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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써 로마사
서방 선진국이 볼 때, 역사라는 말을 하면 어떤 부분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누구나 동의하는 공통분모가 하나 있습니다.
로마 사입니다. 이탈리아 역사로서의 로마사가 아니다. 영국·프랑스·독일을
포함한 유럽 전체, 나아가 미국이 연구하는 인류 역사의 모델로서의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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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입니다. 자국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로마라는 제3국의 흥망성쇠를 객관적
눈으로 살펴보면서 오늘과 내일의 방향을 모색한다. ‘모든 길’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도’ 로마로 통합니다. 로마는 동과 서, 남과 북 모두를 연결한
글로벌 대제국이지요. 유럽 지식인들이 글로벌 차원의 역사에 주목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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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부터다. 신대륙 발견 이후 이어진 대항해시대가 계기입니다. 유럽 외
세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로마 사에 주목하게 됩니다.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로마를 대제국 모델로 삼아요. 마침내 유럽에서 처음으로,
문명사관에 기초한 로마 역사서가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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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에 달하는 [로마 흥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로 옥스퍼드 대학 출신 영국인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저자입니다.
내부의 적이 더 냉혹하고 잔인하다
흥미로운 것은 책이 최종 완성된 때가 1789년이란 점입니다. 프랑스 시민들이
유혈혁명에 돌입하던 해, 영국 시민은 로마 사 연구에 들어갑니다. 파리가
로베스피에르 공포정치로 숨도 못 쉴 당시 영국은 기본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한 글로벌 패권 확보에 나섭니다. 바이블이 아니라, 로마사의 교훈을 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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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진출입니다. 이후 로마 사 연구는 세계 지식인의 중심 테마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로마 사를 공부할 땐 황제별 연대기로 접근하는 편이 수월
해요. 황제에 오른 인물을 중심에 두고 로마 사 전반으로 시야를 넓혀가는
방식입니다. 대통령을 키워드로 한 현대사 연구와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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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부분은 로마사의 종점에 관한 부분이에요. 로마 멸망이 언제인지에
대한 논의가 다양합니다. 당연하지만, 로마의 종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연구 내용도 달라집니다. 로마사의 출발은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
(Romulus and Remus)를 시조로 한, 기원전 753년 로마왕국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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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이후 기원전 509년, 로마는 독재자 왕을 쫓아낸 뒤 직접 공화정체제로
들어가지요. 남성 시민 개개인에게 권력을 부여한, 그리스 폴리스와 같은 정치
체제입니다. 기원전 27년, 로마 왕국과 로마 공화정의 중간 형태인, 제정 로마
에 들어갑니다. 초대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에요. 4세기, 로마 제정은 두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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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로 분리돼요. 현재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즉 현재의 이스탄불을 중심
으로 한 비잔틴 대제국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이탈리아 로마를 서로마,
콘스탄티노플 비잔틴을 동로마라 부릅니다.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 용병
대장에 의해 멸망합니다. 동로마 비잔틴은 서로마보다 무려 1000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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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합니다. 이슬람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아메트(Sultan Ahmet)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것은 1453년입니다. 서로마와 동로마의 멸망 시기가
달라지면서 로마 흥망사에 대한 기준도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의미의 로마 사는 서로마, 넓은 의미의 로마 사는 비잔틴까지로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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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대세입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전혀 다른 제3의 로마 멸망 기를 제시
하기도 합니다. 서로마와 동로마 사이 지속했던 동류의식이 사라진 때가 로마
최후의 날이란 의미입니다. 외부의 침략이 아닌, 내부의 분열에 의한 로마
사 단절이 로마 최후의 날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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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시기는 1204년입니다. 서로마가 제 4차 십자군 전쟁
이란 미명 하에 동로마를 침략한 해이지요. 이른바 라틴 제국(Latin Empire)
이라는 이름 하의, 서로마에 의한 동로마 침략 시기입니다. 1261년까지 무려
57년간 지속한, 서로마에 의한 동로마 통치지요. 금으로 치장된 콘스탄티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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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부를 탈취하기 위한 서로마의 욕(慾) 그 자체가 주원인입니다. 성전을 가장
해, 형제 국이자 같은 크리스천 대제국을 초토화합니다. 당시 동로마 역사가
들은 “서로마의 침략이 이슬람 침략보다 한층 더 잔인하고 교활하다”고 기술
해요. 인류 역사가 증명하듯, 내부의 적이 한층 더 참혹하고도 차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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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연대기에 의한 로마 사는 주로 좁은 의미의 로마 사에 적용됩니다.
바로 서로마의 역사에요. 제정 로마의 출발점 아우구스투스 이후 476년 멸망
까지, 449년간 흥망성쇠 연대기입니다. 이른바 로마 융성기를 대표하는 5현제
에 관한 연구는 황제 연대기의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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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러하듯 명암은 교차합니다. 황제 연대기는 반드시 명의 역사에
그치지 않아요. 암으로서의 황제 연대기, 즉 폭군 황제에 대한 역사도 중요
합니다. 폭정을 통해 선정의 가치와 방향을 잡아가는 식입니다.
황제는 목에 죽음을 걸고 산다.
한국에서 폭군이라고 하면 제정 로마 5대 황제 네로(Nero)가 가장 먼저
떠오를 듯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크리스천을 탄압한 황제라는 점에서
한국인에게 특히 유명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폭군 황제라 말할 때, 로마
사 최악의 인물은 네로가 아닌 칼리굴라(Caligul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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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도 자주 활용되는 폭군이지요. 제정로마 3대 황제로,
41년 암살됐어요. 집권 3년 10개월 만에 당한 비극적 종말입니다. 당시 28살
칼리굴라는 사후,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 직전까지
간 인물입니다. 원로원에 의한 기억 말살 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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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인물에 관련된 기억 전부를 영원히, 소각 매장하는 형벌입니다. 후임
황제인 클라우디아의 반대로 형벌은 면했지만, 남아있는 조각상이 극히 드문
인물이 칼리굴라입니다. 팔라티니 언덕(Palatine Hill)은 로마에 들르면 반드시
찾아가는 곳입니다. 로마 한복판, 콜로세움 근처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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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 암살 극이 벌어진 비극의 땅입니다. 팔라티니는 영어로 Palace,
즉 왕궁을 의미해요. 칼리굴라는 왕궁 아래 건물에서 행해진 연극을 보러 가던
중 암살됐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콜로세움 광장에서 카피톨리니 언덕
(Capitoline Hill)으로 이어진, 500m 길이의 로만 포럼(Roman Forum)
왼쪽 언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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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집이었다고 하지만, 과거의 영화를 느낄만한 그 어떤 증거도 남아
있지 않아요. 현재는 높이 10m 정도의 소나무로 뒤덮인 언덕으로 변해
있습니다. 불과 50m 떨어진 곳인데도 관광객으로 뒤덮인 콜로세움 주변
분위기와 전혀 달라요. 개인적 느낌이지만, 차갑고도 고독한 공기만이 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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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출입을 금지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로만 포럼 내 사각지대가
팔라티니 언덕입니다. 입체적으로 보기 위한 최적의 장소는 카피톨리니 박물관
반대편 전망대에요. 카피톨리니 박물관이 워낙 커서 놓치기 쉬운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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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처음부터 들러 조망하는 것이 좋아요. 칼리굴라만이 아니라, 역대 로마
황제들이 살았던, 음울하고도 싸늘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로마는 검투
사와 크리스천만이 아니라, 황제의 피로 얼룩진 도시이기도 합니다. 황제가 된
다는 것은 목에 죽음을 달고 다닌다는 의미이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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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마 사 전체를 통틀어 스스로 황제 자리를 마다한 인물은 아무도
없어요.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의 영광이라도 최고 권력에 집착했어요.
권력욕은 로마인의 DNA 그 자체같아요. 로마 건국신화를 보자. 서로 세력다툼
을 하는 과정에서, 형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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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만이 아니라, 부모·모자·부부·자매도 서로 죽이는, ‘권력=죽음을 동반한
일상사’라는 것이 로마 건국 이래 상식입니다. 필자가 칼리굴라에 주목한 이유
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인간 칼리굴라에 대한 연구로 황제로서만이 아닌,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보낸 1세기 로마인에 관한 관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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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치부심 끝에 황제에 오른 인물에 관한, 심리학·정신분석학 차원의 연구
라고나 할까.. 둘째는 청산과 보복이라는 한국 정치와의 유사성에서 시작
됩니다. 간단히 말해 칼리굴라를 보면 오늘은 물론 내일의 한국 정치가
눈에 들어옵니다. 로마사가 세계 지식인 모두의 관심거리가 된 가장 큰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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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의 보편성과 일반화’에 있어요. 로마 사를 통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적용 가능한 교훈이나 모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암살된 독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보면 권력자의 야망과 비극, 나아가 권력의 성격과 특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살해 공포에 시달린 칼리굴라의 유년
칼리굴라라는 이름은 로마 군인들이 신던, 가죽으로 만든 작은 군화에서
유래합니다. 1세기 초 로마를 대표하는 장군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를
아버지로 둔 칼리굴라는 전쟁터에서 태어나, 전쟁터에서 성장합니다. 가죽
군화를 신고, 전선을 오가는 아버지 주변을 맴돌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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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로마군의 아이 돌 같은 것이 칼리굴라 인생의
출발점입니다. 로마군과 함께 동고동락한, 친근감이 느껴지는 인물이에요.
그러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원인 모를 이유로 죽으면서 180도 달라진 삶에
빠져듭니다. 역사가들은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뒤에 2대 황제 티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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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berius)가 있다고 봤어요.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자 미리 제거
한 것입니다. 곧이어 칼리굴라 가족 모두가 비극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요.
칼리굴라는 6명의 형제자매 중 3번째입니다. 형 두 명이 처형당하고, 여동생
3명만 살아남아요.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어머니는 기아로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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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니다. 정작 칼리굴라를 살려준 인물은 티베리우스 황제에요. 유배지를 전전
하던 칼리굴라가 열아홉 살 되던 때 티베리우스의 별장, 카프리(Capri)에 불려
옵니다. 티베리우스는 로마 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인물입니다. 아우구스투스
양자로 들어가 황제에 오르지만, 원로원의 지지가 미약한 이방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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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후 잠시 로마에 머무는 동안, 죽음의 공포에 빠지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
암살될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증입니다. 티베리우스는 아예 로마를 떠나, 나폴리
근처 카프리 섬으로 거처를 옮겨요. 절벽 위에 세워진 왕궁 속에서 암살의
위협 없이 생존하는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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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가 없는 로마는 거의 무법지대로 변해갑니다. 로마가 자랑하던 탁월
한 행정력도 사라집니다. 원로원이 로마 정치를 좌지우지하지만, 부정부패가
하늘을 찌릅니다. 칼리굴라는 이런 상황에서 카프리 섬에 불려온 겁니다. 이미
저세상에 간 가족들을 고려하면, 언제라도 티베리우스에게 살해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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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었습니다. 1분, 1초의 공포가 카프리 섬에서 보낸 5년간 칼리굴라 인생
의 전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를 먹고 자란 피해망상증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불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칼리굴라보다 일곱 살
어린 손자, 게메루스(Gemellus) 때문입니다. 최전선에서 암살된 아버지 덕분
이겠지만, 칼리굴라에 대한 로마시민들이 지지와 사랑은 특별했어요. 칼리굴라
는 카이사르는 물론,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로마 제정의 성골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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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이에 비해 티베리우스와 손자 게메루스는 성골이 아닌, 6두품 정도
방계 혈통에 불과해요. 티베리우스는 손자 게메루스와 칼리굴라 두 명을 후계
자로 임명합니다. 티베리우스 사후 공동 황제가 된다는 의미에요. 칼리굴라의
정통성과 인기를 게메루스에 나눠주면서, 때가 되면 제거하자는 것이
티베리우스의 생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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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칼리굴라가 선수를 칩니다. 37년 3월, 티베리우스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입니다. 칼리굴라 본인, 나아가 칼리굴라를 지지한 세력에 의한 암살
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당시 칼리굴라의 나이는 24살이었습니다.
17세 게메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 자리에 오르지만,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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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를 진짜 황제로 받아들여요. 로마 시민의 인기를 배경으로 칼리굴라의
초기 행적은 성군 그 자체입니다. 로마시민에 대한 세금도 내리고, 티베리우스
식 정치보복도 금지합니다. 각종 공공건물도 늘리고, 티베리우스 이래 중단된
검투사들을 통한 ‘피의 이벤트’도 벌여 인기를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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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의 공백을 한순간 메워준, 젊고 능력 있는 황제로 추앙됩니다.
그러나 재임 7개월째부터 상황은 급변해요.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3개월에 걸친 병상 생활에 들어갑니다.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어요.
칼리굴라 본인은 음식을 통한 암살 후유증이라 믿지만 완쾌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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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는 180도 변해요. 성군에서 로마 최악의 폭군으로 변신합니다. 학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도 많습니다. 먼저, 공동
황제 게메루스를 암살 음모 범으로 살해합니다. 원로원 장로들도 사형장으로
보냅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수단과 방법 안 가리고 공공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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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탈합니다. 자신의 말(馬)을 원로원의 대표 격인 집정관(Consul)에 임명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원로원을 아예 정면으로 부정한 행동이에요. 언제
어디서 암살될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증이 나은 ‘미친 정치’입니다.
후계자 문제는 칼리굴라가 보여준 피해망상증의 극치에요. 주변 모두를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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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과정에서, 오직 자신의 혈통만 믿게 됩니다. 자신의 직계만이 미래의
후계자가 될 수 있고, 돼야만 한다고 맹신합니다. 결국 피의 후계자 창조를
위해 살아남은 세 명의 여동생들과의 근친상간도 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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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당시 성도덕이 21세기 현재와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여동생, 그것도 세 명 모두와 한꺼번에 성관계를 갖는 것은 전혀 다
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첫째 여동생의 경우 이미 남편을 둔 유부녀이기도
합니다. ‘운 좋게’ 첫째 여동생이 임신하지만, 출산과정에서 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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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미래를 지켜줄 피가 사라지면서 칼리굴라의 피해망상증은 한층 더
해갑니다. 죽은 여동생을 신으로 승격하면서, 로마 곳곳에 여동생을 기리는
신전을 건설합니다. 물론, 칼리굴라 자신도 신으로 행동합니다. 칼리굴라의
‘미친 행적’에 공포를 느낀 두 여동생은 참다못해 ‘오빠 암살’에 나섭니다.
그러나 직전에 발각돼 섬으로 유배됩니다.
권력자가 직계 상속에 집착하는 이유
원로원과 대립한 칼리굴라는 국민적 지지기반을 넓히고자 갑자기 영국 침략에
나섭니다. 로마 정치의 특징이지만, 전승 무용담은 황제가 갖는 권위의 기본
요소입니다. 대규모 군대와 함께 영국 침략에 나서는데 현장 장군들의 반발에
직면합니다. 겨울의 영국해협을 건널 만 한 배나 장비가 없는 상황에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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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모두 공격을 주저하게 됩니다. 보급도 부족한 상태에서 칼리굴라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로마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신으로서의 칼리굴라 숭배 이벤트
도 계속 이어져요. 재정난이 한층 더 심해지고 원로원은 물론, 군인들의 불만
도 가속화됩니다. 칼리굴라의 운이 다한 것은 41년 1월 24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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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에 가담한 군인들은 살해 후 칼리굴라의 살점을 씹어 먹었다고 해요.
칼리굴라의 미친 정치는 어릴 때 겪은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물론, 전임 황제 티베리우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장래도 어둡게 보기 시작해요. 어머니와 두 형의 죽음도 마찬가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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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망상증으로 발전되면서 폭정에 들어간 것입니다. 칼리굴라는 무표정
연기의 달인으로 불리는 황제에요.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눈도 깜짝 안
하는 냉혈한이에요. 티베리우스 별장 카프리에 머물 당시 체득한 생존법에서
비롯된 버릇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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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칼리굴라의 최후는 카이사르와 비슷해요. 두 사람의 암살 음모자
이름이 카시우스(Cassius)란 점과 최후의 순간 약 서른 군데 가까이 칼에
찔려 숨졌다는 부분도 똑같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암살의 역사
조차 되풀이되던 곳이 로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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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춤을 통한 굿판’은 언제부턴가 주기적으로 나타난 한국 정치의 일상적 풍경
입니다. 권력을 잡기 무섭게 시퍼런 칼춤이 시작됩니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숙청과 청산’ 중간 어디쯤에서의 굿판이 벌어집니다. 감옥행만이 아니라, 자살
자도 늘어납니다.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가 벌인 ‘업보’로 인해 두려움을 갖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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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피해망상증으로 발전되기 쉬워요. 주변의 충고는 물론 경고도 무시
합니다. 억지를 부리며 자신이 가진 권력을 사방팔방 휘두르지요. 정권 말기로
접어들면서 직계세습에 올-인합니다. 당장은 직계세습에 성공할지 몰라도,
자신이 뿌린 업보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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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는 로마에만 존재하는, 2000년 전 폭군에 그치지 않고 현재 세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현실로서의 반면교사이기도 합니다. 로마사가 갖는
보편성과 일반화를 믿는다면, 권력욕에 빠진 정치의 실체를 알고 싶다면,
칼리굴라 공부가 최적의 방안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2023.4.1.sat.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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