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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어 읽는 시>
詩, 에고ego를 다스리는 도구
유 진 (시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떠날 수 있다면 이미 인간의 길이 아니고 이미 삶이 아니다. 절로 쉬어지는 호흡처럼 걸어야만 하는 길이며, 고뇌의 끝을 알지 못한다 해도 걸어야만 하는 인생길이다.
태어났으므로 사는 일 외에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왜 사느냐, 왜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에서부터 사유가 시작된다. 그리고 詩는 사유에서 출발한다. 또한 에고와 詩는 불가분의 상관관계를 가진다.
우주만물과 인간은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서로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나아간다.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의 사고, 감정, 의지 등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에고(ego,self)는 지속성과 동일성을 지닌다. 또한 인간본성을 떠나는 순간 현실의 희.노.애.락에 늘 흔들리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개인적이고 우주적인 인과법칙 안에서 온갖 고통과 고난, 배움과 사유로 성장하고 성숙하면서 진화되어간다. 양심과 이성, 생각과 오감,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에고를 어떻게 다스리고 잘 운용하느냐에 따라 영성지능이 배양되는 것이다.
인간생의 본질에 집중하는 길은 우주의 중심에서 파생되는 시간과 공간과 만물이 한 순간도 쉼 없이 무한한 성장과 성숙을 거듭하며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몸, 생각, 오감으로 이루어진 저차원적인 에고가 물질, 에너지, 의식성, 원리의 고차원적인 에고로 성숙하면서부터 영성이 발현되고, 그로부터 영성지능은 보편적 차원에서 우주적 차원으로 레벨을 높여가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성숙한 사람은 영성의 진정한 시크릿(secret)에 대해 눈뜨고, 영성과 에고의 올바른 경영으로 영성을 발달시켜 개인적인 삶에서부터 우주적인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길, 시의 길은 숙명적 한계 내에서 인간의 실존을 찾아가는 일이며,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자립체로서의 존재성을 찾는 것이다. 시를 통해 본성과 감정의 에고를 다스리며, 상황에 맞게 조화롭게 영성의 레벨을 높여가는 것이 시인의 길일 것이다.
토끼는 굴을 만드느라
흙을 파내는 일을 쉬지 않았다
어제는 오른 쪽에
오전에는 왼쪽에 파낸 흙이 쌓였다
토끼는 좌우지간에 집을 지었다
지었다가 금세 허물었다
도시인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짐을 옮겼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물건의 위치가 달라졌다
그들도
집을 만드는 이유를 모르는 토끼도
땀을 흘렸다, 자기 앞의
시시포스 신화를 이어갔다
ㅡ 홍예영「토끼, 굴을 파다 」전문
《우리시》2015년 11월호
시인은 토끼와 도시인의 삶을 동일선상에 놓았다. 부수고 짓고 옮겨 다니며 집을 짓는 일은 계속된다. 이유도 모르는 채 땀을 흘리며 집을 옮겨 다닌다. 토끼는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동안만 토끼이듯, 도시인 역시 자기자리에 열심을 내어 일을 하는 동안만 도시집단에 낄 수 있다. 인간의 한계와 삶의 허망함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인간의 의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시시포스 신화를 이어간다는 것이다. 모두 안으로만 흐르는 일생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시지프스는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삶을 향한 정열의 영웅이다. 인간으로서 범하지 않아야 할 부조리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평생토록 큰 돌을 가파른 산 정상까지 올리고 다시 밑으로 굴리고 다시 내려가서 처음부터 돌을 굴려 올리는 일을 무한 반복해야 한다는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인간은 물론이며 모든 존재들은 우주자연의 섭리 속에 제각각의 생태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영롱한 문자의 눈빛에
가슴 떨며
사유思惟의 신을 신고 그 속을 걸어볼 때도
내게 들려주는 말들이
잠시 나를 위무 하다가
바로 까만 동굴 속에 유폐된다
그때마다 불을 켜고 다시 동굴을 들여다보지만
세상을 담을 내 그릇의 문제일까
내게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넘치지 않으면
아예 그릇에 들지도 않는다
다만 천 년 고목이 가슴을 열어
생은 항상 새록새록 새로움으로 다가온다며
주름진 손 내밀어
나뭇잎을 흔들어 준다
ㅡ 조경진「장자를 읽다가 . 3」부분
《우리시》2015년 10월호에서
모든 생명체들의 생존본능은 동일하다. 생태적, 운명적 삶에서의 개인적인 운명은 있지만 더 우월하거나 더 열등한 운명은 없다.
오직 인간만이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가를 고민하고,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그 자리를 찾고자 사유(思惟)한다. 고등지능을 가진 인간만이 신성과 영적성장을 거듭하며 자율적, 자립적인 존재로 지혜롭게 살아가는 존재이기를 목표한다.
시인의 말처럼 어쩌다 영롱한 문자의 눈빛에 가슴 떨며, 사유思惟의 신을 신고 그 속을 걸어볼 때, 내게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넘치지 않으면 아예 그릇에 들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반성도 하고, 영적성장을 갈망하는 가운데 우주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깨달으며 자유로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장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소요유(逍遙遊)다. 마음이 경지에서 유유자적의 노니는 소요유(逍遙遊), 만물 안에 있으면서 만물의 안과 밖을 마음으로 다 품을 수 있는 경지, 몸은 비록 만물 안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만물 밖에서 만물을 품고 만물과 함께 노닐 수 있다는 소요유의 사상적 배경은 당연히 자유와 해방과 평화 그리고 만물평등이요 생명존중이다.
또한 맹자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든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으며, 측은지심은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착한 마음을 말하고, 인(仁)의 발단이며, 수오지심은 의리에 어긋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고, 의(義)의 발단이며, 사양지심은 예의로서 남에게 양보할 줄 하는 마음이고, 예(禮)의 발단이며, 시비지심은 지식으로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이고, 지(智)의 발단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 인간의 도리와 근본을 알지 못하면 에고는 보편적 수준을 넘어설 수가 없다.
임보 시인의「우주통신」을 읽노라면 영적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소요유의 한 대목을 볼 수 있겠다.
안드로메다 성좌의 한 별에 사는 전 전생의 친구였던 목동이
내게 띄워 보낸 전문을
이제야 접수했다
‘그대가 사는 세상이 궁금함
무얼 먹고 사시는가?‘
빛의 속도로 달려온 이 메시지는
지구의 시간으로
253만 년 전에 발송된 것
‘빛과 물과 흙으로 빚어진
생물들을 먹고 삶.
그런데, 우리가 소식을 주고받기는
지상의 생애가 너무 짧도다!‘
내가 날린 이 전통의 답신이
그 별에 당도하려면
다시 253만 년이 소요 될 것이다.
ㅡ 임보「우주통신」전문
《우리시》2015년 11월호
영성의 단계는 물리적인 정복의 힘이 아니라 인식과 상상력, 에고의 운용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물리적 차원에서 볼 때 빛이 극한 속도이라면 영적느낌은 무한 속도이며, 영통은 존재를 느끼는 순간에 일치하는 동시성을 가진다.
안드로메다은하는 광해가 없는 어두운 곳의 밤이라면 맨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우리 은하계와 가장 가깝다고 하는데, 1시간에 50만 킬로미터씩 가까워지고 있고, 약 37억 5천만 년 뒤에는 우리 은하와 충돌하면서 합쳐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영통은 안드로메다은하까지 약 250만 광년(약 780 kpc)을 가고 올 필요도 없이 시공을 초월한 느낌의 무한 속도, 마음의 파장을 일으키는 동시에 닿을 수 있는 소통이 가능하다.
여러 차원들을 통한 진화과정의 일부인 텔레파시 교신이 자유로우므로 어쩌면 삶에 있어서 가장 축복되고 환희로운 영적소통의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영혼은 이미 또 다른 생(生)의 경험을 선택하는데 있어 자유라는 스스로의 영적 발전과 승화(昇華)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마음이 유유자적의 경지에서 노닐 수 있고, 그리하여 마침내 보이지 않는 내 뿌리와 만물 밖에서 노니는 소요유의 삶을 위해서는 옳고 그름의 시비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나아가 크고 작음, 많고 적음, 길고 짧음, 높고 낮음, 귀천 미추 부와 명예와 권력, 쓸모와 쓸모없음, 생로병사, 희로애락, 너는 너 나는 나라는 모든 상대적 비교와 분별과 잘잘못의 따짐과 구별과 차별과 식별의 구분을 뛰어 넘어야 하며, 만물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 각자 자기가 타고난 본성대로 가장 자기답게 살되 상생과 공생으로 더불어 성숙해야 한다.
안으로는 늘 깨어있는 본성으로, 밖으로는 늘 지혜와 사랑이 충만한 삶을 지향하며, 나아가 이웃에게 인류에게 유익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참된 성숙일 것이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 길뿐이다. 자기가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린 바위가 다시 원점으로 굴러 내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그 행위를 반복 할 것이냐, 아니면 본성을 깨달아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슬픔은 수령하되 눈물은 남용 말 것
주머니가 가벼우면 미소를 얹어 줄 것
지갑을 쫓지도 지갑에 쫓기지도 말고
안전거리를 확보할 것
침묵의 틈에 매운 대화를 첨가할 것
어제와 비교되며 부서진 나
이웃 동료와 더 견주는 건 금물
인맥은 사람에 국한시키지 말 것
숲 속의 풀꽃 전깃줄의 날개들
지구 밖 유성까지 인연을 넓혀 갈 것
해찰을 하는데 1할은 할애할 것
고난은 추억의 사원
시간을 가공 중이라고 자위할 것
돌아오는 길에
낯익은 별들에게 윙크하기 잊지 말 것
ㅡ 조재형「하루의 사용법」전문
《소나기가 두들긴 달빛》2015년 지평선시동인집에서
문명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든 카르마의 노예가 되어 갖가지 바위를 올리고 또 올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카르마의 중량과 빈도의 수는 다를지언정 각자의 운명의 굴레에서 버겁고 무거운 자기 몫의 바위를 떠안고 살아간다.
시인은「하루의 사용법」을 통해 부조리 자체를 또렷하게 인식하고, 깨어있는 의식으로서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의 실존주의를 실천하자고 한다. 각자는 존재자체로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하루하루의 일상을 구체화 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에고ego를 다스리고 잘 운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삶의 주도권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으며, 인간은 살아있다는 자체로 아름답게 존재하는 것이다. 에고의 부조리를 통해 인간존재를 재확인하고, 그 확인을 통해 더욱 자신의 삶을 가치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의 등불이 되는 자명등(自燈明), 그 영감(靈感)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자신과의 대화에서 오는 것이다.
현대는 에고의 수많은 오작동으로 인해 혼란과 혼탁의 연속인 물질팽대의 시대를 살고 있다. 건강한 성숙을 위해 자신의 에고의 작용을 항상 모니터링 해야 한다.
영감(靈感)의 사전적 정의는 신의 영묘한 감응. 신의 계시를 받은 것 같은 인스피레이션.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될 번득이는 착상이나 자극을 계시 받은 듯한 느낌을 말한다.
수시로 몸과 마음을 리셋(reset)하는 가운데 문학적 영감을 얻어야 독자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치로운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바람직하고 올바른 인생관을 가진 가치로운 인격에서 가치 있는 작품이 나온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 의미에서 詩는 성숙한 영성과 육체적 오감을 통해 저차원적인 에고를 다스리고, 고차원적인 에고를 잘 운용할 수 있는 합당한 도구라는 생각을 해본다.
ㅡ 월간「우리詩」 2016년 2월호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읍니다 향상 건강하소서.
잘 지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