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高宗
조선시대 왕(王)들 가운데 후대(後代)의 평가가 극(極)과 극(極)으로 나뉜 사례는 꽤 여러 사례가 있다. 태종(太宗)이나, 세조(世조),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 등 그러한 사례에 해당될 것이다. 조선왕조가 거의 수명(壽命)이 다해 갈 무렵에 왕(王)이 된 고종(高宗) 또한 역사적 평가가 인색(吝嗇)한 왕 가운데 하나이다.
망국(亡國)의 책임이 그에게 있기 때문 것이다. 그는 과연 구국(救國)의 황제(皇帝)인가 ? 아니면 망국(亡國)의 황제(皇帝)인가 ? 최근에 와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세우며 큰 실권(實權) 없는 황제에오르면서까지 왕조(王朝)를 부흥시키려 했던 그의 노력들이 재평가(再評價)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망국(亡國)의 황제(皇帝)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고종(高宗)이 살았던 시기는 우리 역사가 근대사회(近代社會)로 이행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운 '대한제국'은 열강(列强)의 틈바구니 속에서 식민지화(植民地化)의 길을 걸었고, 대한제국의 황제(皇帝)는 국권(國權)을 지켜내지 못한 인물로 남아야 했다. '긍정적'인 평가이든 '부정적'인 평가이든, 그는 실로 조선왕조의 비극적(悲劇的)인 말로(末路)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황제이었고,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明聖皇后)가 비참하게 살해 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비운(悲運)의 인물이었다.
高宗의 즉위
고종(高宗)은 철종4년(1852년) 흥선대원군 ' 이하응(李昰應)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어머니는 '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 '이다. 고종(高宗)이 익종(翼宗 .. 23대 순조의 세자이며, 헌종의 아버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한 것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익종비(翼宗妃) ' 조대비(趙大妃) '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순종, 헌종, 철종의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 안동김씨(安東金氏) '는 철종(哲宗)의 후사(後嗣)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의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이때 '안동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화(禍)를 피하여 시정(市井) 무뢰한(無賴漢)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면서 위험을 피하던 이하응(李昰應)은 조성하(趙成夏)를 통하여 궁중 최고의 어른인 조대비(趙大妃)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1863년 12월 철종(哲宗)이 재위(在位) 14년 만에 33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후사(後嗣) 없이 승하(昇遐)하자, 대왕대비 '조씨(趙氏)'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인 명복(命福)을 다음 왕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철종(哲종)이 승하(昇遐)한 지 5일 만에 명복(命福), 즉 고종(高宗)이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철종(哲宗)이 죽자 조대비(趙大妃)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 아들(命福 ..고종)으로 하여금 익종(翼宗)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高宗)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고, 흥선군(興宣君)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 대섭하게 하였다. 고종은 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곧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高宗)의 어린 시절 이름은 '개똥이'이었다. 소년기에 ' 명복(命福) '으로 개명하였고, 왕이 된 후에는 이름을 다시 재황(載晃)으로 바꾸었다. 형(兄)인 '이재면(李載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조대비(趙大妃)의 수렴청정(垂廉聽政)이 손쉽게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고종(高宗)이 장성(長成)하여 친정(親政)의 의욕을 가지고 차차 아버지 ' 흥선대원군 '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 뜻을 헤아린 '명성황후'와 노대신(老大臣))들은 유림(儒林)들을 앞세워 대원군의 하야(下野) 공세를 피게 되었다.1873년 마침내 서무친재(庶務親裁)의 명(命)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성명(成命)을 환수하고, 고종(高宗)은 통치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친정 선포 親政 宣布
12살의 고종(高宗)이 정치를 직접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대비(趙大妃)의 수렴청정(垂廉聽政)은 고종 즉위 후 10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사실상의 실권(實權)은 부친인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기는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발하는 등 서구(西毆) 열강(列强)의 침입이 노골화되어 가던 시기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외교상(外交上) 통상수교거부정책(通商修交拒否政策)인 쇄국정책(鎖國政策)을 쓰며 통상(通商) 압력을 물리쳤고, 이와 아울러 서원(書院)을 대대적으로 철폐하여 외척(外戚)을 비롯한 양반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아울러 1866년에는 '여흥 민씨(驪興 閔氏)' 집안의 딸 (훗날 명성황후)를 자신의 며느리이자 고종(高宗)의 배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며느리가 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맞수가 되리라고는 짐작할 수 없었다.
1872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이 성인(成人)이 되자, 부친을 대신하여 직접 정치를 주관하고자 하였다. 이때는 '흥선대원군'의 독주(獨走)에 대한 관료들의 불안감과 위기감 또한 고조되던 시기이었다. 노론(老論) 유림(儒林) 세력은 대원군의 정책에 계속 비난(非難)을 해왔으며, 통상수교거부정책(通商修交拒否政策)에 반감(反感)을 가진 개화세력(開化勢力) 또한 그 힘을 키우고 있었다. 친정(親政)을 할 수 있는 좋은 분위기가 마련되고 있었다.
고종의 친정 高宗의 親政
때마침 대원군의 집권(執權)을 비판하는 '최익현(崔益鉉)'의 상소(上疏)가 올라오자, 고종(高宗)은 최익현(崔益鉉)을 호조참판(戶曺參判)에 임명하면서, 아버지인 대원군과 대립각(對立角)을 세우기 시작했다. 결국 성인(成人)이 된 고종(高宗)은 '반대원군(反大院君)' 세력을 등에 업고 강력한 의지로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1873년 11월 14일, 면암 최익현 (勉庵 崔益賢)은 대원군의 하야(下野)를 촉구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최익현은 5년 전인 1868년 대원군의 내정개혁(內政改革)을 비판하는 상소를 한 차례 올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았던 경력이 있었다. 대원군의 실각(失脚)으로이어진 '최익현'의 상소는 훗날 '계유상소(癸酉上疏) '라 불리웠다.
상소는,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로 유림(儒林)의 기반이 송두리째 뿌리뽑힌 데 따른 자구책(自救策)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대원군에 대한 반항(反抗)이었고, 명백한 도전이었다. 대원군의 행태까지 낱낱이 고발한 이 상소(上疏)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던 고종(高宗)의 뜻과 일치하면서 대원군의 10년 세도(勢道)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정계 개편
친정 선포(宣布) 이후 고종(高宗)은 대원군 중심의 정계(政界)를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고종은 조대비(趙大妃)의 권위를 이용하여 정치세력을 재편(再編)하고,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우선, 영돈영부사 홍순목(洪淳穆)과 좌의정 강로(姜老), 우의정 한계원(韓啓源)을 파직시키고, 영의정에 이유원(李裕元)을 그리고 우의정에 박규수(朴珪壽)를 새로 임명하였다.
강로(姜老)와 한계원(韓啓源)은 각각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계열로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력을 약화(弱化)시키려는 대원군에 이해 정계에 진출한 대표적인 대원군 세력이었다. 이유원(李裕元)은 독자적인 세력이 없어 고종(高宗)의 친정세력을 통합할 인물로 적임자이었다.
흥선대원군 정권의 무력적(武力的) 기반은 '삼군부(三軍府)'이었다. 고종(高宗)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삼군부(三軍府)를 약화시켜야 했고, 이를 위해 무위소(武衛所)를 설치하였다. 병권(兵權) 장악을 위해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이재원'과 같은 친위세력을 배치하였고, 훈련대장, 금위대장, 어영대장에 친정세력을 대거 발탁하였다.
아울러 고종(高宗)은 재정권(財政權) 장악에도 주력하였으며,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관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였다. 고종이 친정(親政) 이후에 실시한 정책들은 재정(財政)과 군사(軍事), 외교(外交) 분야에 관련된 것으로, 특히 대원군(大院君)이 추구한 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고종의 재정(財政) 개혁(改革)은 각종 세금(稅金)에 대한 개선책이었다. 예를 들어 군비(軍備) 확충에 필요한 재원(財源)을 마련하고자 대원군이 각 도성문(都城門)에 부과한 유통세(流通稅)를 없앴다.
고종의 친정(親政)이 아무 탈 없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춘생문(春生門) 화재(火災)를 시작으로 궁궐 안팎에서 원인 모를 각종 화재(火災)가 발생하였으며, 1874년(고종 11)에는 중전의 양오라버니인 민승호(閔昇鎬)가 폭사(爆死)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또한 영남(嶺南)의 유생(儒生)들이 대원군의 하야(下野)에 항의하는 등 정국이 불안정하였다.
이에 고종(高宗)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친형(親兄)인 이최응(李最應)을 대신 등용하여 흥선대원군 집권의 명분을 반감(半感)시키는 한편, 김병국(金炳國)을 통해 여전히 성세(成勢)를 보이고 있는 '안동김씨' 세력들과도 연합(聯合)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고종의 친정체제가 형성되었지만, 왕과 정부의 권위(權威)는 오히려 약화(弱化)되었다. 물가상승(物價上昇)으로 민심(民心)은 불안하였고, 각 지방에는 화적(火賊)떼가 들끓었다. 민심(民心)은 흥선대원군 시절을 그리워 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반목
사실, 고종(高宗)사대는 고종(高宗)이 주인공이 아닌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 (權力鬪爭)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高宗)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의 10년 집권(1864 ~ 1873)은 말 그대로 '권불십년 (權不十年) '이었다.
대원군의 몰락(沒落)과 함께 권력은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明聖皇后) '민씨'가 틀어?ㅆ다. 사실상 고종(高宗)이 친정(親政) 체제를 구축하였다고는 하나, 아버지인 대원군과 직접적으로 대립각(對立角)을 세우기는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적 야심(野心)이 있었던 '명성황후'는 그의 바람막이 역할로 제격이었다. 고종(高宗)의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이미지는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부인 '명성황후'의 강력한 카리스마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종(高宗)은 아내인 명성황후'를 의지하고 믿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866년 명성홍후와 가례(嘉禮)를 올린 고종(高宗)은 자신의 첫 사랑인 궁녀(宮女) '이씨'에게서 먼저 왕자 '완화군 (完和君)을 얻었다. 명성황후 또한 그렇게 원하던 왕자를 얻었지만, 그 왕자는 항문(肛門)이 막히는 장애가 있었다. 왕자는 결국 변(便)을 보지 못하고 생후(生後) 5일 만에 사망하였다.
왕자의 죽음이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때문이라는 오해(誤解)를 낳으면서, 명성황후의 흥선대원군 대한 반감(反感)은 극(極)에 달하였다. 그러다가 1880년 13살 밖에 안 된 완화군(完和君)이 급질(急疾)로 사망하자 이번에는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의심하였고, 두 사람 간의 대립(對立)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고종(高宗)의 친정(親政)으로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흥선대원군은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봉기한 구식(舊式)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再執權)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궁궐을 피해 도망치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명성황후가 입었던 옷을 관(棺)에 넣고 장례(葬禮)를 치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壓力)으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라의 천진(天津)으로 압송(押送)되었다. 1개월 만에 고종(高宗)은 복권하였으나, 그 뒤로부터 청(淸)나라의 정치 간섭(干涉)을 받았다.
대한제국 大韓帝國
조선은 근대(近代) 이전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의례상(儀禮上)의 위계적(位階的) 아시아 국제질서 때문에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천자(天子)와 대등한 지위에 올려놓지 못하였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세계관(世界觀)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급진(急進) 개화파들은 혁신정강 제1조에서 ' 중국이 납치해간 흥선대원군을 하루 속히 돌려 보낼 것. 조공(朝貢)하는 허례(虛禮)의 의행은 폐지할 것 ' 등을 공포하였다. 또한 조선국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한 의례적 지위에 놓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은 종래 국왕을 공식적으로 '군주 (君主) '라고 호칭하던 것을 '대군주 (大君主)'라고 호칭하도록 하고, 국왕을 '전하(殿下)'라 하고 부르던 것을 황제(황제)와 마찬가지로 '폐하(폐하)'라고 높여 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왕의 명령을 황제의 명령과 같이 ' 칙(勅) '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국왕 자신도 황제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 짐(朕) '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것은 완전자주독립을 강화하려는개화파(開化派)의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이러한 시도(試圖)도 중단되었다.
대조선국 大朝鮮國
갑신정변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후 10년이 지나 갑오경장(甲午更張)에 이르러 온건개혁파(穩健改革派)가 집권하자, 다시 국왕의 지위를 황제(皇帝)의 지위로 높이려는 운동이 추진되었다. 갑오경장 정부는 1894년 7월 29일부터 우선 첫단계로 국왕을 공식적으로 '군주(君主)'로부터 다시 '대군주(大君主)'로 호칭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연호(年號)를 폐지하고, 조선왕조의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하여 1894년은 개국(開國) 503년이 되었다. 그들은 다음 단계로 1895년 1월7일부터 국왕이 종묘(宗廟)에 나아가 조상에게 서고문(誓告文)을 바치는 형식으로 ' 홍범 14조 (洪範 14條) '를 공포하였다. 그런데 제1조에 ' 청국(淸國)에 의부(依附)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自主獨立)의 기초를 세운다 '는 것을 선언하여 중국와의 관계에서 조선 국왕을 중국(中國) 황제(皇帝)와 대등(對等)한 지위로 자리함을 공포하였다.
또한 그들은 1895년 8월 27일에 국호(國號)를 '대조선국 (大朝鮮國)'으로 개칭하고 ' 대군주(大君主)'를 황제(皇帝)로 격상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반대로 계획은 집행되지 못하였다. 그 후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갑오경장(甲午更張) 내각이 붕괴됨으로써 개화파의 국왕을'황제'로 격상시키려는 운동은 다시 중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열강(列强)에게 이권(利權)을 빼앗겼으며, 정권은 친러(親露) 수구파(守舊派)에 의하여 농단되었다.
1896년 7월 2일 창립된 개화파(開化派)의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獨立協會)와 자주적(自主的) 수구파(守舊派)들은 연합하여 고종(高宗)의 환궁(還宮)에 총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1897년 2월20일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播遷)한 지 약 1년 만에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하여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고종(高宗)의 환궁(還宮) 뒤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들은 힘을 모아 '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강화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국왕과 정부는 '칭제(稱帝)'는 뒤로 미루고 우선 '건원(乾元)'을 하기로 하여 1897년 8월16일 '건양(建陽)'을 '광무(光武)'로 고쳐 '건양 2년'을 '광무 원년(光武 元年)'으로 고쳤다. '건원(건원)'에 성공한 개화파와 수구파는 연합하여 '칭제운동(稱帝運動)'을 벌였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197년 9월 25일 독립협회 회원인 농상공부협판 '권재형(權在衡)은 ' 황(皇), 제(帝), 왕(王)은 글자는 다르지만 한 나라가 자주독립(自主獨立)하여 의지하지 안았다는 점에서는 같은 뜻을 가질 뿐 아니라, 황제의 위(位)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만국공법상(萬國公法上)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므로, 정부와 협의하여 그 방책을 정해서 조속히 보호(寶號)를 올림으로써 임금을 높이는 여론에 부응하고, 문약(文弱)하며 의부(依附)하는 의심을 깨트려야 할 것입니다 '라고 칭제(稱帝)를 주장하는 상소를 하였다.
대한제국의 선포
고종(高宗)과 정부는 1897년 9월 27일부터 '칭제(稱帝)'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작업을 시작하여, 의식(儀式) 장소인 원구단(園丘壇)을 만들고, 1897년 10월 12일 고종(高宗)이 문무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나아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황제와 정부는 조선(朝鮮)의 국호(國號)를 '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쳐 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성립은 대한(大韓)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내외에 거듭 재천명(再闡明)한것이며, 자주독립(自主獨立)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고종(高宗)을 환궁(還宮)시키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대한제국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은 개화파(開化派)인 독립협회(獨立協會)와 집권파인 수구파(守舊派) 사이에 연합과 협조가 비교적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환구단 園丘壇
명칭의 한자(漢字) 표기와 독음(讀音)을 환구단(園丘壇)과 원구단(園丘壇 또는 圓丘壇)으로 혼용하던 것을 2005년 문화재청에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기록된 " 원구단(園丘壇)"으로, 한글 표기는 고종(高宗)이 제사를 지낸 1897년 당시 "독립신문"의 표기에 따라 "환구단"으로 정하였다.
단(환구단)은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으며,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부터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祈雨祭)를르 국가적으로 거행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제도화된 환구제(園丘祭)는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재위 981~997)때부터라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제천의례를 억제함으로써 世祖 때 환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조선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고, 고종(高宗)이 황제로 즉위하여 천자(天子)가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지금의 환구단은 1897년(고종 34)에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단(壇)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이다. 그 후 단지 내에는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1899년에 축조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였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석고(石鼓)의 몸체에 부각된 용(龍)무늬는 조선 말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처음 조성된 단지는 1913년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고,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되었으며, 지금의 황궁우(皇穹宇)는 석고(石鼓)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石造) 대문만이 보존되어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있다.
대한제국의 한계
대한제국의 성립이후 정치체제를 놓고 독립협회파(獨立協會派)와 친로(親露) 수구파(守舊派) 사이에 정치적견해가 크게 대립되어 갈등이 격화되었다. 독립협회는 열강(列强)의 침략으로 이미 많은이권(利權)을 빼앗긴 상태에서 '대한제국'을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로 발전시키는 것은 취약하기 때문에 입헌대의군주제(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이권(利權)을 빼앗길 때처럼 열강(列强)이 황제를 위협하여 황제의 동의(同意)만 얻으면 나라의 귀중한 권리가 박탈되고 국권(國權)까지 쉽게 빼앗길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협회는 전제군줴(專制君主制)를 페지하는 대안으로 국민에게 참정권(參政權)을 주고 의회(議會)를 설립하여 국정의 중요한 사안과 외국과의 모든 조약(條約)은 반드시 의회(議會)의 동의를 얻어 통과해야 효력을 발생하는 '입헌대의군주제 (立憲代議君主制)'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집권한 수구파(守舊派)는 친러(親露)정책을 채택하여, 러시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독립협회의 '입헌대의군주제'로의 개혁안을 반대하여,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그대로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회(議會)를 개설하여 '입헌대의군주제'를 만드는 것은 불가피하게 민권(民權)을 신장시키고 황제의 지위를 약화(弱化)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종(高宗)은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입헌대의군주제(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면, 군권(軍權)이 감소되고 민권(民權)이 증대된다는 '수구파'의 주장에 설득되어 친러수구파의 /전제군주제' 주장을 지지하고 독립협회의 '입헌대의군주제'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이 성립한 이듬해인 1898년 초부터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둘러싸고 개화파인 독립협회와 집권한 '친러 수구파' 사이에 첨예한 정치적 논쟁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그 후 일본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특명전권대신으로 파견하여 고종황제에게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외교권(外交權)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일본 통감(統監)의 지배를 받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요하였다. 결국 일본은 1906년 2월 1일,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을 장악한 다음, 한국 민족의 의병(義兵)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격렬한저항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이라는 것을 강요하여 식민지(植民地)로 강점(强占)하므로써, 대한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헤이그특사 파견
1905년, 일제(日帝)가 고종(高宗)을 비롯해서 각료(閣寮)들을 위협, 강제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체결한 다음 이에 따라 한국의 외교권(外交權)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는 등 노골적인 병탄(竝呑)을 꾀할 즈음,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40여 개국 대표가 참석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해 4월, 고종(高宗)은 전(前)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 ' 이상설 (李相卨) '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親書)를 주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우리의 실상을 만천하에 고(告)하도록 했다. 이상설(李相卨)은 전(前) 평리원검사(評理院檢査) ' 이준(李儁) '과 함께 블리보스토크, 시메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 ..현재의 레닌그라드'에 도착, 전 러시아공사관서기 ' 이위종(李瑋鐘) '을 데리고 회담 개최 며칠 전에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회의 자체가 열강(列强)이라는 ' 큰 도둑들의 만찬회 '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 영국 등의 집요한 방해와 기타 열강들의 방관으로 인해 우리 대표들은 회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네델란드 언론인(言論人) ' 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들은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어, 러시아어, 불어, 영어 등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李瑋鐘)이 세계의 언론인들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게 되었다. 그 연설(演說) 전문은 '한국을 위해 호소한다 '라는 제목으로 세계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으며, 이에 이준(李儁)은 울분을 삭이지 못한 채 그곳에서 분사(분사)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제(日帝)는 고종(高宗)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7월20일 양위식(讓位式)을 강행하였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친일단체인 일진회(日進會)의 기관지를 발행하는 '국민신문사'와 경찰서 등을 파괴하고, 친일(親日) 괴수 이완용(李完用)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격렬한 항일(抗日)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日帝)는 이에 아랑곳없이 7월 24일에는 일제의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위한 '한일신협약 (韓日新協約.. 정미7조약)을 성립시킨 데 이어 27일에는 언론탄압(言論彈壓)을 위한 신문지법(新聞紙法)을, 29일에는 집회결사(集會結社)를 금지하는 보안법(保安法)을, 31일에는 한국 군대의 해산 명령을 각각 공포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순종(純宗)이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年號)도 광무(光武)에서 융희(隆熙)로 바뀌었으며, 전국 각지에서는 일제에 항쟁하는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나는 가운데 일제는 한국병탐의 마지막 작업을 서두르게 되었다.
강제 퇴위 强制 退位
통감(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참정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불러 ' 이 헤이그밀사 사건은 조약(條約) 위반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宣戰)할 권리가 있다 '고 협박하였다. 주인의 질책을 들은 이완용(李完用)과 내각(內閣) 대신(大臣)들은 곧바로 고종(高宗)에게 달려가 따졌다. 일본 외교문서 1907년 7월7일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고종(高宗)은 ' 짐(朕)은 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고 모두 헤이그에 있는 자들이 밀서(密書)를 위조(僞造)한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 대신들에게 사태 수습책을 강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유의 이중처신(二重處身)이 통할 때는 이미 아니었다. 1907년 5월 차악(次惡)이었던 박제순(朴齊純) 내각이 최악(最惡)인 이완용(李完用) 내각으로 교체된 것이다. 일진회(日進會)의 송병준(宋秉畯)이 친일(親日) 경쟁에서 '이완용'에게 밀릴세라 적극적으로 나섰다. 흑룡회(黑龍會)에서 편찬한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秘史)'의 기록에는 .. 송병준(宋秉畯)이 일진회 고문(顧問) 우치다(內田),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와 입을 맞추고 어전회의에 나갔다고 전한다.
송병준(宋秉畯)은 고종(高宗)의 면전에다 '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日皇)에게 사과하던지, 대한문(大漢門)에 나아가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하라 '고 욱박질렀다. 고종을 도와줄 열강(列强)은 한 나라도 없었다. 4년 동안의 왕(王) 노릇이 끝나게 되는 7월 18일, 고종은 우왕좌왕했다.
고종 퇴위 .. 1907년 7월 18일
일본 외교문서, 대한매일신보, 매천야록(梅泉野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고종실록 등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 7월 18일 오후는 매우 급박하였다. 이날 오후 3시 이완용(李完用) 등 내각 대신들은 회의를 하고, 오후 4시에 입?여 고종(高宗)에게 사태 수습책을 건의하였다. 수습책(收拾策)이란 다름아닌 왕위에서 물러나라는 통보이었다.
다급해진 고종(高宗)은 통감(統監)의 의견을 듣겠다며 시간을 끌었다. 통감(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은 ' 한국 황실의 중대 문제에 간섭할 수 없으며, 내각 대신들과 상의한 일도 없다 '고 천연덕스레 대답하고 떠났다. 7시에는 서울에 온 일본외무대신 '하야시(林董)'에게 매달렸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내각(內閣) 대신들은 8시 경 다시 고종(高宗)을 찾아가 양위(讓位)를 요구하였다. 황현(黃玹)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 이완용(李完用)이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라고 협박하자 폐하를 모시는 무감(武監), 액례(掖隷)들이 흥분해 고종(高宗)의 말 한마디만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버리려 하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고 전하고 있다.
밤 11시 고종(高宗)은 원로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면서 신기선(申箕善), 민영휘(閔泳徽), 민영소(閔泳韶)를 불렀다. 이듬해 사망하는 '신기선'은 논외로 치더라도 민영휘, 민영소는 1910년 일제(日帝)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恩賜金)을 챙긴 인물들이니 이완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고종(高宗)은 새벽 1시에 ' 짐(朕)은 지금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황태자)로 하여금 대리(대리)하게 하겠다 '고 물러섰다. 양위(讓位)가 아니라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킨 다음 기회를 봐서 복귀하려는 의도이었다. 황태자는두 번이나 대리청정을 사양하는 상소(上疏)를 올리고, 고종은 '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효도 '라고 타일렀지만, 대?ㅇ정(代理聽政)은 '이등박문'이나 이완용 내각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순종실록(純宗實錄) 즉위년 7월 19일자는 ' 순종(純宗)이 명을 받아 대리청정을 하고 이어서 선위(禪位)를 받았다 '고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다. 통감부문서 7월 19일자는 이완용이 이등박문에게 보낸 '황태자집무대리 조칙 통고건'인데, 19일에도 고종(高宗)의 뜻이 양위(讓位)가 아니라 대리청정(代理聽政)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법무대신 조중응(趙重應)이 통감 이등박문에게 와서 ' 양위(讓位)의 건은 짐(朕)의 충심에서 나온 것으로 결코 남의 권고 또는 협박(脅迫)에 의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종이 ' 본뜻을 오해하여 함부로 분개하거나 폭동을 일삼는 자는 통감에게 의뢰하여 제지하고 기회를 봐서 적절히 진압할 것을 위임한다 '라는 칙명(勅命)까지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이 자발적으로 양위(讓位)를 결심했으며, 반대 봉기(蜂起)가 일어나면 이등박문에게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인데, 이는 물론 법무대신 조중응(趙重應)의 조작일 것이다. 일본외교문서 명치(明治) 40년(1907) 7월20일조는 ' 오전 8시에 황태자 대리식(代理式)을 거행하였다 '고 적고 있어 고종은 여전히 황태자 대리청정을 고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와 친일내각이 억지로 양위식(讓位式)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고종(高宗)과 황태자(皇太子)가 모두 불참(不參)한 가운데 이완용(李完用), 임선준(임선준), 고영희(高榮熙), 이병무, 이재곤, 조중응, 송병준(宋秉畯) 등 이른바 ' 정미7적 (丁未七賊) '과 여타 친일파 등이 참석한 식이 열려 고종(高宗)의 44년 치세(治世)가 강제로 막을 내렸다.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자 호외(號外)는 내각 대신들이 고종에게 ' 직접 일본으로 가서 일본 황제에게 사과하라 '고 요구했지만, 고종이 거부(拒否)하였다는 궁중 소식 등을 전하면서 밀사(밀사) 이준(李儁)이 ' 흥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자결(自決)하고 만국(萬國) 사신들 앞에서 피를 뿌려 만국을 놀라게 했다 '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헤이그에서 병사(病死)한 이준(李儁)이 국내에서는 자결(自決)한 것으로 전해지게 된 유래이다.
황태자 대리청정(代理聽政) 소식이 전해지자 종로(鍾路) 각지에 시민들이 모여 통곡하거나 친일(親日) 내각을 성토하고, 친일파들에게 훈장을 수여한 표훈원(表勳院)에 투석(投石)하였으며, 한국군 일부가 경무청(警務廳)에 발포하고 시민들이 밤 11시쯤 일진회(日進會) 기관지인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를 습격하였다고 각종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법무대신 조중응(趙重應)이 항의하는 군중들에 대한 진압권(鎭壓權)을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넘긴 것처럼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도 이등박문에게 ' 각 조약국에도 일체를 성명하라' 고 하면서 열강들에게 황태자 대리청정 사실을 통보하라고 권유하였다.
차관정치 차관정치
위와 같은 여세를 몰아 7월 24일 통감(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 하세가와 주차군 사령관, 하야시 외무대신은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이른바 ' 제3차 한일협약 '을 체결했다. 제1조는 ' 한국 정부는 시정(施政) 개선에 관해 통감(統監)의 지도(指導)를 받는다 '고 규정하고 ' 한국 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統監)의 승인(承認)을 거친다 '고 규정하여 통감(統監)을 사실상의 총독(總督)으로 격상시켰다. 또 '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한다 '고 규정하였다.
이완용은 이등박문과 ' 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 '도 작성하였는데, 크게 재판권(裁判權)과 군대 해산(軍隊 解散)에 관한 두 가지 사항이었다. 최고법윈인 ' 대심원(大審院) 원장 및 검사총장과 전옥(典獄 .. 형무소장)은 일본인으로 한다 '고 규정했다. 또한 ' 육군 1대대를 존치시켜 황궁 수비를 맡게 하고 기타는 해산(解散)한다 라고 경호대대를 제외한 군대 해산을 명문화했다.
이완용 친일 내각은 '대한제국'이 살아나면 자신들은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炳武 .. 합방 후 자작 수여)가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은 외무대신이 체결하고 군대(軍隊) 해산은 군부대신이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군대해산의 디-데이는 8월 1일이었다. 하세가와의 지시를 받은 이병무(李炳武)는 아침 8시까지 일본군 사령관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으로 시위대 각 대장들을 불러 10시에 훈련원에서 해산식(解散式)을 한다고 통보했다.
서소문에 주둔하고 있던 시위대 제1연대 1대대는 교관인 '구리하라(栗原)' 대위가 인솔해 해산식에 인솔하려 하자 대대장 박성환(朴星煥)이 항이하며 자결하였다. 격분한 병사들은 영외로 뛰어나가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했다. 남대문 안에 있던 2연대 1대대도 이 소식을 듣고 동조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기관총 등의 중화기(重火器)로 진압에 나섰고 결국 시위대 병사들은 진압당하고 말았다. 해산식에 참여한 병사들에게는 군모(軍帽)와 견장(肩章)을 회수하고 계급에 따라 25 ~ 80원의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지급했다. 군대까지 강제 해산을 당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에 저항할 마지막 수단을 상실했다. 500년 제국은 그렇게 종말(終末)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정미의병 정미의병
함녕전 咸寧殿 ... 보물 제82호
함녕전(咸寧殿)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침전(寢殿)이다. 1897년(광무 1)에 지었는데, 1904년(광무 8)에 수리공사를 하던 중 불에 타버렸고,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그 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그리고 이 곳은 고종(高宗)이 아들 순종(純宗)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바닥에는 카펫트가 깔렸으며, 등(燈)기구도 서양식(서양식)이다. 동쪽 방에서 고종이 자고, 서쪽 방은 황후(황후)의 침실이었으며, 가운데 공간은 왕을 시중들던 상궁들의 침실이었다. 규모는 앞면 3칸, 측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여 평면이 " ㄱ "자형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 모서리에 여러 잡상(雜像)들을 나열한 점은 침전(침전)의 건축에 잘 사용하지 않던 특이한 구성이다. 조선 후기의 마지막 침전(寢殿)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라고 한다. 잡상(잡상)은 .........
왕릉이 아닌 황제릉
명성황후는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874년 고종의 뒤를 이을 순종(純宗)을 낳았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高宗)'이 친정(親政)을 하자 명성황후(明聖皇后)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일제(일제)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하여 친청(親淸), 친러(親露) 정책을 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자객을 보내 1895년 10월8일 경복궁 건천궁(건천궁)에서 민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는 처음에 서울 청량리(淸凉里)에 묻히었으나 고종(高宗)이 승하하자 이 곳 홍릉에 합장된다.
이곳 능터는 고종(고종)이 직접 조성하고 설계(설계)하였으나, 1919년 고종이 승하(승하)하자 일제(일제)는 왕의 무덤인 능(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반 왕족의 무덤인 묘(묘)로 격하(격하)하려고 했다. 왕실에서는 서울 청량리(청량리) 홍릉(홍릉)에 모셨던 명성황후(명성황후)를 이곳으로 천장(천장)하여 고종(고종)과 합장(하방)하는 묘안을 생각해 내었다. 새로 능(능)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능(능)의 칭호를 옮겨 왔을 뿐이라고 주장한것이다. 황제가 홍후(황후)의 능(능)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홍릉은 역대 조선의 왕릉(왕릉)과는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른 것은 고종(高宗)이 1897년 국호(국호)를 대한제국(대한제국), 연호(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면서 왕(왕)을 황제(황제)로 격상시켰기 때문에 , 능(능)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曉陵)을 본 따왔다. 국호까지 고치며 황제로 격상시키면서 , 한편 능(능)의 형식은 여전히 중국의 것을 흉내내는 것은 ???? 기존의 왕릉과 큰 차이는..... 정자각(정자각)이 없고 침전(寢殿)이 대신하고, 봉분 주위에 있던 여러 석물(石物)들이 홍살문과 침전 사이에 세우는 것...왕릉의 석물에는 양. 호랑이가 있었으나, 황제릉에는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들을 순서대로 세워놓았다.
高宗의 장례식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일본식으로 쓸쓸하게 치루어진 高宗의 장례식
고종(高宗)의 장례는 1919년 3월3일에 거행되었다. 3.1만세 운동 바로 이틀 후이었다. 온 나라가 만세운동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 장례식에 참석한 우리나라 사람은 불과 70여명이었고,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親日派)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장례를 일본식(日本式)으로 치루고, 복장도 일본 고유의 상복(喪服)을 착용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에, 순종(純宗)을 비롯한 종친(宗親)들이 참석하기를 기피하였고, 일본은 억지로, 강제로 순종과 종친을 참석시켰다. 한산했던 장례식과는 달리 장례 행렬이 금곡(金谷)에 도착하였을 때, 길가에는 수 만 명의 백성들이 나와 통곡을 하였으며, 밤이 되자 지나가는 마을마다 불을 밝혀 고종의 마지막 길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이 陵은 高宗 스스로 설계하였다
고종(高宗)은 생존 시에 이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며, 이 릉(릉)의 도면(도면)을 침전(침전)에 두고 틈만 나면 꺼내 보며 좋아 했다고 한다. 고종은 '고영희'라는 사람을 직접 중국에 보내 명태조(明太祖)의 효릉(曉陵)을 그대로 본땄다. 고종이 죽자 친일파 신하 윤덕영(尹德榮)은 금곡(금곡)은 장례 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청량리)의 홍릉으로 합장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곳 능은 이미 조성이 되어 있었으므로 , 결국 이 곳에 묻히고 명성황후가 이곳으로 이장하여 합장된다. 그래서 이름도 홍릉(홍릉)이다.
왕릉의 석물(石物)들은 조선의 전통 기법으로 세워져 낯설지 않으나, 홍릉이 석물들은 서양의 기법을 동원하여 만들어져 뭔가 이상하고,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高宗의 사진
고종(고종)은 유일하게 얼굴이 알려진 왕(왕)이다. 순종(순종)도 사진을 남겼지만, 그는 왕(왕)이아닌 황제(황제)이었다. 고종(고종)의 치세에 사진술(사진술)이 도입되어 어진(어진)과 함께 어사진(어사진)을 남겼던 것이다. 그가 처음 사진을 찍은 것은 언제, 어떤 계기일까. 누가 그의 사진을 찍었고,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
고종 49세 때의 모습
고종(고종)이 처음 사진(사진)을 찍은 것은 개항(개항) 직후인 1880년대로 추정되고 있는 가운데, 윤치호(윤치호)의 일기(일기)에는 ' 1884년 3월 10일과 13일 사진을 촬영하였다 '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고종(고종)의 사진을 처음으로 찍은 사람은 '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는 책을 남긴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다.
그는 미국 애리조나 천문대를 세운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조선이 1883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 .. 조선 최초로 서구에 파견한 외교사절단)를 파견했을 때 그 안내를 맡았었다. 고종(고종)은 그 공(공)을 치하하는 의미로 한국에 초청하여 1883년 12월20일부터 이듬해 3월18일까지 체류하였다.
그로부터 3일 후 다시 어사진(어사진)을 찍은 사람은 로웰이 아닌 지운영(지운영)이었다. 종두법(종두법)을 시행한 지석영(지석영)의 형(형)인 지운영(지운영)은 화가(화가)이자 사진가이었다. 개항(개항) 이후 일본 '고베'에서 사진을 배운 그는 1880년대 초반 종로 마동에서 촬영국을 운영하였으나, 1882년 임오군란(임오군란)으로 인해 풍비박산이 났다. 그 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왕(왕)의 사진을 촬영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고종과 왕세자의 사진 1장 씩을 남겼다.
1884년 3월 10일, '로웰'은 윤치호(윤치호)의 소개로 창덕궁(창덕궁)에 들어가 농수정(농수정)을 배경으로 고종(고종)의 사진 3장 (위 사진 참조)과 왕세자(왕세자 ..후일 순종) 사진 1장을 찍었다. 고종(고종)은 장대석(장대석)에 앉거나 서서 사진을 찍었고, 원경(원경)도 촬영하였다.
1898년 미국 화가 "휴버트"가 고종의 반신상을 그린 다음 전신상을 그렸다.
패랭이를 쓰고있는 고종 그리고 영친왕
군사관련 행사 등에 입는 활동하기 편한 철릭에 패랭이를 쓰고있는 고종의 모습으로 1902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책에 실린 삽화이다.
高宗과 왕실가족 사진
1918년 1월21일 촬영한 사진으로 영친왕(英親王)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여 왕실가족이 모여 日食으로 식사를 한 직후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高宗을 중심으로 왼편에 순종과 영친왕 그리고 오른편에 純宗妃 순정효황후 그리고 덕혜옹주의 모습이 담겨 있다. 덕수궁 석조전 안에서 촬영..
高宗의 女人들
고종에게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어 나이에 죽고 나중에 성인이 된 자녀는 4명 즉, 마지막 임금인 순종(생모, 명성황후), 궁녀 장씨(장귀인)의 소생인 의친왕(의친왕), 영친왕(생모, 순헌황후 엄씨) 그리고 양귀인(양귀인)이 낳은 덕혜옹주(덕혜옹주)뿐이었다.
명성황후
양귀인 梁貴人
양씨(양씨 .. 1882~1929) ..고종의 6번째 후궁으로 1893년 그녀가 12살 되던 해에 입궐하여 상궁으로 있다고 고종의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덕혜옹주)를 낳았다. 위 사진의 왼쪽 여인.... 아래 사진은 그녀가 48세에 찍은 사진이다.
장귀인 張貴人
義親王을 낳았다
엄상궁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 실질적으로 국모(국모)역할을 하였던 엄귀비(엄귀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그녀는 1854년(철종 5) 11월 증찬정(증찬정)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나 5살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 들어가 후에 명성황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지밀상궁(지밀상궁)이 되었다.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못생기고 뚱뚱하였던 엄상궁은 후에 황귀비가 된 후 신문화와 신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 등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못 생긴 궁녀에 불과했던 엄상궁이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고, 궁궐 밖으로 ?겨 난다. 엄상궁이 32세 때의 일이었다.
궁녀의 나이로는 늙은 편이었던 엄상궁의 어떤 점이 고종의 승은을 입고 총애를 받은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뛰어난 지략과 대담한 배짱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소용돌이 속에 있던 고종으로서는 그녀의 두뇌와 지략을 의지했던 듯 싶다.
일본총독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인과 함께 찍은 엄상궁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5일 후 고종은 엄상궁을 궁궐로 다시 불러들인다.명성황후에게 엄상궁이 내?긴 지 10년 후인 때이었다. 나라의 국모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궁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심에 엄상궁이 있었다. ... 이 일은 "아관파천"에서 자세히 기술한다.
"아관파천" 이듬해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으며, 고종의 아기를 임신했던 엄상궁은 44세의 나이에 황제의 아이를 낳는다. 황제의 아들을 낳은 엄상궁은 황귀비(황귀비)로 책봉된다. 순종이 등극하자 마지막 황태자로 책봉되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은 영친왕(영친왕)이다.
영친왕 영친왕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엄귀비와 고종은 영친왕이 이등박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는 해마다 방학 때 영친왕을 조선으로 보내겠다고 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귀비는 1911년 7월20일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王 그리고 皇帝
고종(高宗)은 이웃 청나라, 일본 등과 대등한 국가 위상을 확립하고자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마치 한(漢)나라가 후한(後漢)으로 이어 것과 같다는 뜻으로 황제의 연호(年號)도 후한(後漢)의 개창제(開創帝) 광무제(光武帝)의 연호(年號)를 빌려 광무(光武)라 하였다. 그러면 왕과 황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왕 王
왕(王)은 우두머리 또는 최고 통치권자를 가르키는 말이다. 보통 군주(君主), 천자(天子), 큰제후(諸候)의 칭호로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왕에 대한 기록상의 용어는 중국 은(殷)나라 갑골문(甲骨文)에 처음 나타나는데....' 王 ' 의 ' 三 '은 각각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며..." ㅣ "는 天,地,人을 하나로 통괄하는 최고의 인격체를 상징한다. 즉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이들 모두는 각각 하나의 우주(宇宙)이며, 그 각각의 우주를 다스리는 자(者)가 곧 ' 王 '이라는 것이다.
황제 皇帝
황제(皇帝)란 한마디로 왕중(王中)의 왕(王)이란 뜻으로 사용되며, 중국의 경우 진(秦)나라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후 청나라에 이르는 역대 왕조에 계승되었다. 수 백년간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며,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탄생시킨 진(秦)나라 왕(王)은 이미 이전의 왕들과 같을 수가 없었다.
이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황(皇)은 빛나고 빛난다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제(帝)는 자연계와 인간계 모두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神)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따라서 황제란 빛나는 우주의 절대적 지배자라는 뜻이 된다. 왕이라는 칭호는 이때부터 황제라는 이름으로 바뀌는데, 보통 황제로부터 봉토(封土)를 하사받은 제후(諸侯)들을 왕(王)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황제와 왕의 용어(用語)도 차별이 생겨난다.
황제는 자신을 부를 때 짐(朕)이라고 하지만, 왕은 고(孤) 또는 여(予)라고 하며, 황제의 도장은 옥새(玉璽), 왕은 어보(御寶)..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에는 폐하(陛下), 왕은 전하(殿下), 신하가 왕에게 절을 할 때에는 세번, 왕에게는 한번을 한다. 황제를 칭송할 때에는 萬歲,萬歲 萬萬歲, 왕에게는 千歲,千歲,千千歲라고 한다. 황제를 계승할 자는 태자(太子), 왕을 계승할 자는 세자(世子)라고 한다.
위 사진은 1890년에 고종과 순종이 찍은 사진인데, 아직 대한제국을선포하기 전이므로, 입고있는 곤룡 포도 황(黃)룡포가 아닌 홍(紅)룡포를 입고 있다.
황제의 죽음은 붕(崩), 왕의 죽음은 몽(夢)...황제의 옷 색갈은 노란색, 왕의 그것은 푸른색이나 빨간색..황제의 상징은 용(龍), 왕은 봉황(鳳凰)..황제의 국가는 제국(帝國), 왕의 국가는 왕국이라고 하였다.
시호 諡號
시호란 왕이나 황제가 죽으면, 그의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이름을 붙여주는 제도이다. 삼국시대의 임금들 대부분이 ㅇㅇ왕이라고 하는데, 이때 왕 앞에 있는 ㅇㅇ이 시호이다. 그러나 시호제도는 왕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에는 왕비, 왕의 종친, 정2품이상의 문,무관,공신 등이 죽으면 생전의 행적을 칭송하여 왕이 시호를 내려 주었다. 후대에는 낮은 하급 관직자에게도 시호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충무공(忠武公) 시호만 해도 10여명이 넘으며,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시호)를 받은 사람은 100명이 훨씬 넘었다.
묘호 廟號
묘호는 사망한 임금을 종묘에 모실 때 시호(諡號)와 함께 붙여 주는 이름을 말한다. 보통 ㅇ祖,ㅇ宗이라고 부르는 것이 묘호이다.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이라고 할 때 세종(世宗)은 묘호이고, 장헌(莊憲)은 시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묘호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대개 창업자에게는 조(祖..創業之主는 祖), 그 후계자에게는 종(宗..守城之君은 宗)이 추증되었다.묘호를 추증할 때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며, 생전의 업적에 따라 지었다.묘호도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고려가 몽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황제의 나라인 원나라 입장에서는 왕,제후의 나라인 고려가 묘호를 사용하는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시호만을 사용케 하였으며, 그 시호의 맨 앞에는 몽고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반드시 충(忠)을 들어가게 하였다.
그래서 고려 임금의 계보를 보면 조,종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충ㅇ왕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다시 묘호를 사용하였다. 임금은 여전히 황제의 상징인 용(龍)의 문양을 사용했다. 중국 명나라와의 역학관계에서 겉으로는 사대(事大)를 하면서도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할지.. 체면과 겉 모양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허례인지는 모르지만....
아관파천 俄館播遷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계속된 친일(親日) 개화파(開化派)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시아파(親露派)가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현하였다.
그러자 1860년 이후 끊임없이 남하정책(南下政策)을 펼치던 러시아는 일본(日本)의 독주(獨走)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 삼국간섭 (三國干涉)"으로 요동반도를 반환케 하는 한편 조선의 왕실에도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부심하였다. 그동안 친일 개혁파에 눌려있던 민비(閔妃)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러시아 영향력 강화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895년 일본군, 폭도,낭인들을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등 " 을미사변 (乙未事變) "을 일으키면서 단발령(斷髮令)을 실시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하였다. 민비가 학살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 친러 세력들은 고종(高宗)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 하였다. 고종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였다.
춘생문 사건 春生門 事件
덕수궁 뒷편 정동에 있던 러시아공사관
아관파천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러시아공사관 문 앞에 대포까지 동원하여, 고종(고종)의 환궁(환궁)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일본군이 대포까지 동원하여 高宗의 환궁(還宮)을 요구하지만, 고종은 이를 거절한다.
러시아공사관 안에 있는 고종의 침실 및 거실... 고종을 위한 더블베드 하나와 황태자(후일, 순종)을 위한 싱글베드하나 그리고 응접셋트 하나가 전부이다. 옆 방에서는 상궁들이 번갈아 기거하면서 고종,황태자의 수발을 들었다.
高宗의 친서(親書)
러,일전쟁(露日戰爭)의 강화(講和) 이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列强들이 힘써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국가의 황제에게 조선의 自主獨立을 지지해 줄 것과 한일합방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상황을 호소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덕국(德國 ..독일)의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로서, 양국의 우호를 다짐함과 아울러 상호 협조를 기약하며 전권공사(全權公使)로 민영익(閔泳翊)을 파견한다는 내용이다.
독일황제에게 일본의 조선 자주권 침탈을 폭로하고, 조선의 독립 보장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독일황제 빌헤름 2세
고종이 경운서궁(慶運西宮)에 거처하면서, 러시아(俄羅斯)황제에게 황태자의 탄신을 축하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고종이 前 駐韓 러시아公使 파블로프(巴禹露厚. Pavloff)편에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친서로, 러일전쟁 이전에 조선은 이미 중립을 표명하여 각국의 승인을 받은바 있는데, 전쟁이 심화되어 조선이 무고하게 화를 입었으니 그 정황을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서 잘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프랑스(법란서. 法蘭書)공황국에 보내는 고종의 친서로 양국의 우호를 다짐하고, 상호간의 협조를 기약하기 위하여 전권공사(全權公使) 민영익(閔泳翊)을 보낸다는 내용의 고종 친서.
高宗과 빌헤름2세 (독일)
황제어새 皇帝御璽
고종(高宗)은 18917년 10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한다. 마치 한(漢)나라가 후한(後漢)으로 이어진 것과 같다는 뜻으로 황제의 연호(年號)도 후한의 개창제(開創帝) 광무제(光武帝)의 연호를 빌려 광무(光武)라고 하였다. 제국은 황제국으로서 국사(國事)에 사용할 국새(國璽), 어새(御璽), 어보(御寶), 보인(寶印) 등을 모두 새로이 제작하였는데, 이들은 현존하는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를 통해 그 실제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 제1618호로 지정된 " 황제어새(皇帝御璽) "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어새류(御璽類)는 그 크기가 대략 10cm 전후로서, 큰 것은 12cm에서 작은 것은 9cm정도인데,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는 크기가 5,3cm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가의 安危가 풍전등화에 놓인 위급한 상황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이 어새(御璽)의 사용실례를 볼 때, 이 어새(御璽)가 공개적,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아래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볼 때, 이 어새(御璽)가 "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에 등록되지 않고, 또 그 크기가 다른 어새(御璽)들과 비교해 특별하게 작게 만들어졌으며 뿐만아니라 어새를 보관한 함(函)에 인주함(印朱函)까지 함께 들어 있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사용 실례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근거로 고종은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를 1903년부터 1909년까지 모두 15번 사용한 자료가 남아있는데(위 고종의 親書 사진 참조), 주로 비밀외교(秘密外交)를 목적으로 발부한 친서(親書)들에 사용한 것들이다.
즉 러시아황제를 비롯하여 이태리, 프랑스, 오스트리아, 항가리 그리고 독일의 황제 또는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親書)에 사용하였으며, 이는 1903년 이후 러일전쟁 발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고종이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비밀 외교활동을 펼치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어새(御璽)를 새로 만들 필요성을 가지게 되고,
기밀의 유지를 위하여 내대신(內大臣)의 직제를 통하지 않고, 황제 자신이 직접 관장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휴대와 비장(秘藏)하기에 적합한 크기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종(高宗)은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를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두 가지 자료가 현존하여 남아 있다.
즉, 1909년 1월1일 고종은 미국 헐버트공사에 미국으로 유학 간 조카(조남복)을 잘 돌보아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와 1909년 10월20일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재산을 찾기 위하여 역시 헐버트에게 준 친서 위임장에 이 황금어새를 사용하였다.
즉 고종(高宗)은 황제 재위 시 여러나라 군주(君主)들에게 대한제국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親書)에 이 " 황제어새 "를 사용하였고, 일제(日帝)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빼앗긴 이후에도 이 어새(御璽)를 사적(私的)으로 지니고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 설치
위와 같은 관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종(高宗)이 1902년 6월에 "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 "라는 이름의 황제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을 창설한 사실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藏書각)에 소장되어 있는 " 제국익문사비보장정 (帝國益聞社秘報章程) "에 따르면, 통신사(通信社)를 가장(假裝)한 황제직속의 이 국가 정보기관은 서울에 본사를 두고, 61명의 통신원을 두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동경, 오사카, 나가사키, 북경, 상해, 해삼위, 여순 등지에 상주하는 외국 통신원도 9명을 배정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외국 국가원수들에게 보내는 비밀 친서(親書)들은 이들 요원들의 손을 거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기관의 창설 시기가 친서의 사용실례에 1년 前 정도라는 점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해 주고있다.
전화로 3年喪을 치른 순종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純宗)은 아버지 고종의 3년상(3年喪)을 전화로 치루었다. 아버지의 묘(墓)가 있는 홍릉(洪陵)에 전화를 걸어 매일 아침 전화 수화기에 대고 "아이고, 아이고 ' 곡(哭) '을 한 것이다. 홍릉에 있던 묘지기는 수화기를 고종(高宗)의 봉분에 향하게 들어 순종(純宗)의 곡소리가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3년상을 전화로 했다는 것이 발상도 기발하지만, 순종의 효심도 지극하다. 조선에서 전화를 가장 처음으로 사용한 왕(王)이 고종(高宗)이었다.
일제(日帝)의 감시로 아버지 '고종'과 아들인 '순종'은 살아 있을 때에도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고종(高宗)이 세상을 떠나자 일본은 일본식(日本式)으로 제사를 치를 것을 강요한다. 순종은 이같은 일본의 강요에 반대하는 의미로 일본식으로 진행되는 여러 행사에 참석하기를 기피한다. 일본의 감시와 강요(强要) 속에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기 어렵게 되자 전화를 이용해 그 마음을 전한 것이다, 순종(純宗)의 애절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고종어차 高宗御車
자동차가 들어오기 전 고종이 타고 다니던 가마
1910년 치욕적인 한일합방에 따라 초대 총독(總督)으로 부임한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자동차를 들여와 타고 다니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타기에 미안하였던지, 고종(高宗)의 어차(御車)도 같이 들여 오도록 우리 왕실을 부추켜 체면을 세우려 했다. 이렇게 하여 당시 군왕이 탈 수 있는 리무진 자동차를 만들던 영국의 '다임러사'에 고종(高宗)의 어차(어차)를, 그리고 영국의 '위슬리사'에 총독(總督)용 자동차를 각각 주문, 도입했던 것이다. 이 두 대의 자동차가 비로서 이 땅에 자동차시대를 열었던 최초의 자동차로 1911년이었다.
고종 어차
데라우치 총독 차
이 중에서 고종(高宗)이 타던 '다임러' 리무진은 숱한 고난의 세파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이 차의 복원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1996년 내한하였던 영국 '다임러사'의 노장 기술자들이 이 차를 보고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겉만 약간 헐었고 녹이 슬었을뿐, 부품하나 손상되지 않은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이 리무진은 10대만 생산되었던 귀한 차로서 지금까지 한 대도 남아오지 않았는데, 한국이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어 영국이나 제작사인 '다임러'가 모두 부러워하고 탐내는 보물급 유물이 되었다. 고종어차(高宗御車)는 6기통, 총독 차는 4기통 엔진을 얹었는데, 특히 고종의 자동차는 뒷부분에 무관(武官)들이 올라서서 고종을 호위할 수 있도록 발판이 달려 있었지만 지금은 발판이 없어 부서져 떼어버린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고종 어차
그 후 1913년 왕실에서는 황태자이었던 순종을 빼놓을수 없어 고종(高宗), 순종(純宗) 용으로 미국 캐딜락 리무진 두 대를 더 들여 온다. 그런데 이렇게 들여온 자동차를 고종은 거의 이용하지 않아 '순종'이 물려 받았고, 순종의 캐딜락은 순종(純宗)의 비(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후)가 사용하였다. 이 캐딜락은 2001년부터 5년간 10억원의 비용을 사용하여 복원에 성공,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당시 이 차는 20대 밖에 만들지 않았고, 지금은 이 차를 포함하여 전세계에 4대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복원 전
복원 후
고종의 아침 ... 커피
덕수궁(德壽宮)이 처음 궁궐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피난(避難)에서 돌아온 선조(宣祖)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臨時) 궁궐로 삼으면서부터 라고 한다.
정릉동 행궁(行宮)이었던 곳을 광해군(光海君)이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경운궁(경운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경운궁(慶運宮)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러시아공사관에 있던 고종(高宗)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부터라고 하니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된 셈이다.
덕수궁(德壽宮)이라는이름은 일제(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고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고종(高宗)의 장수(長壽)를 비는 뜻으로 '덕수 (德壽)'라는 궁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된 것이다.
조선 최초의 커피숍 .. 정관헌(靜觀軒)
정관헌(靜觀軒)은 대한제국 시절 고종(高宗)이 다과(茶菓)를 먹거나 연회(宴會)를 열고 음악을 감상하는 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덕수궁(德壽宮) 안에 지은 회랑(廻廊) 건축물이다. 궁내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며, 정면과 좌우측 발코니가 화려하게 꾸며져있고,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벽면이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 화려하고 이색적(異色的)인 모습이다.
다양한 건축재를 사용하여 지은 건축물로 서양풍(書洋風)의 건축양식에 전통 목조건축 요소가 가미(加味)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때 태조, 고종, 순종의 영정(影幀)과 어진(御眞)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정관헌(靜觀軒)이란 솔밭과 어우러진 함녕전(咸寧殿) 등의 건축물을 고요하게 내다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같은 동북 아시아에 속한 중국(中國)은 실크로드를 통한 서방(西邦)과의 교역(交易)을 통해 오래 전부터 '가배(珂俳)'라는이름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였고, 일본(日本)도역시 한국보다 170년 정도 이른 시기에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고종과 커피
공식적으로 기록된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최초(最初)로 마신 사람은 고종(高宗)황제이다. 불론 한국도 교역(交易)을 통해 100년 훨씬 전에 커피가 들어왔으리라 추정은 되고 있지만, 역사적 기록이 없기에 고종황제가 최초로 마신 것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한국 최초의 커피에 대한 기록은 비극적(悲劇的)인 우리나라 역사의 한 사건과 연루되어 있다.
1896년 2월 21일 추운 겨울, 고종(高宗)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황급히 피신을 하게되는데 역사는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러시아 공사(公使)인 '웨베르'가 고종(高宗)에게 커피를 소개하였고, 향후 1년 간의 러시아공사관 생활을 통해 고종(高宗)은 커피 애호가(愛好家)가 되었다.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를 소개하는 글의 기록을 보면, ' 고종께서는 이 쓰고도 달콤한 커피에 상당히 매료되셨던 것 같다. 이 당시에 소개된 커피는 각설탕 속에 커피가루를 넣은것으로 그대로 뜨거운 물에 넣고 저어 마셨다. 어쩌면 이 쓰고도 달콤한 한잔의 커피에서 고종은 자신의 삶의 모습을 씁쓸히 즐겼을지도 모른다 '
러시아 공사관 생활을 마치고 고종은 명성황후(明聖皇后)가 살해된 경복궁을 버리고 덕수궁(德壽宮)으로 돌아온 후 커피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1900년 덕수궁 내에 정관헌(靜觀軒)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관(洋館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하였다. 고종은 이곳에서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대신(大臣)들과 커피와 다과(茶菓)를 즐겼다고 한다.
손탁 호텔
한편 고종(高宗)이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기간 중에. 러시아 ' 웨베르' 공사(公使)의 친척이 되는 '손탁'이라는 여인이 고종(高宗)에게 커피를 대접하곤 하였는데, 매우 친절하고 상냥스럽게 고종(高宗)을 대접하여 고종이 그 여인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일부 기록에는 '손탁'이 '웨베르' 공사의 친척이니 처제니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 손탁(Sontag)은 독일 여성으로, 1885년 한국 주재(駐在) 러시아 대리공사 '웨베르'와 함께 서울에 도착하여 '웨베르'부부의 추천으로 궁궐에 들어가 양식(洋食) 조리와 외빈(外賓)의 접대를 담당하였다. 그러다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정계(政界)의 배후에서 활약하였다.
드디어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게 된 고종(高宗)은 1895년 정동(貞洞)의 건물 한 채를 '손탁'에게 하사하였다. 이 건물은 외교관들의 사교(社交)와 로비의 장소로 이용되었고, 후에 반일(反日) 성향의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후 1902년 이 건물을 헐어내고 현대식 건물을 지었는데, 이 호텔이 '손탁 호텔'이며, 이 호텔의 1층에 '정동구락부'라는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커피숍이 등장하게 되었다.
비록 특권층만 출입할 수 있었던 최초의 커피숍 '정동구락부'가 왕실의 커피가 백성에게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커피 역사에서 한 획(劃)을 그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손탁 호텔'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18년 문을 닫게 되었다.
김홍륙 독다 사건 金鴻陸 毒茶 事件
김홍륙(金洪陸)은 함경도 사람으로 연해주(沿海洲)를 출입하는 가운데 러시아어(語)를 익혀 1894년과 1895년에 이범진(李範晉)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조로통상조약(朝露通商條約)을 체결할 때, 통역관이 되어 출세의 기회를 잡았으며, 1896년에 고종(高宗)의 아관파천(俄館播遷) 때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고, 윤용선(尹容善) 내각에서는 학부협판(學部協瓣)이 되었다.
그 후 러시아의 세력을 믿고 권력을 남용(濫用)함으로써 이를 규탄하는 방서(榜書)가 나붙기도 하였다. 1898년 친러시아파(親露西俄派)가 몰락할 때 관직에서 사퇴하였으며, 같은 해 8월 러시아와의 교섭에서 사리(私利)를 취하였다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게 된 김홍륙(金鴻陸)은 고종(高宗)의 생일(生日)인 9월12일 만수성절(萬壽聖節)에 전선사주사(典膳司主事) 공홍식(孔洪植)을 시켜, 고종가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아편(아편)을 넣게 하였다. 공홍식(孔洪植)은 은전 1,000원(元)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궐내보현당고직(闕內普賢堂庫直) 김종화(金鐘和)를 매수하여 행동에 옮기게 하였다.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고, 태자(太子)는 마시다가 토(吐)하고 쓰러졌다. 이 사건으로 김홍륙, 공홍식, 김종화는 사형(死刑)을 당하고, '김홍륙'의 처(妻) 김소사(金召史)는 태(苔) 100대와 3년간의 백령도 유배의 형(刑)을 받았다.
고종, 동양 최대의 운산금광을 팔아 넘기고 캐딜락을 구입하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稱慶記念碑) .. 사적 171호
고종(高宗. 재위기간 1863~1907)이 왕으로 즉위한 40주년(周年)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비석으로 비(碑)를 보호하는 비전(碑殿) 안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高宗)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황제(皇帝)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비석은 귀부(龜部)와 비신(碑身) 그리고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신(碑身)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碑文)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윤용선'이 짓고, 글씨는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전(碑殿)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비(碑)를 보호하고 있는 비전(碑殿)은 20세기 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 이러한 유형의 건물 중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며, 이 시기에 세워진 덕수궁의 다른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고 한다.
기로소 耆老所
기로소(耆老所)는정2품의 문관(文官)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서, 고려시절의 기영회(耆英會)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耆英會 .. 후에 耆社로 바뀜)에 들어 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 살지 못하여 기로소에 들어가는 왕이 없자,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해서 미리 앞당겨 들어 간 것을 본받아 고종(高宗)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기로소(耆老所)의 정식 명칭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이며 왕과 조정 원로(元老)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으며, 영조(英祖) 때 수직관(守直官) 2명과 서리(胥吏) 2명, 고직(庫職) 1명, 사령(使令) 44명, 군사(軍士) 1명을 두었는데 수직관은 승문원(承文院)과 성균관에서 7품 이하의 관원이 차출되었다.
기로소의 유래는 1394년 조선의 태조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관청을 만들어 文臣과 武臣을 가리지 않고 70세 내외의 2품관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耆社)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려 전토(田土), 어전(漁箭), 염전(鹽田)과 노비를 하사하고 군신(君臣)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며 즐기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고려의 기영회(耆英會)을 본 받은 것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하면서 이것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하여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라고 하다가, 1428년에 世宗이 이름을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개칭하였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기로소에 들어 갈 수 있는 자격에 제한을 두어 정경(正卿)으로서 70세 이상된 文신으로 제한하였고, 숙종 때에는 이들을 기로당상(耆老堂上)이라 하였으며, 군신(君臣)이 함께 참여하는 기로소의 특성상 관아의 서열에서는 기로소가 으뜸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로소가 맡은 일은 임금의 탄생일과 설날, 종지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에 모여서 하례(賀禮)를 행하거나 중요한 국상의 논의에 참여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숙종이 60세 되던 1719년에 기로소에 들어 가면서 경내에 영수각(靈壽閣)을 지었다.
기로소에 들어가면 녹명안(錄名案)에 이름이 기록되는데, 조선 초,중기의 기록은 모두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 그후에 다시 편찬한 " 기로소제목록후(耆老所題目錄後) "에 의하면 여기에 들어 온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이었으며, 최고령자는 현종 때의 윤경(尹絅)으로 98세이었고, 다음으로는 숙종 때 97세의 이구원(李久源)과 96세의 민형남(閔馨男) 등이 있었다.
칭경기념비전의 옛 모습
고영근 ... 고종의 碑를 지키다
이 비석에 얽힌 얘기는 더욱 애절하다. 고종(高宗)의 능(陵)에 이름도 붙이지 못하고, " 대한고종황제 홍릉"이라고 새긴 능비(陵碑)는 가마니에 둘둘 쌓여 그대로 비각(碑閣)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 비(碑)가 지금처럼 세워진 것은 4년 후, 경기도 장연(長淵) 군수(君守)로 있던 고영근(高永根)이라는 노인의 노력 덕분이었다. 고영근(高永根)은 충신으로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하였던 우범선(禹範善)을 암살(暗殺)하고, 감옥에 다녀 온 사람이다. '고영근'은 고종(高宗)이 금곡, 이 곳에 묻히자 능참봉(陵參奉)을 자원하여 능지기로 일하고 있었다.
이 비(碑)를 세우는데 4년이나 걸린 이유는...고종(高宗)을 안장한 후, 이 비(碑)를 세우려 하자, 조선총독부는 반대한다. 세우려면 앞에 전(前)을 더 새겨 넣으라는 압력이었다.
고영근(高永根)은 4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거적에 쌓인 능비(陵碑)를 바라보다가 일단 세워놓고 보자는 생각에 인부를 불러 모았다. '고영근'은 몹씨 추운 날, 어둠을 틈 타 목욕재계를 한 후 능비를 세웠다. 고영근(高永根)은 이제야 고종(高宗)의 성은에 보답했다 하면서... 상소문(上疏文)을 들고 순종(純宗)이 있는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 이 소식에 술렁이던 조정은 이미 세운 비(碑)는 그대로 두고, 고영근(高永根)을 참봉직(參奉職)에서 파면시키는 것으로 결정한다. '고영근'은 홍릉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이듬해 죽어, 고종의 능(陵) 인근에 묻혀 있다.
고종실록 高宗實錄
고종 독살설 高宗 毒殺說
고종(高宗)은 1919년 1월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德壽宮)에서 사망하였다. 67세이었다. 고종(高宗)의 사망 원인(原因)은 당시 일제에 의하여 뇌일혈(腦溢血)로 발표되지만, 그 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毒)때문에 사망하였다는 주장이 사망 당시부터 현재에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고종독살설(高宗毒殺說)은 당대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3,1운동의 배경이 되었지만, 당시의 정국을 살펴보면 근거없는 소문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 난 고종이 의병(義兵)이나 독립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구심점(求心點)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에서 고종을 망명(亡命)시켜 항일운동을 활성화할 계획이 드러나는 등 일제(日帝)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존재이었다.
더구나 고종(高宗)은 덕수궁에서 망국(亡國)의 한(恨)을 씹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액(高額)의 내탕금 (內帑金...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으로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지원하고 있었다. 독살(毒殺)에 관련된 인물로는 이완용, 이기용, 한창수,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등이 있으며, 어의(御醫) 안상호도 의심을 받고 있다.
이들 중 이완용(李完用)과 이기용(李琦鎔)은 일제(日帝)로부터 작위(爵位)를 수여받은 친일파로써, 특히 '이완용'은 일본왕(日本王) 앞에서 고종(高宗)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하기도 하였다. 독(毒)을 탄 음료를 고종(高宗)에게 직접 전달한 궁녀(宮女)는 일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가지 의혹만 있을 뿐, 사건의 실체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과 주변의 움직임들을 보아 틀림없을 것이라는 설(說)이 요즈음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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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 ...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해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