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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글로벌선교연구 원문보기 글쓴이: 호박꽃
출처: http://www.kjfmission.com/
2010년 조망, 세계선교 흐름과 한국선교
정보애 선교사 (UPMA총무)
1. 왜 2010년에 세계선교 흐름을 조망해야 하는가?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한국 도착 후 미북장로회와 감리회, 호주 장로교 등 많은 서양선교사들의 선교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를 기점으로 2010년은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125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윤치호 등 15명이 한국대표로서 최초로 세계선교대회에 참여했던 1010년 에딘버러대회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당시 에딘버러선교대회의 한 보고에 의하면 “한국인은 동방의 모라비안”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1)
이처럼 한국교회는 2010년이라는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한 해를 맞이하여 먼저 감사와 함께 세계 선교역사 속에서 서구 기독교의 유산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조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원고의 주제는 ‘2010년 조망, 세계선교 흐름과 한국선교’로 정했다.2) 구체적으로 에딘버러 대회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선교 개관에 이어 1910년 에딘버러대회 이후 한국의 세계선교가 본격화되기 전인 1980년 이전 까지 선교 흐름을 살펴보았다. 글의 주안점은 선교운동과 선교적 장애, 한계를 돌파한 대회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세계교회협의회로 대표되는 WCC진영까지 포괄하는 선교적 흐름 조망은 전방개척선교저널의 성격상 너무 광범위하고, 지면의 한계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80년대 이후 선교 흐름 역시 복음주의권의 큰 흐름 파악에 초점을 맞추어 동일 맥락에서 정리, 고찰했다.
일찍이 1793년 윌리암 캐리는 “이방인의 개종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방법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연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라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역사적 선언의 효시 자료와 함께 하나님께 위대한 것들을 구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라(Expect things from God, an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공포했다. 2010년은 윌리암 케리 시대처럼 한국교회를 포함한 세계선교계의 전환적 효시의 시기라 볼 수 있다. 대내외적으로 기독교의 정체와 서구기독교선교의 퇴조, 2/3세계 글로벌 남반구의 기독교 이동이라는 세계선교환경의 변화를 맞아, 새로운 한국선교 역사, 새로운 세계선교 역사를 창조하는 변곡점, 전환점의 시대로 이미 들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이야 말로 그 어느 때보다 이슬람권, 힌두권, 불교권 등 남은과업의 완수를 위해 전세계교회의 연합이 필요하다. 2010년 새로운 십년을 내다보며 한국교회는 서구선교의 유산 위에 서구선교계와 남반구 선교계를 견인하기 위해 위대한 것을 구하고, 위대한 일을 행하는 자리에 바로 서야 할 것이다.
2.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세계선교 개관
유럽과 북미 대륙에서 ‘Evangelical Awakening’이라고 불리던 ‘복음주의 대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주의에 대응하면서부터 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운동은 대각성운동보다 빠른 1705년 덴마크 할레대학에서 선교사들이 나가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데니쉬-할레 선교회(Denish-Halle Mission)가 조직되었다.
이어 1722년 모라비안 형제단(The Moravian Brethern)의 색소니(Saxony)가 진젠돌프 백작(Count Zinzendorf)의 영지인 헤른허트(Hernhut)에 정착하여 모라비안 공동체 전체가 선교사 파송운동을 벌여 모라비안선교회(The Moravian Mission)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유럽, 북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인도양과 태평양 섬들에 선교사를 파송 유럽과 아메리카의 다른 교회들에까지 선교의 돌풍을 일으켰다.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케리가 1793년 11월 인도에 도착했을 때, 데니쉬할레선교회가 파송한 덴마크 선교사들이 세람포레(Serampore)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이 독일과 덴마크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세계선교운동을 촉진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여 영국으로 그 불길이 옮겨 붙었다. 영국에서는 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일으킨 경건주의운동을 통하여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복음주의 대각성(The Evangelical Awakening)운동의 불길로 번져 나갔다. 미국에서는 처음에 아메리카 본토민인 인디언 선교에 주력했다. 최초의 미국 외국 선교회가 조직된 것은 사무엘 미츠(Samuel J. Mitts)와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두 신학생을 회중교회 메사추세츠대회(General Association of Massachusetts of the Congregation Church)가 받아들여 선교사로 임명하고 미국 외국선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of Foreign Mission)를 구성한 1812년의 일이다. 이어 같은 해 미국 장로교 총회가, 1817년에 장로교회 총회와 개혁교회 총회가 연합선교부를 조직하였다. 1837년에는 다시 장로교회 총회가 자체 선교부를 독립시켰다. 한편 1814년부터 1821년 사이에 미국 침례교회, 감리교회와 감독교회 역시 모두 외국 선교부를 조직하였다.
유럽과 미국의 교파 중심의 해외 선교운동은 1850년대를 넘어서면서 비교파 신앙선교운동과 학생자원선교운동으로 전환기를 맞게 된다. 곧 프로테스탄트 선교 세력 중심이 유럽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폭풍처럼 연쇄적으로 학생자원운동(SVM: Student Volunteer Mission Movement)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1886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마운트 허먼(Mount Hermon)에서 개최된 무디의 여름성경학교에서 참석한 학생 대부분이 선교에 자원하였으며, 이어 1889년 6월 노스필드 선교대회에 431명 대학생이 등록을 했다. 이후 1892년에는 영국으로 학생자원선선교운동 조직이 퍼져나갔을뿐 아니라, 1900년 런던 국제학생선교대회(International Student Missionary Conference) 소집으로 이어졌다. 당시 세계 여행의 수단은 육지에서는 기차밖에 없고 바닷길은 증기선에만 의존하던 시대였는데 세계 40여 개의 나라에서 2, 000명에 달하는 학생들과 대학교수들, 그리고 선교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당시 대회의 주제는 “학생과 선교”였다. 즉 20세기 선교를 이끌어 갈 젊은 학생들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모임이었다. 대회의 성격은 세계선교를 위한 성경의 원리를 연구하는 회의였으며,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을 부르는 마게도니아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회의였다. 또한 학생들의 자원선교를 위한 결단을 촉구하는 모임이었다.
1910년 에딘버러대회 이전 세계선교 흐름을 간단히 정리하면, 역사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선교는 이처럼 제도적 교회의 구조 밖에서 선교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대학생들의 자발적 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ission Movement)과 국제학생선교대회를 통하여 전 세계적으로 선교가 확장되었다.
3. 1910년 에딘버러대회 이후 1980년 이전 까지 세계선교 흐름
1910년 에딘버러 대회
19세기 처음 10년 동안 세계질서에 큰 격동이 일어났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원 1894년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유럽에서의 세계질서는 영국,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각각 주요 세 축을 형성하여 오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에딘버러대회는 이러한 역사적 격동기 한복판에서 소집된 것이다. 당시 에딘버러대회의 주제는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이었다. 에딘버러대회의 의의는 세계역사의 대전환기에 세계선교의 미래를 대비했다는데 큰 역사적 의미가 있다. 더욱이 한국교회 입장에서 보면 최초로 세계선교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1966년 휘튼대회 휘튼 선언
이후 1920년대~60년대 중반까지 세계선교는 제1차, 2차 세계대전 와중에 IMC(국제선교협의회,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의 쇠퇴와 WCC(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로의 편입을 통해 복잡한 역사적, 시대적 상황 속에 선교운동으로서 위축을 맞게 된다. 특히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창립총회는 30년 전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이후 선교단체를 중심한 IMC 중심의 세계선교 구조를 교회중심으로 바꿔놓았다.
이런 점에서 1966년 미국 중서부 일리노우 주 시카고 외곽에 위치한 복음주의의 메카 휘튼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Congress on Church’s World-wide Mission)가 지닌 의미가 크다. 1928년 예루살렘 대회를 전후해서 1961년 대회에 이르러 세계선교운동이 거의 와해되고 서구 선교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이에 대한 응전과 대각성운동으로서 1966년 휘튼대학에서 교회의 세계선교를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기 때문이다. 서구 복음주의 선교가들은 1910년 에딘버러 대회 이후 처음으로 복음주의권에서 선교의 위기 상황을 직면하여 결집된 선언을 발표했다. 이 대회에는 71개국 938명의 공식 대표들이 참석했다.4) 한편 휘튼 선언문은 새로운 선교 세력이 태동되고 있음을 보지 못한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1961년 뉴델리 이후 이미 새로운 선교세력이 한국, 홍콩, 일본, 일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전역에서 싹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복음주의 선교지도자들은 이런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보지 못했다.
1966년 베를린대회
같은 해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자 이데올로기의 대결로 분열된 독일의 옛 수도 베를린의 장벽 앞에서 세계전도를 위해 세계 100 여개 국가의 대표들이 선교의 새로운 종교개혁을 선언하는 범세계적 전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의 비전으로 잉태될 수 있었다. 베를린 대회의 주제는 ‘한 인류(One Race)’, ‘한 복음(One Gospel)’, ‘한 과업(One Task)’이었다. 휘튼 대회가 복음주의자들의 ‘성경적 세계관’을 집대성한 선언서를 창출하는데 성공한 대회라면, 베를린대회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선포하는 데 주안을 가진 대회였다. 베를린대회는 세계구원과 복음전도를 위해 범세계적 군단의 형성을 위한 지도자들의 세계 공의회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5) 전 세계 100여 국가에서 참석한 1,200명의 참가자들중 한국 대표는 모두 열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베를린대회 한 해 전인 1965년을 한국선교 80주년 전국복음화운동의 해로 선포하고 범교회적인 위원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베를린대회의 한국 대표단은 그 조직의 중심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6)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1970년 프랑크푸르트선언은 독일 튜빙겐대학교의 피터 바이어하우스(Dr. Peter Beyerhaus)가 주도하고 독일의 신학자 15명의 연서명으로 작성된, 1968년 웁살라 WCC가 채택한 선교의 갱신(Renewal in Mission)에 관한 리포트를 비판하고 응전한 선언이다. 이들은 웁살라 총회의 인간화(Humanization)가 속죄(Redemption)를 선교의 목표로 하는 성경적 원리에서 멀어진 것임을 확인하고 이를 거부하는 신학적 선언을 발표했다. 프랑크푸르트선언은 15명이라는 소수의 독일대학교 교수들에 의하여 제출된 선언문이지만, 선언 즉시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전파되었고 세계 각국의 수많은 신학자들과 선교학자들과 선교 지도자들이 이 선언문에 서명하고 동참하였다. 이리하여 프랑크푸르트선언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풍미하던 정치선교화한 WCC선교에 반기를 들고 예수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중심의 선교과업 사명의 중심성을 분명히 천명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1974년 세계복음화 국제대회 로잔언약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 국제대회는 20세기 최대의 국제대회였다. 당시 이 대회에는 150여 개국으로부터 온 4천여 명이 참석하여 “온 땅으로 그의 음성을 듣게 하라(Let the Earth Hear His Voice)”라는 주제를 가지고 10일간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110개 이상의 선교에 관한 성경적, 신학적, 전략적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특별히 대회 공식 참가자의 3분의 2가 비서구세계 대표들이었으며 강연자와 토론자의 3분의 2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지도자들이었다. 대회가 끝난 후 로잔위원회의 국제사무총장에 선출된 사람은 아프리카 케냐의 지도자인 비앙 카토(Dr. Byang Kato)였다. 이처럼 로잔대회는 세계선교 역사의 중심 대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또한 ‘선교(mission)’라는 용어가 60년대 이후 선교의 세속화, 선교의 인간화, 오늘의 구원을 통한 사회화로 환원, 변질되면서 이에 대한 거부와 응전, 보완의 개념으로 ‘복음화(evangelization)’7)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1975년 아시아선교협의회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선언
1975년 8월 31일 서울에서 20세기 기독교 세계선교에 관한 선언문 중 최초로 비서구 세계인 아시아인들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바로 서울선언이다. ’75년 8월 28일~9월 1일까지 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개최된 아시아선교협의회 창립총회에는 아시아에서 한국, 일본,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필리핀, 대만, 싱가포르, 태국 등 12개 국가의 대표와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4개국 옵저버들이 참석했다. 서울선언의 특징은 서구 선교역사의 과거에 대한 반성과 회개로부터 당시 정치와 사회 중심의 선교에 대한 위험성과 오류에 대해 비판하고 성경적 원리와 사도적 선교 정신을 전승할 것을 서약한데 있다. 서울선언은 서구선교의 잘못으로 서구 국가의 영토 확장과 상업주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정책과 복음이 함께 전달되어 올바른 복음의 전달에 거침돌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 발전과 함께 인간 중심 선교의 심각한 오류를 강하게 비판했다.
서울선언은 1) 과거에 대한 반성과 회개(Examination and Repentance of the Past) 2) 오늘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고찰(Criticism and Reflection Upon the Present Reality) 3) 끝나지 않은 과업(The Unfinished Task) 4) 새로운 선교 세력의 개발과 동서간의 협력(Development of the New Mission Force and Cooperation of the East and West) 5) 우리의 서약(Our Covenant)으로 이루어져있다. 서울선언은 서구 선교계에 독주와 독점을 지적하고 새로이 일어나는 아시아 선교계와 불필요한 경쟁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한편 남은 과업 완수를 위한 공동전선을 호소한 것이 장점이다. 또한 새로 일어나고 있던 아시아교회에 격려와 동역을 제안한 것도 의미가 있다.
4. 1980년 이후 세계 선교의 흐름
1980년 에딘버러세계선교대회 70주년 기념대회
1910년 에딘버러대회 70주년을 기념하는 대회가 1980년에 각각 호주 멜버른, 태국 파타야,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리게 된다. 멜버른대회는 WCC주관으로 선교이해와 실천에 대한 재평가가 위주였다. 파타야대회는 로잔위원회에서 개최한 것으로 ’74년 로잔대회의 주제 “온 땅으로 그의 음성을 듣게 하자(Let the Earth Hear His Voice)”에 대한 실천방법으로 “어떻게 저들이 듣게 할까(How Shall They Hear)”로 대회를 진행했다. 한편 에딘버러에서는 선교역사학자 랄프 윈터가 주도하는 ‘에딘버러 ’80 프론티어 선교를 위한 세계회의(World Consultation Frontier Mission, Edinburgh ’80)’대회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사실 랄프윈터는 1972년부터 에딘버러대회 70주년을 기념하여 1910년 에딘버러대회의 원래 취지와 정신을 회복하여 전 세계 다양한 전통을 가진 범세계적 선교조직과 단체들이 연합하여 개최하는 세계선교회의를 제창해왔다. 하지만 상이한 이해관계와 상황에 따라 결국 ’80년에 멜버른대회는 WCC에 속한 제도적 교회 중심으로 개최되고, 파타야 ’80은 선교전략 전문가들과 선교학자들, 그 외 여러 선교계 사역자들이 참여하여 로잔대회를 개최하였다.
결과적으로 에딘버러 ’80은 그 숫자에 있어서 멜버른이나 파타야에 비해 극히 적은 숫자인 3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모두 각 국가의 선교협의회와 선교단체들의 공식 대표들이었다. 영국의 40명 대표, 미국과 캐나다의 84명 대표, 아시아의 69명 대표, 영국 밖의 유럽 국가들의 35명 대표, 아프리카의 24명 대표, 라틴 아메리카의 9명 대표가 모두 그 나라의 선교협의회와 선교단체가 파송한 공식대표들이었다. 당시 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은 WCC멜버른’80이나 로잔위원회의 파타야 ’80과 달리 에딘버러 ’80의 지역별 컨설테이션을 계속하기로 결의하고 이것을 담당할 국제촉매위원회(International Catalyst Committee)를 구성하였다.
에딘버러 ’80대회는 선언문이 아닌 결의문을 채택했다. 당시 참석했던 지도자들은 숨겨진 백성들(hidden peoples)에 대한 프론티어 선교를 통한 “2000년까지 모든 민족에게 교회를!(A Church for Every People by the Year 2000!)”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을 다짐하는 6개 항목8)으로 된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 결의에 따라 이후 보다 타겟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숨겨져 있는 백성들 전도운동을 그 용어를 미전도종족으로 바꾸고 미전도종족의 조사와 책임분담운동(AAP운동)등 강한 프론티어 선교운동으로 퍼져 나갔다. 에딘버러 ’80대회가 일으킨 파장은 이후 20세기 말까지 복음주의 진영의 세게선교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가장 영향력 있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1982년 AMA(아시아선교협의회) 기독교 선교에 관한 아시아인의 서약
1975년 서울에서 창립된 AMA는 1978년 싱가포르에서 제2회 대회를 열고 아프리카 선교운동 지도자들을 참석시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는 선교운동의 상호 협력과 단결을 위해 새로운 선교구조의 창출을 시작했다. 이후 1982년 8월에 제3회 대회 모두 강연에서 “아시아인 기독교운동의 탈 서구화와 선교구조의 개혁(De-Westernization of the Asian Christian Movement and Reforming Mission Structures)”를 발표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후에 ’82서울선언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시아인의 서약(Asian Commitment)은 1) 기독교 선교의 역할 2) 기독교 선교의 위기 3) 기독교 선교의 미래 4) 우리의 서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4) 우리의 서약에서 일곱 가지의 공동의 과제9)를 도출했는데, 비록 이후 탈 서구화에 대한 엄청난 반향및 지도력 등 이런 저런 요인이 얽혀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지만 2010년을 맞는 현재 여전히 남은 과제들이서 일찍이 ’80년대에 이런 서약을 발표한 한국을 포함한 비서구권 선교계의 협력, 서구선교계에 대한 건설적 비판 대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제삼세계 선교운동(Third World Mission Movement)과 AMA의 영향
사실 제삼세계 선교운동은 1960년대 초 아시아에서부터 태동되었다. 당시 1960년 초부터 한국, 일본, 홍콩과 대만 등 해외 중국인들,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등에서 자생적 비교파 선교단체운동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1970년대에 들어서면 아프리카 검은 대륙이 뒤를 이었다. 서부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가 먼저 깃발을 올렸으며 동부의 케냐가 그 뒤들 이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1970년대 말부터 남아메리카의 브라질에서 일어난 자생 비교파 선교운동에 이어 아르헨티나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선교지도자들의 협의체인 AMA가 제삼세계 선교운동에 촉매제 역할을 일정 정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1978년 제2차 AMA대회가 싱가포르에서 열렸을 때, 초청되었던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대표 판야 바바(Rev. Pannya Baba)는 본국으로 돌아간 후 나이지리아 복음주의선교단체협의회(NEMA: Evangelical Missions Association)를 조직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후 1982년 서울에서 모인 AMA 제3차 대회에 초청되어 기독교 선교에 관한 아시아인의 서약에 동참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브라질 대표 조나단 산토스(Rev. Jonathan Santos )는 귀국 즉시 브라질 해외선교단체협의회(Brazil Foreign Missions Association)를 조직한다. 이어 1986년 파사데나에서 열린 AMA ’86 제삼세계선언에 참석했던 루이스 부시(Luis Bush)를 중심한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 대표들은 그 다음해 1987년 브라질에서 라틴 아메리카 선교대회(Congreso Missionero Iberoamericano―COMIBAM)를 개최했다. 이러한 일련의 제삼세계에서의 선교단체 상호간의 협력을 위한 협의회 조직과 대회들은 1978년부터 AMA 대회에 참석한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선교 지도자들이 AMA와 함께 전개한 제삼세계 선교단체 상호간의 협력운동과 1986년 제삼세계선언의 영향의 결과들로 볼 수 있다. 이어 1988년에는 제삼세계 선교 발전을 위한 제삼세계선교지도자회의를 통해 ’제삼세계선교협의회(TWMA: The Third World Mission Association)조직이 결의되었다.
1989년 AD 2000운동과 싱가포르 선언
AD 2000운동은 사실 1980년 에딘버러 프론티어 선교 컨설테이션에서 랄프 윈터가 제창한 “AD 2000년까지 모든 민족에게 교회를(A Church for Every People by the Year 2000)”운동을 발전시킨 운동이다. 1989년 1월 싱가포르에서 AD 2000과 그 이후를 위한 세게복음화국제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AD 2000운동은 “AD 2000 and Beyond Movement”를 붙임으로써 20세기 끝까지(By the Year 2000)가 아닌 21세기를 위한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 운동을 ‘기독교21세기위원회’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싱가포르 선언 서론에서는 AD 2000운동이 교회 역사상 단일화 된 운동이 되기를 바란다고 희망을 피력했으며, 세계 복음화 과업에 방해가 된 교만, 편견, 경쟁, 불순종을 고백했다. 이후 본론에서 이 선언은 AD 2000년까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서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한 행동지침으로 1) 협력과 파트너십 2) 권능을 받음(Empowerment) 3) 긍휼히 여김(Compassion) 4) 완성을 향하여(Toward Fulfillment)등 네 가지를 제안했다.
1989년 로잔Ⅱ 마닐라 선언
같은 해 1989년 7월 로잔Ⅱ대회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되었다. ’74년 로잔이 기독교 복음과 전도의 총론적 성격을 지녔다면 로잔Ⅱ는 각론 성격을 띠고 있다. 사실 이 대회의 마닐라선언은 선언문이라기보다는 대회 주제인 “ 온 교회가 온 세상에 온전한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다(Calling the Whole Church to Take the Whole Gospel to the Whole World)”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로잔운동은 1966년 휘튼선언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오던 세계복음주의 교회들의 세계선교를 위한 40여 년간의 전도와 선교에 관한 지도력 확립 및 협력운동으로 발전했다.
마닐라선언문은 21개 항의 확인(Affirmations)과 주제인 온전한 복음(Whole Gospel), 온 교회(Whole Church), 온 세상(Whole World) 등 세 가지에 대한 12항목10)의 신앙적 확인(affirmation)에 대한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이 선언은 로잔 제1회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회의가 채택한 로잔언약의 실천을 위한 지침서이면서도 또한 전도와 선교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해설서, 전략적 문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로잔운동의 톰 휴스톤(Tom Huston) 사무총장은 로잔언약을 복음주의 진영의 깃발(Banner)이라고 할 정도였는데 로잔대회를 통해 전 세계 많은 다양성과 분파성을 지닌 복음주의진영이 일치와 단결, 협력을 이루어 낸 것이 기적이자 큰 성과로 평가된다.
1995년 AD 2000년과 그 이후를 위한 운동 GCOWE’95 서울선언
1995년 5월에 서울에서 최초로 범세계적인 세계 복음화를 위한 세계대회(GCOWE: Global Consultation on World Evangelization)가 개최되었다. 당시 186개국에서 4,500 여 명이 넘게 대회에 참석하여 기독교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국제회의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원래 AD2000운동은 1989년 1월 싱가포르에서 소집된 GCOWE가 기원이 되어 태동이 되었다. 1989년~1995년까지 이 운동은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GCOWE’95서울대회는 이처럼 1989년 AD2000년운동 창립 이후 최초로 범세계적인 대회였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GCOWE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가 비서구 선교지도자들에 의하여 비서구 선교진영의 기수인 한국에서 한국교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조동진 박사는 로잔운동이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단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한 것과의 차별성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이 점에서 분명히 GCOWE가 서구 의존에서 벗어나 서로 상호성과 동등성을 실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대회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GCOWE’95서울선언은 6개 항11)으로 된 비교적 간략한 선언문이지만 목표지향적 선언으로 평가된다.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면 10/40Window를 주요 선교 중심과녁임을 선언하고 그 안의 미전도종족들을 위한 복음전파와 교회설립을 위한 계획을 수립한 것에서도 선언의 성격이 전략 실행을 위한 실천계획이었음이 잘 드러난다. GCOWE’95서울대회 이후 AD 2000운동은 큰 탄력을 받았다. 1996년 한해에만 22개의 회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1997년에는 23개 지역에서 AD 2000년운동의 회의가 전개되었다. 1997년 7월에는 남아프리카에서 제3회 GCOWE가 소집되기도 했다. 이처럼 AD2000운동은 GCOWE의 확산을 통해 특히 1995년 서울대회 이후 1백 개 이상의 세계회의로 확산되었다.
예루살렘 메시아탄생 2000년기념대회
1989년 싱가포르에서 조직된 AD2000운동은 예수 탄생 이후 두 번째 천년인 AD2000년이 지나고 제3의 천년시대를 여는 21세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1995년 서울대회 이후부터 5년 동안 메시아 탄생 기념대회를 준비해왔다. 그리하여 2000년 12월 27~2001년 1월 2일로 날짜 확정이 되고 당시 AD2000년 운동의 국제총무였던 루이스 부시는 그 본부를 미국의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가서 준비에 몰두하여 당시 106개 국가들로부터 1,700명의 대표들이 참석 등록을 마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돌연 개최 예정 한 달 반을 앞두고 이스라엘 정부의 출입국 관리들의 파업으로 결국 2000년 12월 22일 대회준비위원회는 대회 취소를 긴급하게 발표하게 되어 예루살렘 메시아 탄생 2000년 기념대회는 안타깝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본 글에서 개최되지 못한 메사아탄생 2000년 기념대회를 다룬 것은 당시 세계선교지도자들이 21세기를 감사하고 축하할 뿐 아니라, 미래 기독교 세계선교를 위해 준비하고 노력을 경주했다는 것을 지면에 알리고 미래적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비록 이 대회가 미완에 그쳐 선언도 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발표했지만 그 내용 중 ‘현대의 실상들’ 부분에서 기독교의 중심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되고 있음을 확인한 것과 20세기 후반부터 선교진영의 크기가 비기독교 세계인 제삼세계, 현재 글로벌 싸우스(Global South)라고 불리는 세계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한편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지난 세기 선교 역사의 과오에 대한 회개와 개선이 없고 선교의 패러다임 변동 추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큰 단점으로 지적된다. 결국 이 선언은 AD2000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의 첫 세기가 될 21세기를 위한 언약이 되기에 한계가 있으며,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선교의 시대를 열 예언자적 선언이 되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5. 2010년 조망, 세계선교 흐름과 한국선교
2010년에 세계교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를 맞이하여 에딘버러대회, 도쿄대회, 로잔Ⅲ대회를 각각 개최한다. 에딘버러대회는 에딘버러 100주년을 기념하여 관련 학자들을 중심으로 개최되는 대회이고, 도쿄대회는 전 세계 선교구조및 단체들의 협력과 네트워크를 증진시키기 위한 대회이다. 한편 로잔Ⅲ대회는 로잔언약의 계승과 발전, 실천을 위한 로잔위원회가 주관하는 대회이다. 현재 세계교회가 당면한 도전과 미래 방향 등이 이 세 대회를 통해 잘 제시되고 연합과 협력이 증진되길 기대하면서도, 한편 한국교회는 이러한 세계선교 흐름가운데 어디에 서있으며,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와 미래 대안은 무엇이고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사실 한국교회는 1910년 에딘버러대회를 통해 처음 세계선교대회에 참여하여,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한국교회는 일제식민지 시대, 6. 25 전쟁, 독재정치, 산업화와 민주화, IMF등 많은 도전과 위기를 겪었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1907년 평양대부흥을 목도한 존 모트의 말처럼 현재 동방의 대표적인 기독교국가로 자리매김 하였을 뿐 아니라, 2/3세계에 그 영향력과 위상을 드높이게 된 것이다.
2010년은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125년이 되는 해이다. 복음의 전래는 단군 이래 수천 년 동안 가난과 어둠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 민족을 기독교 전파 1세기 만에 전 세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고속 성장, 발전하도록 동력을 제공하였다. 한국교회는 비단 외형적 성장만이 아니라 말씀 중심, 기도의 열정, 복음전파의 열정과 희생, 헌신 등 많은 영적 자산도 함께 지니게 되는 축복을 누렸다. 이 모든 것이 기적이자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동안 200여 년 동안 서구교회는 서구선교사들을 통해 서구교회의 좋은 영적 유산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에 흘러 보냈다. 그러나 현재 서구교회는 복음의 정치화, 사회화 이후 세속화의 도전에 직면하여 위기를 겪고 있으며 선교가 많이 위축되어 있다. 이러한 세계 선교환경의 변화 시대에 한국교회의 세계교회를 향한 역할은 무엇일까?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의 가장 큰 선교의 열매이자 생산물로서 이제는 한국교회 부흥의 원천이 되었던 좋은 영적 유산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굴, 전수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난과 핍박 속에 성장한 우리의 영적 유산들을 공유하여 세계교회로 하여금 세계선교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 한국교회 역사에 대한 평가와 전략적 적용을 할 수 있는 한국적 장(場)이 마련되어야 한다.12) 일찍이 한국의 선교선배들은 1975년, 아시아선교협의회(AMA)창립, 1982년 탈 서구화를 통한 기독교 세계의 미래 제시, 제3세계선교운동 등을 전개했는데 여러 이유로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공유되지 못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2010년을 맞는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서구교회 스스로 탈 서구화를 외치고 있으며 남반구에서는 급증하는 교회가 어떻게 선교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런 세계선교 흐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잘 간파하여 비둘기같은 순결함과 뱀같은 지혜로 준비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