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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9: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빌닷의 말에 욥이 대답을 한다.
■(욥 19:2)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들의 말이 내 마음을 더 괴롭게 하는구나,
언제까지 말로 나를 부셔버리려고 하느냐?
이 세사람도 대단한 것이 몇날 몇일이 되도록
집에도 가지 않고 욥하고 앉아서 계속 네버앤딩
설파를 하고 있다. 눈을 부라리며.
어쨌든 욥 집에서 삼시세끼는 얻어 먹고 있었지
않았을까. 욥 집에서 잠도 잤을 것이고.
그럼 좀 비위에 맞는 말도 좀 해주고 위로도
해주고 그러지 그렇게 욥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얘기하는게 건강에 좋긴
한데 거슬리는 주제가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욥 19: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너희들의 하는 말이 오히려 나를 학대하는 것인데도
모르고 미안해 하지도 않는구나.
■(욥 19:4)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그래! 내게 허물이 있다고 치자,
그럼 그 허물이 나에게만 있느냐?
너희들에게는 없다는 것이냐?
■(욥 19:5)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너희들이 스스로 자만하고 너희들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나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주장하는구나.
■(욥 19: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하지만 그것은 신이 잘못하신 것이다. 나는 억울할 뿐이다.
정말 나는 잘 못한 것이 없는데 신이 그물로 나를 꽁꽁 묶으신
것이다. 그런 줄 알아라.
■(욥 19: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내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있다고 부르짖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도움을 주는 자도 없구나.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구나.
욥이 올바른 사람이었으면 주의 응답이 있었을 것이다.
(시편 106:44)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이사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지만 부르짖는 자가 악한 자일 경우는 응답하지 않으신다.
(사무엘하 22:42) "그들이 도움을 구해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도다"
(미가 3:7) "그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
■(욥 19:8)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구원도 안해주시고 응답도 안해주시는 건 둘째치고
오히려 신이 내가 가는 길을 막고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에 절망만 놓으셨다.
■(욥 19:9)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지난날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르치고 다스리고
관리하고 도와주고 따르게 하고 인도하였던
나의 영광의 자리를 거두어 가시고, 나의 왕관을
벗겨버리셨구나.
신께서는 그 어떤 사람에게 권력도 주신다.
왕으로도 삼으신다.
그렇지만 잘못된 관모를 쓰고 있으면 결국에는
벗기신다.
사울도 왕으로 세움 받을 때는 아주 준수했다.
그런데 갈수록 사람이 인격적으로 엉망이 된 것이다.
그럴 때는 관모를 벗기신다.
그러면 왕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그럴 것인지 아시고도 왕으로 세우셨단
말인가?
그렇다. 너나 나를 왕으로 세워도 똑 같을 것이니까.
주께서는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시다.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걸 또 기독교인으로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시다고
읽어버리면 안 된다. 누구든지 부르심이다.
■(욥 19:10)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사면초과다.
자녀도 죽고 종도 죽고 많은 가축도 죽고
나를 좋아하는 자도 없고, 나를 불쌍하게
보는 자도 없고, 나를 동정하는 자도 없고,
나를 찾는 자도 없고 이제 나는 소망도 없구나.
이제 나는 죽는 것만 남았구나.
■(욥 19:11)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원수를 보듯이 대노하시면서 나를 보시는구나
■(욥 19:12)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
나를 치러 한두명도 아니고 군대같이 온다.
영의세계에서 신의 명령으로 많은 군대가 욥의 집 주변을
지키고 있다. 이로 인해 육의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욥의 집에
오지도 않고, 오고 싶어 하지도 않고, 욥을 미워하게 된다.
욥의 죄 값으로 자동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신께서
아무 생각 없이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다.
■(욥 19:13)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신께서 욥의 형제들도 욥을 멀리하도록 하신다.
그동안 욥에게는 많은 사람이 따르고 쫓아다니고
도움을 받을까 하고 손을 비비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멀리가고 어쩌다 봐도 모르는척 하고
낯선 사람들 같다. 침이나 안뱉으면 다행이다.
■(욥 19:14)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아주 가깝게 지내던 친척들 지인들 모두가
욥을 멀리한다. 그들도 욥이 건재했을 때는
나름 콩고물을 얻어먹고 살았을 것이다.
더럽고 치사해도 살기 위해서 참았을 뿐이지.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욥 19:15)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재산 털리고 자식 죽고 몸도 아프고 그래도 아직
종들이 있을 정도로 재산은 있다.
아직도 욥의 집에 머물러 사는 자도 있고 여종들도 있지만
그들조차도 욥을 길거리 거지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다.
그들에게 욥은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다.
■(욥 19:16)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뀌었다.
욥이 종을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는다.
콧방귀를 끼는 것이다.
네가 언제부터 나의 주인이냐?
아직도 네가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 하냐?
조금있으면 죽을 주제에!
욥은 그들에게 아직도 주인이지만 얼마나 행색이
죽을 것 같고 보기 싫은지 주인 취급을 안 해준다.
욥이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해도 부탁조로 간청해야 했다.
그 모습은 욥의 아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꼴도 보기 싫어하면서 나가 뒈져라! 하고 있다.
종들은 주인 따라 한다. 자식은 더 그렇고.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새고,
집안에서 안 새는 바가지 나가서 안 샌다.
욥의 아내가 그 아픈 남편을 끔찍히도 위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다면 친지나 친척이나 종들이
그렇게 멀리하고 이방인 취급을 할 수가 없다.
■(욥 19:17)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욥의 아내는 욥이 숨 쉬고 있는 것도 싫다.
아직도 살아있냐는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치를 떨게 해줬는지 빨리 죽었으면 한다.
손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욥을 처량하게 보고 있다.
인간은 조금만 미워도 죽이고 싶어지고, 그게 심하면
죽이고, 자기를 모욕해도 죽이고 싶어지고 그게 심하면
죽이는 것이 인간이다. 신께서 부부로 가족으로 친구로
이웃으로 종교로 단체로 나라로 묶으시지 않으시면
그냥 다 죽이고 죽고마는 존재이다.
치를 떨만큼 싫어하는 사람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게 사람이다.
나도 그랬다. 오빠가 너무 무서워서 싫다보니
죽었으면 좋겠다고 저주까지 하게 되고,
내가 살릴 수 있는 환경인데도 오빠가 그냥
죽도록 방관했다.
■(욥 19:18)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동네 아이들까지 욥을 업신여기고 욥이 일어나면
욥을 조롱하기 바쁘다.
"오늘도 살아있네!" "아직 안 죽었네!"
"언제 죽을라고 그러나!"
이런 상황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아프면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그들 가족들이 전부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가난하기만 해도 상처를 스스로 입는데 그 가난 위에서
군림했던 욥 아래서 가난이라는 것을 가지고 마음의
상처들을 그렇게 심하게 입을 정도로 욥의 행동이
그랬다.
■(욥 19:19)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그동안 욥하고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도 그를 미워하고
욥이 그동안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들이 욥의 원수가 되었다.
욥은 사랑한다고 한 것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심한 상처가 됐을까?
욥에게 무언가를 얻어먹기 위해 사랑하는 척
한 것을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았을 수도 있다.
사랑은 내가 해주고 싶은 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받고 싶은 대로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욥 19: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욥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여러 달 째 그렇게 하고
있었으니 살이 뼈에 붙었고, 거무튀튀하고,
말만 할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그나마 겨우 입만 살아있다.
■(욥 19: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욥이 친구들에게 부탁 한다.
"너희들은 그래도 나를 좀 불쌍하게 여겨다오"
"내가 비록 어떨지라도 그냥 너희들은 지금 나의
처절한 모습을 보고서라도 나를 좀 불쌍하다고
해주라"
신께서 나를 치셔서 이렇게 됐다.
욥이 지금까지 푸념식으로 형제, 친척, 자녀, 종들까지
자기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안에 자기의 죄가 다 들어있다. 욥 자신만 모를뿐.
자기 입으로 자기를 정죄하고 있다.
■(욥 19: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어째 너희까지 신이 나를 때리듯이 나를 괴롭게 하냐?
내 이런 처절한 모습으로도 안 되겠니?
이 모습이 불쌍하지도 않니?
아무리 나쁜 사람일지라도 이 정도까지 처참한 지경에
이르면 “쌤통이다” 라는 생각보다 "안 됐다"는 생각이
더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이 앞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은 욥이 불쌍하다는
것보다, “네가 과거에 그렇게 했으니 그렇게 됐지!”
하면서 자꾸 "네 잘못을 인정하라!"고 한다.
물론 징계를 당하는 자는 자기 잘못을 찾아야 하지만
그것도 신께서 찾게 해주시지 않으면 찾지를 못하게
되어 있다.
결국에는 욥이 “내가 어떤 죄를 지었어도, 그래서
이렇게 징계를 받고 있을지라도 당신들만큼은,
그래도 과거에 나를 알고 학문을 논하고 했던
당신들만큼은 나를 좀 불쌍하게 보아달라"고 한다.
처절한 부탁인 것이다. 왕 같이 권위적이었던
욥의 입장에서는 아주 처참한 부탁인 것이다.
"당신들은 나를 좀 불쌍하게 여겨주세요"
"내 꼴이 이지경인데, 아직도 받을 벌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라고 하는 소리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람이 신께 어떤 형벌을 받을지라도
사람인 우리는 동질감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불쌍하게 보아주어야 한다.
지금 현재 기독교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설교에서 늘 듣는 말이, 불신자들이 불쌍하다고 한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저들이 참으로 불쌍한 존재라고
한다.
글쎄, 얼마나 불쌍해 하는지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래서 전도해서 마구마구 구원시켜야 한다고 한다.
글쎄, 죽어서 가는 지옥만 불쌍한가?
본인이 죽어서 지옥 갈지 천국 갈지도 모르는데
남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사랑하는 것은 다 거짓이라고 하시는데,
그 말씀은 눈에 보이는 현재의 삶도 불쌍해하지
않으면서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만 불쌍하다는
것은 다 거짓이라는 것과 같다.
나는 신앙생활 하면서 참 고민이 있었다.
왜 나는 지옥에 가는 영혼들이 불쌍한 생각이
안 드는 것인지.
기도해도 소용없고, 아무리 불쌍하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안 되고. 나는 강퍅해서 그런가? 회개도 하고
노력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과거 어느 땐가 주변 사람이 나더러 전도사를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때도 나는 속으로 극구 부인했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없는데 어떻게
전도사를 할까? 교회 행정적인 것을 잘 하는 것이
전도사라면 해볼 만 했다.
나도 그런 것은 잘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전도사라는 것이 교회 행정적인 것을
보조하는 것이 다일까?
지금도 어린 청년들이 전도사 사역을 한다고
하면 나는 참 궁금하다.
저들은 정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할까?
지옥에 가는 영혼들이 불쌍해서 정말 울고불고
기도를 드릴 줄 아는 사람들일까?
저 어린 사람들이 그런 것을 알까?
그런 궁금한 생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설교야 좀 지식적으로 공부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와서 깨닫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다 옳구나 한다.
(마태복음 23:15) "너희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녀
전도라는 것을 해놓고 일단 하나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구나"
라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겠고,
우리는 목사든 성도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성경대로 악하게 살고 있는 중이다.
죽기 전에 입으로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시인했으니
천국갔겠구나~, 아님 할 수 없고... 라면서
그냥 장례 치루고 인생이 다 그렇지 하면서
금방 잊고.
누군가 조금 잘못하거나 맘에 안 들면 싸늘한 눈길을 보내고
싸늘한 몸짓을 보내고, 남아 있는 성도들도 많은데 하나 정도
없어도 끄덕도 없고.
우리는 누구를 불쌍하다고 하는 것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속을 좀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욥 19: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내가 하는 말들이 기록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인생이 책으로 씌어졌으면 좋겠다.
■(욥 19: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영원히 없어지지 말고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청각 동물이라 이렇게 선배가
미리 알려줘도 소용없다. 본인이 당해보고야 아는
것이다.
그것도 철 들거나 개과천선 아니면 소용도 없다.
■(욥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 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를 심판하시는 분이 살아계시니
어느날인가 밝혀주실 것이다.
(욥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제 내가 죽고 나면 신을 보겠구나.
■(욥 19: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욥은 죽으면 신을 대며하여 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신을 만날 것인데 신을 낯선 사람 보듯 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초초하다.
육체 입장에서 볼 땐 어떻게 생기셨을까 궁금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 만나는 것처럼 초초하다.
하지만 영의세계에는 신과 같이 존재하고 있다.
육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뿐이고
완전 죽어야 그곳을 의식할 수 있다.
나도 사실은 신께서 임재하시고 계셔서 이런 글도
쓰고 있지만 믿어질 때가 있고 안 믿어질 때가 있고
그렇다.
그런 것도 주께서 그런 믿음을 주시냐 마시냐다.
나도 죽어서 가는 창조주신의 세계가 궁금하다.
정말 초초하다 어떤 곳일지, 어떤 모습일지.
■(욥 19: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이겨볼까, 나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몰아붙이고
있는데
■(욥 19:29)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너희도 벌 받을까 조심해라. 분노는 벌 받는다.
그러면 너희에게도 심판하시는 분이 있는 줄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