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편지
헤세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에 편지를 곁들이는 것을 좋아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 작품을 소장한 사람은 내가 죽고 나서 큰돈을 벌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작가의 손글씨로 직접 쓴 다정한 편지를 받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실제로 헤세의 세 번째 부인 니논과 헤세의 인연도 독자의 팬레터와 저자의 다정한 답장으로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이었던 니논은 헤세가 새로운 작품을 출간할 때마다 그 작품을 향한 애정을 듬뿍 담아 지적인 흥취가 물씬 풍기는 팬레터를 띄웠고, 외로운 헤세를 감동시켰다. 독자편지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10년 넘게 이어졌고, 헤세보다 무려 18년이나 어렸던 니논은 마침내 꿈같은 결혼에 이르게 된다.
* 동양의 고전 [중용]에서 말하는 진실함[誠]을 떠올리게 한다. 비록 두 번의 이혼을 겪었으나, 진실함은 살아 있었고, 편지는 그 표현이었으며, 새로운 인연은 이어졌다.
14. 고요하고 정갈한 공간
칼프의 헤세박물관은 고요하고 정갈한 공간이다. 성수기에도 사람이 많지 않다. 수많은 관광객에 등 떠밀리는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칼프에서 며칠 묵어도 좋을 것 같다. 그 흔한 프랜차이즈 호텔 하나 없지만, 칼프의 숙소들은 깨끗하고 아늑하다. 헤세박물관에서는 카메라 셔터소리조차 엄청나게 크게 들린다. 주변이 너무도 조용하기 때문이다. 셔터소리에 놀라 차마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없었다. 대신 마음속 그득 '헤세의 고향'이 지닌 온기를 담았다.
* 고요하고 정갈한 공간이 인연된다면 더 바랄 것이 있으랴. "친숙한 길들이 만나는 곳에서는 온 세상이 잠시 고향처럼 보인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중 ; 정여울책 59쪽)
15. 단촐하고 소박하게
헤세는 화려한 삶을 싫어했다.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했지만, 일상은 놀라울 정도로 단촐하고 소박했다. 헤세의 수필을 보면 양복을 기워 입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그런 헤세의 소박함을 반영하는 듯 그의 소장품 하나하나는 꾸밈이 없다. 헤세의 시계 또한 고급스럽다기보다는 '작가다운' 기품이 느껴졌다. 그는 도둑맞을까 봐 걱정할 만한 어떤 사치품도 원하지 않았다.
* [도덕경] 제67장에 나오는 노자의 삼보에 검박함[儉]이 들어 있고, [중용] 제33장에 담이불염(淡而不厭)이란 구절이 있다. 또한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권에서 백제문화의 기풍을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했다. 생활은 검박하게, 생각은 고상하게 하는 것이 개인이나 공동체가 정신을 성성하게 견지하는 좋은 방도가 아닐까 한다.
16. 헤세의 목소리
헤세 박물관 2층으로 천천히 올라가면 헤세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오디오룸이 있다. 그가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낭독했던 목소리가 CD에 생생히 담겨 있고, 관람객들은 언제든지 자신이 듣고 싶은 작품을 골라 헤드폰으로 헤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귀여운 손녀와 앙증맞은 고양이, 꽃과 나무와 함께 행복한 미소를 짓는 헤세의 멋진 사진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 작고 알찬 박물관이나 문학관은 그 얼마나 근사한가! 헤세 박물관이 그렇다. "기쁨이 멋진 것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생겨나고, 결코 돈으로는 살 수 없다는 점이다." (헤르만 헤세의 <보리수 꽃> 중 ; 정여울책 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