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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인도 불교사
9. 윤회輪廻 II
윤회輪廻란 중생이 삼계육도三界六道를 돌며 끊임없이 생사를 거듭하는 것을 말한다. 윤회는 인도 아리안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사상으로 불교 고유의 것은 아니지만, 해탈을 강조하는 불교의 속성상 윤회가 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또 ‘무엇이 윤회하는가?’ 하는 윤회의 주체 또한 비껴갈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다.
불교 학자들은 불교의 모든 교리들은 윤회사상의 기초위에서 성립되며 실로 모든 불교 교리는 윤회를 인정하는 데서 존재가치를 가지게 된다. 만약 윤회사상을 불교에서 제거해 버린다면 불교라는 구조물은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업과 윤회설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설명하거나 인간조건의 불평등이나 존재의 사후 운명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윤회설만큼 명료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 (박상민,「윤회사상輪廻思想」(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이들을 규명하는 것은 불교의 존립과도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윤회의 기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1) 윤회와 무아의 역학관계
베다Veda 시대(B.C. 1,500년경-B.C. 1,000년경), 인도에는 “마나스manas”와 “아수asu”라는 개념이 존재하였다. ‘마나스’는 정신적인 측면으로 사유, 의향, 기쁨, 근심 등 생각[意]을 나타내고, ‘아수’는 생명을 유지하는 육체적인 측면으로 운동, 호흡[息] 등 몸을 움직이는 생활력을 의미한다. 동양권에서 흔히 쓰는 “혼백魂魄”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혼魂에 해당하는 마나스는 심장에 머물지만 몸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고 생각하였다.
이들 둘은 혼魂과 백魄처럼 개념적으로는 차이가 있었지만, 종종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이 죽으면 인간의 몸을 떠나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하다 새로이 몸을 받게 된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이들의 존재유무에 따라 삶과 죽음이 구별되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을 넘어 영속성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윤회 사상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도의 베다(Veda) 문헌에는 ‘마나스(manas)’와 ‘아수(asu)’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들은 인간이 죽을 때 몸을 버리지만, 몸을 버린 뒤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그 자체를 계속한다는 뜻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데에서 우리는 인도의 윤회 사상의 시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마나스나 아수가 몸을 버린 뒤 멸하지 않고 그 자체를 계속한다면 이 불멸의 마나스나 아수는 다시 어떤 몸을 받아 그것과 결합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高翊晋,「阿含의 無我輪回說」, 고익진 지음,『불교의 체계적 이해』 pp. 152~153.)
다음 브라흐마나Brahmana 시대(B.C. 1,000년-B.C. 800년)에 이르면, 인간에 대한 관찰과 분석이 한층 더 고도화되면서 이들 개념 또한 점차 변하게 된다. 아수는 생명의 숨, 에너지, 기氣 등을 뜻하는 “프라나Prāṇa”라는 말로 대체되게 된다. 요컨대 ‘영원불멸의 주체’를 찾는 데 있어, 아수는 가장 근원적인 숨인 ‘프라나’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써 아수는 죽지 않는 참다운 주체로써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마나스는 마음의 모든 기능을 총괄 제어하는 어떤 ‘나’인 “아트만(ātman, 我)”으로 불리게 된다. 아트만에는 본래 생명의 근원이 되는 숨 혹은 호흡의 뜻도 있어, 아수나 프라나 역시 자연스럽게 아트만에 흡수되고 만다. 이로써 아트만은 마나스 뿐만 아니라 아수와 프라나 등을 흡수 통합하면서 인간의 본질로 간주되었으며, 상주하는 영원불멸의 존재로 격상되게 된다.(김종욱,「무아에서 진아까지 —불교 무아 개념의 형성과 전개—」)
프라나와 아트만은 이리하여 죽지 않는 불멸의 근원적 주체로서 다 같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는 브라흐마나 시대의 사색과정에서 프라나는 아트만에 흡수되고 만다. 왜 그러냐면 아트만에는 본래 ‘숨’이라는 뜻이 있어 프라나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임하여 몸을 떠나가는 것은 마나스나 아수가 아니라 이제 아트만이다. (고익진 지음,『불교의 체계적 이해』 p. 153. 高翊晋,「阿含의 無我輪回說」.)
브라흐마나 시대를 지나 우파니샤드 시대를 거치면서 아트만은 숨의 의미로부터 변하여 영혼의 뜻을 갖게 되었다. 이어 모든 기능의 총괄하는 “자아自我”의 의미로도 쓰이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트만은 인간의 본체이자 윤회의 주체로 굳어지게 되었고, 이제 죽으면 몸을 떠나는 것은 아수나 마나스가 아닌 아트만이 된 것이다.
특히 우파니샤드 시대(기원전 700년경-100년경)에 아트만은, 전 우주의 근본 원동력인 “브라흐만(brahman, 梵)”과 동일시된다[梵我一如]. 아트만은 이제 자아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우주창조의 제일 원리이자 만유의 본체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환경 속에 태동한다.
2) 불교의 등장과 초기 무아설
이때 등장한 혁명가 싯다르타는, 이 세상은 연기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므로[無常], 고정불변의 본체란 존재할 수 없다[無我]고 선언한다. 이는 당시 영원불변의 본질로 여겨지던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으로 전통적 인도철학사상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면, 그 근본 배경이 되는 윤회 또한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와 함께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이라는 불교 수행의 목표 또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트만의 부정은 불교의 존립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생과 생을 거듭하는 윤회는 불변·불멸의 실체적 자아가 전제 되어야 성립하고, 그래야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붓다 재세시나 초기 불교 시대에는 이러한 모순이 전혀 문제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윤회하면서 무아인 것이 전혀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아와 윤회를 병렬적으로 따로따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의 관점에서 ‘무아’와 ‘윤회’를 다루기보다는 일관되게 ‘무아’를 설하고 ‘윤회’를 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무아이지만 윤회가 성립한다’고 애써 주장하는 형태가 아니라, ‘무아이니 윤회한다’ 혹은 ‘무아가 윤회한다’의 형태로 ‘무아’와 ‘윤회’가 나타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무아’와 ‘윤회’는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며, 더 나아가 ‘실체적 자아가 있어야만 윤회가 가능 · 성립한다’는 입장이 오히려 기이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안옥선,「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 업의 자아의 윤회」.)
이어 논자는 무아이면서 윤회하는 문제는, 설명이나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전제이거나 고정관념을 버리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만 ‘우리 뼈 속 깊이 각인되어 온 일차적이고 기초적인 믿음을 버리는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 윤회는 인류를 가장 오랫동안 지배해온 관념들 중의 하나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보편적 정서였으며, 특히 인도인들에게 윤회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가 없어도 된다는[無我] 반실체주의적 입장에 서 있던 불교인의 관점에서도, 무아와 윤회의 관계가 모순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윤회개념에 있어서 사람들 간 개념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자는 ‘윤회’가 연속되는 자아간 동일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실체아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실체론적 윤회개념일 뿐이다. 비실체론적 관점에서 윤회는 반드시 자아간의 동일성(identity)이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윤회는 자아들간 연속성(continuity)만 전제되어도 가능하다. 동일성에 의한 윤회는 실체주의적 자아관을 대변하고, 연속성에 의한 윤회는 반실체주의적 자아관을 대변한다. 9안옥선,「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 업의 자아의 윤회」.)
윤회는 변할 수 없는 기본 배경으로 하면서도 붓다는, 연기법에 입각해 기존에 있었던 윤회의 실체를 수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원래 있었던 전제조건과의 모순은 처음부터 염두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도 전통의 실체주의적 우파니사드 철학자들에게 윤회는 자아가 있는 “유아윤회”다. 반면에 불교는 ‘업’을 기반으로 한 실체적 자아가 없는 “무아윤회”가 된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아트만의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하고 일어났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설無我說(anātma-vāda)로서 인도철학사에서 이채를 띠는 가장 특징적인 사상이라 할 것이다. 아트만의 부정은 필연적으로 윤회를 부정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런데 불교는 또 업보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학자들은 불교의 윤회설을 우파니샤드의 유아윤회설有我輪回說에 대해 무아윤회설無我輪回說이라고 부르고 있다. (高翊晋,「阿含의 無我輪回說」, 고익진 지음,『불교의 체계적 이해』 p. 154.)
3) 붓다의 윤회관
그럼 실제 경전에 나타난 붓다의 윤회관은 어떤 것이었을까?『잡아함경』「신명경身命經」에는 어느 때 출가한 어떤 바차婆蹉 종족의 승려가 부처님을 찾아와 문답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떻습니까? 구담이시여, 목숨[命]이 곧 몸[身]입니까?”
부처님께서 출가한 바차 종족에게 말씀하셨다.
“목숨이 곧 몸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해답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어떻습니까? 구담이시여, 목숨도 다른 것이고 몸도 다른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출가한 바차 종족에게 말씀하셨다.
“목숨도 다르고 몸이 다르다고 하는 것도 정확한 해답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바차족 승려는 붓다의 윤회관에 대해 묻기 위해, 우선 “명(命; 목숨, 생명生命, 수명壽命, 운수運數, 운運)”과 “신(身; 몸, 신체身體, 주主된 부분部分, 나, 자기自己, 자신自身)”의 관계를 묻고 있다. 그런데 단순할 것 같은 이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답이 예상 밖으로 모호하다. ‘명命’과 ‘신身’은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는 두루뭉술한 대답이다. 선종의 선사들이 흔히 쓰는 중도적인 답변이다. 진리의 모습이 그러하다지만 붓다는 선사들 화법의 원조인 것이다. 어쨌든 이에 승려는 대답의 모호함을 지적한다.
출가한 바차 종족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습니까? 구담이시여, ‘목숨이 곧 몸입니까?’라고 여쭈어도 ‘정확한 해답이라고 할 수 없다’고 대답하시고 ‘목숨은 몸과 다릅니까?’라고 여쭈어도 ‘정확한 해답이라고 할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문 구담께서는 어떤 법이 있기에 제자가 목숨을 마치면, 곧 예언하여 말씀하시기를 ‘아무개는 어느 곳에 태어났고 아무개는 어느 곳에 태어났다. 그 제자들은 여기서 목숨을 마치고 몸을 버리면, 곧 의식[意生身]을 타고 다른 곳에 태어난다’고 하십니까? 그 때를 당해서는 목숨도 다르고 몸도 다른 것이 아닙니까?”
당시 붓다는 제자가 목숨을 마치면, ‘아무개는 어느 곳에 태어났고, 아무개는 어느 곳에 태어났다’고 종종 말했던 모양이다. 붓다가 윤회를 인정하였다는 것인데, 승려는 이를 근거로 그렇다면 목숨과 몸은 다른 것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다. 그래야 죽었을 때 목숨은 몸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 다시 몸을 받고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트만과 같은 존재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붓다나 승려는 윤회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윤회하는 대상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바차 종족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것이 있음을 말한 것이고, 남은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 아니니라.”
바차 종족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이시여, 어찌하여 남은 것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남은 것이 없음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바차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불이 남은 물질이 있으면 타고, 남은 물질이 없으면 타지 않는 것과 같느니라.”
붓다는 승려에게 ‘남은 것이 있음을 말한 것이지, 남은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목숨과 몸의 구분과는 별개로 죽었을 때는 무언가가 남는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불은 남은 물질이 있으면 타고, 남은 물질이 없으면 타지 않’는다라고 비유로서 설명한다. 다시 말해 목숨을 마치고, 몸을 없어져도, 남는 것이 있으면, 그 남은 것이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러자 그 승려는 다시 묻는다.
바차 종족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불이 남은 물질이 없는데도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바차 종족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보고 불이 남은 물질이 없는데도 탄다고 하느냐?”
바차 종족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비유하여 말씀드리면 큰 불 더미에 세찬 바람이 불면 불이 공중에 날려갑니다. 그런 것이 어찌 남은 물질이 없는데도 불이 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바차 종족에게 말씀하셨다.
“바람이 불어 불을 날리는 것도 남은 물질이 있는 것이다. 남은 물질이 없다고 할 수 없느니라.”
바차 종족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이시여, 공중에 날리는 불을 어떻게 남은 물질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바차 종족에게 말씀하셨다.
“공중에 날리는 불은 바람을 의지하기 때문에 머물고 바람을 의지하기 때문에 타는 것이다. 바람을 의지하기 때문에 남은 물질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승려는 불꽃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예로 들어, 남은 물질이 없어도 불이 탄다는 의견을 낸다. 그러나 붓다는 바람에 날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무엇인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남은 물질이 있어야 바람에 의지하면서 불에 타는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럼 어떤 것이 남아 의식을 타고 다른 곳에 가서 태어나는 가고 다시 묻는다.
바차 종족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중생이 여기에서 목숨을 마치고 의식을 타고 다른 곳에 가서 태어나는데 어떤 남은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바차 종족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이 여기에서 목숨을 마치고 의식을 타고 다른 곳에 가서 태어날 그 때를 당해서는 애욕으로 말미암아 집착하고, 또 애욕으로 인해 머무르기 때문에 남은 것이 있다고 말하느니라.”
바차 종족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중생은 애락(愛樂)으로써 남은 것이 있고, 염착(染着)으로써 남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세존께서는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셨습니다. 사문 구담이시여, 세간에 일[緣]이 많아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바차 종족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그 때를 알아야 합니다.”
바차 종족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갔다.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957. 신명경(身命經) (원문 각주: 소경은 『별역잡아함경』 제10권 1번째 소경의 내용과 비슷하다.))
붓다는 ‘목숨을 마치고 애욕으로 말미암아 집착하고, 또 애욕으로 인해 머무르면’ 다른 곳에 가서 태어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목숨을 마쳐도 애욕은 남는다는 것이고, 무언가 남는 것이 있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애욕이나, 애욕으로 말미암아 집착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업(業, Karma)”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붓다의 말에 따르면 윤회는 업의 유무에 따라 있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본인의 행동과 수행여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경에 의하면 붓다가 업과 윤회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화는 업설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붓다 사후 2~3세기 뒤에 이루어진 미린다 왕과 나아가세나 존자와의 대화에서도 ‘죽을 때 생존에 집착을 가지고 죽는다면 다시 태어날 것이요, 생존에 대한 집착 없이 죽는다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있어 변화한 모습이지만 그 바탕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대화를 기록한『미란다 팡하』에는 윤회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대왕이여, 어떤 사나이가 한 소녀에게 구혼하며 값을 치루고 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소녀가 장성하여 묘령의 처녀가 되었을 때, 딴 사나이가 값을 치루고 그 소녀와 결혼했다고 합시다. 먼저 사나이가 와서「당신은 왜 나의 아내를 데리고 갔소」라고 따졌습니다. 나중 사나이가「나는 당신의 아내감을 데려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구혼하여 값을 치룬 어린 소녀와 내가 구혼하여 값을 치룬 처녀는 딴 여성입니다」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그들이 입씨름을 하다가 왕에게 재판을 요구한다고 하면, 왕은 어느 쪽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먼저 사나이가 옳다고 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중 사내가 무슨 말을 하든, 장성한 그 아가씨는 어린 소녀로부터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그와 같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현재의 명칭과 형태와,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명칭과 형태는 딴 것이긴 하지만, 저 세상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악업惡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초기불교에서 이렇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윤회와 무아는 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가?
4) 무아론의 변주變奏
우파니샤드upanishads의 중심철학은 아트만으로 대표되는 아론(我論, ātma-vāda)이고, 불교는 무아론(無我論, anātma-vāda)이다. 이들은 ‘있다’와 ‘없다’로 극명하게 갈려 일견 반대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앞「무아無我와 중도中道」장에서 밝혔듯 우파니샤드의 ‘아’와 불교의 ‘무아’는 상당한 유사성을 띄고 있다.
초기불교에서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의 무아론은 기본적으로 상캬 철학에서 말하는 아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은 아론을 일부 수정한 실천적, 윤리적 아트만론인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의 무아는 일종의 중도적 아론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무아론은 원래의 취지를 벗어나게 되어 붓다의 말씀과는 거리가 있게 된다.
무아론이 후대 논사들에 의해 불교의 기본교리로 정립이 되는 과정에서, 상캬철학과의 차별화에 중점을 두다 보니 아트만을 부정하게 되었고, 아트만을 부정하려다 보니 윤회나 업의 주체인 자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몰라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붓다 시대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사상들이 이론을 정교화 하는 과정에서 후대 논사들에 의해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어떤 것이든 내세우지 않으면 윤회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른다면 윤회전생을 잘 설명할 수 없다. 거기에서 어떤 부파(犢子部, 正量部, 輕量部)에서는 윤회하는 주체로서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라는 것을 상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정말로 실재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곧 불교의 ‘무아설(無我說)’과 모순되고 만다. ‘非卽非難蘊의 補特伽羅 - 즉,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우리’라고 말하는 괴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요컨대 ‘그 무엇인가?’가 윤회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무엇인가’를 세워 놓지 않고는 설명하기가 난감했던 것이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211.)
무아의 입장에서는 수행을 통해 완성해야 할, 어떤 의식의 존재를 상정할 수 없다. 또 일반 대중 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 즉 업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업과 윤회를 말하고, 인과응보와 사람의 도덕적 책임을 말하면서도, 영원한 자아는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자업자득의 주체를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 연유로 각 부파는 그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해법들을 찾게 된다.
그래서 초기불교 경전인 아함에는 여러 가지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푸드갈라(Pudgala) 이론이다. 이는 5온과 같은 것도 아니면서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 둘째, 식(識, vijnāna) 이론이다. 이는 항상 머무는 존재이며 변하지 않는 존재로서 한 생(生)에서 다른 생(生)으로 윤회하는 영혼 또는 자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셋째, 상속(相續, santati) 이론이다. 이는 어떤 물질적 존재나 정신적 존재도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흐르는 개울물처럼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병욱,「‘무아와 윤회 논쟁’에 대한 종합적 고찰」. )
그러나 이 문제는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꼬이게 되어있다. 소승小乘 20부 중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의 푸드갈라pudgala이론이나, 심식류心識類의 그 무엇인가가 윤회한다는 입장이나,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실재한다는 상속설相續說이나, 무아와 윤회의 관계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오히려 돼지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거기다 버선을 신기는 형국이 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무아윤회를 대전제로 하고 있지만 독자부의 푸드갈라 이론과 설일체유부의 오온상속설은 유아윤회적 성격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나머지 심식류가 윤회한다고 보는 이론도 식류識類를 윤회의 존재로 내세우기 때문에 순수 무아윤회론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부파불교가 무아설에 발목이 잡혀 윤회 주체에 대한 명확한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고 푸드갈라나 심식류 같은 애매한 이론을 내세운 부분은 참으로 궁색한 발상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정적인 실체를 갖지 않는 존재가 윤회를 한다는 것은 얼른 납득이 될 수 없는 그런 논리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론들이 대외적으로 설득력을 가지기가 힘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혜운, 영산불교사상연구소,『영혼체 윤회론, 2천년간 무아윤회 논쟁에 종지부』, pp. 61~62.)
앞 장에서 언급하였지만 불교에서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 하여 선업善業에는 선보善報가 따르고 악업惡業에는 악보惡報가 따른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업자득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 주체가 없으면 윤회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교의 업설 또한 명쾌한 설명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거기다 중생들에게 현실은 ‘선인선과’나 ‘악인악과’가 아닌, ‘선인악과’ ‘악인선과’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사바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업자득의 주체마저 모호해진다면 불교의 존립에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물론 옳고 그름, 선과 악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처한 입장에 따라 혹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키지 못하면, 종교로서의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믿음의 대가가 그 정도라면 맥이 빠지는 일일 것이다. 그런 연유로 윤회는 물론 업설의 정당성을 위한 변명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5) 업설의 해명,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부파불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모든 현상의 본체는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는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교의를 바탕으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니 “업감연기業感緣起”, 그리고 오온이 상속한다는 “오온상속설五蘊相續說” 이니 하면서 교리체계 구축에 힘을 쏟는다. 무아사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업의 과보를 받는 윤회의 주체를 모순 없이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중 삼세양중인과설은 12연기를 태생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윤회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파불교 시대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12연기설은,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에 이르는 연기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성을 보면 우선 ①무명(無明: 미迷의 근본인 무지無知)으로부터 시작하여 ②행(行: 무지로부터 다음의 의식 작용을 일으키는 동작), ③식(識: 의식 작용), ④명색(名色: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마음과 형체가 있는 물질), ⑤육처(六處: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의 5관官과 의근意根), ⑥촉(觸: 사물에 접촉함), ⑦ 수(受: 외계外界로부터 받아들이는 고苦ㆍ낙樂의 감각), ⑧애(愛: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함), ⑨취(取: 자기가 욕구 하는 물건을 취함), ⑩유(有: 업業의 다른 이름으로 다음 세상의 결과를 가져올 업) 그리고 ⑪생(生: 이 몸을 받아 남)과 ⑫노사(老死: 늙어서 죽음)로 되어 있다. 노사의 원인은 무명이 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설일체유부는 12가지 가운데 과거세인 ‘①무명-②행’가 원인(因)이 되어 ‘③식-④명색-⑤육입-⑥촉-⑦수’라는 현재세의 결과(果)를 초래하고, 다시 현재세의 ‘⑧애-⑨취-⑩유’가 원인(因)이 되어 미래세의 ‘⑪생-⑫노사’의 결과(果)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인-과-인-과의 반복적인 중층구조인데, 이를 윤회의 관점으로 보면 ①무명-②행은 전생을, ③식-④명색-⑤육입-⑥촉-⑦수와 ⑧애-⑨취-⑩유는 금생을, ⑪생-⑫노사는 내생을 나타낸다. 이렇게 삼세三世에 걸쳐 두 번의 인과因果가 있다하여 삼세양중인과라고 부르는데, 삼계육도三界六道를 도는 중생들의 삶은 이렇게 인과관계의 틀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붓다는 연기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유부는 이를 단계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이것이 붓다가 진정 의도했던 바일까?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敎, deśanā)이냐, 희론(戱論, prapaǹca)이냐 하는 문제에 맞닿아 있다.(우에다 요시부미/박태원 옮김,『대승불교의 사상』 pp. 51~63.)
참고로 용수는 12인연처럼 ‘그것이 있을 때에’ ‘그것에 연緣하여 이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하여 이것이 있고, 이것에 의하여 그것이 있다’는 “상의相依관계”이므로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상의란 12인연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서 없이 완전히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용수는『중론中論』에서 “무자성無自性한 여러 가지의 있는 것에는 존재성(存在性, Sattā)이 없으므로, ‘그것이 있을 때에 이것이 있다’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집약되어 불교의 ‘업설’은 현재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겠다.
6) 윤회하는 인간
불교는 인도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아트만의 존재는 부정하지만, 그 대신 업을 윤회의 주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실체적인 업 주체를 부정하는 불교의 업은 단순한 ‘행위’를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위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까지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선택, 의지, 결단 등이 강조되는 업이며, 자아로부터 생겨나지 않고 반대로 자아를 규정하는 업이다. 자아는 오직 업일 뿐으로, ‘무아의 자아’는 ‘업의 자아’다. 이러한 업이 조건을 갖추어 추동력을 얻는 한 멈추지 못하고 윤회가 계속된다는 것이 ‘무아의 윤회’의 핵심이다. 달리는 열차가 갑자기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안옥선,「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 업의 자아의 윤회」.)
사람의 업이 윤회를 지속시키며, 윤회하는 자아의 연속성은 이 업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 때의 업은 행위나 의식, 혹은 갈애 등 일견 ‘오온의 행’과 다르지 않다. 생사윤회는 바로 그런 망념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업설과 무아설은 이론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윤회로부터의 해방, 즉 무명을 제거하면 해탈한다는 설명 또한 자연스럽다.
이러한 ‘무아의 윤회’의 자아관은 주지하다시피 상주론과 단멸론의 중도적 자아관으로 설명된다. 동일성을 가진 불멸의 실체적 자아를 부정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재적 자아나 현생 이후의 자아에 대한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상주론도 아니고 단멸론도 아닌 중도적 입장에서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자아 ‘연기’의 자아를 말할 뿐이다. 즉 자아는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조건이 지속되는 한’ 지속·연속되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안옥선,「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 업의 자아의 윤회」.)
현재도 윤회와 무아에 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발간된『윤회와 반윤회』라는 책에서는 이 견해들을 정리하면서 ‘윤회는 연기의 힌두적 상상력에 불과하다. 윤회가 신화적이라면 연기는 철학적이며, 윤회가 종교적이라면 연기는 논리적이다. 연기는 윤회를 설명하고, 포용하며, 흡수한다. 연기 앞에 윤회가 설 자리는 없다.’고 하는 견해를 내놓기도 하였다.(정세근 지음,『윤회와 반윤회』p. 280.) 붓다가 발견한 연기라는 진리에 비중을 둔 학자적 견해라고 하겠다.
얼마 전 절에 갔다가『길을 묻는 신도에게, 새 신도를 위한 안내서』라는 작은 책자를 받았다. 그 책 말미에 ‘묻고 답하기’라는 장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정말 윤회하나요, 그리고 어떻게 윤회하나요?’라는 질문과 거기에 대한 답변이 실려 있었다. 이것이 현재 윤회에 대한 불교계의 입장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고 하겠다. 즉 종교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시작도 없는 먼 옛날부터 과거, 현재, 미래에 거쳐 윤회를 합니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저 밑에 지옥의 세계에서부터 천상의 세계까지 끝없는 공간을 윤회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이 삶에서도 시시각각 변화하면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윤회합니다. 마음과 행동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지옥 같은 고통에 빠지기도 하고, 축생처럼 싸우기도 하며, 아름다운 천상을 여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윤회하게 할까요? 윤회의 주체, 내 생명의 주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합니다. 업이란 의지를 동반한 행위입니다. 행위는 파동을 남깁니다. 선한 물결은 선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퍼지고 되돌아옵니다. 지나온 나의 업은 내 운명을 결정합니다. 결국 미래의 모습은 현재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이어짐을 불교적으로 보면 업의 이어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본다면 업은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DNA와 비슷한 형태라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 이번 생에 획득한 형질, 즉 생명체의 습관이나 행위에 의한 결과는 DNA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다음 생으로 이어지고 또 발현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업이란 초월적, 또는 철학적인 것이라고 돌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업을 유전자의 구조면에서 생각해 볼 때, 매우 과학적임을 깨닫게 된다. 부처님이 사셨던 시대에는 유전자의 지식이 없었다. 하지만 전 생명에 관통하는 영원한 생명의 흐름을 직감했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유전자의 구조는 내가 태어날 때에 생긴 것이 아니다. 부모님을 통해, 생명의 기본인 아메바나 미토콘드리아,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의 상태에서부터 생겼던 것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유전자의 구조를 두고 <청정법안(淸淨法眼)>으로 업의 형태를 파악한 것이 아닐까? (김용운 지음,『0(零)에서 0(空)의 세계로』(고려원, 1991) p. 150.)
조금 주제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일반적인 생명에 적용해보면 그럴 듯도 하다. 진화의 과정에 비추어 보아도 하등의 잘못이 없어 보인다. 윤회의 <과학적 견해>라고 하면 어떨까? 물론 우리가 논의하는 윤회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다. 업을 DNA로 간주한다면 인간의 문제는 곧 진화의 문제로 환원되면서, 인류가 지금까지 고민해온 철학적, 종교적, 그리고 인문학적 고찰과는 그 기반부터가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금은 쉽게 받아들이는 현대 과학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연기의 법칙을 파악하고 해결책까지 제시한 붓다의 안목은 해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탁월하였다는 것이다.
7) 윤회와 나[我]의 역학관계
여기에 하나 더 참고한다면 윤회에 대한 불교인이 가져야 할 절실함이다. 윤회를 많이 논의하다보면 윤회에 대해 무뎌지게 된다. 윤회, 윤회하다 보면 그냥 남의 일처럼 느껴지게 된다는 경험적 사실이다.
즉 인간이라면 다 똑같이 겪는 것이라는 학습효과로 인해 그리 크게 혹은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윤회에 대해 가졌던 절심함과 그것을 밝히겠다는 의욕은 어느덧 사라지고 용두사미의 논의로 끝나게 될 공산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 인간은 윤회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소승불교도의 이해였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한다면 문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마치 타인의 일처럼 생각하게 된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것은 허용되었다. ‘허용되었다’는 말이 존 이상한 표현이나, 그것뿐이라면 석존의 참뜻을 완전히 오해한 것은 아니다.
허용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윤회한다’고 읽었을 때 그 윤회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윤회를 계속해 가는 존재로서 ‘인간’이 논의의 화제가 된 것이다.
윤회가 남의 일처럼 느껴짐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관심 또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보편화 되면서, 자신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문제로 이해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다. ‘나는 윤회한다.’에서 ‘인간이 윤회한다.’로 진전이 되면, 그렇게 큰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붓다가 “불방일不放逸하여 정진하도록 하라”고 그렇게 강조한 수행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논자는 이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내가 말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가……?
바꿔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내가 ‘히로사찌야는 윤회한다’라고 읽을 경우, 문제는 자신의 것이 된다. 어떻게 하면 윤회하지 않게 될까? 그것을 결사적으로 고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윤회한다’라고 알게 되면 문제는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윤회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영혼인가? 아닌가? 그러한 것만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소승불교 사람들이 읽는 방법이다.
그렇게 때문에 소승불교에서는 12연기설, 또는 보특가라설(補特伽羅說)과 같은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논의만을 되풀이해 왔던 것이다.
아마도 석존은 윤회의 문제를 타인의 일처럼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의도적으로 일반적인 윤회의 법칙을 말하지 않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p. 215~216.)
윤회의 문제를 타인의 일처럼 생각하게 될까봐, 붓다는 의도적으로 윤회의 법칙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독특하다. 윤회는 너 자신의 문제이고 그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라! 윤회에 대한 논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니 그런 것에 시간을 보내지 마라! 무명을 타파하고 진리를 깨우쳐라. 그것을 목표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뭐 그런 의도로 윤회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붓다는 말했다. “화살부터 뽑아라!” “해탈을 향해 매진하라!” 그러면 그대는 스스로 알게 될 지니.
의문이 사라졌는가? 그래도 의문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으로 논의를 끝내기에는 무언가 허허虛虛롭다.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그렇게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무언가 찜찜하기 까지 하다. 언젠가 올 그날을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인가? 오기는 오는 것인가? 모르고 묵묵히 나아가기가 무척 곤욕스러울 수도 있겠다.
8) PS, 수행자의 변명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번성하다가 침체하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중국 최대의 전통이 된 종파가 “선종”과 “정토종”이다. 간단히 말하면, 선종이 현실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종파라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정토종淨土宗이다.
현실에 마주쳐 차별심을 없애면 그런대로 살만하다는 선종에 맞서, 현실에 만족할 수 없다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을 믿고 수행하여 사후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도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윤회를 고려한 윤회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관념어인 중국어의 특성상 논리적인 사고가 발달할 수 없는 중국인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체험적 직관을 극도로 중시하는 것으로서는 불교 중에서 가장 중국적 색체가 강한 선종(禪宗)을 들 수 있다. 중국 불교도 인도 불교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육조 말부터 당대 중기에 걸쳐서 세밀한 논리와 분석에 능한, 구사종(俱舍宗), 성실종(成實宗), 삼론종(三論宗), 법상종(法相宗) 등 소위 논종(論宗)의 성립을 보이지만 그러한 것은 한정된 전문가 사이에서만 행해진 것이었고 당말 이후로는 자취를 감추었다. 당말 이후, 송 · 원 · 명 · 청에 걸쳐서 존재한 것은 단지 선종과 정토종(淨土宗)만이라고 해도 좋다. 그 원인은 선과 정토가 중국인의 체질에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양자에 공통되는 점은 논리를 가능한 한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모리 미키사부로 지음 ★ 임병덕 옮김,『중국사상사』 p. 16.)
정토종은 근기가 약한 중생들이나 하는,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한 수행이라고 폄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로지 아미타불을 믿고 염하면서 혼란 없는 한 마음인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상태에 도달하기는 오히려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어리석은 범부 중생도 닦을 수 있다고 전토법문을 아주 깔보는데, 그렇다면 화엄경은 어찌 보지도 않는단 말이오? (김지수 옮김,『단박에 윤회를 끊는 가르침』p. 10.)
명말明末의 고승 운서주굉雲棲株宏은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라고 하여 ‘혼란 없는 하나의 마음[一心不亂]’이 바로 자성의 아미타불이며 마음이 곧 정토라고 하였다. 그는 선종과 정토종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보았는데, 염불을 통해 일심불란에 이르면 그것이 곧 선종이 추구하는 견성이라고 하였다.
『아미타경』에서 붓다는 사리불에게 서쪽으로 저 멀리 가면 아미타불이 설법하는 아무런 괴로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고 말한다. 역경가 구마라집은 그 세계를 ‘극락(極樂)’이라고 번역했다. ‘극락’이라는 표현은 엄청난 말이다. 현실의 고통 없는 세계의 유혹은 오히려 강력하다. 산스크리트 수카바티(sukhāvati)를 극락으라고 번역하지 않고, 안양(安養)이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다. 중국의 불교 주석가 희적(羲寂)은 이것을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몸을 잘 돌보는 것[安心養身]’으로 풀었다. 태백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영주 부석사의 고색창연한 누각이 하나 있다. 바로 안양루(安養樓)다. 그 아래를 통과하면 아미타불이 설법하는 무량수전을 만난다. (김영진 지음,『근대 중국의 고승』 p. 268.)
경기도 안양安養 시가 역시 불교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의미하는 ‘안심양신安心養身’에서 왔으며, 축구팀 FC 안양의 “수카바티 안양!”도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어쨌든 ‘수카바티’를 극락이 아닌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몸을 잘 돌보는’ 안양이라고 번역하고 보면, 선종에서 말하는 선수행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정토는 신심과 염원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단단하게 붙들어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추구하는 행위다. 편벽하게 유심정토나 자성미타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라고 한 중국의 고승 인광印光의 말도 이해가 간다. 아미타불을 진실로 믿고 절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정토에 이르지 못할 것은 자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이 다를 뿐 “땅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처럼 진리의 모습은 초록의 푸른빛으로 모두 같다는 생각이다.
정토법문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나머지 공덕이 다음 생에 나타난다. 모르는 사람은 단지 그것이 다음 생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공덕이 대부분 현재 삶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김영진 지음,『근대 중국의 고승』 p. 273.)
그렇다면 현실은 어떤가? 누구는 천국에 살고 있는 듯한데, 누구는 지옥에 살고 있는 듯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가지고 천국과 지옥이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만 천국과 지옥이 다음 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 생, 금생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소위 사후 천국에 가거나 혹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인과를 따지는 문제하고는 다르다. 어떻게 현재의 삶을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가하는 고리타분함도 넘어선다.
우리 의식의 긴 여정에 있어 지금 당면한 현재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명확하게 일러준다. 현재의 나를 주목하라!
요사이는 그것을 “지금 행복하라!”는 데로 몰아가는데, 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이야 어쨌든 모든 과보는 그대로 이행되고 업대로 간다는 것은 참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가 정리하자면 부처님이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선종으로 되었고, 말할 수 없었던 부분은 정토종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대로가 그대로 진리라고 받아들이면서 마음의 평화를 구하거나, 혹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버겁다면 죽어서도 그것은 가감 없이 이행된다는 정토종식 사고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나는 윤회한다. 윤회하는 것을 알았다면 그것으로 좋다. 윤회하는지 모른다면? 윤회한다고 믿고 생활하라. 손해 볼일은 없을 것이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합리적인 결론이다. 일본 진종眞宗의 개조 친란親鸞은 말했다.
“극락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계셔도 좋고 안 계셔도 좋다.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나의 신심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山田無文 老師, 현재훈 옮김,『부처님의 자비로운 목소리』 p. 112.)
물론 미동도 하지 않는 다고하기보다 미동할 것이 없다면 어떨까? 어쨌든 행복의 추구는 본능 같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붓다도 세간의 행복을 구하는 사람 중에 나를 능가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아나룻다야, 세간에서 행복을 찾는 것에서도 또한 나 이상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나룻다는 그 말씀을 즉시 이해하지 못하였다.
「세존이시여, 세존은 이미 미혹(迷惑)의 바다를 건너고 애착(愛着)의 늪을 벗어났으니 다시 또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또 무슨 이유로 행복을 구하려고 하십니까?」
여기서 붓다는 그를 위해 궁극의 경지를 투철한 사람도 더욱 추구할 것이 많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보시는 이 정도면 되겠다는 것이 없다. 인욕에는 이 정도 참으면 된다는 한계가 없다. 진리의 추구에는 끝난다는 것이 없다. 그리고 행복의 추구 역시 그와 같다고 말씀하시며, 붓다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덧붙였다.
「이 세상에 있는 갖가지 힘 가운데,
행복의 힘이 가장 뛰어나다.
천상세계[天界]에도 인간세계[人界]에도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붓다의 길[佛道] 역시 행복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불교 역시 그 모든 말씀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마쓰다니 후미오 / 장순용 옮김, 다르마 총서3『붓다의 가르침』 pp. 184~185.
9) 기룬 것은 다 님이다.
공리公理란 일반 사람과 사회에서 두루 통하는 진리나 도리다. 수학이나 논리학 등에서는 증명 없이 받아들이는 자명한 진리이고,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원리이다. 쉽게 말해 진리이다. 그런데 공리란?
<공리는 어디에다 정해도 좋다. 그 결과는 모두 참이다.(隨處作主 立處皆眞)>《임제록(臨濟錄)》에 있는 이 말은 모두 진리가 될 수 있고 그러기에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님을 갈파(喝破)한 것이다. 여기에 인식과 대오(大悟) 사이의 비약이 요구된다. 달의 자리를 가리키기 위한 손가락은 달을 인식한 뒤에는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지성의 한계까지 사유를 하다 보면, 결국 논리의 필요는 없어진다. 여기에 포기가 아닌 비약, 즉 지성에서 대오의 경지에 이르는 비약이 있다. (김용운 지음,『0(零)에서 0(空)의 세계로』(고려원, 1991) pp. 120-121.)
임제는 ‘어느 곳에서든 그 곳에서 스스로 주인이 된다면 그 모든 것이 참이 될 것이다[隨處作主 立處皆眞].’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말은 진리란 어째도 좋다는 말인가? 그 말의 한계는 무엇인가. 그대로 읽으면 “서는 자리마다 주인공이 되라”는 뜻이지만, 다시 읽으면 “너는 서는 자리마다 주인공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추궁으로도 읽혀진다. 문제는 이해가 아닌 어떤 비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참 희한하재. 내처럼 무식하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놈에게 기적이 일어났다니….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 이 일이 일어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난 그 날 이후로 모든 의문이 사라져 버렸어. 그 순간 내가 안 것은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 죽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언제나 생사에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천진 쓰고 현현 엮다,『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수행이야기』 p. 218. 이 말의 주인공은 저자들의 스승인 정봉 스님이다.)
‘의심이 사라져 버렸다’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마음’ 즉 의심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확실히 알았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을까? 혹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관통하는 어떤 원리를 알았다는 의미일까? 혹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두 파악했다는 뜻일까? 확실한 것은 최소한 그런 것이 궁금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성과는 다르다. 그것은 논리와도 통하지 않는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한용운 시집,『님의 침묵』「군말」. 수학자 김용운은 이 시 첫 번째 연을 인용했는데, ‘기룬 것은 모두 님’이라는 뜻은, 지성에서 대오의 경지에 이르는 비약을 전제로 해서 얻어진 경지라는 취지다. )
‘자유롭다’는 말은 구속이나 속박 따위가 없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임제의 선언처럼 모든 주권主權이 나라면 바로 낙樂이요, 무엇이든 다른 것에 예속되면 모두 고苦인 것이다. 그러려면 어느 것에도 걸리지 말아야 한다.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을 만나도 기죽지 말아야 한다. 나보다 뛰어난 업적을 쌓은 사람을 보아도 부러운 마음이 솟구치지 않아야 한다. 안으로 부족한 것이 없고 밖으로는 구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스님의 가풍입니까?”
“안으로는 한 물건도 없고 밖으로는 구할 것이 없다.”
(선림고경총서 18, 백련선서간행회 편,『조주록趙州錄』 p. 137. 원문: 問, 如何是和尚家風. 師云, 內無一物, 外無所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