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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피터 마스터스의 10월 28일 2012년 저녁복음설교: 누가복음15장11절
[요약: 그리스도의 비유 중 가장 유명한 비유는 ‘탕자의 비유’일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반항심의 본질과 우리의 영적인 허무함을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상태를 볼 수 있게 깨우실 때와, 회개와 믿음으로 그를 찾게 우리를 이끄실 때 어떻게 되는지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5장1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오늘 저녁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 입니다. 탕자(prodigal son)라는 말은 ‘낭비하는/방탕한 자’라는 말이고 라틴어로 ‘사치스러운’, ‘낭비적인’이라는 말에서 나온 단어 입니다. 더 나은 제목을 준다면 간단하게 ‘두 아들의 비유’라고 할 수 있고, 아니면 ‘영적인 각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각성’이라는 제목이 제일 정확히 비유의 의미를 전합니다. 드믈게 사용되는 제목이지만 내용의 핵심을 제일 잘 잡아줍니다.
비유에 두 아들들이 나오는데 오늘은 둘째 아들, 탕자만을 볼 것입니다. 둘중에 더 유명한 아들입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두 아들 중 한 아들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 아니면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째 아들, 탕자와 비슷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영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어떤지 이 비유가 잘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이 누굴 상징하는지에 대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거에 대해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이 비유는 이해하기가 너무나도 쉽습니다.
아주 있음직하지 않은 사건으로 이 비유가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말하는 핵심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 아버지를 반대하고, 실은 아버지를 무지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이러길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고, 아버지 재산 중에서 제가 가져야 하는 몫을 바로 지금 갖고 싶습니다. 그 돈, 그 재산을 갖고 저는 떠나겠습니다!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살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 살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아버지에게 이러한 말을 하진 않을 것입니다. 화가 났을때나 짜증을 낼때 비슷한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심한 것입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있음직하지 않은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이 아들이 도데체 왜 자기 아버지를 이렇게 미워했을까요? 비유를 보면 아버지가 이렇게 미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아들의 아버지는 아주 좋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비유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너무나도 미워합니다. 아들이 자만했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를 싫어했고 재산의 자기 몫을 바로 지금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가 문자 그대로 있음직하지는 않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너무나도 현실을 직시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의 행동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도 갖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듯이 저는 생각하고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의 몫을 갖고 내 자신을 위해 쓸 것입니다! 내 힘과 능력과 은사와 내 지식과 내 체력과 내 기억력, 등등을 갖고 내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나만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 것입니다! 하나님을 몹시 미워하고 하나님께 감사할께 아무것도 없다 생각하고, 하나님 없이 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있음직하지 않은 사건은 하나님에게 방항적인 사람들 마음 안에 항상 일어나는 것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줍니다. “꺼지세요! 하나님에 대해 관심 없습니다! 너무나도 사실적인 말입니다. 회심하기 전의 저와 당신들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고 있다”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서부터 모든 것을 훔치고 싶어하고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갖고 싶지 아니한다!” 이렇게 비유가 11절에서 시작됩니다.
12절을 봅시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그리고 아주 놀랍게도]…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가 아들이 원하는 것을 줬습니다. 아들에게 재산의 몫을 줬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십니다. 우리에게 임대차 계약 같은, 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십니다. 우리는 이 계약을 갖고 떠납니다. 살고 싶은대로 살고,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대로 살 수 있게 됩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렇게 산 것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계약이 끝날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같이 이 비유에 보입니다. 우리가 혼자 살 수 있게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모욕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건방지면 하나님을 무시할까요? 우리가 얼마나 교만하면 하나님을 외면할까요? 얼마나 세속적이고 육적인 욕망으로 차여있으면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우리 자신만을 위해 쓰고 싶어할까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하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제 모습입니까? 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까? 제가 진짜 이렇게 하나님께 말했나요? 제 하나님 아버지 한테?
13절엔 이렇게 써있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갔습니다.” 떠나는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있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해서 금방 떠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회심하기 전 저와 당신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릴 때부터, 청년일 때부터 우리가 스스로 의견들을 갖기 시작하며 “교회 다니기 싫다! 기독교를 원하지 않는다! 성경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 삶을 탐험하며 내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가지겠다! 난 사람들이 날 알아주길 원하고, 돈과 명성과 부를 원하고, 편함과 쾌락과 좋은 기분들을 원하다! 하나님을 원하진 않는다!”
언제부터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까? 얼마나 빨리 이러기 시작했습니까? 이 비유는 아주 세밀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아들은 떠났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즉시 반역하는 자들입니다. 가능할 때부터 가장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창조자에게 반항하는 자들입니다.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갔다고 말해줍니다. 아주 의미깊은 말입니다. ‘먼 나라’라고 말합니다. 이웃나라를 간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으로 옆에 있는 나라를 간 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으로 옆에 있는 나라로 간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제일 멀리 갈 수 있는 만큼 떠난 것입니다. 수많은 국경들을 지났을 것입니다. 넷, 다섯, 여섯 나라를 지났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먼 곳으로 갔습니다.
도데체 왜 그렸을까요? 자기 아버지 대해서 아무것도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버지의 연락을 듣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 간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무 관계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해서 아버지가 아무 소식도 듣지 않길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먼 나라로 갔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가려고 합니다. 교인들이 누구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교회로 초대하던가 어린아이들을 주일학교로 초대할 때도 주로 문을 꽝!하면서 닫습니다! 하나님에게서부터 최대한 멀리 있으려고 하고 교회에서 어떤 소식을 듣고 싶어하지도 아니합니다. 어떨땐 기독교인들이 일자리에서나, 학교에서나, 대학교에서나 다른 사람들이랑 하나님 대해서 말을 나누고자 할 때, 우리는 “듣기 싫다! 날 내비둬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부터 최대한 멀리 있고 싶어합니다. 도전을 받고 싶지 아니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도망가는 반항자들이고, 의도적으로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합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현실을 너무나도 정확히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냥 천재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비유를 얘기하실 때 우리는 자세히 들어야합니다. 모든 단어들이 깊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 필요한 단어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제일 멀리 갈 수 있는 만큼 떠났습니다. 우리도 또한 얼마나 반항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에게부터 멀리하고 싶어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재산을 낭비했다고 말합니다. 괘락과 여색과 죄에 재산을 다 낭비했습니다. 영어로는 “riotous living/방종한 생활”이라고 (KJV에)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헬라어 원본에 있는 단어는 번역하기가 쉽진 않습니다. 문자적으로는 “unsafe/안전하지 못한” 생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 문학을 보며 ‘낭비적인’, ‘가증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이 됩니다. 번역이 틀린건 아닙니다. 하지만 원본을 보면 꽤 재밌습니다. ‘안전하지 못한/위험한’ 생활이라고 얘기하며 이 단어에는 무책임적이었다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너무나도 많이 낭비했습니다. 돈이 없어지면 어떻게 할지 생각하지도 않고 재산을 낭비해버렸습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산다고 너무 바빴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과 능력과 은사들을 위험하게 낭비합니다. “그리스도를 원하지 아니하고, 회심을 원하지 아니하고, 성경을 원하지 아니하고, 천국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유명해지기 위해 바쁘다고 말하고, 괘락을 즐기기 위해 바쁘다고 하고, 젊은 시절을 죄를 짖고 살고 싶은데로 산다고 바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에만 관심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없어질 것입니다. 삶이 흐를수록 당신의 젊음은 없어질 것이고, 힘도 없어질 것이고, 자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짐을 지기 시작하고, 삶에 끝이 다가올 것입니다. 다시는 영원히 살 것이 아닙니다. 놀라울 정도로 곧 당신은 하나님 앞에 서서 당신의 삶에서 했던 일들에 대해 책임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위험하게 산다면 구원의 기회를 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을 버리는 것입니다. 낭비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고, 그 때에는 너무 늦을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는 너무 늦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당신께 아무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왜 죄를 지으며 삶을 살았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고 그후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에서부터 없어질 것입니다.
이 비유의 모든 단어들에게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돌째 아들은 책임없는 안전하지 못한 생활로서 삶을 낭비해버렸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다 없앤 후…”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살았던지,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던지, 얼마나 많은 하인들을 두고 살았던지, 어떤 괘락을 즐겼던지, 어떤 물질들을 갖고 있었던지 상관없이 이젠 다 없어졌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 없앤 후 아무것도 없을 때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어쩌면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삶을 사시면서 하나님을 거절하시고 경멸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 그리합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가질 수 있는데도 그리합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실 수 있고 당신이 주님을 알고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데도 그리합니까? 하나님께서 당신께 성품과 삶의 목적과 영원한 숙명을 주실 수 있는데도 그리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경멸합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당신은 지금 흉년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흉년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이 둘째 아들이 간 곳에서는 영혼을 채워줄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영혼의 양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면 당신의 영혼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성경을 읽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모르고, 기도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굶주려진 것입니다. 당신의 성품은 더욱더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심해집니다. 이것이 흉년입니다. 당신의 영혼이 양식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목적 없는, 의미 없는 흉년입니다. 당신은 삶의 참된 목적이 없고 최종적인 목적이 없습니다. 아무 영적인 목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꼭 필요합니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서 궁핍한지라.”
이렇게 궁핍해젔을때 둘째 아들은 자기 아버지 대해서 먼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내가 내 재산을 낭비해버렸다! 내가 내 아버지를 싫어했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너무나도 좋은 아버지였고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은 너무나도 좋은 것이었다. 내가 예전엔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난 너무나도 건방젔고 어리석었다.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올바로 보지 못했다”라고 둘째 아들이 얘기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난 지금 도랑에 빠저있고,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난 이것들을 감당할 수 있다! 난 살아 남을 수 있다! 난 계속해서 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날 이겨내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가질 수 있던 일들 중에 제일 좋은 일은 돼지들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비유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리고 또한 이 비유를 자세히 보면 그 돼지 주인은 둘째 아들에게 얼마 안되는 보수를 주었습니다. 실은 너무나도 보수를 적게 받아서 둘째 아들은 먹고 살기도 힘들어했습니다. 굶어 죽기 직전이어서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라고 적혀있습니다. 거의 굶어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이 젊은 남자를 이렇게 상상합니다. 냉담하고 교만하고 유능했던 젊은 남자. 하지만 이젠 볼살도 없고 몸이 비실비실 합니다. 근육도 다 없어졌고 굶어 죽기 직전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자기 자신의 방법이, 자기 자신의 해결책들이 성공하지 않고 스스로 일을 찾으려고 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자기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을꺼다. 일들이 해결되지 않고, 난 행복하지 않고, 아주 우울하고, 삶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매번 실망하게 되고, 사람들은 약속을 어기고, 직장생활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이것이 풀리지 않고 저것이 풀리지 않고, 예상치 않게 몸이 안좋아졌고, 직장에서 정리 해고당하고…아, 내 인간관계들도 문제가 많다. 부분적으로 내 잘못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날 몹시 실망하게 만들었다. "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게 마땅하다. 새로운 삶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야 마땅한데도… "아니야! 아니야!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꺼야! 내 자신을 스스로 일어 새우겠다”라고 말하지만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둘째 아들은 이제 갈 곳도 없고 어딜 향해서 갈데도 없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단기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도 실패했습니다. 이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역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비유에서 우리가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당신이 의기소침할때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에 실망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낄때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에 어떠한 심리학자도 당신을 도와주지 못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해결책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들 17절을 봅시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When he came to himself)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이에 스스로 돌이켰을 때…’ 실은 ‘스스로’라는 말이 우리를 조금 헷갈리게 합니다. 헬라 원본을 더 잘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하는게 더 낳습니다: “이에 돌이켰을 때,”(When he came to,). 우리도 이 표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돌이켜졌을 때.’ 그가 깨어났을 때…. 그가 깨어났을 때 제대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그가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있다면 자고 있는 것입니다. 꿈 세상에서 살고 있는거와 같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니 우리 삶은 비현실적입니다.
제가 이 예를 자주 사용했을꺼라 생각하지만 다시 한번 사용하겠습니다. 몽유병자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런던대학교 박사였습니다. 이 일은 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사람은 러니미(Runnymede)라는 지역에서 템즈(Thames) 강가 옆에 있는 아주 아름다운 집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집에는 강가까지 가는 긴 잔디밭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말해준 사람은 이 박사가 그 집에 살고 있을 때에 이웃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박사가 몽유병 때문에 밖에서 걸어다닐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룻밤 극심한 폭풍이 왔을 때 이 박사는 강에 빠져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박사가 자고 있는 도중에 밖으로 나갔다고 추리했습니다. 폭풍이 있었어도 자고 있었기 때문에 박사는 그의 주위를 아예 의식하지 못 했습니다. 폭풍은 그를 깨우지 못했습니다. 천둥번개가 침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자며 걸어다녔습니다. 그가 잔디밭에서 걸어다니다가 파도가 사나운 강으로 빠졌다고 사람들은 추리했습니다. 그는 그의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자고 있을 때에 꿈을 꾸고 있었다면 뭐 대해서 꾸고 있었을까요? 꿈은 현실과 아무 관계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없이 살고 회심하기 전, 목적 없을 때의 우리와 너무나도 같습니다. 우리도 꿈꾸듯이 행복하고 평온히 있지만 삶의 현실은 푹풍 같습니다. 우리 삶엔 죄가 너무나도 많고, 우리의 성품은 계속해서 파괴되고, 우리의 무신론주의와 물질주의와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이 계속 파괴되고 있지만 우린 이것들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위험들을 보지 못 하고,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심판의 날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몽유병자 같이 사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을 깨어났습니다. “이에 돌이켜…” 드디어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도데체 왜 여기 있는가? 내가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있는데 지금 내가 도데체 왜 이렇게 굶주리고 있는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내가 왜 여기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가 회심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에 회심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을 찾고 발견해야합니다. 둘째 아들은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러분, 당신들도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 삶을 살면서 도데체 왜 궁극적인 만족없이 사는지, 왜 깊은 행복과 평화 없이 사는지, 왜 영원한 목적 없이 사는지, 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사는지, 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사는지, 왜 죄씻음을 받은 마음과 새로운 성품을 갖지 않고 사는지, 기도를 모르며 사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도데체 왜 이러한지 물어보십시오. “
크리스천들을 봤는데 그들은 희망을 갖고 살고, 행복하게 살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산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무엇과도 하나님을 바꾸지 않는다 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채우시고 축복하시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다고 말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한다. 이 비유의 둘째 아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때 그가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우리도 이렇게 말해야합니다. “내가 무한하고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품꾼으로 사는 것이 지금 내가 있는 상태보다 훨씬더 낫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는 자로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겠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라고 해야합니다. 하지만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께 내가 바보 같이 행동했다고, 내가 뭘하고 있는지 정확히 몰랐다고, 내가 미숙해서 그랬다고 말해야겠다. 어떤 부분은 내 잘못이 아니었고, 나쁜 예를 따라서 그랬고, 나쁜 친구들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에 내가 뭘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해야겠다. 아버지, 지금은 배웠으니 저를 받아주세요”라고 둘째 아들이 말하지 않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죄를 작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고, 자기 죄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 돌아갈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방법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전 교만한 반역자 입니다. 제가 어리석은 것만이 아니라 교만합니다. 전 부정직하고, 이기적이고, 저한테 너무나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 주님, 제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비유에서 둘째 아들도 이러한 마음의 태도를 갖고 아버지께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그에게 향한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을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둘째 아들에게 와서 “뭐?! 네가 네 아버지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고?! 네 재산을 다 낭비해버렸다고?! 네 아버지가 너를 받아주겠냐?”라고 말했다면 둘째 아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가 어떠하신 분이지 모르십니다. 그는 저를 다시 받아주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비롭고 긍휼한 분이시며 저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제가 그에게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악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면, 그는 저를 다시 받아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가 처음부터 자기 아버지가 자비롭고 긍휼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미워하게 스스로 열을 내었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을 미워하려고, 모욕하려고 스스로 열을 내고 있습니까? 무신론자들을 믿고 하나님을 생각에서 없앨려고 합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하는 것을 정당화시킵니까? 이 비유를 문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둘째 아들도 그랬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둘째 아들이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젠 깼습니다. 20절 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그리고 (18절에 나오는) 말하려고 결심했던 말들을 아버지께 했습니다; 21절]”
우리도 이래야합니다. 혹시 이 장소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지만 행하지는 않을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기분이 우울할 때 “난 하나님을 찾겠다. 난 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 생명을 빌고 용서해 주시라고 빌겠다”라고 했지만 일어나서 가지는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움직여져 “내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라고 한 후 이 장소를 떠나 밖에 있는 것들에 휩쓸려 방해받고, 사단이 당신을 유혹하며 다른 것들에 호기심을 갖게 되어서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 어버지께로 돌아가 내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겠다”라고 한 말을 잊지 마십시오. 이 비유의 둘째 아들은 자기가 하겠다라고 한듯이 행했습니다. 이 아들의 예를 따르십시오. 여러분,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들께 이 비유에 있는 내용 중 아주 놀라운 것을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설교가 거의 끝났지만 이것을 꼭 말해드려야합니다. 둘째 아들이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고 적혀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 때 둘째 아들은 너무나도 배고파서 돼지들이 먹는 것을 먹곤 했습니다. 그렇게 배고팠다면 그는 쇠약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연약하고 힘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쯤엔 그 아들이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있었을꺼고 아주 가난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집을 돌아갔을까요?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이웃 나라에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먼 나라에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멀리 있었습니다. 이구절을 자세히 보면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라고 할 때 아버지께로 가까이 돌아가지도 못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He came to his father”라는 말은 “아버지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거리가 먼데… [미안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 아들이 멀리도 못 갔다고 생각합니다.]…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간 것입니다. 이 비유를 읽을 때 둘째 아들이 집에 가는길에 있는 마지막 언덕을 지나 집을 볼 수 있을 때쯤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왔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더 자세히 생각해보면 둘째 아들이 그 먼 길을 걷지도 못했을 것을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그를 찾으로 왔다는게 더 맞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시는 것을 잘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러 내려오셨습니다. 내가 내 자신께 “천국으로 가는 길을 내가 걸어서 가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 긴 길을 어떻게 걸어갈 수 있을까요? “삶을 고치겠다. 거룩한 사람이 되겠다. 착하게 살겠다. 더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모든 죄를 포기하겠다. 이기심을 버리고 완벽한 사람이 되서 천국에 들어가게 애쓰겠다. 하나님의 집으로 내가 스스로 가겠다”라고 대답한다면 당신껜 아무 희망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길 잃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먼 여행을 절대로 끝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 같은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밖여 죽으신 것은 세상창조 보다 더 놀라운, 세상역사에서 제일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는 이땅에 내려와 사람들이 그를 잡게 허락하셨고, 보이기론 연약하셨지만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계획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성부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받을 모든 자들의 죄 심판을 제게 부으십시오. 그들 대신 저를 심판하십시오. 그들이 영원히 받아야 할 그 심판을 압축하여서 제 자신에게 놓으십시오. 제가 그들이 받야야 하는 고난을 대신 받겠습니다. 아버지, 저는 그들을 사랑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이땅에 내려왔고 그들을 속죄하겠습니다. 그들이 용서를 받고 값없이 죄사함을 받고 내 자녀들이 되고 우리와 함께 영원히 천국에 있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도 말 그대로 하십니다. 한 시인은 그 때 있었던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용서와 새 생명을 받고 변화되기 위해서 // 하나님 어버지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 동일히 하나님이시고 동일히 영원한 // 사랑하는 아들에게 우리의 심판을 부으셨네.”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달려갔다는 말은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성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이땅에 내려오셔서 나를 위해 고난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당신은 꼭 갈보리 십자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리스도께로 간다면 그가 당신을 위해서도 돌아가신 것입니다.
제가 이제 서둘러 설교를 끝내야합니다. 비유 끝 부분을 보겠습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8절 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2절에는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가 적혀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다시 아들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아들의 옷을 그에게 입혔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가족의 가락지를 끼운 것입니다. 이제 가족 안으로 다시 받아준 것입니다] 발에 신을 신기라…[신은 그 시절에 품위를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잔치가 있고 다들 즐거워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아들로 다시 받아주셨었습니다. 그리스도께로 가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변명하지 않고 진심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와 그가 하신 일을 우리가 믿는다면 하나님의 가족에 포함되고 영생을 얻고 새로운 본성을 받아 기도할 수 있고 새로운 성품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의 생애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마지막 구절들을 같이 봅시다. 24절 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당신은 영적으로 죽어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에게서부터 영적인 생명이 주어지길 바랍니다] 내가 잃었다가…[당신도 잃은자입니까? 영적으로 길을 잃었습니까? 느릿느릿 움직이며 죽음과 심판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까?] 다시 얻었노라… [당신도 이렇게 찾아지길 바랍니다. 오늘이라도 당신이 생명을 받길 바랍니다.”
예로 얘기한 그 박사 같지 않길 바랍니다. 거친 강에 빠져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것입니까? 여러분, 영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로 가셔서 그를 발견하십시오. 그에게 간청하십시오, 그를 구하십시오. 그는 당신을 결코 돌려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를 믿는데에 격려해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밤 우리 모두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오늘 들은 것들을 우리 생각에 두게 도와주십시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 죄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 받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주님께 다가갈 수 있게 해주세요.
오늘에도 여자, 남자, 젊은이들이 그들의 창조자이시고 하나님이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오 주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게 해주시고 사람들이 그를 알고 그와 동행할 수 있게 해주세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양무리 마을/ Horace
첫댓글 아멘..
벼랑에서 몸부림치며 죽어가며 외치는 저의 소리를 들으시고
아버지는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소리를 듣고 오신줄 알았는데...
........항상 곁에 계셨다고 하네요...
그 마음을 주신 순간 저는 머리로만 이해되던 하나님이
마음으로 들어오셔서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주 긴 신앙의 여정끝에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친아버지임을 알게된거죠..
아주 긴 시간을 보내고서요....
....
지내온 세월이 너무 아깝고..
허비한 시간이 너무 죄스러워..
우리의 많은 아이들에게
나처럼 살지말라고 전해겠노라 약속했습니다.
더이상
나같은 바보가 없도록요..
..꼭 그러고 싶습니다.
아멘!
공유 할수있도록 힘써주심에 감사합니다.
주님! 성도가 서로 거룩함으로 교통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청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