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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가면무도회를 찾아서
1.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는 그 사람 사랑에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못잊어서 우는 그때 그 사람 .......
그때 읍내 삼우문학회 회원들은 정기모임 때면 격렬한 작품 합평회의 열기가 식고 제각기 돌아가며 술이 거나해지면 으례 누군가 그 노랫말을 흥얼흥얼 그리곤 하였다.
70년대 말 시대상과 맞물려 그것은 참으로 적절한 술 안주 감이었고 적절한 패러디 였다.
그러나 그속에서 내가 또 한사람의 피해자란 엄연한 사실을 인지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문학회의 꽃이었던 두 젊은 여자 하귀숙과 홍성란이 있었다. 그녀들은 나와 나이가 엇비슷한 연배 였다.
두사람은 친구였으며 모임때면 으례 같이 나타났다. 실과 바늘과 같은 관계여서 짖굿은 사람들은 그 시대 사건을 비유해서 놀리곤 하였다.
이를테면 이런식이었다.
술에 취해 끄덕끄덕 졸던 한 회원이 고개를 퍼뜩 들고 주변을 둘러 보다가 농담을 건넨다.
"홍양, 하귀숙씨 어디 갔어? 왜 혼자야?"
"아까 얘기 하고 갔잖아요. 어머, 졸다가 못 들었나 봐요."
이때 다른 남자 회원이 끼어 들게 마련.
"그게 아니고 모처에 은밀하게 조사를 받기 위해 합수부에 출두 하였소. 헛허허"
"아하. 그러니까 궁정동의 두 여인. 흐흐, 그 말 되네. 말이 돼."
그런데 나는 그럴때면 심사가 편치 않았다. 공연이 속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솟아 났다.
변기에다가 목을 꺾고 웩웩 구역질을 하곤 먹었던 음식을 토하였다.
한바탕 쓴 위액까지 올린 나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힌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참담해 하였다.
정말, 지독하군. 이젠 정말 끝났나 싶어,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망령이 다시 쫒아 다니는 느낌이야.
내가 진짜 나의 출생의 비밀을 내가 밝혀 낼 수 있을까. 그걸 밝혀 내지 못한다면 아주 미스테리로 끝나고 말 확률이 크다. 어머니는 절대 그 부분에 대해선 철저한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아마 누군가에게 단단히 쇄놰 교육을 받은 모양이다.
내가 담배 연기와 시끌벅적한 그 방으로 다시 돌아왔을때 홍성란이 말했다.
"문오씨가 전 안나타나길레 가버린 줄 알았잖아요."
"그러잖아도 가버릴까 하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왜요? 문오씨는 그럴 사람이 아닌걸로 아는 데. 끝까지 자리 지키고 있잖아요. 이젠 매번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좀 멍청 해서 그렇겠죠. 아니면 좀 모자라거나"
"왜 자신을 그렇게 비하 하세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결핵으로 정양을 핑계로 집안에서 빈둥대며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해 나가자 어느날 안방 화장대 앞에서 하얀 속치마 바람으로 앉아 화장을 하고 있다가 어머니는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였다.
"나는 니놈의 새끼가, 글을 쓸줄 알았다. 하긴 그 피가 어디 갈려구 츳츳."
"그러면 그 사람은 데체 누구에요? 가르켜 주세요?저도 이제 머리가 굵었다구요. 당연히 알 권리도 있고요."
어머니는 피워물었던 담배 연기를 허공에 훅 뿌리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미친새끼. 뉘 애빈 죽었다. 육이오때 전선에서 싸우다 죽었어."
"그런데 세간에 나를 두고 들려오던 지난 소문의 진위는 뭐죠? 그건 아버지가 어딘가 살아 있다는 게 아닌가요?"
"그건 그냥 루머일 뿐이야. 괜한 소문에 현혹 될 필요는 없어. 몸에 좋은 약은 쓴법. 괜한 생각 하지마라."
어머니는 왜 그 의혹에 대해서 완강하게 빗장을 걸어 잠궈야만 했을까. 나는 문득 저주 받은 영혼을 갖고 태어난 천형의 죄인인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스스로 비하 하고 학대 하였다. 따지고 보면 나는 한낱 기생의 몸에서 그것도 정식으로 태어난게 아니라 모종의 불장난에서 태어난 것이다. 성스러운 관계라기 보다 그저 쾌락의 씨앗에 다름아니라는 선입견에 나는 괴로워 하였다.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억눌린 감정이 풀어보고자 자신을 그토록 학대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2,
낯선 사내가 우리집에 나타난것은 해가 성큼 기울어 그 열기가 한풀 꺾일때 였다.
그 날도 나는 바닷가에서 내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면 으례 그러하듯 나는 방안에 누워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고 한참동안 죽은듯이 앉아 있었다.
나는 여전이 우울하고 침울 하였다. 그렇게 석불처럼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상체를 바닥에 붙이고 큰댓자로 뻗어 버린다. 온 몸이 꿈을 꾸는듯 나른하고 몸에서 미열이 나고 서너번 기침이 쿨럭쿨럭 터져 나왔다.
종합병원에서 의사로부터 결핵이란 진단을 받은지 1년 남짓 되었지만 크게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지럽고 현기증까지 동반하자 어느날 어머니와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이 나를 다리 밑으로 끌고 가더니 개를 잡아 고기를 나에게 먹기를 강요 하였다.
내가 비위가 상해 쭈볏거리자 외삼촌은 벌컥 성질을 내며 윽박질렀다.
"먹으렴 . 결핵에는 이 이상 좋은 보신은 없다. "
"도저히 못먹겠어요. 외삼촌."
"살려면 먹어. 너는 몸이 허해서 식은 땀을 흘리는거야. 살려면 이를 악물고 먹어야 한다. 내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그러나 나는 몇 점 먹고 비위가 상해 도저히 못먹고 뒤로 물러 났다. 그래, 그건 차라리 고문이었으니까.
그 한낮의 끈적끈적한 미열에 나는 정말 불쾌하였고 그럴때면 나는 두 눈을 꽉 감고 한없이 깊은 늪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늪은 끝은 허무 였다.
그 시간대가 대개 그렇듯이 유난이 세상이 정지된것처럼 유난이 적막하여 나는 그런 번뇌와 망상의 허울속을 헤메다가 낮잠에 빠져 들거나 허무의 한 자락을 움켜지고 눈물을 글썽거리게 마련 이었다.
격자 문양의 창호지 위로 햇살이 환하게 비쳐 들어 왔고 마당에는 암탉이 막 알을 낳았는지 날개를 퍼득이며 횃대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날달걀은 나의 차지 였다.
그건 유일한 영양의 공급처 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왠지 몸이 자꾸 아래로 가라앉고 만사가 귀찮아 졌고 나는 오후의 나른한 권태와 무료함에 젖어 들었다.
방바닥에는 주머니에서 흘러 나온 모래가 서걱거렸다.
방안에 들어 오기 전 아무리 주머니를 까뒤집고 털어내도 모래는 널려 있기 일쑤 였다.
보드랍고 작은 모래는 채로 그른듯이 아주 보드랍고 미세 하였다.
갑자기 손발이 차가와지며 감기몸살이 날려는지 재채기가 나고 몸이 안으로 움츠려 들었다.
이럴때면 나는 건들면 보호색을 뛰며 변하는 무당벌레처럼 으례 가만이 축 늘어 진다. 그러면 흐름이 정지된 것같이 집안의 정적도 더 과장되고 확대 되었고 그것이 마치 나에게 육박해 오는 느낌이 들었었다.
봄이라고는 하나 여전이 냉랭한 기온은 날이 서 있었다.
그날도 그렇게 습관적으로 헛된 생각에 빠져 방안에서 막 졸음에 빠져 들려는 순간이었다.
마당에 자전거 급부레이크 밟는 소리가 끼이익, 하고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가 우편배달부의 편지왔음을 알리는 소리쯤으로 알았다. 나는 외로워 전국의 익명의 소녀들과 많은 편지를 나누고 있었다.
편지를 씀으로서 나의 고독과 외로움의 무게는 조금씩 조금씩 헐리어 가는 느낌을 받곤 하였다.
내가 편지를 보내면 그쪽에서는 어김없이 답장이 날아와 나는 그런저런 낙에 사는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춘천에서 전라도 영광에서 포항에서 편지는 날개를 달고 날아 왔다.
내가 몸을 일으켜 왈칵 방문을 열고 툇마루에 나갔을때 마땅이 있어야 할 우편배달부 대신 마당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자전거 안장에서 막 내려 섰다.
나는 처음에는 그가 동네 누굴 찿고 있는 외지인 정도로 착각 하였다.
우리동네의 길이란게 하도 지랄같아, 잘못 들어가면 뒤란으로 연결 되고 집안으로 돌아 모서리에 꺾어 들면 묘하게 막다른 길이어서 다시 돌아 나와야 하고 어쨋든 외지 사람들은 한두번 당하기 마련이었다.
그들에게 길은 숨은그림찾기의 미로나 마찬가지 였다.
나는 등산복 차림의 사내를 홀깃 쳐다보았다. 검은 뿔테 안경에 등에는 색을 매고 있었다.
사내가 물었다.
"혹시 강문호씨 아닌지요?"
"네. 그런데요. 무슨 일때문에 ....."
"아, 바로 찾았군요. 사실 좀 헤맸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름을 대니까 처음엔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강씨라면 이 집 뿐이라면서 가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무작정 왔지요."
사실 나는 좀 계면쩍었다. 내 이름은 가명이었으니까. 본명은 강진태 였다.
소녀들과 편지를 하자면 뭔가 촌닭같은 본명 보다는 그래도 그럴듯한 이름으로 환상을 심어 놓는게 필요할수도 있겠다, 싶어서 였다.
그래서 나는 가명을 써고 있었다.
사내가 다시 말하였다.
"읍내 문학회에서 나왔습니다. "
"아,그렇다면 삼우 문학회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전 읍내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키고 있는 김송규라고 합니다. "
김선생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그 손은 작고 보드랍고 따뜻하였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길을 오셨군요?"
"회장님께서 영산리에 있는 분이 있는데 모임에 한번도 나오고 있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번 찾아 왔습니다."
"우선 툇마루에 앉아 땀좀 식히시죠?"
"네."
나는 바가지에 펌프질 해서 찬 수돋물을 받아 김선생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김선생은 갈증을 느꼈는지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맻힌 땀을 닦았다.
그래도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 왔는데 그냥 있을수 없어 나는 점포에 가 막걸리를 받아 왔다.
대충 상을 봐 우리는 나의 골방에 마주 앉았다.
"소설을 쓰신다면서요? "
"네. 쓰고 있긴 하지만 ,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릅니다. 그냥..."
"저도 소설에 관심이 많습니다. 시를 쓰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회원들은 주로 시입니까 소설쪽입니까?"
"그의가 시 쪽이지요. 소설은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한 주전자의 가득한 막걸리가 바닥 나자 우린 일어나 동네 뒤 개목과 앞 바닷가에 나갔다.
바다는 오전에 보던 것과는 또 달랐다.
마을 아낙네들이 소쿠리를 옆구리에 끼고 첨벙첨벙 발을 물에 담그고 갯바위에서 진드 바리를 뜯고 있었다.
이른 봄이면 갯바위에는 파아란 이끼 모양의 진드바리가 돋아 났는데 그걸 뜯어 얘들 공부를 시키고 생계에 톡톡이 보태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소쿠리에 한가득 담아 와 짚으로 만든 발에다가 햇볕에 잘 말려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그런데 김과는 좀 억센편이었다.
바다 지척에서 빤이 보이는 곳에서 봄 미역 역을 체취하는라 땟목이 떠 있었다. 어부는 나무로 통발처럼 만든 사각형의 물안경을 물에 담궈 바닷속을 이리저리 비춰 보며 가끔 긴 장대 끝에 매단 낫으로 깊은 바다속에 너울거리는 미역을 잘라 올려 땟목에 쌓았다.
바다는 잔잔 하였고 햇가 설핏 기운 탓인지 그림자가 백사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김송규 선생이 돌아가면서 꼭 다음 모임에는 한 번 뵙게 되기를 당부 하였고 타고 왔던 자전거로 그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다시 돌아갔다.
나는 동구밖까지 배웅하며 그가 한 점에서 저 멀리 신작로에 사라질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다.
3,
내가 삼우문학회 첫모임에 나간 것은 그해 가을 정기 모임 때 였다. 그 사이 꽤 여러달이 흘러갔지만 나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어쩐지 그들을 만나고 인사나누고 토론하고 문학이야기를 한다는것이 왠지 마뜩찮고 번거럽게 느껴 지기도 하였고 좀 쑥스럽게 생각 되기도 하였다.
나는 태생적으로 낯을 가리는 편이고 성격이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놓을 만큼 사교적인 편이 못되었다.
11월 모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참여 했으면 한다는 당부의 편지가 전해져 와 나는 고민이 되었다. 문득 나는 라디오를 통해 문학회 회원을 모집 하던 때가 생각 났다. 지난해 봄 나는 그날도 바닷가에서 막 돌아와 뉴스를 듣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그런데 뉴스를 시작하기전 지역 아나운서에 의해 공지사항이 전해지고 있었다. 읍네 삼우문학회에서 신입회원을 모집 한다는 방송 안내 였다. 나는 문득 그 방송을 무심코 듣다가 귀를 쫑긋 하였다. 나는 하하하, 하고 갑자기 웃었다.
육군 지원병이나 학원생을 모집 한다면 그냥 넘기겠는 데 왠 문학회 회원이냐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호기심이 동하였다. 사실 나는 이미 작가 지망생으로 그 길을 이미 걷고 있는 처지 였기 때문이다.
나는 촛불을 켜놓고 대학노트에다가 습작을 하고 책을 읽었다.
나는 처음엔 좀 장난 삼아 야간학교 교장으로 있다는 회장이란 분 한데 편지를 써서 보냈다
. 영산리에 살고 있고 장차 문학을 해보고자 하는 데 그곳에 가입하려면 어떤 자격 요건을 갖춰야 하는 지 하는 질의와 나에대한 상세한 소개를 적어서 우편으로 보냈다.
적확히 일주일후에 답장이 왔다.
문학을 하고 있다니 반갑습니다. 본 문학회는 여러 문학회가 갈래로 나눠져 있었는 데 이번에 통합을 해 하나로 새롭게 출발하기에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꼭 참여 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매달 한 번씩 모임이 있으니 그때 참여 하면 됩니다.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뿐 나가지는 않고 있었다. 그편지를 하도 자주 꺼내 읽어 너덜너덜 해 질 지경이에 김송규 선생이 우리집에 왔었던 것이다.
여러모로 그의 방문은 나로서는 어떤 새로운 전환점의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는 꼭 참여 해야만 하는 느낌을 나는 받고 있었다. 망년회를 앞당겨 정기모임과 같이 겸해서 한다고 하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출향 회원들도 그날은 그의 빠짐없이 참여 한다고 하였다.
여전이 나는 책을 읽고 그런 분위기속에 하루하루를 살아 가고 있었다.
골방에는 책이 많았다. 그의가 소설책이었지만 다른 책도 꽤 있었다.
나는 읍내 나가 서점을 순례하며 좀 읽힌다 싶으면 무조건 사오는편이었다. 그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나에겐 사전 정보도 없었다. 그때 제목의 책들은 지금도 선연히 뜨오른다.
이호철의 작품집 '이단자', 정비석의 '소설작법', 오정희의 '불의 강', 김승옥의 '환상수첩',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최창학의 '참을 수 없었던 물음들', 신석상의 작품집 '정들면 고향', 최인호의 작품집 '타인의 방', 한수산의 장편소설 '부초',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목', 선우휘의 '불꽃'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생텍쥐 베리의 어린 왕자 , 주머니속의 꽁트집, 차 한잔의 꽁트집, 차 한잔의 수필, 현대문학 두 권, 문학사상 과월호 한 권 ,소설문학 두 권, 샘터 몇 권 .....
나는 모임에 가기 위해 외출복을 갈아 입고 그날 집을 나왔다. 마을 뒤 강뚝으로 해서 걸어서 천천이 거슬러 올라 갔다. 마읍천에서 발원한 강물을 수량이 풍부해 폭이 넓은 물은 최종적으로 종착지인 저 쪽 바다와 합류 하였다.
강은 건너편 들판이 꺼꾸로 고스란이 비쳐지고 있었다.
흐린 날씨 탓인지 그것은 강물에다가 머리를 쳐박고 마치 머리를 감고 있는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저쪽 들판 끝 산기슭에 하얀 패인트를 칠한 농업고등학교가 보였다. 본관 입구에 수양버드나무가 양쪽에 입을 축축 늘어뜨린채 서있었고 독특한 아치형 창문이 중세시대 성의 창문처럼 보여지고 있었다.
강둑은 면에 까지 길게 휘여져 이어져 있었고 나는 그 길로 줄곧 걸었다.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자 다시 둑이 나타났고 불과 지척에 정류장이 보였다. 왼쪽 저 끝에는 미류나무의 가로수가 줄줄이 늘어 서 있고 멀리 차량이 이쪽으로 오는지 마치 물방개처럼 맨땅의 꽁무니에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버스 였다. 그것은 미로같은 신작로를 이리저리 휘돌고 산모퉁이에 가려졌다가 어느 순간 불쑥 인근 마을 앞에 성큼 나타났다.
정류장 매표원은 표를 끊어 주기 위해 바쁘게 쫓아 다녔고 외출을 하려는 사람과 수업을 끝내고 통학하는 학생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읍내 내려 회원들이 모이기로 했다는 다방에 곧장 들어가지 않고 어시장 술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나는 뭔가 취하고 싶었다.
그래야, 모임에도 나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주인공은 부끄러움을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 하였지만 나는 쑥스러워서 마셨다. 그저 왠지 어색하고 쑥스럽고 쑥스럽워 일단 취하고 싶어 하였다.
어시장에는 칸칸마다 포장집으로 나눠져 술을 팔거나 해장국을 팔고 있었다.
나는 기웃거리다가 안으로 들어가 빈자리에 앉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여주인이 솥을 열어젖히자 왈칵 김이 쏱아져 나와 곧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아마 술국을 끓이는 모양이었다.
여인이 나에게 와서 물었다.
"혼자 세요?"
"네."
"뭐 드실라우?"
"소주 하고 간단한 것, 뭐 좀 주세요?"
여인이 술과 안주를 갖다놓자 나는 자작을 해서 거푸 몇 잔 마셨다.
그냥 쑤셔 넣은 탓인지 속이 불이 난것처럼 홧홧 거렸다.
건너편 앞 자리에 세멘트 공장 직원으로 보이는 사내 둘이 술을 마시며 떠 들고 있었다.
회사마크가 새겨진 작업복에 작업모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많이 취해 있었다.
나는 술을 마시며 생각 하였다.
지금 쯤 다방에서 회원들이 만나 다음 장소로 이동 하였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이젠 마음이 좀 바빠 졌다.
나는 술값을 계산을 계산하고 낮술에 적당이 취해 다시 거리로 나왔다.
중앙통 가기 전 삼거리를 지날때 나는 전파사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라디오뉴스를 들었다.
정오뉴스에 박정희를 시해 한 김재규를 내란음모 및 국가 변란기도란 죄명으로 군형무소에 수감 하였다고 했다.
독재 정권 18년의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 김재규에 의해 살해 되고 나라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안개와도 같은 정치적 혼미에 빠져 들고 있었다.
새로 등장한 신군부가 수사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귀와 눈을 어느때보다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뉴스는 어느새 대통령의 최후의 만찬에 초대 된 두 명의 연예인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 누구라는 실체가 불분명하게 밝히지 않은탓에 무성한 소문이 신문이나 티브이 혹은 주간지를 타고 나돌았다.
그러나 소문의 진의는 감추면 감출수록 인간의 궁금증과 호기심은 그에 비례하여 증폭 되게 마련이다.
두 명의 여인이 모처에서 비공개로 다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늘 선글라스로 자신을 감춘 독재자. 자신의 이미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웃지 않는 독재자로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애쓴 박정희.
박정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나는 극심한 심적 혼란을 느꼈었다. 그것은 일종의 공황상태였다.
나는 근처에 이발소가 있었기 때문에 수시로 신문을 접하였다. 신문 1면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의 동정기사를 실었었다. 그의 사진과 함께.
늘 그 사진과 기사를 늘 읽고 보았다.
그는 우리나라의 천황이자 국부라는 사실이 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 되어 있었다.
내가 그를 실제로 마지막으로 본 것은 면에서 방위근무를 할때 였다.
나는 그해 공교롭게도 해안경비 인원 충원이란 묘한 계획에 걸려 현역 판정을 받고도 또래 들과 같이 교육대에서 교육을 받고 지역에 충원 되었다.
그의 해안에 있는 초소에 배치를 받고 근무를 하였다.
나는 면 예비군 중대본부에 근무를 서게 되었다.
면 단위의 예비군 자원을 관리하는 임무 였다. 그런 이게 나의 지난 상처를 건드리고 있었다.
녀석들은 그의 해안에 경비를 서는 데 너는, 어떻게 편하게 그쪽으로 배치를 받았냐는 것이었고 누가 뒤를 봐줬다고 수군수군대기도 하였다. 그래, 어쩌면 그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 하였다. 어머니가 면에 있는 유지들 어느 특정인에게 줄을 댔지 않았나 하는 게 나의 추측이었다.
어머니는 유지들과 무관하지 않은 관계 였기 때문이다. '근화정'이라는 요정에서 지금 마담으로 있는 '다방'이라는 것도 유지중에 한 사람이 차려 주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불문율처럼 절대 입을 벙긋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사람이 요정에 출입하던 건설회사 사장, 부대장, 재재소 사장, 예비군 중대장, 영산리의 소설가 함성욱 등이 관련 되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 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괴소문속에 나의 미스테리인 나의 출생을 여전이 부여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초등학교때 부터 그런저런 소문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을 유폐 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성격이 폐쇄적으로 흘러갔다.
그들중에 누군가가 다방을 차려 주었으면 그만이지 왜 사람들은 그런 사실
을 끊임없이 소문을 퍼뜨리고 유포하고 확대 재생산 하는 지 나는 불만이었다.
당사자가 겪는 심적인 고통을 한 번이라도 느낀다면 과연 그들이 그럴수가 있을까.
그것은 인터넷 악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예민하고 상처 받기 쉬운 아이였기에 그 지난 과거가 고통스러웠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결핵으로 병환 생활을 하자 이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뭔가 해방감을 맛보았다.
그건 이런저런 루머의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 하였다.
어머니도 이제 내가 머리가 굵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젠 모든 것을 나에게 일임 하였다.
그런 필연적인 상처 속에서 성장한 나는 그런것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의 운명처럼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근무 하던 예비군 중대본부는 면 지서 2층 건물을 같이 사용 하고 있었다.
내가 그날도 예비군들에게 훈련 영장을 수령 받느라 골짜기 오지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느라 막 사무실에 도착 해 잠깐 숨을 고르고 있을때 였다.
그때 나는 뒷 계단을 딛고 누군가 쿵쾅거리면서 뛰어 올라오는 구둣발 소리를 들었다. 뭔가 다급한 일이 벌어졌음을 느끼고 나는 긴장 하였다.사무실 쪽문 유리창을 열고 얼굴을 내 밀고 지서 차석이 급히 중대장을 찾고 있었다.
"중대장님 어디 갔어?"
"잠간만요."
나는 내실 문을 와락 열었다.
중대장은 내실 쇠침대 걸터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중대장님 급히 찾는데요?"
"누가?"
"차석님이오."
"엉? 무슨 일이오?"
"치안본부장님이 지금 서에서 찾고 있어요. "
"뭐라구. 지금 와 있단 말이오?"
"그렇소. 빨리 내가 가 보시요."
두 사람이 황급히 우당탕거리며 계단을 굴러 내려 갔다.
박정권 밑에서 치안의 수장을 맡고 있던 손달영이 이곳 면 출신이란 것을 나는 동네 사람들로 부터 듣고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이곳 출신인 예비군 중대장 김형모와 광주 포병학교 동기생이라고 하였다.
손달영이 대통령을 모시고 수행원 자격으로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잠깐 들른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사전 지리 답사 코스차 였다.
삼척에서 울진간 동해안 국도 개통식에 대통령이 참여 하기 위해서 였다.
얼마뒤 곧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지나간다고 학생과 시민들이 연도에 늘어 섰다. 손에는 종이로 만든 만국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나는 그 인파속에서 묻혀 어서 나타나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었다.
이윽고 교통이 전면 통제된 도로에 고요와 적요를 뚫고 흐린 하늘 아래 선발대의 무개차량이 라이트를 켜고 나타나고 있었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과 학생들이 함성을 질렀다. 만국기의 물결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인근 학교 브라스밴드부에서 음악을 쿵작쿵작 음악을 연주 하고 있었다.
라이트를 켠 선두 차량 후미에 박정희 대통령의 리무진이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경호원들이 주변을 에워쌓으며 천천이 달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박정희 대통령이 열린 차창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햇볕에 받지 않아서 그런지 얼굴이 허여멀끔 하였다.
그렇게 환영 나온 인파에 간단하게 답례를 보내고 차량은 다시 속력을 내 다음 목적지인 울진쪽으로 급히 사라졌다.
그 해 가을 그는 시해 사건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4,
나는 2차 모임 장소인 '춘성원' 이란 중국음식점으로 향했다.
아마 그들은 이곳에 한창 모임으로 아직 있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춘성원을 읍내의 번화가인 중앙통에 있었다.
나는 이곳에 책을 사러 여러번 와 본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꽤 여러군데의 책방이 이곳에 있었고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이 쪽에 있는 아카데미극장에서 영화를 보기도 하였다. 대낮에 캄캄한 어둠속에서 영화를 보고 극장 밖으로 걸어 나오면 중앙통의 거리가 여전이 환한 눈부신 햇살 아래 여전이 사람들은 활기차게 오가는 그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 나는 정신이 먹먹해 지곤 하였다.
거리는 후라이팬속의 계란후라이처럼 튀겨지고 부글부글 끓어 넘치고 있었다. 그럴때면 습관처럼 현기증이 밀려 오곤 하였다.
내가 '춘성원'이란 중국집 현관에 들어갔을때 다듬이방 입구에 신발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안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여 현관 밖까지 고스란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나는 문 앞에서 주저하다가 덜컥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와서 꽂혔다.
여자분이 세 분 있었고 나머지는 남자분들이었다.
상위에는 독한 고랑주가 놓여 있었고 안주로 탕수욕이 보였으며 짜장면 장이 묻은 짜장면 빈그릇이 보였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우리집에 왔었던 김송규 선생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잖아도 오늘 온다고 했는데 기다고 있던 참이었수. 잘 오셨수."
나는 좀 어색하기도 하고 쑥스러워 하고 있었다.
김송규 선생이 옆에서 다시 말을 했다.
"인사하시죠? 바로 옆에 앉으신 분이 삼우문학회 회장님 이십니다. "
"안녕하세요.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근데, 왜 늦었수. 술 한 잔 하신것 같수?"
회장은 슬쩍 나를 건네다보며 웃고 있었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에 윤곽이 선명한 모습에 웃음이 맑아 보였다. 뭐랄까, 천연 화확 조미료를 넣지 않은 그런 무공해 웃음이었다.
회장이 다시 나에게 중얼 거렸다.
"영산리 산다면 함성욱씨를 잘 알겠네 . 소설을 쓰는 분인데 그 분이 우리 초창기 동예문학시절 회장이었지"
나는 뭔가 가슴이 서늘한 감정이 나의 명치 끝을 훝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나의 출생에 대해 끝까지 뭔가 나를 쫓아 다니고 있는 불길한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그 망령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도데체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다.
그는 동네 한귀통에 대숲이 우거진 한옥에 살고 있었다.
한동안 나는 나의 생부가 그라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때 그도 면의 유지로 근화정에 출입을 하였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문은 어느 순간 잠수함을 타고 잠잠해 졌다. 그래서 나는 그 근처에도 가지고 않고 있었다.
그가 소설가 였다는것도 회장의 말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회장이 담배를 피워물며 다시 곁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효선 선생과는 같은 종씨네 ..."
"그렇군요."
강효선이란 선생이 웃고 있었다. 하얀 자켓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도 소설을 쓴다고 했던가 그랬다. 옆에 짐가방이 보였다.
그런데 나의 눈은 자꾸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머물러 있었다.
베코를 친듯 짧은 머리칼에 눈매가 날카로운 사람. 아마 머리 형태를 봐서 산에서 도를 닦다가 하산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지 그런 류의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인상을 살아오면서 늘 봐 왔었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까, 나는 묘한 친근감을 느꼈었다.
어린 시절 우리집에도 먹물들인 가사장삼 걸친 중들이 가끔 시주를 나오곤 하였다. 그럴때면 나는 독에 있는 쌀을 퍼다가 바랑에 담아 주곤 하였다. 스님들은 하나같이 우리집 툇마루에 앉아 다리쉼을 하곤 하였는데 나를 보면 으례 나의 관상을 보며 선문답처럼 한마디씩 하였다.
'넌, 천상 중이 될 팔자다. 그래야 너 명을 잇는다.' 어쩌구 저쩌구 그러면서 떠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스님을 따라 동자승으로 절에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끝내 실천은 못했지만. 그게 내 운명이라면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나는 그런 당돌한 생각까지 했으니까.
그날 김송규 선생의 주도로 술판이 끝나고 헤어지기 아쉬었던 회원들은 죽서루로 우루르 몰려갔다. 김송규선생은 술이 취하자 전연 딴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테면 그건 객기 였다. 아니 하나의 광기 였다.
죽서루는 지척에 있었다.
날씨는 잔뜩 흐려 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간간이 바람이 불어 고목에 매달려 있던 마지막 나뭇입들이 거리에 흩날렸다.
죽서루 입구에서 건너편은 출렁다리로 연결 되어 있었다. 말그대로 교각이나 받침대가 없이 철심 로프로 놓아져 있었다. 발을 딛는 널빤지 틈새로 오십천을 검푸른 강물이 보였다. 섬찟 했다. 사람들이 건너가자 다리는 그네를 타듯이 흔들거렸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태연이 그곳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아득한 현기증이나 중간쯤에서 난간 로프를 잡고 한참 서 있었다.
저편에 아래에는 깊은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굽이쳐 흐르다가 꺾이며 휘돌아 오십천 기암절벽을 때리며 바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바위를 푸른 강물에 깊이 담그고 장구한 세월속에 꼿꼿이 서 있는 기암괴석들은 산지사방으로 뻗어 있는 나무 숲과 함께 그 자취들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번듯하게 굵은 기둥을 받치고 의연하게 서 있는 누각.
수백년, 아니 수천년의 고대와 현대가 절묘하게 만나 어우러져 공존 하고 있었다.
수천년 전의 역사는 단지 역사속에서만 존재하는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현대와 같이 버젓이 어께동무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시대에 존재 했던 무수한 인간군상들만 사라졌을 뿐이다.
출렁 다리 아래 질펀한 개울가에 진을 치기 시작하였다. 누군가는 황량한 잡초쪽을 향하여 소변을 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오십천 강물에 물수제비 뜨고 있었고 누군가는 절벽위에 만고풍상에도 절벽위에 고졸하게 서 있는 죽서루 누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송규선생이 마을에 들어가더니 바께스에다가 막걸리를 한가득 들고 나타났고 여자 회원인 성옥경 회원은 이곳저곳 들판 뒤져 피어 있는 잡초와 꽃을 꺾어다가 꽃다발을 만들어 꺿꽃이 작품인양 전시회 놓았다.
그 개천에서 막걸리 파티가 벌어졌고 성옥경 회원이 즉흥시를 지어 낭송하기도 하였고 누군가 바리톤의 굵은 음성으로 '성불사의 밤'이란 가곡을 불렀다.
마지막 죽서루 오십천 절벽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 촬영이 있었다.
그날 나는 너무 취해 집에 나가지 못하고 김송규 선생 하숙집으로 갔다. 그러나 우리는 밤새도록 또 마셨다. 그리고 그는 아침에 그대로 출근 하였고 나는 술이 깨진 않은 채 집으로 나갔다.
5,
그 후 나는 가끔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나는 여전이 나는 일찍 나가서 어시장에서 혼자 술을 한 잔 마셨고 낮술에 취해 거리를 뵈회 하였다.
햇살을 머리위에서 내리 쬐고 있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 대합실에 가서 하릴없이 서성거렸다. 정류장 마당에는 시외버스들이 잠시 멈췄다가 다음 행선지로 다시 출발 하였다. 직행버스 앞면 유리창에는 <대구><포항> <영덕> <강릉> <속초><춘천>이라는 노선 표시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차를 타고 어딘가 낯선 곳을 가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 나는 실천을 못하고 있었다. 광장에는 기름에 잔뜩 찌든 작업복을 입은 정비사들이 근처 커피 배달 가는 레지 아가씨들에게 추파를 보내며 낄낄 거렸고 나는 다시 한참 걸어 콘크리트 다리위에 난간에 서서 오십천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기도 하고 교각 저편에 기차가 철커덕철커덕 그리며 철교를 지나 터널속으로 마치 도마뱀의 꼬리처럼 자취를 감추는 모습도 보았다.
다리를 건너오는 데 난데 없이 어떤 미친여자가 힛히히, 웃으면서 줄곧 나를 따라 오고 있었다. 검정치마가 찢겨져 속살 다 비쳐 보였다. 나는 돌을 던졌고 그래도 여자는 헤픈 웃음을 멈출줄 모르고 줄기차게 나를 쫓아와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외면하고 걸었다.
교복 차림의 공업 전문학교 학생들이 꾸역꾸역 하학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교문을 학교 정문을 나와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실습 기자제를 한 손에 들고 있거나 옆구리에 강의 노트나 책을 끼고 있었고 삼삼오오 떠들며 술집이나 아니면 당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땐 나는 읍내 여고생들의 막 수업을 끝내고 빠져 나오는 그 한가운데 나는 서 있기도 하였다. 힌 카라의 교복을 입은 청순한 여고생 무리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은 묘했다. 우연이긴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난다.
회원들이 직장인들이 많아 그의 저녁 시간에 모임이 이뤄졌다.
나는 회원들의 면면에도 조금씩 낮이 익어 가고 있었고 그가 시를 아니면 소설을 쓴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다.
몇 몇 회원은 회장의 독선적인 운영시스템에 은근이 불만스러워 하기도 하였고 술에 취하면 하귀숙과 홍성란을 궁정동 두 여자 운운하며, 아직 혼미의 안개 정국에 쌓여 있는 한국적 암울한 분위기에 여전이 닿아 있었다. 신군부의 위상이 조금씩 득세 해 가고 있었다.
아마 차기 대권자는 아무개가 될 것이라고 회원들은 떠들고 있었다. 그 아무개는 하나회 소속의 신군부 였고 그 모임의 핵심이었다.
총무였던 홍성란이 동인지 삼우문학 창간호를 낸다고 작품을 내라고 모임때마다 공지를 하였고 나는 조금 흥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작품도 실릴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기대와 흥분말이다.
나는이제부터 뭔가 좀, 써야겠다고 다짐 하였다. 그러나 그건 언제나 생각일뿐 실천을 못하고 있었다. 생각과 실천의 괴리감에 나는 늘 번민 하고 있었고 사실 통 글이 쓰여지지 않아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렵게 글을 끄적거려 작품이 마무리 되면 일단 총무인 홍성란 한데 보냈다. 왠지 매월 합평회도 지지부진 하고 있어 나는 좀 불만 스러웠다.
모임이 끝나면 김선생과 나는 으례 2차로 어시장 근처 술집에 들어갔다. 지난번 죽서루에서 막걸리 파티가 끝나고 김송규 선생 하숙집에서 밤새워 마실때도 그도 곁에 있었다. 그의 이름이 천우학이라던가. 그는 절에 입산 하였다가 어떤 일로 다시 하산 하였다고 하였다. 시를 쓴다고 했다. 그는 향토 시인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그는 나와 김선생에게 물었었다.
" 이성교 시인을 압니까?"
"아, 들어본것 같습니다. 이 지역 호산 월천리 출신인가 그렇지요."
김송규 선생이 대답 하였다.
"맞아요. 그 시인의 아버지가 소장수 였대요. 소를 키워 공부를 시켰다고 소에 관한 시도 썼지요."
" 듣고 보니 재미 있군요. 소가 가족들을 먹여 살린 일등공신이었네요. 허허. "
나는 그가 천우학이란 이름을 갖고 있던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름이 독특 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조금씩 관심이 가지고 있었다. 여전이 눈매가 날카로웠다. 그는 왜 절에서 하산 하였을까. 그에 대한 애기를 그는 아직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저 지금은 시를 쓰고 싶다고 하였다.
가끔 그는 내게 집으로 엽서를 보내 오기도 하였다. 강형, 삼다의 원즉을 갈고 닦아 좋은 글 써자구요. 여전이 글 많이 쓰고 많이 읽고 있겠지요. 오늘따라 영산리 바다가 보고 싶네요,
언젠가 나는 그가 우리집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나는 좀 뭣하지만 집에 있었다. 누군가 마당에서 계십니까, 계십니까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학노트에 여태 습작 하였던 소설을 처음 부터 다시 읽게 되었는 데 이건 숫제 하나의 독립된 형태의 작품이라기 보다 저급한 낙서에 다름아니라는 자괴감과 극심한 회의에 빠져 있었다. 이건 소설이 아닐꺼라는 부정적인 면이 자꾸 확산 되어 갔다.
어쩌면 내겐 재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 왔다. 그건 절망 이었다.
나는 그날 질펀이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서 마당 한귀통이에서 그 노트를 라이터 불을 댕겼다. 그러자 노트는 금방 불길에 솟구치며 활활 태워 졌다. 나의 고뇌의 밤을 함께 했던 그 영혼은 순식간에 한줌의 재로 화해 버렸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 영혼의 흔적들아 잘가라. 안녕히.
나는 이미 깡소주를 들이켜 취한 상태 였고 피우던 담배로 나의 팔뚝을 거침없이 지져버렸다. 역한 노린내가 짙게 풍겼다. 그때 나는 방안에서 혼자 흐느끼고 있었다. 아마 통곡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침묵 속에 그가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고개를 갸웃하면서 마당을 다시 돌아서 걸어나가는 모습을 며칠동안 불면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핏발선 눈으로 창호지의 찢어진 구멍으로 쫓고 있었다. 그때 나는 분명이 집에 있었더랬다.
김송규 선생이 문득 술을 건네며 나에게 물었다.
"강형 요즘 뭔 책 읽고 있습니까? 나는 애들 가르키느라 시간 없어 통 책을 못 읽고 있소."
"디자이 오사무에 빠져 있습니다."
"아, 그분이 전후 일본 작가지요."
옆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천우학이 넌지시 끼어들었다.
"그렀습니다."
나는 서점에서 우연이 그를 읽고 어쩌면 나의 삶과 닳았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일본의 전후 폐허속에 태어난 그는 '태어나서 죄송 합니다란' 말로 유명하다.
그는 수없이 자살을 기도 했다. 그 속에는 요정 여급과도 함께 투신자실을 하기도 하였다. 왜 하필이면 요정의 여급이었을까. 나는 그 부문에 자꾸 관심이 쏠렸다. 그러다 보니 그가 그냥 좋아 졌었다.
김송규 선생은 이미 취해 있었다. 그가 심각하게 물었다.
"강형은, 문학과 인생에 대해 혹시 깊이 고뇌해 본적 있습니까?"
나는 느닷없는 김선생의 질문에 당혹해 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주어진 길을 가기에도 벅차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어쩌면 지나친 자기 도피고 자기합리화 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본질을 교묘하게 회피 하며 딴청을 부렸다.
"글쎄요. 깊이 생각 해본적은 없지만 그건 일란성 쌍둥이가 아닐까요. 이를테면 각기 따로 분리 되어 있지만 결국 그게 하나의 몸체라는 사실 말입니다."
"사실 요즘 제가 좀 힘듭니다. 매일 술에 쩔어 학교에 출근해 아이들을 수업에 들어 갑니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난다고 소문이 자자 합니다. 그것이 교장 선생님의 귀에 까지 들어가 솔직이 곤혹스럽지요. 전 선생으로서의 품위를 잃었고 윗사람의 눈밖에 나 있지요. 이럴때 강형 같으면 어떻게 처신 하겠수?"
"글쎄요. "
나는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렸다. 아무리 듣고 나서 심사숙고 해도 이렇다할 답이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나에겐 세상이란 도처에 널려 있는 어떤 한가지 문제의식과 정면으로 싸우고 물어 뜯기 보다 이젠 적당이 회피하고 도망가기에 급급하였다.
내가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안에 돌아왔을때 천우학이 혼자 있었다.
아까 화장실에서 토하던 것을 봤는데 어디로 훌쩍 또 사라진 모양이었다.
자신의 하숙집에 들어가기 보다 어디 다른곳에서 가서 가슴에 술을 붓고 있을것 같은 확신이 들고 있었다.
문득 천우학과 나는 술집을 나와 주변 어시장 주변을 하나하나 수색해 나가기 시작 하였다.
그때 멈췄던 딸꾹질이 다시 시작 되고 있었다.
6,
그 이듬해 새 해 첫날은 눈이 많이 내려 있었다. 나는 지난 년말 읍내 개인병원에서 악성 비염 수술을 하였다. 개인병원 원장을 마취도 하지 않고 메스로 나의 생살을 마구 째고 있었다. 나는 너무 고통러워 줄곧 이를 악물었다. 한마디로 의사는 무지막지 하였다. 다시는 이놈의 병원에 오지 않겠다고 나는 다짐 하고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소개한 어느 여인숙 방에 입원해 있었다.
여러개의 방에 있는 구조에 맨 끝방이었다. 나는 그 방에 누워 무료하면 '선대이서울'이란 주간지를 사놓고 읽곤 하였다. 병원 간호원이 매일 와서 엉덩이에 항생재 주사를 투여하였고 팔뚝에 링거를 꽂곤 하였다. 간호원이 주사를 놓을때 나는 공연이 엄살을 떨었다.
하루는 간호원이 나한데 말 하였다.
"예전에 어디 몸이 아팠댔어요?"
"그건 왜 묻는겁니까?"
"아니오. 그냥."
"폐가 안좋아 1년동안 앓았지요."
"그외 다른 병은 없었나요."
"글쎄, 그것 뿐, 기억 안나는군요. "
간호원이 골똘이 생각하다가 말하였다.
"내일 담당 의사 한데 가서 말씀 하세요. 퇴원하겠다고요."
"그렇잖아도 그런 말씀 하기를 기다고 있었어요. 그래서 물어 봐야 되나 어찌해야 되나 고심 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말씀하더라는 말은 하지말고 그 말만 하세요?"
"아가씨 어쨋든 고맙수. 복 많이 받으쇼. 이담에 결혼하면 아마 잘 살껍니다."
나는 한마디로 그 속이 쿠리한 뚱뚱한 의사를 패주고 싶어 하였다. 수술한 환부는 그런데로 아물어 있었다.
간호원이 나가버리자 나는 밖으로 나왔다.
일주만의 외출이었다. 거리는 햇살이 눈 부셨고 눈이 쌓여 거리가 질척 거렸다. 어린 학생들이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고 있었고 어떤 꼬맹이는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버스 승강장 가판대에서 신문을 한부 사서 죽서루로 갔다.
죽서루는 힌눈으로 뒤덮혀 있었다. 나무는 설화로 가지게 늘어져 있었다.
신문을 펼치자 새 해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작품과 당선소감이 실려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의 당선소감에 나의 눈길이 머물렀다.
'새하곡' 이란 중편소설에 당선된 이문열이었다.
나는 그의 당선소감을 재미 있어 하며 읽고 또 읽었다.
,,,, 늘 한곳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 나의 출향, 그리고 30분 간격으로 고개를 드는 절망, 그 염염한 세월, 그리고 늘 취해 있어야만 온전 했던 나의 정신, 이제 그 폐허의 시간은 정녕 내 곁에서 떠나려는가, 그 유적의 세월이여........
나는 다시 모임에 나가기 시작 하였다. 기다리던 삼우 문학 창립 동인지가 나왔다.
그런데 은근히 기대했던 나의 작품은 삼우문학 창립동인지에 실리지 않아 나는 서운하였다. 혹시나 하고 기대 했던것이 적잖이 실망으로 바뀌었다.
회장의 하나의 통합으로 향토문학에 새출발을 모색 하면서 라는 '권두언'이 실렸고 회원들의 대부분 시가 실렸다. 그리고 뒷 쪽에 강효선씨의 단편소설과 성옥경의 꽁트가 실려 있었다.
강효선과 성옥경은 문학회 모임에서 만난 연인으로 연인관계로 발전 되었으며 강효선의 타지역 발령으로 함께 결혼을 전재로 떠났다고 회원들은 그들의 축하와 아쉬움을 동시에 나타내었다.
나는 총무인 홍성란 한데 술에 취해 어느날 말하였다.
"내가 그동안 보낸 원고 갖고 있지요.?"
"얘기 못들었어요?"
"글쎄요. 금시초문인데요."
나는 홍성란을 쳐다보았다.
"문오씨의 원고 회장님이 갔고 갔어요."
"왜요?"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인천에 있는 김석하 동인 한데 보냈다는 것 같은데요."
"그래요."
나는 좀 놀라하면서도 멈칫거렸다.
그 해 김석하 회원과 정일후 회원이 삼우문학회에서 현대문학에 나란이 데뷔를 하였다. 그래서 지역은 두 문사의 탄생으로 작은 축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현대문학이라면 그래도 가장 이 나라에서 전통있고 권위있는 메이져급 문학지중의 하나 였다.
김석하 회원이 소설로 정일후 회원이 시로 데뷔를 추천 완료 하여 문인으로 막 새출발을 한지 얼마 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문단데뷔 동인 시화전을 준비 한다고 하였고 전시 할 시를 보내라고 해 나는 바닷가를 산책 하며 쓴 시 한편을 써서 보내 주었다. 그리고 일에 쫓겨 허둥거렸다.
갑자기 집수리를 하느라 나는 모임에도 참여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존의 있는 집을 일부 허물고 대폭 수리하기로 하였다. 워낙 집이 낡고 쓰러질듯 기울어져 있었고 또 이 지역이 바닷가고 해서 민박을 겸한 수리 였다.
나는 목수들과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날 회장 한데서 엽서 한장이 날라왔다. 김석하 회원한데 보낸 원고뭉치가 지금 도착 해 있으니 엽서 받는 즉시 학교로 와서 찾아 갔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쁜 와중에 두툼한 원고뭉치를 찾으러 달려 갔다. 회장은 한적한 교무실에 창가자리에 나를 불러 앉혀 놓고 밤색 작업복 차림의 모습으로 커피를 한 잔 권하면서 특유의 미소로 실실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이 의미 하는 것이 뭔지 처음에는 헷갈렸다.
담배를 피워 물며 회장이 말하였다.
"올 여름 모임은 영산리에서 하기로 하였소. "
그건 결정된 사항을 일방적인 통고 였다.
그래서 나는 좀 어리둥절 하였다. 그래도 최소한 한마디 물어봤어야 하지않은가.
"저희 집에서 말입니까?"
"음, 그쪽이 바닷가니까 아무래도 ..."
나는 괜히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었다. 왠지 회원들이 동네 오는것도 마뜩 찮고 더구나 우리집에 오는건 내키지 않아 하였다. 나의 출생 컴플렉스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많에 하나 알게 된다면 내 자신에 큰 과오를 범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였다.
한편으로 집이 바닷가 이고 보니 이해는 갔다.
"아,알았습니다. 그,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나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쯤에 와서 달리 방법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식당에서 조용히 치르고 싶어 하였다.
"이건, 순전이 내가 단독으로 결정을 했으니 서운하게 생각 말아요. 힛히히."
회장은 다시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한 번 올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
나는 솔직하게 털어 났고 회장도 그럴줄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집에 와서 예의 봉투속에 들어있는 원고를 꺼내 읽고 싶은 마음에 조바짐 치고 있었다.
나는 목재가 쌓여 있는 한귀통이에 웅크리고 앉아 원고를 뜯어 읽었다.
원고지에 교정을 본듯 빨간펜으로 죽죽 그어져 있었고 회사 마크가 들어간 백지에다가 쉬임없이 노력 하라는 당부의 글이 편지형식으로 한통 쒸어 져 있었다. 그 때의 그 감회랄까 기분은 내가 구름을 타고 어리론가 둥실둥실 흘러가듯이 묘했다.
내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 졌다. 그래, 내가 앞으로 과연 기대에 부응 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할 때 나는 왠지 막막 하고 아득 하였다. 아직 갈길은 멀고 첩첩이 산 넘어 산 또 산이었기 때문이었다.
7.
회원들이 우리집에 오기로 된 날 나는 밤새 잠을 설치고 있었다. 가슴앓이랄까, 그랬다.
어머니는 다방을 비워 둘 수 없기 때문에 동네 이웃 아낙네들에게 부탁을 해 놓을 테니 일을 치르라고 내게 당부 하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하였다.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외삼촌과 나는 새벽 포구에 가서 갓잡아 온 생선과 횟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왔고 부엌에서 아줌마들이 그것을 포를 떠고 회를 치고 밥을 짓고 있었다.
오기로 한 시간이 되자 나는 동네 뒷 둑길로 배웅을 나갔다. 오전 10시 쯤 되어 아마 마을에 도착 할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벌써 마음이 들떠 있었다.
며칠 동안 내린 장맛비로 인해 강물은 이미 흙탕물로 부옇게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콘크리트 다리 건너 저편 신작로에 한때의 사람들이 걸어 내려 오고 있는것이 보였다.
그들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문학회 사람들이란 것을 금방 알아챌수 있었다.
걸어 내려 오는가 싶더니 다시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주변에 아카시아 나무가 가로수로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는 데 그들은 그것을 한꼬투리씩 뜯어 들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누가 빨리 이것을 털어 내는가 게임을 하고 있는듯 하였다.
나는 일행들을 만나 집으로 아내 하였다.
그들은 새로 단장한 우리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관심을 나타내었고 마을 살피기도 하였다.
새로 들인 큰방에 회원들이 들어갔고 곧 식사와 술상이 차려졌다. 왠만한 회원들은 그의 빠짐없이 참여 한듯 하여 인원이 많았다.
식사를 하기전 회장이 한마디 하였다.
"함께 하였던 김송규 회원께서 봉직하던 학교를 떠나 약혼녀와 함께 LA로 이민을 떠나게 되어 되었습니다. 그간의 문학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감사패를 전달 하겠습니다."
회장이 그에게 감사패를 전달 하였고 후래시가 터졌고 박수가 쏱아졌다. 회자정리라고 이건 정들자 이별이어서 나는 내심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오늘 온 여자분이 장차 장례를 약손한 약혼녀가 아닌가.
김송규 선생과 옆에서 술을 마시며 나는 그런 아쉬움을 토로 하였다.
"이거 정들자 이별이군요. "
"그러게 말입니다.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을텐데 말이우. 강형도 앞으로 글 많이 쓰시구 건강하시우."
"떠나서 행운이 깃들기를 빕니다."
나는 술을 받아 넙죽 넙죽 먹으랴 부억에 있는 음식을 가져 날으랴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로 준비한 음식이 여유가 있어 다행이었다. 여전이 껄껄웃는 소리와 들썩한 고성이 집 안팍에 흘러 넘치고 있었다.
옆에 있던 홍성란이 말했다.
"집 새로 수리 한듯 하군요."
"네 한 달 동안 꼬박 하였지요. "
"그럼 집들이겸 모임이 되었군요."
"허어, 그렇게 되는 건가요."
"잠깐 바닷가에 함께 갔다올까요?"
"그러죠."
나는 자리에서 몰래 빠져 나와 동네 골목을 걸었다.
"그런데 하귀숙씨는 왜 안보여요?"
"아, 오늘 학교 엠티 갔다고 했어요. 공교롭게 날짜가 겹쳤지 뭐예요."
"왔으면 좋았을텐데 그랬군요. "
나는 짐짓 아쉬워 하였다.
홍성란이 동네 이곳저곳을 관심 있어 하며 물었다.
"동네가 의외로 큰데요?"
"한 삼백 가구 되지요. 반이 어업이고 나머지 반이 농업과 직장인이지요. 이곳엔 처음 이지요?"
"네 덕분에 이런 곳엘 다 와보네요."
그때 동네 솔밭 언저리에 있는 교회당에서 촤임벨 소리가 댕그렁 댕그렁 은은하게 마을을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는 여운을 끌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저 소리 너무 고혹적이고 아름답군요."
"홍성란씨는 교인라고 그랬지요? 나는 무신론잡니다. 아직 신이라든가 그런곳이 나하고 아득한 곳에 있다는 생각 들더군요. 앞으로는 다시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강이 흘러가는 모래주변을 걸어 개목으로 갔다.
건너편 해수욕장의 가건물이 보였지만 수해로 인해 골조만 앙상하고 남아 있었다.
이번 수해는 그러고 보면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읍내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홍성란에게 말하였다.
"저쪽 흐릿하게 보이는 곳이 삼척 화력 발전소 입니다. 불빛이 깜박거리죠?"
"그렇군요."
언젠가 북평에서 모임에 끝나고 김성출 회원과 둘이 읍내 시내를 걸었다. 대낮이었고 특별이 어디로 갈만한 곳도 없어 나는 무작정 그를 따라 걸었다. 그는 화력 발전소 다니고 있었다. 오늘 곧장 교대근무 들어간다고 하였다. 나보고 특별이 갈곳 없으면 같이 가자고 하여 나는 따라 갔었다. 국민학교 수학 여행때 한번 들렸던 기억도 있어 나에겐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그날 나는 그가 일하는 작업장 까지 갔다가 나왔었다.
"바람이 점점 거새어지는 군요."
홍성란이 머리칼이 마구 흩뜨려뜨리며 날리자 말하였다.
"그럼 그만 들어갈까요?"
"그러죠. 회원들이 기다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만 들어가요."
회원들이 마루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술들을 적당이 마셔 취해 있었다.
나는 마을 앞 바닷가로 회원들을 몰고 나갔다. 간단한 술 안주와 돗자리 까지 준비 하였다. 술을 가게서 다시 샀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풀밭에 빙둘러 앉아 다시 술을 마셨고 장기자랑을 펼쳤다. 바다는 파도가 거세어 흙탕물과 뒤섞여 으르릉 대고 있었다. 아마 수해 탓으로 흙탕물이 휩쓸려 내려간 탓이었다.
김송규 회원이 바람이 부는 모래사장에 약혼녀와 나란이 걸으며 조가비를 줍고 있었다.
누군가 앞에서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해질녘까지 시간을 보내고 회원들이 다시 마을로 나왔다.
이번에는 회장이 앞장서서 호기를 부리고 있었다.
한때 문학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함성욱의 집을 들렀다가 가자고 해 회원들은 다시 그곳으로 갔다.
나도 그속에 섞여 갈 수밖에.
솔직이 내키지 않고 피하고 싶지만 그럴수있는 적당한 구실이 없었다.
함성욱의 집은 마을 외진 대나무 밭이 있는 산기슭에 있었다.
나는 내내 그가 나의 생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좀더 그의 모습을 샅샅이 살펴보리라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과음한 낮술에 이미 정신이 몽롱해 있었다.
술, 그것은 나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처방약이었다. 나는 그래서 늘 술에 취해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의 미스테리인 출생이라는 문제에서 보다 자유스러워 지기 때문이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는지 회원들을 자신의 서재에 들였다. 천정부터 시작해 그의 서재는 장서로 덮혀 있었다.
그런데 그도 몸이 안좋았는지 전에 보다 얼굴이 핼쓱 해져 있었다. 그래도 그 열정과 패기는 젊은이나 다름없었다.
함성욱이 서재에 술상이 들여 졌고 그가 서가에 있는 책을 한 권 꺼내 들고 말하였다.
"오늘 내가 이 책을 막 다 읽은 참이었네."
무슨 책인데 그러시우?"
회장이 슬며시 살피며 묻고 있었다.
나는 책 표지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만다라'란 제목의 장편소설이었다. 만다라는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십여년 동안 저자가 실제 절밥을 얻어 먹으며 수행을 했지만 목적한 바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감에 휩싸인다는 자전적 소설이었다.
함성욱은 내내 그 책을 극찬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그가 처음으로 펴냈다는 소설집 한 권과 서가에 꽂혀 있는 읽을만한 책 몇 권을 뽑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내 자고 일어나 나는 햇볕이 환한 방안에서 그의 소설집에 실린 글을 읽고 있다가 '가면무도회'란 단편을 읽으며 묘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것은 '명정원'이란 요정에 출입하면서 한 여인과 풋사랑으로 여급이 임신을 하였고 그것을 낳는다는 줄거리로 이뤄져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숨죽여 읽으며 어쩜 내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것을 소설이란 형식을 빌어 우회적으로 고백하고 있음을 단번에 간파하고 있었다.
나는 믿기지 않아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읽어 나가기 시작 하였다.
...... k는 면에 있는 모 요정의 '란'이는 여급과 일시적인 사랑에 빠져 임신을 시켰고 이를 고민하던 여급 '란'은 k에게 고백 하였고 K는 이 사실에 크게 당혹 스러워 하며 임신중절 수술로 처리 할 것을 신신당부 하였으나 '란'은 이를 거절하고 아기를 낳았다.
이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된 k는 이미 가장을 갖고 있던 자신에게 자칫 하면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서 친한 친구인 국태건설 사장 J에게 앞으로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게 다방을 차려 줄것을 극비리에 요청 하였던바 J는 두 사람의 오랜 우정을 받아 들여 면에다가 다방을 차려 주었다. K가 전면에 발벗고 나서 전면적으로 뛴 것은 다수가 지지른 이 일에 누군가가 한 사람 나서야 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진정 K의 핏줄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의 핏줄인지 그건 여급도 모른다.정확한 사인을 가려 내자면 DNA검사를 통해서만이 가려 질 것이다. 란이란 여급을 품은 사람이 어디 K뿐이었겠는가. 그래도 K는 란이란 여급과는 예술가 답게 모종의 미묘한 사랑의 관계였다는 것만 다를뿐. 그 란이라는 여급은 여전이 면에서 '은모래'라는 다방 마담으로 있으며 늘 트레머리에 단아한 한복차림으로 손님을 기다린다. 다방 안에는 가수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이라는 노래가 늘 구슬프게 흘러 나온다. 가수 권해경의 삶이 비운의 삶속의 여정이었다면 여급 '난'의 인생 또한 그녀와 비슷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해 보는 데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가설일 뿐 크게 신경 쓸 건 없다.
다만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인데 란의 아들이 성장해 나처럼 소설을 쓰겠다는 소문이 있는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그 유력한 인물이 아닐까 생각 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팥 심은데 팥나고 콩심은데 콩난다'는 이 말은 이 시대에도 여전이 유효하다는 걸 감안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듬해 함성욱은 병환으로 끝내 저 세상으로 떠났다. 아마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나에 대한 의문의 미스테리를 자전적 소설이란 형식을 빌려 그는 안개속의 밀실처럼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