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 임제종풍 수용
고려말 불교계를 이끌어간 대표적 선승이었던 나옹스님(1320-1376)은 "통불교적인 선사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이같은 주장은 <가산 학보 > 제5집에 실린 "나옹혜근의 법계와 麗元 佛敎交流"를 통해 유영숙씨 (서울교대 강사)가 제기한 것이다.
나옹 선사상의 특징과 국내외 선승들과의 交遊, 나옹의 불교사적 위치 등 을 분석한 이 논문에서 유씨는 "나옹은 平山處林의 법과 看話禪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임제선의 본체를 익혔고 게다가 지공과 의 교유를 통해 인도의 원시적인 선사상까지 받아들였다"면서 "이를통해 나 옹은 조계종 사굴산문 및 임제선의 선사상과 胡僧 指空의 선사상을 융합해 포용적이고 독특한 선 사상을 만들어 냈다"고 강조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나옹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호승 지공이다. 나옹이 入元해서 처음과 마지막에 찾아간 인물이 지공이며, 원에서 10년간 머문 것도 지공의 요청 때 문이었다.
또 나옹이 "擇三山양水之間居之(세산과 두물줄기 가운데를 선택해 살아라)"라는 지공의 수기를 받고 귀국 한것 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고 유씨는 설명했다.
나옹은 물론 원에서 지공이외 여러 사람들과 교유했다고 이 논문은 강조 하고 있다. 충정왕 2년(1350) 나옹은 지공을 떠나 임제종 蒙山德 異和尙의 眞堂 休休庵에 가서 하안거를 보내며 몽산의 법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휴휴암은 이름뿐임을 알고 떠난다.
이후 그는 다시 淨慈禪寺로 가서 임제종의 平山處林을 만났다. 평산은 나 옹과의 문답을 통해 그의 선지 가 대단함을 알고 전법의 표시로 法衣, 拂子 와 함께 傳法揭를 내린다.
이런 교류속에서 나옹은 평산에게서도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지만, 지공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유씨는 파악했다.
조계종 선풍을 바탕으로 지공의 인도선법을 계승함으로써 활달하고도 포용 적인 선사상을 이룩, 고려말 위 축돼 있던 사굴산문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 어넣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편 나 옹과 보우와의 관계에 대해 이 논문은 " 쌍벽을 이루며 고려말 불교계를 주도 하고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두 주역" 이라고 설명했다.
나옹은 원증국사 보우 와 함께 각각 국사.왕사로 책봉돼 신돈 집권시 일시적이나마 진각국사 천희 를 주축으로 한 화엄종 중심의 불교계를 마감시키 고 조계종이 그 자리를 대 신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 다는 것이다.
결국 사굴산문의 법맥을 이은 나옹은 가지산문 출신의 태고와 더불어 麗末 불교계를 주도했다는 것이 유씨의 결론이다.
이 논문은 "고려말 임제선이 적극 수용되는 과정과 아울러 조계종이 융성하게 된 배경 등을 고찰함으로 써 나옹의 불교사적 위치와 함께 당시 불교계의 동향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연구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