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은 예수님의 설교로 채워져 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큰 사람이냐고 제자들이 예수께 묻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하늘나라’라는 표현이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원본인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즉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현실세계를 말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의 저자는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로 바꾸어 마치 초월적인 세계를 뜻하는 것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표현의 차이는 마가와 마태의 신학의 차이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원본인 마가복음의 본문을 마태복음이 베껴온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이 마가복음보다 앞에 자리하게 되면서 마치 마태복음이 복음서의 첫 번째 책인 것처럼 인식되어, 기독교 복음의 원형이 갖고 있었던 현실성을 약화시키고 초월성을 지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왜곡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 본문의 원본인 마가복음 9장 33~37절을 보겠습니다.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뒤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뒤에, 그를 껴안으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원본에는 이렇게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현실세계에서의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은 이 본문을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로 바꾸었습니다.
어쨌든 본문의 예수님은, 어린이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새로운 관점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어린이는 미성숙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래서 당연히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이를 인정해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를 본받으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물론 어린아이의 유치함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순수함을 본받으라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본문들은 마태복음이 기록된 서기 80년대의 교회상황을 반영하는 본문들이라고 현대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6~10절을 보겠습니다.
6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 깊숙히 잠기는 편이 낫다.
7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 범죄의 유혹이 없을 수는 없으나, 유혹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8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던져 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이 불구가 되어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9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어서 던져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10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1절 없음)
어린 아이를 본받으라는 이야기에서 어린 아이를 소홀히 하거나 학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말하는 어린 사람, 또는 작은 사람이 의미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어린 아이가 아니라 초신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초신자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괴롭히거나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서기 80년대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공동체가 갈등에 휘말리거나 분열되는 걸 막기 위한 엄중한 경고의 뜻이 담겨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에 등장하는 말씀과 같은 엄중한 경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어지는 초대교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본문이 10절에서 곧바로 12절로 이어집니다. 11절은 없습니다. 이런 부분이 성서에 가끔 나옵니다. 17장에도 21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1절이 있는 사본도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원래 원본에는 있었는데 사본으로 옮겨지면서 없어졌거나, 반대로 원본에는 없었는데 사본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누군가 삽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11절의 내용이 없는 사본이 대부분이고, 없는 것이 글의 흐름에도 더 자연스럽기에, 원래 없었을 것으로 해석된 결과로 본문에 11절이 없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12~14절을 보겠습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으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게 되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을 염려하고, 구성원 한 명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초대교회의 상황이 반영된 본문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본문이 18장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15~17절을 보겠습니다.
15 "신도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신도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러나, 그 신도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문제를 일으키는 신도를 어떻게 치리할 것인가 하는 내용인데,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는지요. 본문은 분명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인들 간의 갈등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대에 이 정도의 체계를 갖춘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몇 십 년 후의 미래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성서무오설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보수적인 학자들이지요.
그러나 그런 해석은 매우 어색합니다.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본문은 마가복음에는 없습니다. 누가복음에도 없습니다.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정직하게 본문을 들여다보면, 이 본문은 분명히 어느 정도 틀을 갖춘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인들 간의 갈등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서기 80년대 마태공동체의 고민을 담고 있는 본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자가, 또는 마태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교회 내의 이런 갈등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 이어 베드로가 예수님께, 교우 중에 자기한테 죄를 짓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21~22절을 보겠습니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
유대인들에게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한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는 것은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용서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큰 빚을 탕감 받은 어느 종이 자신에게 적은 빚을 진 동료를 박하게 대하는 상황을 비유를 들어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신 후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서기 80년대에 마태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이 본문을 자기들의 복음서에 담은 이유와 의도는, 당시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죄를 용서받았으면서도 서로간의 작은 허물을 덮어주지 않는 이기심을 나무라고 깨우쳐주어, 공동체의 분열을 막고 화목을 도모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 현대 신학자들의 진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동료를 몇 차례 권면해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앞부분의 말씀과, 무한히 용서하라는 뒷부분의 말씀이 서로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용서하지 말아야 할 죄는 마태공동체가 기본적으로 채택한 중요한 교리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사적인 문제에 대한 지침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