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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고 배척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최선의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포용이다.
요즘 우리사회는 사는게 힘들다하여 세계최저의 출생율을 보이고 옆나라 일본도 출생율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외국인 백만명시대를 맞은 이때 우리가 갈 방향은 어디일까 해답을 찾기위해 역사여행을 한번 떠나보자.
서라벌의 벌, 황산벌의 벌을 다른 나라에서 찾는다면 말레이의 나그푸르, 수단의 다르푸르 아프카니스탄의 카불, 터키의 이스탄불, 인도의 칸푸르와 니그푸르 이것만 봐도 우리민족이 유라시아대륙의 아주 먼 곳까지 연결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얼굴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말이 장동건의 얼굴도 아랍인과의 혼혈이 아니고선 절대 나올수 없는 얼굴이라고 한다. 그럼 장동건의 조상만 혼혈이었을까 그는 단지 평범한 한국사람중의 하나일뿐이다.
한반도는 원래 다양한 사람들이 건너와서 서로 어우러지고 섞이면서 살던곳이고 단일민족이란 개념도 구한말 권위를 잃은 왕정에 대신해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야하기에 만들어진 개념일뿐입니다. 누군가를 배척하고 세상을 더 넓게 포용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이제 과감하게 내려놓아도 좋지 않을까요?
구석기인 죠몽인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신석기인 야요이인의 신장은 3cm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갑자기 영양이 좋아진거라 우기지만 많은 유물적 증거로 보았을때 한반도인과의 혈연적 공통성이 100%라는게 증명된지 오래이고 전체 일본인의 90%가 한국인과 같은 핏줄이죠.
그럼 우린 어떨까요 먼저 인도와 흉노만 언급하죠
맛보기로 독고씨도 흉노족 도각씨에서 유래한거지요
흉노족이 동진해 세운나라가 신라이고 서진해 세운 나라가 터키이기에 2002월드컵시절 그들은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 호칭했고 터키를 방문한 노대통령은 미국보다 더 가까운 우방이라 발언까지 한건 아닐런지요
구한말때도 양복을 입었지만 본격적으로 양복이 전래된건 무교동에 자리잡은 터키인들에 의해서라고 알고있습니다.
얼굴을 연구하신 조용진교수님은 인도남부 타밀인과 환난을 피해 넘어온 중국화남인이 22%이고 흉노등 북방계통이주민이 78%로 이들이 섞여 한민족의 주류를 이루었고 흉노 까오리족의 일부가 만주이남으로 진출했기에 우리의 국호가 코리아라고 불리게 된 것이지요.
한글도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10년동안의 연구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그 뼈대는 인도북부 드라비다어와 티벳의 팍파란 승려가 만든 파스파문자에 만주의 가림토문자가 융합되어 만들어진 것이고 임진왜란때 왜인들이 한글을 가져가 신사에 모셔두고 신대문자라 칭하며 여기에 참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유 문자라고 아직도 잘못 인식하고 있지요
신사가 2만개이면 신도 2만개이고 신사가 10만개이면 신도 10만개이지요
인도의 힌두교도 폴란드평원에 거주하던 유목민이 북인도에 침입했을때 만들어진것이고 힌두교도 일본의 신사와 다를바없죠 힌두교에서 파생된 종교가 불교이고 불교에서 파생된 종교가 원불교이며 원불교에서 파생된 종교가 대순진리회이듯 모든 종교가 똑같은 길을 걷는다고 보면맞을겁니다.
우리는 베트남을 업신여기지만 베트남 사람들도 한국땅에 많이 섞여삽니다.
대표적인 사람 몇만들죠 1995년 화산이씨 종친회 대표들은 780년만에 베트남을 찾아 대통령등 귀빈들의 깎듯한 예우를 받았고 고려 무신정권시절 14년간 무소불위의 철권을 휘두른 이의민은 귀화인 이양혼을 시조로하는 베트남계 정선이씨이며 이외에도 대표적 귀화성만해도 청해이씨 경주설씨 덕수장씨 우록김씨등 이루 헤아릴수가 없습니다.
sbs개국방송때 일본 백제마을을 보여주었다. 이게다일까
군국주의시절 한반도와의 연을 단절코자 많은 지명을 바꾸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백제강을 소가강으로 바꾼것이다.
소가씨는 원래 개로왕시절의 목만치로 부여연맹인 열도담로에게 보낸 신하로 그의 5세손이 소가씨인 것이다.
부여가 북부여,동부여,남부여하는 것은 부여의 담로제도가 있었기 때문인데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고친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친인척들을 여러곳의 수장으로 두었기에 한곳이 망해도 다른 곳에 다시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장수왕에게 패한 개로왕은 설욕을 하고자 열도에 있는 담로에게 믿을만한 신하 목만치를 보낸것이고 그 목만치가 모신 담로가 오늘날의 천황이란 이야기로 결론이 나는 것인데도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단일민족신화를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
다시 신라로 넘어와 신라에는 괘릉이 있다 아랍인의 형상을 한 석상.
무덤에서 나온 목걸이에 있는 인물상은 중앙아시아인이고 부처의 몸에 있는 십자가나 켈트족이 발칸반도에 있을때 만들어진 칼에서 나온 켈트족의 문양이 새겨진칼이나 가야의 고분에서 나온 인도의 쌍어문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미국에서도 가끔 백인과 백인이 결혼했는데 난데없이 흑인 아이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우리나라 사람중에 흑인입술을 가진 가수가 있다는 이야기 격세유전 즉, 먼 조상중에 흑인의 유전자가 세대를 여럿 건너뛰어 나타났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혼혈이란 결론이다. 우린 단일민족이 아니다 세상에 단일민족은 없다.
신라향가중 제일 유명한 처용가의 처용도 이미 귀화한 아랍인이란게 정설로 되어있다.
문무왕비에 새겨진 '투후제천지륜전칠엽'이란 말은 흉노인 김일제 이후 7대가흘러 김알지가 되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 흉노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북쪽이 오늘날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 여기는 몽고가 되고 남흉노가 원수로 여겼던 민족 거란이 된다.
아들형제 둘이 있다고 치자 하나는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하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만약 한국에서 형제가 따로 운전을하다 둘의 차가 추돌을했을때 멱살잡고 싸움부터할까 형제니 좋게좋게 넘어가자할까 그리고 8대가 지나 다시 도로에서 추돌사고가 났을때 멱살부터잡을까 형제니 좋게좋게 넘어가자했을까 미국에 있던 그 8대후손의 얼굴엔 한국인의 얼굴이 남아있을까 토종 어메리칸의 얼굴이 대부분일것이다.
장영실도 귀화한 중국인과 기생사이에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 사람의 결점만 지적하고 허물만 적발한다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이 인재를 구하는 첫걸음이듯 출생율저하만 걱정할것이 아니라 이제는 단일민족이란 낡은 사관을 과감히 버리고 가슴을 열고 이민자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포용의 자세를 가져야하지않을까 우리를 단일민족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난 후의 일이다.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의 본질에 제대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지 말고 그들 나름의 고유한 전통을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주체적 구심력이 강할때만 인간을 포함한 외래의 문물을 순기능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우리는 배달겨레라고 한다 일본은 왜놈이라한다 왜놈부터 말한다면 삼국사기 삼국지연의등 한국과 중국의 고대서적을 종합해보면 '왜'는 큰강이나 바닷가에 살던 동이족을 가르키는 즉 고대 범한국인의 호칭이었다 그렇게 신라를 괴롭히던 왜가 가야가 망한뒤 사서에서 사라졌다 즉 가야를 고대엔 왜라고 불렀고 고구려의 마가,우가,저가에서 우리가 일본을 쪽..라고 비칭으로 부르듯 신라는 고구려를 말갈이란 말고 비칭으로 부른것이고 고구려의 마가 즉 말갈족이 200년동안 서진해 세운나라가 5음계를 쓰는 현재 헝가리이다.
배달에서 뒤에 달은 땅 벌판 산을 나타내고 배는 박 밝 즉, 밝게 빛나는 산 해뜨는 알타이산을 나타내는 말인것이다.
단순설화의 곰이야기도 퉁구스의 많은 종족 예벤키족, 오로촌족등 많은 북방의 종족들이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이야기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도 실존인물이 아니라 그 이전에 살았던 성인급 인물들의 거룩하고 고상한 행적들을 총동원하여 짜깁기해 만들어낸 이야기로 당시 로마인들은 유럽세계의 지배자였고 자신들의 모든 활동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을 남겼는데도 인간 예수에 대한 기록은 로마 문헌 어디에도 없었다고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에 지나치게 흔한 이름이었고 유대인 역사가들의 저술 속에서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메시아의 전기가 아니라 이교도의 유서깊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신화'로 예를들어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12월25일 동정녀에서 태어났으며 결혼식 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냈으며, 영성체 의식으로써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다고합니다. 예수의 생애의 일생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예수는 이교도들의 미스테리아가 유대인들에게 수용될 수 있도록 유대인 메시아로 변장한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이며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물고기의 상징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상징이었던 바로 그 물고기이며 예수가 죽은지 나흘이 된 나자로를 살려낸 것처럼, 엠페도클레스는 죽은 지 30일이 된 여자를 살려냈다고합니다.
미스테리아의 핵심은 죽어서 부활한 신인의 존재입니다.
신인을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이탈리아에서는 바쿠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예수는 3월 23일에 죽었고, 25일에 부활했으며 소아시아의 신 아티스가 죽고 부활한 것과 같은 날입니다. 예수는 사흘 만에 부활하는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오시리스도 역시 사흘만에 부활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 같은 일을 했을까요?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제국과 같은 로마를 꿈꾸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그는 자신의 강력한 통치를 위해 자신의 제국이 영원무궁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교를 이용했으므로 성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철저히 국가적으로 기획되고 만들어진 국가 이데올로기 홍보용책자입니다.
이집트의 많은 신들도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어 그리스와 로마의 신으로 둔갑합니다. 교황의 모자는 수메르신들의 모자를 그대로 따왔고 교황의 행차와 파라오의 행차장면은 너무도 흡사합니다.
미라의 풍습은 사후에도 육신과 영혼이 불멸한다는 오시리스 신앙에서 연유하는데 우리의 천주교 기독교도 그것을 고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뭐든지 배척하고요
로마를 만든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기원전 13세기에 멸망한 트로이의 왕족 아이네아스의 후손으로 그들은 포용정책을 펼쳤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번성하고 현대의 유럽에까지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수 있었습니다.
지구상의 생물은 한 개의 세포에서 진화했다고합니다. 두 세포의 가장 최근 공통선조가 분열할 때, 분열 직전에 이미 세포의 이쪽 절반과 저쪽 절반이 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포분열에서 탄생한 두 딸세포는 유전자는 같지만 그 주변의 화학물질들은 서로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유전자가 켜지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후손들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이런 원리가 발생의 맨 처음 시작에서부터 과정 전반에 적용된다. 모든 동물에게 있어서 분화의 열쇠는 비대칭적인 세포분열이다.
인간과 침팬지도 아주먼 옛날 600만년전 공통선조에서 분열하기 시작했다.인류가 다양한 민족으로 분화하면서 국가와 민족에 따라 다양한 식생활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는 단일민족일까 예를들어보자
845년경에 편찬된 아랍 지리서 <왕국과 도로 총람>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금이 많이 나는 신라를 동경하여 많은 아랍인들이 한반도로 건너가 영구 정착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9-15세기 사이에 17명의 이슬람 학자들이 쓴 20여권의 책에서 아랍인과 신라인의 빈번한 접촉을 다루고 있다.
또 이 책에서도 이슬람 지리학자였으며, 마수디는 한반도에 이라크인이 진출,거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다른 책에선 우마이야 왕조(661-759)의 박해를 피한 일부 알라위족들이 한반도에 망명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일본서기 753년의 기록에 의하면 장안에서의 궁중하례에 신라,일본 사절단이외에도 아랍 사절의 참석을 전하고 있다.
아랍 상인들의 신라 진출을 나타내는 세계최초의 한반도 지도에 12세기 무슬림 지리학자 이드리시의 지도에 '신라'가 명기되어 있다.
기록에 없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그 대답은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다
고려사에도 보면 대식국(아라비아)에서 열라자등 100명이 와서 왕을 만나 토산품을 바치니, 왕이 그들을 극진하게대접하게 하였고 그들이 돌아갈 때 금,은,옷감등을 선물로 주었다등 많은 기록이 전하며
그당시 개인무역이 금지되어 모든 국제교역은 왕실과 직접 거래하는 공무역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들은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이었고 1274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된 제국공주의 시종으로 따라온 삼가라는 회회인이나 현재 덕수 장씨의 시조등 위구르-터키계출신들이나 이능화가 쓴 <조선불교통사>에 보면 회회 집단이 고려 개성에 예궁을 짓고 살았다하며 이 예궁은 이슬람사원이었을것이다.
세종실록에도 "예조에서 아뢰기를 회회의 무리가 의관이 달라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는 바, 이미 우리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우리 의관을 따라 차이를 없애야만 자연스럽게 혼인하게 될 것이다. ...또 회회인들이 대조회 때 송축하는 의식도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하자 왕이 이를 승낙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정월초하루,동지,망궐례 때에 세종꼐서 문무백관과 외교사절들을 초빙하여 의례를 가졌고 그 자리에서 이슬람의 대표도 참석해 송축하며 꾸란을 낭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양성에 대한 조화없이 나라는 지속되지 않는다.
출산율이 떨어진다고 무슨 걱정인가 많은 이주민들이 있지않는가
다양성이 포용된 공존과 조화의 회복이야말로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는 진정한 출발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추가하자면 남북이 갈라진지 70년이 다되어간다 30cm의 얼음은 하루아침에 얼지않는다 한달만에 얼었다면 이 얼음이 녹는데도 한달이 걸릴것이다 헤어진지 70년이면 다시 하나가 되는데도 70년이 걸릴것이다.
북한을 다시 하나의 민족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유이민들을 꾸준히 받아들였던 선조들의 지혜를 계승하는 것이 다양성과 포용이 공존하는 강한나라를 만드는 기틀이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