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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함성과 환호성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의 적막은 아니었다.
"우씨, 왜 내가 이길 때는 아무 소리도 안 하는 거야?"
백산은 자신에 대한 관중들의 부당한 대우에 열이 받았는지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관중석을 향해서 두 주먹을 휘둘러댔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함만 흐르고 있는 관중석.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본 관중들은, 혼자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백산을 이상한
동물 쳐다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호인들의 수치였다.
어떻게 이곳 뇌룡현(雷龍縣)의 삼류건달이 강호무림인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 말았다.
혼자서 발광을 하던 백산이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입안이 불편했던지 조그마한
구슬 하나를 손위로 뱉어내고 관중석을 향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야! 이 새끼들아. 이 몸이 이겼으면 최소한 박수 정도는 쳐야 되는 것 아냐?
그리고 너희들 전부 죽을래?"
어디론가 시선을 보내며 외친 백산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재빨리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짝! 짝! 짝!
"형님, 잘하셨습니다."
박수소리와 함께 강구두 패거리 네 명이 그 자리에서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백산을 향해서 외쳤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흔들고
있는 백산을 향해 투인석에 있던 한 사람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들어왔다.
"야. 이 도둑놈아! 내 피독주 내놔!"
풍신개였다. 피독주 때문에 소운에게 얼마나 시달렸는데 그것이 뜻밖에도 백산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제야 관중석의 관중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뇌룡현(
雷龍縣)의 삼류 건달인 다쇠불알 백산이 사독 장서이를 이긴 비밀이 밝혀졌다는
표정들이었다.
사독 장서이의 시체를 옆에 두고 두 골통들은 이리저리 뛰면서 연신 말다툼을
해댔다.
"이놈아, 훔쳐갔으면 훔쳐갔다고 말을 해야지. 빌려달라면 안 줄까 봐서 그걸 훔쳐?
그것 때문에 내가 소운이한테 깨진 것을 생각하면…."
주루까지 오면서도 풍신개의 요란한 푸념은 그칠 줄 몰랐고, 그 옆에서는 소운이
백산의 옆구리를 꼬집으면서 사람 걱정시킨다고 쫑알거렸다.
"아-따! 이 영감 되게 그러네. 그런 것이 있었으면 진작 줄 것이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감춰놓고 있어요. 그것도 지저분하게 사타구니 속이 뭐요? 그 더러운 걸
입에 물고 있었으니 아직도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구먼. 야! 여기 술 안 가져오고
뭐해?"
여태껏 피독주를 입에 물고 있던 백산이 풍신개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 더러운 걸 왜 아직도 주둥이에 쳐 넣고 있어? 빨리 내놔?"
"내 몸에 독 찌꺼기가 아직도 남아있으면 어떡하고요? 더러워도 물고 있어야지."
이제는 되었다 싶었는지 피독주를 뱉어낸 백산의 고개가 이번에는 강구두 일행을
향해서 돌아갔다.
"너! 이 새끼들 전부다 대가리 박아! 그동안 오냐오냐했더니. 빨리 안 박아! 야
주판, 손 뒤로 돌려 새끼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강구두를 제외한 주판과 나머지 세 명은 주루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이어지는 백산의 일장 연설은 주루 안을 순식간에 웃음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렸다.
"취-익! 너희 이 새끼들 잘 들어라. 나는 말이야 조직을 살리기 위해 비무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응원 한 마디도 없어? 그래놓고 너희들이 의리 있는
놈들이냐? 앞으로도 계속 그리 할 거야? 대답을 해, 새끼들아!"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판과 그 일행은 자신들을 데려온 강구두를 원망하며 머리를 박고 있는 상태에서
주루가 떠나갈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 이후 백산이 비무를 할 때마다 '행님 이겨라! 백산 잘한다!'라는 구호가 비무
끝날 때까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여어! 다쇠불알인지 버러지인지 애들 교육을 무-척 잘 시키는구먼? 다음 번까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는 쟤들이 응원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래?"
백산을 향해서 비웃음을 흘리며 한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산이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버러지라 표현한 인물을 쳐다보았다.
"누구신지…."
"아! 나? 다음에 너 버러지와 비무? 아니 싸울 쾌비도(快飛刀) 마추(馬秋)다."
쾌비도 마추, 비도의 달인이며 정사지간의 인물. 일명 무영비도(無影飛刀)라도
일컬어지고 있는 자로 그의 마지막 비도술인 무영비도술(無影飛刀術)은 강호 일절로
알려져 있다.
순간 백산이 얼굴이 풍신개를 향해서 돌아가고,
"영감이 허구한 날 나 무시하니까 이런 좀만한 새끼까지 날 씹는 것 아뇨. 어떻게
무림인이란 새끼들은 주둥이만 살아있어요. 취-익!"
쾌비도 마추의 발 옆으로 침을 뱉어낸 백산이 거만한 표정으로 마추를 노려보자,
모욕적인 말을 들은 마추의 얼굴이 붉어지며 양손이 소매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백산은 아직 멀었다는 듯이 연신 빈정거렸다.
"오! 여기에도 꼬랑지 없는 개새끼 한 마리가 있었네? 이봐 개새끼 할 말 있으면
비무장에서 칼로 하라고. 이런 곳에서 짖어봐야 네놈 잘났다고 해줄 놈 하나도 없어.
그리고 그 배경 좋은 놈에게 말해. 이런다고 겁먹을 백산이 아니라고. 할 말 있으면
직접 와서 하라고 해 알았어?"
백산의 개새끼란 말에 잔뜩 붉어진 얼굴로 살기를 날리며 쾌비도 마추가 다가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루 안은 긴장감에 휩싸여들었다.
"잠깐!"
막 주루(酒樓) 안으로 들어서던 정천무룡 백무천이 쾌비도 마추를 제지하고 나섰다.
"이봐 버러지, 나는 배경만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야. 좋은 사부와
훌륭한 무공이 있다고 모두가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지. 뛰어난 오성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네. 너희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노력 말이야."
백산을 향하는 백무천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수많은 명문제자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만의 치열한 암투를 거치고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온 자신들이다.
그런고로 그들의 자존심은 어떤 누구보다 강했던 것이고,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처럼 될 수 없다는 우월감이었다.
백산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그래서, 그런 노력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갔으니까 우리 같은 버러지들은 너를
우러러보아야 한다 이거냐? 나보다 나이도 어린놈을 떠받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건가. 지금까지 네 녀석이 만난 모든 사람들이 너를 인정해주고
알아서 모셨는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인지도 모르는 촌놈 하나가 너를
무시하니까 그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버러지가 되는 것인가? 그런
건가."
정천무룡 백무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곧 타오를 것 같은 백무천에게 백산은
기름까지 붓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 오늘의 정천무룡 백무천을 있게 한 것은 정파 최고 무공이라
알려진 금황신공(金黃神功) 때문이라고 말이야. 만약 금황신공이 없었다면 백무천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 말은 맞는 것 같더구먼. 네가 보여주었던 달마삼검(達磨三劍)
인가 하는 검법 말이야 형편없었어. 그 정도라면 나도 잡을 수 있을 것 같더라고."
비웃듯 하는 백산의 말에 백무천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잇새로 말을 뱉었다.
"그럼 네놈이 내가 시전하는 달마삼검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이냐?"
"아니?"
백산의 부정적인 말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백무천과 그의 일행은
백산의 다음 말에 얼굴빛이 썩은 대춧빛으로 변해버렸다.
"네가 달마삼검만으로 나와 싸운다면 비무대 바닥에 눕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지?"
쿡! 쿡! 쿡! 프! 하하하!
정천무룡 백무천의 입에서 가소롭다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림인 같지도 않은 애들 두 명 이겼다고 간이 부었구나, 버러지. 좋아, 내가 하나
약속하지. 정천무룡 아니 천무맹(天武盟)의 이름을 걸고. 만일 너와 내가 비무를
하게 된다면 그땐 무조건 달마삼검만을 사용하지. 왜 내가 정천무룡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도록 하마. 물론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안 됐거든. 앞으로도 이백 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고 되어있어. 저 하늘에도 그렇게 적혀있다더군."
백산이 웃으면서 주루의 천장을 가리켰다.
정천무룡 백무천의 표정이 급속히 굳어졌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말로는 이놈을
당할 수가 없다. 정말이지 버러지 같은 놈이다. 무공실력도 배경도 형편없는, 말
그대로 삼류건달일 뿐이다. 만일 이런 곳이 아니라면 결코 만날 수도 없고, 이렇게
신경전을 벌일 일도 없을 것이다.
버러지는 버러지일 뿐 그냥 밟아버리면 된다.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주변의 누군가가 벌써 밟아 없애버렸을 것이다. 이곳에서
투신이 되어 그 여세를 몰아 맹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참아야만 한다. 하찮은
생사투인(生死鬪人)을 죽여서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이고자 한다면
정식으로 생사비무를 통해서 죽여야 한다.
백무천은 입을 굳게 다물고 쾌비도 마추를 쳐다보았다. 백무천의 시선을 받은
쾌비도 마추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말만으로는 천하제일이구나. 부디 무공실력도 네놈의 말발과 같았으면 좋겠군."
백무천이 몸을 돌려 밖으로 사라졌다.
"대단하구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비무에 대해서 벌써부터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 자존심 강한 놈을 자극해서 금황신공을 못쓰게 만든다. 정말이지 대단한
잔머리라 아니 할 수 없구나."
대책이 안 선다며 고개를 흔들고 있는 풍신개를 향해서 백산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매사에 준비성이 철저한 놈은 살아남는 거지요. 사냥의 법칙이기도 하고요."
사냥의 법칙이라는 백산의 말에 풍신개는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 * *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한 손에 만두 접시를 들고 있는 백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놈아! 무슨 바람이 불어 이곳까지 와서 무게를 잡고 있느냐?"
"쉿!"
백산이 입에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한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처연히 갈대밭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네놈에게 무게는 무슨. 저 여자가 누군 줄이나 알고 이러고 있는
게냐?"
풍신개가 백산의 행동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남자 보기를 벌레 쳐다보듯 하고, 스치기만 해도 얼음 조각으로 부서지게 되는
빙천수라마공(氷天修羅魔功)이란 마공을 익힌 빙혼마녀(氷魂魔女) 조천영(趙川英)
이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라, 이놈아."
빙혼마녀 조천영. 고금오천무 중 하나인 빙천수라마공을 익힌 여 고수. 특히
남자에게는 일말의 인정도 두지 않고 얼음 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잔인한 손속에
마녀라고까지 불리는 여자. 누구인가를 찾아서 중원을 헤매고 다닌다고 알려져있다.
"영감, 빙혼마녀는 여자 아닌감? 여자들이 다 가지고 있는 가슴이 없는 거야.
아니면 밑이 잘못 된 거야. 저 몸매 좀 봐. 자고로 여자는 저 정도는 돼야지. 안
그렇소, 영감."
빙혼마녀 조천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산의 눈은 몽롱하게 풀어져서 그녀의
움직임만을 쫓고 있었다.
"저렇게 고독하고, 외롭게 보이는 여자를 보고도 못 본 체한다면 그놈은 남자가
아니지. 거시기를 떼서 개를 줘버려야 돼. 암 그렇고 말고."
멍한 표정의 풍신개를 뒤로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백산은 조천영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자신이 다가갈수록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살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백산이 귀찮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단 말을 몸으로 보여주는 백산의 발걸음은 멈출지를 모르고
진군을 계속해 나갔다.
"저, 소저.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계신지는 모르지만 허락하신다면 저도
소저가 안고 있는 고뇌의 바다에 같이 빠지고 싶습니다만. 이왕이면 이 만두라도
같이 들면서요."
뿌듯했다. 자신이 생각하기도 너무나 멋있는 말이었다. 고뇌의 바다라니,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고급 언어에 고무된 백산이 가만히 조천영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백산을 향해서 돌아서던 조천영은 백산의 이상한 몰골에
가소롭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훗!"
잔물결이 치듯 얼굴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조그마한 미소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백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조천영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조천영의 귀밑머리가 살짝 날리고 이에 놀란 주변의 갈대들이
스슥거리며 아우성을 친다.
"그렇게 웃고 사십시오. 소저가 웃으니까 따뜻한 바람이 불고, 갈대들도 즐거워하지
않습니까."
백산의 말에 약간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조천영의 얼굴이 원래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미소를 지은 것은 자신 앞에 나타난 이 평범하게 생긴 청년의 몰골
때문이었다.
덩치는 보통사람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컸지만 얼굴에 비해서 작은 눈이며 입이,
그리고 흉터 등 아무리 잘 쳐주어도 보통 이하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거기다 고독의 바다라니 어디 신파극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읊으며 수작을 거는
모습이 너무나 촌스러웠다. 심지어 팔다리에 고정시켜 걸을 때마다 위 아래로
흔들리는 철구는 또 무엇인가. 마치 유량극단의 광대 같았다.
그리고 그가 내미는 손에 있는 식어빠진 만두 두 개. 정말이지 눈물겹도록 불쌍한
몰골이었다.
"여자에게 수작 부리기에는 당신이 너무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리고 당신 모습을 보면 있던 여자도 도망가게 생겼는데. 안 그런가요? 공자!"
화들짝 놀란 백산이 손가락을 펴서 자신을 가리켰다. 그 무섭다던 조천영의
목소리는 의외로 포근했던 것이다.
"에이 모르시는 말씀 마시오, 누님! 사람이란 말입니다. 여기 이 얼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가슴속을 봐야 된다는 말이지요. 거 허우대만
멀쩡한 놈들 말이요. 열에 아홉은 사기꾼이에요.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마음고생만
시키죠.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백산이 자신의 가슴을 탁탁 쳐댔다. 누님이란 소리에 흠칫하던 조천영은 이내
표정을 풀며 재미있다는 듯이 백산을 쳐다보았다.
"공자의 말이 맞기도 하죠. 그렇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를 더
좋아한답니다, 이 숙맥 공자님."
마지막 말은 우스갯소리처럼 흘렸으나 얼굴 표정은 씁쓸함이 가득했다.
"이런데서 여자 꼬실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나
하는 건 어때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저는 운이 좋거든요. 그리고 오래 살아야 될
숙명을 타고나서 빨리 죽고 싶어도 죽지를 못해요."
확고한 표정을 지으며 딱히 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닌 마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백산을 가만히 응시하던 조천영이 떠나면서 한마디
했다.
"만나서 즐거웠어요. 오랜만에 웃어보기도 하고."
"누님! 누님은 웃는 모습이 예쁘네요."
저 멀리 멀어져 가는 조천영을 향해서 백산이 소리쳤다.
조천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백산은 그 자리에 털썩 드러누워 버렸다.
어두워지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평생을 사냥꾼으로만 살다간 아버지와
이제는 얼굴마저도 희미해지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과 너무나 흡사해서인지 그녀에게 친숙감을 느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나이가 저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오래 살아야죠. 아버지 어머니 몫까지 살아가려면 아직도 많은 세월이
남았어요. 그 전에 두 분을 그렇게 만든 놈들한테는 반드시 돌려줘야죠. 그놈이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이 우리 사냥꾼의 법칙이니까요.
이자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뭐해요? 이럴 시간 있으면 빨리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쉬는 것이 어때요?
그 여자하고는 잘 안됐나 보죠?"
입이 한자나 튀어나온 소운이 백산을 쏘아보고 있었다.
"소운? 아! 그 여자. 남들이 빙혼마녀가 어쩌고 하기에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백산이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섰다.
"그만 가자고."
"찬 데서 그렇게 누워있으면 어떡해요…."
백산의 등에 붙어있는 갈대 잎을 털어주면서 구시렁대는 소운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신영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백산이 남기고 간 자리에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인간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 * *
"저번에 주루에서는 대접 잘 받았다. 너무 지루한 시간이었다. 진정한 무림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마, 버러지 새끼."
자신의 소맷부리 속으로 두 손을 깊숙이 찔러놓고 있던 쾌비도 마추가 무엇이
못마땅한지 온몸을 움찔움찔 떨고 있는 백산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다. 주루에서 당한 모욕을 갚아줄 때가 된 것이다. 비무의
시작 소리와 함께 비수를 발출(發出)하려던 마추가 백산의 이상한 모습에 멈칫 섰다.
변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잔 떨림을 보이고 있던 버러지의 모습이 천천히
변화하고 있었다.
눈으로부터 청광(淸光)이 조금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동공이
사라지고 시퍼런 광채만 남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눈으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온몸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백산의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며 다
헤어진 옷들이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힘을 견디다 못한 철구들이 마치 무엇인가가 밀치기라도 하듯이
비무대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절로 움직이는 철구의 모습은 까닭
모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의 야수였다.
"크크크!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백산의 입에서 거북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끌시끌하던 관중석의 소음도 딱 멈추었다. 백산의 변화된 모습에 하도 놀라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야수처럼 변한 백산의 모습에 흠칫하던 마추가 표정을 풀면서 가볍게 응수했다.
"준비를 많이 했군. 연출도 훌륭하고 말이야. 그렇지만 네놈이 죽는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아."
번쩍!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추의 양손으로부터 네 줄기의 빛이 터져 나왔다. 두 줄기는
시퍼렇게 빛나는 백산의 눈을 향하고, 나머지 두 줄기는 백산의 가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캬악!"
귀찮다는 듯이 괴성과 함께 휘둘러진 철구에 의해 네 개의 비도(飛刀)들이
나가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백산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몸놀림과는 확연히 달랐다.
육안으로는 거의 확인할 수도 없는 가공할 속도로 쾌비도 마추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뒤이어 허공을 유영하는 백산의 철구들. 새파란 빛을 발하고 있는 열두 개의
철구는 마추의 모든 움직임의 방위를 차단하며 거세게 몰아쳤다.
계속해서 뒤로 밀리기만 하던 마추는 자신의 비도를 발출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피하기에만 급급해했다. 비도를 날리기 위해서는 한 호흡이 필요한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백산의 공격에 호흡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놈의 철구가 얼굴을 스쳤는지 뺨으로 끈적끈적한 것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피이리라.
마추는 경악하고 말았다.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가 알고 있던 놈의 실력은
단연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비도를 한번 발출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낼 수 있는 실력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처음 던진 네 개의 비도는 잠시 겁이나 주자 싶어서 가볍게 던진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단 한번의 비도를 던질 기회마저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간밤에는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일 것인가에 대해서 계획을 세웠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살아있다는 것을 저주하도록 해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인가. 저놈은 비도를 뽑을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고
있다. 벌써 일 다경 이상을 속수무책으로 피하고만 있다.
마추는 이를 악물었다.
'좋다. 네놈이 정 그렇다면 살을 주고 뼈를 받는다.'
철구가 자신의 왼쪽을 노리고 날아오는 순간 마추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어
선 채 자신의 오른손을 힘차게 내뻗었다.
"허! 아!"
관중석에서 한숨 섞인 탄성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이 굳어진 마추가 날아오는
철구를 보고도 그대로 멈춰 섰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오른쪽
어깨를 움찔하는 것도 같았으나 몸이 움직이지를 못했다.
퍼억!
백산의 철구가 와서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왼쪽어깨가 부서진 마추는 엄청난 고통에
입을 벌렸으나 비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마추는 자신의
왼팔을 내려보았다. 완전히 부서졌는지 너덜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심하기는 했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마추는 시선을 돌려 놈을
쳐다보았다. 놈은 새파란 광채를 쏟아내며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자신이 던진 비도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비도를 찾던 마추는 오른손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비도를 던진 동작에 의해
앞으로 내뻗고 있어야할 그의 오른손이 너덜거리는 왼팔의 소매 속에 그대로 있었다.
"인면부시독(人面腐屍毒)이닷!"
"사독(死毒) 장서이(張瑞二)의 인면부시독에 당했다!"
관중석에서 놀람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런…가?"
힘겨워하는 목소리로 마추가 백산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당해보았는데 아주 효과적이더군. 자! 이제 마무리를 지어볼까?"
새파랗게 빛나는 백산의 철구들이 무차별하게 마추를 강타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갖지 못한 몸뚱이가 그대로 비무대 바닥에 쓰러졌다.
백산은 시선을 들어 천천히 관중석의 한 곳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 끝자락에 굳어진 얼굴의 백무천이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잡혔다.
"사형! 저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갑자기 전에 비해서 몇 배나 강해진 것
같으니 말입니다."
버러지의 죽음을 만끽하기 위해 나왔다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백무천의 말을 듣고 있던 운학자(雲鶴子)도 백산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온몸에서 잠력(潛力)을 뽑아내는 듯한 폭발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사악한
마단을 복용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리라.
"저렇게 폭발적인 효과를 끌어내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사령마단(邪靈魔丹)이나
혈마단(血魔丹) 또는 광혈단(狂血丹)을 복용했을 때만 저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사령마단이라면 오십 년 전에 무림공적이었던 백살마대(百殺魔隊)가 복용했다는 그
저주의 마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옆에 있던 목령자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백살마대.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선배들로부터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였다.
온몸이 핏빛 강기에 휩싸인 채 인성을 잃고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질렀던 그들,
결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살인귀들의 집단이었다고 했다.
"그런 저놈이 복용한 것이 사령마단이란 말입니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사령마단이라 보기에는 그 효력이 너무 미약해. 더욱 중요한
것은 저놈의 정신이 말짱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느냐."
운학자의 말처럼 머리와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청광이 사라진 백산은 몹시 맥 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숨을 고르는 듯했다. 으레 그러했듯 환호성도 없는 관중석을 한번
바라보고는 터벅터벅 비무대를 빠져나갔다.
* * *
"이놈아! 네놈이 처먹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더냐? 무엇을 먹었기에 그렇게
반미치광이가 되었고, 지금은 왜 또 이렇게 힘이 없냐고?"
백산의 방에서 풍신개와 소운이 백산을 다그쳤다.
백산을 걱정하는 소운과는 달리 풍신개는 백산이 복용한 약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은지 계속해서 약에 대해서만 물었다.
"혹시…네놈, 그 사령마단인가 하는 그 저주의 마단을 복용한 거냐?"
순간 백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여태껏 힘없어 보이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영감도 사령마단이란 걸 알고 있었소? 그렇군. 어쩌면 그 당사자들 중의 한
사람인지도…."
백산의 뒷말은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으나 곁에 있던 풍신개는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그 사령마단이란 것은 천무맹과 천마맹에만 있는 것인데 나 같은 촌무지렁이가
어디서 그 귀한 것을 구하겠소."
어쩌면 풍신개를 통해서 백살마대의 진실을 밝힐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백산은 그를 떠보기 위해서 천무맹과 천마맹을 들먹이며 알은체를 했다.
풍신개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그도 오십 년 전의 백살마대 사건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때의 주재자였고 피해자라
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그 내막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서 방주자리마저 내던지고 백살마대의 생존자를 찾아서 강호 전역을 헤매고
다녔으나 어디에도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백살마대의 탄생에는 사령마단이라는 마단과 천무맹, 천사맹.
천마맹 즉, 현재의 무림삼천(武林三天)이 모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백살마대를 탄생하게 했던 사령마단의 존재를 알고 있는 놈을 만난
것이었다.
"네가 사령마단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어찌 아느냐?"
얼굴이 굳어진 풍신개가 다그치듯이 백산을 향해서 다가섰다.
"영감도 많이 알고 있군. 다 지나간 일인데 새삼스럽게 관심은 무슨 관심이요?
그렇게 하면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하쇼? 어차피 천무맹과 천마맹 세상이
되었는데, 그들이 바라던 대로 말이요. 혹시 모르지 영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당신도 그때 천무맹의 일원이지 않았냐는 소리였다.
"네 이놈!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 게냐?"
얼굴을 붉힌 채 고함을 치던 풍신개는 금방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보였다. 옆에
있던 소운은 두 사람의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심각해지는 풍신개를
보며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아! 영감 진정하고 생각 좀 해봅시다."
풍신개를 진정시키며 백산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 시대는 말이요. 오천맹(五天盟)의 세상이었소. 강호 최대의 세력인 오천맹의
후예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사령마단을 복용했겠소.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전원이 다
그것을 먹을 정도로 절박한 무엇이 있었을까요? 아니죠. 그들은 가만히 있어도
무림의 최고가 되게 되어 있었소. 그런 그들이 단체로 미쳤다는데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음모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들을 도륙(屠戮)하기 시작한 거지.
말로는 정의 수호니 악인 처단이니 하면서 자신들보다 잘난 놈들을 없애 버린 거야.
그리고 오천맹의 수뇌들도 그들의 자식들이 패악을 저지른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음모니 뭐니 하는 말도 못 꺼냈겠지. 오히려 강호 무림의 신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자식들에게 검을 날렸지.
어떤 말로 핑계를 달아도 결국에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저질러진 일이란
말이요. 그래서 그런 놈들이 싫소. 정의를 위한다며 자기 이름을 날리기를 원하고,
정의를 실현한다며 사욕을 채우는 그런 위선적인 놈들 말이요."
풍신개는 할 말을 잃었다. 늘 덤벙대기만 하던 놈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백살마대 사건에 대해서 너무나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이 또 다른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확신마저 들게 했다.
그래서 백산을 더욱더 다그쳤다.
"백산 자네, 그것들 전부를 누구한테 들었나?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지금 어디 있나?"
풍신개의 말투가 절박한 애원조로 바뀌었다. 그러나 백산의 눈빛은 요지부동 변함이
없었다.
"알아서 어쩔 거요. 설령 그것이 음모였다 하더라도 오십 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무얼 어쩔 것이오. 다 늙어서 오늘 내일 하고 있는 노인네하고 삼류건달밖에 안 되는
나 같은 놈하고 증거를 찾아낸들 무슨 방법이 있는 게요. 아무 것도 없소, 다
부질없는 짓이요. 결국 영감은 허송세월 한 거요, 지난 세월을…."
백산도 느끼고 있었다. 이 강호 노기인의 삶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그것 하나가 이 노인네를 지탱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아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 노인네는 백살마대의 음모가 일어났던 그 시대의 개방의 방주로서
천무맹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아니야 그렇지가 않아. 그것이 음모였다면, 진정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면 나는
밝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내가
하다가 안 되면 하늘에 빌어서라도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풍신개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가진
얼굴로 변해갔다.
"하늘이라고 하셨소. 지금껏 살아오면서 하늘이 벌주는 것 보았소. 결코 하늘은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소. 권력을 잡고 싶은 놈, 힘을 갖고 싶은 놈들이 하늘을
핑계 삼아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오. 죄를 짓는 놈도 인간이고 벌하는 놈도
인간이며, 이 세상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오."
하늘이란 놈을 믿지 않는다. 정녕 하늘이 있어서 죄 지은 놈을 심판한다면 왜
인간에 의해서 고통 받는 사람이 생겨나겠는가. 아버지가, 어머니가, 순박하던 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수백의 인물들이 죽어갔는데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건을 무마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가진 자가 더 잘 사는 세상, 없는 자는 더 힘든 세상이 바로 인간사인 것이다.
"이놈아,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누구냐고. 그것만 얘기해라."
백산이 고개를 돌리고 침대에 누워버리자 풍신개가 고함을 빽 질렀다. 그간 거의
포기했었다. 어느덧 오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천무맹의 일원이어서 조사할 수 없었고, 그 후론 백살마대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정도 무림의 금기로 취급되고 있어서 조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방주자리마저도 버렸다. 일생을 통틀어서 그가 단 한번 사랑했던 그녀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렀다.
"영감도 나에게 전부 이야기한 것은 아니잖소. 서로에게 조금씩 비밀이 있는 것
같으니 그 이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둡시다. 영감 말대로 밝혀져야 할 거면 언젠가는
밝혀지겠지…."
풍신개는 힘없이 백산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찌되었건
자신은 그 당시 천무맹 소속인 개방의 방주 아니었던가.
"그래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나중에. 오십 년을 기다렸는데 이까짓 며칠 정도를
못 기다리겠느냐."
풍신개가 힘이 없는지 소운의 부축을 받으며 되돌아 나갔다.
"이야기해줄 걸 그랬나? 괜히 찜찜하네. 나중에 이야기해주면 되지 뭐."
복잡한 것을 피하자는 의도도 있었지만 아직은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었다.
풍신개는 오십 년 전의 개방 방주였던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때 백살혈겁사건의 중심에 있던 사람임에는 분명한 사실이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요, 영감.'
* * *
풍신개와 백산이 서로의 가슴속에 있는 앙금을 풀어내지 못한 채 생사투인전은
계속되었다. 자신이 돈을 걸었던 무인이 이겼을 때는 환희와 열광이, 패했을 때는
실망과 눈물이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에 흐르고 있었다.
새파란 청광을 쏟아내며 달려드는 백산의 상대는 없었다. 생사비무 시작 전의 첫
모임에서 백산에게 구타당했던 혈월(血月) 사뇌영은 채 십 초를 넘기지 못하고 주방
칼에 암습(暗襲)을 당해서 이번에는 완전하게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백산의 별호 앞에는 운수대통이란 말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백산에게 걸기만 하면 운이 좋게도 돈을 번다는 뜻에서 생긴 별호이다. 아울러 이곳
뇌룡현의 삼류건달이 생사비무에서 쟁쟁한 무림인들을 물리치고 아직 살아있는 것도
대단하거니와 오차전을 부전승으로 올라가게 되어 운 때가 좋은 놈이란 뜻이었다.
'운수대통 다쇠불알 백산'
이것이 이곳 만상투인루에서 새로 생긴 백산의 별호였다.
이제 백산은 생사비무 최종전인 참마도(斬魔刀) 팽월(彭月)과의 비무만 남아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십일월의 서늘한 바람이 살랑살랑 갈대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어차피 만나게 될 텐데 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이유가 무엇이오?"
중앙에 조그마한 공터가 만들어져 있는 끝없는 갈대밭에서 참마도 팽월과 백산이 도
위에 손을 올린 채 마주보며 서 있었다.
"왜! 여차하면 그 도(刀)로 나를 벨 텐가?"
특유의 유들유들함이 사라진 백산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팽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백산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팽월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일말의 감정도
담겨져있지 않은 그런 눈빛이었다. 끝 간 데 없는 심해처럼 깊디깊은 눈동자였다.
팽월은 과거에도 저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인 도왕(刀王)
팽인덕(彭仁德)의 눈빛이었다.
바로 절대자의 눈빛이었다.
참마도 팽월은 약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애도인 오호단문도(
五虎斷門刀)를 꽉 움켜쥐었다. 가문 최고의 보물이었던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가
큰아버지와 함께 사라지고 난 후 그가 가지고 있는 오호단문도가 팽가의 최대 보물이
되었다.
바로 할아버지인 팽인덕이 그가 열 살 때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며, 결코
이용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며 쥐어주신 도이다.
그때 보여주었던 눈빛이 바로 저 눈빛이었다.
"팽무도라는 사람을 아느냐?"
쾅!
팽월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면서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팽-무-도!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영광이자 수치인 이름 석자.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에서
백살마대(百殺魔隊)의 대주로, 아버지의 도를 가슴으로 받아야 했던 비운의 인물.
자신의 가문에서는 그 누구도 팽무도란 이름 석자를 입에 담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팽무도란 이름은 가문의 금기가 되어버렸다.
"팽무도란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누-누구요, 당신은. 어째서 그분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이오."
"백살마대의 대주였던 대마인 팽무도의 이름은 강호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닥쳐라! 어느 누구도 그분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팽월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뽑아들었다.
"그래도 가족이라 이건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그분을 모욕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참마도 팽월의 기세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흥분한 마음을 바로 추스르며
자신의 도에 집중하는 모습은 역시 명가의 후예다웠다.
참마도 팽월이 일도직파(一刀直破)의 도법으로 또다시 무극도(無極刀)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도에서 한 치 정도의 도강이 새어 나오면서 백산을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상대의 강함을 알아본 팽월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까닭이리라.
백산은 준비해왔던 도를 뽑아들고 가볍게 막아내고 있었다.
팽월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나 큰 실력 차이였다. 자신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가볍게 쳐내버린 상대였다. 어쩌면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온몸의
진기를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끌어올렸다. 그의 도에서 다섯 치 정도의 도강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잠깐! 이것을 먼저 보고 판단을 해라."
백산이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천팽무도법(恨天彭武刀法)의 일초인 혈극참(
血極慘)이었다. 백산의 평범한 도에서는 일장이 넘는 도강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스치는 모든 것은 가루가 되어 날렸다.
눈이 찢어질 듯 커진 팽월은 가문의 최고 보물이며 자신의 손에서 절대로 떼어놓지
말아야할 오호단문도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다.
보았다. 시뻘건 혈광 속에 녹아있는 하북팽가 최고의 도법이며 자신의 큰할아버지의
독문 무공이었던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을.
"한천팽무도법(恨天彭武刀法) 제 일초 혈극참(血極慘)이다."
한천팽무도법이라 했다. 하늘을 원망하는 팽무도의 도법이라고 했다. 팽월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분, 그분은 살아 계십니까?"
도법에 관한 것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팽무도의 생사만 물었다.
팽월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끄덕인 백산은 빙긋이 웃었다.
"너, 나랑 거래를 한번 해야 되겠다."
다음날 참마도(斬魔刀) 팽월은 관중석에 있는 모든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백산에게 걸레가 되도록 얻어맞고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를 떠났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떠나는 팽월을 보며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으나, 아무런
말도 없이 싱글벙글 웃고만 있는 그의 모습에 그저 비무에 진 충격으로 실성했다고
치부해버렸다. 그 누구도 더 이상 팽월을 기억하지 않았다.
제1권 끝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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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감사함니다
2권기대만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