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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뉴스정보 스크랩 지명과명소(1)포진지
박두춘 추천 0 조회 337 13.11.04 11: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7. 구남 의 용호농장

일제는 용각지 잘록개 지역에 움직이지 않는 군함의 위력을 갖춘 기지를 건설하였다

그래서 지명은 군함(軍艦) 소리글로 구남이라 하였다.

1945년 해방후 부터 군함의 일본군인 병영에 한센병 환자들이 밤을 이용하여 배와 육로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용호본동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은 용호병원으로 인가되고 추가로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들었다 .용호동의 1개통으로 인구가 늘어나자 정치적으로 국립 용호병원으로 바뀌게 되어 한때는 부산시의 권한 밖이 되었다.

그 후 새마을 사업으로 용호농장으로 변모하면서 돼지와 닭 등 가축을 대량 사육하고, 인근 산을 개간하여 채소 등을 재배 하게 되었다 .

농장자체 보안을 담당하고 간이 화장장을 운영하였으며 비룡산자락에 불법 분묘도 생겨났다 농장 입구에 미감아들의 교육시설인 용호분교를 운영하였다

용호주민들과 운동회 등 다양한 접촉이 이루어지고 교류도 많았다 .

또한 일본은 군함의 포진지등을 위장하기위해 편백과 삼나무 군락지를 조성하여 울창한 숲이었지만 심각하게 훼손되고 파괴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용호농장은 한센병 환자들이 이주하고 대단위 아파트단지로 변모 하였다

 

                   구남용호농장

 

 

 

*용각지(龍?地) 벽산아파트-문서보존소와 용호농장의 골짜기를 말한다

 

8.구남의 일본군 포진지와 탄약고

 

     ( 제2관측소  gop)

 

1904년의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콘크리트 요새를 공격하려고 고민하던 끝에 일본 본토에 설치되어 있던 해안포 28cm 투박한 메이지 유탄포를. 운반해 여순 공방전 최대의 악전고투를 보이던 203고지 점령 전에 승리를 이끌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해안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일본해군이 전함 도사’와 ‘아카기, 카가 를 건조하든 ’1921년 영국, 미국, 일본 3국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체결에 의해 주력함정 의 비율을 5:5;3으로 하였다. 그 전함에 탑재될 예정이던 408mm 함포(일본호칭은40cm급2문을1포)를 일본 육군이 구입하여, 부산 용호동 오륙도 해안과 쓰시마섬(對馬島) 북단의 ‘토요포대’(豊砲臺)에 각각 바다를 마주보며 움직이지 않는 군함의 화력을 갖춘 거대한 규모의 포진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일본은 1924년부터 1932년까지(토요포대는1929년5월부터 1934년3월에 완공), 총 8년에 걸쳐 11군데에 함포용 해안포대를 설치하였다.

그 당시 연합군은 일본본토와 부산일원에도 공습경보와 많은 폭탄을 투하 하였다. 용호동에도 벽산아파트 뒤2곳 낙천대 아파트1곳 동산말에 1곳 용호초등학교 염전에1곳 신용산 용당쪽 에2개의 대형폭탄을 투하하였다.

천혜의 오륙 도 앞 잘록개(승두말) 해안까지 절개하여 거대한 지하 포진지를 구축 하였다.

포진지에 사용한 자갈은 비용개(백운포) 몽돌을 사용하여 포의 구조물을 만들고 지붕을 덮어 석면마분지 에 아스콘을10겹 사용하여 방수처리를 하고 그 위에 지상포격에 견딜 수 있도록 콘크리트를 하였다 지하 구조물은 진동에 의한 균열을 최소화 하기위에 3겹으로 아스콘 처리한 석면 마분지를 연결부위에 넣었다

포신의구경장은 45cm급(18.5m 108ton)으로 제작한 함포로 사정거리가 약30km 에 달하였다고 한다.

진지를 완공하고 복토하여 관목과 대나무를 심어 위장하여 항공 지표 식별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포진지 위쪽에 2곳의 관측소를 구축하고 거미섬(933m위치)과 구덕 상여 돌(498m위치) 앞에 콘크리트 해수표 구조물을 만들어 해수면의 조석관측을 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함포의 조작은 수압에 의한 방식으로 별도 압축 조정 탱크(축력기蓄力機)를 만들어 압력보조 추를 이용하여 수압의 상태를 확인 하였다.

가까운 해안 잘록개, 동서로 10cm급의 다양한 유탄포(메이지곡사포)4문과 15cm급 카농포(加農砲.비교적 긴 포신을 가진 포, 옛날 분류의 ‘캐논’을 일본식으로 읽음)4문, 그리고7cm 대공고사포4문등 메이지 포대외 6개의 지하포진지를 해방 무렵까지 구축하였다.(동백곶1934년5월~1935년년12월 1938년1월개축)

메이지(明治)포는 1922년 이전에 오륙도 선착장 잘록개에 원통 방호벽 속에 설치하였으나 사용하지 않고 철거하여 다른 포를 설치할 계획만 수립한 상태였으며 카농포4문은 지금의 오륙도 중학교 앞 씨사이드 공사 예정지 동백 곳에 설치하여 매년2~3회 사격훈련을 하며 탄두 없이 발사 시험을 하였다.

두 곳의 탄약고는 진해 총사령부 예하 모든 군영에 보급하는 화약고 이었으며 제1탄약고 앞 4동의 건물에서 포탄을 제조하여 전국으로 보급하였다고 한다.

화약의 용해는 파라핀(Paraffin)을 이용하여 간접가열 하였으며 이곳에서 신관(信管Fuse)과 뇌관(雷管 Detonator) 삽입 관 가공도 하였다고 한다.

장자등 화물운송 선착장은 방패섬 앞에 ( ㄱ )자 형 부두를 축조하여 운동장까지 대차 레일을 설치하여 운반 하였다. 부두는1959년9월17일 사라(Sarah)호 태풍으로 파손 유실 되었다.

7cm고사포는 장자산 큰 고개쉼터 남쪽 산 정상(구309전대)에 4문을 설치하고 그곳을 나나까(7處) 라 불렀다 . 1942년부터는 서치라이트를 장자산 정상까지 설치하여 밤마다 가동하였다.

그러나 큰 포는 두 문중 왼쪽 1문만 운전하도록 수압배관을 하였고 우측1문은 가동포(可動砲)를 따라다니는 모양새였으며, 년 1~2회 추진화약만 장진하여 대포(큰포라함)를 시험하고 일본이 폐망하자 1945년10월 미군이 진주하여 폭약을 설치하여 폭파시켰다. 쓰시마 토요포대(豊砲臺)의 포신두개는 미군 감독 하에 1945년 10월에 철거하여 야하타(八幡) 제철소로 옮겨 전후 경제 부흥의 재료로 활용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키섬 뒤편 사이까이(相崎)섬 북단 쿠로사키 (墨崎)포대 는 미군이 알지 못해 훼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속(內)포신(고탄소강)의 조각을 수습하여 철판의 절삭 가공용 (포탄)바이트(Cutting tool)로 70년대까지 시용하였다.

현재 히로시마현(廣島縣)구레시(吳市) 해상 자위대 연병장에는 용호동 장자등에 설치한 동급40cm급 나가사키(長崎)의 사이까이(相崎)섬북단 쿠로사키(墨崎)포대에 설치하였든 포를 전시하고 있다 .부산 용호동 장자등 포진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지하에 추진 화약과 포탄 보관 및 운반을 위하여 대차 레일을 설치하고, 포탄(길이150cm)을 포에 장진할 수 있도록 수압 수직 승강기도 설치하고, 40cm급 대포(408mm)를 운영할 수압 디젤엔진(Diesel engine) 75마력 급 피스톤 2열 압축펌프2대를 중앙갱도와 우측 갱도에 각각 설치하고, 발전기용 8마력(5kw)과 32마력(20kw)(가솔린 엔진오일 혼합유)은 모두 우측 갱도에 설치하였다. 또한 우측 입구에 우수 차집 물탱크와, 우측 상승 승강기 옆과 좌측 입구에 창고를 갖추었다

화장실은 우측갱도 입구에 있었다. 현재 지하갱도의 3열이 개방되어 있으나 이 또한 철근 회수를 위한 콘크리트 벽을 파쇄 한 것이다 .

조선기술자는 윤장술 씨와 김쾌암(快岩 까이강)씨, 두 분이 관리와 정비를 담당하였으며 우수한 기술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지하시설물을 장입하고 돌이 없는 흙을 덮어 평토하고 포의 발사 때 진동 충격의 전달을 최소화 하기위해 승강기와 포설치 대를 연결하지 않고 별도 공사를 하였다 .

포설치대는 약10m의 원통, 높이5m의 대형 콘크리트 방호벽 아래 20cm의 철판을 깔고 그 아래 고무판을 삽입 하였다. 포의 회전이 가능하도록 바? 메탈 기어 처리 하였다.

포의 상하 회전 및 충격방지 쇼바(쇼크업소바 Shock absorber) 실린더도 수압 실린더(Cylinder)로 작동하였다.

포를 안착하고 5m높이로 콘크리트 상단 방호를 하고150mm두께의 철판으로 원형 덮개를 하여 개폐 하도록 하였다. 항공식별이 불가 하도록 관목과 소 교목을 심고 그 중앙에 우수 차집 관을 설치하였다

1942년까지 (1차 시험은1932년 이전) 매년1~2회 추진 화약으로 시험발사를 하였다.

그 때마다 지표의 흙먼지가 솟아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시험 발사 후 글리세린(Glycerin)으로 포신을 청소하고 주위 먼지의 청소는 폭발성이 적은 가루 화약을 뿌려 순간에 소거 하였다

포진지의 총 높이는 지상에서 약 15m 이었다.(10여m 철근회수작업으로 발파함)

관측소는 1관측소, 2관측소 두 곳이 있었으며 2관측소 아래 2개동의 건물과 통신용 비둘기 집이 있었다.

2관측소 바로 아래 건물은 7cm(나나까)고사포 관련 창고 이었으며, 그 아래 건물은 큰 포 사무실이었다. 잘록개는 지하수를 찾지 못하여 지붕에서 내리는 빗물을 받아 차집 하여 물탱크에 비축하였다.

장거리 통신은 전서구 (傳書鳩 Homing pigeon 훈련시킨 비둘기) 로 진해 사령부와 쓰시마 토요 포대 간 군용통신 연락망을 운영하였다.

용호동 동급 포대 쓰시마 토요포대도 미군이 일부 폭파하였으나 1984년12월에 복원하여 관광 상품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용호동 장자등 포대도 복원하고 이기대 의기의 충절 또한 볼거리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며 문화적 가치도 우수하다

*전함 카가’와‘아카기는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고 ,도사 는 폐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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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1922년생 왕 석호(王 碩鎬)개성왕씨33대손으로8대째용호동에서 거주

1935년대일 화물선 선장인 부친(王基世1888년생)의 소개로 용호광산 급사로 사회에 첫걸음을 시작하시었다.

성실함을 인정받아1936년 나나까(7處 7cm고사포기지)에 서 군수시설 보조공으로 근무하셨다.

나나까 공사 완공되고 최고위소령급 장교가 큰포진지에 소개하여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인 두 기술자와 근무하면서 본(見)대로 사실을 수차례 설명하여 주셨기에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그시대의 지명과 포진지의 역할을 수록할수 있었다.

40Cm급 포의 상세한자료는 동급 쓰시마 토요포대 에 전시기록한 사양을 인용하였슴

 

 

 

 

 

 

 

 

 

 

  포진지 갱도 금속고철 분리파쇄작업으로 원형보존 어려워

 

 

파괴되기전의모습 

 

 

 

 

 

대포 방호벽(쓰시마 토요포대(豊砲臺)같은 규격의 포대

   용호동 장자등(용각지) 잘록개위 구남에설치한동일 함포(일본자위대연병장에설치)3층건물보다 높다

                   용호동 구남에 설치한 같은급의 구로사끼(墨騎)포의내부설치도 (구로사끼 포대 발자취)墨崎砲臺跡

   추가설치한 케논포

( 해안  케논포 장자등에설치한것과 동일종)

 

 

 

*포진지방수:(이미지1월#8폴더2640.2641jpg)

.*해수표:(6월#12폴더1590-1jpg

*육상자위대 사진 11월#5폴더에 이미지수록/남태평양 카리바시에설치한 해안포 월외폴더.임시.#카리바시jpg

 

9)탄약고 (문화역사)

 

 

  

해안포는 진지 내에 세 종류 모두 있었는데 탄약고는 2개가 있었다. 고철을 수집하기위한 탄약고 발파 작업은 사하구 엄궁동의 발파공이 많이 와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탄약고는 말굽 모양의 쌍굴 로서 폭 4m, 높이 7m 정도의 길이 있으며 바닥은 콘크리트를 치고 그 위에 철도 레일을 깔았고 대차가 통행하였다고 한다. 굴 안쪽 화약고는 바닥크기 100m×20m 정도였는데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한 후 1m를 띄우고 35㎝ 두께의 콘크리트 옹벽을 쳐서 탄약고에 통풍이 잘 되도록 만들었다. 이중 콘크리트에는 석면 마분지에 아스콘을 묻힌 것을 10겹으로 붙이고 구조물 연결 부위는 아스콘 처리한 석면 마분지 3겹을 삽입하여 네 외부충격에 대비 하였다.

1차 만든 탄약고의 규모는 길이 100m, 폭 50m, 높이 10m정도였으나 습기 방지를 위하여 통풍구 공간을 두고 2차 공사를 하였기 때문에 완성된 탄약고는 길이 90m, 폭 20m, 높이 7m로 작아졌다고 한다. (공사에 참여한생존자가 없으며 공사완료후 보수작업에 참가한 분들의 증언)

그러나 입지조건과 탄약고의 외형으로 봐서는 폭60여m 길이 120m정도로 산을 깎아 평지 상태에서 폭20m길이 90m높이7m의 탄약고를 만들고 그 위에 폭50m길이100m높이10m의 콘크리트구조물을 덮어 쉬우고 흙을 덮고 식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방부 관할이라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 하다.

탄약고로 사용하는 굴이기 때문에 항상 습도계를 비치해 두고 있었으며 1년에 1회 48시간동안 통풍하여 건조를 했다고 한다. 먼저 한쪽 통풍구에는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어 다른 쪽 통풍구로 바람이 빠져나가게 하였고 탄약고의 문은 전함의 문처럼 만들어서 핸들을 돌려 문을 잠그고 나면 외부의 공기가 전혀 들어갈 수 없도록 완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탄약고 안에 습기가 절대로 차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 탄약고 한개는 문서 보존서 내에 있으나 지금은 해군에서 관리하고 나머지는 1개는 sk뷰아파트 후문쪽 이었으나 아파트기초공사시 굴착하여 없어 졌다.

 

 

 

 

 

 

 

 

 

 

  용호 장자등 구남 포진지 공급수 취수장 탱크

 

 포대와 탄약고의 방수장치 석면포10겹에아스콘처리

                     연결석면포3겹에 아스콘처리

 

 

 

 

 

 

 

 

 

 

제2장 지명의 유래

 

1. 이기대(二妓臺) 의기대(義妓臺) (문화전설)

 

   두 의기가 동래 점령지 관할 장수 기시와고이소를 치마폭으로 감싸 투신한곳

둥근 (?)공용발자욱에 물을부어 반도의 높은 문화를 즐긴 곳 이곳이 이기대다

 

   안압지 처럼 술잔을뛰워 흥을돋운곳 아래 원형과 두곳추정

개모자반이 뒤엉킨 저바다 낚시꾼이 서 있는 저 곳에서 외장을 감싸 않고 같이 바다에 뛰어들어가 모자반에 뒤엉켜 주검을 맞이한 의기의 한이서린곳

 

                               두 의기의 무덤을 발견 당시의 모습 묘지라기보다 잡목이우거진 등으로

                              남구청이 매년 벌초를 하고 있다

 

이기대는 동산(瞳山)동쪽 목 너머 남쪽해안 넓은 반석이다 .

동산말에서 오륙도에 이르기까지 조간대에는 보호종인 게바다말(거머리말과)이 생육 및 발육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확인됐고 다양한 해조류가 서식하고 있으나 연안의 하수방류수의 영향을 받아 부유토가 침전되어 산호말의 갯녹음이 가속되고 있다.

그 당시 공부(公簿)마저 변변한 기록이 없는 이기대(二妓臺)는 다양한 의견이 있었으나 구전(舊傳)에 의하면 임진왜란 첫날1592년 4월13일 밤 동산에서 왜놈을 정탐하다 개의 울음소리에 왜병들이 산위에 까지올라 오자 기생은 숨을 곳을 찾아 헤매었다. 발 빠른 병사들이었다. 비탈길 옆 작은 석굴을 발견하고 숨어들었다. 석굴 앞에서 개는 왜병들의 움직임 에 계속 짖었다.

왜병들은 동굴을 향하여 여러 번 무어라 고래고래 고함을 내뱉었다.

누렁이는 왜병이 가까이 올라오자 달려들며 달빛에 하얀 이빨이 빛나는 순간 총소리가 메아리쳐 들려 왔다.

누렁이의 살벌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왜병들은 낄낄 거리며 동산말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남이와 경이 자매는 꼭 껴안은 채 적막이 잠긴 석굴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주위를 살폈다.

석굴을 각시 당이라 하며 4월13일에 제를 올리고 어민들이 배를 진수 하면 오방색과 흰 소복을 만들어 각시 당에 바쳐 바다에서의 무사를 비는 곳이기도 하다

왜군은 단숨에 부산진성을 점령하고 왜관의 도움으로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수영 성까지 도달하였다. 수영 성을 함락시키고 군을 재정비하였다.

전투부대는 북진을 계속하며 큰 항쟁을 받지 않았다.

수영성에서 점령지를 관할하는 기시(岸)대장과 고이소(小磯)부 대장은 성격이 포악하고 주색을 즐기는 전형적인 왜놈이었다. 침략군에 빌붙은 몇몇 관리들은 아부하기 시작하였다 .

일패 기생을 소개하고 이름난 요정을 찾아가며 비위를 맞추기 시작하였다.

점령지가 평정되고 주민들도 생업에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한 고이소(小磯) 는 왜관 통역관과 조선 관료 몇몇을 불러 들여 경치 좋은 곳을 물었다 .

통역관은 금정산을 추천하였다

의심이 많은 기시(岸)는 산보다 툭 트인 바닷가를 선호하였다

결국 일본을 바라볼 수 있는 장자산 해안가를 추천 하였다

기시(岸)와 고이소(小磯)는 부관과 오장등 오륙명을 대동하고 조선기생 5명과 악기를 다루는 일본 기생 3명을 데리고 전함을 타고 장자산해안 장바위에 정박하였다.

장바위에서 백 여 보 떨어진 넓은 반석에 자리를 마련하여 여흥을 즐기든 왜병들은 취기가 오를수록 짐승에 가까운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조선기생들은 처음 당해보는 왜병의 욕구에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기생들이 반항 할수록 술에 취한 왜병들은 미쳐 날뛰며 추행을 즐겼다

경치 좋은 이곳에서 성전의 축하 잔치가 무르익을수록 미쳐 날뛰는 왜병들은 기생을 껴않고 돌 틈으로 하나둘 숨어들었다

기시(岸)대장과 고이소(小磯).는 신라의 안압지처럼 공룡(恐龍)의 발자국에 바닷물을 넘치도록 퍼붓고 술잔을 띄우며 즐기는 독특한 술버릇이 있었다. 술이 거나하여 기생의 부축으로 간신이 걸을 정도 이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로 윗옷은 풀어 흐느적거렸다

 바다에는 가마우지가 먹이잡이에 물속을 드나들었다

기시(岸)와 고이소(小磯)는 기생의 부축을 받으며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이 순간 두기 생은 치마를 풀어 외장을 감사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기생은 오장 요나이 (米內)에게 추행당하며 이 순간을 지켜본 것이다

파도소리만 들렸다

두기생과 기시(岸) 대장 그리고 고이소(小磯)부대장이 개모자반 위에 떠있는 것을 본 것은 30여분이 지나서 요나이 (米內) 오장이발견하였다.

요나이(米內) 오장의 고함소리에 부관과 참모가 옷을 걸치며 달려오고 전함의 병사들이 모여들어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조선기생의 시신은 남겨두고 본대로 돌아갔다

이들은 치열한 전투중 기생과 축하잔치를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이 밝혀지면 문책 당 할 것이 두려워 입을 맞추어 실족하여 죽은 것으로 보고하기로 하여 남은기생들도 무사하였다

4월25일 남이와 경아 두 기생이 기시(岸)와 고이소(小磯) 부대장과 바다에 뛰어 드는 것을

지켜본 기생은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반석에 있는 두기생의 뒤처리를 부탁하고 돌아갔다

두 기생은 철따라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홍수와 가뭄을 대비하여 관계시설을 만들어 해마다 풍년 들게 하고 농번기가 끝나면, 물때를 정확히 맞추어 바다에 나가 그물을 치게 하니 언제나 만선으로 돌아 왔다,

해풍에 약발이 오른 초목으로 병든 마을 사람들을 치유토록 하였다.

밤이면 마을 사람을 모아 글을 가르치니 기생은 마을의 촌장이며 의사이고 신(神)이었다.

주민들은 1592년4월27일 두기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동해바다가 가려지는 작은 등뒤에 상좌에 남이기생을 그 아래 동생 경아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후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 이 끝난 2년 후 목 너머 반석에서 기생들이 신축년(辛丑)1601년 4월 25일 바다 에서 전사한 영혼과 두 기생을 추모하는 무혼 굿을 한 장소를 이기대 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선돌에 이기대 (二妓臺)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공부(公簿)등의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1850년 경상좌수사 이형하(李亨夏)가 내영지(來營誌) 산천조(山川條)에 이기대를 설명하기를(左營南十五里 上有 二妓塚云)라 장소와 두기 생의 묘지가 있다는 것 이외 상세한 자료는 없었다.

 좌영15리를 구글 어스로 거리측정결과 약5.8km 지점에 우거진 잡목과 잡풀 속에 어렴풋이 분간되는 큰 묘(塚)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이기대는 천혜의 자연 보존지역으로 반딧불이 와 애반디가 서식하고 있다.

해마다 반딧불이 축제를 벌여 그 존재 가치를 알릴 정도로 수가 급격히 줄고 있어 보호와 보존 전략이 시급히 요구되는 생물이다. 반딧불 이를 복원하기 위해 민간단체와 꾸준히 노력을 기울여야 할 가치 있는 사업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나 아직은 효과가 미미한 편이며, 희소성으로 2011년7월27일 이전으로 생태 복원이 절실한 실정이다.

해파랑길 장자산 도시자연공원 구간 갈맷길 을 재정비 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많은 관광객이 찾지 않을 수 도 있다. 산책로의 폭과 바닥의 정비가 시급하며 지명의 표지와 해설사의 상시 활동이 요구 되고 있다

 

*1)기시(岸) 란 성은 임지왜란 이기대 반석 언덕에서 기생을 추행한 것을 숨기고 공을 세웠다고 기시(岸) 라하였으며 일본 56대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와 같은성씨이다

2)고이소 (小磯)란 성도 임진왜란 이기대 반석 물가에서 기생을 추행하다 죽은 것을 전공으로 기록하여 그 후 고이소 (小磯)라 하였으며같은성씨로 대표적인 인물은 41대 총리 고이소 구니아키(小磯 國昭)가 있다

3)요나이(米內)란 이름도 임진왜란 이기대에서 아름다운 기생들 틈에서 추행을 하고 문책이 두려워 간부들과 입을 맞춘 전형적인 간사한 왜놈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인품에 어울리는 요나이(米內)로 일본37대 총리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와 같은 성씨다

이기대 4-8 2713-1 발견당시묘지 4-8 70076 /77 벌초한 묘지 9-8 761-762

*이개대 와 의기대에 관한 상세의견 별첨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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