그것은 언어일 뿐 실상은 아니다. 언어로서는 끝내 실상을 나타낼 수 없다. 텅 비어 공적하고 평등한 자리에 앉아야 부처의 실상이나 법의 실상을 본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9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正覺過去世와未來及現在하사
永斷分別根이실새是故說名佛이로다
과거 세상과 미래 세상과
현재 세상을 바로 깨달아
분별하는 뿌리를 영원히 끊었을 새
이러한 까닭에 이름을 부처님이라 하네.
강설 ;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서로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한 이치를 깨달아 시간성에 대한 분별을 끊어서 멀리 초월하여 영원을 누리면 곧 부처님이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9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8) 서북방 진실혜(眞實慧)보살의 찬탄
爾時에 眞實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진실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가, 중생을 이롭게 하다
寧受地獄苦하야得聞諸佛名이언정
不受無量樂하야而不聞佛名이로다
차라리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지언정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하면서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지는 않으리라.
강설 ; 부귀공명으로 세속적인 즐거움을 아무리 많이 누린들 부처님의 이름을 듣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가난하게 살더라도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불교의 정법을 공부하고,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며 영광이며 보람이다. 그래서 필자는 “문수경전연구회”에서 화엄경을 공부하는 일을 “금세기 최고의 축제 화엄경 강설 만일결사”라고 명명하였다. 그 인연으로 이렇게 강설을 집필하고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00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所以於往昔에無數劫受苦하야
流轉生死中은不聞佛名故로다
그 까닭은 지난 옛적에
수없는 겁 동안 고통을 받으며
생사 가운데 유전함은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한 때문이로다.
강설 ; 생사 가운데 유전하는 이유를 밝혔다. 무수한 세월에 생사에 흘러 다니는 것은 모두가 부처님으로부터 생사가 없는 진리를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하루빨리 진여생명의 불생불멸하는 원리를 알아 생사를 초월하여야 하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101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나, 망(妄)을 깨닫고 진실을 증득하다
於法不顚倒하고如實而現證하야
離諸和合相하면是名無上覺이로다
법에 전도되지 아니하고
진실과 같이 환하게 증득하여
모든 화합한 모양을 여의면
그 이름이 위없는 가장 높은 깨달음이로다.
강설 ; 무상한 것을 항상한 것으로 알고, 항상한 것을 무상한 것으로 아는 것이 법에 전도된 것이다. 무상한 현상과 항상한 본질을 환하게 증득하여 모든 화합상(和合相)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곧 가장 높은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0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現在非和合이며去來亦復然하니
一切法無相이是則佛眞體로다
현재는 화합한 것이 아니며
과거와 미래도 또한 다시 그러하니
일체 법이 모양이 없는 것이
이것이 곧 부처의 참된 체성이로다.
강설 ; 과거와 미래와 현재라는 일체 시간도 모두 진실한 모양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도 물질과 같이 본래로 없는 공성(空性)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가스님의 증도가에 “제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한 것이 이것이 곧 여래의 크고 원만한 깨달음이다.”라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0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若能如是觀諸法甚深義하면
則見一切佛의法身眞實相이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모든 법의 깊은 뜻을 관찰한다면
일체 부처님의
법신의 진실한 모양을 보게 되리라.
강설 ; 이와 같이 모든 법의 깊은 뜻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차별한 현상은 허망한 것이며, 곧 사라지는 것이지만 존재의 본체는 공적한 것이며, 평등한 것이며, 통일된 것이며, 영원한 것이라고 깨달아 아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와 같은 현상이 곧 본질이며 본질이 곧 현상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0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다, 깨달음으로 비춰보다
於實見眞實하고非實見不實하야
如是究竟解일새是故名爲佛이로다
진실에서 진실함을 보고
진실이 아닌 데서 진실이 아님을 보나니
이와 같이 끝까지 이해할 새
그런 까닭에 이름이 부처라네.
강설 ; 진실한 것은 무엇인가. 존재의 본질인 텅 비어 공한 경지다. 진실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수시로 변화하는 차별현상이다. 이 두 가지 면을 철저하게 꿰뚫어 알면 그것을 부처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0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라, 깨달음이 아니나 깨달음이라고 한다
佛法不可覺이라了此名覺法이니
諸佛如是修일새一法不可得이로다
부처님 법은 깨달을 수 없는지라
이것을 아는 것이 이름이 법을 깨달음이니
모든 부처님은 이와 같이 닦았을 새
한 법도 얻을 수 없네.
강설 ; 깨달음이 아닌 것에서 깨닫는 것이 미묘한 깨달음인 묘각(妙覺)이다. 실로 불법은 깨닫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법을 깨달은 것이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하고 깨달음의 가르침이라 한다. 그러나 진실로 깨달은 부처님의 차원에서 불법은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0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知以一故衆이며知以衆故一이니
諸法無所依하야但從和合起로다
하나로써 여럿을 알고
여럿으로써 하나를 아나니
모든 법이 의지한 데 없어
단지 화합을 좇아 일어나도다.
강설 ; 진실한 법은 하나로써 여럿을 알고 여럿으로써 하나를 안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여럿이 있고 여럿 가운데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다.”라고 하였다. 한 방울의 바닷물에서 전체의 바닷물을 알고, 하나의 세포에서 그 사람 전체를 안다. 아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세포로 그 사람이나 그 동물과 그 식물 전체를 만들기도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0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無能作所作이라唯從業想生이니
云何知如是오異此無有故로다
짓는 이도 지을 것도 없고
오직 업의 생각을 좇아 생김이니
어떻게 이와 같은 줄을 아는가.
이것과 다른 이치는 없는 까닭일 새.
강설 ; 선과 악을 짓는 주체자도 없고 지어지는 대상도 없다. 오직 업에 의한 생각으로 선과 악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 밖에는 결코 다른 이치는 없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0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一切法無住라定處不可得이니
諸佛住於此하사究竟不動搖로다
일체 법이 머무는 데 없어
정해진 곳이 없으니
모든 부처님이 이런 이치에 머물러
끝까지 동요치 않네.
강설 ; 법, 법, 법이라고 하지만 그 법은 머무는 데가 없다. 그래서 어디엔가 정해진 곳을 찾을 수 없다. 부처님은 항상 이와 같은 이치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본래 스스로 동요가 없다. 그것이 진여본성의 부동성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0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9) 하방(下方) 무상혜(無上慧)보살의 찬탄
爾時에 無上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무상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가, 무상혜라는 이름
無上摩訶薩이遠離衆生想하야
無有能過者일새故號爲無上이로다
무상혜 보살 마하살이
중생의 생각을 멀리 여의어
그보다 능히 지나갈 자가 없을 새
그런 까닭에 이름이 위없음이라네.
강설 ; 무상혜(無上慧)란 가장 높아서 그보다 높은 이가 없으며 누구도 그를 지나가는 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와 같은 지혜를 가졌기에 중생의 생각은 멀리 떠났다. 그러나 실은 사람사람이 모두 본래로 가장 높은 무상성(無上性)을 지녔다. 그래서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10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나, 제불의 소득
諸佛所得處가無作無分別하시니
麤者無所有며微細亦復然이로다
모든 부처님이 얻은 것은
지음도 없고 분별도 없어
거친 것도 없고
미세한 것도 또한 다시 그러하네.
강설 ;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것을 얻은 분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하고, 그 깨달음을 펼쳐 보인 화엄경은 인류 최고의 걸작이라 한다. 그러나 돌이켜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지음도 없고 분별할 것도 없으며, 크거나 미세한 것도 없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11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다, 제불의 소행
諸佛所行境이여於中無有數라
正覺遠離數하시니此是佛眞法이로다
모든 부처님이 행하신 경계는
그 가운데는 수효도 없어
정각(正覺)은 수효를 멀리 여의었으니
이것이 부처님의 진실한 법이라네.
강설 ; 부처님의 소득과 소행은 너무나 위대하고 훌륭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크다느니, 작다느니, 몇 개라느니 하여 그 수효로 계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각을 어찌 세속적인 잣대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
화엄경 강설 제16권 11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라, 상을 보내고 이치를 나타내다
如來光普照하사滅除衆闇冥하시니
是光非有照며亦復非無照로다
여래의 광명 널리 비추어
온갖 어둠 소멸하시니
이 광명은 비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다시 비춤이 없는 것도 아니네.
강설 ; 여래란 곧 지혜의 광명이다. 여래의 가르침도 또한 깨달음의 광명이다. 여래의 일생도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큰 빛이다. 이 모든 광명으로 세상의 어둠을 다 소멸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빛이 되었는가. 그러나 정작 그 광명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모든 형상을 보내고 이치를 나타내는 길이다. 마치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1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於法無所着하야無念亦無染하시며
無住無處所하사대不壞於法性이로다
법에 집착함이 없고
생각도 없고 물들지도 않아
머무름도 없고 처소도 없지만
법의 성품을 깨뜨리지도 않네.
강설 ; 법에 만약 집착한 바가 있으면 온갖 생각이 난무하여 염오가 막심하리라. 법에 집착한 바가 없으므로 생각도 없고 염오도 없으며, 머무름도 없고 처소도 없다. 그러나 법성은 결코 무너지거나 손실이 없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1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此中無有二며亦復無有一이니
大智善見者가如理巧安住로다
이 가운데는 둘도 없고
또한 다시 하나도 없으니
큰 지혜로 잘 보는 이
이치대로 공교하게 안주하였네.
강설 ;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두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것은 둘도 없고 하나마저 없다는 뜻이다. 지혜가 밝은이는 언제나 이와 같은 이치에 안주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1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無中無有二며無二亦復無라
三界一切空이是則諸佛見이로다
없는 것에는 둘도 없고
둘이 없음도 또한 다시 없는지라
삼계 일체가 공(空)이니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견해로다.
강설 ; 위와 같은 이치를 밝히는 것이 일상화가 된 사찰에서는 아침에 도량을 쓸 때도 나타난다. 도량에 비질을 할 때는 반드시 뒷걸음질을 하면서 티끌을 쓴다. 티끌도 쓸고 티끌을 쓸고 간 사람의 발자국마저 쓸기 위해서다. 없는 것 가운데는 하나도 없고 둘도 없다. 그리고 그 없는 것 마저 다시없다. 삼계 일체가 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상의 견해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1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마, 법에 머무는 바가 없다.
凡夫無覺解일새佛令住正法하야
諸法無所住케하시니悟此見自身이로다
범부는 깨달음의 이해가 없으니
부처님께서 정법에 머물게 하여
모든 법에 머무는 바가 없게 하시니
이것을 깨달으면 제 몸을 보리라.
강설 ;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에게 참으로 훌륭한 법을 깨우쳐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그 훌륭한 법에 머물러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 정법(正法)에 머문다는 것은 곧 모든 법에 마무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정법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의 몸의 실상을 보게 될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1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非身而說身하시며非起而現起하시니
無身亦無見이是佛無上身이로다
몸이 아니나 몸을 말하고
일어난 것이 아니나 일어남을 나타내나니
몸도 없고 또한 보는 것도 없음이
이것이 부처님의 가장 높은 몸이시네.
강설 ; 부처님의 몸은 몸이 아니다. 진리의 가르침이 그 몸이다. 지혜의 광명이 그 몸이다. 또 부처님은 오고 감도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이 오고 가며 온갖 작용을 일으킨다. 몸이 없는 몸을 나타내고 보는 것이 없는 봄으로 부처님을 본다. 이것이 부처님의 위대하신 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1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바, 공덕을 진실혜보살에게 미루다
如是實慧說諸佛妙法性하시니
若聞此法者는當得淸淨眼이로다
이와 같이 진실혜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묘한 법의 성품 설하시니
만약 이 법을 듣는 자는
마땅히 청정한 눈을 얻으리라.
강설 ; 진실혜보살의 설법도 뛰어나지만 무상혜보살의 지금까지의 설법이 부처님의 미묘한 법의 성품에 대해서 잘 설하셨다. 논리가 미묘하며 까다롭고 딱딱하다. 그러나 존재의 실상과 법성을 체득하는 견해가 분명하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1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10) 상방(上方) 견고혜(堅固慧)보살의 찬탄
爾時에 堅固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견고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가, 부처님을 찬탄하다
偉哉大光明勇健無上士여
爲利群迷故로而興於世間이로다
위대하셔라. 큰 광명이시여.
용건하셔라. 무상사(無上士)시여.
미혹한 군생들을 이익하게 하시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도다.
강설 ; 부처님은 위대하시고, 큰 광명이시고, 용건하시고, 가장 높은 선비라고 표현하였다. 이유가 무엇인가. 미혹한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셨기 때문이다. 불교가 세상에서 찬탄을 받으려면 진실로 미혹한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화두는 언제나 중생이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20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나, 중생의 고통
佛以大悲心으로普觀諸衆生이
見在三有中하야輪廻受衆苦하시나니
부처님께서 큰 자비심으로
널리 모든 중생 살피시어
삼유(三有) 가운데 윤회하며
온갖 고통을 받고 있음을 보네.
강설 ; 불교의 기본적인 관점들을 밝혔다. 부처님은 대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널리 관찰하시어 욕계와 색계와 무색에서 윤회하며 온갖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21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唯除正等覺具德尊導師하고
一切諸天人은無能救護者로다
오직 정등각을 이루시고
덕을 갖춘 높은 도사(導師)를 제하고는
일체 모든 천신과 사람을
능히 구호할 자 아무도 없네.
강설 ;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이 이르러갈 수 있는 최정상까지 도착해야한다. 그 최정상이란 어디인가. 개개인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우리 마음의 궁극적 차원이다. 궁극적 차원만이 가장 완전하게 우리를 구호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정등각의 자리이며, 덕을 갖춘 높은 도사의 경지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22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다, 승보(僧寶)를 찬탄하다
若佛菩薩等이不出於世間이면
無有一衆生도而能得安樂이로다
부처님과 보살님들
세간에 나오시지 않으셨던들
한 중생도 능히
안락을 얻을 자 없었으리라.
강설 ; 사찰에서는 조석으로 예불을 올릴 때 반드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가에게 절을 올린다. 중생들을 교화하여 안락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다. 실로 생각해보면 그 은혜는 태산보다 높으며 바다보다 깊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화엄경 강설 제16권 123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如來等正覺과及諸賢聖衆이
出現於世間하사能與衆生樂이로다
여래 정등각과
모든 현인 성인들
세간에 출현하시어
중생들에게 즐거움 주셨도다.
강설 ; “지심귀명례 문수 보현 관음 지장보살마하살” “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10대제자 16성 5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 제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지심귀명례 인도 중국 대한민국 모든 세계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 미진수 제대선지식”
화엄경 강설 제16권 124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라, 보고 들음의 이익
若見如來者는爲得大善利니
聞佛名生信하면則是世間塔이로다
여래를 보는 자는
크고 좋은 이익 얻나니
부처님 명호 듣고 신심 낸다면
이것이 곧 세간의 탑이라네.
강설 ; 공덕의 탑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고 법문을 들어 환희심과 신심을 내면 그것이 곧 큰 이익이며 각자의 공덕의 탑이 된다. 이름만 들어도 삼악도의 고통을 면하고 불보살의 형상만 보아도 해탈을 얻으니 어찌 공덕의 탑이 아니겠는가.
화엄경 강설 제16권 125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我等見世尊은爲得大利益이니
聞如是妙法하면悉當成佛道로다
우리들이 세존을 뵙는 것이
큰 이익을 얻은 것이니
이와 같은 미묘한 법을 들으면
다 마땅히 부처님의 도를 이루리라.
강설 ; 부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를 알고 다시 이와 같은 미묘한 법, 즉 화엄경을 듣고 사유하고 더욱 열심히 수행하면 그 일 자체가 곧 불도이며, 큰 이익이며, 가치 있는 삶이 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26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諸菩薩過去에以佛威神力으로
得淸淨慧眼하야了諸佛境界라
모든 보살들이 과거 세상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청정한 지혜의 눈을 얻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알았도다.
강설 ; 부처님의 정법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하여 큰 믿음과 이해가 생기면 그것이 곧 부처님의 위신력이다. 믿음과 이해를 통해서 존재의 실상을 아는 지혜의 눈으로 다시 부처님의 경계를 알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127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今見盧舍那하야重增淸淨信이로다
이제 노사나 부처님 뵙고
청정한 믿음 더욱 증장하리라.
강설 ; 자성미타와 자성법신불을 깨달아 알면 바른 믿음과 바른 이해와 바른 실천이 저절로 따라 오며 더욱 증장하리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128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마, 부처님의 덕이 다함이 없다
佛智無邊際라演說不可盡이니
부처님의 지혜 끝이 없는지라
아무리 연설해도 다함이 없도다.
강설 ; 부처님의 복덕과 지혜와 자비와 원력 등은 끝이 없고 다함이 없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설한다하더라도 다 설명할 수 없이 많고 또 많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29
十四.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勝慧等菩薩과及我堅固慧가
無數億劫中에說亦不可盡이로다
승혜 등 보살과
저와 견고혜보살이
무수한 억 겁 동안에
말한다 하여도 또한 다함이 없으리라.
강설 ; 부처님이 처음 정각을 이루신 시방 일체의 보리수나무 밑을 떠나지 않으시고 십주법문을 설하기 위하여 수미산으로 올라오셨다. 수미산에 올라오시니 제석천왕이 제석궁전으로 모시면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이것이 승수미산정품이다.
다음으로 수미정상게찬품으로서 동방의 법혜보살과 남방의 일체혜보살과 서방의 승혜보살등 열 명의 대표 보살들이 차례대로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을 찬탄하였다. 그러나 실은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은 무수억겁을 찬탄한다하여도 다 찬탄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십주법문의 서막을 열고 다음 본론인 십주품으로 이어진다.
수미정상게찬품 끝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16권 中
화엄경 강설 제16권 130
十五, 십주품(十住品)
강설 ; 화엄경 7처 9회의 설법 중 제3회 십주법문을 설한 품이다. 총 39품 중에서는 열다섯 번째 품에 해당한다. 설법의 회주는 법혜보살이다. 법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무량방편삼매(無量方便三昧)에 들어갔다. 그리고 천 불찰미진수의 법혜 부처님이 함께 가피하시어 십주법문을 설하도록 하였다.
십주(十住)법문이란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52위 중, 제11위(位)에서 제20위까지를 말한다. 10신위(信位)를 지나서 마음이 진제(眞諦)의 이치에 안주(安住)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주(住)라 한다.
(1) 초발심주(初發心住)는 10신(信)의 거짓된 현상으로부터 텅 빈 본질로 들어가는 관법[從假入空觀]이 완성되어 진무루지(眞無漏智)를 내고 마음이 진제의 이치에 안주하는 지위이다.
(2) 치지주(治地住)는 항상 공관(空觀)을 닦아 심지(心地)를 청정하게 다스리는 지위이다.
(3) 수행주(修行住)는 만선(萬善) 만행(萬行)을 닦는 지위이다.
(4) 생귀주(生貴住)는 정히 부처님의 기분(氣分)을 받아 여래 종에 들어가는 지위이다.
(5)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는 부처님과 같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방편행을 갖추어 상모(相貌)가 결함(缺陷)이 없는 지위이다.
(6) 정심주(正心住)는 용모가 부처님과 같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똑같은 지위이다.
(7) 불퇴주(不退住)는 몸과 마음이 한데 이루어 날마다 더욱 자라나고 물러서지 않는 지위이다.
(8) 동진주(童眞住)는 그릇된 소견이 생기지 않고 보리심을 파하지 않는 것이 마치 동자의 천진하여 애욕이 없는 것과 같아서 부처님의 10신(身) 영상(靈相)이 일시에 갖추어지는 지위이다.
(9) 법왕자주(法王子住)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해(智解)가 생겨 다음 세상에 부처님 지위를 이을 지위이다.
(10) 관정주(灌頂住)는 보살이 이미 불자가 되어 부처님의 사업을 감당할 만하므로 부처님이 지수(智水)로써 정수리에 붓는 것이 마치 인도에서 왕자(王子)가 자라면 국왕이 손수 바닷물을 정수리에 부어 국왕이 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이렇게 이른다. 또 이것을 탁태(托胎)의 순서를 모방하여 처음 초발심주에서 제4 생귀주까지를 입성태(入聖胎)라 하고, 제5 구족방편주에서 제8 동진주까지를 장양성태(長養聖胎)라 하고, 제9 법왕자주를 출성태(出聖胎)라고도 한다. 혹은 보살의 10지(地)를 10주라고 표현하기도 하나 이 십주와는 다른 뜻이다.
차례
1. 삼매와 가피(加被)를 보이다
(1) 법혜(法慧)보살이 삼매에 들다
(2) 가피를 입다
(3) 가피와 삼매의 인연
(4) 가피하는 열 가지 이유
(5) 입의 가피
화엄경 강설 제16권 131
十五, 십주품(十住品)
1. 삼매와 가피(加被)를 보이다
(1) 법혜(法慧)보살이 삼매에 들다
爾時에 法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入菩薩無量方便三昧하시니라
그때에 법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보살무량방편삼매에 들었습니다.
강설 ; 십주법문이라는 큰 법문을 설하기 위해서는 삼매에 들어야 하고, 다시 부처님으로부터 가피를 입어야 한다. 이러한 법식에 근거하여 모든 불교의식에는 반드시 입정(入定)이라는 것이 있으며 부처님의 가호를 청한다. 회주가 되는 법혜보살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보살무량방편삼매에 들었다.
(2) 가피를 입다
以三昧力으로 十方各千佛刹微塵數世界之外에 有千佛刹微塵數諸佛하사대 皆同一號하야 名曰法慧라 普現其前하사 告法慧菩薩言하사대
삼매의 힘으로 시방으로 각각 일천 부처님 세계의 미진수 같은 세계 밖에 일천 부처님 세계의 미진수 같이 많은 부처님이 계시는데, 다 같이 한 가지 이름으로 법혜(法慧)이었습니다. 널리 그 앞에 나타나서 법혜보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강설 ; 법혜보살이 보살무량방편삼매에 들어가니 그 힘으로 시방에서 무수한 법혜부처님이 나타나서 법혜보살에게 가피를 내려주는 말씀을 하신다. 법혜부처님이 법혜보살 앞에 나타나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진여생명의 부처님이 있어서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앞에 나타난다. 마음을 기우리고 귀를 기우리며 예의주시하면 누구나 친견할 수 있는 부처님이다. 위신력을 청하고 가피를 기다리면 빠짐없이 위신력을 얻고 가피를 얻는다. 그것이 법혜보살 앞에 나타난 법혜부처님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32
十五, 십주품(十住品)
(3) 가피와 삼매의 인연
善哉善哉라善男子야 汝能入是菩薩無量方便三昧하니 善男子야十方各千佛刹微塵數諸佛이 悉以神力으로共加於汝하시며 又是毘盧遮那如來의 往昔願力威神之力과 及汝所修善根力故로 入此三昧하야 令汝說法이니라
“훌륭하고, 훌륭하여라. 선남자여, 그대가 능히 이 보살무량방편삼매에 들었도다. 선남자여, 시방에서 각각 일천 부처님 세계의 미진수 같이 많은 부처님이 모두 위신력으로 그대에게 가피하십니다. 또한 비로자나 여래의 지난 옛적 원력과 위신력과 그리고 그대가 닦은 선근의 힘으로 이 삼매에 들어서 그대로 하여금 법을 설하게 함이니라.”
강설 ; 법혜보살이 십주법문을 설할 수 있는 가피와 삼매의 인연을 밝혔다. 첫째는 시방의 무수한 부처님이 위신력으로 함께 법혜보살에게 가피한 것이며, 둘째는 비로자나 여래의 지난 옛적 원력과 위신력이며, 셋째는 스스로 닦은 선근의 힘으로 삼매에 들어 법을 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33
十五, 십주품(十住品)
(4) 가피하는 열 가지 이유
爲增長佛智故며 深入法界故며 善了衆生界故며 所入無礙故며 所行無障故며 得無等方便故며 入一切智性故며 覺一切法故며 知一切根故며 能持說一切法故니 所謂發起諸菩薩十種住라
“부처님의 지혜를 자라게 하기 위한 연고며, 법계에 깊이 들어가게 하기 위한 연고며, 중생의 세계를 잘 알게 하기 위한 연고며, 들어가는 바가 걸림이 없게 하려는 연고며, 행하는 바가 장애가 없게 하려는 연고며, 같을 이 없는 방편을 얻게 하는 연고며, 일체 지혜의 성품에 들어가게 하는 연고며, 일체 법을 깨닫게 하는 연고며, 일체 근기를 알게 하는 연고며, 일체 법을 능히 가지어 설하게 하는 연고입니다. 이른바 모든 보살의 열 가지 주처(住處)을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강설 ; 시방의 무수한 법혜 부처님이 신, 구, 의 세 가지로 다시 법혜보살에게 가피하는 이유를 열 가지로 밝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보살의 열 가지 주처(住處)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주법문을 설하기 위함이다. 보살수행의 52계위 중에서 십신법문은 모든 보살행의 바탕이 되고, 십주법문은 그 출발이 된다. 그 출발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열 가지 이유를 들어 가피를 하게 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34
十五, 십주품(十住品)
(5) 입의 가피
善男子야 汝當承佛威神之力하야 而演此法이니라
“선남자여, 그대는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이 법을 연설할지니라.”
강설 ; 신, 구, 의의 세 가지 가피 중에 첫째는 입의 가피다. 시방의 법혜 부처님이 다시 법혜보살에게 “선남자여, 그대는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이 법을 연설할지니라.”라고 한 말씀 속에 부처님의 가피가 들어있다. 즉 당부하고 격려하는 말씀이 곧 가피인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35
十五, 십주품(十住品)
(6) 뜻의 가피
是時에 諸佛이 卽與法慧菩薩에게 無礙智와 無着智와 無斷智와 無癡智와 無異智와 無失智와 無量智와 無勝智와 無懈智와 無奪智하시니 何以故오 此三昧力이 法如是故니라
“이때에 모든 부처님이 법혜보살에게 걸림 없는 지혜와, 집착 없는 지혜와, 끊어짐이 없는 지혜와, 어리석음이 없는 지혜와, 다름이 없는 지혜와, 잃어버림이 없는 지혜와, 한량없는 지혜와, 이길 수 없는 지혜와, 게으름이 없는 지혜와, 빼앗을 수 없는 지혜를 주셨으니 이 무슨 까닭인가. 이 삼매의 힘이 법이 이와 같은 연고이니라.”
강설 ; 뜻의 가피는 열 가지 지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뛰어난 지혜를 부처님이 주시고 보살이 받을 수 있는 것은 법혜보살의 삼매의 힘이 법이 으레 이와 같은 까닭이다. 부처님의 가피란 가피를 받을 사람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부처님은 언제든지 주신다. 어떤 경로를 거쳐서 어떻게 나타나든지 반드시 가피는 있다. 보배가 하늘 가득 중생을 이익하게하려고 비가 내리듯이 내리고 있다. 다만 중생들의 그릇이 반듯하게 놓여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그릇의 크기를 따라 담기는 보배의 양도 각각 다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36
十五, 십주품(十住品)
(7) 몸의 가피
是時에 諸佛이 各伸右手하사摩法慧菩薩頂하신대法慧菩薩이 卽從定起하야告諸菩薩言하사대
이때에 모든 부처님이 오른손을 펴시어 법혜보살의 이마를 어루만지시니 법혜보살이 선정으로부터 일어나서 여러 보살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강설 ; 끝으로 몸의 가피다. 말씀으로 하고, 마음으로 지혜를 주시고, 오른 손을 펴서 법혜보살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그러자 곧 법혜보살은 삼매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곧 모든 보살들에게 보살의 열 가지 주처에 대해서 설법한다. 경전에서 설법하는 이와 같은 형식대로 모든 불교의 법회에서도 잠깐이지만 선정에 들었다가 일어나서 설법하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37
十五, 십주품(十住品)
2, 보살 십주(十住)
(1) 머무는 곳의 체상(體相)
佛子야 菩薩住處가 廣大하야 與法界虛空等이니라 佛子야 菩薩이 住三世諸佛家하나니 彼菩薩住를 我今當說호리라
“불자들이여, 보살의 머무는 곳이 넓고 커서 법계 허공과 같으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이 삼계의 모든 부처님의 집에 머무나니 저 보살의 머무는 것을 내가 이제 마땅히 설하겠습니다.”
강설 ; 보살이 머무는 곳이 열 가지가 있다. 그 열 가지 머무는 곳의 근본인 체상이 있는데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든 부처님의 집에 머무는 것이다. 부처님의 집에 머무는 것으로부터 열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것이 십주다. 즉 일체 불자가 발심하여 공부를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수행을 하는 데는 언제나 부처님의 집을 떠나지 않고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불자들은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처님의 집에서 부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뜻이다. 법혜보살이 부처님 집에 머무는 열 가지 모습을 설명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38
十五, 십주품(十住品)
(2) 이름을 열거하다
諸佛子야 菩薩住가 有十種하니 過去未來現在諸佛이 已說當說今說이시니라 何者가 爲十고 所謂初發心住와 治地住와 修行住와 生貴住와 具足方便住와 正心住와 不退住와 童眞住와 法王子住와 灌頂住라 是名菩薩十住니 去來現在諸佛의 所說이시니라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이 머무는 것이 열 가지가 있으니,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이미 말씀하셨고, 앞으로 말씀하실 것이며, 지금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열 가지입니까. 이른바 초발심주(初發心住)와 치지주(治地住)와 수행주(修行住)와 생귀주(生貴住)와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와 정심주(正心住)와 불퇴주(不退住)와 동진주(童眞住)와 법왕자주(法王子住)와 관정주(灌頂住)니라. 이것을 보살의 열 가지 머무는 곳이라 이름 합니다.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설하시는 것입니다.”
강설 ; 십주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이 십주법문은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설하시는 것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의 집에 머무는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은 절차와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뜻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39
十五, 십주품(十住品)
(3) 제1 발심주(發心住)
가, 발심의 열 가지 일
佛子야 云何爲菩薩發心住오 此菩薩이 見佛世尊의 形貌端嚴과 色相圓滿과 人所樂見과 難可値遇와 有大威力하며 或見神足하며 或聞記莂하며 或聽敎誡하며 或見衆生의 受諸劇苦하며 或聞如來의 廣大佛法하고 發菩提心하야 求一切智니라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의 발심주인가. 이 보살이 부처님 세존의 형상이 단정하고 상호가 원만하여 사람들이 보기를 즐겨하며, 만나 뵙기 어렵고 큰 위신력이 있음을 보며, 혹은 신통을 보며, 혹은 수기함[記莂]을 들으며, 혹은 가르침을 들으며, 혹은 중생들이 온갖 고통 받는 것을 보며, 혹은 여래의 넓고 큰 불법을 듣고 보리심을 내어서 온갖 지혜를 구하느니라.”
강설 ; 처음 발심하여 부처님 집에 머무는 보살은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 이와 같은 사실을 듣는다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우리 불자들이 불교에 처음 마음을 내게 된 사유가 무엇인가이다. 첫째는 부처님의 모습이 훌륭한 점을 보고, 또는 부처님과 관계된 수행환경과 예술적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을 내었다. 둘째는 불법이 뛰어난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불법에는 모든 사람들이 본래로 부처임을 보증한다는 사실과 교훈적 가르침과 철학적 심오한 이치들이다. 이와 같은 등등의 보고 들은 사실로 인하여 발심하였다. 그 외에도 부모님의 천도를 위하여, 자녀들의 진학을 위하여,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병고를 치유하기 위하여 이러한 등등의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40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얻기 어려운 법
此菩薩이 緣十種難得法하야 而發於心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是處非處智와 善惡業報智와 諸根勝劣智와 種種解差別智와 種種界差別智와 一切至處道智와 諸禪解脫三昧智와 宿命無礙智와 天眼無礙智와 三世漏普盡智니 是爲十이니라
"이 보살이 열 가지 얻기 어려운 법을 인연해서 마음을 내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옳은 곳과 그른 곳을 아는 지혜와, 선악의 업으로 받는 과보를 아는 지혜와, 모든 근기의 수승하고 하열함을 아는 지혜와, 갖가지 이해의 차별을 아는 지혜와, 갖가지 경계의 차별을 아는 지혜와, 모든 것에 이르러 갈 곳을 아는 지혜와, 모든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아는 지혜와, 숙명을 걸림 없이 아는 지혜와, 천안이 걸림이 없는 지혜와, 삼세의 번뇌가 모두 다한 지혜니, 이것이 열 가지니라.“
강설 ; 또 불교에 발심하게 된 인연으로는 부처님의 위대한 열 가지 힘[十力]이 있음을 알고 발심하게 되었다. 위에서 밝힌 발심의 열 가지 일은 일반적인 발심이라면 열 가지 얻기 어려운 법을 인연하여 발심한 것은 보다 차원이 다른 경지이다. 이와 같이 발심에도 낮은 발심과 높은 발심 등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보모님의 천도를 위해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가 끝내 진정한 불법에 높은 신심을 발하여 훌륭한 보살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심이 얕은 중생이라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41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勤供養佛과 樂住生死와 主導世間하야 令除惡業과 以勝妙法으로 常行敎誨와 歎無上法과 學佛功德과 生諸佛前하야 恒蒙攝受와 方便演說寂靜三昧와 讚歎遠離生死輪廻와 爲苦衆生하야 作歸依處니라
“불자여, 이 보살이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지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부지런히 부처님께 공양함과, 생사에 머물기를 좋아함과, 세간을 주도하여 악한 업을 버리게 함과, 수승하고 미묘한 법으로 항상 가르침을 행함과, 위없는 법을 찬탄함과, 부처님의 공덕을 배움과, 모든 부처님 앞에 태어나서 항상 섭수(攝受)함을 입음과, 방편으로 적정삼매를 연설함과, 생사윤회를 멀리 떠남을 찬탄함과,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해서 귀의할 곳이 되는 것이니라.”
강설 ; 불법에 마음을 낸 사람은 반드시 열 가지 법을 배워야 한다. 일체 중생과 일체 생명을 모두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며 법공양으로 공양하며 공경하고 존중 찬탄하여야 한다. 생사를 떠나려고 하지 말고 중생과 함께 생사에 머물기를 좋아하여야 한다. 세간의 주인이 되어 그들을 잘 인도하여 악업을 짓지 못하게 해야 한다. 수승하고 미묘한 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실천해야 한다. 항상 최상의 법을 찬탄해야한다. 부처님의 공덕을 배워야한다. 모든 부처님 앞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섭수함을 입어야한다. 방편으로 적정삼매를 연설하여야 한다. 생사윤회를 멀리 떠나기를 찬탄해야 한다.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해서 귀의 할 곳이 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불교에 마음을 낸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법을 항상 배워야 한다. 이것이 불자의 의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42
十五, 십주품(十住品)
라, 까닭을 말하다
何以故오 欲令菩薩로 於佛法中에 心轉增廣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마음을 더욱 넓게 하며, 들은 법을 스스로 이해해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하는 이유에 대해서 밝혔다. 위에서 열거한 열 가지 법을 배우게 되면 불법에 대한 마음이 더욱 넓어진다. 그리고 그동안 듣고 배운 법을 스스로 깨닫게 되어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43
十五, 십주품(十住品)
(4) 제2 치지주(治地住)
가, 중생에게 열 가지 마음을 낸다
佛子야 云何爲菩薩治地住오 此菩薩이 於諸衆生에 發十種心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利益心과 大悲心과 安樂心과 安住心과 憐愍心과 攝受心과 守護心과 同己心과 師心과 導師心이니 是爲十이니라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의 치지주인가. 이 보살은 중생들에 대하여 열 가지 마음을 내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이익을 주려는 마음,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大悲心], 안락케 하려는 마음, 편안히 머물게 하려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거두어 주려는 마음, 수호하려는 마음, 내 몸과 같이 여기는 마음, 스승같이 여기는 마음, 도사(導師)같이 여기는 마음이니,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강설 ; 발심을 하고나면 다음에는 자신을 다스리는 단계이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떤 마음을 내어야하는가 하는 점이다. 사람을 대할 때마다 경문에서 열거한 열 가지 마음을 내고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어떤가? 사람을 대할 때 이익을 주려고 하는가? 불쌍하게 여기는가? 안락하게 하려하는가? 편안히 머물게 하는가? 내 몸과 같이 여기는가? 스승과 같이 여기는가?
화엄경 강설 제16권 144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佛子야 此菩薩이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爲十고 所謂誦習多聞과 虛閑寂靜과 近善知識과 發言和悅과 語必知時와 心無怯怖와了達於義와 如法修行과 遠離愚迷와 安住不動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열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외우고 익혀 많이 아는 것, 한가하여 고요한 것, 선지식을 친근하는 것, 화평하고 즐겁게 말하는 것, 말을 할 시기를 아는 것, 두려운 마음이 없는 것, 이치를 잘 아는 것, 법대로 행하는 것, 어리석음을 멀리 여의는 것, 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강설 ; 치지주(治地住)에서 마땅히 배워야할 열 가지 법이다. 자신을 다스리려면 성인의 바른 가르침을 외우고 익혀 많이 아는 것이며, 한가하고 고요히 지내는 것이며, 선지식을 친근하는 것 등등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45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까닭을 말하다
何以故오 欲令菩薩로 於諸衆生에 增長大悲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들로 하여금 중생에 대하여 대비심을 증장케 하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강설 ; 치지주에서 열 가지 법을 마땅히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밝혔다. 중생을 위한 대비심이 더욱 증장케하여 들은 법문을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46
十五, 십주품(十住品)
(5) 제3 수행주(修行住)
가, 열 가지 행으로 온갖 법을 관찰한다
佛子야 云何爲菩薩修行住오 此菩薩이 以十種行으로 觀一切法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觀一切法無常과 一切法苦와 一切法空과 一切法無我와 一切法無作과 一切法無味와 一切法不如名과 一切法無處所와 一切法離分別과 一切法無堅實이니 是爲十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수행주라 하는가. 이 보살이 열 가지 행으로 일체 법을 관찰하나니, 그 열 가지 행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일체 법이 무상하고, 일체 법이 괴롭고, 일체 법이 공하고, 일체 법이 내가 없고, 일체 법이 지음이 없고, 일체 법이 맛이 없고, 일체 법이 이름과 같지 않고, 일체 법이 처소가 없고, 일체 법이 분별을 여의었고, 일체 법이 견실(堅實)함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강설 ; 불교를 수행의 종교라 한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세상과 인생을 보는 관점이 어떠해야하는가를 밝혔다. 수행자는 세상사나 자신의 인생이나 부귀공명 일체가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 무작(無作) 무미(無味) 불여명(不如名) 무처소(無處所) 이분별(離分別) 무견실(無堅實)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세상과 인생을 보는 눈이 이와 같지 못하고 수행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상누각이다. 세상에는 사상누각을 짓는 수행자가 얼마나 많은가.
화엄경 강설 제16권 147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觀察衆生界와 法界와 世界며 觀察地界와 水界와 火界와 風界며 觀察欲界와 色界와 無色界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중생계와 법계와 세계를 관찰하며, 지계(地界)와 수계(水界)와 화계(火界)와 풍계(風界)를 관찰하며,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관찰함이니라.
강설 ; 수행주에서는 중생계와 법계와 세계의 현상과 그 본질을 관찰하며, 지수화풍의 현상과 그 본질을 관찰하며, 3계의 현상과 그 본질을 관찰해서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수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48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까닭을 말하다
何以故오 欲令菩薩로 智慧明了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들로 하여금 지혜가 분명하게 하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강설 ; 열 가지 법을 왜 배우는가를 밝혔다. 보살들로 하여금 지혜가 더욱 명료해서 법문을 들은 것에 대해서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49
十五, 십주품(十住品)
(6) 제4 생귀주(生貴住)
가, 열 가지 법을 성취하다
佛子야 云何爲菩薩生貴住오 此菩薩이 從聖敎中生하야 成就十法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永不退轉과 於諸佛所에 深生淨信과 善觀察法과 了知衆生과 國土와 世界와 業行과 果報와 生死와 涅槃이니 是爲十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생귀주라 하는가. 보살은 성인의 교법으로부터 태어나서 열 가지 법을 성취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영원히 퇴전하지 아니하며, 모든 부처님께 청정한 믿음을 깊이 내며, 법을 잘 관찰하며, 중생과 국토와 세계와 업의 행[業行]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을 잘 아는 것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강설 ; 생귀주란 귀족 중에 태어나서 귀족으로 머문다는 뜻이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태어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며 부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의법출생(依法出生)이라는 말도 있다. 법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실로 모든 불교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불계(佛戒)를 받으면 불위(佛位)에 오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번 왕자로 태어나면 그가 설사 큰 잘못을 범했더라도 서민이 되지는 않듯이 불법 중에서 퇴전하지 않는다. 또 누구나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면 모두 세속의 성씨(姓氏)를 버리고 동일하게 석씨(釋氏)의 성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부처님의 처소에서 청정한 믿음을 내며, 부처님의 법을 잘 관찰하며,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로서 중생과 국토와 세계와 업행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 등을 잘 아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50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了知過去와 未來와 現在의 一切佛法하며 修集過去와 未來와 現在의 一切佛法하며 圓滿過去와 未來와 現在의 一切佛法하며 了知一切諸佛平等이니라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분명히 알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닦아 모으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원만히 하며, 일체 부처님 법의 평등함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라.”
강설 ; 확실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확실한 부처님의 아들딸이 되었다면 반드시 수학해야할 법이 있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분명히 알아야하며, 법을 닦아 모아야 하며, 법을 원만히 하여야 하며, 법의 평등함을 분명하게 아는 일이다. 예컨대 만약 왕족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왕가의 법도를 배워야 하는 것과 같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51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까닭을 말하다
何以故오 欲令增進하야 於三世中에 心得平等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로 하여금 더욱 증진하여 세 세상 가운데서 마음이 평등하게 하려 함이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생귀주(生貴住)에서 열 가지 법을 배우는 이유를 밝혔다. 제3 수행주(修行住)에서 수행한 단계보다 더욱 더 증진하여 삼세 가운데 마음이 평등하고 들은 법을 스스로 깨달아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52
十五, 십주품(十住品)
(7) 제 5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
가, 선근의 열 가지 일
佛子야 云何爲菩薩具足方便住오 此菩薩의 所修善根이 皆爲救護一切衆生하며 饒益一切衆生하며 安樂一切衆生하며 哀愍一切衆生하며 度脫一切衆生하며 令一切衆生으로 離諸災難하며 令一切衆生으로 出生死苦하며令一切衆生으로 發生淨信하며 令一切衆生으로 悉得調伏하며 令一切衆生으로 咸證涅槃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구족방편주라 하는가. 이 보살이 닦는 선근은 모두 일체 중생을 구호하며, 일체 중생을 요익케 하며, 일체 중생을 안락케 하며,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기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재난을 여의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한 신심을 내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조복함을 얻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을 증득케 하려는 것이니라.”
강설 ; 보살이 구족방편주에서 선근을 닦아 열 가지 일을 한다. 일체 중생을 구호, 요익, 안락, 애민, 도탈하며, 또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재난과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청정한 믿음을 내게 하며, 조복을 얻게 하며, 열반을 증득하게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이 중생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이 방편이다. 진정한 불자는 언제나 자신 중생을 위해서 이와 같이 해야 하며, 다른 중생을 위해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53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知衆生無邊과 知衆生無量과 知衆生無數와 知衆生不思議와 知衆生無量色과 知衆生不可量과 知衆生空과 知衆生無所作과 知衆生無所有와 知衆生無自性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열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끝없음을 알며, 중생이 한량없음을 알며, 중생이 수가 없음을 알며, 중생이 부사의함을 알며, 중생의 한량없는 몸을 알며, 중생이 헤아릴 수 없음을 알며, 중생이 공함을 알며, 중생이 지음이 없음을 알며, 중생이 있는 바가 없음을 알며, 중생이 제 성품 없음을 아는 것이니라.”
강설 ; 일체 중생을 구호하며, 일체 중생을 요익케 하며, 일체 중생을 안락케 하려면 중생의 무변함과 중생의 한량없음과 중생의 수가 없음을 잘 알아야 한다. 또 한편 중생이 공하고, 중생이 지음이 없고, 중생이 없고, 중생이 제 성품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서로가 상반되는 견해 같으나 있음과 없음에 자유로워야 중생을 구호하고 중생을 요익하게 하고 중생을 안락하게 할 수 있다. 있음과 없음에 치우친 사람은 결코 훌륭한 보살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54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까닭을 말하다
何以故오 欲令其心으로 轉復增勝하야 無所染着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 마음이 더욱 더 수승하여 물들어 집착하지 않게 하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강설 ;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에서 열 가지 법을 배우는 이유를 밝혔다. 생귀주에서 수행한 마음을 더욱 더 수승하게하며 물들어 집착하지 않게 하여 법을 들은 것에 대하여는 스스로 깨닫고 다른 이를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55
十五, 십주품(十住品)
(8) 제6 정심주(定心住)
가, 믿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않는다
佛子야 云何爲菩薩正心住오 此菩薩이 聞十種法하고 心定不動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聞讚佛毁佛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讚法毁法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讚菩薩毁菩薩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讚菩薩毁菩薩所行法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정심주라 하는가. 이 보살이 열 가지 법을 듣고 마음을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부처님을 찬탄하거나 훼방함을 듣고도 불법(佛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법을 찬탄하거나 법을 훼방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보살을 찬탄하거나 보살을 훼방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보살을 찬탄하거나 보살이 행하는 법을 훼방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함이니라.”
강설 ; 정심주(定心住)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살은 마음이 태산부동으로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첫째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보살과 보살이 행하는 법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불법을 신봉하며 살다보면 때로는 부처님을 훼방하기도 하고 찬탄하는 말을 듣기도 한다. 또한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나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들에 대해서나 불자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훼방하거나 찬탄하는 말을 듣게도 된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다종교사회이다 보니 여러 종교가 함께 혼재하여 있어서 훼불(毁佛)과 훼법(毁法)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 그때마다 참으로 갈등할 때가 많다. 분연히 일어나서 맞서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태산부동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가.
화엄경 강설 제16권 156
十五, 십주품(十住品)
聞說衆生의 有量無量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說衆生의 有垢無垢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說衆生의 易度難度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니라
“또 중생이 한량 있다거나 한량없다고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중생이 때가 있다거나 때가 없다고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중생이 제도하기 쉽다거나 제도하기 어렵다고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함이니라.”
강설 ; 다음에는 중생에 대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않음을 밝혔다. 필자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하였다. ‘지구상에 인구가 자꾸 불어나는데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살던 사람이 죽어서 이곳에 태어나는가?’ ‘다른 동물이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는가?’
화엄경 강설 제16권 157
十五, 십주품(十住品)
聞說法界의 有量無量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說法界의 有成有壞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說法界의 若有若無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니 是爲十이니라
“또 법계가 한량이 있다거나 한량없다고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법계가 이룩하는 것도 있고 무너지는 것도 있다고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법계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강설 ; 마지막에는 법계에 대한 문제에 불법 가운데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음을 밝혔다. 정심주에서는 그 어떤 문제에 봉착하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지위다. 법계가 한량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또 이뤄지고 무너짐이나, 있음과 없음에 대해서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58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一切法無相과 一切法無體와 一切法不可修와 一切法無所有와 一切法無眞實과 一切法空과 一切法無性과 一切法如幻과 一切法如夢과 一切法無分別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일체 법이 모양이 없고, 일체 법이 자체가 없고, 일체 법이 닦을 수가 없고, 일체 법이 있는 것이 없고, 일체 법이 진실하지 않고, 일체 법이 공하고, 일체 법이 성품이 없고, 일체 법이 환영과 같고, 일체 법이 꿈과 같고, 일체 법이 분별이 없는 것이니라.”
강설 ; 보살이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으려면 일체 법을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수용해야 한다. 금강경에 “일체 유위의 법은 마치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은 것으로 관찰하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보는 기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온갖 문제와 집착과 고뇌에 얽매여 진흙탕물속을 허우적거리게 된다. 유의하고 또 유의할 일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59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까닭을 말하다
何以故오 欲令其心으로 轉復增進하야 得不退轉無生法忍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 마음으로 하여금 더욱 더 증진하여 퇴전하지 않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게 하려 함이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남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일체 유위법을 왜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는가. 수행하는 마음이 더욱 증진하여 생멸이 없고, 생사가 없고, 증감이 없고, 기멸이 없는 진리에서 퇴전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들은 법에 대해서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0
十五, 십주품(十住品)
(9) 제7 불퇴주(不退住)
가, 열 가지 법을 듣고 퇴전하지 않는다
佛子야 云何爲菩薩不退住오 此菩薩이 聞十種法하고 堅固不退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聞有佛無佛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有法無法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有菩薩無菩薩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有菩薩行無菩薩行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有菩薩이 修行出離修行不出離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의 불퇴주인가. 이 보살은 열 가지 법을 듣고 견고하여 물러서지 않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부처님이 있다. 부처님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않는 것이며, 법이 있다.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보살이 있다. 보살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보살행이 있다. 보살행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보살이 수행해서 벗어난다. 수행해서 벗어나지 못한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함이니라.”
강설 ; 보살의 불퇴전의 지위란, 만약 불법 가운데 발심을 했다면 설사 부처님이 없고, 법이 없고, 수행자도 없고, 수행도 없고, 수행의 결과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은 태산부동이 되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자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법 가운데에 발심을 했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퇴전하는 사람들이 있던가. 안타까운 일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1
十五, 십주품(十住品)
聞過去有佛過去無佛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未來有佛未來無佛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現在有佛現在無佛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佛智有盡佛智無盡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三世一相三世非一相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이니 是爲十이니라
“또한 과거에 부처님이 있었다. 과거에 부처님이 없었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미래에 부처님이 있을 것이다. 미래에 부처님이 없을 것이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현재에 부처님이 있다. 현재에 부처님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부처님의 지혜는 다함이 있다. 부처님의 지혜는 다함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삼세가 한 모양이다. 삼세가 한 모양이 아니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강설 ; 또 눈앞의 문제만이 아니고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또는 부처님의 지혜에 대해서 있고 없음을 듣거나 의심하여 물러서는 경우도 있다. 보살은 결코 자성생명 부처님과 자성생명 법문과 자성생명 불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위와 같은 일로 퇴전해서는 안 된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욱 굳건히 믿어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2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佛子야 此菩薩이應勸學十種廣大法이니 何者가爲十고 所謂說一卽多와 說多卽一과 文隨於義와 義隨於文과 非有卽有와 有卽非有와無相卽相과 相卽無相과 無性卽性과 性卽無性이니라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응당 열 가지 넓고 큰 법 배우기를 권할지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하나가 곧 많은 것이다 말하며, 많은 것이 곧 하나다 말하며, 글이 뜻을 따르고 뜻이 글을 따르며, 있지 아니한 것이 곧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곧 있지 아니한 것이며, 상(相) 없는 것이 곧 상이며, 상이 곧 상이 없는 것이며, 성품 없는 것이 곧 성품이며, 성품이 곧 성품 없는 것이니라.”
강설 ; 불퇴주(不退住)에서 배워야 할 열 가지 법을 밝혔다. 하나가 곧 많은 것이며, 많은 것이 곧 하나라는 이치를 배워야 한다. 글과 뜻, 뜻과 글의 상관관계를 배워야 한다. 유와 무, 유상과 무상, 유성과 무성이 원융무애하고 상즉상입하는 이치를 배워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3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까닭을 말하다
何以故오 欲令增進하야 於一切法에 善能出離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로 하여금 더 나아가서 모든 법에서 잘 능히 벗어나고 법을 듣고는 곧 스스로 잘 알아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니라.”
강설 ; 불퇴주에서 열 가지 법을 배우는 이유를 밝혔다. 한 단계 한 단계를 밟아 올라갈수록 수행이 더욱 증진하여 번뇌에서 벗어나고 생사에서 벗어나고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은 법에 대해서는 스스로 깨닫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4
十五, 십주품(十住品)
(10) 제8 동진주(童眞住)
가, 보살은 열 가지 업(業)에 머문다
佛子야 云何爲菩薩童眞住오 此菩薩이 住十種業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身行無失과 語行無失과 意行無失과 隨意受生과 知衆生種種欲과 知衆生種種解와 知衆生種種界와 知衆生種種業과 知世界成壞와 神足自在하야 所行無礙니 是爲十이니라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의 동진주인가. 이 보살이 열 가지 업에 머무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몸으로 행함이 잘못됨이 없고, 말로 행함이 잘못됨이 없고, 뜻으로 행함이 잘못됨이 없고, 뜻대로 생(生)을 받고, 중생들의 갖가지 욕망을 알고, 중생들의 갖가지 이해를 알고, 중생들의 갖가지 경계를 알고, 중생들의 갖가지 업을 알고,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짐을 알고, 신통이 자재해서 다니는 데 걸림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강설 ; 동진주(童眞住)보살이 열 가지 업에 머무는 것을 밝혔다. 불교에서는 동진이라는 말을 귀하게 여기며, 동진출가한 사람을 높이 받든다. 어려서 출가하여 세속의 때가 묻지 않아서 수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문에서도 신, 구, 의 삼업에 잘못됨이 없다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5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種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知一切佛刹과 動一切佛刹과 持一切佛刹과 觀一切佛刹과 詣一切佛刹과 遊行無數世界와 領受無數佛法과 現變化自在身과 出廣大徧滿音과 一刹那中에 承事供養無數諸佛이니라
“불자여, 이 보살이 응당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지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 세계를 알며, 모든 부처님 세계를 움직이며, 모든 부처님 세계를 가지며, 모든 부처님 세계를 관찰하며, 모든 부처님 세계에 나아가며, 수없는 부처님 세계에 노닐며, 수없는 부처님 법을 받아드리며, 변화가 자재한 몸을 나타내며, 크고 넓고 두루 가득한 음성을 내며, 일찰나 동안에 수없는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함이니라.”
강설 ; 동진주에서 배워야할 열 가지 법을 밝혔다. 부처님 세계를 알며, 움직이며, 가지며, 관찰하며, 나아가며, 무수한 세계에 노닐며, 무수한 불법을 받아드리는 등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6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까닭을 말하다
何以故오 欲令增進하야 於一切法에 能得善巧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로 하여금 더 나아가서 일체 법에 능히 좋은 방편을 얻고, 법을 듣고는 곧 스스로 잘 이해해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강설 ; 동진주에서 왜 위와 같은 법을 배워야하는가를 밝혔다. 불교적 삶이란 그가 어느 지위에 있든 무한히 앞으로 나아가는 정진의 삶이다. 동진주에서도 다시 더욱 증진하여 일체 법에 능히 좋은 방편을 얻고 법을 듣고는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7
十五, 십주품(十住品)
(11) 제9 법왕자주(法王子住)
가, 열 가지 법을 잘 안다
佛子야 云何爲菩薩法王子住오 此菩薩이 善知十種法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善知諸衆生受生과 善知諸煩惱現起와 善知習氣相續과 善知所行方便과 善知無量法과 善解諸威儀와 善知世界差別과 善知前際後際事와 善知演說世諦와 善知演說第一義諦니 是爲十이니라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의 법왕자주인가. 이 보살이 열 가지 법을 잘 아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들이 태어나는 것을 잘 알며, 모든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잘 알며, 습기가 계속되는 것을 잘 알며, 행할 방편을 잘 알며, 한량없는 법을 잘 알며, 모든 위의(威儀)를 잘 알며, 세계의 차별을 잘 알며,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잘 알며, 세상 법을 연설할 줄 잘 알며,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연설할 줄 잘 아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강설 ; 법왕인 부처님의 진정한 아들로 머무는 지위이다. 왕이 백성을 다스리려면 백성들의 고충을 잘 알아야 하듯이 법왕의 아들이 되어 앞으로 중생들을 잘 교화하려면 중생들의 문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열 가지 법을 잘 아는 내용이다. 중생의 태어남, 번뇌, 습기상속, 행할 방편, 한량없는 법, 모든 위의, 세계차별,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 세상 법 연설, 제일의제의 연설 등이다. 이와 같은 일을 모르면 중생을 교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8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種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法王處善巧와 法王處軌度와 法王處宮殿과 法王處趣入과 法王處觀察과 法王灌頂과 法王力持와 法王無畏와 法王宴寢과 法王讚歎이니라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응당히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할지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법왕처(法王處)의 선교방편과, 법왕처의 법도와, 법왕처의 궁전과, 법왕처에 들어감과, 법왕처를 관찰함과, 법왕의 관정과, 법왕의 힘으로 유지함과, 법왕의 두려움 없음과, 법왕의 편히 잠잠과, 법왕의 찬탄하는 것이니라.”
강설 ; 법왕의 아들로 머물려면 법왕노릇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즉 부처님의 지위를 관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법왕의 아들로서 갖춰야 할 것이 많겠으나 가장 중요한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69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까닭을 말하다
何以故오 欲令增進하야 心無障礙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로 하여금 더 나아가서 마음에 걸림이 없고 법을 듣고는 스스로 잘 알아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법왕자주에서 열 가지 법을 배우는 이유를 밝혔다. 더욱 더 증진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마음에 장애가 없고 들은 법에 대해서는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음을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70
十五, 십주품(十住品)
(12) 제10 관정주(灌頂住)
가, 열 가지 지혜를 성취하다
佛子야 云何爲菩薩灌頂住오 此菩薩이 得成就十種智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震動無數世界와 照耀無數世界와 住持無數世界와 往詣無數世界와 嚴淨無數世界와 開示無數衆生과 觀察無數衆生과 知無數衆生根과 令無數衆生趣入과 令無數衆生調伏이니 是爲十이니라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의 관정주인가. 이 보살이 열 가지 지혜를 성취하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수없는 세계를 진동하며, 수없는 세계를 밝게 비추며, 수없는 세계에 머물며, 수없는 세계에 나아가며, 수없는 세계를 깨끗이 장엄하며, 수없는 중생에게 열어 보이며, 수없는 중생을 관찰하며, 수없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수없는 중생들이 들어가게 하며, 수없는 중생들을 조복하게 함이니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강설 ; 십주 중에 마지막 주가 관정주(灌頂住)다. 관정이란 물을 정수리에 붓는다는 뜻으로, 본래 인도에서 왕이 즉위(卽位)할 때나 태자(太子)를 세울 때, 사방의 국토를 잘 다스리라는 뜻으로 사해(四海)의 바닷물을 떠다 정수리에 붓는 의식(儀式)이다. 그와 같이 불법이 만족하여 부처님이 하신 교화의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는 지위를 인가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관정을 받으면 태자는 왕의 역할을 해야 하고, 보살은 부처님의 역할을 해야 한다. 밀교(密敎)에서는 이와 같은 의미로 머리에 물을 뿌리는 의식을 행한다. 오늘 날에도 머리에 물을 뿌리며 가피를 내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관정주에서 밝힌 관정보살의 덕의 작용에는 먼저 다섯 구절은 세계를 아는 걸림 없는 지혜를 말하고, 다음 다섯 구절은 중생을 성취하는 걸림 없는 지혜를 밝혔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71
十五, 십주품(十住品)
佛子야 此菩薩이 身及身業과 神通變現과 過去智와 未來智와 現在智와 成就佛土와 心境界와 智境界를 皆不可知니 乃至法王子菩薩도 亦不能知니라
“또한 불자여, 이 보살이 몸과 몸의 업과 신통변화와, 과거의 지혜와 미래의 지혜와 현재의 지혜와 부처님 국토를 성취함과. 마음의 경계와 지혜의 경계를 다 알지 못하며, 내지 법왕자 보살들도 또한 능히 알지 못하느니라.”
강설 ; 관정주에서 밝힌 관정보살의 덕의 작용에는 다른 주와 달리 특별히 20구절이 있다. 먼저 열 구절은 앞에서 밝혔고 다음의 열 구절이다. 관정주의 지위는 수승하여 측량하기 어려움을 찬탄하였다. 십주의 지위가 끝남으로 이 열 구절을 더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72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佛子야此菩薩이 應勸學諸佛十種智니 何者가爲十고 所謂三世智와 佛法智와法界無礙智와 法界無邊智와充滿一切世界智와 普照一切世界智와住持一切世界智와 知一切衆生智와 知一切法智와知無邊諸佛智니라
“불자여, 보살은 응당 모든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를 배우기를 권할지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삼세의 지혜와, 불법의 지혜와, 법계의 걸림 없는 지혜와, 법계의 끝없는 지혜와, 일체 세계에 충만한 지혜와, 일체 세계를 널리 비추는 지혜와, 일체 세계에 머무는 지혜와, 일체 중생을 아는 지혜와, 일체 법을 아는 지혜와 끝없는 모든 부처님을 아는 지혜이니라.”
강설 ; 비록 관정주(灌頂住)라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나 다시 또 마땅히 배워야할 열 가지 법이 있다. 관정을 받고 부처님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면 무엇보다 지혜를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열 가지 지혜를 들었으나 중요한 지혜를 다 밝혔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73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까닭을 말하다
何以故오 欲令增長一切種智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로 하여금 일체종지가 더욱 자라게 하고, 법을 듣고는 곧 스스로 잘 알아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관정주에 이르렀으나 보살의 삶이란 정진하고, 정진하고, 또 정진하는 것이다. 보살이 어찌 휴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체종지가 더욱 증장하게 하고 법을 듣고는 곧 스스로 깨달아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법과 궁극의 법은 모두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음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십주의 지위를 비록 차별하게 설하였으나 한 지위, 한 지위마다 그 뜻과 역할이 나무나 훌륭하다. 실은 다만 한 지위의 역할만 다하더라도 보살로서의 중생교화는 훌륭할 것이다. 이것으로서 십주위의 법을 설함은 마쳤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74
十五, 십주품(十住品)
(13) 6종18상으로 진동하여 상서를 보이다
爾時에 佛神力故로 十方各一萬佛刹微塵數世界가 六種震動하니 所謂動과 徧動과 等徧動과 起와 徧起와 等徧起와 踊과 徧踊과 等徧踊과 震과 徧震과 等徧震과 吼와 徧吼와 等徧吼와 擊과 徧擊과 等徧擊이라
그때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으로 각각 일만 부처님 세계의 미진수 같은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습니다. 이른바 움직임과 두루 움직임과 함께 두루 움직임이며, 일어남과 두루 일어남과 함께 두루 일어남이며, 솟음과 두루 솟음과 함께 두루 솟음이며, 떨림과 두루 떨림과 함께 두루 떨림이며, 부르짖음과 두루 부르짖음과 함께 두루 부르짖음이며, 부딪침과 두루 부딪침과 함께 두루 부딪침이었습니다.
강설 ; 십주법문을 설하고 나니 시방으로 각각 일만 불찰 미진수 세계가 6종 18상으로 진동하여 상서를 나타내고 증명하였다. 6종 18상이란 6근과 6진과 6식의 18계를 뜻한다. 이 18계는 사람의 삶의 영역 전체를 말하는데 십주설법을 듣고 삶의 영역 전체가 환희로 인한 충격과 감동과 놀라움에 휩싸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다. 만약 이것이 실제상황이라면 진도 1천도가 넘는 지진과 같을 것이다. 화엄경의 설법에 우리는 얼마나 환희하고 감동하는가.
화엄경 강설 제16권 175
十五, 십주품(十住品)
(14) 천상의 꽃과 음악 등으로 상서를 보이다
雨天妙華와 天末香과 天華鬘과 天雜香과 天寶衣와 天寶雲과 天莊嚴具하며 天諸音樂이 不鼓自鳴하며 放天光明과 及妙音聲하니 如此四天下須彌山頂帝釋殿上說十住法에 現諸神變하야 十方所有一切世界도 悉亦如是하니라
또 하늘의 묘한 꽃과 하늘의 가루 향과 하늘의 꽃 타래와 하늘의 여러 가지 향과 하늘의 보배 옷과 하늘의 보배구름과 하늘의 장엄거리를 비 내리듯 하며, 하늘의 여러 가지 음악이 여주하지 않아도 저절로 울리며, 하늘의 광명이 비치고 아름다운 음성이 들리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천하의 수미산 정상의 제석전(帝釋殿)에서 십주법을 설하니 온갖 신통변화를 나타내는 것과 같이 시방에 있는 일체 세계에서도 다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강설 ; 십주법문을 설하고 나니 6종 18상으로 상서를 보여 증명하고 나서 다시 또 하늘의 꽃과 향과 옷과 보배구름과 장엄거리와 음악과 광명 등으로 상서를 나타내며 증명하였다. 이곳 사천하 수미산 제석전에서 십주법을 설하니 온갖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상서를 보인 것과 같이 시방의 일체 세계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76
十五, 십주품(十住品)
(15) 시방 보살들의 찬탄과 증명
又以佛神力故로 十方各過一萬佛刹微塵數世界하야 有十佛刹微塵數菩薩이 來詣於此하사 充滿十方하야 作如是言하사대
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으로 각각 일만 부처님 세계의 미진수 같은 세계를 지나서 열 부처님 세계의 미진수 같은 보살들이 이곳에 와서 시방에 충만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善哉善哉라 佛子여 善說此法이로다 我等諸人도 同名法慧며 所從來國도 同名法雲이며 彼土如來도 皆名妙法이라 我等佛所도 亦說十住하나니 衆會眷屬과 文句義理도 悉亦如是하야 無有增減이니라
"훌륭하여라. 훌륭하여라. 불자여, 이 법을 잘 설하였도다. 우리들 모든 보살들은 다 같이 법혜(法慧)라고 이름하며, 좇아온 국토도 다 같이 이름이 법운(法雲)이며, 그 국토의 여래도 다 이름이 묘법(妙法)이니라. 우리들의 부처님 계신 곳에서도 또한 십주법문을 설하나니, 모인 권속들과 문구와 뜻과 이치도 다 또한 이와 같아서 더하거나 덜함이 없느니라.”
강설 ; 십주법문을 설하고 나니 시방 세계가 6종18상으로 진동하여 상서를 보이고, 다시 천상의 꽃과 음악 등으로 상서를 보이고 나니, 시방의 보살들이 증명하며 찬탄하여 말하였다. “그 많은 보살들의 이름은 다 같이 법혜며, 국토는 법운이며, 여래의 이름은 묘법이며, 다 같이 십주법문을 설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시방 세계가 동도(同道)며, 시방 부처님이 동도며, 시방보살들이 동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말씀이다. 만약 시방의 세계와 부처님과 보살들의 도가 같지 않다면 그것은 곧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77
十五, 십주품(十住品)
佛子야 我等이 承佛神力하고 來入此會하야 爲汝作證하노니 如於此會하야 十方所有一切世界도 悉亦如是하니라
“불자여, 우리들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고 이 법회에 와서 그대를 위하여 증명하노니 이 법회와 같이 시방에 있는 일체 세계에서도 다 또한 이와 같으니라.”
강설 ; 시방의 보살들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거듭 증명을 하며, 이곳의 법회에서와 같이 시방의 일체 세계에서도 다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여 밝혔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78
十五, 십주품(十住品)
3. 게송을 설하여 거듭 밝히다
(1) 제1 발심주(發心住)
가, 발심의 인연
爾時에 法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觀察十方과 曁于法界하고 而說頌曰
그때에 법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과 법계를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見最勝智微妙身하니相好端嚴皆具足하사
如是尊重甚難遇하고菩薩勇猛初發心이로다
가장 수승한 지혜와 미묘하신 몸을 보니
단정하고 엄숙한 상호 모두 갖추었도다.
이렇게 존중하심은 심히 만나기 어려워
보살이 용맹하게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십주설법을 게송으로 거듭 밝혔다. 산문의 내용에서 미진한 점을 더 보충하기도 하고, 또 아름다운 운문으로 달리 표현하면서 복습하는 의미가 있다. 제1 발심주의 발심의 인연은 여러 가지지만 부처님의 수승한 지혜, 아름다운 몸의 모습, 32상과 80종호, 그리고 백 천겁에도 만나기 어려운 분을 만난 것이 처음 인연이 되어 보살이 보리심을 발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79
十五, 십주품(十住品)
見無等比大神通하며聞說記心及敎誡와
諸趣衆生無量苦하고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비교할 이가 없는 큰 신통을 보고
수기[記心]를 설하심과 가르침을 듣고
여러 갈래 중생들의 한량없는 고통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일반적으로 불교에 신심을 일으킬 조건과 인연은 무엇이 있을까.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본래로 부처님이라는 보증을 한 수기가 중요한 조건이 된다. 또 교훈적인 가르침에 감동하여 발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육도 중생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건져주려는 뜨거운 자비심이 발심의 큰 동기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0
十五, 십주품(十住品)
聞諸如來普勝尊이一切功德皆成就하사대
譬如虛空不分別하고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모든 여래 두루 수승하신 어른께서
일체 공덕을 모두 다 성취하심을 들으니
허공을 분별할 수 없음과 같아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부처님은 일체 공덕을 다 성취하여 모든 중생에게 그 공덕을 베풀지만 마치 허공이 지역을 따라 분별하지 않듯이 골고루 평등하게 하심에 또한 발심의 인연이 되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1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열 가지 힘을 얻기 위한 발심
三世因果名爲處요我等自性爲非處니
欲悉了知眞實義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삼세의 인과는 옳은 곳이요
우리들의 자성(自性)은 그른 곳이니
이렇게 진실한 뜻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또 보살이 처음 발심한 동기에는 부처님의 위대하신 열 가지 힘[十力]을 인연하였다. 부처님의 위대함을 나타낼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열 가지 얻기 어려운 법이다. 첫째는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이다. 도리와 도리가 아닌 것을 아는 지혜의 힘이다. 이 세상 모든 법은 인과와 인연과 연기라는 절대적인 이치에 의해서 생성하고 소멸하며 흥망성쇠하고 성주괴공 한다는 사실은 옳은 이치며 옳은 도리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시하여 모든 존재가 어떤 고정불변 하는 실체[自性]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옳지 못한 도리며 그른 이치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진실한 도리를 모두 알고자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2
十五, 십주품(十住品)
過去未來現在世의所有一切善惡業을
欲悉了知無不盡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지난 세상 오는 세상 지금 세상의
있는 바 선과 악의 모든 업보를
끝까지 분명하게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열 가지 힘 중에 둘째는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이다. 일체 중생의 과거 현재 미래에 지은 선과 악의 업보가 여러 가지 현상을 달리하여 나타나는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남김없이 다 알고자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3
十五, 십주품(十住品)
諸禪解脫及三昧의雜染淸淨無量種을
欲悉了知入住出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선정과 해탈과 모든 삼매의
물들고 청정함이 한량없거늘
들어가고 머물고 나옴을 다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신 열 가지 힘 중에 셋째는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이다. 선정과 해탈과 모든 삼매를 다 아는 지혜의 힘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남김없이 다 알고자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4
十五, 십주품(十住品)
隨諸衆生根利鈍하야如是種種精進力을
欲悉了達分別知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중생들의 근기가 영리하고 둔함을 따라
이렇게 가지가지 정진하는 힘을
분명하게 모두 알아 분별하려고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신 열 가지 힘 중에 넷째는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이다. 모든 중생들의 근기와 수준이 영리하거나 우둔함을 따라 정진하는 결과가 여러 가지로 달리 나타난다. 이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남김없이 다 알고자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5
十五, 십주품(十住品)
一切衆生種種解와心所好樂各差別인
如是無量欲悉知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중생들이 가지가지 이해가 있고
마음에 좋아함도 각각 다르니
한량없는 이런 차별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신 열 가지 힘 중에 다섯째는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이다.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지해(知解)를 아는 지혜의 힘이다. 중생들은 서로가 아는 것도 다르고 마음에 좋아하는 것도 각각 다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차별을 보살은 남김없이 다 알고자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6
十五, 십주품(十住品)
衆生諸界各差別이며一切世間無有量이니
欲悉了知其體性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중생의 모든 경계 제각기 차별하며
일체 세간도 한량없거든
그 자체와 성품을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신 열 가지 힘 중에 여섯째는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이다. 일체 중생들의 경계가 각각 차별하며 일체 세간도 한량없음을 다 아는 지혜의 힘이다. 이와 같이 차별한 모든 경계와 중생과 세간의 자체와 성품을 보살은 남김없이 다 알고자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7
十五, 십주품(十住品)
一切有爲諸行道의一一皆有所至處를
悉欲了知其實性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일체 유위의 모든 행하는 길이
하나하나가 다 이르러 갈 곳이 있나니
그러한 참된 성품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신 열 가지 힘 중에 일곱째는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이다. 중생들의 여러 가지 행업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남김없이 다 알고자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8
十五, 십주품(十住品)
一切世界諸衆生이隨業漂流無暫息을
欲得天眼皆明見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일체 세계의 모든 중생이
업을 따라서 표류하여 잠깐도 쉴 새 없나니
천안통을 얻어서 밝게 보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신 열 가지 힘 중에 여덟째는 사생지력(死生智力)이다. 일체 세계 모든 중생이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는지를 천안통으로 아는 지혜의 힘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남김없이 다 알고자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89
十五, 십주품(十住品)
過去世中曾所有如是體性如是相을
欲悉了知其宿住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지나간 세상에서 있던 모든 일
이와 같은 체성과 이와 같은 형상을
그 숙명(宿命)을 분명히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신 열 가지 힘 중에 아홉째는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이다. 숙명통으로 중생이 과거세에 지은 일들을 다 기억하여 아는 지혜의 힘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남김없이 다 알고자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0
十五, 십주품(十住品)
一切衆生諸結惑과相續現起及習氣를
欲悉了知究竟盡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일체 중생의 모든 맺힌 번뇌가
상속하여 일어나고 익힌 버릇들
모두 알고 끝까지 다하려 하여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신 열 가지 힘 중에 열째는 누진지력(漏盡智力)이다. 번뇌를 모두 소멸시켜 없애는 지혜의 힘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남김없이 다 알고자 처음 발심하였다. 이와 같이 보살은 부처님의 열 가지 위대한 능력을 스스로 다 갖추고자 처음 발심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1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속제(俗諦)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
隨諸衆生所安立하야種種談論語言道를
如其世諦悉欲知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중생들이 펼쳐놓은 모든 언론과
가지가지 담론과 언어를 따라서
그러한 세속 일을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중생들이 사량 분별로 전개하는 이론과 논리체계들을 속제(俗諦)라 하며, 또는 세제(世諦)라고도 한다. 보살은 중생교화에 이러한 모든 세속적인 담론도 다 잘 알아야 한다. 이 또한 발심의 인연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2
十五, 십주품(十住品)
라, 진제(眞諦)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
一切諸法離言說하야性空寂滅無所作이니
欲悉明達此眞義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일체 모든 법들이 말을 여의고
성품이 공하고 적멸하여 지음이 없나니
진실한 이런 이치 밝게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일체제법이 언설이 많으나 그 진실한 법은 언설을 떠났으며, 일체제법이 형상이 많으나 그 자성은 공하며, 일체제법이 이와 같이 눈에 가득하나 그 실상은 적멸하며, 일체제법이 생성과 소멸이 끝이 없으나 그 진실은 지음이 없다. 이러한 이치를 밝게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3
十五, 십주품(十住品)
마, 신통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
悉欲震動十方國하고傾覆一切諸大海하야
具足諸佛大神通일새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시방의 국토들을 진동시키고
일체 모든 바닷물을 엎어버리는
부처님의 큰 신통 구족하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 가장 큰 사건이다. 화엄경의 설법은 인류사의 최고 걸작이다. 깨달음과 화엄경으로 시방 국토를 진동시키며, 큰 바다를 뒤엎는다. 이것이 부처님의 신통 지혜다. 보살은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은 금세기 최고의 축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4
十五, 십주품(十住品)
바, 해탈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
欲一毛孔放光明하야普照十方無量土하고
一一光中覺一切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한 모공(毛孔)에서 광명을 놓아
한량없는 시방 국토 두루 비추고
낱낱 광명으로 일체를 다 깨닫게 하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모공광명이란 화엄경의 10조 9만 5천 48자라는 글자 수다. 낱낱 글자가 진리의 광명이 되어 한량없는 시방 국토를 환하게 비춘다. 또 낱낱 광명이 지혜의 가르침이 되어 일체 중생을 깨닫게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은 뜻으로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5
十五, 십주품(十住品)
欲以難思諸佛刹로悉置掌中而不動하고
了知一切如幻化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부사의한 부처님의 많은 세계를
손바닥에 놓아도 꼼짝도 않고
일체가 환화(幻化)와 같은 줄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공의 세계를 공의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그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그 손바닥은 세계가 무거워서 견디기가 얼마나 힘이 들까? 보살에게는 일체가 환화며 일체가 공성이다. 보살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6
十五, 십주품(十住品)
欲以無量刹衆生으로置一毛端不迫隘하고
悉知無人無有我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한량없는 세계의 모든 중생을
한 터럭 끝에 두어도 비좁지 않고
남도 없고 나도 없는 줄을 다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주관과 객관이 다 끊어지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며, 있음과 없음이 하나인 이치에서는 무량 중생도 무량 중생이 아니며, 한 터럭도 한 터럭이 아니어서 일과 다가 무애며, 사와 사가 무애인 해탈 지혜를 다 알고자 보살이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7
十五, 십주품(十住品)
欲以一毛滴海水하야一切大海悉令竭하고
而悉分別知其數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하나의 털끝으로 바닷물을 찍어 내어
모든 바닷물을 다 하게 하여
그러한 숫자를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하나의 털끝으로 모든 바닷물을 찍어서 그 숫자를 다 아는 것은 해탈 지혜가 자유 자재함을 표현한 것이다. 보살이 처음 발심하는 그 원력의 크고 세밀함이 이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8
十五, 십주품(十住品)
不可思議諸國土를盡抹爲塵無遺者하고
欲悉分別知其數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불가사의한 모든 국토를
모두 다 부수어서 티끌을 만들고
그 수효를 낱낱이 세어 다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보살이 처음 발심한 그 원력은 불가사의하다. 예컨대 이 지구를 다 부수어 가루를 만들었을 때 그 숫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설사 그와 같은 수효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다 헤아려 아는 지혜를 얻고자 처음 발심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199
十五, 십주품(十住品)
사, 겁(劫)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
過去未來無量劫에一切世間成壞相을
欲悉了達窮其際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지난 세월 오는 세월 한량없는 겁
일체 세간 이룩되고 무너지는 일
끝까지 궁구하여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보살이 초발심하는 것은 한량없는 겁 동안 지구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것을 끝까지 궁구하여 다 알고자하는 지혜를 얻으려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0
十五, 십주품(十住品)
아, 삼승(三乘)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
三世所有諸如來와一切獨覺及聲聞을
欲知其法盡無餘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세 세상에 나시는 모든 여래와
일체의 독각이나 여러 성문들
그 법을 남김없이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보살이 초발심하는 것은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 법을 달 알고자 함이며, 일체 성문과 연각의 법을 다 알고자 함이며, 일체 보살의 법을 다 알고자 함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1
十五, 십주품(十住品)
자, 삼밀(三密)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
無量無邊諸世界를欲以一毛悉稱擧하고
如其體相悉了知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한량없고 그지없는 모든 세계를
한 털로써 사뿐히 모두 다 들어
그 체성과 형상을 다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삼밀(三密)의 지혜란 신구의(身口意) 삼밀로써 일다상용(一多相容)과 사사무애에 걸림 없음이다. 먼저 신밀(身密)의 지혜다. 보살이 초발심하는 것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모든 세계를 털 하나로 그 체성과 형상을 다 알고자 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2
十五, 십주품(十住品)
無量無數輪圍山을欲令悉入毛孔中하고
如其大小皆得知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한량없고 수가 없는 윤위산(輪圍山)을
한 모공(毛孔) 속에다 모두 넣고서
크고 작음을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윤위산(輪圍山)이란 한량없는 화장장엄세계를 모두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산이다. 모공이란 인체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장 작은 점이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큰 윤위산의 본질이나 작은 모공의 본질이나 그 본질은 다 같이 공성으로 통일되어 있다. 일체 존재의 공성에서 보면 크고 작음은 같은 것이며 하나다. 그러므로 사사무애며, 일미진중에 시방 세계를 함유하고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3
十五, 십주품(十住品)
欲以寂靜一妙音으로普應十方隨類演하고
如是皆令淨明了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고요하고 미묘한 한 음성으로
시방 중생 종류 따라 법을 말하여
이와 같이 그들에게 분명히 알게 하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다음은 구밀(口密)의 지혜다. 부처님은 일음(一音)으로 법을 연설하신다. 그러나 시방에 있는 온갖 중생들의 종류와 근기에 맞추어 알맞게 설법하신다. 보살은 그와 같은 사실을 명료하게 다 알고자 처음으로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4
十五, 십주품(十住品)
一切衆生語言法을一言演說無不盡하고
悉欲了知其自性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일체 중생들의 말하는 법을
한 말로 남김없이 연설하여서
그들의 자성을 모두 알게 하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역시 구밀의 지혜다. 한마디 말로 일체 중생의 언어의 법을 다 설하여 그들의 자성을 모두 알게 하려고 보살은 처음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5
十五, 십주품(十住品)
世間言音靡不作하야悉令其解證寂滅일새
欲得如是妙舌根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세상에 온갖 음성 모두 지어서
그들이 열반[寂滅]을 증득케 하는
이와 같은 미묘한 혀를 가지고 싶어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역시 구밀의 지혜다. 보살은 세상의 모든 말로서 중생들이 열반을 증득하게 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미묘한 혀를 가지고 싶어서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6
十五, 십주품(十住品)
欲使十方諸世界로有成壞相皆得見하고
而悉知從分別生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시방의 모든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모양을 다 보게 하여
분별로 생기는 줄 알게 하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다음은 의밀(意密)의 지혜다. 계절에는 춘하추동 사계절이 있고, 지구에는 성주괴공이 있고, 사람에게는 생로병사가 있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그 모든 것은 사람의 분별로 안다. 또 앎을 통해서 그것이 비로소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자 보살은 초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7
十五, 십주품(十住品)
一切十方諸世界에無量如來悉充滿하시니
欲悉了知彼佛法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일체 시방에 널려 있는 모든 세계에
한량없는 여래가 가득 찼거든
그 부처님의 법들을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역시 의밀(意密)의 지혜다. 보살은 왜 처음 발심하였는가. 시방 세계의 한량없는 부처님, 그 부처님들의 한량없는 법을 다 알고자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8
十五, 십주품(十住品)
차, 마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
種種變化無量身이一切世界微塵等이니
欲悉了達從心起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갖가지로 변화하는 한량없는 몸
일체 세계의 티끌수와 같이 많으니
마음으로 생긴 줄을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천백억화신이 낱낱 몸마다 천변만화하는 것이 부처님의 몸이며, 깨달음의 지혜다. 또한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들 보통 사람의 몸도 또한 역시 천백억화신이며, 천변만화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일체가 오직 한 마음의 작용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기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09
十五, 십주품(十住品)
카, 일다무애(一多無碍)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
過去未來現在世의無量無數諸如來를
欲於一念悉了知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과거 세상 미래 세상 현재 세상의
한량없고 수없는 모든 여래를
한 생각에 분명하게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여래가 얼마나 될까. 무량하고 무수하리라. 그러나 우리 모두의 한 생각 안에 존재한다. 즉 한 생각과 무량 무수 여래가 걸림이 없는 이치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분명하게 알고자 보살은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0
十五, 십주품(十住品)
欲具演說一句法하야阿僧祗劫無有盡호대
而令文義各不同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한 구절의 법문을 갖추어 말하면
아승지겁으로도 다할 수 없고
글과 뜻도 제각기 같지 않나니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또 무량 무수 법문도 역시 한 구절 안에 갖춰져 있다. 한 구절에 갖춰져 있으면서 글과 뜻이 제각각이다. 이 또한 하나와 많은 것이 걸림이 없는 이치이다. 보살이 이를 위해 발심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1
十五, 십주품(十住品)
十方一切諸衆生의隨其流轉生滅相을
欲於一念皆明達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시방의 일체 모든 중생들
그들이 유전하고 생멸하는 모습
한 생각에 분명히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일다무애(一多無碍)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은 모든 것에 적용된다. 일체 중생들이 유전하며 흘러 다니고, 이곳에서 죽어서 저곳에서 태어나는 생멸의 모습까지 분명히 알고자 초발심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2
十五, 십주품(十住品)
타, 방편과 진실이 하나인 지혜를 얻기 위한 발심
欲以身語及意業으로普詣十方無所礙하고
了知三世皆空寂하야菩薩以此初發心이로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업으로
시방세계 두루 가도 걸림이 없고
삼세가 공적함을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강설 ;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업으로 시방세계에 걸림 없이 두루 가는 것은 방편의 지혜다. 한편 삼세가 모두 공적함을 아는 것은 진실의 지혜다. 이와 같은 방편과 진실의 지혜를 얻기 위해 보살은 초발심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3
十五, 십주품(十住品)
파,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다
菩薩如是發心已에應令往詣十方國하야
恭敬供養諸如來일새以此使其無退轉이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발심하고는
마땅히 시방세계 두루 다니며
여래에게 공경하고 공양하여서
이것으로 퇴전함이 없게 하도다.
강설 ; 여기 까지 십주(十住)법문 가운데 보살이 처음 발심하게 된 까닭을 밝혔다. 이제 더욱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것을 보인다. 무엇이 더욱 수승한 법인가. 시방세계에 두루 다니며 여래에게 공경하고 공양하여 이것으로 퇴전함이 없는 것이다. 퇴전함이 없어야 제2주와 제3주와 제4주로 계속해서 나아가게 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4
十五, 십주품(十住品)
菩薩勇猛求佛道하야住於生死不疲厭하고
爲彼稱歎使順行일새如是令其無退轉이로다
보살이 용맹하게 불도(佛道) 구하며
생사(生死)에 머물러도 싫은 줄 몰라
그를 위해 찬탄하고 따라 행하게 하니
이와 같이 퇴전함이 없게 하도다.
강설 ; 진정한 보살은 불도를 구하기 위해서 생사에 머문다. 또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생사에 머문다. 어떤 이유에서든 생사를 떠나지 아니한다. 중생들을 위하여 찬탄하고 그들을 따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보살행이다. 생사를 싫어하여 떠나려는 것은 소승적 생각이다. 진실한 불법이 아니다. 보살이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것은 이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5
十五, 십주품(十住品)
十方世界無量刹에悉在其中作尊主하야
爲諸菩薩如是說일새以此令其無退轉이로다
시방의 한량없는 많은 세계에
곳곳마다 가장 높은 어른이 되어
보살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연설하네.
이것으로 퇴전함이 없게 하도다.
강설 ; 보살이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것은 한량없는 세계에서 곳곳마다 가장 높은 어른[世尊]이 되어 이와 같은 보살의 삶을 설하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6
十五, 십주품(十住品)
最尊最上最第一인甚深微妙淸淨法을
勸諸菩薩說與人일새如是敎令離煩惱로다
가장 높고 가장 위며 가장 제일인
매우 깊고 미묘하고 청정한 법을
보살들이 사람에게 말하게 하여
이와 같이 가르쳐서 번뇌를 여의게 하네.
강설 ; 여래의 정각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정각에 의한 진리의 가르침은 가장 높은 가르침이다. 가장 위가 되는 가르침이다. 가장 제일의 가르침이다. 무상심심미묘법이다. 가장 청정하고 뛰어나고 가장 훌륭한 법이다. 화엄경을 공부해보면 감탄하고, 감탄하고, 또 감탄하게 된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가르치고 많이 전파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 화엄의 큰 바다에서 행복한 유영을 하게 해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7
十五, 십주품(十住品)
一切世間無與等하야不可傾動摧伏處를
爲彼菩薩常稱讚일새如是敎令不退轉이로다
일체 세간에서 그 무엇도 같을 것 없고
흔들거나 굴복할 수 없는 경계를
보살들을 위하여 항상 칭찬하여
이와 같이 가르쳐서 퇴전하지 않게 하네.
강설 ; 화엄경의 가르침은 일체 세간에서 더불어 같은 것이 없다. 비교할 것도 없다. 그 어떤 주의주장이나 철학적 이론도 화엄경의 견해를 흔들거나 굴복시킬 수 없다. 그래서 모든 보살들이 화엄경의 광대하고 넓고 높은 법을 알게 되면 저절로 퇴전하지 않게 된다. 처음 발심했을 때 곧 정각을 이루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8
十五, 십주품(十住品)
佛是世間大力主라具足一切諸功德하사
令諸菩薩住是中일새以此敎爲勝丈夫로다
부처님은 세간에서 큰 힘 가진 주인이라
일체 모든 공덕을 갖추었거든
보살들이 이 가운데 머물게 하여
이 가르침으로 수승한 대장부가 되게 하도다.
강설 ; 발심주에서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길은 일체 공덕을 구족한 세간의 주인이며, 큰 힘을 가진 주인이신 부처님의 경계에 머무는 것이다. 이 가르침으로 수승한 대장부가 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19
十五, 십주품(十住品)
無量無邊諸佛所에悉得往詣而親近하야
常爲諸佛所攝受일새如是敎令不退轉이로다
한량없고 그지없는 부처님들께
모두 다 나아가서 친근하고
항상 부처님이 섭수하심을 받으며
이와 같이 가르쳐서 퇴전하지 않게 하네.
강설 ; 발심주에서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또 하나의 길은 일체 모든 부처님께 나아가서 친근하고 항상 부처님의 섭수하심을 받아서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20
十五, 십주품(十住品)
所有寂靜諸三昧를悉皆演暢無有餘하야
爲彼菩薩如是說일새以此令其不退轉이로다
고요하고 적정한 모든 삼매를
모두 다 연설하여 남음이 없고
보살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설법하여
이것으로 퇴전하지 않게 하더라.
강설 ;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또 하나의 길은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선정과 삼매를 모두 설하여 결코 퇴전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십신으로부터 십주에 들어가면 확고한 지위를 얻어서 물러서지 않는다. 이것이 곧 처음 발심하였을 때에 곧 정각을 이룬다는 이치이다.
초발심의 수승함을 밝힌 대반열반경의 글이 있어 인용한다.
발심필경이불별(發心畢竟二不別)
처음 발심한 것과 마지막 성불이 둘이 다른 것이 아니지만,
여시이심선심난(如是二心先心難)
이와 같은 두 가지 마음 중에 발심이 어려우니라.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
자신은 아직 제도를 얻지 못했으나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하나니,
시고아례초발심(是故我禮初發心)
그러므로 나는 처음 발심한 사람에게 예배합니다.
초발이위천인사(初發以爲天人師)
처음 발심하면 이미 천신과 인간의 스승이 되나니,
초승성문급연각(超勝聲聞及緣覺)
성문과 연각보다 훨씬 수승하니라.
화엄경 강설 제16권 221
十五, 십주품(十住品)
摧滅諸有生死輪하고轉於淸淨妙法輪하야
一切世間無所着일새爲諸菩薩如是說이로다
모든 갈레에서 생사에 헤매는 일 없애버리고
청정하고 묘한 법륜 굴려가면서
일체 세간에 조금도 집착이 없어
모든 보살을 위하여 이와 같이 설하네.
강설 ; 보다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또 하나의 길이다. 모든 갈레, 즉 육도에서 생사 윤회하는 것을 모두 소멸하여 초월하고 나서 화엄경이라는 청정한 미묘 법륜을 굴린다. 그와 같은 경지라면 일체 세속적인 삶에 무슨 집착이 있겠는가.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설법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22
十五, 십주품(十住品)
一切衆生墮惡道하야無量重苦所纏迫에
與作救護歸依處일새爲諸菩薩如是說이로다
일체 중생이 악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에 얽혀 있거늘
그들을 구호하고 귀의할 곳이 되도록
모든 보살을 위하여 이와 같이 설하도다.
강설 ; 부처님의 화두는 늘 고통 받는 중생이다. 일체 보살의 화두도 또한 고통 받는 중생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정진하고 공부하여 그들의 귀의처가 되는 것이 발심의 이유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23
十五, 십주품(十住品)
하, 발심주를 모두 맺다
此是菩薩發心住에一向志求無上道니
如我所說敎誨法하야一切諸佛亦如是로다
이것이 보살들의 발심주로서
한결같이 무상도(無上道)를 힘써 구하니
이렇게 내가 말한 가르치는 법
일체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러해.
강설 ; 보살의 십주 가운데 발심주가 가장 중요하므로 설명도 길다. 발심에 따르는 열 가지 법과 또 열 가지 힘과 그리고 갖가지 지혜가 모두 발심에 속한다. 또 보다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내용도 풍부하다. 보살들이 발심주로서 한결같이 무상도(無上道)를 힘써 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보살들만 설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 제불도 또한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24
十五, 십주품(十住品)
(2) 제2 치지주(治地住)
가, 치지주의 법을 말하다
第二治地住菩薩은應當發起如是心호대
十方一切諸衆生을願使悉順如來敎니
제2 치지주에 이른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낼지니
시방의 일체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기를 원하라.
강설 ; 치지주란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는 지위이다.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려면 시방의 일체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불교에는 참으로 훌륭한 가르침이 너무나도 많건만 그것을 따르고 실천하려는 마음을 내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제발 불자들만이라도, 아니 출가한 전문 수행자들만이라도 여래의 가르침을 수순하는 분위기가 된다면 한국의 불교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25
十五, 십주품(十住品)
利益大悲安樂心과安住憐愍攝受心과
守護衆生同己心과師心及以導師心이로다
이익하고 자비하고 안락한 마음과
안주하고 연민하고 섭수하는 마음과
내 몸같이 중생을 수호하는 마음과
스승의 마음과 도사의 마음이로다.
강설 ; 중생들이 수순해야할 여래의 가르침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이익하고, 자비하고, 안락한 마음과 안주하고, 연민하고, 섭수하는 마음과 내 몸같이 중생을 수호하는 마음과 스승의 마음과 도사의 마음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26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다
已住如是勝妙心에次令誦習求多聞하며
常樂寂靜正思惟하고親近一切善知識하며
이와 같이 수승하고 묘한 마음에 머문 뒤에는
외우고 익히어서 많이 알도록
늘 즐겁고 고요하고 바르게 생각하며
일체의 선지식을 친근히 하도다.
강설 ; 이제 십주위의 두 번째 지위다. 앞으로 끊임없이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야한다. 앞에서 든 수승한 마음에 머문 뒤에는 부처님의 법문을 외우고 익혀서 많이 알아야하며 적정과 바른 사유를 항상 즐기고 일체 선지식을 친근하여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27
十五, 십주품(十住品)
發言和悅離麤獷하고 言必知時無所畏하며
了達於義如法行하고 遠離愚迷心不動이로다
하는 말이 화평하여 거칠지 않고
때에 맞게 말함으로 두려움 없으며
이치를 알고 법도 있게 행을 닦아서
우매함을 여의고 마음은 동하지 않게 한다.
강설 ; 보살로서 중생을 교화하려면 말씨가 좋아야 한다. 특히 대중을 상대로 설법을 하는 자리라면 표준말을 사용해야 하고 부드러운 말과 교양이 있는 말과 자비와 겸손이 묻어나는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시의적절한 말과 그 자리와 듣는 사람과 상황에 알맞은 말을 가려가면서 해야 한다. 특히 이치에 맞는 진리의 말을 해야 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말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불교에 입문하여 맨 먼저 배우는 경전이 천수경이며, 천수경의 첫 구절이 말을 조심해서 하고 길상한 말을 하라고 가르친다. “말 한마디가 천량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28
十五, 십주품(十住品)
다, 치지주를 모두 맺다
此是初學菩提行이니能行此行眞佛子라
我今說彼所應行하노니如是佛子應勤學이어다
이것이 처음 배우는 보리행이니
이렇게 행하는 이라야 진정한 불자니라.
그들이 꼭 행할 일을 내가 지금 말하니
이와 같은 것을 불자들은 응당히 부지런히 배울지니라.
강설 ; 보살이 처음 배우는 보리행이란 깨달음의 수행이며, 지혜와 자비의 실천행이다. 이와 같은 수행이 있어야 참다운 불자다. 보살행을 하는 사람들이 응당히 실천해야할 것을 법혜(法慧)보살이 모두 설법한다. 이와 같은 것을 불자들은 응당히 부지런히 배울지니라. 이것이 치지주의 결론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29
十五, 십주품(十住品)
(3) 제3 수행주(修行住)
가, 수행주의 법을 말하다
第三菩薩修行住는當依佛敎勤觀察
諸法無常苦及空과無有我人無動作과
제3은 보살들의 수행주이니
부처님의 교법대로 관찰하여라.
모든 법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며
나[我]도 없고 남[人]도 없고 지음도 없네.
강설 ; 불교적 관점에서 세상과 인생을 보는 기본 견해다. 이와 같은 기본 견해가 확립이 되어야 비로소 수행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무인, 무작, 일체개고, 일체개공이다. 인생과 세상을 보는데 이와 같은 견해를 장착하지 못했으므로 출가수행자가 되었으나 마음은 항상 부귀공명과 득실시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30
十五, 십주품(十住品)
一切諸法不可樂과無如名字無處所와
無所分別無眞實이니如是觀者名菩薩이로다
일체 모든 법은 하나도 즐겁지 않고
이름과도 같지 않고 처소도 없어
분별할 것도 없고 진실도 없나니
이와 같이 보는 이를 보살이라 하네.
강설 ; 또 모든 법은 즐겁지 않고, 이름과 같지 않고, 처소가 없으며, 분별도 없고, 진실도 없다. 이와 같이 세상과 인생을 보는 사람은 진실한 수행자다. 만약 이와 같은 견해가 없다면 그는 가짜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가 무기를 지녀야 하듯 이와 같은 견해는 수행자가 반드시 지니고 다녀야할 무기다. 마음에 늘 장착하고 있어야 한다. 수행주의 법이란 이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31
十五, 십주품(十住品)
나,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다
次令觀察衆生界하고及以勸觀於法界하며
世界差別盡無餘하야於彼咸應勤觀察하며
그 다음에는 중생계를 관찰하게 하고
온 법계를 관찰하도록 권할 것이니
세계의 모든 차별 남음이 없이
모두 다 부지런히 관찰하여라.
강설 ; 수행주에서 더 수승한 법으로 나아가는 길은 중생계나 법계나 온갖 세계의 차별도 남김없이 그 현상과 실상을 끝까지 관찰하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32
十五, 십주품(十住品)
十方世界及虛空에所有地水與火風과
欲界色界無色界를悉勸觀察咸令盡이니
시방 세계와 허공계와
모든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욕계와 색계들과 무색계까지
낱낱이 관찰하여 다하게 하라.
강설 ; 또 시방 세계와 허공계와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까지 그 현상과 실상을 끝까지 다 관찰하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33
十五, 십주품(十住品)
觀察彼界各差別과及其體性咸究竟하야
得如是敎勤修行이此則名爲眞佛子로다
저 세계가 각각 차별한 것과
자체의 성품을 끝까지 다 관찰하여
이와 같은 가르침을 부지런히 수행한다면
이를 일러 진실한 불자라 하리.
강설 ; 일체 존재와 세계의 각각 차별과 그 체성을 관찰해서 그 현상과 본질을 궁구하여 마친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얻어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 참다운 불자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34
十五, 십주품(十住品)
(4) 제4 생귀주(生貴住)
가, 생귀주의 법을 말하다
第四生貴住菩薩은從諸聖敎而出生이라
了達諸有無所有하야超過彼法生法界로다
제4 생귀주에 이른 보살은
성인(聖人)의 교법으로부터 태어나
모든 갈레[諸有]가 없는 줄을 분명히 알고
그 법을 뛰어넘어 법계에 태어나도다.
강설 ; 생귀주란 부처님의 자식인 귀족으로 태어나는 지위다. 부처님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철저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장소나 지역이나 처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도 천상도 아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인간과 천신과 아수라 등 모든 갈레[諸有]가 없는 줄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 법, 즉 육도가 실재한다는 법을 뛰어넘어 진리의 세계[法界]에 태어나 진리로 살 뿐이다. 그것이 귀족으로 태어난 생귀주의 보살이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35
十五, 십주품(十住品)
信佛堅固不可壞하고觀法寂滅心安住하며
隨諸衆生悉了知體性虛妄無眞實이로다
불법을 믿음이 견고하여 파괴될 수 없고
일체법의 적멸성을 관찰하여 마음이 편안하며
모든 중생들을 따라서 자체 성품이
허망하여 진실함이 없는 줄 분명히 알도다.
강설 ; 부처님의 자식인 귀족으로 태어나는 지위의 생귀주의 법은 첫째 불법을 믿음이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어야 하며, 그리고 일체 법과 일체 존재의 본성은 적멸하다는 것을 관찰하면 그 마음은 편안하다. 또 중생의 공성과 중생의 본래 불성을 분명히 알면 비로소 귀족에 태어남이 된다.
화엄경 강설 제16권 236
十五, 십주품(十住品)
世間刹土業及報와生死涅槃悉如是하니
佛子於法如是觀하야從佛親生名佛子로다
세간과 세계와 국토와 업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이 모두 이와 같으니
불자가 법에 대하여 이와 같이 관찰하면
부처님에게서 태어났으므로 불자라 하네.
강설 ; 세간과 세계와 국토도 자체 성품이 없어 허망하여 진실하지 아니하며, 업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도 자체 성품이 없어 허망하여 진실하지 아니하다. 불자가 법에 대하여 이와 같이 관찰하면 부처님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진정한 불자라 한다.
나,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다
過去未來現在世에其中所有諸佛法을
了知積習及圓滿하야如是修學令究竟이로다
과거 세상 미래 세상 현재 세상에
거기 있는 여러 가지 부처님 법을
잘 배워서 익히고 원만히 하며
이와 같이 닦고 배워 성취케 하네.
강설 ; 생귀주에서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길은 어느 한 시대의 불법만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불법을 낱낱이 배워서 끝까지 성취하는 것이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데는 옛것만 알아도 안 된다. 현대의 지식도 갖춰야하고 미래의 세상도 예측하면서 세상을 선도해야 한다.
三世一切諸如來를能隨觀察悉平等이라
種種差別不可得이니如是觀者達三世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여래를
따라서 관찰하니 모두 다 평등하여
여러 가지 차별을 얻을 수 없어
이와 같이 관찰하여 삼세를 통달하네.
강설 ; 과거 현재 미래의 여래를 관찰하니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은 어느 때의 깨달음이라하더라도 그 깨달음이 진실하다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생귀주만 하더라도 삼세 여래의 평등한 경지를 관찰하여야 한다.
다, 생귀주를 찬탄하다
如我稱揚讚歎者는此是四住諸功德이니
若能依法勤修行하면速成無上佛菩提로다
나와 같이 칭양하고 찬탄한 것은
이것이 제4주의 모든 공덕이니
만약 능히 법을 의지하여 부지런히 수행하면
가장 높은 부처님의 보리 이루리.
강설 ; 제4주에서 찬탄한 법을 의지하여 부지런히 수행하면 가장 높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빨리 이루게 될 것이다. 십주위가 하나하나 중요하지만 부처님과 같은 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생귀주는 그 이름만으로도 환희심이 솟구치는 지위이다.
(5) 제5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
가, 구족방편주의 법을 말하다
從此第五諸菩薩을說名具足方便住니
深入無量巧方便하야發生究竟功德業이로다
이로부터 다섯째 보살지위를
구족방편주라 이름 하나니
한량없는 공교한 방편에 깊이 들어
구경의 공덕업을 발생하였네.
강설 ; 제5 구족방편주는 부처님과 같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방편행을 갖추어 상모까지도 결함이 없는 지위다. 한량없는 공교한 방편에 깊이 들어 구경의 공덕업을 발생한다. 즉 불교의 8만 4천 수행 방편은 모두가 공덕을 닦는 방편이며, 구경의 공덕업은 곧 성불의 경지다.
신라 선덕여왕 때 경주 석장사의 양지(良志)스님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는 등 온갖 불사를 많이 하였다. 그 때 향가(鄕歌)를 지어 불사를 위해 흙을 나르고 돌을 운반하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이 네 구절의 다섯 낱말에는 인생의 실상과 목적을 잘 설파하였다. 즉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인생은 계속 오지만 인생은 고해(苦海)며, 그 고해는 누구나 꼭 같다. 고해에서의 삶의 목적은 공덕을 닦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 불교의 가르침은 오직 공덕을 닦는 방법이다.
菩薩所修衆福德이皆爲救護諸群生이니
專心利益與安樂하야一向哀愍令度脫이로다
보살이 닦아 모은 모든 복덕은
모두가 중생들을 구호하기 위함이라
마음을 오로지 이익하고 안락케 하여
한결같이 애민하며 도탈(度脫)함이라.
강설 ; 세존이 어느 날 눈이 어두운 우바리존자를 대신해서 바늘귀를 뀌어주는 작은 복도 먼저 짓고자 하였듯이 진정한 보살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복을 짓는다. 그것은 모두가 중생들을 구호하기 위해서다. 오로지 중생들을 이익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다. 항상 중생을 연민히 여기고 제도하여 해탈케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보살이 경제적인 복이 많아야 중생에게 돌아가는 혜택도 많다. 미혹한 중생은 돈이 많아도 가치 있게 사용할 줄을 모른다. 복이 많다는 것은 보살에게 큰 방편이다.
爲一切世除衆難하고引出諸有令歡喜하며
一一調伏無所遺하야皆令具德向涅槃이로다
일체 세상의 모든 재난을 덜어 없애고
제유(諸有)에서 끌어내어 환희케 하며
낱낱이 조복하여 빠뜨리지 않고
공덕을 갖추어서 열반을 얻게 하네.
강설 ; 구족방편주의 법은 끝없이 세상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육도(六道)의 온갖 갈레에서 끌어내어 환희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또 어느 한 중생도 빠뜨리지 않고 일체 공덕을 갖추어 끝내는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나,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다
一切衆生無有邊과無量無數不思議와
及以不可稱量等으로聽受如來如是法이로다
일체 중생은 끝이 없으며
한량없고 수효 없고 부사의하며
또다시 일컬을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데
여래의 이러한 법을 받아 지니네.
강설 ; 중생도 무수히 많다. 여래의 법도 그들 중생의 수와 같이 무수히 많다. 구족방편주에서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것은 무수한 여래의 법으로 다시 무수한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다, 구족방편주를 찬탄하다
此第五住眞佛子가成就方便度衆生이니
一切功德大智尊이以如是法而開示로다
이 제5주의 진실한 불자가
방편을 성취하여 중생을 제도함이라
일체 공덕 갖춘 큰 지혜의 어른 이
이러한 법으로써 가르쳐 보이도다.
강설 ; 구족방편주에 이르면 진실한 불자가 된다. 왜냐하면 무수한 방편을 구족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은 모든 공덕을 갖추신 큰 지혜의 어른, 곧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법을 열어 보이기 때문이다. 구족방편주의 보살은 부처님의 법대로 살고 부처님의 삶과 같이 산다.
(6) 제6 정심주(正心住)
가, 정심주의 법을 말하다
第六正心圓滿住는於法自性無迷惑하야
正念思惟離分別일새一切天人莫能動이로다
제6 바른 마음이 원만한 지위는
모든 법의 성품에 의혹이 없고
바른 생각으로 사유하여 분별을 떠났으니
일체 천신과 인간이 흔들 수 없도다.
강설 ; 정심주(正心住)는 바른 마음이 원만한 자리에 머무는 보살의 지위다. 그러므로 모든 법의 자체 성품을 꿰뚫어 보아 아무런 의혹이 없다. 모든 법의 자체 성품에 아무런 의혹이 없으므로 바른 생각 바른 사유로 인하여 차별과 분별을 다 떠났다. 사람이 정직하고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색각만 한다면 누가 그를 흔들 수 있겠는가.
나,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다
聞讚毁佛與佛法과菩薩及以所行行과
衆生有量若無量과有垢無垢難易度와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찬탄하고 훼방함을 듣거나,
보살과 보살의 행을 찬탄하고 훼방함을 듣거나,
중생이 한량 있고 한량 없다함을 듣거나,
번뇌가 있다 없다거나, 제도하기 쉽다 어렵다고 듣거나,
강설 ; 정심주의 법이란 불법 가운데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찬탄하기도 하고 훼방하기도 할 경우 정심주보살은 불법 가운데 마음이 안정되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또 보살과 보살행 찬탄도 하고 훼방도 할 경우 보살은 불법 가운데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다. 또 중생의 유량과 무량과 번뇌의 유무와 중생제도의 쉽고 어려움에 대해서도 역시 불법 가운데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다.
한국에는 다종교사회이다 보니 이웃 종교인들이 불교를 헐뜯고 훼방하고 심지어 신앙의 대상인 불상을 훼손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또 자신들의 모임에서 어느 어느 사찰이 무너져라 라고 부르짖기도 한다. 그럴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그들을 상해할 수도 없고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다. 불법에 대해서는 더욱 애착이 가지만 마음은 크게 흔들린다. 화가 나고 미움이 솟구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 그 회답을 찾지 못하였다.
法界大小及成壞와若有若無心不動하야
過去未來今現在에諦念思惟恒決定이로다
법계가 크다 작다 이뤄지고 파괴된다.
있다 없다함을 들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과거 미래 현재에
자세히 생각하고 사유해서 항상 결정되었도다.
강설 ; 정심주보살은 또 법계가 크다 작다. 이뤄지고 무너진다. 법계가 있다 없다 함을 듣고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자세히 사유하여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심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이다.
一切諸法皆無相이며無體無性空無實이며
如幻如夢離分別이니常樂聽聞如是義로다
일체 모든 법이 모두 형상이 없고
실체도 없고 성품도 없고 공하여 진실치 않아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분별없나니
이런 뜻 항상 듣기 좋아하도다.
강설 ; 또 정심주의 보살은 일체법을 공성(空性)으로 보아야 한다. 일체가 형상이 없으며, 실체가 없으며, 성품이 없으며, 공하여 진실이 없으며, 환영과 같고, 꿈과 같이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뜻에 대한 설법을 항상 듣기를 즐겨하여야 한다. 그래야 어떤 경우라도 평정심을 굳게 지킬 수 있다.
(7) 제7 불퇴주(不退住)
가, 불퇴주의 법을 말하다
第七不退轉菩薩은於佛及法菩薩行의
若有若無出不出에雖聞是說無退動이니
제7 불퇴주에 이른 보살은
부처님과 불법과 보살과 보살행이
있다 없다. 벗어난다.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이런 말을 들어도 퇴전함이 없느니라.
강설 ; 불퇴주 보살은 어떤 상황에서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퇴전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부처님과 불법과 보살과 보살행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수행을 통해서 생사에서 벗어난다. 벗어나지 못한다 하는 말을 듣고도 불 법 가운데서 마음이 퇴전하지 않는다. 출가한 수행자나 일반 불자들 중에도 가끔은 불법 중에 마음이 퇴전하는 사람들을 본다. 불법보다 더 나은 어떤 법이 있어서일까? 이와 같은 화엄경에 맛을 들인다면 퇴전할 까닭이 없다.
過去未來現在世에一切諸佛有與無와
佛智有盡或無盡과三世一相種種相이로다
과거 미래 현재 세상에
일체 모든 부처님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부처님 지혜가 다한다, 다하지 않는다.
삼세가 한 모양이다. 여러 모양이다.
강설 ; 역시 불퇴주의 법이다. 부연하여 설명하면 삼세 일체 부처님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부처님의 지혜가 다한다거나 다하지 않다거나, 삼세가 한 모양이라거나 가지가지 모양이라거나 하는 말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신심이 깊어서 불법에 환희심을 일으키는 사람은 모든 이치를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 하든 그 마음은 퇴전하지 않는다.
나,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다
一卽是多多卽一과文隨於義義隨文이여
如是一切展轉成을此不退人應爲說하며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며
글이 뜻을 따르고 뜻이 글을 따르는
이와 같이 일체가 되풀이하여 이뤄지는 일
이 불퇴주 보살이 응당 위하여 말하느니라.
강설 ; 불퇴주보살이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려면 응당히 배워할 법이 있다. 그것은 곧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며, 글이 뜻을 따르고 뜻이 글을 따르는 등 이와 같이 일체가 전전히 이뤄지는 이치를 배우는 것이다.
若法有相及無相과若法有性及無性의
種種差別互相屬을此人聞已得究竟이로다
예컨대 법이 모양이 있음이 모양이 없음이고
법의 성품이 있음이 성품이 없음이다.
가지가지 차별을 서로서로 이어감을
이 사람이 듣고는 성취[究竟]함을 얻으리라.
강설 ; 역시 불퇴주보살이 배워야할 것이다. 게송의 글은 제약이 있어서 넉넉하게 표현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장문(長文)을 이끌어서 쉽게 부연하여 번역하였다. 법이 모양이 있음이 곧 없음이며, 법의 성품이 있음이 곧 없음이라는 이치를 응당히 배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생이라는 이치를 응당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8) 제8 동진주(童眞住)
가, 동진주의 법을 말하다
第八菩薩童眞住는身語意行皆具足하며
一切淸淨無諸失하야隨意受生得自在로다
제8 보살의 동진주는
몸과 말과 뜻으로 행하는 일이 모두 구족하며
일체가 청정하여 잘못 없으며
마음대로 태어나서 자재하도다.
강설 ; 동진이란 어리다. 청정하다. 천진난만하다. 순수하다. 깨끗하다. 등등의 뜻이 있다. 제8 동진주보살도 그와 같아서 신구의 삼업 일체가 아무런 결손이 없고 때가 없어 청정하다. 그래서 태어나는 것도 마음대로 태어난다.
知諸衆生心所樂과種種意解各差別과
及其所有一切法과十方國土成壞相이로다
중생들의 마음에 좋아하는 일과
가지가지 이해와 각각의 차별과
있는 바의 일체 법과
시방 국토의 이뤄지고 무너짐을 모두 다 아느니라.
강설 ; 동진주에 머문 보살은 중생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다 안다. 가지가지의 이해가 각각 차별한 것도 다 안다. 또한 일체 법이 이뤄지고 무너지는 것을 다 안다. 즉 세상사와 인간사의 모든 흥망성쇠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를 다 안다.
逮得速疾妙神通하야一切處中隨念往하며
於諸佛所聽聞法하고讚歎修行無懈倦이로다
빠르고 묘한 신통 모두 다 얻고
일체 처 모든 곳에 뜻대로 다니며
여러 부처님들께 들은 법문을
찬탄하고 수행하여 게으르지 않도다.
강설 ; 또 동진주에 머문 보살은 빠르고 묘한 신통도 얻고 모든 곳에 마음대로 다닌다. 무엇보다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법문을 찬탄하고 여법하게 수행하는데 게으르지 않는다. 불법에 깊은 신심이 있어서 경전의 훌륭한 가르침을 만나면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어 한다.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그렇고, 열반경의 설산동자가 그렇다.
나,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다
了知一切諸佛國하고震動加持亦觀察하며
超過佛土不可量이요遊行世界無邊數로다
일체 모든 국토를 분명히 알아
진동하고 가지(加持)하고 관찰도 하며
헤아릴 수 없는 세계 다 지나가서
수없는 여러 세계 다니느니라.
강설 ; 동진주보살이 마땅히 더 배워야 할 내용들이다. 모든 국토를 분명히 알고, 국토를 진동하며, 가피[加持]도 내리고, 관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를 지나며 교화하러 다니는 것이다.
阿僧祗法悉諮問하고所欲受身皆自在하며
言音善巧靡不充하고諸佛無數咸承事로다
아승지 부처님 법을 다 물어보고
뜻대로 받는 몸이 다 자재하며
음성이 교묘하고 두루 충만해
수없는 부처님을 섬겨 받드네.
강설 ; 동진주보살이 응당 배워야 할 점을 더 밝혔다. 무수한 불법을 물어서 이해하고 받아드리며, 변화가 자유자재한 몸을 나타내며, 광대하고 변만한 음성을 내어서 법을 설한다. 또 무량무수 모든 부처님을 공양 공경 예배 찬탄하며 받들어 섬긴다.
(9) 제9 법왕자주(法王子住)
가, 법왕자주의 법을 말하다
第九菩薩王子住는能見衆生受生別하며
煩惱現習靡不知하고所行方便皆善了로다
제9 법왕자주의 보살은
중생들의 태어나는 차별을 보고
번뇌와 현행(現行), 습기(習氣) 모두 다 알고
행할 바 모든 방편 모두 잘 알도다.
강설 ; 법왕자주란 법왕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법왕의 장자가 되면 곧 법왕이 하시는 일을 모두 물려받아 대신 법을 펼쳐야 하는 소임을 갖는다. 그래서 중생들의 태어나는 차별을 모두 보고 그들의 번뇌와 번뇌가 작용하여 펼쳐 보이는 모습과 다시 습기로 굳어지는 사실들을 다 알아야 한다. 또 그에 맞는 방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법왕자주의 보살이 할 일이다.
諸法各異威儀別과世界不同前後際와
如其世俗第一義를悉善了知無有餘로다
모든 법과 위의가 각각 다르고
세계의 다른 것과 앞뒤 시간과
세상의 모든 일과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분명하게 잘 알아 남음이 없네.
강설 ; 법왕자주란 법왕의 아들이므로 법왕이 해야 할 일을 다 해야 한다. 모든 법이 각각 다른 점을 알고, 위의 가 다른 점을 알고, 세계가 같지 않음과 세계의 시간성에 대해서도 알고 세상의 일과 출세간의 일인 제일의제도 남김없이 다 알아야 한다.
나,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다
法王善巧安立處와隨其處所所有法과
法王宮殿若趣入과及以於中所觀見과
법왕의 선교방편과 법왕의 법도[安立處]와
처소에 따라서 있는 법과
법왕의 궁전에 나아가는 일
법왕의 지위를 관찰함을 모두 잘 알도다.
강설 ; 법왕자주보살이 응당히 배워야 할 내용들을 열거하였다. 이와 같은 점을 더 배워야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간다. 법왕의 성교방편과 법왕의 처신과 법왕의 궁전에 나아가는 법과 법왕의 지위가 어떤 것인가를 잘 관찰해야 한다.
法王所有灌頂法과神力加持無怯畏와
宴寢宮室及歎譽여以此敎詔法王子로다
법왕의 정수리에 물 붓는 법과
신력으로 가지하고 두려움 없음과
궁전에 주무심과 찬탄하는 일
이것으로 법왕자를 가르치도다.
강설 ; 법왕자주보살이 응당 배워야 할 법에는 정수리에 물 붓는 법[灌頂法]이 있다. 다음의 제10주가 곧 관정주이기 때문이다. 법왕이 신력으로 가피하는 일과 법왕의 두려움 없음과 법왕이 궁전에서 주무심과 찬탄하는 일 등이다.
如是爲說靡不盡하야而令其心無所着이니
於此了知修正念하면一切諸佛現其前이로다
이와 같이 끝까지 말씀하셔서
그 마음에 집착이 없게 하나니
이런 것을 잘 알고 정념(正念) 닦으면
일체 부처님이 그 앞에 나타나시네.
강설 ; 법왕자보살이 응당 배울 것을 다 배워서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이와 같은 것을 다 말씀하여 마음에 집착이 없게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잘 알아 바른 기억을 닦으면 일체 부처님이 곧 앞에 나타나리라.
(10) 제10 관정주(灌頂住)
가, 관정주의 법을 말하다
第十灌頂眞佛子는成滿最上第一法하야
十方無數諸世界를悉能震動光普照로다
제10 관정주의 진실한 불자는
가장 높은 제일 법을 만족하여서
시방의 무수한 모든 세계를
다 진동하고 밝은 광명으로 두루 비추도다.
강설 ; 관정주는 십주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다. 정수리에 사해의 물을 부어주면서 사방을 잘 다스리라는 뜻과 같이 부처님의 지위에서 모든 중생들을 잘 가르쳐 교화하는 소임을 맡기는 지위다. 그래서 가장 높은 제일 법을 만족하여 시방의 무수한 모든 세계를 다 진동하고, 밝은 지혜의 광명으로 두루 비춘다.
住持往詣亦無餘하고淸淨莊嚴皆具足하며
開示衆生無有數하고觀察知根悉能盡이로다
머물러 지니고 나아감에 남음이 없으며
청정한 장엄들을 모두 갖추고
수없는 중생들에게 열어 보이며
관찰하여 근성(根性) 알아 모두 다했네.
강설 ; 또 관정주의 법은 무수한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시 무수한 세계에 끝까지 나아간다. 즉 가고 머무름에 걸림 없이 자유롭다. 또 무수한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며, 무수한 중생에게 열어 보이며, 무수한 중생들의 근성을 다 알며, 무수한 중생을 다 관찰한다.
發心調伏亦無邊하야咸令趣向大菩提하며
一切法界咸觀察하야十方國土皆往詣로다
발심하고 조복함도 그지없어서
큰 보리에 향하여 나아가게 하고
일체 법계를 모두 다 관찰하면서
시방의 모든 국토에 다 나아가네.
강설 ; 관정주의 법은 무수한 중생에게 보리심을 발하게 하고 무수한 중생의 번뇌를 조복하게 한다. 또 무수한 중생을 큰 깨달음에 나아가게 한다. 또 일체 법계를 다 관찰하여 시방 국토에 다 나아간다.
其中身及身所作과神通變現難可測과
三世佛土諸境界를乃至王子無能了로다
그 가운데 있는 몸과 몸으로 짓는
신통과 변화함을 측량 못하며
삼세의 불국토 모든 경계를
법왕자 보살들도 알지 못하네.
강설 ; 관정주의 보살은 몸과 몸의 업과 신통과 변화를 가히 측량할 길이 없다. 그리고 이 보살의 삼세 불국토의 경계를 앞의 법왕자주의 보살은 절대로 알지 못한다. 도가 같아야 가히 알 수 있다.
나,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다
一切見者三世智와於諸佛法明了智와
法界無礙無邊智와充滿一切世界智와
일체 것을 다 보는 삼세의 지혜와
모든 부처님의 법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와
법계의 걸림 없고 끝없는 지혜와
일체 세계에 가득한 지혜와
照耀世界住持智와了知衆生諸法智와
及知正覺無邊智를如來爲說咸令盡이로다
세계를 다 비추는 지혜와 세계를 주지하는 지혜와
중생들과 모든 법을 아는 지혜와
정각(正覺)의 그지없음을 아는 지혜를
여래께서 위하여 끝까지 말씀하시네.
강설 ; 더 수승한 법에 나아가는 것은 이 보살의 지위에서 응당 배우기를 권하는 내용이다. 마지막 관정주의 보살이 응당 배워야 할 것은 앞의 경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다시 살펴본다.
“불자여, 보살은 응당 모든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를 배우기를 권할지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삼세의 지혜와, 불법의 지혜와, 법계의 걸림 없는 지혜와, 법계의 끝없는 지혜와, 일체 세계에 충만한 지혜와, 일체 세계를 널리 비추는 지혜와, 일체 세계에 머무는 지혜와, 일체 중생을 아는 지혜와, 일체 법을 아는 지혜와, 끝없는 모든 부처님을 아는 지혜이니라.”
(11) 십주(十住)를 모두 찬탄하다
如是十住諸菩薩이皆從如來法化生이라
隨其所有功德行하야一切天人莫能測이로다
이와 같은 십주의 여러 보살은
여래의 법으로써 화생(化生)한 이들
그들의 가진 공덕 한 가지 행도
일체 천신이나 인간은 측량 못하리라.
강설 ; 처음 보리심을 낸 때가 곧 정각을 성취한 때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발심주보살 지위로부터 마지막 관정주까지 모두가 여래의 법으로써 화생(化生)한 보살들이다. 하나하나가 정각의 경지라고 보아야 하리라. 그러므로 일체 천신이나 인간은 결코 십주의 공덕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측량할 수 없다.
(12) 발심주를 특별히 찬탄하다
過去未來現在世에發心求佛無有邊이라
十方國土皆充滿하니莫不當成一切智로다
과거 미래 현재 세상에
불도를 구하려 발심한 이가 끝이 없어서
시방 국토에 모두 충만하였으니
모두 다 마땅히 일체 지혜를 이루리라.
강설 ; 처음의 발심은 곧 정각이며, 정각은 곧 처음의 발심이다. 그러므로 처음 발심한 공덕을 특별히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 발심만 하였다면 정각을 이루는 것은 이미 끝난 것이다. 마치 씨앗 속에 열매가 있고, 열매는 곧 씨앗이 되는 이치와 같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곧 부처며 부처가 곧 중생인 이치이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다고 한 것이다.
연꽃을 불교의 꽃이라 한다. 왜냐하면 불법의 이치가 곧 연꽃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꽃과 열매가 처음부터 함께 존재하는 것이 중생과 부처가 함께 존재하는 것과 같으며, 처음 발심한 것이 곧 정각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치가 이와 같아서 과거 현재 미래 시방 국토에 충만한 무량무수한 사람들이 모두 일체 지혜를 이루지 못할 이가 없다.
一切國土無邊際하고世界衆生法亦然하며
惑業心樂各差別하니依彼而發菩提意로다
일체 국토가 끝이 없으며
세계와 중생과 법도 또한 그러하고
미혹과 업과 마음에 즐겨함도 각각 차별하니
그들을 위해 보리심을 처음 내었도다.
강설 ; 보리심을 처음 발하게 된 동기는 이와 같다. 즉 일체 국토가 무량무변하며, 세계와 중생도 또한 무량무변한데, 미혹도 무량무변하고 업도 무량무변하고 마음에 좋아하는 바도 역시 무량무변하다. 이러한 사실에 의해서 자비심이 많은 보살은 발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始求佛道一念心을世間衆生及二乘이
斯等尙亦不能知어든何況所餘功德行가
처음 불도를 구하려는 한 생각 마음을
세간의 중생들과 성문(聲聞) 연각(緣覺)도
이들은 오히려 능히 알지를 못하거늘
하물며 그 나머지 공덕이리오.
강설 ; 불교에서 공덕을 논할 때 처음 발심한 공덕을 제일로 친다. 그래서 일반 중생들이나 성문이나 연각과 같은 소승들은 그 공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십주중에서 초발심주에 불과하다. 나머지 아홉 개 주의 공덕은 얼마나 많겠는가. 편협한 마음의 소승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十方所有諸世界를能以一毛悉稱擧하면
彼人能知此佛子의趣向如來智慧行이로다
시방에 널려 있는 모든 세계를
털 하나로써 모두 다 들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라면 이 불자의
여래에게 향하는 지혜의 행을 능히 알리라.
강설 ; 보통의 사람이나 성문이나 연각과 같은 이들이 처음 발심한 공덕과 지혜를 알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알 수 있을까. 시방 일체 세계를 털 하나로써 모두 다 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초발심의 공덕은 이와 같이 위대하다. 그래서 특별히 초발심주를 높이 찬탄하는 것이다.
十方所有諸大海를悉以毛端滴令盡하면
彼人能知此佛子의一念所修功德行이로다
시방에 널려 있는 큰 바닷물을
모두 다 털끝으로 찍어내어 말린다 하면
그런 사람이라면 이 불자의
잠깐 동안 수행한 공덕을 알 수 있으리.
강설 ; 발심주의 공덕을 특별히 찬탄하면서 비유를 들어 밝혔다. 태평양 바닷물을 털끝으로 찍어서 다 없앨 수 없다. 그와 같이 초발심한 보살의 한 순간의 수행 공덕도 결국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진정한 발심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一切世界抹爲塵하고悉能分別知其數하면
如是之人乃能見此諸菩薩所行道로다
일체 세계를 부수어 티끌 만들고
그 수효를 헤아려 알 수 있다면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이 보살들이 행하는 도를 능히 보리라.
강설 ; 진정으로 발심한 보살의 보살행을 보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다시 비유를 들어 밝혔다. 어찌 일체 세계를 부수어 티끌을 만들 수 있으며, 설사 만들었다하더라도 그 수효를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13) 발심수행에 대한 찬탄
去來現在十方佛과一切獨覺及聲聞이
悉以種種妙辯才로開示初發菩提心이라도
과거 미래 현재의 시방의 부처님과
일체 독각이나 성문들까지
가지가지 미묘한 변재를 다해
처음 낸 보리심을 열어보여도
강설 ; 부처님께서 출가하여 6년 고행하시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었다. 그 보리수나무 밑에 앉으신 채 깨달음의 내용을 남김없이 세상에다 다 밝혀 보이시는 설법이 곧 이 화엄경이다. 화엄경은 믿음과 이해와 실천과 증득이라는 순서로 설해졌다. 먼저 보광명전에서 믿음에 대한 설법이 끝나고 다음으로 처음 깨달음을 이루신 보리수나무 밑을 떠나지 않으신 채로 수미산에 올라오셔서 십주법문을 설하셨다. 그 십주법문의 설법이 이로서 끝을 맺는다.
發心功德不可量이라充滿一切衆生界하니
衆智共說無能盡이어든何況所餘諸妙行가
초발심한 공덕은 헤아릴 수 없어
일체의 중생 세계에 가득 찼나니
온갖 지혜로 말해도 다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그 나머지 여러 묘한 행(行)이랴.
강설 ; 십주법문 중에서 처음 발심에 대한 법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공덕이 또한 얼마나 대단한가를 거듭 밝히면서 끝을 맺는다. 시방과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성문과 연각들까지 미묘한 변재로서 설명한다하더라도 처음 발신한 공덕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초발심한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일체 중생세계에 가득 찼다고 하였다. 초발심의 공덕도 그와 같은데 하물며 그 외 다른 법과 다른 공덕이야 얼마나 많겠는가. 깊이, 또 깊이 마음에 새겨 우러러 배워야 할 것이다.
십주품 끝
제1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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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감사합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_()()()_
스님 감사합니다
화엄경을 누구나 보고 아해 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그 무량한 공덕에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