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진주군 문산면 상이동(象耳洞), 일동(一洞) 일부로서 상문리(象文里)라 하였다.
상이(象耳) : 형태가 코끼리 귀처럼 생겼다고 하여 상이마을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옛날 진주에서 등짐 장사꾼이 새벽 일찍이 먼동이 트기전에 마산방면으로 장사길을 떠나서 상이마을에 이르면 날이 새어야 귀내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날이 새는 이 상이마을을 「새태」라고 하여 이 말이 널리 알려져왔다.
신라 49대 왕인 헌강왕 4년(878)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로, 진주 8경 중 하나인 월아산(月牙山)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선조 36년(1603) 계형대사가 중건하여 불법을 이어오다가 1946년 청담대종사가 중수하였다. 원래 청곡사(靑谷寺) 암자였으나 1962년 해인사 말사로 등록되면서 두방암에서 두방사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방암으로 불리고 있다. 1963년 철웅스님이 무량수전을, 1970년 법령스님이 요사채를 보수하고, 1973년 성범스님이 진입로 1.5km를 포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1998년 11월 13일에 전통사찰 제35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 월아산 두방사 아래 200㏊의 산림욕장이 조성해 두방사 입구에는 산책로와 등산로 설치, 노면주차장, 침목 3개소와 안내판을 설치해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산림욕장을 따라 오르다보면 가파르지 않은 산길 곳곳에 작은 구름다리와 통나무 계단들이 운치를 더하고, 곳곳에 쉴 수 있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어 연인이나 가족끼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되어주고 있다.
보이지 않습니까? 비가온뒤 아직 땅이 마르지 않고 산 골짜기에는 기압차이로 계곡에 뿌연 안개가 약간 서려 있지 않나요
더더욱 신기한 것은 또 있답니다
청송 부남면에 있어야 하는 작은 주산지가 여기에 또 있네요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어~, 오~ "주산지"네
여기는 나무가지가 늘어지지 않는 버드나무로 심한 가뭄이 있을 때 마다 저수지가 말라 죽은가지가 있다.
차이는 연못둑이 농업용 저수지둑이 아니고 심한 가뭄때 물이 조금씩 새어 나가므로 마른다는점.....
저기 물속에 버드나무 밑둥 주위에 수염뿌리가 많은 게 저수지가 생길때부터 같은 세월을 동거동락하지 않았나 싶다
적극 추천할만 하다
사찰의 작은 계곡은 물이 많이 흐르면 좋지만 조금씩 끊이지 않고 계속 흐흐고 있다는 게 중요한거 같습니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 삼림욕장 중간지점 야트막한 곳엔 자연석과 풀로 꾸며놓은 야외 공연장, 체력 단련장이 조성돼 있고, 그 위쪽엔 간식을 먹을 만한 평상과 작은 쉼터 팔각정이 있다. 찻길로 계속 올라가면 꼬불꼬불한 오솔길 양쪽에는 주차공간, 각종 꽃나무와 소나무등이 우거진 숲을 만들어 놓았다.
맑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상큼하고 향긋한 솔향과 흙네음이 섞인 두방사 입구가 여름 피서지로 거듭날 수 있겠다.
텐트를 칠수 있고 평상도 있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면 울창한 숲을 걷거나 대화 또는 사색을 하게 하는 치톤키드 산림욕은 일상생활에서 심심의 피로를 한방에 날려 보낼 것이다. "여름이여 가라"
사찰 경내로 들어오려면 계단을 따라 100m 정도를 걸어야 하는데 계단이 끝나는 지점 왼쪽에 종무소·공양간으로 구성된 3층 요사, 오른쪽에 1980년경 건립된 팔작지붕 전각인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에 서면 산아래까지 훤히 내려다보인다.
월아산 아래 마을사람들은 이 산을 " 달이 떠오르는 산" 이라하여 "다름산" 있다. 달오름산이 점점 변하여 다름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특히 월아산과 장군대산을 잇는 다름산 고개는 멀리서 보아도 달맞이와 해돋이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두 개의 산봉우리가 서로 대치하여 월아마을의 수구(水口)를 가렸는데 산의 동쪽에서는 재상을 낳고 서쪽에서는 장군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훗날 재상으로는 강맹경(姜孟卿) 강혼(姜渾)이, 장군으로는 조윤손(曺潤孫), 정은부(鄭殷富)가 나왔다 하며 그 뒤에도 계속하여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한다
사찰 중앙에 있는 주법당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정면 5칸·측면 3칸 규모의 익공식 공포(栱包), 팔작지붕 건물이다. 주불로 아미타불, 협시로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후불탱화로 아미타탱화, 불단 왼쪽으로 신중탱화가 있다. 외벽에는 심우도를 그려 놓았다. (사진에 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주지스님의 법문 :
三日修心은 千載寶요 百年貪物은 一朝塵이니라
삼일수심은 천재보요 백년탐물은 일조진이니라
삼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보배요, 한평생 탐착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먼지와 같으니라"
우리 가족 일행이 주차장 입구에 도착할 때 범종 타종소리가 들려 왔다.
계단을 올라 가니 주지스님께서 직접 타종을 하시는 종소리는 불심이 없는 중생도 "처음에는 귀에서 들리지만 갈수록~~~~~~
정(停) 소리로 귀속에~ 마음속에 계속 머문다고나 해야 표현이 맞는지......종소리에서 정(停)머루르는 소리로)
올해 고3, 중3학년을 둔 학부모로서 2012수능 발원기도 플랜카드가 있어 마음속으로나마 내공은 없지만 빌어본다
석탑의 재료는 푸른빛이 도는 점판암을 사용하였는데, 이와 같은 청석탑(靑石塔)은 고려 초기에 주로 유행하였다. 두방암 다층석탑은 본래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법륜사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법륜사가 소실되어 폐허가 되자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두방암으로 옮겼다고 한다.
두방암 다층석탑은 얇고 작은 석재로 차곡차곡 쌓은 소형 탑이며, 재질은 점판암으로 석재의 돌 빛이 푸른색을 띠고 있어 청석탑이라고도 한다. 청석탑의 대부분이 화강암 기단을 갖는데 두방암 다층석탑은 기단이 결실되어 원래의 석재를 알 수 없으며, 현재 새로 만든 화강암 기단위에 세워져 있다.
화강암 기단 위에 연화문이 새겨진 하층기단 갑석을 얹고 그 위에 다시 상대중석과 역시 연화문이 새겨진 상층기단 갑석을 얹었는데, 상대중석은 결실되어 근래 새로 만들었다. 탑신부는 석질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한 매의 석재로 만들었으며 1층과 11층, 12층 탑신석은 원래의 석재가 아니란다.
쉽게 풍화가 되지 않는 땅속의 푸른빛을 띠는 점판암(청석돌)으로 만든 높이 3m의 고려시대 석탑 ‘두방암다층석탑(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00호)로' 등록되어 우뚝이 서 있으며, 높지는 않지만 1~12층까지 1100년전 시대를 반영하면 연화문이 새겨진 하상기단 갑석을 보면 상당히 정교한 기술이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의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과 국립대구박물관의 정도사지 오층석탑,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그리고 경천사 십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 건립된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지장전이 있다. 지장전 불단 가운데에는 지장보살이 있고, 작은 금동 지장보살상 600개도 모셔져 있단다
신비의 샘물 "아픈 사람의 병을 낫게 했다는 감로수로 알려진 두방사 약수를 앗불사! 헐~놓치고 왔다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두방사에 가시는 분은 신비의 샘물 한 모금 공양도 하고 불전함에 시주도 하시면 마음의 만병은 치유됩니다.
지장전 뒤쪽에 약수터(신비의 약수)가 있고, 약수터 위쪽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삼성각이 나온다
삼성각(三聖閣 : 산신, 독성, 칠성 세분을 모신 곳)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익공식 공포 건물로, 내부에 2000년에 조성된 칠성탱화·독성탱화·산신탱화가 있다. 왠지 삼성각하니 소시적 할머니가 부엌옆 뒷산쪽으로 칠성........두손응 비비면서 기도하는 내용....
너무 정감이 가는 두방사인것 같다.
한국 토속신을 그대로 수용하여 불교의 토착화에 기여. 산신각, 독성각, .칠성각으로 따로 모시기도 한다.
사찰에 가보면 일반적으로 대웅전으로 표시하였지만 두방사는 "무량수전 "으로 현판이 있었다.
그 이유는 주지스님께서 차를 한잔(우리가 편하게 커피를 주문함)하면서 설명해 주셨다.
아미타여래가 봉안된 불전불교에서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사찰 당우(堂宇). 극락보전·무량수전·무량전·보광명전(普光明殿)·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알고 갑시다?
아미타불(阿彌陀佛), 무량광불(無量光佛)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은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에 머물며 설법을 한다는 부처로, 주로 정토교에서 숭앙하는 구제불이다.
《무량수경(無量壽經, Sukhāvatῑ-vyūha-sūtra)》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원래 법장(法藏)이라는 비구승, 즉 법장보살이었는데, 48개의 큰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끝에 서원을 모두 이룬 뒤 부처가 되어 서방 극락세계를 세워 다스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곳에 설법을 하고 있다고 한다.
淸淨善根普回向
청정선근보회향
청정한 선근(善根)을 널리 회향(回向)하사
得成無上照世燈
득성무상조세등
세상에 가장 밝은 등불이어라
佛智廣大同虛空
불지광대동허공
허공과 같은 부처님의 지혜여
悉了世間諸妄想
실료세간제망상
세간(世間)의 모든 망상(妄想)을 깨닫게 하고
悉令一切諸衆生
실령일체제중생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利益群迷恒不捨
이익군미항불사
중생 이롭게 하는 일 언제나 쉬지 않으시네
(사진순서는 맞는지 모르겠다)
주련[柱聯] : 법당 기둥에 불경의 짧은 경구를 적어 넣거나 새긴 목판. (아래 설명 참조)
문설주에 "청룡" 과 "홍룡" 문양이 너무 정교하여 담아 보았다
알고갑시다?
주련[柱聯] : 법당 기둥에 불경의 짧은 경구를 적어 넣거나 새긴 목판.
주련은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로 기둥(柱)마다 시구를 연달아 걸었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원래는 좋은 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내용을 붓글씨로 써서 그냥 기둥에 붙이거나 혹은 얇은 판자에 새겨 걸었던 것이 후대에 발전하여 지금은 일정한 양식을 갖춘 주련으로 발전했다. 법당에 걸려있는 주련은 판 위 아래에 연잎이나 연꽃, 혹은 당초 무늬를 새겨 다듬고 그 가운데에 글귀를 적는데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써 넣어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 한 특징이 있다. 내용은 부처님 말씀이나 선사들의 법어가 주 내용이다. 사찰의 기둥이나 벽에 성구를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기둥마다에 부처님 성구나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른다.
오늘은 두방사를 찾아 너무 많은 수련을 했다. 범종소리를 듣고, 무량수전에서 기도도 드리고, 종무소에서 차를 한잔 할수 있었고, 주지 스님의 세세한 설명도 듣고 처음으로 대면하여 좌장할수 있었다는 것으로 2011년 7월 3일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찾아 갔을때 무량수전과 종무소 뒷 축대공사 마무리 잘 하시구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들러 인사드립니다
장군대봉 등산로는 벌들이 많은가 보다 "벌조심" 기와장에다 표시
감로의 샘
산 기슭 깊은 곳에 절하나 깃들였는데
송죽이 저 같이 맑기만 하구나
옛 부처님 말이 없는데
흐르는 샘물이 대신 설(語)하네
- 월아산 두방사 -
1. 진주시 문산리 상이동과 그 주변 마실과 고개 유래에 관한 이야기
2.상문리 : 1914년, 진주군 문산면 상이동, 일동 일부로서 상문리라 하였다.
3.상이 : 형태가 코끼리 귀처럼 생겼다고 하여 상이마을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옛날 진주에서 등짐 장사꾼이 새벽 일찍이 먼동이 트기전에 마산방면으로 장사길을 떠나서 상이마을에 이르면 날이 새어야 귀내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날이 새는 이 상이마을을 「새태」라고 하여 이 말이 널리 알려져왔다.
4.빈대골 : 법륜사가 있던 골이다. 이 절은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된 사찰로서 임진왜란 때 폐사되어 산 중턱에 절터만 남아있다. 폐사된 원인은 「빈대」가 극심했다는 설도 있고, 임진왜란 때 승려가 모두 승병으로 출정하고 절은 소실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이곳에서는 사찰터 부근을 빈대터라고 부른다. 지금도 부근의 돌밑에는 빈대껍질이 붙어있다. 조선조 말기까지 13층석탑이 남아 있었으나 상문리 2번지 소재 두방사에 옮겨져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5.장군봉 : 봉화대는 군사상의 목적을 위하여 설치한 통신수단으로서 서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평시에는 일거이지만 적형이 나타나면 이거로, 또 경에 가까워오면 삼거, 경을 범하게 되면 사거이고, 접전이 시작되면 오거로서 이와같이 단계별로 알리는 요령을 정해놓고 있었다. 그 식별을 쉽게하기 위하여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꽃으로서 상전했다고 한다. 전국의 봉화대는 약623개소로서 문산은 상문리 2번지 두방사 뒤 산정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장군봉이라 한다. 이 장군봉 봉화대에는 항시 군인 16명 오장 2명이 상근하면서 이상이 발생하면 직봉으로 동래를 거쳐 광주천림산으로, 여기서 또다시 서울 남산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봉화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장군봉 근처에는 그 화력에 의하여 암석이 끓어흘러 용암처럼 보이니 등산객들이 자연석 또는 괴석인가하여 거의 채굴하여간 실정이다. 그리고 이 장군봉 봉화대를 국사봉이라 했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6.애티고개 : 문산면과 진성면 간의 면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이다. 일명 귀내고개라고도 하며 국도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길이 험하고 고개가 깊었으므로 혼자서는 도적떼나 맹수 때문에 넘지를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간이 유원지로 조성되어 통행하는 사람이나 차량이 쉬어갈 수 있도록 시설이 되어 있다.
7.가는골 : 귀내고개 아래에 위치한 가늘고 길게 꼬부라진 골짜기이며 6·25사변 당시 많은 시체가 묻힌곳이기도 하다.
8.중티 : 상문리 동편에서 갈촌리로 넘어가는 막다른 골짜기의 고개이다. 이 고개의 정상에는 진양보육원(1995. 6. 대평면 내촌리에서 이전)이 있으며 서쪽 아래에는 중티 못이 있다.
9.황서방갓골 : 황씨성을 가진 사람이 골짜기에 자기소유의 산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런 연유로 붙여진 골짜기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0.실밤실 : 세율곡이 언제부터인지 근거는 없으나 토박이들로부터 바뀌어 불러진 이름이다. 6·25사변 당시는 골짜기가 길고 산이 무성할 뿐만 아니라 산정은 사방의 동정을 살피기 좋은 곳으로서 유일한 피난지였다고 한다. 70년대를 전후하여 「단감」「배」밭으로 개간되었다.
11.후도골 : 법륜고개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논밭에 일하러 나온 농부들이 가져다 놓은 점심참을 지나가던 길손이나 도적들이 훔쳐먹다가 일하던 주인이 보고 멀리서 소리치면 도망쳤다고 하여 도적을 쫓는 골짜기라고 후도골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12.막대는 골 : 상문리 동북쪽에 있는 아주 험한 골짜기이다. 고개만 넘으면 진성면이다. 문산면에서는 막다른 골짜기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3.늦은티 : 경사가 완만한 늦은 고개라 하여 '늦은티'라고 한다. 상이마을 안골짝을 물통골이라고 한다. 골짜기의 막바지에 위치한 이 '늦은티'가 문산읍과 진성면의 경계이다. 1974년에 남해안 고속도로를 개설할 때 상행성 550m, 하행선 719m의 진주터널이 관통되었다.
14.깐치골 : 진성면으로 가는 국도 왼편 골짜기가 까치처럼 생긴 지형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이 골짜기 일대에 진주전문대학이 있다.
15.부치네이 : 상이 마을 동쪽에서 진성면으로 가는 국도변 골짜기 일대를 말한다. 1990년 초 진주에 있던 실업전문대학을 1983년에 이곳으로 옮기면서 교명을 진주전문대학이라고 하였다.
16.보림보리 : 부치네이 아래에 있다. 문산에서 갈촌방면과 진성방면으로 가는 삼거리 갈림길 일대를 이르는 말이다.
17.다악실 : 상이마을 앞산 넘어 동쪽에 닭 형태로 생긴 골짜기로서 계곡, 즉 닭실인데 방언이 변해 불려진 지명이다. 골짜기에 계곡소류지도 있다. 80년대말 이곳에 「창용산업」에서 「아스콘」공장을 건립하였다.
18.성지골 : 수원이 높아 물이 마르지 않는 약수터 골이라 하여 성지골이라 한다.
19.미마이 : 상이마을 동남쪽 철도 건너편에 위치한 언덕이다. 지금은 단감밭이 되어있다.
20.오지미(집)터 : 두방사 뒷산 중턱에 움막을 쳐놓고 약초, 산채도 캐고, 산양을 방목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오지미」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살던 집터라고 하여 「오지미 집터」라 불려지고 있으며 그분의 성은 김씨이며 지금도 그 우막 집터가 남아있다.
21.부동 : 문산면에서는 제일 먼저 정착된 주거지역으로서 마을 뒷산이 가마솥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이 보인다 하여 옛날 이름인 「가매실」을 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일동네」라고 불러도 부동마을인줄 알고 있다.
22.가매실골 :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월의 흐름으로 「가암시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3.밭 뚝 : 일동네(부동) 앞들에 있는 제방을 가리키는데 옛날에 남산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냇물을 논밭에 돌려대기 위하여 만들어진 제방이다. 일동네 밭뚝이라고 하면 의례 부동마을인줄 안다.
24.댓방골 : 꼬불꼬불하고 길쭉한 경사진 골목이 부동마을과 주정마을을 갈라놓고 있으며 옛날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골목어귀에서 담뱃대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25.적광사 : 부동마을 북쪽 서지골의 산기슭에 있는 절이다. "서지"는 한문서당의 방언인데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930년을 전후하여 서당이 폐쇄되고 그 자리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26.아우실 : 부동마을의 동북쪽 등너머에 있는 긴 골이다. 와우곡의 방언으로서 소가 누워있는 형태의 골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쪽 산등성이는 상문리 공동묘지로 되어있다.
27.굴바우 : 아홉실 안골에 있는 바위굴이다. 얼마나 굴이 깊던지 굴 입구에다 불을 지피면 금산면 금호못 뚝에서 연기가 난다는 전설이 있다.
28.새 미 실 : 천곡의 방언이다. 상이마을 남쪽 경전남부선 철도의 건너편에 위치한 산과 골짜기를 말한다.
29.장사바우 :「새미실」산 중턱에 있는 바위이다. 어떤 장수가 그곳 바위 옆을 지나다가 미끄러져 얼떨결에 바위에다 손을 짚었는데 그 바위 복판에 손자국이 지금도 남아있다.
30.벅 수 골 : 마산쪽에서 상문리 부동마을 입구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안치되어 있다. 이 대장군의 토속적인 방언이 「벅수」라 함으로서 붙여진 이름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사람이 모여 동제를 모신다. 그러므로써 온갖 잡귀가 마을에 침범못하고 농사도 풍년이 되고 평온한 마을이 되기 때문이다.
31.정 기 : 상이마을 입구 지점을 말한다. 거기에는 200여년 된 큰 느티나무 2그루가 있었다. 이 느티나무를 방언으로 「정기」나무라 하며 그로 인해서 생긴 지명이며 마산 진주간 국도확장공사 때 채벌되었다.
32.주정 : 부동과 관정과의 경계를 이룬 마을이다.
33.시 종 골 : 주정마을과 관정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길다란 골목이다. 골을 지나 마을 뒷산의 산지꼬·뒷대꼬를 거쳐 청곡사 월아산 산정으로 가는 길목이다.
34.달래고개 : 어느날 의좋은 남매가 남산 먼당에 있는 밭에 일하려 여동생을 앞세우고 가는데 갑자기 내린 소낙비를 맞아 비에 젖은 베옷이 과년한 여동생 몸에 찰싹 달라붙자 그 몸매에 순간적으로 욕정을 느낀 오빠가 자기의 불륜한 마음가짐을 뉘우치고 고개마루에 올라가서 생식기를 돌로 찍어 죽고 말았다. 앞서가던 여동생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빠가 오지않자 고개를 되돌아 가보니 그런 참변이 일어나고 있지않은가. 그러한 광경을 본 여동생은 울부짖으며「무엇때문에 죽었을까. 한번이라도 달래나 볼 것이지」했다는 유래로 달래고개라고 한다. 남산 중턱에 있다.
35.메모틔 : 마을 어귀 남산 기슭 모퉁이에서 말을 탄 관리나 길손은 말에서 내려 객사에 출입할 수 있다하여 하마모틔라고 하였다. 이 말이 세월이 지나면서 매모틔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는 찰방 이상석 청덕선정비가 서 있다.
첫댓글 스님의 합격기원 범종소리에 아들녀석이 자기가 원하는 곳에......합격했어요
그쪽으로 가는 길이 있으면 한번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