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초월하여, 유쾌한 인생을 만드는 사람
주혜(主恵) 김정숙 / 수필가
사람 사이의 ‘관계’란 참으로 오묘하며, 사람들의 성격도 정말 다양하다.
어떤 때에는 그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고 예의를 다 해도 작은 오해가 생겨 큰 갈등으로 번지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그런데 또 어떤 경우에는 오고 가는 대화들이 그다지 고급스럽지도(?) 않고 또 때로는 비속어가 난무해도, 상호간에 무척 정겹고 따뜻한 정(情)이 넘쳐나는 그런 인간관계도 있다. 예를 들면 욕쟁이 할머니와 같은 이미지이거나, 또는 연예인 김영옥씨나 윤여정씨처럼 솔직담백한 입담으로 시원한 사이다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사는 우리 동네에도 그런 정겨운 아줌마가 있다. 상황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솔직‧담백함 뿐만 아니라, 듣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즐겁고 재미있는 입담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한다. 그래서 함께 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어 준다.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재미가 있고, 웃긴 얘기만 하는 것 같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원리를 이미 통찰한 듯한 말투를 쓰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뼈있는 말들을 무심하게 툭툭 던지기도 한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얼핏 보면 매너가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사람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눈도 갖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상대방의 됨됨이를 빠르게 파악하여, 그 사람의 성격이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면 본인도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례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핵폭탄급 거친 말들을 시원스럽게 날려버린다. 그런데 그런 말도 상대방이 가급적 불쾌하지 않게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정신을 차리도록 만드니, 참 묘한 매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 아줌마는 우리 엄마들 사이에서는 ‘JH맘’이라 불리운다.
내가 JH맘을 처음 만난 게 아마도 2019년 하반기 쯤 이었던 것 같다. 유달리 말투가 세고 당차기도 했지만, 유독 톡톡 튀는 재미있는 발언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말투를 듣고 있으면 너무 웃기고 재미있어서 나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그 사람의 얼굴만 봐도 툭툭 던지는 그 화법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주 듣기 좋은 편한 소리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거칠고 또 때로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감 있는 비속어도 종종 사용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 사람에게는 원인 모를 정(情)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원래 욕하는 것이나 욕을 듣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사람 중에 한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즐겨 쓰는 비속어들이 정말 싫지 않았고 심지어 정겨운 느낌까지 들 정도이니,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나에게 비속어를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마도 내가 한두 살이라도 언니라는 이유로, 그녀는 나에게도 진심을 다해 언니대우를 해 주는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그런 그녀가 너무 재미있게 느껴져서, 그 사람의 무엇이 그렇게 유쾌함을 유발하는 것일까(?)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나의 어설픈 분석대로라면, 그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시선을 가감 없이, 전혀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솔직함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 같다. 또 그것을 해학적인 웃음으로 승화시키는데 최적화 되어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 사람의 어릴 적 인생이, 큰 고생 없이 부모님으로부터 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왔을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 사람과 개인적인 얘기들을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내 주변에 그만큼 힘든 유년시절을 살아온 사람은 보기 드물 정도로, 정말 힘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내 유년시절이 참 고달팠다며 내가 고생한 이야기들을 한풀이처럼 늘어놓았다. 나는 육남매 중 막내였고 집안 형편은 늘 가난했다. 아버지는 워낙 약골이시라 어머니가 정말 쉴 틈 없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우리 형제들도 늘 그런 가난 속에 시달려야 했고, 유독 공부를 정말 잘했던 둘째오빠는 집안 형편이 너무 힘들어 중학교도 1년을 휴학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언니들과 오빠들보다는 훨씬 더 편하게 산 인생이었겠지만, 나 역시도 땔감을 얻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해 와야 했다. 그리고 꽁꽁 얼어있는 동네 길을 가로질러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 물지게로 길어 나르는 생활도 많이 했다. 한겨울에는 정말 손가락이 깨지도록 시려왔다. 저녁때면 아궁이에 불을 때서 소여물을 끓이는 일도 종종 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내 또래의 아줌마들은 <언니, 언니는 무슨 80세 넘은 할머니들과 친구하다가 왔어? 도대체 어느 시대에서 살다 온 거야?>라고 묻는다. 그 정도로 내 또래 엄마들 사이에서는 그런 깡촌의 삶들을 살아 본 인생들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시골생활들이 그저 한 많은 인생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름대로 운치도 있고,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그 가난한 삶 속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산천을 돌아다니며 보리수, 머루, 산딸기, 참다래도 따먹어봤고, 송사리, 잉어, 우렁이도 잡아보고 맑은 계곡물에서 가재도 잡아봤다. 또 어떤 때는 우리들의 아지트를 만들기 위해 대나무 숲에 아담한 작은 움막도 지어보았다. 때로는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산속 작은 동굴도 탐험해 보았다. 그렇게 나는 대자연 속에서 가난의 설움을 어느 정도 치유 받고 자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JH맘이 살아온 인생은 내 고생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했던 고난은 작은 육체적 고생이었다면, 그녀의 삶은 육체와 정신의 총체적 고통이었다. 친어머니의 얼굴은 어렸을 적부터 전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도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신 듯 하다. 결국 어렸을 적부터 고모집에 얹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식모살이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당연히 중고등학교도 제대로 갈 수 없었고 수많은 눈칫밥을 먹으며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가지 불안감에 의해, 어렸을 적부터 잠을 제대로 못자는 것이 습관화되어 지금도 자주 깬다고 했다. 조금씩 설잠을 자는 시간을 모두 합해도 하루 평균 4시간 정도밖에 못자는 것이 이미 익숙해져 있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삶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보통의 경우 부모 중 한명에게서라도 적절한 사랑을 받으면 그 아이는 대개는 세상의 힘듦을 그럭저럭 잘 버텨낸다고 한다. 최소한 어렸을 때만이라도 부모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받을 수 있다면, 그 어렸을 때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비교적 원만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JH맘은 부모 모두에게서 적절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유년시절을 보낸 참 서글픈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청소년기부터 미용분야에서 일하게 되었고, 아주 작은 일부터 배우기 시작하며 다양한 고생들을 많이 했다. 20대 중반쯤 되어서는 백화점내 미용실에서 어느 정도의 높은 지위에서 일할 정도로 실력도 꽤 키웠다고 했다. 그러다가 결혼을 했고 자녀들을 키우느라 여러 가지 일들도 많이 경험해 보게 되었지만, 지금은 다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나는 우연히 듣게 된 그녀의 지나온 삶에 정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과거의 삶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 그녀의 삶은 많이 유쾌해 보인다. 그녀의 가정 분위기도 많이 건강해 보인다. 그녀의 세 아들들 또한 성품들이 준수하여 주위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으며 잘 성장해 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그 JH맘에게 물었다. <심리적으로 정말 많이 힘들었을텐데, 그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다 견디며 이렇게 활기찬 가정을 이룰 수 있었어?>라고 물었더니, 자신의 우울했던 삶을 더 이상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악착같이 버티며,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굳이 심리학의 이론들을 덧대지 않아도, 유년기의 힘든 상처와 기억은 우리의 인생을 평생 동안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전반적인 인생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일반인들도 잘 아는 일반적인 통념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들이 더 아름다워 보이고, 그녀의 해학적 삶이 더 진국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거침없는 진솔한 말투가 우리에게 더 큰 교훈과 여운이 되는 것 또한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런 굴곡진 삶속에서 깨달은 것들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꺼내놓기에, 함께하는 우리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들은 정말 알쏭달쏭한 신기루같다. 모든 것이 분명치 않고, 그 어떤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기에, 앞으로의 인생도 결코 우리가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과연 우리 자신이 무엇을 형상화시키며 무엇을 걷어 올릴지, 그 열쇠(key)를 갖고 있는 것 또한 분명 우리 자신일 것이다. 과거의 깊은 상처와 고난, 설움, 시련, 자기 열등감의 위험성을 이겨내고 매우 단단하게 일어선 JH맘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대의 그 진심이 자녀들의 마음속에서 밝은 해가 되어 따뜻한 햇살을 만들며 평생의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첫댓글 우리 주변에는 평범해 보여도 위대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