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퇴원'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 공모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1966-72년 월간 <사상계> <아세아> <지성> 편집부 기자로 재직하였고, 1999년에는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좌교수로 활동하였다.
작품으로는 『병신과 머저리』, 『굴레』, 『석화촌』, 『매잡이』, 『소문의 벽』, 『조율사』,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떠도는 말들』, 『이어도』, 『낮은 목소리로』, 『자서전들 쓰십시다』, 『서편제』, 『불을 머금은 항아리』, 『잔인한 도시』, 『살아있는 늪』, 『시간의 문』, 『비화밀교』, 『자유의 문』, 『별을 보여 드립니다』, 『가면의 꿈』, 『당신들의 천국』, 『예언자』, 『남도 사람』, 『춤추는 사제』, 『흐르지 않는 강』, 『낮은 데로 임하소서』, 『따뜻한 강』, 『아리아리 강강』, 『자유의 문』 등 여러 편의 소설과 소설집이 있으며 수필집 『작가의 작은 손』, 『사라진 밀실을 찾아서』, 『야윈 젖가슴』 등을 비롯해, 희곡 『제3의 신』등이 있다.
그 밖에 동화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를 비롯하여 판소리 다섯마당을 동화로 풀어 쓴 『놀부는 선생이 많다』, 『토끼야, 용궁에 벼슬 가자』, 『심청이는 빽이 든든하다』, 『춘향이를 누가 말려』, 『옹고집이 기가 막혀』를 포함한 많은 작품이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큰형, 아우의 죽음은 이청준을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 벽촌이던 고향에서 광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고향 사람들의 자랑거리였다. 법관이 될 거라는 기대를 뒤로 하고 그는 문학의 세계에 눈을 돌리고 독문학과에 진학했다. 우리 현대소설사에서 가장 지성적인 작가로 평가 받는 이청준은 그의 소설에서 정치·사회적인 메커니즘과 그 횡포에 대한 인간 정신의 대결 관계를 주로 형상화하였다. 특히 언어의 진실과 말의 자유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른바 언어사회학적 관심으로 심화되고 있다.
그의 소설들 중에는 영화화된 작품이 많은데, 1972년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을 시작으로, 세계적인 컬트 감독으로 추앙받는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1977), 맹인 목사 안요한의 일대기를 그린 이장호 감독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 국내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했던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와 ‘축제’(1996), ‘천년학’(2006), 삶의 의미와 구원의 문제를 탐색케 하는 칸영화제 수상작인 이...(하략)
"당신이 길거리에 나앉아 동전 구걸하고 있을 때, 그 앞으로는 가지가지 고난과 외로움을 지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자신의 죽음의 길을 생각하며 그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그들이 당신을 보고 자신의 고난과 외로움을 위로받고 새로운 삶에의 용기를 얻어 갔다면, 당신은 바로 그의 구원자인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한두 사람에 그친 일이라 하더라도 그 뜻이 작은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그 낮고 작은 삶을 스스로 소중히 함으로써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그것까지 구원의 용기로 채워 준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냄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럴진대 우리의 삶을 어찌 낮고 작은 것이라 불평을 하며 부인할 수가 있느냔 말입니다."
"......"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야 물론 초라하고 고난스런 삶이 자랑스럽고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길거리에 나앉아 구걸질을 해야 하는 것을 축복받은 삶이라 할 수도 없겠구요. 하지만 어차피 한번 먼 눈을 불평하고 원망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제 말은 그런 어려운 삶 속에서마저도 뜻이나 보람을 찾을 수가 있으니, 그것을 더욱더 소중히 여겨서 오히려 그 눈을 뜬 사람들보다도 먼저 참 지혜를 깨달아 가자는 것이지요...... 육신의 눈이 멀었다고 세상이 모두 암흑은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세 가지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저 단순히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이요, 그 두번째는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눈입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밝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영혼의 눈입니다. 그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보거나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영혼의 눈으로써야 비로소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그 영혼의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받음이 유익이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멀게 한 것은 우리에게 그 영혼의 눈을 일찍 뜨게 하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차라리 그 육신의 암흑을 통하여 누구보다 일찍 영혼의 눈을 뜰 수 있게끔 선택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 pp.310-311
"당신이 길거리에 나앉아 동전 구걸하고 있을 때, 그 앞으로는 가지가지 고난과 외로움을 지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자신의 죽음의 길을 생각하며 그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그들이 당신을 보고 자신의 고난과 외로움을 위로받고 새로운 삶에의 용기를 얻어 갔다면, 당신은 바로 그의 구원자인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한두 사람에 그친 일이라 하더라도 그 뜻이 작은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그 낮고 작은 삶을 스스로 소중히 함으로써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그것까지 구원의 용기로 채워 준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냄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럴진대 우리의 삶을 어찌 낮고 작은 것이라 불평을 하며 부인할 수가 있느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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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야 물론 초라하고 고난스런 삶이 자랑스럽고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길거리에 나앉아 구걸질을 해야 하는 것을 축복받은 삶이라 할 수도 없겠구요. 하지만 어차피 한번 먼 눈을 불평하고 원망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제 말은 그런 어려운 삶 속에서마저도 뜻이나 보람을 찾을 수가 있으니, 그것을 더욱더 소중히 여겨서 오히려 그 눈을 뜬 사람들보다도 먼저 참 지혜를 깨달아 가자는 것이지요...... 육신의 눈이 멀었다고 세상이 모두 암흑은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세 가지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저 단순히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이요, 그 두번째는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눈입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밝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영혼의 눈입니다. 그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보거나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영혼의 눈으로써야 비로소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그 영혼의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받음이 유익이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멀게 한 것은 우리에게 그 영혼의 눈을 일찍 뜨게 하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차라리 그 육신의 암흑을 통하여 누구보다 일찍 영혼의 눈을 뜰 수 있게끔 선택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 pp.310-311
[YES2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