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에스더 7장 1절 ~ 10절>
서론: 어둠속에서 드러나는 '보이지 않는 진실'
17세기 빛과 어둠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는 본문의 결정적 순간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림 속 아하수에로 왕과 왕후 에스더, 그리고 총리 하만은 한 식탁에 앉아 있지만, 그들 사이를 감도는 침묵은 터질 듯 팽팽합니다. 에스더의 고발이 막 끝난 순간, 렘브란트는 에스더의 얼굴과 아하수에로의 왕관에 가장 밝은 빛을 비추는 반면, 하만의 전신은 어두운 그림자 속에 고립시켜 표현했습니다.
에스더서 전체에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이를 '하나님의 숨어 계심(Deus Absconditus)'이라고 부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우리 삶의 배경이 어두컴컴하고 하나님의 존재가 희미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짙은 어둠 속에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진정한 빛은 쉬지 않고 일하고 계셨습니다. 본문은 그 보이지 않던 손이 마침내 역사의 수면 위로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울림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생명을 향한 간구와 십자가의 자기비움
에스더는 목숨을 건 잔치 자리에서 아하수에로 왕에게 소청합니다.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에7:3) 여기서 '생명(네페쉬, נֶפֶשׁ)'은 단순한 육체적 호흡을 넘어,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이자 온전한 '혼(Soul)'과 '자아'를 뜻합니다. 에스더가 자신의 네페쉬를 구한 것은 왕의 은총 아래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는 철저한 의존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네페쉬의 간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한 중보로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네페쉬/프시케)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생명을 민족을 구하기 위해 간구했으나,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네페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네페쉬'를 완전히 쏟아 부으셨습니다(사 53:12)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인간이 대중 속에 숨지 않고, 오직 죽음과 직면하여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The Individual)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다고 말했습니다. 에스더는 왕후라는 화려한 익명의 그늘에서 벗어나,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하나님과 제국 앞에 자신의 '네페쉬(자아)'를 날것 그대로 노출시켰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우리에게 가짜 자아, 화려한 가면을 쓰고 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나의 연약한 '네페쉬'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주권이 오직 그리스도께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2. 고난의 한복판에서 드러나는 악의 정체
에스더는 민족을 멸절하려 한 대적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에7:6) 여기서 '대적(차르, צַר)'은 '괴롭히는 자', '원수'를 뜻하는 동시에 동사형으로는 '좁게 만들다', '가두다', '압박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악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방으로 욱여싸고 숨 쉴 공간조차 주지 않는 물리적·정신적 압박으로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겪는 환난과 압박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차르의 상태)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바울이 고백한 이 '욱여쌈(들리보, θλίβω)'이 바로 히브리어 '차르'의 헬라어적 번역입니다. 세상의 대적은 우리를 사방으로 에워싸 압박하지만,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에게 있기에 성도는 갇히지 않습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은 거대하고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유의 불능(Thoughtlessness)과 평범함 속에서 일어난다고 통찰했습니다. 하만 역시 왕의 권력을 등에 업고 유다 민족의 숨통을 조여오는 시스템의 악(차르)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수행하던 자였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교회를 물질적, 문화적, 영적으로 압박하여 좁은 틀에 가두려 합니다. 그러나 악의 압박이 강해질수록 우리를 덮고 있는 그리스도의 공간은 결코 좁아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공중 권세 잡은 '차르'의 세력 앞에서 타협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영적 자유함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하만의 나무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만은 모르드개를 달기 위해 오십 규빗 높이의 나무를 세웠으나, 결국 그 나무에 자기 자신이 매달리게 됩니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에7:10) 여기서 '나무(에츠, עֵץ)'는 살아있는 '나무'뿐만 아니라 사형 틀로 쓰이는 '목재'를 의미합니다. 하만이 세운 오십 규빗의 나무는 그의 기고만장한 교만과 공의의 상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도구였습니다.
이 '에츠(나무)'는 기독교 신학의 심장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벽한 영적 역전을 이룹니다. 구약 성경은 "나무(에츠)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고 선언합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골고다의 나무(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자신이 승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의 나무를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나무이자, 사탄의 권세를 영원히 멸하시는 공의의 도구로 뒤바꾸셨습니다.
독일 철학자 헤겔(G. W. F. Hegel)의 역사철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이성의 간계(List der Vernunf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주관적인 욕망과 악한 목적을 가지고 역사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결국에는 그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거대한 역사의 합리적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한다는 이론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 스스로 올가미(나무)를 짰으나, 그 나무는 결국 하만 자신을 처단하는 심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악은 스스로 파놓은 무덤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불의와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의인을 매달 나무를 준비하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악인이 의인을 해치려 만든 바로 그 '나무' 위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완성됩니다. 우리는 눈앞의 고난에 흔들리지 말고, 대반전의 십자가(에츠)를 바라보며 최후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결론: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화폭 속에 표현된 에스더의 잔치는 마침내 악의 폭로와 공의의 심판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하만이 준비한 비극의 잔치 상은 유다 민족에게 영원한 기쁨의 날인 '부림절(Purim)' 축제로 역전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은 역사의 커튼 뒤에서 당신의 주권적인 손길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고백인 '생명(네페쉬, נֶפֶשׁ)'를 주님께 올려드립시다.
세상의 욱여쌈과 압박인 '대적(차르, צַר)' 앞에서도 비굴하게 무릎 꿇지 맙시다.
우리를 위해 저주에서 생명으로 역전된 그리스도의 '나무(에츠, עֵץ)'를 단단히 붙잡읍시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마침내 눈에 보이는 영광스러운 역전의 기쁨으로 다가올 날을 신뢰하며, 날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