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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일본 불교사
일반적으로 일본 불교는 크게 고대古代, 중세中世, 근세近世로 나눈다. 그중 고대는 아스카(飛鳥·白鳳, 6세기 말~8세기 초), 나라奈良, 헤이안平安 시대, 중세는 가마쿠라鎌倉와 무라마치室町 시대로, 그리고 근세불교는 에도江戶와 메이지明治 시대 불교로 나눈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중국이나 한반도의 발전된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거꾸로 이는 대륙으로부터 어렵게 전해진 문화를 충분히 음미하고 일본화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이기도 하다. 불교도 마찬가지여서 중국 주변 여러 나라의 불교는 대체적으로 비슷비슷하고 공통적인데 반해, 일본불교는 그들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가진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음에도 점차 다른 길을 걷게 되어, 확연히 다른 일본만의 불교를 갖게 되었다.
1. 아스카[飛鳥: 538~710] 시대 불교
아스카 시대는 정치의 중심지가 현 나라현奈良縣 아쓰카무라[明日香村], 즉 아스카[飛鳥] 일대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스카[飛鳥]와 하쿠호[白鳳: 645~710] 문화가 개화한 시기로 아스카에 궁전을 비롯한 도시가 형성이 되고, 한반도 등 대륙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때다. 이 시기 국호도 왜국倭国에서 일본日本으로 바뀌었다.
1) 불교의 전래
일본에 불교가 처음 알려진 것은 5세기경으로, 대부분 한반도로부터 이주한 도래인渡來人들에 의해서이다. 6세기에 들어서면 고대 국가의 확립과 함께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불교가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 후반부에서 통일신라 전반기쯤이다.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성립된 불교가, 기원전 1세기경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그리고 이어 4세기 후반쯤엔 고구려와 백제로, 6세기 초에는 신라에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하고 어언 천년이 흐른 뒤다.
일본으로 불교가 전해진 전래 루트로는 다음 2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국가 간의 외교를 통한 공식적인 공전公傳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왕래나 이주 등으로 인한 사전私傳, 즉 사적인 루트를 통해서이다. 공전에 대한 첫 기록은 정사正史인『일본서기日本書記』에 나타나는데, 일본 29대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509~571, 재위: 539~571] 때다. 흠명欽明 6년(545) 백제 성왕[聖王, 523~554]이 일본 천황을 위해 장육丈六 불상의 만들었다고 하고, 이어 흠명 13년(552)에는 불상, 경전, 스님을 보내왔다고 한다.(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 15. 저자는 전래 연대에 대해 자세한 논의를 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552년(흠명13, 임신년) 10월, 백제의 성명왕(聖明王, 성왕)이 사신을 파견하면서, 금동 석가여래불 1구와 약간의 번개(幡蓋), 경전, 그리고 불교숭신의 공덕을 적은 서신 등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552년 백제로부터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해진 것이다.
한편, 이러한『일본서기』의 공전기록과는 약간 다른 내용을 전하는 사료들이 존재한다.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과『원흥사가람연기병유기자재장(元興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이 그것인데, 백제 성왕으로부터 일본으로 불교가 전해졌다는 대략적인 내용은『일본서기』와 같지만, 전래시기와 구체적인 전래품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전래시기가 문제인데, 이들 사료에서는 모두 흠명천황 대의 ‘무오년 12월’, 즉 538년(흠명천황의 재위기간을 41년간으로 볼 경우 흠명 8년에 해당함)에 전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2 제1 강좌 일본불교의 여명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일본서기』의 기록과 다른 흠명 8년 538년이라는 설은 백제의 사비천도와 연관되어 있어 의미가 있다. 백제의 사비천도의 해가 또한 성왕 16년 538년이기 때문이다. 협소한 웅진에서 이남인 곡창지대 사비로 옮기면서 다른 나라에 이를 알리고, 국가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으로의 사신 파견과 불교의 전수가 있었다는 것이 자연스럽다.
당시 백제의 내부사정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한 수세적 목적으로 단행된 웅진천도(475)와는 달리 사비천도는 백제의 중흥을 위한 개혁의 완성적 의미가 강했다. 즉, 동성왕→무령왕→성왕의 삼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추진된 일련의 중흥정책은 결과적으로 통치체제의 안정은 물론 경제적 기반의 확대나 대외적 위상의 향상 등으로 이어졌다. 지리적으로 협소한 웅진은 더 이상 수도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사비 이남의 곡창지대를 확실히 확보해 두는 것 또한 국력신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이처럼, 백제의 사비천도는 백제의 중흥을 대외적으로 확정짓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일본으로의 사신 파견과 불교의 전수 또한 새롭게 다시 태어난 백제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이에 관해서는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충분히 그 가능성은 열어둘 수 있다고 본다.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2 제1 강좌 일본불교의 여명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한편『일본서기』민달13년(敏達: 584) 9월조에는 ‘불법의 시초가 여기에서 성립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소가씨 가문의 소가노 우마코[蘇我の馬子, 551?~626]가 백제로부터 2구의 불상을 얻었다는 것과, 588년 젠신니[善信尼] 등 3인의 비구니를 출가시켜, 계를 받기 위해 백제에 보냈다는 기록이다. 소가노 우마코는 30대 비다쓰[敏達] 천황 때 대신大臣에 취임한 이래, 31대 요메이[用明], 32대 스슌[崇峻], 그리고 33대 최초의 여제女帝이자 동아시아 최초의 여성 군주였던 소가노 우마코의 질녀 스이코[推古] 천황 등 4대에 걸쳐 권세를 누린다. 그는 54년 간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소가씨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공전이전에도 이미 일본열도에 불교문화가 전래되어 있었는데, 이른바 도래인이라고 불리는 한반도나 중국 출신의 유민들에 의해서이다. 고대 일본사회에서 이들의 위상은 굉장히 높았는데, 이들은 새로운 문물을 전하는 매개체이면서 동시에 농업 기술 등 새로운 테크닉을 가진 신기술 집단이었다.
고대 한반도나 중국의 격동적 세력다툼에서 밀려 일본에 이주하여 집단을 이루고 있었던 도래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제철, 직물, 제도(製陶), 치수, 건축, 농경, 문자, 역법, 산술, 의약 등의 선진기술을 독점·세습하였다. 또한 지속적으로 대륙의 문물을 수입하여 일본사회에 적용시키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전담함으로써, 고대 일본사회의 상층부에 편입되어 그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특히,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운 큐슈(九州)지역이나, 당시 일본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던 나라(奈良) 인근의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오카야마(岡山)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도래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불교공전 이후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숭불파(崇佛派)와 배불파(排佛派)의 치열한 다툼과정에서도 숭불파의 주역을 담당하였던 것도 도래인들이었다.(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2 제1 강좌 일본불교의 여명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일본에 전해진 불교는 처음 보수적인 집단들에 의해 배척받는다. 그러나 그 저항이 그리 크지는 않았는데, 다만 새로운 종교인 불교와 원래부터 존재하던 신앙과 융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는 이미 8백 만이나 되는 신을 받드는 재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外國으로부터 宗敎가 수입될 때에는, 예부터 내려오던 종교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日本에 불교가 건너갔을 때에는 충돌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物部氏의 反對가 진압되고 蘇我氏의 政權이 확립됨으로서 불교의 지위도 보증이 되었다. 物部氏의 반대라고 하드라도 그것은 새로운 宗敎理念에 관한 반박 같은 것이 아니고, 外國의 神들과 日本의 여러 神들과의 優劣을 다투는데 지나지 않았다. 蘇我氏들만 하드라도 불교의 敎義에 관하여는 흥미도 이해도 없이 단지 멋진 異國의 神도 함께 봉안하는 편이 효력이 있을 듯하다는, 완전한 타산으로부터 불교를 채용한데 불과하였다. 당시의 천황들마저도 전혀 같은 생각에서, 혹은 佛敎와 神道와의 양자를 나란히 채용하고, 혹은 한 쪽 것을 버리기도 하였다. (도변조굉渡辺照宏(와다나베 쇼오꼬오) 저著, 이영자李永子 역譯, 『일본불교日本佛敎』 pp. 80~81.)
2) 백제계 도래인 소가씨[蘇我氏]
6세기 후반쯤에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에는 불교유입문제를 놓고 중앙호족들 간에 다툼이 벌어진다(당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새롭게 수입된 불교를 채용하는 기준이 질병疾病의 유행이나 천재지변들을 제어하는 데 있었다. 불교가 종래의 원시신들보다 효과적이냐 아니냐로 따져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말해준다.). 불교를 수용하여 개혁정치를 하려는 백제계 도래인渡來人 소가씨[蘇我氏]와 기존의 정치권력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신라계 모노노베씨[物部氏]가 그들이다. 왜로 먼저 건너온 배불파排佛派인 신라계 모노노베씨와 숭불파崇佛派인 백제계 소가씨 사이에 다툼은 587년 전쟁으로 판가름 나는데, 신흥 개혁 세력이었던 소가씨가 승리하므로 써 불교가 공식화 된다.
이로서 불교전래 이후로부터 약 반세기에 걸쳐 계속되어온 숭불파와 배불파의 격한 대립은 끝을 맺는다. 결과적으로 군사적 실력행사라는 최후의 수단을 통해 일단락될 수밖에 없었지만, 고대 일본사회에서 불교의 수용이 서로의 입장에 따라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던 중대한 사안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숭불과 배불의 이유와 목적이 순수한 종교적 차원의 것이라기보다는 서로의 존립기반과 정치적 이득에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2 제1 강좌 일본불교의 여명,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소가씨가 승리하면서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시텐노지[四天王寺]와 소가노 우마코의 호코지[법흥사法興寺]가 건립된다. 소가씨 편에 섰던 쇼토쿠 태자[성덕태자聖德太子]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사천왕상을 새기고 서원을 세운다. 이 싸움에 승리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것과 함께 사천왕을 안치하는 사원을 건립하겠다고 서원했던 것이다. 시텐노지[四天王寺]는 백제 기술자들에 의해 스이코[推古] 천황 원년(593)에 건립된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의 일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 시텐노지는 많은 고난을 겪는다. 1576년에는 화재로 전체 가람이 완전히 소실되었었고, 1934년에는 무로토 태풍[실호태풍室戸台風]으로, 1945년 태평양 전쟁 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탑과 정문, 금당, 남측 회랑 등이 모두 불탔다. 그때그때 복원되고 무너지고 하면서 금당과 탑 등의 건축 양식 또한 바뀌어, 현재는 강당과 금당, 탑, 정문이 일직선으로 놓인 백제식 가람배치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흥사[法興寺, 현 아스카데라[飛鳥寺]는 588년 소가노 우마코의 발원發願으로 596년에 창건됐다. 엄밀히 말하면 불교 초전지이자 최초의 사찰은, 현 나라현奈良県) 타카이치군[高市郡] 아스카무라[明日香村] 토유라[豊浦]에 있는 코우겐지[向原寺]다. 이곳은 불교공전 시에 백제로부터 전해진 금동석가불을 모시던 곳[向原の家]으로, 토유라데라[豊浦寺]라고 불리던 절이다. 하지만 불교사원으로 건축된 최초의 사찰은 아스카데라[飛鳥寺]라고 할 수 있다.
법흥사 역시 백제 도래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법흥사의 본존불인 아스카다이부쓰 대불[銅造釈迦如来坐像]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금동불상이다. 창건 당시 장대한 모습이었던 법흥사는 9세기와 12세기 있었던 대화재로 소실된다. 그리고 오랜 기간 폐사廢寺로 있다가 1632년과 1826년에 재건되어 지금은 많이 축소된 모습인 아스카데라[飛鳥寺]로 남았다.
일본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인 아스카데라는 <587년 발원>→<588년 정지시작>→<590년 목재 확보시작>→<592년 본격적인 건물공사시작>→<593년 불탑조용 시작>→<596년 가람완성>→<606년 본존불인 석가여래삼존상 조상> 등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최초 발원에서 가람이 완성되기까지는 약 11년, 본존불을 모시기까지는 약 20여년이 소요되었다. 당시 일본 최고의 권력자였던 소가노 우마코의 발원과 후원, 그리고 백제에게 파견된 사찰조영전문가 집단의 직접 참여로 이루어진 대사업이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법흥사가 초기의 기초공사부터 백제의 공인들이 파견되어 직접 건립한 사원임에도 불구하고, 1탑3금당식의 고구려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법흥사의 건립에 백제의 사원 조영 전문가뿐 만아니라, 고구려의 가람기술자, 내지는 그러한 기술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 협력하고 참여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와는 달리 같은 도래인으로써 서로 이질감이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학술적 해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지만, 당시 일본이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나 고구려에서도 불교문화를 수용하고 있었고, 고구려·백제·신라가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 있었던 한반도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각각의 유민들이 서로 대립하기 보다는 도래인(渡來人)으로서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공동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함께 단합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출신의 승려 혜자(惠慈)와 백제출신 혜총(惠聰)이 별다른 마찰 없이 아스카데라의 완성과 더불어 그곳에서 함께 머물렀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비록 백제의 공인들의 주도로 아스카데라의 조영이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사원기술이 도래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고구려식의 가람이 만들어졌다는 가정이 성립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별도로 필요할 것이다.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4. 제3강 일본최초 본격적인 사원 아스카데라(飛鳥寺)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2)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소가씨는 일본 최초의 여제 스이코 천황이 즉위하고, 다음 해에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를 스이코 천황의 섭정으로 내세운다. 스이코 천황은 일본 황실 최초의 여왕女王이자 후세에 여제女帝로 추존된 인물로, 쇼토쿠 태자[성덕태자聖德太子]에게는 고모姑母가 된다. 성덕태자의 외가가 백제계 도래인인 것이다. 소가노 우마코는 섭정이 된 성덕태자와 합의하에 정국을 이끌었다.
성덕태자는 불교를 장려하였는데, 594년에는 삼보흥륭三寶興隆의 칙서를 내리고, 604년에는 ‘17조 헌법憲法’을 제정하였다. 607년에는 호류지[법륭사法隆寺]를 창건하였는데, 이 절은 단순히 예배의 시설이라기보다는 성덕태자의 불교 연구 장소로 쓰이기도 하였다. 호류지는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 오경五經과 채화彩畵에 능했던 담징(曇徵, 579~631)이 그린 금당벽화로도 유명하다.
당시 일본 불교의 지식층은 대부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건너온 한국 승려들이었다. 백제는 일본과의 접촉이 빈번해서 도림道琳ㆍ담혜曇慧ㆍ혜미慧彌 등 많은 고승이 일본으로 건너와 불교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595년 건너온 백제의 혜총慧聰과 고구려의 혜자慧慈 같은 이는 법흥사에 머물며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불교는 왕족이나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고, 승려도 본인이 원했다기보다는 관료에 가까웠다.
성덕태자는 학승 혜총과 혜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스스로도 여러 경전을 연구하여『유마경維摩經』『승만경勝鬘經』『법화경法華經』에 대한 주석서『삼경의소三經義疏』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덕태자는 ‘일본불교의 아버지’라 하여 사후 그를 모시는 태자신앙[타이시太子신앙]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쇼오도쿠 태자는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로, 요즘에는 쇼오도쿠종(聖德宗)이라는 종파가 성립해 있을 정도이며, 담징의 벽화로 유명한 호우류지(法隆寺)를 본산으로 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쇼오도쿠 태자는 일본 왕실의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전륜성왕(轉輪聖王)과도 같은 존재다. 쇼오도쿠 태자가 창건했다는 시덴노지(四天王寺)는 오사카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래는 천태종이었으나 후일 와슈(和宗)로 종명(宗名)을 개칭하였는데, 그 이유 또한 쇼오도쿠 태자에 대한 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박보경,「생활불교의 빛과 그림자」 2008. 일본 류우코구(龍谷)대학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논문으로 <중국 유식학에 있어 이파(異派) 논란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성덕태자는 일본 지폐 도안에 가장 많이 들어간 인물로도 유명하다. 1930년, 일본은행권 100엔 지폐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1,000엔 지폐, 5,000엔 지폐, 10,000엔 지폐 등 모두 일곱 번에 걸쳐 지폐 도안에 사용되었다. 성덕태자는 수隋나라에 견수사遣隋使와 학문승을 파견하여 중국의 사회제도와 학문을 받아들이는 등 일본 불교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
3) 본지수적설本地垂跡說
성덕태자는 또 일본고대의 종교와 습속을 지키려는 세력과의 타협책으로 ‘본지수적설本地垂跡說’을 주장한다. 본지수적설이란 일본 재래의 제신들이 인도불교의 제불보살의 화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들의 재래 신과 부처를 하나로 보는 것으로, 본지수적설에 의해 불보살은 ‘본지本地’로 주가 되고, 일본의 신들은 ‘수적垂跡’으로 종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승려들이 신주神主들을 통괄하게 하는 관례를 세운다.
초기의 신불습합은 단순히 민간 신사에서의 불교의례 실시 등의 모습으로 시작되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신도와 불교의 혼합이 심화되었고, 신도의 신들이 불교의 호법신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신사 경내에 병설하는 사원인 신궁사(神宮寺)가 나타나게 된다. 처음에는 신사가 사원의 관리권을 가졌으나 이후 점차 사원이 신사를 지배하는 구조로 바꾸게 된다. ([출처] 일본불교 레포트 - 신도(神道), 불교, 그리고 신불습합(神佛習合)|작성자 선인)
이 같은 신도神道와 외래 불교의 융합을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고 한다. 불교와 신도의 공존은 메이지 시기 ‘신불분리령神佛分離領’으로 신사에서 사찰이나 불상, 스님들이 축출당하기 전까지 일본불교의 가장 큰 특색으로 계승되었다. 불교와 신도를 분리하면서 신도의 우위를 주장하는 신불분리령으로 인해 불교는 곧 박해의 대상이 되었고, 신불습합이 주를 이루던 일본 불교계는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이에 따라 기성 불교계는 그동안의 신불습합을 버리고 경전을 중심으로 한 학문연구 등 엘리트 불교의 길을 가게 된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경우 신불습합까지는 아니지만 불교가 한국의 토착신앙과 융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국 어느 사찰에 가더라도 불교 본연의 불사를 드리는 본당 이외에 토착신을 모시는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 등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산신을 모신 산신각은 우리나라 토착신앙인 산신山神 신앙과 융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군이 나중에 산신령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고유의 신선사상神仙思想까지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보통 산신각은 법당 위에 존재하는데, 불교의 신보다 우리의 조상신인 산신을 우위에 두는데 의미가 있다. 선종이 수용된 9세기 이후 산지가람으로 발전하면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는 보다 긴밀하게 되었다.
위치상으로 보아 산신각이 상위, 불당이 중위, 장승이 하위에 위치하는 우리나라 가람의 삼중구조는 상당으로 관념 되는 산신당, 중당으로 관념 되는 서낭당, 하당으로 관념 되는 장승과 솟대의 삼중구조와 상호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 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신당은 불교의 수용과 함께 융화되어 사원 내에 존재하며 현세구복, 기복 불교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