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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의 유고수필집 『살아 있는 향기』 먹거리여행 - 박 종 국
예식 등 잔치는 말할 것 없고 여행, 축제, 모임도 먹을거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잘 먹어야 제대로 하루를 즐긴 것처럼 여기게 된다. 하루에 세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먹어도 먹을거리가 관심일 수밖에 없다.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기도 하다. 굳이 식도락가 아니라도 그렇다. 단골로 다니던 음식점이거나 소문난 맛집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계절음식도 있어 때를 잘 맞출 수 있으면 나쁠 것이 없다. 대개는 혼자 식당에 가는 일은 드물고 누군가와 어울리게 된다. 시내 가까운 곳도 좋지만 어쩌다 시간을 내어 교외로 나가게 되면 간단한 소풍이 되고 하루쯤 생각지 않았던 여행이 된다. 오가면서 농촌을 덤으로 돌아보며 계절의 변화를 직접 보면서 읽을 수 있다. 봄날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빠름을 느끼기도 하면서 풍성해지는 자연의 모습에 가슴이 부듯해지기도 하고 지친 일상을 힐링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넉넉해진다. 『살아 있는 향기』수필집은 백천께서 2007년 7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쓴 작품 80편을 담아낸 유고수필집이다. 12~13년 전에 주 1편 꼴로 일기 쓰듯 쓴 작품으로 현재의 상황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소재도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음직한 일들로 소박하면서 친밀감이 간다. 대개는 한 번씩은 겪어보았음직한 것들로 낯설지가 않아 편안하다. 글을 읽으면서 내 자신의 일처럼 지난날이 빠르게 스쳐가면서 미소를 머금게 하기도 한다.
「묵 동네가 있던 그 자리에는 그 동안 대형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건설 중에 그 외형을 드러내고 있었다. 묵 동네가 있던 주변을 훑어보다 한 곳에서 50년 전통을 내세운 할머니 묵집 키다리 입간판 하나를 찾았다.」「과수원에 들어섰을 때 반기는 사람들은 푹푹 찌는 폭염 속 땀으로 흙물이 든 작업복에 검붉게 탄 얼굴에 흰 이를 드러냈다. 과수원을 하는 형제는 ‘오늘이 자기 과수원에서 올해 복숭아를 처음 따서 첫 출하하는 날’이라며 가지런히 쌓아놓은 복숭아 상자를 쳐다보았다.」 -『복숭아 과수원 길 오가며』중에서 (35쪽) 도시 주변 농촌지역은 몰라보게 변해가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묵마을이 아파트단지로 변해가면서 상전벽해가 되었다. 과수원에 복숭아 하나도 농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만큼 그냥 열리고 익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집을 즐겨 찾는 이유라면 그 집 막걸리 맛과 두부를 숭덩숭덩 썰어넣어 푸짐하게 나오는 얼큰한 생선찌개를 즉석에서 끓여먹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이 집에서 만나 수육과 칼국수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 집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수육과 칼국수가 아카데미 극장 앞 골목 시절 그 맛이 변하지 않았다며 모두 홍보대사가 된다. 이 집을 찾으면 인사는 없었어도 안면이 있던 우리 동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의 나이 든 모습도 볼 수가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칼국수 집을 처음 찾은 지도 벌써 반세기가 다 되었다.」 -『단골의 사연』중에서 (44쪽) 같은 막걸리도 분위기 따라 그 맛이 확 달라진다. 단골로 반세기 가깝도록 드나드는 손님들을 보노라면 크게 낯설지가 않다. 비슷한 취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은 어쩔 수 없어 그들도 단골집과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자릴 함께 하지 못한 나를 위해 장어구이 한 판을 사 왔다며 온기가 있는 커다란 검은 비닐 봉투를 들어보였다. 또 다른 비닐 봉투를 들어 보이며 이건 식당에서 싸준 누룽지라고 했다.」「구이 집을 찾을 때마다 누룽지를 챙겨주시던 시어머니인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 땐가 점심시간에 구이 집을 찾았을 때 단체 손님이 가득 들어 바쁜 모습이었다. 이 때 할머니가 무엇인지 숨기듯 검은 비닐봉투 하나를 가져와 우리 방에 놓고 갔다. ‘시간이 좀 걸릴 터이니 지금 막 긁어놓은 이 누룽지로 우선 시장기를 달래라.’며, 그 후 그 집을 찾을 때마다 할머니는 언제나 누룽지를 챙겨주었다.」 -『누룽지 맛이』중에서 (83쪽) 고가의 장어구이도 좋지만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심심풀이로 먹어보라고 공짜로 뒷전에 슬그머니 밀어 넣는 누룽지 그 맛을 더 못 잊어한다.
「토마토처럼 발그레한 얼굴에 곱슬머리의 50대 가판 주인은 큰 무더기는 얼마고 작은 것은 얼마라며 ‘더 없이 좋은 찰 토마토’라고 자랑하면서 사길 권했다. 한 무더기를 사고 돌아서는데 한 할머니는 자신이 뜯은 해쑥으로 직접 만든 인절미라며 숭덩숭덩 썰어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주었다.」「옆 자리에서 곱게 다듬은 달래와 냉이를 팔던 다른 할머니는 더 물어볼 것도 없이 달래 한 봉지를 싸 주며 된장국을 끓여 먹으면 그 향기가 더 없이 좋다며 합죽이 웃었다. 할머니 옆 또 다른 자리에서 호박고구마 굽는 냄새...」 -『해쑥 인절미의 향』중에서 (130쪽) 이른 봄날 재래시장에 가면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아주 많다. 봄이 찰찰 넘친다. 가판에 쭈그리고 앉은 할머니의 얼굴도 세월과 함께 쭈그러져 있지만 그 속에는 잔소리처럼 챙겨주는 끈끈한 인정에 따스함이 담겨있다.
「친구의 초가집은 무성한 나무 숲 아래에 있었다. 초가집 마당에는 보리타작을 하는 중인 듯 베어다 놓은 보리와 보릿짚이 가득했다. 그 당시 왜 그리 덥기는 더웠는지. 나무 숲속에서는 매미울음소리가 한창이고 납작한 초가집은 보리 짚 타는 연기에 자욱하게 싸여있었다.」「흰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수건을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시던 어머님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네가 찐 감자를 먹고 싶다는 친구냐?’ 감자를 찌어 줄 테니 이곳은 연기가 많아 매우니 저 나무 그늘 아래에 가 있으라고 했다. 좁은 부엌 보리 짚을 때는 아궁이 연통에서는 보리 짚 타는 연기가 무성하게 피어올랐다.」 -『하지감자 그 맛은』중에서 (189쪽)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이면 찐 감자를 도시락 대신 가져오는 친구가 부러웠다. 친구네 집을 갔다. 순박하면서도 어려운 살림을 엿볼 수 있었다.
「일행은 영동읍내로 맛 손문이 난 한 올뱅이(영동지방에서는 다슬기를 이렇게 부르나 보다) 집을 찾았다. 뒷골집, 상호가 그럴 듯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자리에 앉아 있던 주부 몇 사람이 ‘안녕하세요?’라며 맞았다.」「이 향토음식 자정업소의 대표적 식단인 올뱅이 국밥과 올뱅이 무침을 시켰다. 먼저 나온 밑반찬은 맛부터 일행의 입맛을 북돋우었다. 올뱅이 국밥의 국물은 매큼했으며 부추와 오이와 함께 무쳐서 나온 올뱅이 무침 또한 매큼했다. 밑반찬과 함께 나온 잘게 썬 청양 생 고추와 다지기는 ‘더 매큼하게 먹을 장사는 어디 한 번 넣어 먹어보라,’는 듯이 앉아있었다.」 -『폭염 속에 폭포를 오가며』중에서 (199쪽) 무더운 여름날 다슬기국은 즐겨먹는 음식 중 하나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면 입맛이 되살아나는 보양식으로 여름을 거뜬하게 날 수 있다.
「잘 양념되고 알맞게 익은 배추김치와 깍두기가 밑반찬으로 나왔다. 부인은 추어탕에 진도 지방에서 넣는 방아 잎을 넣지 못해 아쉽지만 토종 고사리를 넣어 끓인 것이라 맛이 다를 것이라고 했다. 박하 향내가 나는 추어탕에 청양고추 다진 것을 넣고 간을 맞추니 탕 맛을 새롭게 더해주었다.」「이 식당을 즐겨 찾아가는 것은 그 식당에서는 다른 곳에선 좀처럼 맛보기 힘든 소머리국밥 그 옛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머리국밥 맛을 더 해주는 식구들이 먹기 위해 담근 것과 다름없는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곁들여...」 -『소머리국밥만 파는 걸요!』중에서 (211쪽) 같은 음식도 늘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 그 식당만의 특성을 지니고 차별화해야 한다. 손맛이고 인정 맛이고 소박하고 텁텁한 맛이다. 단골손님이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멀리서 일부러 찾아갈 때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다슬기를 사도록 결정적으로 마음을 끈 것은 고향 앞을 흐르는 금강 상류 옥천에서 잡아 왔다는 아주머니의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에서 어린 시절 고향에서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다슬기 아욱 된장국 냄새와 맛이 떠오른 것이다. 적은 한 사발과 가을 아욱 한 묶음도 샀다.」「식사를 하기 전에 싱싱한 다슬기를 한 알 한 알 쏙쏙 빼먹으면서 그 맛에 고개를 끄떡였다. 한 알도 버리지 않고 모두 다 빼먹었다. 이어진 햅쌀밥에 가을 아욱 조선된장 다슬기 국으로 저무는 가을에 고향 맛을 한 번 더 즐겼다.」 -『고향 맛 다슬기 된장국』중에서 (243쪽) 다슬기 하나도 고향 마을에서 잡아온 것이라는 그 한 마디가 고향이라도 만난 듯 그렇게 좋고 그 다슬기에서 향수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이처럼 고향은 언제 어디서 들으며 생각을 해도 된장국만큼이나 구수하고 좋다.
「잠시 뒤 수육이 나왔다. 이 집 수육은 기름을 쪽 빼서 삶고 썰기도 잘 썰어 맛을 더해준다고 평이 나있다. 함께 나온 시커먼 열무김치, 우선 열무김치 맛을 보았다. 아주 적당하게 잘 익어 기대하던 그 열무김치 맛이었다. 열무김치와 함께 나온 지고추 다지기, 노릿 노릿하게 잘 삭힌 지고추 다지기 맛도 기대하던 바로 그 맛이었다.」「홀 안 식탁 이곳저곳에서는 한파에 언 사람들이 반주 한 잔씩을 나누며 호탕한 웃음과 이야기꽃들을 피우며 매서운 한파를 녹여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지만 모두들 넉넉한 마음으로 소탈한 손칼국수 점심을 즐기면서 소박한 행복을 나누는 모습들이었다.」 -『첫 한파 녹인 칼국수』중에서 (263쪽) 비록 간단한 밥상이라도 맛이 있으면 된다. 맛만 좋으면 칼국수 한 그릇으로도 넉넉하다. 한겨울 갑자기 밀려든 한파를 녹이는데 부족함이 없다.
「예약을 해야 자릴 얻을 수 있다는 복집은 소문처럼 손님이 많았다. 낡은 집 목제계단을 어렵게 올라 3층에 간신히 자릴 잡을 수 있었다. 주문한 복지리가 나오기 전, 복껍질무침이 나왔다. 모두의 젓가락은 무침으로 향했다. 미나리를 가득 넣은 양념 지리 냄비가 나왔다.」「동창은 내가 복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두 번씩이나 내려와 복을 사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 동창이 즐기는 음식을 모른다. 그러기에 그 동창에게 더욱 고맙고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친구야! 우리 새해 들어 복어탕 한 번 하자!」 -『너 복 좋아하지?』중에서 (272쪽) 동창이라고 서울에서 대전까지 와서 점심을 사기가 쉽지 않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복을 두 번씩이나 말이다. 마음에 빚을 내년에는 덜어보자고 마음속에 굳게 다짐을 한다. 그런 마음씨마저 아름답고 곱게 비쳐진다.
80편의 수필 중에서 먹을거리가 있는 수필 10편을 골라보았다. 백천 수필가께서 소문난 맛집을 찾아 즐겼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한마디로 음식에 일가견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찾는 그 자체로 맛깔스럽고 입맛을 돋게 한다. 사실 먹는 것만큼 흔하면서 중요한 것도 없다. 어쩌다 ‘먹기 위해 사는 것이냐 살기 위해 먹는 것이냐’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어쨌든 음식은 즐기며 적당하게 먹는 것이 좋다. 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발췌된 예문은 그냥 한 번 읽으면 그대로 쏙쏙 들어와 달리 덧붙일 말이 없다 등장하는 먹거리도 많다. 묵, 복숭아, 막걸리, 두부, 생선찌개, 수육, 칼국수, 장어구이, 누룽지, 토마토, 인절미, 달래, 냉이, 된장국, 감자, 올뱅이(다슬기)국밥과 무침, 배추김치, 깍두기, 추어탕, 소머리국밥, 아욱된장국, 열무김치, 지고추, 복국 등 아주 다양하다. 이들을 소재로 토속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수필을 막힘없이 구수하게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금년은 코로나19로 마스크가 필수품으로 생활화가 되었고 사회적 거리 두기로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런 때『살아 있는 향기』를 읽어가면서 지난날 즐겼던 먹을거리를 추억하며 꺼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싶다. 때로는 큰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 때 그 사람이 문득 떠오르고 그립기도 하다. 전화라도 한 번 할까하다가 아니지 지금은 할 때가 아니라며 씁쓸함이 번지기도 한다. - 2020.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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