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만인소(영남의리소)의 역사적 흐름과 의미
1. 전개과정(위정 만인소 위정척사 만인소 영남의병 특히 안동의병의 모태 영남지역 독립운동 영향)
1) 영조(英祖) 38년 사도세자가 뒤주속에 갇힘(억울한 누명으로 봄).
2) 봉화시드물(정조즉위년) : 봉화법전의 풍정동(시드물 전주이씨)인 계촌 이도현의 사도세자 복권·상소(멸문지화)
3) 도산서원 별시 : 정조 16년 2월(1792년)
정조의 왕권강화를 위한 도산서원 별시(바래미 7,228여명참여 고식헌 김희락 장원)
4) 유성한의 상소[임금(정조)이 경연보다 유흥에 심취한다.]
※도산 별시후 정조의 축하 행사 참여
5) 체재공등의 유성한 비판 상소
6) 정조 16년 와은 김한동(바래미)이 관보를 보고 해은 김희성(삼계서원장,바래미), 해와 김희택(바래미)등에게 의논하면서 벼슬한 분(진신)은 내가 책임, 벼슬하지 않는 분(장보)는 희택이 책임 지겠다. 류회문(풍기의 서원원장으로 적극참여). 영남만인소(의리소)의 탄생.
***만인소의 주내용 유성한이 빌미이나 주내용은 사도세자의 신원회복(위정) 일명 의리소
7) 사도세자 추숭상소(철종 6년 1855년):정재 유치명(유회문의 아들),정산 권대제(평암 권정침의 증손) → 유배
→ 정재류치명 위상 강화(문하생 급증)
정재 유치명은 바래미 필동의 외손이이고 바래미가 길러낸 남한조(단사 김경온의 외손)에게 사사받음
8) 이휘병 예안의 이차 영남만인소(영남유생 1만432명) : 바래미 일지와 김택동의 외증손
9) 1880년(고종 17년) 황준헌의 조선책략
중일미연합 → 남진하는 러시아 세력 방어
10) 영남유림의 위정 척사운동 전개 → 의병활동으로 변모 [김희곤의 봉화독립운동사 참조]
① 1차 : 돈와 이만손 제소자(강진규 : 춘양)(예안 이휘병 아들)
일차소수(영주 우금에서 논의하여 안동 예안의 돈와 이만손 추대)
이만손의 사위는 바래미 우수이며 고종3년 병인양요시 외세를 물리치기 위하 영남 소모사
손자 보림과 창식(위인전과 봉영청년동맹참여)
이시대에 척사의 대표격으로 보아도 좋은 소모사 활동은(의병과 자금을 모으는 직책)이만손과
연관있는 듯
② 2차 소수 : 승환 김조영(바래미, 김희택 증손)
김조영 가문은 일제시대 탄압으로 만주 이거 행불
③ 3차 소수 : 김석규(영주 두암리)
④ 4차 소수 : 김진순(안동)
11) 안동의병 삼계서원 통문(가장빠른 통문 )(정재문인 대거참여)
가문과 유생등이 거문적으로 참여한 최대의병
2. 연남만인소의 의미와 임자일록의 사료적 가치
가) 위정만인소
1)정조16년의 영남만인소는 멸문지화를 각오하고 일으킨(사도세자의 죽음은 잘못된 것이라 봄)위정 만인소로 정신과 기개는 선비정신의 결정체이다
2)일만명이상의 진신(벼슬한자), 장보(유생)이 모여서 수결하여 상소한 세계 최대 최고의 만인소임.
3)영남문중과 유생의 단합을 처음으로 이끌어 낸점.
4)가문과 유생의 단합된 힘들이 정재 위정척사를 거치면서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의병활동등으로 변화하며 영남 좌,우도의 독립운동과 심산탄생의 비밀이기도 하다는 점.
5)실제로 김희택은 멸문지화를 각오로 하겠다함.
나) 안동의병과 독립운동의 모태가 된 점(아는 데 까지 올려드린 것임)인물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함
1) 영남 만인소(정조 16년)
<주도참여자> 바래미 마을 약 100가구 40인정도가 의사자 활동 참여 등 거문적 참여 4세대 독립운동(의사자 교육계몽투신 참여자 포함 약 일제시대 약100가구 40인 거의 전가구가 실질적인 일이차 유림 활동주도 독립운동 참여(심산유고 비밀경찰요사와 기타 자료 참조)
김한동(실제주도) → 후손 김순영(파리장서 서명)
김희성(9분) → 진림(의병내방장) → 홍기 → 정진
→ 호림(의병격문, 활동독려) → 창숙(심산탄생의 열쇠)*****************************
→ 창백
만기
→ 창돈
→ 교림
김희택(만인소 유생들 주도) ,김조영(증손 위정척사만인소 소수) ,김창근, 김중열(독서회참여)
김희주 → 건영 → 고종만인소소수 → 파리장서 서명,후손 헌식,창신
류회문 → 정재(퇴계 정통학맥) → 류지호(의병지원)ㅡ류연박(의병 참모 파리장서 참여 홍기의 장인) → 류동시(3.1독립운동)
(바래미 필동의 외손) ※무실대거 의병 참여 외. 거문적 참여
한국국가 발전 연구소 설석규 논문 정재학파 위정척사론의 대두와 성격(정재 류치명의 위정척사 사상)
퇴계학통의 정맥으로 퇴계 이황 학봉김성일, 대산이상정, 남한조, 정재 류치명(대산 이상정에서 남한조와 정재는 바래미와는 특별 관계임) 이들이 의병활동을 주도한다고 나와 (확연히 나타난 부분은 최대규모인 안동의병 참여자
바래미 다실(창의 대장)춘양 8인 정재가6인 내압(다수 참여)정재문인 고위층을 포함한다면 이가문들의 주도로 일어난 것이며
향산 이만도 또한 정재 문인으로 나와
2) 사도세자 추승상소 권대제 → 닭실가 - 의병창의대장 권세연
- 파리장서 6분 참여
정재 류치명(퇴계정맥)은 위정척사 사상 → 위상강화 문인들 대거 참여
내압의 김흥락(의병대거참여)와 향산 이만도(의병대장 순국)도 정재 문인으로 나와
3) 1차 만인소 소수 이만손(퇴계가) → 향산 이만도 등 의병과 독립운동가 거문적 참여
제소자 강진규(춘양) → 의병(3분의 간부진)과 독립운동참여
2차 : 바래미 김조영
4) 안동의병
영남유생들의 위정척사 운동이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구국운동으로 변화함
: 의병사상 가문의 지원을 받은 가장 큰 의병
① 참여가문
봉화 다실3, 봉화 바래미 해저2, 봉화 춘양3
② 총 참여자 39분 중 봉화와 무실(정재)가 14분을 차지함.
③ 특히 창의 대장 외 간부 서열 10인 중 4분이 봉화인으로 당시 안동지방에서의 위상을 반영한 듯.(봉화 바래미와 다실 춘양은 당시 안동도호부 소속)
④ 봉화 유생들은 정재 문인으로 참여
(정재와 바래미의 관계)
정재부친 류회문은 필동의 외손자
바래미가 키운 남한조는 정재의 스승
진림등은 정재문인(안동 소파록에서 의병 내방장)
⑤ 파리장서의 작성자 곽면우 선생도 봉화지역(다실과 춘양)에 은거하면서 의병논의 참여
⑥ 정신과 기개 가문의 지원등이 경북 독립운동의 모태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다.
다) 사료적 가치
1. 의병활동의 모태가 되는 영남가문과 의병의 단합된 힘.
2. 선비정신 연구자료
3. 정조 16년의 만인소 전개과정을 소상히 밝힐 수 있는 자료
4. 세계 최고 최대의 연명 상소문
5. 일제 시대 발전을 더디게 했다는 의미로 일제가 축소지향이나 만인소 가문과 후손들이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선점
(한국국사학 연구소의 이욱은 정신과 기개가 의병활동의 원천이 된다함)
라) 미래가치
① 봉화선비정신의 결정체(봉화의 위상제고)
② 만인소 관련 행사 기획
③ 드라마와 연계소재 개발(만인소와 독립운동 Road탐방)
④ 다큐멘터리 등의 소재
⑤ 자연과 문화의 두 축
자연에 비해서 취약했던 봉화의 우수한 문화재연의 발판마련
⑥ 실제로 봉화 일부지역은 예전 안동도호부소속으로 과거급제대과로 보면 소과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영남에서 10위권중에 춘양 강씨 법전가문, 바래미 의성김씨 개암공파가문, 다실권씨 권두인가문,
오록 풍산 김씨 망와 김영조 가문등이 10위권에 포진 또는 동시대 기록으로서는 1등을 차지한 법전가문(대과기준) 바래미가문(사마시와 대과 기준)으로 볼때 우수한 문화와 정신 등의 많은 문화유산의 계승 발전이 필요함.(식문화와 놀이 문화 창수시와 가사문화등이 무척 많아 복원이 필요함) 만회고택가만도 15첩반상과 가로술(이화주)점주외 넘쳐나
만회고택가는 심산의 생가 상징으로서 심산가는 14대에 12진사와 6대과 독립운동가 3분 벼슬하지 않는 분은 안동좌수 뛰어나고 휼륭한 문화를 가진 심산가는 명문가라는 것
독립운동가이신 홍기의 독립운동가 유관간찰 수백통 콘텐츠화가 필요할 듯
물론 일시적인 이벤트인 송이 축제와 은어축제도 중요하나 일시적인 이벤트보다 지속 가능한 문화에 중점을 두는 것도 중요함.
바래미와 유곡등과 청량산의 자연 환경과...의 연계문화 개발은 특히나 내성시의 직접적인 소득수준 향상에 기여할 것임.
***두드려지게 나타나는 것이 만인소가(정재가문)정재부친인 유회문을 위시한 30정도의 혼약 이만손가문(퇴계가문) 청아댁 희성가 우수가와 인연(바래미는 만인소의 중심지며 독립운동의 원천)
영남_만인소의_의의와_전개과정.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