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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회 이현래 목사 메시지
하나님과 사람
2023. 2. 23
오늘은 예수님까지, 그리고 마지막까지 총괄적으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대강 아시니 듬성듬성 말씀드리겠다.
성경 안의 모든 계시는 하늘과 땅의 문제다. 이 문제는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의 문제다. 장로교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다. 그에 비해 바르트는 인간의 이성을 거의 절대시하고 있다. 창조 주권으로 볼 때는 인간의 이성은 인간에게 부수적으로 주신 것인데 바르트는 인간의 이성으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을 안좋게 말하면 인간 이성이 절대가 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양측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주장하는 칼빈의 경우 성경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든지 모르든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바르트는 우리가 알아야 믿지 모르고 어떻게 믿겠느냐며 맞선다. 하지만 절대주권을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해답이 없으면 답답하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 대로 아무리 뼈대가 잘 짜여져 있어도 살이 없으면 메마르다. 그런데도 무조건 믿으려고 하니까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믿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여건이 되는 것이다.
옛날에 내가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 하고 고민할 때 신학교에 다니던 친구와 밤새 토론한 것이 그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니 나에게 알려달라고 했고 그 친구는 “믿어. 그러면 알게 돼.”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이 사람아, 믿고 싶은데 몰라서 그러네. 좀 가르쳐주게.”라고 하니까 무조건 믿으라고 해서 밤새도록 평행선이 계속 되었다. 바로 그 친구가 나를 불러내서 자기가 다니던 학교에 넣어 주어서 나를 다른 판으로 옮겨 주었던 것이다. 좌우간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후로 판이 바뀌니까 그 문제 보다는 전혀 다른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돈이 없으면 안되는 판에 있다가 학교로 나를 옮겨놓으니까 돈이라는 문제는 어디로 가 버리고 없고 공부라는 문제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더 좋게 되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돈 문제가 없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공부 문제가 등장하니까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거기서 승승장구해서 남보다 좀더 앞서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에 하나님께서 요소요소에 사람을 배치했다가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것은 알고 모르는 문제가 아니라 믿고 못믿는 문제라고 알게 되었다.
그런데 바르트 쪽 말을 들어보면 마치 이성이 절대적인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계시라고 하는 것이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계시가 아니다. 그러면 도로 자유주의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르낙의 제자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자유주의 신학자 밑에 있다가 계시를 너무 무시한다고 해서 계시를 중시하려고 돌아선 사람이 바르트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계시 신학이라고 한다는데 실제로 보니까 이성이 중심이지 계시가 중심이 아니다. 여기서 둘이 대립이 되는 것 같다. 칼빈주의 입장에서 보면 물타기고 바르트의 입장에서 보면 칼빈주의는 맹목적이다. 그래서 맹목적으로 쌓고 있는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평행선이 해결되기가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우리 교회가 당면한 문제도 그런 문제다. 막상 당면해 보니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결국 하늘과 땅, 하나님과 사람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절대주권 하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문제다.
창세기 2장에 가면 “땅은 경작할 사람이 없어서 안개만 가득했다.”고 했고 1장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대해 워치만 니는 사탄이 개입해서 방해한 것이라고, 방해자가 들어온 것이라고 해석한다. 방해자가 있는 한 하나님의 일은 계속 방해를 받아왔다. 그 뒤로 보면 하나님이 무엇을 해 놓으시면 방해가 있고 또 무엇을 해 놓으시면 또 방해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바벨론으로 갔다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저항을 하기 위해서 성을 쌓고 이름을 빛내려고 하다가 마지막에 흩어졌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역사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믿어왔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역사다.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 했고 누가복음에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사실은 헬리의 딸인 마리아가 낳은 아들이라 했는데 그 족보가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 마태는 그들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고 누가는 그들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 이것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고 큰 벽이 되고 있다.
마리아가 처녀로 잉태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런 모든 갈등이 어디 있든지 갈등은 계속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알아진 것은 처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녀냐 아니냐, 이것을 모르지만 어찌할 수 없어서 놔두었던 문제인데 알고보니 처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뱀은 여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사람이 어떤 여자이든지 그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할 자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때 중요한 인물이 하나 빠져있다. 그가 모세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너무나 중요한 존재다.
모세는 무덤이 없고 시체가 없다. 똑같이 예수는 신약시대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모세도 하나님을 대신했고 예수도 하나님을 대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 역시 무덤도 없고 시체가 없다. 이것이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 둘을 어떻게 하면 하나로 합할 수 있는가? 이런 번민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이것이 우주적인 번민인 것 같다.
예수는 살아계실 때 분명하게 자기를 내놓고 말씀하셨겠지만 듣는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다.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보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 어떤 경우에는 그냥 사람을 위로하는 분으로 나타났고, 어떤 때는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셨고, 어떤 때는 우리가 모르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구약성서를 읽을 때까지는 분명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모세, 다윗까지는 분명했다. 그런데 예수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예수를 만난 후로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가자. 내가 어떻게 다 알겠는가.’ 하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신화라는 문제가 나오니까 ‘내가 그러면 신화를 잡고 있었다는 말인가?’ 하는 긴박한 문제가 나에게 부딪쳤다.
나는 예수를 안다고 생각했다. 남에게 말하면서 나는 예수를 안다고 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4대째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를 우연히 광양에서 만났다. 그가 나에게 “이 목사님은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라고 묻기에 “예수 아는 것이 좀 다르지요.”라고 대답했더니 “예수 아는 것이 달라요?”라고 재차 물었다. “그렇지요. 예수 아는 것이 좀 다르지요.”라고 대답했더니 속으로 비웃는 것 같았다. 예수는 다 아는데 당신 혼자 예수를 잘 안다고 하느냐는 태도였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하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이 없고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것이 미국 문화다.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대강 아는 것이다. 그런데 안다 했던 나도 구체적으로 따지면 예수가 누구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하자. 내가 어떻게 그분을 다 알겠는가.’ 하고 지나갔는데 이 신화 문제가 부딪치니까 정신이 바짝 들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이 나온 배경이 신화론이다. 그는 신약성서학자니까 만일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예수가 신화라면 그가 연구한 것이 허당이 되니까 그것을 역사 비평을 통해서 철저히 까발려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딱 이렇다 하고 말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예수를 실존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어떤 논문에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만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내 생각에 잡혔다. 물론 나도 신약성서 안에서 예수를 알아보려고도 했지만 다 애매모호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경험과 같은 경험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애매한 것을 가지고서 안다고 하기 어려웠다. 부활도 그렇고 함께 죽었다는 것도 그렇고 다 애매모호했다. 예수님도 사실은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해석한 셈이다. 구체적으로 따지면 애매모호했다. 그래서 확실한 것을 찾아보자고 하다 보니까 십자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알아진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분이라는 것이고, 하지만 군중들이 하나님 아들이냐고 아우성을 치니까 아무 말도 못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율배반이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셨다. 옛날에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가.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하셨으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가! 예수외에는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다.’ 이렇게 해석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과 나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나는 무슨 일을 당했다 해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할 자격이 없다. 그러니 이 사람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이 말이 그렇게 안들리고 ‘야, 진짜 사람이네.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고 신비롭게 생각하는데 막판에 보니 진짜 사람이네.’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만날만한 예수를 만났다고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들에게서 그렇게 반응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야, 그럴 수는 없는데…….’ 하고 찾다 보니까 끝장을 보게 되었다. 마지막에 가 보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거기서 보니 그냥 끝장이었다.
처음에 그렇게 보았던 것이 아니다. 너무나 내게 안식을 주는 분을 만났다. 나도 끝장인 판, 끝판에서 왔는데 ‘나보다 훨씬 더 끝판인 사람이 있구나.’라고 아니까 나에게 크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병들어 보니 나만 병이 들어 있고 다른 사람은 다 멀쩡했다. 더구나 결핵이라는 병에 걸렸으니까 다 멀쩡한데 나만 결핵환자였다. 그래서 외롭고 쓸쓸했다. 아무도 안왔으면 차라리 좋겠는데 누가 병문안을 와도 괴로웠다. 그러다 병원에 입원해서 옆에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 누워 있으니까 괴로움이 없어져 버렸다. 이것이 동병상련이 아니겠는가.
그와 같이 내가 밑창인 줄 알았더니 나보다 훨씬 밑창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편했다. 편하고 안식이 되고, 그래서 나는 좋다고 선전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승 형제가 하는 말이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뎁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나에게 맨 먼저 한 사람이 재승 형제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야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서 이렇게 망설이고 있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저렇게 죽도록 싫다는데, 아무리 말해 보아도 꿈쩍도 안하고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나.’ 고민이다. 그래서 지난 번에 예수의 실체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실체 복음이 나오게 되었다.
지금 내 마음은 내가 없을 때라도 예수를 보는 사람들의 눈이 다 같도록 해 놓고 죽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50년 동안 대구교회에서 해 왔던 말은 나밖에 못한다. 나와 똑같이 안다 해도 말하고 나면 달라진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서 증거된 것이니까 달라진다. 신약성서를 보니 그렇다. 같은 예수를 만났어도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이 다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없으면 꼭 나와 같이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마지막 만난 예수는 누가 말해도 같은 사람이다. 그러면 객관화가 가능하다. 누가 말해도, 누가 보아도 똑같으면 객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것을 어찌하든지 완전히 까발려서 모든 사람이 다 알게 하고 싶다. 이것이 나에게 남은 과제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기능하다. MZ세대에서는 나 없어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 문제 때문에 대구와 서울에서 약간의 불협화음이 생기고 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을 모르고 어떻게 예수를 안다고 할 수 있느냐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러면 나는 어쩌라는 말이냐?”고 한다. 그래서 서울 교회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대구에도 물론이다.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완전히 객관화해서 누구라도 보면 똑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똑같은 사실을 놓고 말하면 말은 조금 틀어진다 해도 백년 후에 봐도 똑같고 천년 후에 봐도 똑같지 않겠는가. 그러나 바울의 증거나 베드로의 증거를 본 사람들은 바울과 베드로가 없을 때는 달라져 버렸다. 지금 기독교 상황이 그런 상황이다.
이 복음은 객관화될 수 있는 복음이다. 발견을 누가 했든지 간에 객관화될 수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지만 이제는 콜럼버스가 없어도 누구든지 아메리카 대륙에 갈 수 있다. 콜럼버스는 발견한 사람에 불과하다. 콜럼버스에 감사하고 사는 아메리카 사람은 별로 없다. 대륙이 있으니까 누구나 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복음도 그렇게 되어야겠다는 소원이 있다.
하나님과 사람의 갈등이 있지만 사람이 만일 이성이 없다면, 이성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갈등하고 말 것도 없다. 주는 대로 먹으면 되고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 그런데 이성이 있으니까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이성 중심의 세계를 겪고 보니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데 가 보면 벽은 높지만 가능성이 있는데 이성이 절대화되면 가능성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물타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술인지 물인지 잘 구별이 안되는 것이다.
물타기 할수록 사람은 많아진다. 25도짜리 소주를 15도로 도수를 내리면 사람들이 술을 안먹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반대로 너무나 많은 인구가 술을 즐기고 있다. 술 먹는 여자들이 너무 많아져서 포도주 대신 소주를 마신다. 그래서 금복주 회사는 오히려 몇배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문제는 먹어도 별로 안취한다는 것이다. 술 마시는 효과가 별로 없는 셈이다. 노닥거리면서 먹고 노는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술을 먹는 근본적인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물타기 했다가 돈벌이를 더 많이 하고 있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것인데 술로서의 가치는 없어져 버렸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취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완전히 그 안에 빠지고 싶고 그와 하나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하나 되려면 이 자리 외에는 없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완전하게 하나님을 대신했던 두 사람은 무덤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체가 없다는 것이다. 완전하게 하나님을 대신했던 모세와 예수, 이 두 사람은 무덤이 없고 시체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지어놓으시고 좋다 하셨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라고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어놓으시고 좋다 하셨으니까 뭔가 있지 않겠는가. 특별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그 사람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람을 알려고 보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보시고 좋다 하셨다는데 내가 보면 없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은 전적으로 다르다.” 하셨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전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이것을 무시하고 그냥 생각을 갖게 해 보려고 하면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밖에는 길이 없다. 길이 예수 밖에는 없다. 좋든지 싫든지 예수밖에는 없다.” 좋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내 운명인데 어쩌겠는가.
이렇게 지금 말하는데 이것이 어거지로 들리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내 운명이니까 할 수 없구나’, 이렇게 들리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강요로 들리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굉장히 어렵다.
그러나 이 길은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해진 길이고 우리 인간의 운명이니까 누구도 막지 못한다.
내가 대구에서 뜻밖에 만난 사람들이 MZ세대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불거져 나와서 지금 막 새 판을 만들고 다닌다.
어떤 사람들은 MZ세대가 위아래도 없다며 건방지다고 한다. 나에게는 그렇게 안보인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좋다 하던 세계에서 입도 뻥끗 못할 사람들이다. 그 세계에 자기 자신을 내놓을 수 없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판을 만나니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막겠는가, 살판을 만났는데 무슨 수로 막겠는가!
MZ세대는 밀레니얼 제로라고 그들 속에서 나온 말이 “우리는 세대도 없고 역사도 아무것도 없다. 오늘뿐이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어제가 무슨 소용이 있고 내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오늘이다. 오늘.”
나는 전에 늘 그렇게 말했다. “어제는 가 버렸고 내일은 올지 안올지 모른다. 그러니 오늘밖에는 나에게 날이 없다.”고 했는데, 이들은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이 말을 넉넉하게 하고 있다. 나는 살아보고 하는데 이들은 살아보지도 않고 그 말을 넉넉하고 하고 있다. 그래서 ‘참 이상하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더니 정말 그렇구나.’라고 알았다.
먼저 왔다고 더 잘된 것도 아니고 늦게 왔다고 못된 것도 아니다. 결론에 와 보니 다 같지 않은가. 우리가 이르러야 할 곳이 바로 이곳 아닌가!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오늘만 있는, 하나님과 나만 있는 그 세계가 우리가 이르러야 할 곳이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고 함께 삽시다.” 하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즐거워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간 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는데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말은 “네 속에는 이런 것이 없다.”는 뜻이다. 사람 속에는 그런 것이 없다. 역사가 반드시 있다. 모세도 있고 엘라야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역사가 없다.
지금 태어난 사람들, 지금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다. 예수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는가. 전엣 것을 생각했다면 그런 담대한 말을 못한다. 오늘만 있으니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겠는가.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오늘뿐이니 그 말을 하셨지 내일을 생각하면 못한다. 옛날 일을 생각해도 말 못한다. 지금뿐이니까 하신 것이다.
인생은 지금뿐이다. 그런데 그 지금이 너무나 소중하고 귀중하다. 하루가 너무 귀중하다. 오늘이 너무 중요하다. 내가 오늘 아침에 눈을 떴다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그러니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 어찌 이리 딱딱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확실하게 맞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예가 된다고 하였다. 아무리 많을지라도 하나도 약속이 예가 안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아도 안될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문제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우리는 아멘이 안되었던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멘이 안되었다. 아멘이 안되니까, 예가 안되니까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가 되면 문제가 없다. 예가 되면 우리는 아멘하고 찬송할 일밖에 없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그리스도가 예 할 때 우리도 아멘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데 이것이 아주 쉽고도 어려운 일이고 어렵고도 쉬운 일이다.
우리가 그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것이 아무리 해도 아멘이 안된다. 어떤 것은 되는데 어떤 것은 안된다. 그러니까 감사를 해도 온전한 감사가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끝장난 예수와 연합이 될 때는 어느 것이라도 아멘이 안될 것이 없다. 안될 일 자체가 없다. 원리적으로, 근원적으로 없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만사해결이다.
영어성경을 보니 ‘no matter’라고 했다.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For no matter how many promises God has made, they are ‘Yes’ in Christ. And so through him the "Amen" is spoken by us to the glory of God.”
우리가 걸어가는 길, 성경 안에 제시된 길들이 옛날에는 애매모호했는데 지금 보면 너무나 명백하고 확실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볼 때 완전히 예다. 그분에게는 예밖에 없다. 아니라 함이 없다. 우리 인생도 예만 있고 아니라 함이 없으면 그것이 완전한 행복 아니겠는가.
교회에서 맨날 설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예를 하라는 것이다. 아멘하라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신자들의 아멘 소리가 크면 클수록 좋아한다. 기껏 말했는데 아멘이 안나오면 김빠지지 않겠는가. 어떤 목사는 목숨을 걸고 설교하는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이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연세중앙교회 목사는 설교할 때 보니 죽을 힘을 다해서 한다. 그래서인지 교인들이 무지무지 많다. 너무 힘을 써서 말하니까 '저러다 쓰러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있지도 않고 계속 걸어다니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오늘 하루만 살겠다는 생각으로 한다. 그러나 그렇게 힘쓴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까 우리가 아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멘하는 것이 즐거운 세상에 왔다.
왜 아멘이 안되는가? 뭔가 안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라도 안되는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도 어떤 말씀은 아멘이 되는데 어떤 말씀은 아멘이 안된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비극인가.
그런데 이것도 생명 안에서는 복이 되기도 한다. 내가 워치만 니를 만날 때도 아멘이 안되어서 만났던 것이다. 내가 아니라 들은 사람들이 아무도 아멘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충주에 갔을 때 나는 열심히 연구하고 기도하고 해서 학생들에게 말씀을 했는데 도대체 아멘이 없었다.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 응답이 없었다.
이것이 충주 사람들의 독특한 기질이다. 전혀 표정이 없고 화답이 없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 들어가도 주인은 손님을 안보고 먼 산을 보고 있다. 주인이 보고 인사하고 해야 되는데 전혀 모른체 하고 있다가 손님이 물건을 다 골라 놓으면 그때야 물건값을 말한다. 아주 기질이 특이하다. 그리고 외상을 가져가면 언제 갚을지 모른다고 한다. 그래도 갚기는 꼭 갚는다고 한다. 그런 곳에 가서 내가 처음 말씀을 전한다고 했던 것이다. 너무나 반응이 없어서 '왜 이렇게 반응이 없을까.' 하다가 내가 워치만 니를 만난 것이다.
생명 앞에는 부정적인 것이 올수록 더욱 확실해진다. 우리교회에서 나에게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면 있는 것만큼 나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론 같으면 내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이것은 반론이 오면 들어오는 것만큼 더욱 확실해진다. 신기한 일이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린다.”라고 했듯이 찔리면 찔릴수록 향기가 더 난다.
신기하다. 어찌해서 문제가 생기면 생기는 것만큼 나는 더 밝아지는가. 심지어는 교회가 분열까지 되었어도 나는 밝아졌다. 그러니 내가 밝아지면 결국 사람들이 밝아지지 않겠는가. 이렇게 기대를 하고 있다. 안돼도 할 수 없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문제는 간단하다. 하나님과 사람, 하늘과 땅의 관계다. 우리는 창세기 때 하나님이 나를 주권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모르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근거가 없으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 안에서는 내 본적지가 확실해진다. 이것이 내 본적지다. 여기가 내 모태다. 창세기 1장 때 애매했던 것이 지금은 애매하지 않고 아주 명백해졌다.
시골에서 떠나오면서 본적을 옮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어디 가서 살지 모르니까 옮길 수 없었다. 그러다가 병역 문제 때문에 할 수 없이 서울로 옮겼다. 충주에서도 그렇고 대구에 와서도 계속 이사를 해야 되니까 못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등기를 했던 집이 있다. 그곳이 내 본적지가 되었다.
본적지는 확실해야 한다. 우리 본적지가 어딘가.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 이것만으로는 애매하다.
‘예수 안에서 내가 시작되는구나. 여기가 내 본적지구나.’ 이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누가 물어도 명백하다. 내 원적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하였다. 우리의 근원은 예수라는 말이다. 우리의 근본은 예수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지만 우리의 본적지는 예수라는 것이다.
이 말이 쉬운 말이 아니다. 언제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가도 모르고, 또 내가 가만히 있는데 예수가 내 의로움과 구속함과 거룩함이 된다니 이것도 우리가 모르는 일이다. 전혀 내 노력과는 관계없고 내 생각과도 관계없는 것이다. 복음은 이런 것이다. 나로서는 관계가 전혀 없는, 어쩌면 전혀 불가능한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이 복음 아니겠는가.
내가 조금이라도 노력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노력하면 된다. 우리가 노력하면 되는 것이라면 복음이 필요 없다. 공부하는 것이 복음이겠는가. 공부는 내가 하기 달린 것이지 복음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믿음을 받아서 믿는다면 쉽지만 그렇지 않고 믿으려고만 애쓴다면 복음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내 뿌리를 두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명백해지고 확실해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것도 명백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지 않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도 명백해진다. 예수에게서만 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다 예가 된다. 예가 안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엊저녁에 자다가 '아! 예수 안에서 예가 되는구나. 우리가 아멘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리겠는가. 전에 우리는 영광 돌릴 일을 많이 찾았지만 그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멘하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아멘해야 그 다음에 뭐가 시작되지 아멘하지 않고 한 일은 잘 안되고 된다 해도 엉성하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는 것이 구원이다. 보면 그냥 내가 거기 있다. 남이 아니고 나다. MZ세대 젊은이들을 보니까 내가 거기 있다. 그들과 내가 남남이 아니다. 내가 그 안에 있다. 나는 원래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소유 때문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소유가 없어지고 나니까 원래의 내가, 나 자신이 발견된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그 젊은이들 안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안다는 것은 성경만 더 안다는 것뿐이지 새로운 것이 없다. 무슨 질문을 하면 내가 대답하기 난처할 때가 있다. 더 잘 알면서 질문을 하니까 내가 대답을 해 놓으면 맞을까 틀릴까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정말 신기하다.
구자길 형제는 말도 어둔하고 잘 모른다. 그런데 거기 가서 사람이 살아난다. 나는 말을 명백히 한다고 하는데도 나에게 와서는 안되고 거기 가서는 쉽게 사람이 바뀐다. 이것이 놀라운 일 아닌가.
이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기를 원한다. 이것도 내 소원이라기 보다 하나님 소원이 더 크지 않겠는가. 나야 이래도 그만이고 저래도 그만이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깊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신 것이 먼저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셨다.
그런데 결국 가인과 아벨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왔다. 제물로 자기 얼굴을 가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제물이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자기 얼굴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나타나니까 성소의 휘장이 활짝 열렸던 것이다.
이 세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고 백일하에 드러났다. 너무 명백하니까 연구하고 말것도 없다. 애매해던 성경이 너무나 명백해진다. 성경이 그냥 써진 책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영감을 받아 썼다더니 정말 그냥 써진 책이 아니다. 왜 애매했던가? 쓴 사람은 그래도 무엇을 보았으니까 썼을 텐데 우리는 못보았으니까 애매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금강산에 갔다 와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데 내가 못보았으니까 한번 들으면 그만이었고 애매모호했다. 그런데도 본 사람은 신이 나서 말한다. 그런데도 듣는 사람은 별로 신이 나지 않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가서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다.
예수, 예수! 이 사람이 하늘과 땅, 하나님과 사람을 완전히 중보하는 사람이다. 이제 그 안에서는 갈등을 가질 필요가 없다. 보수냐 진보냐, 이성이냐 계시냐 할 것도 없다.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언제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생명이 교회를 장악하고 통일하는 날이 와야 할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할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내 옹고집이라고 하고, 영감 고집이라고 한다. 나는 고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것도 계속 주장을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것만은 어쩔 수 없다. 끝없이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