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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6월 6일 목요일
[(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노르베르토 주교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며,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2,8-15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15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종합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이 두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본성과도 같아 이겨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를 사랑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하는 사랑이 섞여 있습니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조차도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애(自己愛)와, 그로 말미암아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원죄’로 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일 수 없게 하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바로 원죄입니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47-48면 참조).
자기애를 이겨 내려면 끊임없이 하느님을 중심에 두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배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을 때 그 누구도 결코 도구화되거나 소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향하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번째 계명이 자연스럽게 실현됩니다.
이러한 삶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는 인간은,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할 때 본모습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잘 돌보려면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시선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할 때,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그저 감지덕지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원리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원리는 바로 사랑의 계명이요 사랑의 법규입니다. 요약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와 균형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28-3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 참된 사랑의 모습이 어떤 것일까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 사랑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사랑, 상호 성장하는 사랑, 통합되고 완성되는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우리를 내신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랑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대상에 앞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고, 가장 먼저 그분께 사랑을 드리고 흠숭과 찬미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당신의 모상인 동료 인간에게도 향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기반으로 우리의 사랑은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부족해 보이는 동료 인간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 그 외에도 하나가 추가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향한 사랑과 존중, 배려와 호의적인 시선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충만한데, 자신을 향한 사랑은 조금도 없습니다. 자신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여깁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업신여깁니다. 겸손의 덕과는 거리가 먼 지나친 자기 비하나 자기 학대 역시 금물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배려하거나 존중하지도 않고, 내가 나에게 아주 박한 점수를 매기는데, 이 세상 누가 나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겠습니까? 좋은 점수를 주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허물 투성이요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부단히 되풀이 되는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럴 자격을 조금도 갖추지 않은 부당한 우리이지만,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 안에 머무시고, 우리 안에서 호흡하십니다. 우리는 또 다른 살아있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부족한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께서 건네시는 거룩하고 품위 있는 의복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 티모테오 2,12)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죽음이 두려운 거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수많은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문제는 왜 그들이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죽음을 전제합니다. 죽기 싫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청한 막시킬리아노 콜베 신부님이나 아무도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던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몰로카이섬에 스스로 찾아 들어갔던 다미아노 신부님, 아니면 가난한 이들의 인권을 위해 저항하다 미사 때 총 맞아 순교하신 오스카 로메로 주교님 등은 사랑이 곧 목숨을 내어놓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당했을 때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4명의 군목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이 USAT Dorchester에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침몰할 때 군인들이 구명정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각자의 구명조끼를 포기했습니다. 네 명의 군목—조지 L. 폭스, 알렉산더 D. 구드, 클라크 V. 폴링, 존 P. 워싱턴—은 팔짱을 끼고 함께 기도한 후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내려갔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희망이 없다면 진정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위 네 명의 군목은 물론이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은 부활의 희망을 품지 않았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입니다. 남편의 더 큰 사랑을 기대하지 않고 자녀에게 다가가는 어머니는 분명 자녀를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리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생존부터 걱정하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걸까요? 그냥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할 뿐입니다.
개신교의 박효진 장로는 교도관을 하면서 ‘서른 명’에 가까운 사형수들이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극명하게 다르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아무리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가도 목숨 줄 앞에 놓이게 되면 오줌을 지리거나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죽음이 두려운 이들이 자살합니다. 죽음을 온전히 맞이할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심판이 두려워 그냥 그렇게 고통받고 사는 게 싫어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리서치에 따르면(Pew Research Center) 대부분 사회에서 가족은 삶 의미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물질적 복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한국은 왜 이렇게 진정한 가치, 곧 진정한 계명을 잊게 된 걸까요? 누구도 자기를 장님으로 만드는 욕망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바로잡아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이전의 사두가이들은 지극한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추구하며 영원한 것들의 가치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이러한 잘못한 시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죽어도 산다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니시면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그러면 누구도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잴 필요 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고 이것이 삶의 끝니 아니라고 믿게 될 때는 사람이 180도 바뀐다고 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우리 삶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두려움을 버리고 나 완전한 희망으로 나아갑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원래는 좋은 뜻인데 그 의미가 퇴색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진상(珍賞)입니다. '진상'의 유력한 어원 중 하나는 바로 '왕이나 고위층에게 진귀한 물건이나 지방의 토산품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새 쓰이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진상'의 어원으로 꼽힌 이유는 진상이 가지는 폐단 때문이었습니다. 말로는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예우라고 하지만 먹고살기 빠듯한 서민들에게는 귀한 것을 마련하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고, 구하기 힘든 것을 요구해 부담이 가중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진상이 지닌 폐단이 부각되면서 '허름하고 나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었고, 현대에 와서 많이 쓰이는 '진상'은 그 부정적 의미를 차용하여 '못생기거나 못나고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전에 ‘땅콩회황’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땅콩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기에 봉지를 드리고 먹겠다고 하면 접시에 담아 드리는 것이 매뉴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상 손님이 땅콩을 접시에 담아 주지 않고, 봉지로 주었다고 화를 내면서 비행기를 멈춰 세웠습니다. 그리고 승무원을 내리게 한 후에 비행기를 출발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믿고,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혔던 ‘진상’의 한 예입니다. 이런 진상의 이야기는 곧잘 언론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좋은 뜻인데 그 의미가 퇴색된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리사이’입니다. 바리사이의 원래 의미는 ‘분리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리사이는 죽은 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리사이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바리사이는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르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리사이는 특권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진상’ 행위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하는 말은 지키고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마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지고가야 할 짐을 남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조문을 외우지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릇의 겉만 닦고 속은 닦지 않는 것처럼, 바리사이는 겉은 화려하게 꾸미지만 속마음은 탐욕과 거짓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의 얄팍한 지식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쳐야 한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모든 바리사이가 진상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 중에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덤에 모셨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회심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진상 신자, 진상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오늘의 성인
성 노르베르토(Norbert)
신분 : 대주교, 설립자
활동지역 : 마그데부르크(Magdeburg)
활동연도 : 1080-1134년
같은이름 : 노르베르또, 노르베르뚜스, 노르베르투스, 노르베르트, 놀베르토, 놀베르트, 볼베르투스
독일 산튼(Xante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노르베르투스(Norbertus, 또는 노르베르토)는 하인리히 5세 황제의 궁전에서 하사품을 관리하는 차부제로 지내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식에 참석하고자 말을 타고 가다가 번개를 맞아 땅에 떨어졌다. 얼마 후 의식이 회복되자 방탕했던 지난 생활에 대해 깊이 통회하며 "주님, 저로 하여금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옛날의 사도 바오로(Paulus)처럼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그는 쾰른 근처 지그부르크의 한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와 단식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결국 주님의 뜻을 확신한 그는 쾰른 시로 나와 사제 서품을 준비하고 11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왔으나 환영받지 못하였다. 그는 과거의 죄의 보속으로 이러한 모욕과 냉대를 참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후 그는 주임 사제직을 사임하고 소유물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보속의 길을 떠났다.
그가 북부 프랑스를 다니며 주님의 말씀을 설교한 것이 큰 효과를 내게 되어 그는 매우 유명한 설교가로 변신하였다. 이윽고 포세스(Fosses)의 성 후고(Hugo, 2월 10일)가 동반자가 됨으로써 그의 능력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1120년 1월 25일 그는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레몽트레(Premontre)에서 성 마르티누스(Martinus)의 율수 수도회를 개혁하여 새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 수효는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프레몽트레 수도회'이다.
그는 생전에 8개의 대수도원과 2곳의 수도원을 세웠고, 교황 호노리우스 2세(Honorius II)로부터 1125년에 공식 인가를 받았다. 그 후 테오발드(Theobald) 백작이 입회를 요청하자 그는 입회를 거절하고 세상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따라 살도록 제3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그는 독일에 갔다가 황제와 교황 사절의 간청에 굴복하여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가 될 것을 승낙하였다. 그 교구에는 개혁할 일, 정리할 일들이 태산 같았다. 그가 임지에 갔을 때 주교관의 문지기는 그의 너무나 남루한 모습을 보고 거지로 착각하여 주교관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새 주교와 그의 개혁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된 이들도 많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방해하며 심지어 그를 처치해 버리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덕행과 온화하고 용맹한 마음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였다.
1132년 그는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로마에 갔다가 중병에 걸려 4개월 간 병상에 눕게 되었으나 그 후 교구로 돌아와 2년 간 직무를 수행하다가 1134년 54세로 선종하였다. 그는 캉브레(Cambrai)에서 이단과 싸우는 친구 성 발트만(Waltman, 4월 11일)을 도와주었으며, 성체 현존에 관한 이단을 배격하는데 공로가 컸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1672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는 전세계 교회에서 그의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H
성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Rafael Guizar Valencia)
활동년도 : 1878–1938년
신분 : 주교
지역 : 베라크루즈(Veracruz)
같은 이름 : 발렌치아, 발렌키아
성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Raphael Guizar Valencia)는 1878년 4월 26일 사모라(Zamora) 교구에 속한 멕시코 서남부 미초아칸(Michoacan) 주(洲)의 코티자(Cotija)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프루덴치오(Prudencio)와 나티비타드(Natividad)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라파엘과 그의 형제들은 가정에서부터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9살 때 어머니를 여읜 라파엘은 일찍이 수도회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이어 예수회 사제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성소(聖召)는 사제직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이름 안에서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891년 코티자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어 1896년에 사모라에 있는 대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1년 6월, 23살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직 초기에 그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사모라와 멕시코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선교 사업을 수행하는데 헌신하였다. 1905년 사모라 신학교의 영성지도 신부로 임명된 그는 성체성사에 대한 사랑과 동정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 안에서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1910년에 일어난 멕시코 민족주의 혁명의 여파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심해지자 그는 이에 저항하기 위해 1911년에 종교 신문을 창간하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불행히도 혁명 세력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박해는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수십 년 동안 거처조차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는 사생활의 제약으로 인해 고통 받았으며 그 외에도 많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도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거리의 상인, 음악가, 동종요법(同種療法) 치료사 등으로 위장하여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며 죽어가는 이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혁명 세력들에 의해 쫓겨 다니며 계속되는 체포의 위험 때문에 더 이상 멕시코 지역에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15년 말까지 미국의 남부 지방에 머물렀고, 그 다음 해에 과테말라(Guatemala)로 가서 대규모의 선교사들을 지도하였다. 선교사로서 그의 명성이 쿠바(Cuba)에까지 전해지면서 그는 그곳의 선교사들을 지도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쿠바에서의 그의 활동은 매우 생산적이었으며, 특별히 1919년 흑사병 희생자들을 위한 자선사업은 매우 모범적이었다. 1919년 8월 1일 쿠바에 머물고 있던 그는 베라크루즈 교구의 주교로 선출되어 그 해 11월 30일 아나바(Havana)의 주교좌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가졌다.
멕시코 혁명이 잦아든 1920년 1월 9일 라파엘 주교는 그의 교구로 돌아왔다. 그는 처음 두 해 동안 교구의 방대한 지역을 방문하며 선교사들을 지도하고 가공할 지진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을 도왔다. 대지진은 베라크루즈 교구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대규모의 파괴와 죽음을 야기하였다. 그의 사명은 본당에서의 설교와 교리교육, 혼인 유효화와 고해성사를 듣는 일 그리고 지진 희생자들을 돕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미래의 사제들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1921년 그는 지난 1914년에 몰수된 할라파(Xalapa / Jalapa)의 오래된 신학교를 돌려받아 보수하였다. 그러나 보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에 의해 다시 점거당했다. 그래서 그는 멕시코시티(Mexico City)로 신학교를 옮겨 15년 동안 은밀히 그 기능을 유지하였다. 이 신학교는 박해 기간 동안에 문을 연 유일한 곳으로 300명의 신학생들이 있었다.
그는 베라크루즈 교구의 책임을 맡은 이후 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고 그 후로도 줄곧 도망을 다녀야 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교구로 돌아와 박해자들의 손에 자신의 목숨마저 맡긴 것은 용맹하고도 모범적인 행동이었다. 1937년 12월, 코르도바(Cordoba)에서 사명을 수행하던 중에 그는 심근경색으로 고통을 받으며 남은 생애를 몸져누워 지내야 했다. 임종을 앞둔 그는 전능하신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면서도 교구와 신학교를 어렵게 운영해 갔다. 그는 또한 매일미사를 집전하였다. 라파엘 주교는 1938년 6월 6일 멕시코시티에서 선종하여 그 다음날 할라파의 주교좌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장례 행렬은 승리의 사건과도 같았다. 모든 이들이 성인다운 삶을 산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주교는 1995년 1월 2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6년 4월 28일 시성을 위한 기적 심사를 통과한 후 그 해 10월 1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 주교로서는 처음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할라파 주교좌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은 그를 공경하는 수천의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과 전구를 청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성 마르첼리노 샴파냐 (Marcellinus Champagnat)
활동년도 : 1789-1840년
신분 : 신부, 설립자
지역 :
같은 이름 :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말셀로
1789년 5월 20일 프랑스의 르 로지(Le Rosey)에서 물방앗간 집의 아홉 번째 자녀로 태어난 성 마르첼리누스 샴파냐(또는 마르첼리노)는 신심 깊은 부모로부터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다. 일찍이 성소의 꿈을 키운 그는 리옹(Lyon)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16년 7월 22일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라 발라(La Valla) 본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신학교 생활 이후 늘 소년들을 교육하는 수도회의 설립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마침내 1817년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를 설립하여 1836년에 공식 승인을 받았다. 그는 마리스타의 교육 이념인 학교 지침을 발간하였고, 교육 분야에서 기여하다가 1840년 6월 6일 51세를 일기로 노트르담 에르미타주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955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1999년 4월 1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클라우디오 (Claudius)
활동년도 : +699년경
신분 : 주교
지역 : 브장송(Besanion)
같은 이름 : 글라우디오, 글라우디우스, 글로드, 끌라우디오, 끌라우디우스, 끌로드, 클라우디우스, 클로드
성 클라우디우스(또는 클라우디오)는 프랑스 동부 프랑슈콩테(Franche-Comte) 태생으로 원로원 집안 출신이며, 사제로 서품된 후 브장송 교구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12년 동안 봉직하다가 스스로 은퇴하여 콘다트(Condat)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그는 여생을 거룩하고도 엄격한 생활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이 수도원은 후일 그의 이름을 따서 생클로드(Saint-Claude)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수도원의 원장이 된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칙을 채택하고 건물을 세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685년에 그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브장송의 주교로 선임되었으나,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7년 동안이나 교구를 발전시켰다. 그 후 그는 또다시 주교직을 사임하고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성 클라우디우스의 축일은 12세기에 와서 널리 전파되었고, 그의 유해도 발견되어 큰 공경을 받았는데, 그의 무덤에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온다. 그는 클로드(Claud)로도 불린다.
성 필립보 (Philip)
활동년도 : +1세기경
신분 : 부제
지역
같은 이름 :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성 필리푸스(Philippus, 또는 필립보)는 사도들로부터 선발된 일곱 보조자(부제) 중의 한 명이고(사도 6,5), 처음으로 사마리아에서 설교하였으며(사도 8,5-13), 마술사 시몬의 개종을 비롯하여 에티오피아(Ethiopia)의 내시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사도 8,26-40). 그는 주로 카이사레아(Caesarea)의 자기 집을 중심으로 하여 설교했는데 결혼하지 않은 딸 넷을 데리고 살았다(사도 21,8-9). 그리스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 서부 리디아(Lydia)의 트랄레스(Tralles) 교구의 주교였다고 한다. 그의 설교가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가끔은 그를 ‘복음사가’라고도 불렀고, 그로 인해서 사도 성 필리푸스와 때때로 혼동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